우리 어린이 만화 이야기
- 어린이를 지키는 만화, 평화를 가꾸는 만화
이주영 [개똥이네집 2013.09. 제 94호]
1980년대 이후 어린이 만화 역사를 보면 1952년에 창간하여 폐간되었다가 1978년에 복간한 어린이 잡지 <새법>, 1982년 창간한 만화 전문 잡지 <보물섬>, 1993년에 창간한 <점프>, 2005년에 창간한 <고래가 그랬어>, 2007년에 창간한 <개똥이네 놀이터>가 큰 역할을 했다. 이때 나온 어린이 잡지에서는 만화를 많이 실었고, 만화 전문 잡지도 나오면서 좋은 어린이 만화들이 나왔고, 이를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눈길을 끄는 만화를 꼽으라면 <아기 공룡 둘리>, <머털 도사>, <두근두근 탐험대>라고 할 수 있다.
김수정의 작품 <아기 공룡 둘리>는 <보물섬>에 1983년부터 10년 동안 연재한 만화로 우리 어린이 만화 역사에 그 가치가 길이 남을 작품이다. 20세기 전반기에 태어난 대표 어린이 주인공은 '피터팬'을 꼽을 수 있고,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대표 어린이 주인공은 '말괄량이 삐삐'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거기에 '아기 공룡 둘리'를 보태고 싶다. 피터팬이 남성 중심주의와 전쟁을 지향하는 주인공이라면, 삐삐와 둘리는 양성주의와 어린이 해방을 지향하는 주인공들이다. 둘리는 먼 빙하기에서 지구에 온 외로운 남자아이다. 부천시에서 1993년에 만들어 준 둘리 주민등록증 번호가 '830422-1185600'이니 남자가 확실하다. 그런데 보드라운 선이나 노는 모습을 보면 여자아이 같기도 하다. 삐삐가 남자아이 같은 말괄량이 여자 아이라면, 둘리는 귀여운 여자아이 같은 장난꾸러기 남자아이다.
<아기 공룡 둘리>는 등장인물이 여러 색깔이고 재미있다. 둘리는 초록색 공룡, 도우너는 빨간 코에 노랑머리 외계인, 또치는 아프리카 타조, 젖꼭지를 물고 다니는 희동이는 고길동의 조카다. 가수를 꿈꾸는 마이콜은 흑인 소년에 가깝다. 이 주인공들이 좌충우돌하면서 일으키는 사건들이 재미있으면서도 따스하다. 어른을 대표하는 고길동은 불청객인 도우너나 또치를 내쫓으려고 하지만 그때마다 오히려 아이들한테 당한다. 그때 시민단체 만화모니터 모임에서는 김수정과 대화 시간을 마련한 자리에서 이런 아이들이 버릇없다면서 비판하기도 해서 작가가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1980년대는 군사 독재 정권이 민주 사회가 지향하는 다양성을 억압하던 시대다. 그런 권위주의 시대에 강자를 상징하는 어른이 약자를 상징하는 아이들한테 당하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파격이다. 그러나 그보다 이야기들마다 아이들이 선택한 삶이 옳았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어린이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곧 이런 관점은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살 수 있는 어린이 해방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둘리는 1987년에 케이비에스(KBS)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김수정은 둘리를 좀 더 적극 알리기 위해 1995년에 주식회사 둘리나라를 설립하고, 1996년에는 장편 영화로 <아기 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을 만들어 큰 사랑을 받았다. 1999년에는 독일을 비롯해 여러 나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에스비에스(SBS)에서 새롭게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요즘 둘리나라에서는 극장판 만화영화로 다시 만들고 있다.
이두호의 작품 <머털 도사>는 <새벗>에 1984년부터 연재했던 <도사님 도사님 우리 도사님>을 엠비시(MBC)에서 1989년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방영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1990년에는 <머털 도사와 108 요괴>, <머털 도사와 또매>를 만들었다. 2012년에는 에스비에스(SBS)에서 <다시 돌아온 머털 도사>를 26부작으로 만들어서 2013년까지 방영해서 어린이들한테 인기를 끌었다. 주인공은 이두호 만화 특성에 맞게 헐렁한 바지저고리를 입었다. 조금 미련하고 공부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한 주인공이 도술을 배우는 과정이나 어렵게 배운 도술로 약한 사람들 편에서 마을의 평화를 지키는 활동이 웃음을 준다.
김홍모의 작품 <두근두근 탐험대>는 <개똥이네 놀이터>에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연재한 만화다. 2012년에는 보리출판사에서 모두 다섯 권의 책으로 펴냈다. 어린이 마음이 두근두근하며 뛰놀 수 있게 해 주는 재미를 주는 만화다. 어른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생각하며 볼 수 있다. 어린이한테는 즐거운 상상 속에서 뛰놀게 하면서 생각하는 힘을 키워 주고, 어른한테는 현실 문제를 다시 보면서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주인공 '동동이, 소희, 수우, 철이, 깍두기' 다섯 명은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 평화로운 삶을 위협하는 어두운 힘에 맞선다.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다섯 어린이가 물리쳐야 하는 어둠의 힘은 환상세계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현실 세계라는 걸 보여 준다. 이것은 어린이들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현실에 맞서기를 바라는 작가정신이 살아 있는 작품이다.
얼굴 모양과 살색이 다르다고 미워하고 따돌리는 현실을 보여 주면서 자기 색깔을 소중히 여기며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제시한다. 동무들을 짓밟으면서 오직 나 혼자 잘살겠다는 경쟁을 부추기는 현실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서로 도와 가면서 살아가는 세상, 어린이 마음을 지키면서 살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어린이 마음을 되찾아 진실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지켜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만화책이다.
조금만 살펴보면 좋은 만화가 꽤 있는데, 아직 우리 사회는 만화를 좋지 않은 문화 매체로만 생각하는 편견이 있다. 1970년대 마녀사냥식 불량만화 추방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점도 있고, 2000년대 뒤로는 지식을 거칠게 나열하는 학습만화가 너무 많이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이 만화가 지식 학습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어린이 만화가 발전하려면 투철한 작가 의식이 우선되어야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어린잏나테 즐거움을 주고, 어린이 마음을 지켜 주고, 어린이 마음에 평화의 씨앗을 심어 주는 만화여야 한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웃고 즐기며 재미있게 읽는 가운데 새로운 세상을 여는 힘과 슬기를 키워 주는 만화를 창작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
어린이문학은 어린이 모습을 그리는 문학이다. 어린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어떻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뚜렷한 어린이의 삶으로 보여주는 문학이다. 그렇지 않고는 어린이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어린이문학 작품도 어린이 세계를 그린 것이고 보면, 작품 속에는 작가가 바라는 그 시대의 어린이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오덕 , ≪삶 문학 교육≫에서
이오덕이 말한 이런 작가 의식은 어린이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들한테도 똑같이 들어맞아야 한다. 어린이문학을 어린이 만화로 바꿔서 읽어 보면 우리 어린이 만화가 나갈 길이 무엇인지 새겨볼 수 있다. 21세기에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만화, 지구촌 어린이 삶을 지키고 평화를 가꾸는 좋은 만화가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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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이네 집>, <개똥이네 놀이터> 신청하기
위 글은 <개똥이네 집> 2013년 08월_94호에 실릴 글입니다.
어린이 문학 운동사에 대한 이야기로 이주영 선생님이 쓰신 글입니다.
<개똥이네 놀이터>는 어린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겠다는 보리 출판사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아 펴내는 어린이 잡지입니다.
부모님 책 <개똥이네 집>에는 오랫동안 어린이를 살리는 일에 앞장서 온 분들이 어른들에게 들려주는 교육 이야기를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