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평:상 86호] 책,삶,목회 | 고진하의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
1. 불편당(不便堂)
지난 1월 25일(목) 원주에서 조촐한 모임이 있었다. 평소 친분을 나누던 송대선 목사님의 주선으로 몇몇 지인들이 모여 고진하 목사님의 10번째 시집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 출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모임 장소는 불편당(不便堂). 고진하 목사님과 권포근 사모님께서 자연과 교감하며 삶을 엮어가시는 거처이다.
저마다 어떻게 하면 편하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하건만 목사님 내외는 아예 당호(堂號)를 불편당(不便堂)이라 짓고 불편을 즐기며 살아가고 계신다. 목사님 내외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는 불편당(不便堂)의 모습을 이번에 출간하신 목사님의 10번째 시집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에 담아 내셨다.
그래도 주인은
이 집을 짐벙한 선물이라 여기는지
일곱 기둥에 한글 주련이 붙어 있었네
- 날마다 화전 놀이하듯
- 불편도 불행도 즐기자
- 쉴 새 없이 명랑하자
- 당신은 우주에 핀 한 송이 꽃
- 시와 꽃과 예술과 하느님을 낭비하자......
그러니까 여기 터잡고 사는 이는
오늘을 예찬하며
오달진 아름다움을 낭비하는 사람이구나
- ‘불편당’ 중에서
불편당 일곱 기둥에 걸려진 한글 주련의 내용들은 고스란히 목사님 내외의 삶을 드러내보이고 있다. 불편하지만 명랑하게 자연과 더불어 함께! 이웃과 자연을 배려하며 산다는 것 자체가 불편을 감수하는 일 아니던가! 우리의 대장 예수께서 불편의 삶의 끝판왕이셨으니, 그를 진정으로 따른다면 불편한 삶은 곧 우리가 짊어져야 할 마땅한 삶인 것이다. 당호(堂號)에는 그곳에 기거하는 이의 의식구조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마련이다. 이번 기회에 내가 살아가는 집 또는 내 방에 이름을 붙여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을 짓는 일은 의미를 짓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집이나 방에 이름을 짓는 일은 그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리라. 옛사람들은 당호(堂號)를 지을 때 아호(雅號)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그 흐름에 이어 내 집에 이름을 붙여본다. ‘동산당’.. 북산(北山) 최완택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아 그 뜻을 이어오는 이들은 저마다 아호(雅號)가 있다. 끝자(末字)는 모두 ‘산’으로 끝난다. 2022년 5월 북걷사(북산을 걷는 사람들)가 의성을 찾아온 이후 북걷사의 일원이 되었고, 이후 자연스레 아호(雅號)를 갖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산’이다. 동산은‘마을 부근에 있는 낮은 언덕이나 산’을 일컫는다. 누구라도 부담 없이 편안하게 오를 수 있는 언덕, 누군가에게는 놀이터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생의 터전이 되기도 한다. 동산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며 쉼을 얻는 공간이기도 하다. ‘함께’의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온 터라 당호(堂號)로 알맞춤하다.
2. 시집과 삶
고진하 목사님께서는 찾아온 이들에게 이번에 나온 시집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와 야생초 전문가이자 야생초 요리가이신 권포근 사모님과 함께 지으신 『야생초 밥상』을 선물해주셨다. 목사님은 책 속에 친필로 ‘쉴 새 없이 명랑하자’고 써놓으셨다. 이 문구는 불편당 외부 기둥에 걸어놓으신 한글 주련에도 쓰여있다. 우리네 삶은 얼마나 심각하고 경직되어 있는가! 허허로이 노니는 것을 무능과 게으름으로 치부해버리는 현대 사회에서 잘 사는 게 무엇인지 우리로 하여금 한 번 생각해보라고, 삶의 목적은 기쁨이라고 말씀해주시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의미를 좇는 삶은 자칫 심각하고 무거워질 수 있다. 생의 지향은 분명히 하되 너무 경직되지 않게 명랑하게 걸을 일이다. 우리의 삶은 기쁨을 향해 걷는 길이다. 우리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다. 처음 세상이 창조되던 때에도 연신 기뻐하신 하나님이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기쁨 속에 탄생하였다. 우리의 근원은 기쁨이다. 목사님의 명랑으로의 초대에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에게 명랑하자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목사님의 명랑함의 비결을 배우고 싶었다. 난 목사님이 전해주신 근황 이야기를 들으며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이야기 중 요즘 달밤에 춤을 추신다는 말씀을 들었다. 잠이 오지 않으면 새벽이라도 마당에 나가 달밤을 조명 삼아 의식의 흐름대로 춤을 추신다 하셨다. 춤을 배우신 적은 없으시단다. 그저 몸이 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시면 그것이 곧 춤이 된다 하셨다. 이 춤은 곧 시가 되어 ‘달밤의 왈츠’라는 제목으로 시집에 실려있다.
추적이는 가을비 탓만은 아니지만
온종일 몸이 찌뿌둥했어
밤 이슥해지니 찬비 그친 후
휘영청 달이 떴네
왜 떴냐고 물어봐야 소용없는 일
어깨에 얹히는
월금(月琴)의 리듬 따라
별서 정원에서 몸을 흔드네
피할 수 없는 운명
그냥 밟고 가려는 몸짓
수피(Sufi)처럼 돌고 돌고 돌아도
이 행성을 떠날 순 없겠지만
저 달이 뜨든 안 뜨든
춤을 멈추진 않을 꺼야
왜 흔드냐고 물어봐야 소용없는 일
그렇다고 춤을
생의 열쇠라고
촌스럽게 떠벌리진 않을 꺼야
- ‘달밤의 왈츠’ 전문
달밤의 춤! 날이 푹해지면 나도 시도해보련다. 달과 교감하는 한바탕 춤사위를 멈춤없이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다.
목사님의 명랑한 삶의 또 하나의 비결은 자연과의 교감이다. 목사님의 시의 재료는 대부분 자연이다. 생명에 대한 경외에서 비롯되는 자연과의 대화가 곧 시(詩)가 된다. 시집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의 제목에서부터 그분의 시가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알게 해준다. 시집의 처음을 여는 [시인의 말]은 그분의 시(詩)의 근원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난 촉감의 신[Epaphus]처럼
흙 주무르기를 좋아한다네.
꿈도 밥도 사랑도, 느린 내
시의 보폭도 궁극에는 흙으로 수렴되는 것
세상은 “대지에서 그 시적인 영혼을 떼어버린”(헨리 베스톤)
인간들로 진동한동 붐비지만
야생의 흙길을 맨발로 걸으며
흙에서 나고 자라는 식물들과 깊이 사귀는 동안
시적 감흥과 지혜의 희색(喜色)이 넘쳐 흐르는 순간도 있네.
흙이여, 시여, 고맙다
자연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며 끊임없이 교감하는 중에 목사님의 얼굴에 희색(喜色)이 도는 모습이 그려진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며 노니는데 명랑하지 않을 틈이 있을까? 그런 삶의 비결을 아시기에 분주한 삶에 지쳐 게슴츠레한 눈빛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려 ‘쉴 새 없이 명랑하자’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목사님의 일상은 이렇듯 자연이라는 품에서 쉼도 얻고 여러 모양으로 노니시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계시다.
목사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신 사이 권포근 사모님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야생화 이야기와 야생화 요리 이야기는 잠시 점을 찍은 정도. 이야기의 대부분은 딸의 뒤늦은 결혼 이야기와 특히나 사위를 얻게 된 이야기였다. 알고 보니 딸의 결혼이 성사되기까지 모든 일을 주도하신 분이 사모님임을 알게 되었다. 사모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참으로 흥미진진하고 유쾌하게 해주셨다. 참 좋은 사람을 사위로 맞아 딸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목사님과 사모님은 작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셨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영상으로 어린 핏줄을 마주하신다니 얼마나 행복하실까? 무심한 듯 보이는 목사님도 잘 드러내시진 않으시지만 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낭보’라는 제목의 시로 남기셨다.
독신으로 살 것 같던 딸이 혼인을 하고
회임을 하더니
어느 날은
열레달처럼 둥글어지는 배를,
어느 날은
보름달처럼 만삭의 배를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는데
얼마 뒤 순산을 했다며
드디어
할아버지가 되셨다는 낭보를 전해 왔다
얼마나 기쁘던지
울컥,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한데
기쁨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
소금꽃 피는 물의 심연에
치명의 독(毒)을 풀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종말의 기운이 요동치는 세상이지만
인간 종이 사라지는 것이
가이아(Gaia) 여신이 기뻐할 낭보일 거라는 말은
제발, 내 앞에서는 하지 말기를
-‘낭보’ 전문
시 ‘낭보’에는 딸의 상태에 따라 울고 웃는 아빠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밖에도 시(詩)에 대한 목사님의 생각과 모인 이들의 삶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다 토지문학관 인근에 있는 원주 농가맛집 토요(土謠, 흙을 노래하다)에서 생명밥상으로 차려진 감자 옹심이와 만둣국을 맛있게 먹고, 가까운 카페에 들러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앞으로 매년 한 두 차례 이 모임을 지속적으로 갖기로 하고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좋은 시간! 내 마음이 무언가로 충만히 채워진 느낌이었다. 함께 한 이들이 너무도 좋았다. 고진하 목사님과 권포근 사모님은 물론, 늘 존경하는 송대선 목사님, 정명성 목사님, 이기록 목사님, 그리고 처음 인사를 나누었지만 이미 페친이어서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박용한 목사님, 그리고 늘 보고 싶었던 평창의 이상민 목사... 모두 예수를 닮은 순수한 사람들이다.
3. 나도 진심어린 글쓰기를 하고 싶다
목사님께서는 이번 시집이 10번째 시집이라며 거의 3년마다 한 권씩 시집을 내게 되었다 하셨다. 그러고 보니 30년 줄곧 시를 써오신 셈인데, 시집이 나올 때마다 목사님의 3년간의 삶과 생각이 응축되어 시(詩)가 만들어진 것이다. 시 한 편이 쓰이기까지 수많은 고뇌와 수정이 가해진다 하셨다. 거침없이 한 번에 시작(詩作)하는 분들도 있지만, 목사님의 시는 단어 하나를 선정할 때나 문장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몇 날 며칠이 걸리기도 하신다 하셨다. 왜 안 그렇겠는가! 글이 단순한 낱말의 조합이 아닌 삶과 사상이 녹아있는 것이라면, 글과 글쓴이는 분리될 수 없는 법. 그 글은 곧 그 사람인 셈이다. 그것이 세상에 나와 모든 이들에게 읽힌다면 어찌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허투루 쓸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 자리에 함께했던 시인 정명성 목사님도 깊이 동감하시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도 그런 글쓰기를 하고 싶다.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나의 정체성과 분리되지 않은 진심어린 글을 쓰고 싶다.
첫댓글 💌 물새들이 바닷가 칠판에 쓰고 간 가갸거겨, 아야오요를 배우러 가고 싶어지는 봄날 아침입니다. 당번인 파도가 지우개로 지우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