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경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신안식(건국 대 강사)
1198년 정월 노비 만적은 미조이, 연복, 성복, 소삼, 효삼 등과 더불어 개경의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노비들을 불러 모아 놓고 항쟁을 모의하였다.
국가에서 경인년, 계사년 이후로 높은 벼슬이 천한 노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수와 정승이 어찌 종자가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찌 육체를 괴롭게 하면서도 채찍 밑에 곤욕을 당할 수 있느냐.
그의 제의는 모두 그렇게 여길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무인정변으로부터 이에 저항한 김보당의 거사를 진압할 때까지 정국을 주도한 자들 중에 천한 노예출신이 많았다는 주장은 노비들도 신분상승할 수 있다는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만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힘을 모아 최고 집정자인 최충헌 등을 제거하고, 각기 그 주인을 죽인 다음 노비문서를 불살라 버리면, 자신들이 공경장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비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자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공경장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포기해 버리기에는 시대 여건이 너무나 유동적이었다.
노비신분의 굴레
노비는 남자 노와 여자 비를 합하여 부르는 말이며, 소속에 따라 개인 소유권 사노비와 국가 공공기관 소유의 공노비로 구별된다.
사노비에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가 있었다. 이들은 신분을 세습하거나 양인이 가난하여 몸을 팔거나, 전쟁포로, 그리고 권세가가 불법적으로 양인을 노비로 만드는 경우 등으로 사노비가 되었다. 솔거노비는 주인 호적에 올라가 있었고, 주인집에 살면서 나무하고 취사하는 등 집안의 잡역을 담당하였다. 외거노비는 그의 거주지에 별도의 호적이 있었고, 주인과 떨어져 살면서 주로 농사에 종사하면서 생활하다가 주인의 필요에 따라 일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솔거노비는 주인의 매매, 증여, 상속, 탈취 등으로 인하여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제한적이었다. 외거노비는 주인과 떨어져 살아 주인의 간섭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솔거노비보다는 현실적으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노비는 노비끼리 결혼하였다. 양인과의 결혼은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었지만 꼭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 자식은 ‘일척즉천’의 원칙에 따라 부모 가운데 한쪽이라도 노비이면 노비가 되었고, 그 소유권은 ‘천자수모법’에 따라 어머니의 주인에게 또는 어머니가 양인인 경우에는 아버지의 주인에게 귀속되었다. 동시에 이들은 주인의 사유재산으로서 재물과 같은 존재였으며, 죽임 이외에 주인의 횡포에 따른 어떤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였다. 주인이 반역죄와 같은 중대한 범죄에 관련될 때 고발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 노비는 주인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다.
공노비는 궁궐과 관청 등 국가의 공공기관에 예속되었다. 전쟁 포로나 반역한 사람, 적에게 투항하거나 이적 행위를 한 사람들은 처형되거나 공노비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의 가족이나 사노비는 몰수되어 공노비가 되었다. 이들 중에는 해당 관청의 잡역을 담당하고 그 대가로 생활하는 공역노비가 있었고, 따로 농사를 지으면서 규정에 따라 공납을 부담하는 외거노비가 있었다. 이들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다. 외거노비가 재산을 소유하거나 결혼을 할 때는 공역노비보다 유리하였다. 이들은 60세가 되면 역에서 면제되었다.
고려시대의 노비들은 위와 같은 신분적인 규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혜택으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일찍이 태조 왕건은 ‘훈요 10조’에서 노비와 같은 천류들은 그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양인이 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무리 큰 공을 세우더라도 노비는 상금을 받는 것 외에는 관리가 될 수 없도록 제도로 만들었다. 이것이 고려국가의 신분정책의 하나였다. 물론 최씨 무인집권기와 원 간섭기 등 사회 모순이 중첩된 시기에는 노비가 중책을 맡은 경우도 있었지만 극히 예외적이었다. 그러나 신분상승의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분상승을 꿈꾸던 시대
어느 시대든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바꿀 수 있는 길은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여 권력과 부를 얻거나, 사회체제를 변혁하는 경우이다.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명종 때 노비 평량이라는 자가 출세한 것이 앞의 예이고, 공주 명학소의 사람들과 다른 노비들의 항쟁이 뒤의 예이다.
평량은 원래 평장사 김영관의 노비였는데, 견주(경기도 남양주)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주어 노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고 산원동정이란 벼슬까지 얻게 되었다. 그의 아내도 소감 왕원지의 노비였다. 무인정변 이후 문신 지배층들이 몰락하면서 왕원지의 집안도 가난해졌는데, 그는 가족을 이끌고 노비의 남편인 평량에게 의탁하러 왔다.
그러자 평량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개경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처남들을 보내 도중에서 죽여 버렸다. 아내의 주인이 없어지면 영원히 양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뒤 그의 아들은 벼슬을 얻고 관리의 딸에게 장가도 들었다. 그러나 뒤에 왕원지의 가족을 죽인 사실이 드러나자, 평량은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의 아들들도 관직에서 쫓겨났다.
공주 명학소의 사람들은 소 지역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에 봉기하였다. 소에 사는 사람들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여러 물품들을 전문적으로 생산해야 했기 때문에 일반 군현의 주민들보다 역이 무거웠다. 또한 탐욕을 부리던 관리들로부터도 많은 침탈을 받았다. 특히 무인집권기에는 더욱 심하였다. 이들이 항쟁을 일으킨 때에는 평안도 지역에서 일어나 조위총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로 관군을 동원해야 했는데, 중앙 정부는 군사 동원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개경 이남 지역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명학소의 사람들이 지금의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를 함락시키자, 중앙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올려 주어 불만을 누그러뜨리고자 하였다. 명학소 사람들은 이 조치를 받아들여 봉기를 중단하였지만, 정부의 조치는 곧 속임수로 판명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봉기하여 왕경까지 점령하려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주모자인 망이, 망소이 등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고려시대 노비의 항쟁은 대략 10건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발생 시기는 주로 무인집권기 이후이고, 발생 지역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절반이 수도 개경에서 일어났다. 항쟁에 가담한 노비는 대부분 공역노비와 솔거노비였다. 그것은 이들이 외거노비보다 주인이나 국가로부터 많은 수탈과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쟁의 동기도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항쟁의 결과는 대부분 실패하여 참살되거나 강물에 빠뜨려져 죽임을 당하였다.
이들의 저항은 무인정변 이후 정치적 격변과 향촌사회의 저항에 따른 사회적 혼란 및 대몽전쟁기의 경제적 궁핍, 그리고 몽고와 강화한 뒤 외세의 간섭이라는 새로운 상황 등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났다. 따라서 노비들은 자신들의 신분적인 차별을 극복하고 새로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항쟁하였으며, 때에 따라서는 기존 지배체제에 저항하려는 세력들과 연합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노비의 항쟁이 수도 개경에서 빈번하게 발생한 것이 주목된다.
개경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곳의 노비들은 다른 지방의 노비들보다 사회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았을 것이다. 그 점은 신분제 자체를 부정했던 1198년의 사노비 만적의 봉기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한 사회의식은 항쟁이 실패해도 그 영향을 계속해서 남기고 있었다. 1232년(고종19) 몽고 군대를 피해서 중앙 정부가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자 어사대에 속한 노비 이통이 봉기한 경우, 그리고 1271년(원종12년) 굴욕적인 대몽강화에 반발하여 삼별초의 항쟁에 동조하려 한 노비 숭겸, 공덕의 경우 등에서 그러한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노비해방의 기치를 든 만적의 야망
노비 만적은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항쟁을 도모하였다. 만적은 노비신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공경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기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다!”양인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권력을 잡겠다는 것이었다.
만적이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무인정변 이후 대대적인 문신 살육, 잦은 권력쟁탈로 인한 집권 무인세력의 빈번한 교체, 향촌사회의 지속적인 저항 등 격변했던 사회적 상황에 따른 기존권위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최충헌의 정변과 그 이후 정변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더욱더 그러한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집권 무인세력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의민의 신분문제가 관심을 끈다.
이의민은 무인정변 때 행동대원으로 활약하여 크게 출세했던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견제를 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신분이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유독 <고려사> 열전에서는 그의 신분이 노비로 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 이선은 소금가 체를 파는 일을 생업으로 하였고, 어머니는 경상북도 영일에 있었던 옥령사의 노비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의민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천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천인이면서도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키가 8척이고 완력이 남보다 특출하다는 것과 무술을 좋아했던 의종이 배려해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이의민의 신분이 노비였는지 아니면 최충헌이 꾸며낸 사실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노비신분으로 집권자가 되었다면 최충헌이 정변을 합리화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적의 구호에서도 보듯이 이의민의 출세는 이 시기의 노비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노비의 아들이 권력의 최고 정점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노비들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채찍 밑에서 뼈가 으스러지도록 부림을 당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씨 정권은 60여 년 동안이나 유지되었지만, 최충헌 정권 초기는 아직 권력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무인정권 안에서도 권력쟁탈은 계속되었고 다른 세력의 도전으로 인하여 언제 권력을 잃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권력쟁탈의 성패는 집권자 한 명의 영욕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자의든 타의든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좌우하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서 권력자들의 노비들은 유사시에는 사병이 되기도 하였다. 명종 때 무인정권에서 벌어졌던 여러 번의 정변에서는 국가 공병이 동원되어 성공한 경우도 있었지만 권력자들의 노비들도 실제로 행동대원으로 동원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노비들은 처참한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결국 만적 등의 항쟁은 노비라는 신분 때문에 오는 당연한 불만 외에도,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서 오는 죽음의 공포와 육체적 수탈에서 비롯되는 분노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만적의 항쟁에서는 그에 참여한 노비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고, 모의단계에서 노비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려고 했던 사실이 주목된다. 만적은 동조하는 자들에게 누런 빛깔의 종이에 ‘정’자의 표식을 주었는데, 준비된 종이가 수천 장에 달하였다고 한다. 거사 당일의 행동방법에 대해서도 만적은, 흥국사에 모여 일제히 북을 치고 소리치면서 대궐의 뜰로 몰려가면 환관들과 관노들이 반드시 호응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대궐의 환관들이 호응할 것이라는 장담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환관은 궁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세세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합세할 것이라는 것은 항쟁세력을 결집시키는 데에 매우 고무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관노들은 주로 대궐이나 관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공공기관을 장악하거나 관리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유리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만적 자신과 다른 노비들은 최충헌과 자신들의 주인을 살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계획은 수도 개경의 모든 정치기구를 장악하고 권력가들을 단숨에 제거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만적의 지도력이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항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변을 일으키기로 약속한 날에 모인 사람이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적은 인원으로는 정변을 성공시킬 수 없다고 염려하여 거사 날을 다시 잡아 일을 뒤로 미룬 것이 일차적인 화근이었다. 만적은 “신중하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하니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고는 내부에서 생겼다. 율학박사 한충유의 노비인 순정이라는 자가 주인에게 모의 사실을 고발하였다. 한충유는 이를 다시 최충헌에게 알렸다. 최청헌은 만적을 비롯하여 100여 명의 노비들을 잡아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 그 나머지 동조한 수많은 노비들을 모두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반면 한충유는 합문지후로 승진되었고, 고발자 순정에게는 백금 80냥을 주고 노비에서 해방되는 상이 주어졌다.
재평가되어야 할 노비항쟁
지난 역사 속에서 고통받은 자들에 대한 평가는 어떠하였는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혁명에 성공한 자들은 그에 따른 영광스러운 권력과 부귀를 얻을 수 있었고 역사의 창조자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그에 반해 그들에게 도전하는 자들에게는 ‘반란’이라는 이름 아래 그 실상을 왜곡한 경우도 빈번하였다. 그 속에서 사라져 간 선구자와 추종자들은 역사의 흐름 밖에서 잊혀진 망령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세사회의 모순과 압박을 단숨에 뛰어 넘으려고 했던 많은 이들의 외침은 역사의 흐름 속에 면면히 살아 있었다. 우리들은 역사 속에서 만적을 생각할 때 노비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감하게 뛰어넘으려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왕에서부터 가장 아래까지 사람의 높고 낮음이 분명하고, 그것이 진리이던 시대에 미천한 지위의 한낱 노비가 신분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고려왕조 500년 동안 우리는 만적 외에 그러한 인물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조선시대의 임꺽정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만적의 항쟁은 그들이 지향한 이상이 원대하고, 세력의 조직화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저항보다도 격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실패하였지만 성패를 떠나 신분제 사회를 철폐하려 했던 노력은 높이 평가하여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