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기슭
만년설이 바라보이는 해발 이천오백미터
고지대의 한적한 마을에서
한낮의 햇살이 매서운 눈처럼 쏘아보는 곳에서 나는 보았다
늙은 붉은 머리 독수리 한 마리
먹이를 찾아 천천히 공중을 선회하다가
까마귀 몇 마리에게 습격 당하는 것을
원래는 자신의 영토였으나.
이제는 까마귀들의 하늘이 된 곳에서
홀로 고독하게 날던 붉은 머리 독수리
까마귀들의 집중 공격에 잠시 균형을 잃고
마을의 지붕들 위로 추락할 뻔 했다
그러나 붉은 머리 독수리는 초연하게 피할 뿐
까마귀들에 맞서 싸우려하지 않았다
히말라야 고산지대
만년설의 흰눈을 배경으로
더욱 검고 탐욕스러워 보이는 까마귀들은
늙은 붉은 머리 독수리를 얕잡아 보고
사방에서 겁없이 덤벼들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독수리의 눈빛이 한순간 흰눈에 반사되는 것을
그러나 늙은 독수리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
한바퀴 공중을 선회할 뿐
까마귀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한낮의 태양이 매서운 눈처럼 쏘아 보는 곳
원주민들이 히말라야의 새라고 부르는 붉은 머리 독수리는
천천히 만년설을 향해 날아갔다
태양도 눈을 녹이지 못하는 그 곳
까마귀들은 더 이상 그를 추적할 수 없었다
나 역시 그 흰눈에 눈이 부셔서
그곳을 오래도록 바라볼 수가 없었다.
- 류시화, 「히말라야의 새」 전문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지는 ‘히말라야’는 ‘눈’(雪)과 ‘거처’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1년 내내 “만년설이 바라보이는 해발 이천오백미터”의 마을에서 서정적 주체는 ‘붉은 머리 독수리’를 본다.
이 마을의 원주민들은 그 독수리를 ‘히말라야의 새’라고 부른다. ‘만년설’은 기온이 낮은 높은 산에서 볼 수 있는 백설의 풍경이다. 이 시의 이러한 분위기는 다분히 환상적이며 명상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주인공인 히말라야의 ‘붉은 머리 독수리’는 어릴 땐 머리가 회색이었다가 점차 붉은 색으로 변한다. 그런 모습이 칠면조를 닮았다 해서 하늘을 나는 ‘털키 벌쳐’(Turkey Vulture)라고 부른다.
큰 날개와 육중한 몸집의 이 독수리는 냄새로 죽어있는 먹잇감을 찾아다닌다. 그런데 새의 제왕이라 불리는 이 독수리가 “까마귀들의 집중 공격”에 고전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독수리들은 동물들의 사체가 발견되면 의외로 까마귀나 까치들의 습격에 도망 다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시인은 독수리의 이러한 점을 시적 발상으로 한 것이다. 히말라야 기슭의 “고지대의 한적한 마을”에서 ‘붉은 머리 독수리’는 “까마귀 몇 마리에게 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비굴하거나 초라한 독수리의 모습을 그리고자 한 것은 아니다.
“한 바퀴 공중을 선회하다가” 자기 영토를 침범한 까마귀들을 공격하지 않는 ‘붉은 머리 독수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검고 탐욕스러워 보이는 까마귀들은/ 늙은 붉은 머리 독수리를 얕잡아 보고” 더욱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고 있다.
독수리는 그들과의 싸움을 피해 “태양도 눈을 녹이지 못하는 만년설”을 향해 날아간다. 먹잇감을 놓고 쌈박질을 하여 상처를 주고 피를 흘리는 치열한 생존 경쟁의 제로섬 게임을 벗어난다.
그리고 까마귀들이 갈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을 선택한다. 즉 ‘붉은 머리 독수리’는 모든 세속적 욕망을 떨쳐 버리고 백색의 ‘만년설’을 향해 천천히 가고 있는 것. 푸른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독수리의 풍경은 초인적 삶의 모습이기에 경외감이 느껴진다.
평범한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지향하기에 “나 역시 그 흰눈에 눈이 부셔서” 바라볼 수 없는 것.-한상훈
첫댓글 류시화 선생이 쓴 인도 기행문을 읽은 기억이 나요.사물의 본성을 통찰하는 눈이 예리한 편이지요.선생님의 평도 고차적입니다
네.
최근에 인도 갠지스강 근처인가...어디서
하이쿠까지 쓴 걸 봤습니다..
문단에서 이런 분들을 넘 아웃사이더 취급하는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