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회 문화답사
2020년 능•원•묘를 찾아 시대별 인물들의 대한 이야기를 국립서울현충원을 시작으로 두 번째 답사지로 조선500년의 왕과 왕비의 혼을 모신 종묘 나들이입니다.
● 만나는 일시 : 2020년 1월 18일(토)오후2시
● 만나는 장소 : 종묘 매표소 앞
● 문의 및 진행 : 답사팀장 최병규
조선왕실의 사당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에 반드시 국가의 도읍지에 세워야 했고, 그 위치나 형식 등도 따로 규정한 제도에 의거해 정해야 했다. 지금 서울에 있는 종묘는 1395년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에 지었다.
‘궁궐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주례에 따라 경복궁의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의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에 중건한 것이다. 건립 후 모시는 신주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수차례 건물 규모를 늘려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전과 영녕전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을 종묘라 하였으나, 현재는 정전과 영녕전을 모두 합쳐 종묘라 부른다.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49위를, 영녕전의 신실16칸에는 34위의 신주를 모셨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지만, 왕위에서 쫓겨났다가 숙종 때 명예를 회복한 단종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셨다.
종묘는 제사를 모시는 공간과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뉜다. 제사를 모시는 공간으로는 정전, 영녕전, 공신당, 칠사당이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는 재궁, 향대청, 악공청, 전사청 등이 있다.
종묘의 모든 건물은 장식과 기교를 절제하여 단조로워 보이지만, 이는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위한 의도적인 장치이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한국의 종묘는 건물과 더불어 제례와 제례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왜 종묘를 세우는가?
종묘의 건립은 유교의 조상 숭배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형체인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당(廟)을 지어 ‘혼’을 모시고 무덤(墓)을 만들어 ‘백’을 모시는 형태로 조상을 숭배하였다. 사당에서는 죽은 조상의 혼이 깃든 신주(神主)를 만들어 제례를 올리며 후손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사당중에서 왕실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종묘라고 한다.
조선왕조와 관련된 책이나 드라마에서“ 종묘사직을 보존하고…”또는“종사를 어떻게 하려고…”와같은 표현을 흔히 볼 수 있다. 종사는 종묘와 사직을 합친 말로 조선시대에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것이었다.
창건 당시 종묘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한 다음, 종묘를 먼저 짓고 궁궐을 그 다음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벽을 쌓아 도성을 건설한다는 원칙을 정하였다. 이에 따라 1394년 10월에 가장 먼저 종묘를 짓기 시작하여 1395년9월에 완성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종묘를‘태묘(太廟)’라 하였다. 태묘가 완성되자 개경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의 조상4대의 신주를 새로 지은 종묘로 옮겨 모셨다.
종묘 기본 모습의 형성
종묘는 태종·세종대에 이르러 기본 모습이 정립된다. 태종은 종묘 남쪽에 인공으로 가산(假山)을 조성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였다. 야트막한 구릉이 사방으로 종묘를 둘러 싸도록 해서 그 안에 신성한 기운이 감돌게 만든 것이다. 또한 제례 때 비와 눈을 막을 수 있도록 건물 양끝에서 직각으로 꺾인 동서 월랑(月廊, 행각)을 만들었다.
이것은 중국과 달리 새로 고안한 종묘 건축의 기본 틀로서 조선의 독특한 양식이다. 그리고 종묘의 둘레에 담을 두르고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종묘의 격식을 갖추었다. 세종 때 영녕전을 새로 건립하여 조선왕조의 종묘 건축은 종묘와 별묘를 두는 제도로 정비된다.
종묘의 훼손
조선시대에는 건물을 지을 때 자연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 풍수를 중시했다. 종묘는 응봉자락을 따라 흐르는 산줄기의 지맥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거쳐 흘러들어온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종묘와 창경궁 사이에는 도로가 동서 방향으로 나있어 두 곳을 가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광화문에서 이화동으로 통하는 도로(현재의 율곡로)를 내어 종묘로 들어오는 지맥을 끊어 버린 것이다. 다행히 율곡로를 덮고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복원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향대청香大廳 일원
종묘제례를 위한 준비실
향대청은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ㆍ축문ㆍ폐백과 같은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향대청 앞에는 행각이 길게 자리 잡고 있어 두 건물 사이에 남북으로 긴 뜰이 만들어졌다. 향대청 동남쪽으로 망묘루(望廟樓)가 있고, 그 뒤쪽에 공민왕 신당이 있다. 툇마루 앞에는 신발 벗는 섬돌을 길게 설치해 여러 사람이 드나들기 편하게 했다.
망묘루(望廟樓)
망묘루는 종묘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도서를 보관하고 그림을 걸어 두기도 하였다. 망묘루는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인데, 연못 방향의 두칸은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정식이름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다. 조선 왕조 최고의 사당인 종묘에 고려의 왕을 모셨다는 점이 특이하다. 역성혁명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하기도 하고, 종묘를 창건할 때 공민왕의 영정이 바람에 실려 종묘경내로 떨어졌는데 조정에서 회의 끝에 그 영정을 봉안키로 하여 공민왕 신당이 건립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왕의장례식
국장이라 하는 왕의장례는 국가사업에 비견할 정도로 막대한 비용과 인력으로 치러졌다. 승하한 왕과 왕비에게는 흰 비단옷으로 만든 수의를 9겹 입혔다. 소렴(2~3일 내에 하는 염습의 처음절차)에는 겹옷, 겹이불로 19겹을 입히고, 대렴(5일 후에 시신에 옷을 입히고 이불로 싸서 베로 묶는 절차)에는 무려 90겹의 수의를 입혔다.
왕의 승하 후에는 도성의 성문과 대궐을 군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5일간 장이 열리지 못하며, 3개월까지 혼인과 동물의 도살이 금지된다. 국장 때까지 시신이 썩으면 안 되기에 동빙고에 저장해 둔 얼음을 이용하여 일종의 냉동 영안실을 만들어 놓고 5개월의 긴 장례기간 동안 시신을 보관하였다.
재궁齋宮 일원
제를 위해 심신을 정결히 하던 곳
재궁은 왕이 머물면서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으로, 어재실, 세자재실, 어목욕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왕이 머무르는 어재실,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고, 담으로 둘러져 있다. 왕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서협문으로 나와서 정전과 영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정전正殿 일원
역대 왕실의 신주를 모신 곳
정전은 왕과 왕비의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 정전의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곳에 있다. 남문은 신문(神門)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다. 동문으로는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고 서문으로는 악공, 춤을 추는 일무원, 종사원이 출입한다.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재위 중인 왕의 4대 조상, 역대 왕 중에서 특히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정전은 내부에 모실 신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옆으로 증축하여 늘렸다. 건물 앞에 있는 가로109m, 세로69m나 되는 넓은 월대는 정전의 품위와 장중함을 잘 나타낸다. 월대 가운데에는 신문에서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다. 제관과 집례관들은 월대에 도열하여 제례를 행한다. 신실의 양쪽에는 창고와 부속실들을 마련했다. 거친 월대 바닥과 위로 육중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를 이룬다.
정전은국보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신당ㆍ칠사당ㆍ악공청
정전의 월대 아래 동쪽에는 공신당(功臣堂)이 있고, 서쪽에는 칠사당(七祀堂)이 있다. 공신당은정전에 모신 역대 왕들의 공신들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창건할 때는 5칸에 불과하였으나 정전에 모시는 왕의신주가 늘어남에 따라 배향 공신들의 위패도 늘어나 지금과 같이 83위를 모신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칠사당은 토속신앙과 유교 사상이 합쳐진 사당이다. 왕실과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이 아무 탈 없이 잘 풀리도록 봄·여름·가을·겨울의 운행과 관계되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낸다. 정전서 남쪽 담장밖에는 제례악을 준비하는 악공청(樂工廳)이 있다.
악공청은 종묘제례 때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며 연습도 하던 건물이다.
전봉안 신위
현재 정전에는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 다음 칸부터 차례로 태종(3대), 세종(4대), 세조(7대), 성종(9대), 중종(11대), 선조(14대), 인조(16대), 효종(17대), 현종(18대),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 문조(익종,추존), 헌종(24대), 철종(25대), 고종(26대), 순종(27대)과 각 왕의비(妃)를 합쳐 모두 49위의 신주가 19감실에 모셔져있다.
신령한 종묘
임진왜란 발발 2년 전인 1590년 (선조 23)에는 종묘를 지키는 종이었던 이산 일당이 도둑질을 하고 나서 이를 은폐하기 위해 불을 지른 일이 있었다. 화재는 초기에 진화되었지만, 이 일로 인해 선조는 소복 차림을 하고 선왕의 혼령들에게 사죄드려야 했다. 또 <선조수정실록>에는 임진왜란 전에 종묘 안에서 도적들이 유숙하여 배설물이 낭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관은 ‘식자들은 장차 환란이 일어날 조짐임을 알았다고 한다’라고 적고 있다.
유성룡이 쓴 <기란후사(記亂後事, 전란 후의 일을 적다)>에도 서울에 진입한 일본군이 처음에는 종묘에 머물렀는데, 갑자기 왜군들이 죽는 일이 발생하자 ‘종묘는 신령이 있기 때문에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며 지금의 덕수궁 맞은 편 남별궁(南別宮)으로 옮겨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영녕전永寧殿 일원
왕실 신주를 모신 별묘
1421년(세종 3)에 정종의 신주를 정전에 모시며 정전의 신실이 부족하자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다른 곳에 옮겨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별묘다. 그 이름은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녕전은 신주를 정전에서 옮겨 왔다는 뜻에서 조묘( 廟)라고도 한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일원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친근감 있게 지어졌다.
정전일원과 마찬가지로 이중으로 된 월대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ㆍ남ㆍ서 세 곳에 문을 두었다.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비를 모신 곳으로 다른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좌우의 협실 각각 6칸에는 정전에서 옮겨 온왕과 왕비 및 추존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은 정전과 같이 세면을 벽으로 감쌌으며, 내부 공간은 트여 있으나 가운데 4칸과 좌우 협실 사이는 벽을 두어 구분하였다.
영녕전을 건립하게 된 이유
조선 초기 종묘에는 정전 한 채만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신실이 모자라게 되었다. 천자의 나라인 중국의 종묘에는 7신실에 신주를 모시고 제후의 나라인 조선은 5신실에 신주를 모시게 되어 있었던 당시의 원칙 때문에 함부로 증축할 수도 없었다. 신주를 5신실에 모시는 오묘제(五廟制)는 왕조를 일으킨 태조와 현재왕의 4대 조상을 모시는 제도다. 논쟁 끝에 중국 송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사당을 하나 더 짓기로 하고 정전 옆에 영녕전을 세웠다.
영녕전 신위
영녕전에는 중앙의 각 신실에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왕비들의 신주를 모셨으며, 서협실(西夾室)에는 정종(2대), 문종(5대), 단종(6대), 덕종(추존), 예종(8대), 인종(12대), 동협실(東夾室)에는 명종(13대), 원종(추존), 경종(20대), 진종(추존), 장조(추존), 영왕과 각 왕의 비(妃)를 합쳐 모두 34위신주가 16감실에 모셔져있다.
종묘 신위에 올라가지 못한 왕
왕의 어머니 왕을 낳은 생모라 할지라도 왕비가 아니면 종묘의 신위에 올라갈 수 없었다.
영조는 자신을 낳은 어머니 숙빈최씨를 종묘에 모실 수 없어 숙빈묘라는 사당을 따로 지었다. 조선 왕조에서 미천한 무수리 출신으로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는 숙빈최씨 뿐이었다.
영조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각별 하였지만, 왕이라 할지라도 엄격한 신분의 벽을깰 수는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 숙종이 장희빈 사건을 계기로 후궁을 왕비로 올리는 일을 국법으로 엄격히 금지시켰으니, 영조가 할 수 있는 일은 명당에 어머니의 사당을 지어 위로하는 일밖에 없었다.
전사청典祀廳 일원
제례용 음식을 조리하던 곳
전사청은 제례를 치를 때 음식을 마련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제사에 사용하는 집기들을 보관하였다. 네모난 마당 둘레에 ‘ㅁ’ 자 모양으로 건물이 들어섰고 마당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돌절구들이 남아 있다. 1395년(태조 4년)에 종묘를 지을 때 함께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8년에 재건했다. 정전 동문 옆의 수복방(守僕房)은 종묘를 지키는 수복들이 사용하던 곳이며, 그 앞에 찬막단(饌幕壇)과 성생위(省牲位)가 있다. 전사청 동쪽에는 제사에 쓰는 우물인 제정(祭井)이 있다. 제정 주위에는 담을 쌓아 사람들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찬막단(饌幕壇)과 성생위(省牲位)
찬막단은 제사에 바칠 음식을 미리 검사하는 단이다. 종묘제례에는 날 음식을 올렸으므로 특별히 주의해야 했기 때문에 천막을 치고 휘장을 둘러 청결하게 하였다. 성생위는 제물(祭物)인 소ㆍ양ㆍ돼지를 검사하는 곳으로, 제물로 올려도 좋다는 판정이 난 후에야 잡아서 썼다.
종묘 제사에는 왼쪽표(어깨 뒤 넓적다리 앞 살)에서 오른쪽 우(어깻죽지 앞 살)로 관통한 상살(上殺)만 올릴 수 있었다.
신실神室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곳
조선시대의 종묘는 하나의 건물 안에 신실을 따로 두어 각 신실마다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동당이실(同堂異室)로 되어 있다. 정전과 영녕전 신실 북쪽 벽에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감실(龕室)이 있다. 각 감실 주위에는 사방과 천장에 황색의 휘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따로 황색의 휘장을 쳐서 마치 생전의 침상과 같이 꾸몄다. 각 감실 사이에는 발을 내려뜨려 구획을 나누었다. 감실 앞에는 주렴(珠簾, 발)을 내렸으며, 감실 위에는 집 모형의 닫집을 설치하고 구름과 연꽃을 조각하여 천상의 세계를 나타냈다. 밤나무로 만든 신주는 각 감실 중앙 뒤쪽의 신주장(神主欌)에 모셨는데, 왕의 신주는 서쪽에, 왕비는 동쪽에 모셨다.
왕의 호칭 자(字), 휘(諱), 시호(諡號), 묘호(廟號), 능호(陵號)
조선시대의 왕은 많은 호칭을 갖게 된다. 왕은 태어날 때 이름을 갖지 않고 적장자로 태어나면 원자(元子)라고 부른다. 자라면서 관례를 행하면 자(字)를 받고, 세자에 책봉될 때 이름인 휘(諱)를 받는다. 왕이 승하하면 그의 일생을 평가하고 공덕을 기리기 위해 시호(諡號)를 짓는다.
궁궐에서 삼년상을 지내고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새로 등극한 왕과 대신들이 정하는 이름이 묘호(廟號)다. 예를 들어 태조, 세종, 정조 등은 모두 묘호다. 왕이 묻힌 무덤은 능(陵)이라 한다. 태조의 능호(陵號)는 건원릉(健元陵)이고, 세종의 능호는 영릉(英陵)이다.
신주
유교에서 죽음은 혼령이 몸에서 떠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몸을 떠난 혼령이 의지할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상징물이 바로 신주(神主)다. ‘신주 단지 모시듯 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매우 신성시하였다. 종묘 신주는 윗면이 둥글고 아랫면이 네모난 직육면체로, 혼이 드나드는 규(竅)라는 구멍을 내었고, 신주 앞면에는 왕의 묘호(廟號), 시호(諡號), 존호(尊號) 등을 세로로 썼다. 종묘 신주는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전쟁이 일어나면 안전한 곳으로 옮겨 모셔야했다.
국기판 國忌板
왕과 왕비,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을 출산한 후궁의 기일(忌日)과 능·원·묘의 위치가 새겨져 있는 판으로, 마지막에는 제작 당시의 왕과 대왕대비, 왕대비, 왕비의 탄일(誕日)이 새겨져있다. 익종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헌종대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종의 묘호
정종(2대)은 1419년(세종 1)에 승하하였는데, 처음에는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지 못하여 신주에 공정대왕이라고 올렸다. 이는 정통 임금의 대우를 받지 못한 것으로 여러면에서 다른 왕들 보다 낮은 대우를 받았다.
1475년(성종 6년)에 성종의 아버지인 덕종을 추숭하고 종묘에 부묘하는 과정에서 신실이 모자라자 정종의 신주를 제기를 놓아두는 서쪽 협실에 모신 일도 있었다. 여러 번에 걸쳐 묘호를 올리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정종이 죽은지 260여년이나 지난 1681년(숙종7)이었다.
부묘祔廟
왕이 돌아가시고 삼년상을 마치면 길한 날을 택하여 궁궐의 혼전에 모셨던 신주를 종묘정전으로 옮겨 모신다. 이것을 부묘(祔廟)라 하고, 그 의식을 부묘제(祔廟祭)라 한다. 왕비가 먼저 사망하였을 때는 신주를 궁궐에 모시고 있다가 왕의 삼년상이 끝날 때 같이 부묘한다. 부묘에는 왕의 시책(諡冊)과 시보(諡寶)도 함께 올리며, 배향 공신의 위패도 공신당에 봉안한다. 부묘제를 전환점으로 왕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종묘제례 宗廟祭禮
국가최대 규모의 제례
종묘제례는 유교예법에 맞추어 신을 맞는 절차, 신을 즐겁게 하는 절차, 신을 보내드리는 절차로 구분하여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행한다. 조선시대의 종묘제례는 왕이 친히 행하는 가장 격식이 높고 큰 제사로서 밤중에 지냈으며, 왕을 비롯한 왕세자, 여러 제관, 문무백관 등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왕이 직접 지내는 친행을 못하면 영의정 등 대신이 올리는 섭행을 하기도 하였다. 종묘제례는 정전에서는 각 계절의 첫 달과 음력 12월에 좋은 날을 정하여 일 년에 다섯 번 지냈고, 영녕전에서는 봄·가을에 두 번 봉행하였다. 지금은 매년5월 첫째 일요일에 봉행하고 있다. 제례이외에도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빌거나 알리는 의식을 종묘에서 먼저 행한
다음 시행하였다. 종묘제례는 상사(喪事)나 흉사(凶事)가 아니라 길사(吉事)여서 의례도 길례(吉禮)로 받들었다. 종묘제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종묘제례악과 함께 2001년 5월에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어가 행렬
왕이 행사를 위해 의장(儀仗)을 갖추고 종묘로 가는 공식적인 행렬을 일컫는다. 어가 행렬을 할 때는 호위군사와 수행원이 어가 앞뒤에 가로 세로 방향으로 길게 배열하여 성대하게 움직였다. 종묘제례의 시작인 어가 행렬은 왕이 궁궐 밖에 준비한 연(輦, 가마의 일종)에 오르면, 호위 군사와 둑(纛)·교룡기(蛟龍旗) 등 왕을 상징하는 의장기 및 창검이 앞을 인도하고, 왕이 탄 연 앞뒤로는 커다란 해가리개와 부채, 취악대가 배치되며, 그 뒤로 종친과 문무백관이 왕을 수행하고 현무대라는 호위군사가 뒤를 따랐다. 어가가 종묘 외대문 밖에 이르면 왕은 연에서 내려 여(輿)로 갈아타고 종묘 안으로 향하였다. 왕은 종묘에 들러 네 번 절하고 나서 재궁에 들었다.
제례 순서
왕은 종묘제례가 있으면 7일 전부터 몸과 마음을 경건하고 정결하게 하는 재계(齋戒)를 하였다. 종묘제례는 정성과 엄격한 격식을 갖춰 치러졌다. 제례는 제관이 정해진 자리에 나가 각자 맡은 역할을 할 준비를 하면서 시작된다(취위 就位). 다음으로 혼을 맞이하기 위해 향을 피우고 바닥의 관지에 울창주(술의 일종)를 부어 백을 모신 후 신에게 흰색 모시를 바친다(신관례 晨 禮). 제사에 사용할 희생의 털과 피, 익힌 내장 등을 올리고 간 및 기장, 피, 쑥 등을 기름과 섞어 숯불화로에서 태운다(천조례薦俎禮). 신이 즐기도록 왕이 첫 술잔을 올리고, 두 번째 잔과 세 번째잔은 왕세자와 영의정이 올린다(헌작례 獻爵禮). 왕이 대표로 술과 고기를 먹음으로써 조상이 주는 복을 받는다(음복수조례 飮福受胙禮). 제사에 올렸던 축문과 폐백을 모두 모아 요대(燎台)에 가서 태우는 것으로 제사는 끝난다(망료례望燎禮).
종묘제례에 참여하는 사람들
초헌관(初獻官): 첫째 잔을 올리는사람
아헌관(亞獻官): 둘째 잔을 올리는사람
종헌관(終獻官): 셋째 잔을 올리는사람
집례(集禮): 홀기를 읽는 사람
찬례(贊禮): 초헌관을 모시는 사람
천조(薦俎): 조(익힌고기)를 바치는 사람
봉조(捧俎): 조를 받들고 가는 사람
대축(大祝): 축문을 읽는 사람
우전(右奠): 오른쪽에 서작(爵,술잔)을 올리는 사람
봉향(捧香): 향합을 받드는 사람
봉로(捧爐): 향로를 받드는 사람
내봉(內奉): 신실 안에서 작을 전해주는 사람
외봉(外奉): 준상에서 내봉에게 잔을 전해주는 사람
사준(司樽): 술을 떠서 잔에 담는 사람
찬의(贊儀): 집사와 헌관을 인도하는 사람
관세위(盥洗位): 손 씻는 대야를 둔 곳에서 도와주는 사람
제기와 음식
종묘제례는 국가제례이므로 제기(祭器)또한 특별히 제작, 관리되었다. 대나무를 엮어 만들어 마른제수를 담는 변(籩), 젖은 제수를 담을 수 있게 나무로 만든 두(豆), 3종의 희생을 올려놓는 조(俎), 곡물을 담는 보(簠, 사각형 모양)와 궤(簋, 둥근 모양), 국을 담는 형(鉶), 그리고 닭·새·코끼리·소·산·구름·곡식 등 여러 모양의 술그릇을 포함해서 모두 63종이다.
영조 때 작성한 <종묘의궤>에 의하면 제수는 곡물 4종류, 떡 5종류, 과실 5종류, 포 2종류, 젓갈 4종류, 고기 7종류, 김치 3종류, 양념하지 않은 국 3종류, 기본적인 장, 술 등이지만 현재는 간소화되었다. 제수는 선사시대의 풍습에 따라 날것이거나 소금 절임, 또는 삭힌 것을 썼다.
종묘제레악宗廟祭禮樂
아름답고 장엄한 인류무형문화유산
종묘제례악은 악기(樂)ㆍ노래(歌)ㆍ춤(舞)을 갖추고 종묘제례 의식에 맞추어 연행하는 음악이다. 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돌아가신 왕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며 제례의식을 위한 춤을 춘다. 종묘제례악은 1447년에 세종이 처음 만들었고, 세조 때 이르러 제례악에 걸맞도록 보태평(保太平) 11곡과 정대업(定大業) 11곡으로 줄이고 다듬어 사용하였다.
보태평의 곡들은 역대 왕들의 문덕(文德)을, 정대업의 곡들은 무공(武功)을 호기 넘치는 시어(詩語)로 칭송하며, 죽은 신령과 인간, 왕과 백성을 한데 결속시켜주고 후손에게 한없는 복을 내려 나라가 창성하게 해줄 것을 기원하는 내용이 간절하게 표현돼있다.
종묘제례악은 연주위치와 악기편성에 따라 등가와 헌가로 나뉘는데, 상월대에 배치되는 등가는 노랫말이 있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이고, 하월대에 배치되는 헌가는 노랫말이 없는 음악을연주하는 악단이나, 현재 종묘제례에는 등가, 헌가 모두 노랫말이 있다.
화려하고 시원한 음색과 아름답고 장대한 음률은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중간 중간에 울리는 서슬 퍼런 박 소리는 종묘제례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있다.
일무佾舞
종묘제례 때 줄을 지어 추는 춤을 일무(佾舞)라 하는데 부드러움과 힘참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종묘제례악에서는 6일무를 추다가 고종이 황위에 오른 이후 8일무를 추었다.
일무는 문덕(文德)을 칭송하는 문무(文舞)와 무공(武功)을 칭송하는 무무(武舞)로 구분된다. 문무는 정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춤이고, 무무는 목검과 목창을 들고 강하고 힘차게 추는 춤이다.
종묘에 숨은 장치들
유교 세계관을 반영한 시설물들
종묘에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장치들이 숨어 있다. 외대문에서 곧게 뻗어 있는 길에는 거친 돌을 깔았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왕을 포함해서 제사에 참여한 제관들이 경박하게 빨리 걸어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일부러 거친 돌을 깔아 몸가짐을 조심하게 한 것이다. 정전과 영녕전의 지붕 용마루, 처마, 기단, 담의 높이를 유심히 보면 모두 다르다.
지붕과 기단의 높이는 신실 - 협실 - 월랑 순으로 낮아지고 기둥의 굵기와 높이도 같은 순서로 가늘어지고 낮아진다. 이러한 건축형식은 위계질서를 중요시 하는 유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신로 神路
신로는 종묘제례 의식을 위해 낸 것으로 신(神)만이 다니는 길을말한다. 종묘에는 신로 외에도 신향로(神香路), 향로(香路), 어로(御路), 세자로(世子路) 등이 있다. 종묘 외대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거칠고 넓적한 박석이 세 가닥 길로 깔려 있다. 가운데 길이 약간 높고 양옆은 약간 낮다. 가운데 길은 혼령이 다니는 신로(神路)와향ㆍ축문ㆍ폐백 등 제사예물이 오가는 향로(香路)가 합쳐진 신향로이고, 오른쪽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 왼쪽 길은 왕세자가 다니는 세자로다. 신향로는 종묘 정전과 영녕전 남쪽에 난 대문에 이르러 묘정 상월대 아래에 닿기 때문에 이 남문을 신문(神門)이라 한다. 어로와 세자로는 재궁에 이르러 재궁 서문에서 정전동문, 영녕전동문으로 이어진다.
판위 版位
종묘 정전과 영녕전 동문 밖, 그리고 묘정 동북쪽에는 특별하게 만든 네모난 대(臺)가 있다. 판위라고 부르는 이대는 왕과 세자가 제례를 할 때 잠시 멈추어 예를 갖추는 자리다. 왕이 멈추어 서는 자리는 전하판위(殿下版位), 세자의 자리는 세자판위(世子版位)라 한다.
월대, 계단
정전과 영녕전 앞에 넓게 펼쳐져 있는 대를 월대라 하고, 월대가 있는 공간을 묘정(廟廷)이라 부른다. 월대는 상월대와 하월대로 구분되어있다.
정전과 영녕전 건물은 상월대 북쪽에 기단 위에 서 있다. 상월대와 하월대 사이에는 계단이 3벌 있다. 가운데 계단을 태계(泰階), 동쪽의 계단을 동계(東階)혹은 조계(阼階), 서쪽의 계단을 서계(西階)라 한다. 태계는 조상신을 위해 마련했고, 동계는 제관이 건물에 오를 때, 서계는 망료례를 행하기 위해 내려 올 때 사용한다.
상월대에 이르는 계단과 동월랑의 계단 소맷돌(돌계단 난간)에는 종묘가 ‘천상의 공간’ 임을 암시하는 구름무늬가 새겨져있다.
신실출입문
정전과 영녕전 내부로 출입하는 문은 각 칸마다 두 짝씩 달렸는데, 그 맞춤이 정연하지 않고 한쪽 문짝이 약간 뒤틀려 틈새가 벌어져 있다. 아래 문턱 한 쪽에 삼각형 모양의 기다란 나무를 대어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도록 해놓았기 때문이다.
정전과 영녕전은 앞부분을 제외한 세 면이 모두 벽돌로 완전히 막혀 있어 내부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이다. 출입문의 틈새는 조상의 혼이 드나들게 하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이면서, 공기가 통하게 해서 내부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한다.
지당池塘
종묘에는 물이 담긴 연못(지당)이 세 곳 있다. 사각형의 지당 가운데에는 둥근섬이 있는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짐) 사상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궁궐 지당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으나 여기에는 향나무가 심어져있다.
부알판위 祔謁版位
종묘 정전 남문에서 정전으로 들어가는 신로 중간쯤 되는 곳의 동쪽에 ‘부알판위’가 있다. 전돌로 만든 사각형의 부알판위는 삼년상을 치른 왕이나 왕후의 신주를 궁궐에서 종묘 정전으로 옮겨 모시는 부묘제(祔廟祭)를 할 때 신주를 놓던 곳이다. 이때 정전에 봉안된 태조 이하 모든 왕과 왕비의 신주들을 신주장 앞에 있는 신탑(神榻)에 모셔놓고 고하는 의식을 행한다.
부알판위는 영녕전에도 있다.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신주를 옮기는 조천(祧遷)의식을 하는 판위이다. 삼년상을 치른 왕의 신주를 궁궐에서 종묘 정전으로 부묘하기 위해서는 이미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주 하나를 영녕전으로 옮겨 모셔야했기 때문이다.
하마비 下馬碑
종묘 앞을 지나거나 종묘에 들어올 때 ‘이곳에 이르러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온 말에서 내리라’는 글귀를 돌에 새긴 비다.
종묘에 모신 조상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말에서 내리라는 것이다. 종묘 하마비는1413년(태종13년)에 처음으로 나무로 만들어 세웠다. 현재 종묘 앞에 있는 돌로 만든 하마비는1663년(현종4년)에 세운 것이다.
어정御井
왕들이 종묘에 드나들면서 이 우물의 물을 마셨다고 해서‘어정’이라한다. 땅속 부분은 둥글게 쌓았고 땅위는 네모진 섬돌로 정(井)자 모양으로 쌓았다. 깊이는 약 8m, 지름은 약 1.5m다. 심한 가뭄에도 일정한 물 높이를 유지하는 영험이 있는 우물로 유명하였는데, 종묘공원에 지하주차장을 만들고 난 다음에는 물이 줄어버렸다.
출처 종묘 안내북
첫댓글 상세한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료 잘 보고갑니다
답사팀장님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