兪廕 | 1401 | 1482 | 高靈 |
점필재집(佔畢齋集) 김종직(金宗直)생년1431년(세종 13)몰년1492년(성종 23)자계온(季昷), 효관(孝盥)호점필재(佔畢齋)본관선산(善山)시호문충(文忠)
佔畢齋文集卷之二 / 兪處士墓誌銘
成化十八年壬寅(1482,성종13)冬十一月初三日。咸陽省谷之處士兪君。卒于家。得年八十有二。其孤好仁。以宗直相從於文苑甚久。且曾爲郡大夫。知厥考爲詳。故再以書乞銘。嗚呼。其可辭諸。君諱廕。字某。高靈縣人。其遠祖迪珍。爲吏于縣。子松奇。以一戶三丁。免吏籍。松奇四世孫甫。仕至通禮門祗侯。甫生堅伯。軍器少監。堅伯生信。監門衛中領郞將。卽君之考也。妣徐氏。保勝郞將安敬之女。建文三年辛巳(1401,태종1)六月日。君生于全羅之長水縣。早孤。徐夫人撫之。使就業。旣長。通經書大義。屢從鄕薦。連不得志。遂絶意榮利。而甘於澹泊。一畒之宮。一簞之食。晏如也。性又醞籍。與物無競。故鄕黨愛之。無間言。中年。喪其耦。再壻於咸陽李氏之門。因家焉。有子三人。年未壞齒。輒敎之以詩書。開導誘掖。不資外師。好仁中司馬試。大播華問。未幾。登第還鄕。
유호인(兪好仁) [문과] 성종(成宗) 5년(147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0위(30/33)
余方爲郡。
성종 | 1 | 1470 | 경인 | 成化 | 6 | 40 | 즉위 후 처음 개설한 經筵의 應選者 19인에 들다. ○ 겨울, 모친 봉양을 위하여 咸陽郡守가 되다. |
성종 | 3 | 1472 | 임진 | 成化 | 8 | 42 | 봄ㆍ가을로 鄕飮酒儀와 養老禮를 시행하다. ○ 8월, 〈遊頭流錄〉과 〈觀海樓記〉를 짓다. ○ 鄭汝昌ㆍ金宏弼이 와서 수학하다. |
성종 | 5 | 1474 | 갑오 | 成化 | 10 | 44 | 茶種을 심어 供上하다. 〈茶園詩〉를 짓다. |
성종 | 6 | 1475 | 을미 | 成化 | 11 | 45 | 十考를 받아 通訓大夫에 오르고, 承文院事가 되다. ○ 郡人이 生祠堂을 세우다. ○ 〈申文忠公文集序〉를 짓다. |
大合兪,李二氏之族黨。設榮宴于公堂。君蒼顏素髮。醉而起舞。新恩具袍笏。戴賜花。與歌姬數人。左右挾掖焉。一郡來觀者。咸咨嗟歆豔。由槐院,太常。選入蓬館。昵侍經幄。其季好禮。踵兄有詩名。亦以司馬高弟。雄賢關。今夫搢紳士大夫。一身已致休赫。而縱子弟於琴棊伎術之中。異時祖先之基業。蕩然無遺者。或有之。其視君。爲何如也。兪氏之先世。不甚顯。自君之子孫。其昌矣乎。君之未卒。郡以尊年聞于朝。卒之明年四月。將仕之命始下。嗚呼。可哀也已。君前配陳氏。司直普祥之女。後配李氏。錄事節之女。三男四女。竝李出。
好仁。其長也。好仁娶李敏道女。生二男。曰瑍。曰㻑。
好義娶朴碩女。生一男。曰㺹。
好禮娵劉永壽女。
長女適某。次適某。二女在室。
以明年十月某日。窆于某原。銘曰。
不能自膏。而發於嗣。斧藻德學。方將未已。人或不知。以爲騂角。我明其自。用誌玆石。
점필재집 문집 제2권 / 명(銘) / 유 처사의 묘지명[兪處士墓誌銘]
성화(成化) 18년 임인(1482, 성종13) 겨울 11월 3일에 함양(咸陽) 성곡(省谷)의 처사(處士) 유군(兪君)이 집에서 작고하니, 향년 82세였다. 그의 고자(孤子) 호인(好仁)이 종직(宗直)과는 문원(文苑)에서 서로 종유한 지가 매우 오래되었고, 또 종직이 일찍이 군대부(郡大夫)가 되어 자기의 고(考)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두 차례나 편지를 보내서 명(銘)을 청하였다. 아, 내가 사양할 수 있겠는가.
군(君)의 휘는 음(廕)이고, 자는 아무인데, 고령인(高靈人)이다. 그의 원조(遠祖) 적진(迪珍)은 그 고을의 아전이었는데, 그의 아들 송기(松奇)가 한 집에 세 정남(丁男)을 둔 관계로 이적(吏籍)을 면하였다. 송기의 사세손(四世孫) 보(甫)는 벼슬이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에 이르렀고, 보는 군기 소감(軍器少監) 견백(堅伯)을 낳았으며, 견백은 감문위 중령랑장(監門衛中領郞將) 신(信)을 낳았으니, 신이 바로 군의 고(考)이다. 비(妣) 서씨(徐氏)는 보승랑장(保勝郞將) 안경(安敬)의 딸이다.
건문(建文) 3년(1401, 태종1) 6월 모일에 군이 전라도(全羅道)의 장수현(長水縣)에서 태어났다. 공이 일찍 아버지를 여의자, 서 부인이 그를 어루만져 길러서 학업(學業)을 닦게 하였다. 자라서는 경서(經書)의 대의(大義)를 통하였는데, 누차 향천(鄕薦)에 응시했으나 연해서 뜻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영리(榮利)에 뜻을 끊고 담박(澹泊)한 생활을 달게 여겨 일묘(一畝)의 집과 일단(一簞)의 식생활로 편안하게 지냈다. 성품이 또 온화하고 너그러워서 남들과 다투는 일이 없었으므로, 향당(鄕黨)이 모두 군을 사랑하여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중년(中年)에 상배(喪配)를 하고, 재차 함양 이씨(咸陽李氏)의 가문에 사위가 되어 그대로 그 집에서 살았다.
아들은 3인을 두었는데, 이를 갈 나이도 되기 전부터 매양 시서(詩書)를 가르쳐 스스로 개도 유액(開導誘掖)하였고 바깥 스승에게 의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호인(好仁)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화려한 명성이 크게 전파되었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또 문과에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왔다. 이 때 내가 마침 군수(郡守)로 있으면서 유씨, 이씨 두 가문의 족당(族黨)들을 대거 회합시키어 공당(公堂)에서 영연(榮宴)을 베풀었는데, 이 때 군은 창안 백발(蒼顔白髮)로 취하여 일어나서 춤을 추자, 신은(新恩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이름)이 포홀(袍笏)을 갖추고 어사화(御賜花)를 머리에 꽂은 채로 가희(歌姬) 수인(數人)과 함께 좌우에서 부축하니, 와서 구경하던 온 군내(郡內)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며 부러워하였다.
호인은 괴원(槐院), 태상시(太常寺)를 거쳐 봉관(蓬館)에 선발되어 들어가 경악(經幄)에서 주상을 가까이 모시고 있다. 그의 막내 호례(好禮)는 형을 이어서 시명(詩名)이 있고, 또한 사마시(司馬試)에 고과로 합격하여 태학(太學)에서 우뚝하다.
지금 진신 사대부(搢紳士大夫) 가운데 자기 한 몸은 이미 현달하였으나, 자기 자제(子弟)들을 금기(琴棋) 등의 잡기(雜技) 속에 노닐도록 내버려둠으로 인하여 후일 조선(祖先)의 기업(基業)을 쓸어버린 듯이 없애버리는 경우도 간혹 있으니, 그런 사람을 군에 비교하면 어떠한가. 유씨의 선대는 그리 드러나지 않았으나, 군의 자손들로부터 창성해질 것이다.
군이 작고하기 전에 군(郡)에서 존년(尊年)으로 조정에 계문(啓聞)하였는데, 군이 작고한 다음해 4월에야 장사랑(將仕郞)의 교지가 비로소 내려왔으니, 아, 슬프도다.
군의 전배(前配) 진씨(陳氏)는 사직(司直) 보상(普祥)의 딸이고, 후배(後配) 이씨(李氏)는 녹사(錄事) 절(節)의 딸인데, 3남 4녀가 모두 이씨의 소생이고, 호인이 그 맏이이다. 호인은 이민도(李敏道)의 딸에게 장가들어 환(瑍)ㆍ계(㻑) 2남을 낳았고, 호의(好義)는 박석(朴碩)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변(㺹)을 낳았으며, 호례는 유영수(劉永壽)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아무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아무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 두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다음 해 10월 아무 날, 아무 언덕에 장사지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복록을 스스로 누리지 못하여 / 不能自膏
아들에게 복록이 발하였으니 / 而發於嗣
덕행과 학식 갈고 닦는 일 / 斧藻德學
앞으로 장차 다함이 없으리라 / 方將未已
남들은 혹 속을 알지 못하고 / 人或不知
성각이라고 말들을 하므로 / 以爲騂角
나는 그 유래를 밝혀서 / 我明其自
이 지석에 기록하는 바이다 / 用誌玆石
[주-D001] 포홀(袍笏) : 도포(道袍)와 홀을 이르는 말로, 즉 조복(朝服)을 의미한다.[주-D002] 성각 : 자식이 아버지보다 훨씬 훌륭함을 비유한 말. 춘추 시대 노(魯) 나라 염옹(冉雍)의 아버지는 아주 천하고 행실이 나빴으나, 염옹은 덕행(德行)이 뛰어났으므로, 공자(孔子)가 염옹을 두고 이르기를 “얼룩소[犂牛: 제사의 희생으로 쓰지 못하는 소임]의 새끼일지라도 색깔이 붉고 뿔이 반듯하게 잘 났으면, 비록 그를 쓰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산천은 그것을 버리겠는가.[犂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雍也》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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佔畢齋集卷之十八 / 詩 / 兪居士蔭挽章
醞藉兪居士。鄕閭孰不欽。家無三釜粟。經勝滿籝金。宰樹噓風急。桓碑隱霧深。射陰山上月。空照棘人心。
점필재집 시집 제18권 / [시(詩)] / 유 거사 음에 대한 만장[兪居士蔭挽章]
너그럽고 온화한 유 거사를 / 醞藉兪居士
향리에서 누가 흠모하지 않으랴 / 鄕閭孰不欽
집에는 삼부의 곡식도 없으나 / 家無三釜粟
서책은 상자 가득한 금보다 낫네 / 經勝滿籯金
묘목에는 바람이 급하게 불고 / 宰樹噓風急
환비에는 안개 깊이 잠기었는데 / 桓碑隱霧深
사음산 위의 밝은 달빛만 / 射陰山上月
부질없이 상제의 마음을 비추누나 / 空照棘人心
[주-D001] 삼부의 곡식 : 아주 작은 양의 곡식을 뜻함. 부(釜)는 용량의 단위로서 6두(斗) 4승(升)에 해당한다.
[주-D002] 환비 : 나무를 깎아 석비(石碑)처럼 만들어 묘혈(墓穴)의 네 구석에 세워서 하관(下棺)을 하도록 만든 장치를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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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 11 | 1465 | 을유 | 成化 | 1 | 35 | 2월, 嶺南兵馬評事가 되어 列邑을 순찰하고 題詠詩帖을 남기다. ○ 監司의 명으로 경주에 가서 秋丁釋奠初獻官이 되다. ○ 〈亨齋先生詩集序〉를 짓고 「慶尙道地圖誌」를 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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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彥迪 1491 1553 李迪 驪州 復古 晦齋, 紫溪翁 文元
정덕 12년 정축(1517, 중종12) 선생 27세
○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를 지었다.
1518년(중종 13) 경부터 시작된 후배 학자인 이언적(李彦迪)과의 성리학에 관한 논쟁
兪好仁 1445 1494 高靈 克己 㵢谿 文禧
[문과] 유호인(兪好仁) [문과] 성종(成宗) 5년(147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0위(30/33)
유호인(兪好仁) 극기(克己) 뇌계(㵢溪) 을축(乙丑) 1474 30 고령(高靈) 미상(未詳)
[생원] 유호인(兪好仁) [생원] 세조(世祖) 8년(146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유호인(兪好仁) 극기(克己) 뇌계(㵢溪) 을축(乙丑) 1462 18 고령(高靈) 미상(未詳)
[진사] 유호인(兪好仁) [진사] 세조(世祖) 8년(146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유호인(兪好仁) 극기(克己) 뇌계(㵢溪) 을축(乙丑) 1462 18 고령(高靈) 미상(未詳)
성종실록 성종 7년 병신(1476) 6월 14일(을유)
07-06-14[05] 사가 독서 문신으로 채수ㆍ권건ㆍ허침ㆍ유호인ㆍ조위ㆍ양희지 등이 발탁되다
○議政府、吏曹、館閣堂上擇賜暇讀書文臣以啓, 吏曹正郞蔡壽成均館直講權健、司憲府監察許琛、奉常寺副奉事兪好仁、及第曺偉、承文院正字楊熙止。
의정부(議政府)ㆍ이조(吏曹)ㆍ관각 당상(館閣堂上)이 사가 독서(賜暇讀書)할 문신(文臣)을 뽑아서 아뢰었는데, 이조 정랑(吏曹正郞) 채수(蔡壽)ㆍ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권건(權健)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허침(許琛)ㆍ봉상시 부봉사(奉常寺副奉事) 유호인(兪好仁), 급제(及第)한 조위(曹偉)ㆍ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양희지(楊熙止) 등이었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이상돈 (역) | 1981
曺漢輔 14?? 15?? 昌寧 忘機堂
[진사] 예종(睿宗) 1년(146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67위(97/100)
성종실록 성종 4년 계사(1473) 7월 28일(정사)
04-07-28[01] 사헌부에서 스승을 능멸한 성균관 유생의 죄를 아뢰고 처벌할 것을 청하다
○丁巳/司憲府啓: "成均館首善之地, 而師弟之間, 有父子之恩, 今生員任沚、崔希哲、金俊孫、曺漢輔、李兢, 憤長官生員寄齋, 一樣行楚, 極目揚說, 悖慢無禮。 而又唱爲詭激之說, 皷動諸生, 效衰世捲堂之事, 空館而去。 輕蔑朝廷, 大毁名敎, 罪犯深重。 若不痛懲, 頑悍之徒, 長惡不悛, 汙染風化, 非細故也。 請上項崔京哲, 決杖一百, 任沚拒逆不著, 加二等, 杖六十徒一年, 金俊孫、曺漢輔、李兢, 各杖九十收贖, 皆永永停擧, 以戒後來。" 從之。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성균관(成均館)은 수선지지(首善之地)로서 사제지간(師弟之間)에 부자(父子)의 은의(恩誼)가 있는데, 지금 생원(生員) 임지(任沚)ㆍ최희철(崔希哲)ㆍ김준손(金俊孫)ㆍ조한보(曹漢輔)ㆍ이긍(李兢)이 장관 생원(長官生員)이 재사(齋舍)에 기숙(寄宿)하는 것에 격분하여 똑같이 회초리로 때렸으며,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말하여 패만(悖慢)하고 무례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온당치 못하고 격렬한 말을 끄집어 내어 여러 생원(生員)들을 부추기고 움직여서, 쇠퇴한 세상의 권당(捲堂)의 일을 본받아서 성균관을 비우고 가버렸습니다. 조정(朝廷)을 경멸(輕蔑)하고 명교(名敎)를 크게 허물어뜨렸으니, 죄를 범한 것이 깊고 무겁습니다. 만약에 엄하게 징계하지 아니한다면 완악(頑惡)하고 사나운 무리들의 장차 악(惡)을 조장하고 뉘우치지 않아서 풍속과 교화(敎化)를 오염(汚染)시킬 것이니, 작은 연고가 아닙니다. 청컨대 위의 항목의 최희철은 결장(決杖) 1백 대를 때리고, 임지는 거역하고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니, 죄 2등을 더하여 장(杖) 60대에, 도(徒) 1년에 처하며, 김준손ㆍ조한보ㆍ이긍은 각각 장(杖) 90대를 속(贖)바치게 하되, 모두 영영 과거(科擧)를 정지하게 하여서 후래(後來)를 경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주-D001] 수선지지(首善之地) : 다른 곳보다 모범이 되는 곳.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채희순 (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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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생원(長官生員)이 재사(齋舍)에 기숙(寄宿)하는 것에 격분하여 똑같이 회초리로 때렸으며,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말하여 패만(悖慢)하고 무례하였습니다. ->장관(長官)이 생원(生員)과 기재(寄齋)유생을 똑같이 회초리로 때리는 것에 격분하여,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말하여 패만(悖慢)하고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거관(居館)하는 생원(生員)ㆍ진사(進士)및 기재(寄齋)와 사학 유생은 독서하는 일수
기재(寄齋): 성균관 유생(생원진사) 아닌 유생(사학유생기타유생)이 성균관에서 기거(起居)하며 공부하는 일.<명종실록(明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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葛川先生文集卷之二 / 文 / 㵢溪先生兪公行狀
公諱好仁。字克己。高靈縣人。曾大父諱堅白。軍器小監。大父諱信。中領郞將。考諱蔭。以處士終。年逾八旬。得階將仕。處士自長水娶李節女于咸陽。因家焉。正統乙丑。生公。公幼而聰睿。器宇天成。年纔逾紀。華聞已播。壬午。俱中司馬兩試。佔畢齋金先生爲郡倅。一見奇之。許以忘年。甲午捷科。補承文正字。以公名望素重。旋擢弘文正字。丙申。成廟命揀文臣。賜暇讀書。公與許琛,蔡壽,曺偉,權健,楊煕止實膺其選。世皆榮之。歷博士修撰。以親老乞養。乃拜居昌縣監。在縣三年。値武人爲方伯。所尙矛盾。居下考。成廟驚訝曰。好仁乃予經幄舊臣。爲人不宜至是。命訊其由。方伯難其對。以吟詩不輟。不顧民事爲辭。壬寅。丁內艱。服闋。拜典籍。轉工曹員外。乙巳。判書盧公公弼。遠接皇華于國界。公與木溪姜渾爲從事。有唱斯和。人咸服之。丙午。拜弘文校理。上設文臣都試。公爲第一。受表裏。謝恩日。上命製謝恩榮排律十二韻。公立就以進。上大加褒賞。公以母老辭職。拜義城縣令。上愛其才。命歲季錄所著以進。每覽。嘉嘆不已。嘗手書數句于御案以爲忼。且令監司賜米穀數十斛于其母。歲以爲常。秩滿。復入弘文爲校理。擢司憲府掌令。以母老且病。又乞歸養。上惜其去。與群臣議其允否。咸曰。好仁非徒才大。德邵年高。宜大用置左右。上曰。予意也。命召曰。予初愛汝。不欲遠離。今詢廷議。亦以爲然。當以予意。輦母來京。公承命。請母病不克行反命。上手札諭銓曹曰。好仁事君之日長。事親之日短。不可不從其志。特除晉州牧使。銓曹啓以晉牧未滿六期。爲好仁經除。有乖成憲。拜樂安郡守。公以遠辭。乃以陜川換之。在郡逾月。以疾卒。卽甲寅四月也。是歲二月。公在京師。夫人李氏。卒于咸陽之第。公哀悼過傷。頗損其精云。上聞訃震悼。命優賜賻物。俾克襄事。皆出於異數。其年冬。合窆于咸陽大匡之原。夫人考諱。敏道也。生二男三女。男長曰瑍。壬子進士。次曰㻑。幼歿。女長適朴叢。爲簽使。次適梁應麟。次適朴訥。庚午司馬。朴之適。㻑之歿。皆在公卒後。公忠孝淸白。出於天性。詞藻雄渾。筆力遒健。成廟之朝。號稱多士。而以公爲首。居家淸儉。不事產業。妻孥不免有窘。晏如也。性沈重簡嚴。常不動聲色。而子弟僕妾。畏之如神明。其在義城也。恩信大孚。民切去後之慕。愈久不忘。後有姓金縣令。圖公行蹟。作屛于客軒。其爲人景慕如此。嘗在鸞坡。上以御服出。與群賢討論經史。至夜分將罷。公熟睡未起。上解御衣覆之。其寵遇類此。世方想望大用。而公以將母之諗。不能一日安於朝廷之上。卒至天不假年。齎志以歿。資至於奉列。壽止於五十。而鶴髮在堂。黃口滿室。哀傷痛惜。下至走卒焉。疾革。語瑍曰。君子要須不欺君。吾於事君。實無所欺。汝若得一命。當以爲家法。此乃公平生所守也。家在㵢溪上。以㵢溪自號。有集若干卷行于世。人寶之如瓊琚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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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당집(虛白堂集) 성현(成俔)생년1439년(세종 21)몰년1504년(연산군 10)자경숙(磬叔)호용재(慵齋), 부휴자(浮休子), 허백당(虛白堂), 국오(菊塢)본관창녕(昌寧)시호문대(文戴)
虛白堂文集卷之七 男世昌編輯 / 序 / 㵢溪詩集序
詩難言也。言詩者論氣而不論理。非也。氣以行於外。理以守諸內。守於內者不固。則行於外者未免泛駕而詭遇。詩以理爲貴也。善爲詩者悟於理。故能不失根本。苟失根本。雖豪宕濃艶。雕鎪萬狀。而不可謂之詩也。自麗季至國朝。詩之名家非一。而能悟其理者蓋寡。平者失於野。豪者失於縟。奇者失於險。巧者失a014_473c於碎。俗習卒至於委靡而不回。吁。此則詩之不幸也。兪侯克已氏。金閨彥士也。少時。學詩於佔畢先生。先生以詩鳴於世。縉紳之士攀附而席餘光者無限。余亦與先生相友善。每聞先生之論人。以侯爲奇才。其後余入鑾坡。與侯相從非一日。耳其言而咀其詩。其詩深悟於理而自得。故篇篇有範。句句有警。米鹽醞藉。不落世之窠臼。譬如秋山。多骨少肉。奇峭無窮。而草木亦與之堅實。其得雅頌之遺音歟。昔。鉅鹿侯芭從楊雄授太玄法言。劉歆見其書曰。吾恐後人用覆醬瓿也。嚴厷謂桓譚曰。雄書能傳於後世乎。譚曰。凡人貴遠而賤近。親見子雲。祿位容貌不能動人。故輕其書。自雄沒至今四十餘年。而其書始行。當其時。雄未甚顯。而人未甚貴之也。所從學者惟芭。所歎服者惟譚。然猶流波遠曁而不泯。況今侯詩。佔畢之所稱。成廟之所深許。而膾炙於衆口者。其不覆醬瓿也明矣。所謂詩能窮人者。不遇知於世主。泯滅其跡耳。侯則際會文明。得遇聖君。而猶不達。信乎詩之能窮人也。侯之職位事蹟。不得垂於靑史。而所可傳者惟詩耳。其可不編而壽諸梓歟。見侯之稿。慨然抆淚而題之。丙辰(1496,연산군2)中秋。磬叔敍。
허백당문집 제7권 / 서(序) / 뇌계시집서〔㵢溪詩集序〕
시는 말하기 어렵다. 시를 말하는 자가 기(氣)를 논하면서도 이(理)를 논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기(氣)는 밖에서 행해지고 이(理)는 안에서 지키니, 안에서 지키는 것이 단단하지 않으면 밖에서 행해지는 것이 법도를 벗어나 정도를 잃는 것을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시는 이(理)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이(理)를 깨달았기 때문에 근본을 잃지 않는 것인데, 만약 근본을 잃는다면 비록 호탕하고 농염하게 온갖 형상을 아로새겼다 하더라도 시라고 할 수 없다.
고려 말엽에서 국조(國朝 조선을 지칭함)에 이르기까지 시로 이름난 대가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이를 깨달은 사람은 대체로 적었다. 평담한 것은 조야(粗野)한 문제가 있고 호방한 것은 번다한 폐단이 있으며 기이한 것은 험벽(險僻)한 문제가 있고 공교한 것은 쇄세(瑣細)한 폐단이 있어 속습이 끝내 시들해져서 회복하지 못하는 데 이르렀다. 슬프다! 이것이 시의 불행이라 하겠다.
유극기(兪克己) 씨는 금규(金閨)의 훌륭한 선비이다. 어렸을 때 점필(佔畢) 선생에게 시를 배웠는데, 선생은 시로 일세를 울려 진신지사(搢紳之士)들이 붙좇아 종유하여 선생의 후광을 입은 자들이 매우 많았다. 나 역시 선생과 서로 잘 지냈는데 매번 선생이 사람을 논평하는 것을 들으면 유후(兪侯)를 기재(奇才)라 여기셨다. 그 뒤에 나는 한림원에 들어가 유후와 상종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시를 음미해 보니 그의 시는 깊이 이(理)를 깨달아 자득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편마다 다 규범이 있고 구구절절 교훈이 있는데 기본 자질이 온자(醞藉)하여 세상의 상투적인 틀 속에 떨어지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가을 산에 바위는 많고 흙은 적어 기이하고 우뚝한 경치가 무궁하고 초목 또한 그와 더불어 튼튼하고 실하니 아무래도 아송(雅頌)의 유음(遺音)을 얻기라도 한 것인가?
예전에 거록(鉅鹿)에 사는 후파(侯芭)가 양웅(揚雄)을 종유하여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을 전수받았는데, 유흠(劉歆)이 그 책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후세 사람이 장독의 덮개로나 쓸 것 같다.”라고 하였다. 엄우(嚴尤)가 환담(桓譚)에게 말하기를 “양웅의 저서가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환담이 말하기를 “보통 사람은 오래된 것을 귀하게 여기고 근래의 것을 천하게 여긴다. 직접 양자운(揚子雲)을 만나 보니 그 녹과 지위, 용모가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여 그 책을 가볍게 여겼다. 그런데 이제 양웅이 죽은 뒤 40여 년이 되었는데 그 책이 통행되기 시작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때는 양웅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아 사람들이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종유하여 배운 자는 후파뿐이었고 탄복한 사람은 환담뿐이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흐르는 물결이 멀리까지 미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 유후의 시는 점필 선생이 칭찬하고 성묘(成廟 성종)께서 깊이 허여하신 것으로 여러 사람의 입에 회자되고 있으니, 장독 덮개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하겠다.
이른바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한다는 말은 당세의 임금에게 지우를 받지 못하여 그 행적이 민멸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유후는 문명(文明)한 때를 만나 성군에게 지우를 받았는데도 오히려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인 듯하다. 유후의 직위와 사적이 청사에 드리워지지 못하여 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시뿐이니, 어찌 편찬하여 판목에 새겨 영원히 전해지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후의 원고를 보고 개연히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글을 쓴다.
병진년(1496, 연산군2) 중추에 경숙(磬叔)은 서문을 쓴다.
[주-D001] 뇌계시집서(㵢溪詩集序) : 1496년(연산군2) 8월에 유호인(兪好仁)의 시집에 붙인 서문이다. 이(理)는 안에서 내면을 지키고 기(氣)는 밖으로 행해지므로 이(理)에 대해 깨달은 것이 있어야 시의 병통이 없다는 논리를 전면에 내세운 뒤에, 유호인의 시를 음미해 보니 이(理)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어 시에 규범이 있으면서도 상투적인 데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유호인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서 시를 배우고 칭찬을 받은 사실과 예전에 양웅(揚雄)이 매우 의미 있는 저술을 하였지만 당대에는 알아보는 사람이 적었음을 언급하면서 유호인의 시가 세상에 전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주-D002] 법도를 …… 못한다 : 원문은 ‘미면범가이궤우(未免泛駕而詭遇)’이다. 범가(泛駕)는 힘이 센 말이 궤철(軌轍)에 얽매이지 않고 멍에를 뒤집어엎는다는 말로, 상도(常道)를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漢書 卷6 武帝紀》 궤우(詭遇)는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내용으로, 사냥할 때 수레를 정도로 몰지 않고 짐승을 속여서 몰이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3] 유극기(兪克己) :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을 말한다.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임계(林溪)ㆍ뇌계(㵢溪)이며, 극기는 그의 자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7년(성종18)에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1490년에 《유호인시고(兪好仁詩藁)》를 편찬하여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성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고 1494년 장령을 거쳐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재직 중 병사하였다. 장수(長水)의 창계서원(蒼溪書院), 함양(咸陽)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주-D004] 금규(金閨) : 한(漢)나라 때 궁궐의 문인 금마문(金馬門)으로, 본디 학사(學士)들이 대조(待詔)하던 곳이었는데, 전하여 조정(朝廷)을 가리킨다.
[주-D005] 점필(佔畢) 선생 :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을 말한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계온(季昷)이다. 밀양(密陽) 출신으로, 점필은 그의 호인데 흔히 점필재(佔畢齋)라고 한다. 1459년(세조5)에 문과에 급제하고, 좌부승지ㆍ홍문관 제학 등을 지냈다. 고려 말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숙자(金淑滋)의 아들로 도학과 문장에 두루 뛰어나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남효온(南孝溫)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그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뒷날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원인이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저서에 《점필재집》이 있고 찬집한 책으로 《청구풍아(靑丘風雅)》, 《동문수(東文粹)》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주-D006] 진신지사(搢紳之士) : 홀(笏)을 큰 띠에 꽂은 사람들로, 조정의 벼슬아치를 말한다.
[주-D007] 붙좇아 종유하여 : 원문은 ‘반부(攀附)’이다. 반부는 반룡부봉(攀龍附鳳)의 준말로, 제왕 혹은 명사(名士)에게 몸을 의탁해서 이름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 〈연건(淵騫)〉에 “용의 비늘을 끌어 잡고 봉의 날개에 붙는다.〔攀龍鱗, 附鳳翼.〕”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 거록(鉅鹿)에 …… 전수받았는데 : 양웅은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의 사람으로, 자가 자운(子雲)이며, 성도(成都)에 살았다. 젊어서부터 문장을 잘하여 이름을 떨쳤는데, 특히 고자(古字)를 아주 잘 알았다. 양웅이 병들어 집에 있을 적에 가난하여 좋아하는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런데 거록에 사는 후파(侯芭)란 사람이 항상 술을 가지고 다니면서 양웅에게 어려운 고자를 물었으며, 《법언(法言)》ㆍ《태현경(太玄經)》 등을 배웠다. 후일 양웅이 죽자 후파는 그의 무덤을 만들고 3년 동안 거상(居喪)하였다. 《漢書 卷87 揚雄傳贊》
[주-D009] 유흠(劉歆)이 …… 하였다 : 《한서》 권87 〈양웅전 찬(揚雄傳贊)〉에 나온다. 유흠은 당시 양웅에게 “부질없이 사서 고생하는군!〔空自苦〕”이라 하며 조롱하였으나 양웅이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유흠은 한(漢)나라의 대학자 유향(劉向)의 아들로, 부친의 업을 계승하여 많은 저작을 남겼으나 왕망(王莽)의 찬탈을 돕고 나중에 셋째 아들이 왕망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또 장차 화가 닥칠 것을 예견하고 거의(擧義)하려다가 계획이 누설되어 자살하였다. 《漢書 卷69中》
[주-D010] 엄우(嚴尤)가 …… 하였다 : 이 이야기도 역시 《한서》 권87 〈양웅전 찬〉에 나온다. 엄우는 당시 납언(納言) 벼슬에 있던 관리이다. 환담(桓譚)은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때 급사중(給事中)으로 있으면서 직간(直諫)을 하다가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육안(六安) 고을로 쫓겨 가던 중에 죽었는데, 《신론(新論)》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後漢書 卷28》 어려서부터 특히 고학(古學)을 좋아하여 양웅과 유흠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양웅의 저술을 폄하하는 당시의 풍조에 정면으로 맞서서 그의 저술이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이라고 극력 변호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태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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葛川先生文集卷之四 附錄 / 行狀[鄭惟明]
先生娶高靈兪氏。卽司憲府掌令㵢溪先生之孫。其考進士諱瑍。其妣昌寧曺氏。卽忘機堂漢輔之女。弘治甲寅(1494,성종25)九月初五日。實夫人初度也。夫人性醇德惠。佐先生無違行。先先生十三年(1570,선조3)卒。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71 | 부인상을 당하다. ○ 겨울,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오다. ○ ‘正心修身’을 아뢰다.〈庚午召對草〉 |
子男三人女一人。男長二人皆夭。女適蔚山郡守李求仁。亦早歿無嗣。次男承祚。娶訓導愼準之女。生三男四女。男長曰眞㦂。次曰眞𢡮。次曰眞惷。眞㦂娶士人河世寶之女。女長適士人周國新。餘皆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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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陽郡誌 / 生進
成宗 林彦範 增大仝子丙午(1486,성종17)生員官判官
兪瑍 好仁子壬子(1492,성종23)進士
임득번(林得蕃) [진사]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37위(67/100)
中宗
兪瓚 好仁侄丁酉(1537,중종32)進士
咸陽郡誌 / 姓氏 / 寓居 朝鮮
林薰 號葛川恩津人進士得蕃子中宗朝爲進兪瑍之壻居郡西竹館後移安陰
임훈(林薰,1500~1584) [생원] 중종(中宗) 35년(154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1위(6/100)
명종 | 8 | 1553 | 계축 | 嘉靖 | 32 | 54 | 館薦으로 社稷署 참봉이 되다. |
명종 | 9 | 1554 | 갑인 | 嘉靖 | 33 | 55 | 集慶殿 참봉이 되다. |
명종 | 21 | 1566 | 병인 | 嘉靖 | 45 | 67 | 7월, 李恒ㆍ成運ㆍ韓脩ㆍ南彥經ㆍ金範 등과 함께 ‘經明行修之人’으로 뽑혀 六品職에 제수되어 彥陽縣監이 되다. ○ 9월, 상이 思政殿에서 六賢을 인견하고 治道를 묻자, ‘修身之說’로써 답하다. |
명종 | 22 | 1567 | 정묘 | 隆慶 | 1 | 68 | 상이 災異로 인하여 求言하자, 彥陽縣의 여섯 가지 폐단을 아뢰다.〈彥陽陳弊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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葛川先生文集卷之三 / 文 / 書兪子玉遊頭流錄後
以身履之者。不如以心領之。以目寓之者。不如以神會之。朱均躬趨堯舜之庭。卒不能承堯舜之道。而吾夫子乃能發朗於千載之後。壤桑親炙夫子之儀。終未達夫子之道。而程朱氏乃能發蘊於衰世之末。是知求其眞者。但論其心不心。而身不身不必論也。雖然。使不有傳堯舜夫子之道。以垂于後人如典謨論語者。則程朱氏亦孑孑而無所據矣。山水者。天地間一無情之物。而厚重周流。實有資於仁智之樂矣。是以。世之求道者。不特於堯舜孔氏。而未嘗不之此焉。吾東方山水名天下。論其勝者。必以頭流爲之最。世之治芒屩竹杖以事登討者。日不知其幾許。而徒身履而目寓之如朱均,壤桑者。又不知其幾耶。
若子玉氏。余之勝友也。螢牕談古之餘。未嘗不以遊茲山。一蕩胸懷。爲惓惓囑余。余亦未嘗不惓惓。而紅塵汩沒。人事蹉跎。迄未得一遂焉。
歲在己丑(1529,중종24)秋。余自花林抵嶺。余與子玉氏別有年矣。火急邀面焉。相與敍寒暄畢。子玉氏手袖遊山錄一卷以示余。則子玉氏曾於此歲之孟夏。携同志八九輩。探討頭流之勝。歸而爲實錄者也。其所以逍遙跌宕於登高騁目之時。徜徉閑適乎尋幽訪古之際者。甚詳且雅。而同遊諸子。亦皆一時之彥也。身不爲徒履也。目不爲徒寓也。其得仁智之樂爲甚鉅。余乃廢書自恨曰咄。羈纏世務。麭繫一隅。不得與吾友共此幽奇焉。良辰勝景。君獨得之而我獨辜負。是余之不幸耶。抑亦造物之猜耶。旣而徐自解曰。夫子雖不得親承於堯舜之顏。而有典謨之傳。則亦可以領以心矣。程朱氏雖不得身薰於孔氏之門。而有論語之傳。則亦可以會以神矣。其視朱均,壤桑則萬有間矣。今余縱不得身歷於茲山之奇勝。而斯錄之傳。卽堯舜之典謨也。夫子之論語也。明窓茶罷。讀了斯錄。怳然如身登天王。眼俯澣海。浩氣增其什倍。天下小於目中。雙溪靑鶴。逞奇於顧眄。伽倻般若。呈勝於左右。超鴻濛而混希夷。揖道侶而拉仙曹。當此之時。余非塵世之余也。雖不得如子玉氏之身心兼得。視諸如朱均,壤桑者。則吾亦無足羨矣。噫。芒鞋竹杖。吾亦有所備矣。奇峯絶壑。山亦無所損矣。吾生早晩。倘得一遂其志願。則雖如子玉氏者。亦不敢詑余。而紅塵世務之牽。果如前所云則余志之遂否。又惡可必也。歆艶之不盡。詠嘆之不足。於是乎題其錄後以歸之。友人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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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陽郡誌 / 生進 / 中宗
兪瓚 好仁侄丁酉(1537,중종32)進士
황준량(黃俊良) [생원] 중종(中宗) 32년(153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67위(97/100)
중종 32 1537 정유 嘉靖 16 21 생원시에 합격하다.
중종 34 1539 기해 嘉靖 18 23 庭試에서 直赴會試하다.
중종 35 1540 경자 嘉靖 19 24 文科에 乙科로 급제하다. 學諭가 되고 星州 訓導가 되다.
인종 1 1545 을사 嘉靖 24 29 尙州 敎授가 되다. ○ 지리산을 유람하고, 장편시 〈遊頭流山紀行篇〉을 짓다.
咸陽郡誌 / 姓氏 / 寓居 朝鮮
林薰 號葛川恩津人進士得蕃子中宗朝爲進兪瑍之壻居郡西竹館後移安陰
임훈(林薰,1500~1584) [생원] 중종(中宗) 35년(154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1위(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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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집(錦溪集) 황준량(黃俊良)생년1517년(중종 12)몰년1563년(명종 18)자중거(仲擧)호금계(錦溪)본관평해(平海)특기사항이황(李滉)의 문인
x錦溪先生文集卷之一 外集 / 詩 / 龍遊潭。與兪同年子玉偕行。
流水桃花滿洞春。聯裾劉阮共尋眞。潭邊袖盡驪珠去。爲報神蛟莫我嗔。
黃俊良 | 1517 | 1563 | 平海 | 仲擧 | 錦溪 |
중종 | 32 | 1537 | 정유 | 嘉靖 | 16 | 21 | 생원시에 합격하다. |
황준량(黃俊良) 중거(仲擧) 금계(錦溪) 정축(丁丑) 1540 24 평해(平海) 풍기(豊基)
황준량(黃俊良) 중거(仲擧) 금계(錦溪) 정축(丁丑) 1537 21 평해(平海) 풍기(豊基)
금계집 외집 제1권 / 시(詩) / 용유담에서 동년 유자옥과 함께 가다〔龍遊潭與兪同年子玉偕行〕
흐르는 물에 복사꽃 가득한 동천의 봄 / 流水桃花滿洞春
유완이 서로 손잡고 진경을 찾았네 / 聯裾劉阮共尋眞
용유담에서 소매 가득 주옥편 담아가니 / 潭邊袖盡驪珠去
신룡이여 우리들을 꾸짖지 마소서 / 爲報神蛟莫我嗔
[주-D001] 용유담(龍遊潭) : 《연려실기술》 별집 권16 〈지리전고(地理典故)〉 함양의 지리산에 “북쪽에 영원동(靈源洞), 군자사(君子寺), 유점촌(鍮店村), 벽소운동(碧霄雲洞), 추성동(楸城洞)이 있는데 모두 경치 좋은 곳이다. 산골물이 합쳐서 임천(瀶川)이 되고, 흘러 내려가서 용유담이 된다. 물은 군(郡)의 남쪽 25리 지점에 이르러 엄천(嚴川)이 된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면 개천과 돌의 경치가 매우 기이하다.”라는 기록이 있다.[주-D002] 유자옥(兪子玉) : 임훈(林薰)의 《갈천집(葛川集)》에 〈서유자옥유두류록후(書兪子玉遊頭流錄後)〉가 실려 있으나, 구체적으로 누군지 알 수 없다.[주-D003] 유완(劉阮) : 동한(東漢) 때 천태산(天台山)의 선경에 들어가서 약초를 캐다가 선녀를 만나 반년을 살았다는 유신(劉晨)과 완조(阮肇)를 말한다. 여기서는 황준량과 유자옥을 빗대어 한 말이다.[주-D004] 주옥편(珠玉篇) : 원문의 여주(驪珠)는 검은 용〔驪龍〕의 턱 밑에 있다는 보주(寶珠)인데, 이것은 구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뛰어난 시문(詩文)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백낙천(白樂天), 유우석(劉禹錫) 등 여러 사람이 모여서 금릉회고(金陵懷古) 시를 짓다가 유우석이 먼저 아름다운 시를 지으니, 다른 이들이 “동자(童子)가 용의 여의주〔驪龍珠〕를 얻었으니 나머지의 조개껍데기를 무엇에 쓰랴.”라고 하면서 붓을 놓았다고 한다. 이후 여주는 훌륭한 시, 즉 주옥편을 가리키게 되었다.[주-D005] 용유담에서 …… 마소서 : 용유담의 절경을 시편 속에 모두 담아간다고 하여 신룡(神龍)이 우리를 꾸짖지 말라고 한 것이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강성위 (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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葛川先生文集卷之二 / 文 / 擬上陜川倅書
月日。某謹頓首百拜獻書于陜川大人。伏以賞罰者。君子所以經理斯世之具。而其施之必加謹焉。蓋賞失其功。則無以勸其人。罰非其罪。則無以懲其人。然而賞失其功者。其害止於無以勸其人而已。罰非其罪則人將含憫抱冤。可以傷天地之和。可以致人心之離。誠非治世之細故也。書曰。功疑惟重。罪疑惟輕。豈非其賞寧失於重。而其罰決不可非其罪歟。今者某之罪狀。誠不可以惟輕歟。其罰誠不可以非其罪歟。夫所謂雇工者。實是窮民之無告而依人以爲命者也。士子之貧困而賴是以爲生者也。是則國憲之勿禁二人以下者。爲窮民之遂其生也。爲貧士之安其業也。其意豈不曲盡人情哉。然而間有豪猾之輩。罔念國憲之有限。必須多占以充其所欲。故國家又設推刷之法。以發其踰制之罪。所以制其奸也。然則某之戶雖曰三人。而
一者今年已八十二歲。而其死已三年矣。其老而除其役者。在於二十年之前。
一者窮無以濟其生。逃亡已在九年之前。
一者今年六十有三而前太守審其爲篤疾之人。特免其役。是則某之戶名則三。而實無其一也。如曰。今雖無實。而接三人之時已久云則又有其說焉。
夫一人之老除。在於二十年之前。而二人之現付。在於十年之前。是有其二者。猶可說也。而有其三者。在何時歟。況二人之中。一者之逃已九年。則亦不可謂有其二也。一者之存。又以年老而除軍。篤疾而免役。則亦不可謂有其一也。以無一之戶。蒙有三之罪。是可謂罰以其罪歟。使相以爲此法之行。不可不審其情僞。特命大人以覈其實。則爲大人者。又不可不審其意也。夫以死爲存。以逃爲有。以老疾爲實。必充其三人之數而欲加罪。豈大人慈祥愷悌之本心哉。意必有奸人之喜陷人者。措飛語。設淫辭以聞於大人。而大人偶不意其誣也。夫人在世。豈盡同流合汚。而無所好惡哉。旣有所好惡。則聞一譽。不可以善其人。聞一毀不可以非其人。要在推之以是實。而質之以是法而已。某之有三者已爲虛。有二者非其實。有一者又無其實。而國憲之內。必須三人以上者抵罪。則大人盍亦推其實而察其法歟。決不可以徇人之毀譽而加之罪矣。
某乃㵢溪先生之胤也。㵢溪之負重望於斯文久矣。其家之有訓。豈是冒行非義。靦然於士林哉。
某亦早擢蓮榜。馳譽斯文。士林咸有鳳毛之期。鄕曲皆稱謹愿之士。卽今行年已六十有九矣。生平素性。不與物忤。顧畏物論。如避豺虎。雖不繼箕裘之大名。如曰不負庭訓。則某實有焉。今也以無實之罪。獲非情之罰。則一身之冤。已不可言矣。大人之行法。恐無以懲其人也。㵢溪之後。在子惟某一人而已。單形隻影。僅守先隴。喬木殘園。賴是以保。今若蓋覆黯黮。流陷大罪。則不徒㵢溪之魂飮泣於冥冥。抑恐斯文之恨難洩於無窮也。某之父某。亦丁卯春司馬也。實與大人令弟。有同年之分。斯文骨肉之恩。轉相締結。此所以忘其狂僭。訴冤於左右者也。大人其亦垂仁採納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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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彥迪 1491 1553 李迪 驪州 復古 晦齋, 紫溪翁 文元
嶠南誌卷之二十一 永川郡 校院
滄洲書院 在郡南蒼水里享忠貞公曹尙治純祖癸 未追享忘機堂曹漢輔文忠公曺漢英屛厓曺善長
曺漢輔 14?? 15?? 昌寧 忘機堂
曺漢英 1608 1670 曺夢錫 昌寧 守而 晦谷, 西園 文忠 夏興君
曺善長 1661 1726 昌寧 仁伯 屛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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嶺誌要選 ( 영지요선 )저자:崔錫鳳 ( 최석봉 ) 생몰년 : 未詳 - 未詳발행사항:[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 1931형태사항:71卷6冊
嶺誌要選卷之一 左道
慶州 京七百八十里○營一百六十里○戶一萬七千餘戶○結一萬四百餘結○還穀一萬八千餘石○軍一萬五千餘名
〔沿革〕本新羅古都國號徐耶伐後改今名一云斯羅 斯盧鷄林東京樂浪月城〔山川〕狼山在 東九里鎭山○仙桃山在西七里○金鰲山在南 里一名南山○兄山在安康○斷石山在西二十五里金庾信得神劍試斷大石疊積如山○紫玉山在 安康距府五十里晦齋李彦迪所居○飛鶴山在神光○咽薄山在南三十五里金庾信祈兵法處○鵄述嶺在南五十里○瓢巖在東北五里李謁平所降處○三勝山在安康鄭克後構書堂○道德山在紫 玉山上有場巖中有斗德庵○華蓋山玉山書院主 山○雪倉山在安康良佐村主山○昆弟山在安康 ○峨眉山在南七十里禱雨有應○太華山在杞溪 ○龍巖在神光○達城川有二源一出大峴一出背 法○虎邑川源出飛鶴山○竹長川源出靑松〔官舍〕 琴鶴軒 東軒 鎭營有營將○客舍社稷堂幷邑皆有之故以下不錄○崇德殿朴氏始祖王所奉有參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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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惠殿金氏始祖王所奉有參奉〔坊里〕邑內六坊 ○東面路東三坊○路西二坊○南面路東二坊○ 路西二坊○西面路東二坊○路西二坊○川北二 坊○安康縣江東三坊○江西三坊○神光縣一坊 ○杞溪縣三坊○竹長縣一坊○北安谷縣二坊〔驛〕 〔路〕仇於在東四十八里○朝驛在東二十五里○沙 里在北六里○仁庇在北七十六里○鏡驛在西四 十里○阿火在西四十里○牟梁在西二十里○義 谷在西六十里幷長水屬○奴谷在南二十六里○ 仍甫在南五十五里幷黃山屬○六驛在北七十五里松羅屬〔場市〕邑市 二日七日 安康 四日九日 〔土産〕白礬鰒 文魚水璊瑚水晶〔古跡〕辰韓六部一曰閼川 楊山村其長謁平降于瓢巖儒理九年改六部名賜 姓李二曰突山高墟村其長蘇伐都利降于兄山賜 姓崔三曰茂山大樹村其長俱禮馬降于伊山賜姓 孫四曰觜山珍支村其長智伯虎降于花山賜姓鄭 五曰金山加利村其長祇沱降于明活山賜姓裵六 曰明活山高耶村其長虎珍降于金剛山賜姓辥○ 楊山蘿井在南七里漢地節元年高墟村長望羅井 傍林間有白馬跪拜狀卽觀之馬忽不見有大卵剖之嬰兒出焉收養之年十三六部人立爲君稱赫居 世以大卵如匏以朴爲姓○始林在南四里脫解王 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鷄鳴聲遣大輔瓠公視之 有金櫝掛樹枝白鷄鳴於其下王取櫝開之有小男 兒在王喜乃收養名閼智以其出於金櫝故姓金氏 名其林曰鷄林〔亭閣〕鳳凰臺在南門外羅王所遊處 ○獨樂堂在玉山晦齋別墅有觀魚臺詠歸臺濯纓 臺澄心臺洗心臺○雙碧亭在玉山○雪川亭在良 佐村郡守李宜活所構○六宜堂在東三十里縣監 崔繼宗所構○萬歸亭在安康縣蔣惟亮所構○二樂堂在金鰲山任勩所構○光風樓府尹朴守弘所 創〔院宇〕西岳角干金庾信弘儒侯薛聰文昌公崔致 遠○玉山晦齋李彦迪○金鰲梅月堂金時習○影 堂敬順王〔人物〕薛聰字聰智新羅神文王時翰林高 麗顯宗時贈弘儒侯從祀文廟○崔致遠號孤雲黃 巢之亂高騈爲諸道兵馬都統辟爲從事高麗顯宗 時贈文昌侯從祀文廟○李齋賢號益齋高麗門下 侍中鷄林君配食恭愍廟庭○李存吾字順卿號石 灘以正言入侍見辛旽與王對牀叱之曰老僧何得 無禮如此旽惶駭不覺下牀王怒貶長沙監務憂憤成疾而卒年三十一王思其忠贈大司成○金自粹 號桑村辛禑初以正言論事竄突山逮我朝開國堅 臥不起太宗以刑判徵乃歎曰國亡與亡義也吾 自有死所矣至廣州秋嶺遺命死便埋此遂自裁蓋 圃隱墓在秋嶺也後子孫豎碣書本朝官銜風雷拔 而去之○孫昭字日章佔畢從遊登己卯賢良科吏 參諡襄敏○金時習字悅卿號梅月堂世祖卽位 之後徉狂爲僧寓卜于金鰲山○崔淑生登第能詩 文尤工四六號盎齋○孫仲暾昭子字泰發號愚齋 吏判諡景節佔畢門人○李彦迪驪江人字復古號晦齋從祀文廟○李彦适彦迪弟字子容號聾齋以 孝薦除察訪
○曹漢輔進士號忘機堂博覽古書從事文學而所見流於禪學晦齋作書以辨之
○權德麟字君瑞號龜峰正郞晦齋門人○李全仁晦齋庶 子字敬夫號潛溪禮賓正○李宜潤晦齋孫字粹然 號無忝堂寒岡門人○崔震立致遠後字士建號潛 窩壬辰年二十五以白衣倡義立勩武工參丙子殉 節險川事在尊周彙編諡貞武旌閭從祀大報壇○ 鄭克後烏川人字孝翼號雙峰薦師傅旅軒門人○ 文應星南平人壬辰權奉聖殿東西廡位版于紫玉山中後特除參奉○ 別附 金生僧人也自幼能書年踰 八十猶操筆不休隷書行草皆入神學士洪灌奉使 入宋以金生行草一卷示翰林楊球李革二人大駭 曰不圖今日復見王右軍手書灌曰此乃新羅金生書也二人笑曰天下除右軍焉有妙筆如此哉○崔 洛府吏也壬亂擔運事蹟案藏置于深僻地〔寺刹〕芬 皇寺在東五里○佛國寺在吐含山○祇林寺在含 月山○柏栗寺在金剛山○天柱寺在月城○錫杖 寺在北十里○法光寺在神光○天龍寺在高位山 ○鍪藏寺在東北三十里○茸長寺在金鰲山詩僧雪岑所居 雪岑俗名金時習 淨惠寺在紫玉山晦齋少時肄業於斯○斗德庵在淨惠寺西北壬亂鄕校位版權 奉於此○遠願寺在鳳棲山○開善寺在金鰲山○ 深源寺在西七十里○黃龍寺在東三十里○斷石寺在斷石山○金谷寺在北二十里○安谷寺在杞 溪縣○大屯寺在鵄述嶺○密谷寺在北〔三綱〕金虎 僉使壬辰首倡義旅殺賊數千餘級竟爲賊炮所殺 ○白以昭出身丁酉力戰死○李葩秀芬秀兄弟壬 辰皆力戰死芬秀妻金氏亦拒賊被死○崔奉天壬 辰以戰功特除水營虞侯倉巖之戰力戰死○李希龍壬亂承命覘賊至忠州遇賊戰死子文軫聞父 死誓心報讐直向忠州行至新寧又遇賊力戰死○ 權復興壬亂以足蹇擯不與於義旅發憤備戰馬率 家僮直向釜山馳入賊陳劍折矢盡爲賊所害妻柳 氏絶食而死○奇別崔震立奴也隨震立同死險川 之戰及尋屍屍在其主之側○孫順新羅人有小兒 每奪母食欲埋兒掘地得鍾鍾聲聞王宮王使人審 之賜粳米五十石○許調元年十二所指血和藥以 愈父疾○南得溫廬墓○金允孫父爲虎攫允孫挺 身追虎左手扼其胡右手塞其口因擊殺之父得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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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應璧應奎應井兄弟三人廬于墓側常立階上 而哭三人當足處皆穿深數寸畜犬係書三人各通 家信○李承曾生員廬墓時劇賊八龍徒黨指點相 戒曰此孝子居也愼勿輕動○崔震幹壬辰倭欲刃 其祖母震幹奔救同死妻鄭氏自縊○李氏曹英妻 盜刃其舅以身翼蔽曰願殺我無害舅盜義而釋之 ○張莫同賤隷也事繼母至孝壬亂討賊立功○徐 思遠壬亂父爲賊所害誓必復讐入賊中力戰死〔題〕 〔詠〕鄭樞詩宮省五十世衣冠一千年英雄水朝海文 物草連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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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보(曺漢輔)
유교인물
조선전기 무극태극논쟁을 벌인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망기당(忘機堂). 할아버지는 조상치(曺尙治)이다.생애 및 활동사항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으나, 1473년(성종 4) 생원 임지(任沚)·최희철(崔希哲) 등과 함께 성균관 관원들을 배척하고 동맹 휴학을 했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이후 많은 경전을 두루 섭렵하며 학문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마침내 명유(名儒)가 되었다. 특히, 성리학에 깊이 침잠했으며, 불학(佛學)에도 이해가 깊었다.1518년(중종 13) 경부터 시작된 후배 학자인 이언적(李彦迪)과의 성리학에 관한 논쟁은 우리나라 초유의 것으로 학계의 주목을 많이 끌어 왔다. 조한보의 학문과 사상은 이언적의 문집인 『회재집(晦齋集)』에 수록된 서찰 등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데, 대체로 도교나 불교 사상에 가까운 경향을 보이고 있다.조한보는 존양(存養)을 말함에 있어 “심(心)이 무극의 경지에 소유(逍遊)해 허령의 본체로 하여금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삼는다.(遊心於無極之眞, 使虛靈之本體, 作得吾心之主)”, “천지만물로 하여금 나를 조종(朝宗)하게 해 운용에 막힘이 없게 한다.(使天地萬物朝宗於我, 而運用無滯)”, “무극태허로써 오심(吾心)의 주(主)로 한다.(以無極太虛之體, 作得吾心之主).”라고 하여 도가 사상에 가까운 경지를 취하였다.수양 공부의 방법으로는 “경(敬)을 주하여 심(心)을 존(存)함으로써 위로는 천리에 달한다.(主敬存心, 而上達天理)”라고 하여 선가(禪家)의 돈오(頓悟)에 가까운 견해를 취하고 있었다. 또한, 태극을 무극태허로 해석하고 “태허의 본체는 본래 적멸이다.(太虛之體本來寂滅)”라고 하여 불가의 진여적멸(眞如寂滅)의 열반경(涅槃境)을 태허의 본체, 즉 도체(道體)로 보았다.조한보의 이와 같은 학설은 이언적으로부터 유자(儒者)의 설이 아니라고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이언적은 태극 위에 다시 무극이라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없으며, 도나 태극은 지고지묘(至高至妙)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근지실(至近至實)한 데 있기 때문에 이단(異端)의 공적(空寂)에서는 구할 수 없다는 말로 그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조선유학사』(현상윤,민중서관,1949)
집필자집필 (1995년)이민식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한보(曺漢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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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암집(癡庵集) 남경희(南景羲)생년1748년(영조 24)몰년1812년(순조 12)자중은(仲殷)호치암(癡庵), 지연거사(止淵居士)본관영양(英陽)특기사항이상정(李象靖)의 문인.
癡庵先生文集卷之九 / 傳 / 忘機堂曺公傳
孔子曰知者過之。愚者不及。不及天下皆是。過者不易得。大抵皆才高者也。孔子所謂過者尙矣。後世之學。莫過於禪。而其說近理。故才高者往往中其毒。明道,橫渠所不免。况其下者乎。然而其終也正焉則不咎其始。君子貴遷善也。世論東方學術。或以忘機堂曺公爲近於禪。然尙有以爲晦齋先生門人而載於淵源錄。由始言之。其學誠不無可議者。由終言之。安知不見正於先生也。余悲文獻之無徵也。
忘機堂曺公。名漢輔字逸。其先昌寧人。新羅駙馬繼龍。其鼻祖也。高麗太師昌寧府院君。自是簪纓奕舃。有八平章九少監。至益淸官至左政丞。與益齋李先生齊賢同心秉政。稱麗朝名相。謚襄平。公高祖也。曾祖信忠左翼兵馬使。不仕本朝。祖尙治端廟朝集賢殿副提學也。光廟卽位。拜禮曹參判。不赴賀班。致仕南下。聞端廟昇遐。杜門自盡。今上贈謚忠貞。父變雍初筮仕。六臣事作。堅卧不出。公生於累世忠義學問之家。資禀甚高。見解非俗儒所及。嘗補上舍生。尋擢第見罷。不復應擧。築室於東京之虎溪上。閉門讀書。以斯學自任。同時交遊。有若冲齋權先生晦齋李先生。與冲齋論一本萬殊之理。與晦齋講無極太極之說。
贊曰忘機堂集不傳無可考。考之晦齋先生書。其立說異於象山。先生許其本於濂溪之旨。病其高遠。累書往復。公於無極上去遊心字。於其體至寂下去滅字。第三書後。又去寂滅字。先生尙病其先立其體然後下學人事之語。有第四書。書止於此。豈因公病根盡除而然歟。公之爲先生弟子。或者以是故也。夫師弟子之義重矣。授業解惑之謂師。聞道之謂弟子。不可加於道不同者。而長少之分又異。先生嘗稱小子。非公悔悟心服。自稱弟子。其誰曰門人。淵源錄成於寒岡鄭先生手。寒岡奚從而知其然也。盖嘗借觀公集。豈見公見正於晦齋先生歟。若然公不害爲朱門之李伯諫。且晦齋嘗寄詩公之子弘度。說及洙泗源流之傳。公之學卒歸之正而有家傳之美然後。方可以言此。此可以知公矣。後之人。其無急乎攻公。而惟二先生詩若錄是信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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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집(淵齋集) 송병선(宋秉璿)생년1836년(헌종 2)몰년1905년(고종 42)자화옥(華玉)호연재(淵齋), 동방일사(東方一士)본관은진(恩津)소자구범(九範)시호문충(文忠)
淵齋先生文集卷之四十 / 墓表 / 忘機堂曺公 漢輔 墓表
忘機堂曺公。學問事行。世則遠。有所不可徵者。東京志曰。公博覽古書。而流於禪學。晦齋先生。作書辨之。蓋先生與公論太極無極之說也。然一辨而變其舊見。再辨而頗有新得。漸掃糠粃。以就往聖之軌範。則此豈非公聞義能徙之勇乎。故晦齋又以爲其論甚高。本於濂溪之旨。而不無過智之意。觀此。亦可以知公之爲公也歟。又按世譜。有曰。公氣宇莊嚴。目光如電。人皆畏慴。制行謹葸。所居有巖下徑。終身不由焉。嘗補上舍生。又擢文科。尋見罷。築室於東都之虎溪。閉門讀書。與晦齋及權冲齋。爲道義之交。古人云。不見其人。視其友。斯尤驗其爲君子儒也。公諱漢輔。昌寧人。曺氏。皆祖新羅駙馬繼龍。累公累卿。至左政丞襄平公諱益淸。爲麗朝名臣。於公爲高祖。曾祖諱信忠。郡事。入我朝。徵而不起。祖諱尙治。副提學。自靖于莊光之際。贈諡忠貞。考諱變雍。隨忠貞歸鄕。不復出仕。虎溪遺址。有鴨脚樹。俗傳公手植。而村後會靈洞向亥原。卽其葬也。配柳氏。擧二男三女。男長。弘度。司直。次弘量。進士。女適進士李華。進士兪煥。參奉全懷玉。司直生國良。參奉。元良。進士生國賓。女壻辛恪。曾玄不盡錄。而十四世孫秉夏。從我遊。以公表墓屬之。義不敢辭。聊書此。俾歸篆焉。噫。百世之下。庶幾知高士之藏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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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집 제1권 / 고시(古詩) 금시(今詩) / 서정시〔西征詩〕
정덕 갑술년 / 正德歲甲戌(1514,중종9)
가을 칠월에 / 序屬秋七月
한양으로 출발할 날을 잡으니 / 卜吉將西征
바로 스무하루이다 / 日惟二十一
어머님께 절 올리고 하직하는데 / 再拜辭萱闈
아쉬움에 차마 발을 떼지 못한다 / 依依不忍別
해질 무렵 도착한 앞 고을에는 / 薄暮抵前縣
등불 흐린 객관이 적막도 한데 / 燈殘孤館寂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들지 못해 / 欹枕耿不寐
경괄과 얘기하며 밤을 새운다 / 共談唯曔适
날이 밝아 말을 타고 출발하면서 / 天明上馬行
아직 푸른 가을 산을 돌아보는데 / 四顧秋山碧
모래밭에 흰옷 입은 사람 나타나 / 沙頭見白衣
시냇가에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 一壺臨溪酌
얼굴이 불그레해 헤어지는데 / 面酡欲分袂
아침 해가 동쪽 하늘에 떠오른다 / 東方朝日出
말 위에서 정신없이 졸다가 보니 / 馬背困睡魔
홀연 여현 골짜기를 다 지난지라 / 忽窮礪峴谷
원루에서 잠깐 동안 서성이는데 / 院樓薄夷猶
아침밥 짓는 연기 번져 나간다 / 朝炊煙一抹
느지막이 영양 길을 지나가다가 / 日晏永陽路
붉은 난간 기대서서 바라보려고 / 客倚朱闌曲
말을 두고 쌍청당 위로 오르니 / 舍馬上雙淸
눈에 가득 들어오는 가을 강 물빛 / 滿眼秋江色
함께 앉아 담소를 나누는 이는 / 坐談者誰子
창량과 윤석이로다 / 昌良與潤石
서성이며 고개 돌려 바라보는데 / 徘徊一回首
고향 산은 하늘가에 아득하구나 / 家山天際邈
이길보(李吉甫)가 향교에 몸담고 있어 / 吉甫在黌舍
저녁에 서루에서 묵게 됐는데 / 暮投西樓宿
술병 들어 권하고 마시노라니 / 擧酒聊相酬
거문고 가락 흥을 돋우어 준다 / 琴聲斷復續
피곤해져 새벽녘에 단잠을 자고 / 困來曉夢酣
일어나니 창이 이미 훤히 밝았다 / 睡起窓日赤
아침에 길을 떠나 이십 리쯤 가 / 朝行二十里
시냇가 바위 옆에 잠시 쉬는데 / 歇鞍川巖側
조용수(曺容叟)가 때마침 뒤따라와서 / 曺叟適後至
말에서 내렸다가 바로 출발해 / 下馬語未卒
동행하다 낮이 되어 또 헤어지며 / 同行午又分
내일 밤에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 重會期來夕
[주-D009] 조용수(曺容叟) :
조홍도(曺弘度)로, 용수는 그의 호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부친은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이다. 《淵齋集 卷40 忘機堂曺公墓表》 《韓國近代邑誌 8冊 慶尙道2 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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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집 제1권 / 고시(古詩) 금시(今詩) / 장난삼아 용수의 운에 차운하다〔戲次容叟韻〕
사물에 의탁함이 모두 마음 기르는 것 / 寓物無非養我心
허황된 말 가지고 고원(高遠)함을 좇지 마라 / 休將幻語騖高深
고요한 가운데서 생동함을 보려거든 / 欲觀靜裏能生動
달 가득한 빈산에서 거문고를 퉁길지니 / 月滿空山浪撫琴
[주-D001] 장난삼아 …… 차운하다 : 용수(容叟)는 조홍도(曺弘度)의 호이다. 조홍도의 부친은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로 이언적의 외숙인 손숙돈(孫叔暾)과 ‘무극태극(無極太極)’ 논변을 펼쳤던 인물이며, 이언적은 조한보와 손숙돈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는 글을 지은 바 있다. 《晦齋集 卷5 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 答忘機堂書》 그런데 이 시를 지은 해가 바로 이언적이 〈망재와 망기당의 무극태극설 뒤에 쓰다〔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를 지었던 1517년(중종12)인 것을 보면, 이 시에서 언급한 내용은 당시에 펼쳐지고 있던 태극설의 논변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이언적은 조한보의 논리가 지나치게 고원하며, 적멸(寂滅)을 추구하여 유가(儒家)의 설과 상반된다는 견해를 보이는데, 조홍도의 시에서 부친 조한보의 태극 논변과 관련된 언급을 하자, 이언적이 그 논리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고, 태극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보인 듯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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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집 제1권 / 고시(古詩) 금시(今詩) / 조용수의 시에 차운하다〔次曺容叟韻〕
평생 벼슬살이 않고 은거할 생각으로 / 平生思晦不思彰
작은 집을 에워싸게 소나무와 대 심었지 / 種得松篁擁小堂
학문하며 한세상을 숨어 살려 하였으니 / 擬把詩書潛一世
미력(微力)으로 밝은 세상 보필할 뜻 품었으랴 / 敢將螢爝補三光
십 년간을 먼지 속에 길을 잃고 놀랐더니 / 紅塵十載驚迷路
오늘 아침 푸른 눈이 귀향한 날 반겨 주네 / 靑眼今朝喜返鄕
진중한 우리 친구 두터운 뜻이 많아 / 珍重故人多厚意
술병 들고 찾아와서 쇠한 낭관 위로하네 / 提壺相訪慰衰郞
큰 재주를 오래 굽혀 도를 펴지 못한지라 / 久屈高才道未彰
경치 좋은 곳에다가 서당을 지었도다 / 林泉佳處構書堂
거울처럼 맑은 물에 비쳐진 구름 보고 / 聊憑鏡面看雲影
때때로 술잔 들고 달빛을 감상하네 / 時把杯心弄月光
본체는 주일 공부 힘써야만 밝아지고 / 本體昏明要主一
정신은 미혹함에 쏠리는 걸 경계하니 / 靈機出入戒迷鄕
그대의 참 즐거움 여기 있어 부러운데 / 羨君眞樂此中會
우습게도 늙은 낭관 공명 좇아 달렸구려 / 堪笑馳名老省郞
[주-D001] 조용수(曺容叟)의 시에 차운하다 : 1527년(중종22) 경주로 돌아온 후에 지은 시로 보인다. 조용수는 조홍도(曺弘度)이다. 조홍도(曺弘度)로, 용수는 그의 호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부친은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이다. 《淵齋集 卷40 忘機堂曺公墓表》 《韓國近代邑誌 8冊 慶尙道2 389쪽》
[주-D002] 푸른 눈 : 반가워하는 눈길로, 뜻이 맞는 친구와의 만남을 뜻한다. 진(晉)나라 완적(阮籍)이 속된 사람을 만나면 흰 눈자위를 드러내어 경멸하는 뜻을 보이고, 마음이 맞는 선비를 만나면 검은 눈동자로 대하여 반가운 뜻을 드러내었으므로, 백안(白眼)은 미워하는 눈빛을, 청안(靑眼)은 반가운 눈길을 뜻한다. 《世說新語 簡傲》
[주-D003] 쇠한 낭관 : 이언적이 이 직전까지 이조 정랑으로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 지칭한 것이다.
[주-D004] 본체(本體)는 …… 밝아지고 : 본체는 인간이 지닌 본연의 마음이고, 주일(主一)은 주일무적(主一無適)으로, 전일(專一)함을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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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집 제2권 / 율시(律詩) 절구(絶句) / 병중에 생각을 적어 조용수에게 부치다〔病中書懷 寄曺容叟〕
오 년 동안 한가로이 하늘의 도 즐기면서 / 五載優游只樂天
임천의 안개 달에 남은 세월 보내었지 / 林泉煙月送殘年
경륜과 지업 끝내 쓸 곳이 없지마는 / 經綸志業終無用
공맹(孔孟)의 학문 연원 전해짐을 기뻐했지 / 洙泗源流喜有傳
도를 못 이뤘는데 몸은 이미 늙어 가고 / 學道未成身欲老
책을 오래 덮어둔 채 항상 병을 앓고 있네 / 觀書久廢病常纏
언제나 더위 식고 고질병이 사라져서 / 何時暑退沈痾去
술병 들고 강가에서 전생의 인연 갚나 / 携酒臨江償夙緣
구름이 올라갈 땐 편히 즐길 만하나니 / 雲上於天堪宴樂
누가 알랴 군자가 곤경 속에 형통함을 / 誰知君子困中亨
인간세상 만 가지 일 전혀 마음 쓰지 않고 / 人間萬事渾無念
가을 와서 병든 다리 낫기만을 바라노라 / 只願秋來病脚輕
아름다운 자연 속에 유유자적 살아가니 / 優游湖海自堪娛
지금은 세상 생각 눈 녹듯이 사라졌네 / 世慮如今似雪爐
정신이 맑아지고 원기가 회복되면 / 待得神淸眞氣泰
한 몸이 도리어 당우 시대 사람일 터 / 一身還是一唐虞
[주-D001] 조용수(曺容叟) : 조홍도(曺弘度)로, 용수는 그의 호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부친은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이다. 《淵齋集 卷40 忘機堂曺公墓表》 《韓國近代邑誌 8冊 慶尙道2 389쪽》
[주-D002] 구름이 …… 만하나니 : 《주역(周易)》 〈수괘(需卦) 상(象)〉에 “구름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수이니, 군자가 이에 의거하여 음식을 먹고 편안히 즐기면서 때를 기다린다.〔雲上於天需. 君子以, 飮食宴樂.〕”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는 구름이 하늘 위로 올라갔지만 아직 비를 이루지는 못한 상(象)으로, 군자는 이때 도덕을 간직하고서 음식을 먹어 기체를 기르고 즐거운 마음가짐으로 심지(心志)를 온화하게 하여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세상에 나갈 때가 아니라면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수양하며 살아가면 된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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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집 제4권 / 습유(拾遺)○칠언율시(七言律詩) / 망기당의 시에 차운하다〔次忘機堂韻〕
얼마 전 보내 주신 훌륭한 시를 받고는 거듭거듭 감상하기를 무수히 하였습니다. 감히 거칠고 졸렬한 시로 가르침을 주신 뜻에 보답하고자 하니, 한 번 봐 주신다면 우리 유학에 도움 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한 원기(元氣)의 움직임이 하늘에서 비롯되니 / 一元潛轉自穹旻
온갖 사물 생동함에 봄이 온 걸 징험하네 / 百物敷榮驗得春
땅을 떠나 어디에다 공적을 붙일쏜가 / 去地何從著功迹
하늘 보고 뭇별들의 찬란함을 알아야지 / 見天須識粲星辰
두 눈이 가깝고 먼 이치를 볼 힘 있어 / 雙眸有力窮遐邇
만 형상이 참과 거짓 숨길 수가 없도다 / 萬象無緣遁僞眞
연석으로 점금한 걸 분별하지 못하니 / 鉛錫點金殊不辨
사람들을 그르침이 많은 것을 탄식노라 / 堪嗟多誤世間人
대본이 하늘에서 나온다는 것을 아니 / 大本明知出上旻
전심(專心)하면 곳곳에서 봄가을을 징험하네 / 潛心到處驗秋春
중과 화가 유사하나 빈주의 구별 있고 / 中和雖似有賓主
동과 정은 유행하여 정해진 때가 없네 / 動靜周流無定辰
체찰하는 공부만이 실질적인 학문이요 / 體察工夫終是實
공허한 논설들은 진리가 아닌 것을 / 空虛論說竟非眞
천지간에 몸 있으니 물을 떠날 수 없는데 / 身居天地難違物
도를 하며 어찌 사람 멀리할 수 있겠는가 / 爲道如何却遠人
두 눈을 허공으로 향할 필요 없노니 / 不須游目入空旻
천지간의 풀과 꽃들 모두 봄을 맞았도다 / 滿地靑紅盡是春
기수 가의 맑은 노래 금하지 못했으니 / 沂上難禁吐朗詠
사수에서 좋은 봄날 주관한 자 누구였나 / 泗濱誰識管良辰
천 물결에 잠겨 있는 외로운 달 바라보고 / 千波極望涵孤月
만 경물에 관통하는 한 이치를 볼지어다 / 萬景彌觀渾一眞
공적에 정신을 다 쏟는 것을 탄식노니 / 堪歎役神空寂裏
이 도가 사람 떠나지 있다는 말 못 들었네 / 未聞斯道不離人
홀로 천군 받들어서 큰 공을 세운다면 / 獨奉天君建大功
오랑캐 땅 어디라도 모두 막힘없으리라 / 八蠻無礙九夷通
성곽이 천여 리를 둘러싼 걸 함께 보니 / 城隍共見匝千里
궁궐이 몇만 겹이 되는지를 모르도다 / 宮闕難知幾萬重
종묘 안엔 가지가지 예가 모두 갖춰지고 / 宗廟之中備百禮
천관의 반열 속에 온갖 무리 섞였어라 / 千官班上雜群蹤
밝은 덕을 멀리까지 미루어 나간다면 / 若推明德徹遐邇
사해에 파도 멎고 매운바람 없으리라 / 四海波恬無烈風
천진을 현상 통해 이해해야 할 것이니 / 天眞須向有形融
물아와 정조 절로 관통하게 되리라 / 物我精粗自貫通
백천이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을 보면 / 若見百川流不息
창해가 무궁하게 넓은 줄을 알 수 있네 / 便知滄海浩無窮
집집마다 해가 뜨면 닭이 울고 개 짖으며 / 家家日出喧鷄犬
곳곳마다 봄 깊으면 붉고 흰 꽃 두루 피네 / 處處春深遍白紅
천만 가지 경치를 주관하는 이 누군가 / 景致千般誰是主
고금에 변함없이 한가로운 태허 노인 / 閑居今古太虛翁
이 도는 지극히 커서 크고 작은 천지 만물이 모두 그 속에 갖춰져 있다. 만약 궁궐의 높은 담장과 그 안에 있는 종묘와 백관의 풍요로움만을 보고, 종묘 안에 또 많은 절문(節文)과 의장(儀章)이 있다는 것과 백관 가운데에 또 천만 가지 등급과 법령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도의 정미함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또 창해가 무궁하게 큰 것만을 보고 백천(百川)이 주야로 졸졸 흐르는 것이 어떤 사물도 쉬는 법이 없는 자연 현상 아닌 것이 없음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또한 큰 것을 보는 데에 가려져 작은 것을 빠뜨리는 병통이 될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언급하였다.
[주-D001] 망기당(忘機堂)의 시에 차운하다 : 이언적이 28세이던 1518년(중종13)에 지은 시이다. 망기당의 이름은 조한보(曺漢輔)로,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정재(靜齋) 조상치(曺尙治)의 손자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나, 이언적이 보낸 편지에서 그를 ‘존백(尊伯)’으로, 자신을 ‘소자(小子)’로 지칭한 것으로 볼 때 이언적보다 연배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으나, 1473년(성종4) 성균관 관원들을 배척하여 동맹휴학을 하였다가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그 뒤 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조한보가 이언적의 외숙인 손숙돈(孫叔暾)과 ‘태극무극(太極無極)’에 대한 논변을 벌였는데, 이 글을 본 이언적이 1517년 〈망재와 망기당의 무극태극설 뒤에 쓰다〔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라는 글을 지어 그 주장을 비판하면서 태극무극 논변이 이언적과 조한보 사이로 옮겨졌다. 이듬해인 1518년 이언적과 조한보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변을 벌였는데, 조한보의 편지는 남아 있지 않고 이언적이 조한보에게 답한 편지 4편이 〈망재와 망기당의 무극태극설 뒤에 쓰다〉와 함께 《회재집》 권5 잡저(雜著)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도 이때 지은 것이다. 이언적은 조한보의 주장이 주돈이(周敦頤)의 학설에 근본하였지만 그 논리가 지나치게 고원(高遠)하여 불가(佛家)의 주장에 가깝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하 4수는 이언적의 〈망재와 망기당의 무극태극설 뒤에 쓰다〉와 망기당 조한보에게 답한 4편의 편지 내용과 연관되는데, 하나하나 출전을 밝히기는 어려우므로 별도의 전거 표기는 생략한다.
[주-D002] 연석(鉛錫)으로 …… 못하니 :
납과 주석을 금처럼 꾸며 놓고도 잘못인 줄을 모른다는 뜻이다. 조한보가 유학의 본뜻을 모르고서 불가 쪽의 학설에 가까운 말로 무극태극(無極太極)을 설명하고도 그것의 잘못됨을 알지 못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주-D003] 중(中)과 …… 있고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희로애락의 정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고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하니,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는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길러진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하였다. 조한보가 “대본과 달도는 혼연하게 섞여서 하나인 상태이다.〔大本達道渾然爲一〕”라고 하였으므로, 이언적이 ‘혼연하게 하나인 상태인 것은 맞지만, 그 속에 체용(體用)과 동정(動靜), 선후(先後)와 본말(本末)의 구분이 있는 것은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晦齋集 卷5 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
[주-D004] 동(動)과 …… 없네 :
대본(大本)과 달도(達道),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이 단절되지 않고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다. 조한보에게 답한 세 번째 편지에서 이언적은 조한보가 정(靜)할 때의 주경존양(主敬存養)을 강조한 데 대해서 반박하며 동(動)할 때의 성찰과 체험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D005] 천지간에 …… 있겠는가 :
《중용장구》 제13장에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니, 사람이 도를 하면서 사람을 멀리한다면 도라고 할 수 없다.〔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조한보의 학설이 지나치게 고원하고 불가의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을 비판한 말이다.
[주-D006] 기수(沂水) …… 못했으니 :
공자가 제자들 몇 명과 앉아 있는 자리에서 각자 포부를 말해 보라고 했을 때 증점(曾點)이 “늦은 봄날 봄옷이 완성되면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했던 일을 두고 한 말로, 증점의 쇄락한 기상을 가리킨다. 《論語 先進》
[주-D007] 사수(泗水)에서 …… 누구였나 :
사수는 공자가 강학(講學)했던 곳인데, 여기서는 공자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주희(朱熹)가 앞의 증점의 고사를 두고, “증점은 모든 사물에 천리가 유행하는 것을 알아 좋은 봄날 아름다운 경치를 좋은 벗들과 즐기고자 하였다.……그는 늦은 봄날 봄옷이 완성된 뒤에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는 것이 바로 천리를 즐거워할 만한 곳임을 알았던 것이다.〔曾點見得事事物物上皆是天理流行, 良辰美景, 與幾箇好朋友行樂.……他自見得那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處, 此是可樂天理.〕”라고 설명한 바 있다. 《朱子語類 卷40 論語 先進篇下》 즉 공자 제자들 가운데 봄날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줄 안 증점이야말로 진정 천리를 알고 즐긴 사람이라는 뜻이다.
[주-D008] 공적(空寂)에 …… 것 :
조한보가 태극을 설명하면서 “태극의 체는 본래 적멸(寂滅)하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이언적은 ‘적이감(寂而感)’이라는 말로 태극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조한보의 주장이 불교의 ‘공적’에 빠져 들어간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晦齋集 卷5 雜著 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
[주-D009] 성곽이 …… 섞였어라 :
유학의 학문적 깊이와 규모를 말한 것이다. 자공(子貢)이 공자의 학문 경지를 비유하여 “궁궐의 담장에 비유한다면 나의 담장은 어깨 정도의 높이라서 집 안의 좋은 것들을 다 들여다 볼 수 있지만, 선생님의 담장은 몇 길이나 되어 대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으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풍부함을 볼 수가 없다.〔譬之宮牆, 賜之牆也及肩, 窺見室家之好. 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百官之富.〕”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張》
[주-D010] 천진(天眞)을 …… 되리라 :
천리(天理)는 보이지 않으므로 드러난 현상을 통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사물의 크고 작은 이치를 절로 알 수 있다는 뜻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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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집 제5권 / 잡저(雜著)
망재와 망기당의 무극태극설 뒤에 쓰다정축년(1517, 중종12) 〔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 丁丑〕 망재는 진사 손숙돈(孫叔暾)이고 망기당은 진사 조한보(曺漢輔)인데, 모두 경주(慶州)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망재의 무극태극 논변은 모두 육상산(陸象山)에게서 나온 것인데, 옛날에 주자(朱子)가 상세하게 논하였기 때문에 내가 감히 말을 덧붙일 것이 없다. 망기당의 답서로 말하자면 오히려 염계(濂溪)의 뜻에 근본한 것으로, 논의가 매우 고차원적이고 식견 또한 매우 원대하다. 그리고 그가 말한 《중용(中庸)》의 이치 역시 무척 심오하고 폭넓어서 그 요지를 얻었으니, 매우 그럴듯하여 웬만큼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지나치게 고원하여 우리 유가(儒家)의 학설에 위배되는 것이 있으니, 내가 이에 대해 말해 보겠다.
이른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이 도가 애초에 물질적인 형상은 없으면서도 실제로는 만물의 근저(根柢)가 됨을 형용한 것이다.이는 바로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가 도의 본체를 환히 파악하고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어 용감하게 곧장 나아가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도리를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후대 학자로 하여금 태극의 묘리는 유(有)와 무(無)에 속하지 않고 방소(方所)와 형체에 떨어지지 않음을 환히 알게 하였으니, 참으로 많은 성인들이 전하지 않은 비결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어찌 태극의 위에 다시 이른바 무극이 있다고 여긴 것이겠는가.
이 이치는 비록 지극히 고원(高遠)하고 오묘한 듯하지만 그 실체가 깃든 바를 탐구해 보면 또 지극히 비근(卑近)하고 지극히 실질적이다. 만약 이 이치를 강구해 밝히고자 하면서 그저 심오하고 어둡고 공허하고 요원한 곳으로만 달릴 뿐이요 다시 지극히 비근하고 지극히 실질적인 곳에서 구하지 않는다면, 이단의 공허(空虛)함과 적막(寂寞)함에 빠지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이제 망기당의 논설을 상세히 살펴보면, “태극은 곧 무극이다.”라고 한 말은 옳지만, “어찌 유(有)와 무(無)를 논하고 안과 밖을 나누어 명수(名數)의 말단에 구애되겠는가.”라고 한 것은 잘못되었다. 그리고 “그 대본(大本)을 얻는다면 인간관계와 일상생활 속에서의 갖가지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무엇 하나도 달도(達道)가 아닌 일이 없다.”라고 한 말은 옳지만, “대본과 달도는 혼연(渾然)히 하나가 되니, 그렇다면 어디에서 다시 무극과 태극, 유중(有中)과 무중(無中)의 간격이 있음을 논하겠는가.”라고 한 것은 잘못되었다.
이 극(極)의 이치는 비록 고금을 꿰뚫고 상하에 통하여 혼연히 하나가 되지만, 그 정조(精粗)와 본말(本末), 내외(內外)와 빈주(賓主)의 구분은 그 속에 찬연(粲然)하여 조금의 차질도 용납될 수 없는데, 이것을 어찌 ‘말할 만한 것이 못 되는 명수’라고 함부로 말하겠는가. 그리고 그 본체가 내 마음에 갖추어진 것은 비록 대본(大本)과 달도(達道)가 애초에 두 가지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 가운데는 저절로 체(體)와 용(用), 동(動)과 정(靜), 선(先)과 후(後), 본(本)과 말(末)을 분별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다. 어찌 그 혼연함을 얻으면 다시는 차례를 논할 것이 없고, 반드시 적멸(寂滅)과 허무(虛無)의 경지에 이른 뒤에야 이 도의 극치가 되는 것이겠는가.
지금은 이른바 혼연한 것이 위대한 줄만 알아서 극도로 논하고, 찬연한 것이 애당초 서로 분리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 주장이 합치기를 좋아하고 분리하기를 싫어하며 실질적인 것을 버리고 허무한 데로 들어가서 끝내 눈금 없는 저울과 자가 되고야 만다. 이 어찌 극도로 고원한 것을 추구하여 멈추는 바가 없음이 아니겠는가.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주자(周子)가 각별하게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도체(道體)의 극치를 드러낸 것인데, 공부할 곳을 말함에 있어서는 단지 ‘중(中)ㆍ정(正)ㆍ인(仁)ㆍ의(義)로써 정하되 고요함에 중점을 둔다.’라고 하고 ‘군자는 이것을 닦기 때문에 길하다.’라고 말했을 뿐이요, 사람들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이 ‘무극(無極)의 참됨’을 보아서 굳게 지키도록 하지 않았다. 대개 이 이치의 근원을 궁구해 보면 비록 지극히 미묘하여 온갖 일과 온갖 변화가 모두 여기에서 나오지만 실제로는 가리킬 수 있는 형상(形狀)이 없다. 공부를 논한다면 단지 중ㆍ정ㆍ인ㆍ의가 바로 이 일을 이해하는 곳이 되니, 별도로 한 가지 근본적인 공부가 또 학문을 강론하고 일에 대응하는 것 이외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지금 망기당의 논설은 이러한 공부를 모조리 내버리고 대번에 무극 태허의 본체를 내 마음의 주재로 삼아, 천지 만물로 하여금 나를 중심으로 모이게 하여 운용에 막힘이 없게 하고자 한다. 이것은 하늘에 오르려고 하면서 사다리가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바다를 건너려고 하면서 교량이 없는 것을 헤아리지 않는 것과 같은 격이니, 마침내 허무하고 고원한 지경에 떨어져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대개 망기당의 평생 학술이 그릇된 것은 공허함에 그 병통이 있는데, 병통의 근원을 내가 그 글에서 찾아내었다. “태극의 체는 본래 적멸하다.〔太極之體, 本來寂滅.〕”라고 하여 ‘멸(滅)’ 자로 태허의 본체를 설명하였으니, 이는 단연코 우리 유가의 학설이 아니다.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라는 것을 ‘적(寂)’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극한 적(寂) 가운데에 이른바 “아! 심원하여 그치지 않는다.〔於穆不已〕”라는 것이 존재하여 화육(化育)의 유행이 위아래에 밝게 드러나니, 어찌 다시 ‘멸(滅)’ 자를 ‘적’ 자 아래에 붙일 수 있겠는가.
시험 삼아 마음〔心〕을 가지고 말해 보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이 발하지 않아 혼연히 중(中)의 상태로 있는 것은 이 마음의 본연의 체로 ‘적(寂)’이라고 할 수 있다. 감응하여 마침내 통하는 데 미쳐서는 희로애락의 정이 발함이 모두 절도에 맞아 본연의 묘리(妙理)가 이에 유행(流行)하게 되니, 선유가 이른바 “우리의 적(寂)은 고요하되 감응한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만약 적하고 또 멸(滅)한다면 이것은 말라죽은 나무나 불 꺼진 재일 뿐이니, 천성을 멸하는 데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망기당은 ‘본래적멸(本來寂滅)’이라는 구절 아래에서 멸(滅) 자를 빼고 말하지 않았으나, 도리어 “비어 있되 신령하고 적연하되 오묘하니, 신령하고 오묘한 본체가 태허에 충만하여 곳곳에서 드러난다.〔虛而靈, 寂而妙, 靈妙之體, 充滿太虛, 處處呈露.〕”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망기당도 그 실질적인 이치를 말하면서 이 ‘멸’ 자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 어찌 논리가 궁하여 발뺌한 말이 아니겠는가.
한(漢)나라 이후로 성인의 도가 막히고 사설(邪說)이 퍼져 그 화가 인륜을 망치고 천리를 멸하는 데까지 이르러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모두 이 ‘멸’ 자가 해가 되어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망기당의 평생 학술과 언어 및 위와 같은 논의의 잘못됨이 모두 이 ‘멸’ 자로부터 나왔으니, 내가 변파(辨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가 초연히 한 이치의 혼연한 본체를 잘 이해하여 분명히 알고 의심하지 않은 점으로 본다면, 실로 지금 세상의 속유(俗儒)와 고승(高僧)들이 거의 미칠 바가 아니니, 지혜롭되 지나친 자라고 할 수 있다.
진실로 그처럼 고원한 식견을 가진 망기당이 도를 아는 군자를 만나서 그 유사함을 변별하여 참된 데로 돌아오고 그 공허함을 버리고 실질적인 것으로 돌이킨다면, 그의 고명함은 우리 도의 고명함으로 바뀌고 그의 원대함은 우리 도의 원대함으로 바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공자, 맹자, 주자(周子), 정자(程子) 같은 분이 없으니, 슬프다!
[주-D001] 망재(忘齋)와 …… 쓰다 :
이언적이 27세이던 1517년(중종12)에 지은 글이다. 망재 손숙돈(孫叔暾)은 이언적의 셋째 외숙으로, 부친은 손소(孫昭)이다. 자는 숙경(叔卿)이며, 1489년(성종20)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성종 때 척불소(斥佛疏)를 올렸다고 한다. 망기당의 이름은 조한보(曺漢輔)로,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정재(靜齋) 조상치(曺尙治)의 손자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나, 뒤에 실린 이언적의 편지 투식을 보더라도 이언적보다 최소한 2, 3십 년은 연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으나, 1473년(성종4) 성균관 관원들을 배척하여 동맹휴학을 하였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그 뒤 경전을 연구하여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손숙돈과 조한보가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관련하여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에 대한 논변을 벌였는데, 이를 본 이언적이 이 글을 지어 망기당을 비판하면서 태극무극 논변이 이언적과 조한보 사이로 옮겨졌다. 이다음 해인 1518년 이언적은 망기당 조한보에게 답하는 편지 4편을 보냈으며, 이때 〈망기당의 시에 차운하다〔次忘機堂韻〕〉 시 5수도 지었다. 이언적은, 조한보의 무극태극설이 주돈이(周敦頤)의 학설에 근본하였지만 그 논리가 지나치게 고원(高遠)하여 불교 쪽의 색채를 띠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다만 이언적의 이 글은 이언적의 독창적인 논리라기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주희(朱熹)의 글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글의 전개가 인용 형식이 아닌 경우가 섞여 있기 때문에 번역문에서 원래의 출전을 일일이 밝히지는 못하였다. 아울러 이 글과 아래 4편의 편지는 《태극도설》과 주희의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이들 글을 전제로 언급된 내용들을 번역문이나 주석으로 밝혀 주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밝혀 둔다.
[주-D002] 육상산(陸象山) :
송나라 유학자 육구연(陸九淵, 1139~1193)이다. 자는 자정(子靜), 호는 상산이다. 주희(朱熹)와 같은 시대를 살며 유학자로서 쌍벽을 이루었으나, 주희가 끊임없는 탐구와 연구를 강조했던 데 반해, 육구연은 도(道)의 가장 높은 지식은 내면의 성찰과 자습(自習)을 끊임없이 실천함으로써 습득된다고 주장하였다. 육구연은 ‘무극이태극’에 대해서, 《역(易)》의 원리는 ‘태극(太極)’이라고만 하면 되는데 ‘무극(無極)’이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비판한 바 있다.
[주-D003] 주자(朱子)가 …… 때문에 :
《주자대전(朱子大全)》 권36에 실려 있는 〈답육자정(答陸子靜)〉 두 편의 내용을 가리킨다.
[주-D004] 이른바 …… 것이다 :
이 부분은 《주자대전》 권80 〈소주주학염계선생사기(邵州州學濂溪先生祠記)〉와 《성리대전》 권1의 〈태극도부록(太極圖附錄)〉의 총론(總論)에 나오는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은 주돈이의 《태극도설》의 첫 구절로, 우주 만물의 근원인 《역(易)》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라 한다. 주희는 이를 형상은 없지만 이(理)는 존재한다는 의미로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고 해석하였다.
[주-D005] 이는 …… 것이다 :
《성리대전(性理大全)》 권1에 실려 있는 〈태극도부록(太極圖附錄)〉의 총론(總論)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D006] 유중(有中)과 무중(無中)의 간격 :
주희가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서 ‘무극이태극’에 대해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실제로는 조화의 중심축이고 만물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고 말했으니, 태극 밖에 다시 무극이 있는 것이 아니다.〔上天之載, 無聲無臭, 而實造化之樞紐, 品彙之根柢也. 故曰無極而太極, 非太極之外復有無極也.〕”라고 풀이하고, 육구연에게 준 편지에서는 이 부분을 두고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라는 것은 유 가운데서 무를 말한 것이고,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는 것은 무 가운데서 유를 말한 것입니다.〔上天之載, 是就有中說無; 無極而太極, 是就無中說有.〕”라고 한 바 있다. 《性理大全 卷1》 《朱子大全 卷36 答陸子靜》
[주-D007] 지금은 …… 만다 :
이 부분은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뒷부분에 첨부된 주희의 논(論) 가운데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한 것인데, 글자 구성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朱子大全 遺集 卷2》 《性理大全 卷1》
[주-D008]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
선유는 주희이다. 아래 인용문은 주희가 제자 요덕명(寥德明)에게 준 편지와 〈태극도설해부록(太極圖說解附錄)〉에 나오는 내용이다. 《朱子大全 卷45 答寥子晦》 《性理大全 卷1》
[주-D009] 중(中) …… 길하다 :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희는 여기서의 ‘중ㆍ정’이 예(禮)와 지(智)에 해당한다고 풀이하였다. 즉 ‘중’은 예의 표준이고 ‘정’은 지의 본체이자 지의 절실한 곳으로, ‘예지’라고 하는 것보다 ‘중정’이라는 글자가 더욱 실질적이고 확정적이라고 하였다.
[주-D010] 하늘의 …… 없다 :
주희가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서 ‘무극이태극’에 대해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실제로는 조화의 중심축이고 만물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고 말했으니, 태극 밖에 다시 무극이 있는 것이 아니다.〔上天之載, 無聲無臭, 而實造化之樞紐, 品彙之根柢也. 故曰無極而太極, 非太極之外復有無極也.〕”라고 풀이하고, 육구연에게 준 편지에서는 이 부분을 두고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라는 것은 유 가운데서 무를 말한 것이고,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는 것은 무 가운데서 유를 말한 것입니다.〔上天之載, 是就有中說無; 無極而太極, 是就無中說有.〕”라고 한 바 있다. 《性理大全 卷1》 《朱子大全 卷36 答陸子靜》
[주-D011] 아 …… 않는다 :
《중용장구》 제26장에서 《시경》 〈유천지명(維天之命)〉의 구절을 인용하여 천도(天道)에 대해 설명한 대목이다.
[주-D012] 희로애락(喜怒哀樂)의 …… 것 :
《중용장구》 제1장에 “희로애락의 정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하니, 중이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란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주-D013] 선유가 …… 것 :
선유(先儒)는 원(元)나라 학자인 운봉(雲峰) 호병문(胡炳文)을 가리킨다. 《대학집설계몽(大學集說啓蒙)》 서문(序文) 주(註)에 “우리의 허는 비었지만 있고, 저들의 허는 비어서 없으며, 우리의 적은 고요하되 감응하고, 저들의 적은 고요하여 없어진다.〔此之虛, 虛而有; 彼之虛, 虛而無. 此之寂, 寂而感; 彼之寂, 寂而滅.〕”라는 그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우리는 유가(儒家), 저들은 이단(異端)인 불가(佛家)를 가리킨다. 이 글은 《대학장구》 서문의 소주(小註)에도 실려 있다.
[주-D014] 이는 …… 것이다 :
적멸(寂滅)을 주장하는 불교가 성행함으로 해서 정도(正道), 즉 유학이 쇠퇴하였다는 뜻이다.
[주-D015] 지혜롭되 지나친 자 :
지식은 많지만 그 지식이 상식을 벗어난다는 말이다. 《중용장구》 제4장에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가 알겠으니,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도가 밝아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가 알겠으니, 현명한 자는 지나치고 현명하지 못한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라고 한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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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집 연보 / 문원공 회재 선생 연보〔文元公晦齋先生年譜〕
정덕 12년 정축(1517, 중종12) 선생 27세
○ 원일(元日)에 〈오잠(五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첫 번째는 〈외천(畏天)〉, 두 번째는 〈양심(養心)〉, 세 번째는 〈경신(敬身)〉, 네 번째는 〈개과(改過)〉, 다섯 번째는 〈독지(篤志)〉이다.
○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를 지었다.
망재(忘齋)는 진사(進士) 손숙돈(孫叔暾)이고 망기당(忘機堂)은 진사 조한보(曺漢輔)인데, 모두 경주 사람이다. ○ 글의 대략에 “이 이치의 근원은 비록 지극히 미묘하여 만물과 만화(萬化)가 모두 여기에서 나오지만, 실제로는 가리킬 수 있는 형상(形象)이 없다. 공부를 논한다면 단지 중(中)ㆍ정(正)ㆍ인(仁)ㆍ의(義)가 바로 이 일을 이해하는 곳이 되니, 또 학문을 강론하고 일에 대응하는 것 이외에 별도로 한 가지 근원적인 공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망기당의 논설은 이러한 공부를 모조리 내버리고 대번에 무극 태허의 본체를 내 마음의 주재로 삼아, 천지 만물을 나를 중심으로 모이게 하여 운용에 막힘이 없게 하고자 한다. 이것은 하늘에 오르려고 하면서 사다리가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바다를 건너려고 하면서 교량이 없는 것을 헤아리지 않는 것과 같은 격이니, 마침내 허무하고 고원한 곳에 떨어져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하였다.
또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라는 것을 ‘적(寂)’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극한 적 가운데에 이른바 ‘아, 심원하여 그치지 않는다.〔於穆不已〕’라는 것이 존재하여 화육(化育)의 유행이 위아래에 밝게 드러나는 것이니, 어찌 다시 ‘멸(滅)’ 자를 ‘적’ 자 아래에 붙일 수 있겠는가. 시험 삼아 마음〔心〕을 가지고 말해 보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이 발하지 않아 혼연히 중(中)의 상태로 있는 것은 이 마음의 본연의 체로서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감응하여 마침내 통하는 데 미치면 희로애락의 발함이 모두 절도에 맞아 본연의 묘리(妙理)가 이에 유행(流行)하게 되니, 선유가 말한 ‘우리의 적은 고요하되 감응한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만약 적하고 또 멸한다면 말라 죽은 나무나 불 꺼진 재일 뿐이니, 천성을 멸하는 데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4월에 지은 〈향정혜사음록즉경(向定慧寺吟錄卽景)〉 시 40운(韻)과 〈차조용수(次曺容叟)〉 절구 2수가 있다.
○ 7월에 조정에 들어가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 10월에 정자(正字)로 승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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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집(晦齋集) 이언적(李彥迪)생년1491년(성종 22)몰년1553년(명종 8)자복고(復古)호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본관여주(驪州)시호문원(文元)
晦齋先生集卷之五 / 雜著 / 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丁丑(1517,중종12)
○忘齋。進士孫叔暾。忘機。進士曺漢輔。皆慶州人。
謹按忘齋無極太極辨。其說蓋出於陸象山。而昔子朱子辨之詳矣。愚不敢容贅。若忘機堂之答書。則猶本於濂溪之旨。而其論甚高。其見又甚遠矣。其語中庸之理。亦頗深奧開廣。得其領要。可謂甚似而幾矣。然其間不能無過於高遠而有背於吾儒之說者。愚請言之。夫所謂無極而太極云者。所以形容此道之未始有物。而實爲萬物之根柢也。是乃周子灼見道體迥出常情。勇往直前。說出人不敢說底道理。令後來學者。曉然見得太極之妙。不屬有無。不落方體。眞得千聖以來不傳之祕。夫豈以爲太極之上。復有所謂無極哉。此理雖若至高至妙。而求其實體之所以寓。則又至近而至實。若欲講明此理而徒騖於窅冥虛遠之地。不復求之至近至實之處。則未有不淪於異端之空寂者矣。今詳忘機堂之說。其曰。太極卽無極也則是矣。其曰。豈有論有論無。分內分外。滯於名數之末則過矣。其曰。得其大本則人倫日用。酬酢萬變。事事無非達道則是矣。其曰。大本達道渾然爲一。則何處更論無極太極有中無中之有間則過矣。此極之理。雖曰貫古今徹上下而渾然爲一致。然其精粗本末。內外賓主之分。粲然於其中。有不可以毫髮差者。是豈漫無名數之可言乎。而其體之具於吾心者。則雖曰大本達道初無二致。然其中自有體用動靜先後本末之不容不辨者。安有得其渾然則更無倫序之可論。而必至於滅無之地而後爲此道之極致哉。今徒知所謂渾然者之爲大而極言之。而不知夫粲然者之未始相離也。是以。其說喜合惡離。去實入虛。卒爲無星之稱。無寸之尺而後已。豈非窮高極遠而無所止者歟。先儒言周子喫緊爲人。特著道體之極致。而其所說用工夫處。只說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君子修之吉而已。未嘗使人日用之間。必求見此無極之眞而固守之也。蓋原此理之所自來。雖極微妙。萬事萬化。皆自此中流出。而實無形象之可指。若論工夫則只中正仁義。便是理會此事處。非是別有一段根原工夫又在講學應事之外也。今忘機之說則都遺却此等工夫。遽欲以無極太虛之體。作得吾心之主。使天地萬物。朝宗於我而運用無滯。是乃欲登天而不慮其無階。欲涉海而不量其無橋。其卒墜於虛遠之域而無所得也必矣。大抵忘機堂平生學術之誤。病於空虛。而其病根之所在則愚於書中。求之而得之矣。其曰。太虛之體。本來寂滅。以滅字說太虛體。是斷非吾儒之說矣。上天之載。無聲無臭。謂之寂可矣。然其至寂之中。有所謂於穆不已者存焉。而化育流行。上下昭著。安得更着滅字於寂字之下。試以心言之。喜怒哀樂未發。渾然在中者。此心本然之體而謂之寂可也。及其感而遂通則喜怒哀樂。發皆中節。而本然之妙。於是而流行也。先儒所謂此之寂。寂而感者此也。若寂而又滅則是枯木死灰而已。其得不至於滅天性乎。然忘機於本來寂滅之下。便沒滅字不說。而却云虛而靈。寂而妙。靈妙之體。充滿太虛。處處呈露。則可見忘機亦言其實理而說此滅字不去。故如是。豈非有所窮而遁者乎。自漢以來。聖道塞而邪說行。其禍至於剗人倫滅天理。而至今未已者。無非此一滅字爲之害也。而忘機堂一生學術言語及以上議論之誤。皆自此滅字中來。愚也不得不辨。若其超然高會一理渾然之體。而的的無疑則實非今世俗儒高釋所可幾及。亦可謂智而過者矣。誠使忘機堂之高識遠見。獲遇有道之君子。辨其似而歸於眞。提其空而反於實。則其高可轉爲吾道之高。其遠可變爲吾道之遠矣。而不幸世無孔孟周程也。悲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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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齋先生集卷之五 / 雜著 / 答忘機堂第一書 戊寅(1518,중종13)
伏蒙示無極寂滅之旨。存養上達之要。開釋指敎。不一而足。亦見尊伯不鄙迪而收之。欲敎以進之也。感戴欣悚。若無所容措。前者因四友堂。獲見尊伯答忘齋無極太極辨。妄用鄙見以爲說。不意得達於左右。而又有以煩此辱敎也。迪聞道苦暮。近年來屛居山野。有志於學。蓋亦有年矣。第歎賦質凡下。聞見亦孤。雖嘗用力於涵養之地。而根本不立。勉強於踐履之際而足目未高。思得成德任道之君子。面承提挈而爲之依歸。則世無其人。思得有志好學之士。上下論辨。以資其講劘之益。則鄕無其人。懍懍然惟恐墜於a024_391b寡陋而竟無以自發。而今而後有望於尊伯矣。雖然。來敎所云寂滅存養之論。有似未合於道者。小子亦有管見。須盡露於左右者。敢避其僭越之罪而無所辨明耶。夫所謂太極者。乃斯道之本體。萬化之領要。而子思所謂天命之性者也。蓋其沖漠無朕之中。萬象森然已具。天之所以覆。地之所以載。日月之所以照。鬼神之所以幽。風雷之所以變。江河之所以流。性命之所以正。倫理之所以著。本末上下。貫乎一理。無非實然而不可易者也。周子所以謂之無極者。正以其無方所無形狀。以爲在無物之前而未嘗不立於a024_391c有物之後。以爲在陰陽之外而未嘗不行於陰陽之中。以爲通貫全體。無乎不在。則又初無聲臭影響之可言也。非若老氏之出無入有。釋氏之所謂空也。今如來敎所云無則不無而靈源獨立。有則不有而還歸澌盡。是專以氣化而語此理之有無。豈云知道哉。所謂靈源者氣也。非可以語理也。至無之中。至有存焉。故曰。無極而太極。有理而後有氣。故曰。太極生兩儀。然則理雖不離於氣。而實亦不雜於氣而言。何必見靈源之獨立。然後始可以言此理之不無乎。鳶飛魚躍。昭著上下。亘古亘今。充塞宇宙。無一毫之空闕。a024_391d無一息之間斷。豈可但見萬化之澌盡。而遂指此極之體爲寂滅乎。三皇雖逝而此極不與三皇而俱逝。五帝雖沒而此極不與五帝而俱沒。三王雖亡而此極不與三王而俱亡。先天地而立而不見其始。後天地而存而不見其終。其此理之實然而非虛空也豈不的的矣乎。人物之生於其間者。不能永久而終歸澌盡者。蓋人物有形有質。此理無形無質。有形有質者。不能無生死始終。而其所以生死始終者。實此無形無質者之所爲也。而無形無質者。曷嘗有時而息滅哉。子思子曰。惟天之命。於穆不已。又曰。其爲物不a024_392a貳。其生物不測。其所以不已不貳者果何物耶。而是可謂之寂滅乎。試以心言之。人受天地之中以生。則其心猶天地之有陰陽也。而太極之眞。於是乎在也。其未感物也。湛然虛靜。若無一物。是則所謂無聲無臭之妙也。而來敎所云寂者也。然其至虛至寂之中。此理渾然。無所不備。故感而遂通天下之故。若寂而又滅。則是寂然木石而已。其所以爲天下之大本者何在。先儒所云寂感寂滅之分。蓋以明彼此之似同而實異矣。豈可以此爲浮議而獨以異端之說爲是乎。蓋太極之體雖極微妙。而其用之廣。亦無不在。然a024_392b其寓於人而行於日用者。則又至近而至實。是以。君子之體是道也。戒愼乎其所不睹。恐懼乎其所不聞。有以全其本然之天。而絶其外誘之私。不使須臾之頃。毫忽之微。有所間斷而離去。其行之於身也。則必造端乎夫婦。以至於和兄弟順父母。而有以盡己之性。及其盡性之至也。則又有以盡人物之性。而其功化之妙。極於參天地贊化育。而人極於是乎立矣。此君子之道所以至近而不遠。至實而非虛。建諸天地而不悖。質諸鬼神而無疑。百世以俟聖人而不惑者也。此非愚生之言。實千古聖賢所相傳授。而極言至a024_392c論者也。天地之間。道一而已矣。若外於此而別有一道可以爲敎。則是決非率性之謂而害吾道之邪說也。來敎所云一理太虛之說。雖甚高而實未當。小子請卽馬牛鷄犬之喩明之。蓋天下無性外之物。人物各循其性之自然。則其日用事物之間。莫不各有當行之路。是以。循牛之性則角而可耕。循馬之性則鬣而可乘。循鷄犬之性則絳冠而司晨。披毛而司吠。是雖形殊職異。莫非天命之所爲而初無二也。其不可互相是非也固然矣。若牛而去其角。馬而去其鬣。鷄犬而去其冠毛。不循其性而廢其所司之職。則安得a024_392d辭其違天之罪。而免於人之所議乎。今異敎之人。毀其髮毛。緇其法服。子焉而不父其父。臣焉而不君其君。民焉而不事其事者。亦猶是也。固不可與吾道竝立於天地間也。天下之人。入于彼則出于此。爲吾道計者。安得於是而無所辨耶。夫道只是人事之理耳。離人事而求道。未有不蹈於空虛之境。而非吾儒之實學矣。詩曰。天生烝民。有物有則。物者。人事也。則者。天理也。人在天地之間。不能違物而獨立。安得不先於下學之實務。而馳神空蕩之地。可以爲上達乎。天理不離於人事。人事之盡而足目俱到。以臻於貫通a024_393a之極。則天理之在吾心者至此而渾全。酬酢萬變。左右逢原。無非爲我之實用矣。故明道先生曰。道之外無物。物之外無道。又曰。下學人事。便是上達天理。詎不信歟。且如存養之云。只是敬以直內。存之於未發之前。以全其本然之天而已。若曰遊心於無極之眞。使虛靈之本體。作得吾心之主。則是使人不爲近思之學。而馳心空妙。其害可勝言哉。又況虛靈本是吾心之體也。無極之眞。本是虛靈之中所具之物也。但加存之之功。而不以人欲之私蔽之。以致其廣大高明之體可也。張南軒曰。太極之妙。不可臆度而力致。a024_393b惟當本於敬以涵養之。正謂此也。今曰。遊心於無極。曰作得吾心之主。則是似以無極太極爲心外之物。而別以心遊之於其間。然後得以爲之主也。此等議論。似甚未安。來敎又曰。聖人復起。不易吾言。亦見尊伯立言之勇而自信之篤也。然前聖後聖。其揆一也。今以已往聖賢之書考之。存養上達之論。無所不備。其曰。存心養性。其曰。戒愼恐懼。其曰。主靜曰主敬者。無非存養之意。而曷嘗聞有如是之說乎。呂氏虛心求中之說。朱子非之。況以遊心無極爲敎乎。孔子。生知之聖也。亦曰。我下學而上達。又曰。吾嘗終夜不寢a024_393c以思。無益。不如學也。況下於孔子者乎。故程子曰。聖人千言萬語。只是欲人收已放之心尋向上去。下學而上達也。以此觀之。其言之可易與不可易。直驗於已往之聖人而可見矣。何必有待於後來復起之聖人乎。天下之禍。莫大於甚似而難辨。惟其甚似。故能惑人。惟其難辨。故彌亂眞。伏詳賜書。無非雜儒釋以爲一。至有何必分辨之說。此小子所甚懼而不敢不爭者也。伏見尊伯年高德邵。其於道體之妙。亦可謂有所見矣。但以滯於寂滅之說。於其本源之地。已有所差。而至於存養上達之論。則又與聖門之敎大異。a024_393d學者於是非之原。毫釐有差。則害流於生民。禍及於後世。況其所差不止於毫釐乎。伏惟尊伯勿以愚言爲鄙。更加着眼。平心玩理。黜去寂滅遊心之見。粹然以往聖之軌範自律。吾道幸甚。善在芻蕘。聖人擇之。況聽者非聖人。言者非芻蕘。而遽指言者爲狂見而不察乎。蘧伯玉行年五十。知四十九年之非。又曰。行年六十而六十化。古之君子改過不吝。故年彌高而德彌進也。小子所望於尊伯者止此。干冒尊嚴。不勝戰汗之至。迪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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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齋先生集卷之五 / 雜著 / 答忘機堂第二書
迪後學寡見。輒不自揆。瀆冒至再。難逃僭妄之罪。伏蒙尊慈不加誅責。反覆開喩。辭旨和平。有以見君子長者虛心觀理。不執一隅惟善之從也。迪雖至愚。安得不罄其陋見。以求畢其說而望敎於左右耶。伏覩來敎。於無極上去遊心二字。於其體至寂下去一滅字。是不以愚言爲鄙。有所許採。幸甚幸甚。書中所論一本之理及中庸之旨。亦頗明白少疵。妙得領要。聖人之道。固如斯而已。更無高遠難窮之事。迪敢不承敎。然於其中尙有一兩語與鄙見異者。請更白之。夫適國之路。固有千蹊萬逕東西南北之異。若得其直a024_394b路而進。則雖有遠近遲速。而終皆可以入國矣。然或誤入於邪逕他岐而不知返。則往往迷於荊棘荒遠之域。而洒臨岐之泣。起亡羊之嘆者有矣。如此者。雖終身窘步。而永無適國之期矣。況入道之方。一而已矣。非如適國之路有東西南北之異也。差之毫釐。謬以千里。豈可以爲千蹊萬逕皆可以適國而不必求其正路耶。至如寂滅之說。生於前書粗辨矣。未蒙察允。今又擧虛靈無極之眞。乃曰。虛無卽寂滅。寂滅卽虛無。是未免於借儒言而文異端之說。小子之惑滋甚。先儒於此四字。蓋嘗析之曰。此之虛。虛而有。彼之a024_394c虛。虛而無。此之寂。寂而感。彼之寂。寂而滅。然則彼此之虛寂同。而其歸絶異。固不容不辨。而至於無極之云。只是形容此理之妙無影響聲臭云耳。非如彼之所謂無也。故朱子曰。老子之言有無。以有無爲二。周子之言有無。以有無爲一。正如南北水火之相反。詎不信歟。來敎又曰。主敬存心而上達天理。此語固善。然於上達天理上。却欠下學人事四字。與聖門之敎有異。天理不離於人事。下學人事。自然上達天理。若不存下學工夫。直欲上達則是釋氏覺之之說。烏可諱哉。蓋人事。形而下者也。其事之理則天之理也。形a024_394d而上者也。學是事而通其理。卽夫形而下者而得夫形而上者。便是上達境界。從事於斯。積久貫通。可以達乎渾然之極矣。而至於窮神知化之妙。亦不過卽是而馴致耳。孔子。生知之聖也。亦不能不由下學。乃曰。道不遠人。人之爲道而遠人。不可以爲道。況下於孔子者乎。世之爲道者。不信乎此。而乃欲徑造於虛妙不可知之域。亦見其惑也。且夫窮理。非徒知之爲貴。知此理。又須體之於身而踐其實。乃可以進德。若徒知而不能然則烏貴其窮理。而其所知者終亦不得而有之矣。孔子曰。人皆曰予知。擇乎中庸而不能a024_395a期月守。然則非知之難。行之難。此君子所以存省體驗於日用事物之際。而言必顧行。行必顧言。不敢容易大言者也。不知尊伯亦有如是體察之功乎。亦有如是踐履之實乎。大抵道理。天下之公共。不可以私智臆見論之。要須平心徐玩。務求實是可也。若使尊伯無意於聖人之道則已矣。如其不然則愚之所陳雖鄙。亦不至於無稽。幸蒙俯採。痛去寂滅之見。而又能主敬存心。一於下學上做工夫。以達於天理則尊伯之於斯道。可謂醇乎醇矣。愚見如是。輒冒言之。退增汗懾。迪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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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齋先生集卷之五 / 雜著 / 答忘機堂第三書
迪頓首。伏承尊喩。至再至三。發明道體。極其妙致。使迷暗者。曉然如披雲而見大曜。其所以嘉惠末學至矣。然於其中。尙有未解者存焉。非故欲發愚乎。安有見道如是之高。而猶未能精於存省體驗之地者哉。伏覩來喩所陳。雖云不滯寂滅之說有年。而寂滅之習。似依舊未除。是以。其論說浮於道理幽妙之致。而未及反躬體道之要。不免爲曠蕩空虛之歸。而非切近的當之訓。此小子所以未敢承命者也。迪聞子朱子曰。道者日用事物當行之理。皆性之德而具於心。a024_395c無物不有。無時不然。古今論道體。至此而無餘蘊矣。愚請因此而伸之。蓋道之大原出於天。而散諸三極之間。凡天地之內。無適而非此道之流行。無物而非此道之所體。其在人者。則大而君臣父子夫婦長幼之倫。小而動靜食息進退升降之節。以至一言一默一嚬一笑之際。各有所當然而不可須臾離。亦不可毫釐差者。莫非此理之妙。故子思子曰。語大天下莫能載。語小天下莫能破。是豈非生民日用之常。事物當行之理者乎。蓋因其用之粲然者而觀之。則縷析毫分。似未易得其領要。千差萬別。似不可合而爲一。a024_395d然其所以然之本體。則莫非天命之渾然者。而我之所以爲性而具於心者也。當喜怒哀樂未發之前。此心之眞。寂然不動。是則所謂無極之妙也。而天下之大本在於是也。固當常加存養之功以立大本。而爲酬酢萬變之主。而後可以發無不中。而得時措之宜。然於此心之始動幾微之際。天理人欲戰於毫忽之間。而謬爲千里之遠。可不於是而益加敬愼乎。是故。君子旣常戒懼於不睹不聞之地。以存其本然之天。而不使須臾之離。有以全其無時不然之體。又於幽獨之中。幾微之動。尤加省察之功。以至於應事接物a024_396a之處。無少差謬而無適不然。有以盡其無物不在之妙。張南軒所謂要須存諸靜以涵動之所本。察夫動以見靜之所存。而後爲無滲漏者是也。從事於斯。無少間斷。此心常明。不爲物蔽。則大本之立。日以益固。而又於幾微酬應之際。無一毫人欲之雜。而純乎義理之發。自其一心一身。以至萬事萬物。處之無不當。而行之每不違焉。則達道之行。於是乎廣矣。而下學之功。盡善全美矣。二者相須。體道工夫。莫有切於此者。固不可闕其一矣。來敎有曰。敬以直內。顧諟天之明命。吾之心堅定不易。則固存養之謂矣。而於靜時a024_396b工夫則有矣。若夫頓除下學之務。略無體驗省察之爲。則於動時工夫。蓋未之及焉。是以。其於求道之功。疏蕩不實。而未免流爲異端空虛之說。伏睹日用酬酢之際。不能無人欲之累。而或失於喜怒之際。未能全其大虛靈之本體者有矣。豈非雖粗有敬以直內工夫。而無此義以方外一段工夫。故其體道不能精密而或至於此乎。昔顏淵問克己復禮之目。孔子曰。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程子繼之曰。由乎中而應乎外。制於外。所以養其中。然則聖門工夫。雖曰主於靜以立其本。亦必於其動處深加省a024_396c察。蓋不如是。則無以克己復禮而保固其中心之所存矣。故曰。制於外。所以養其中。未有不制其外而能安其中者也。愚前所云存省體驗於日用事物之際而言顧行行顧言者。此之謂也。安有遺其心官。隨聲逐色。失其本源之弊哉。中庸曰。誠者。不勉而中。不思而得。從容中道。聖人也。誠之者。擇善而固執之者也。蓋地位已到聖人。則此等工夫皆爲筌蹄矣。若未到從容中道之地。而都遺却擇善省察工夫。但執虛靈之識。不假修爲而可以克己復禮。可以酬酢萬變云。則譬如不出門而欲適千里。不擧足而欲登泰山。其不能a024_396d必矣。來敎又曰。爲破世人執幻形爲堅實。故曰寂滅。此語又甚害理。蓋人之有此形體。莫非天之所賦而至理寓焉。是以。聖門之敎。每於容貌形色上加工夫。以盡夫天之所以賦我之則。而保守其虛靈明德之本體。豈流於人心惟危之地哉。孟子曰。形色。天性也。惟聖人然後可以踐形。豈可以此爲幻妄。必使人斷除外相。獨守虛靈之體。而乃可以爲道乎。是道不離於形器。有人之形則有所以爲人之理。有物之形則有所以爲物之理。有天地之形則有所以爲天地之理。有日月之形則有所以爲日月之理。有山川之形a024_397a則有所以爲山川之理。若有其形而不能盡其道。是空具是形而失夫所以得其形之理也。然則棄形器而求其道。安有所謂道者哉。此寂滅之敎所以陷於空虛誕謾之境。而無所逃其違天滅理之罪者。伏想尊伯於此異說。亦已知其誕矣。猶未能盡去舊習以反於正。而復有如是之語。果何爲耶。上達之論。愚於前書粗陳矣。今曰。下學上達。乃指示童蒙初學之士。豪傑之士不如是。愚請以孔子申之。自生民以來。生知之聖。未有盛於孔子者。亦未嘗不事於下學。其言曰。我十五而志于學。五十而知天命。又曰。不如丘之a024_397b好學。然則孔子不得爲豪傑之士。而其所爲亦不足法歟。若曰。孔子之言。所以勉學者也。於其己則不必。然則愚請以孔子所親爲者白之。孔子問禮於老聃。問官於郯子。入太廟。每事問。是非下學之事乎。問官之時。實昭公十七年而孔子年二十七矣。入太廟則孔子始仕時也。古人三十而後仕。則是時孔子年亦不下三十。其非童蒙明矣。夫以生知之聖。年又非童蒙。而猶不能無下學之事。況不及孔子。而遽爾頓除下學不用力。而可以上達天理乎。是分明釋氏頓悟之敎。烏可尙哉。孟子曰。古之君子。過則改之。今之君a024_397c子。過則順之。又曰。古之君子。其過也如日月之食焉。人皆見之。及其更也。人皆仰之。今之君子。豈徒順之。又從而爲之辭。若使尊伯於此異說之誕。終身迷沒。不知其非則已矣已矣。今曰。不滯者有年。則是已覺其非而欲改之也。退之云。說乎故。不能卽乎新者。弱也。請自今痛去寂滅之見。反于吾道之正。如日月之旣晦而復明。則可與聖賢同歸。而四方之士莫不仰而快覩矣。豈不美哉。豈不樂哉。孔子曰。朝聞道。夕死可矣。伏見尊伯年旣高矣。若不及是時而反焉。則平生之學至勤矣。豈不深可惜哉。伏念迪後學無識。干a024_397d瀆至此者。亦知尊伯虛心玩理。必能如舜之舍己從人矣。伏惟恕其狂僭。迪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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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齋先生集卷之五 / 雜著 / 答忘機堂第四書
伏念迪質本戇騃。學乏泛濫。苦守管見。累瀆尊鑑。不覺支離之甚。死罪死罪。今承賜敎。辭旨諄諄。反覆不置。且去寂滅二字而存下學人事之功。迪之蒙許深矣。受賜至矣。更復何言。然而竊詳辱敎之旨。雖若盡去異說之謬。入于聖門之學。然其辭意之間。未免有些病。而至於物我無間之論。則依舊墜於虛空之敎。小子惑焉。韓子曰。荀與楊也。擇焉而不精。恐尊伯亦a024_398a未免於是。愚請姑卽衣網之說白之。蓋衣必有領而百裔順。網必有綱而萬目張。此語固善。然衣而徒有其領。斷其百裔。網而徒有其綱。絶其萬目則安得爲衣網。而其所有之綱領。亦奚所用哉。天下之理。體用相須。動靜交養。豈可專於內而不於外體察哉。聖門之敎。主敬以立其本。窮理以致其知。反躬以踐其實。而敬者又貫通乎三者之間。所以成始而成終也。故其主敬也。一其內以制乎外。齊其外以養其內。內則無貳無適。寂然不動。以爲酬酢萬變之主。外則儼然肅然。深省密察。有以保固其中心之所存。及其久也。a024_398b靜虛動直。中一外融。則可以馴致乎不勉不思從容中道之極矣。兩件工夫。不可偏廢明矣。安有姑舍其體而先學其用之云哉。子程子曰。由乎中而應乎外。制於外。所以養其中。顏淵事斯語。所以進於聖人。後之學聖人者。宜服膺而勿失。以此觀之。本體工夫。固不可不先。而省察工夫。又尤爲體道之切要。伏覩來敎有曰。主敬存心則於直內工夫有矣。而未見義以方外省察工夫。豈非但得衣之領而斷其百裔。但得網之綱而絶其萬目者哉。人之形體。固當先有骨髓。而後肌膚賴以充肥。然若但得骨髓。一切削去皮膚。a024_398c則安得爲人之體。而其骨髓亦必至於枯槁而無所用矣。況旣去皮膚而於骨髓亦未深得者哉。愚前所謂常加存養以立大本。爲酬酢萬變之主者。固尊伯主敬存心。先立其體之說。初非毀而棄之。未蒙照察。遽加罪責。不勝戰汗。來敎又曰。先立其體。然後下學人事。此語亦似未當。下學人事時。固當常常主敬存心。安有斷除人事。獨守其心。必立其體。然後始可事於下學乎。所謂體旣立則運用萬變。純乎一理之正而縱橫自得者。固無背於聖經賢傳之旨。然其所謂純乎一理。縱橫自得者。乃聖人從容中道之極致。體a024_398d旣立後。有多少工夫。恐未易遽至於此。伏惟更加精察。且如萬物生於一理。仁者純乎天理之公。而無一毫人欲之私。故能以天地萬物爲一體。然其一體之中。親疏遠近是非好惡之分。自不可亂。故孔子曰。仁者。人也。孟子曰。無是非之心。非人也。家語又曰。惟仁人。爲能好人。能惡人。以此言之。仁者雖一體萬物。而其是非好惡之公。亦行乎其中而不能無也。舜。大聖人也。固非有間而滯於所執者。然而取諸人爲善。舍己從人則舜亦不能無取舍之別矣。安有心無間則茫然與物爲一。更無彼此取舍好惡是非之可言。然a024_399a後爲一視之仁哉。伏願尊伯平心察理。勿以愚生之有是非取舍爲罪。而更以大舜之舍己從人自勉。幸甚幸甚。如其不然。但於匆遽急迫之中。肆支蔓虛蕩之辭。以逞其忿懟不平之氣。則安有君子長者之意乎。而斯道之明。將無時矣。豈不深可嘆哉。理執所見。言不知裁。伏地待罪。伏惟恕其狂僭。一賜照採。迪恐懼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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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 12년 정축(1517, 중종12) 선생 27세
○ 원일(元日)에 〈오잠(五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첫 번째는 〈외천(畏天)〉, 두 번째는 〈양심(養心)〉, 세 번째는 〈경신(敬身)〉, 네 번째는 〈개과(改過)〉, 다섯 번째는 〈독지(篤志)〉이다.
○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를 지었다.
망재(忘齋)는 진사(進士) 손숙돈(孫叔暾)이고 망기당(忘機堂)은 진사 조한보(曺漢輔)인데, 모두 경주 사람이다. ○ 글의 대략에 “이 이치의 근원은 비록 지극히 미묘하여 만물과 만화(萬化)가 모두 여기에서 나오지만, 실제로는 가리킬 수 있는 형상(形象)이 없다. 공부를 논한다면 단지 중(中)ㆍ정(正)ㆍ인(仁)ㆍ의(義)가 바로 이 일을 이해하는 곳이 되니, 또 학문을 강론하고 일에 대응하는 것 이외에 별도로 한 가지 근원적인 공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망기당의 논설은 이러한 공부를 모조리 내버리고 대번에 무극 태허의 본체를 내 마음의 주재로 삼아, 천지 만물을 나를 중심으로 모이게 하여 운용에 막힘이 없게 하고자 한다. 이것은 하늘에 오르려고 하면서 사다리가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바다를 건너려고 하면서 교량이 없는 것을 헤아리지 않는 것과 같은 격이니, 마침내 허무하고 고원한 곳에 떨어져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하였다.
또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라는 것을 ‘적(寂)’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극한 적 가운데에 이른바 ‘아, 심원하여 그치지 않는다.〔於穆不已〕’라는 것이 존재하여 화육(化育)의 유행이 위아래에 밝게 드러나는 것이니, 어찌 다시 ‘멸(滅)’ 자를 ‘적’ 자 아래에 붙일 수 있겠는가. 시험 삼아 마음〔心〕을 가지고 말해 보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이 발하지 않아 혼연히 중(中)의 상태로 있는 것은 이 마음의 본연의 체로서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감응하여 마침내 통하는 데 미치면 희로애락의 발함이 모두 절도에 맞아 본연의 묘리(妙理)가 이에 유행(流行)하게 되니, 선유가 말한 ‘우리의 적은 고요하되 감응한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만약 적하고 또 멸한다면 말라 죽은 나무나 불 꺼진 재일 뿐이니, 천성을 멸하는 데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4월에 지은 〈향정혜사음록즉경(向定慧寺吟錄卽景)〉 시 40운(韻)과 〈차조용수(次曺容叟)〉 절구 2수가 있다.
○ 7월에 조정에 들어가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 10월에 정자(正字)로 승진하였다.
정덕 13년 무인(1518, 중종13) 선생 28세
○ 망기당(忘機堂)의 편지에 답하였다.
편지는 모두 4편이다. 첫 번째 편지의 대략에 “인(人)과 물(物)은 형질(形質)이 있고 이 이(理)는 형질이 없습니다. 형질이 있는 인과 물은 생사(生死)와 시종(始終)이 없을 수 없는데, 생사와 시종은 실제로 형질이 없는 이 이(理)가 그렇게 하는 것이니, 형질이 없는 이(理)가 어찌 일찍이 종식(終熄)되어 소멸하는 때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천지의 중(中)을 받아서 태어났으니, 그 마음은 곧 천지에 음과 양이 있는 것과 같아 태극의 진(眞)이 여기에 내재합니다. 사물에 감응되기 전에는 맑게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것도 없는 듯하니, 이것이 이른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無聲無臭〕’ 오묘함이고, 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고요함〔寂〕’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적(寂)한 가운데 이 이(理)의 혼연함이 갖춰지지 않은 바가 없기 때문에 감응하여 마침내 천하의 일에 통하는 것입니다. 만약 적하고 또 멸(滅)한다면 이는 적연(寂然)한 목석(木石)일 뿐이니, 천하의 대본이 되는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내시니, 물(物)이 있으면 법칙이 있도다.’라고 하였는데, 물은 인사(人事)이고 법칙은 천리(天理)입니다. 사람이 천지 사이에서 물을 떠나 홀로 설 수는 없으니, 어찌 하학(下學)의 실질적인 일을 먼저 하지 않고 공허한 곳에 정신을 쏟아서 상달(上達)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천리는 인사에서 떨어져 있지 않으니, 인사를 다해서 실천과 이해를 겸비하여 관통하는 지극한 경지에 이른다면, 내 마음속의 천리가 여기에 이르러서 온전해져 만 가지 변화에 대응하는 때에 본원(本源)을 만나 나에게 실질적인 쓰임이 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됩니다.” 하였다.
또 “‘존양(存養)’이란 ‘경을 행하여 안을 곧게 함〔敬以直內〕’으로써 발하기 전에 보존하여 본연의 천리를 온전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 ‘마음을 무극(無極)의 진(眞)에 노닐어 허령(虛靈)한 본체가 내 마음의 주재(主宰)가 되게 한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까이 자신에게 돌이켜 생각하는 공부를 하지 않고 공허하고 오묘한 데에 마음을 쏟게 하는 것이니, 그 해로움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더구나 허령은 본래 내 마음의 본체이고, 무극의 진은 본래 허령 속에 갖춰진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마음을 보존하는 공부에 힘쓰고 인욕의 사사로움에 가려지지 않게 하여 광대하고 고명한 본체를 이루면 될 것입니다. 지금 ‘마음을 무극에 노닌다.’라고 하고, ‘내 마음의 주재가 되게 한다.’라고 하시니, 이것은 무극 태극(無極太極)을 마음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겨 별도로 마음이 거기에 노닌 다음에야 주재가 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였다.
두 번째 편지의 대략에 “주신 편지에서 허령과 무극의 진(眞)을 거론하면서 ‘허무가 곧 적멸이고 적멸이 곧 허무이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유가의 말을 빌려다가 이단의 주장을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유(先儒)가 일찍이 분석하기를 ‘우리의 허(虛)는 비었지만 있고 저들의 허는 비어서 없으며, 우리의 적(寂)은 고요하되 감응하고 저들의 적은 고요하여 멸(滅)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유가와 불가에서 말하는 허적(虛寂)은 글자는 같지만 담고 있는 뜻은 현격하게 다르니, 진실로 분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극이라는 것은 단지 이 이치의 오묘함이 그림자도 없고 메아리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는 것을 형용한 말일 뿐이고, 저들이 말한 ‘무(無)’와는 같지 않습니다.” 하였다.
또 “‘경을 주로 하여 마음을 보존해서 위로 천리를 통달한다.〔主敬存心而上達天理〕’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이 정말 좋습니다. 그러나 ‘상달천리’ 위에 도리어 ‘하학인사(下學人事)’라는 네 글자가 빠진 것은 성문(聖門)의 가르침과 차이가 있습니다. 천리는 인사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어서 아래로 인사를 배우면 자연히 위로 천리에 통달하게 됩니다. 만약 하학(下學)의 공부를 하지 않고 곧장 상달(上達)하려고 한다면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의 주장이 되는 것을 어찌 숨길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세 번째 편지의 대략에 “주신 편지에 ‘경을 행하여 안을 곧게 하고 하늘의 밝은 명을 항상 돌아보면 나의 마음이 굳게 정해져서 바뀌지 않게 된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진실로 존양을 이르는 것으로 정(靜)할 때의 공부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학(下學)의 일을 갑자기 빼 버려 체험과 성찰이 전혀 없다면 동(動)할 때의 공부에는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도를 추구하는 공부가 허술하고 실질적이지 못해서 이단의 공허한 주장으로 흘러들고 마는 것입니다. 삼가 보건대 일상적으로 사물에 대응하는 즈음에 인욕에 얽매이는 경우가 없지 않고, 더러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것이 바르지 못하여 크게 허령한 본체를 온전히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어찌 경을 행하여 안을 바르게 하는 공부는 대충 하였지만 의를 실천하여 밖을 방정하게 하는 이 한 가지 공부가 없기 때문에 도를 체득하는 것이 정밀하지 못하여 혹 여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또 “세상 사람들이 환형(幻形)을 견실(堅實)한 것으로 고집하는 잘못을 논파하기 위해서 ‘적멸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도 크게 이치에 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형체를 가진 것은 모두 하늘이 부여한 바로서 여기에는 지극한 이치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문(聖門)의 가르침은 매양 용모와 형색에서 공부하여 하늘이 내게 부여한 법칙을 다하고 허령한 명덕(明德)의 본체를 보존하여 지키게 한 것이니, 이렇게 하면 어찌 인심(人心)의 위태로움으로 빠져들 리가 있겠습니까. 맹자는 ‘형색(形色)은 천성(天性)인데, 성인만이 하늘이 부여한 형색의 이치를 다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형색을 환영(幻影)으로 여겨 반드시 사람들로 하여금 외형적인 형상(形象)을 끊어 버리고 허령한 본체만을 지키도록 하고서야 도가 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또 “‘하학(下學)을 통해서 상달(上達)하는 것은 나이 어린 초학의 선비를 가리켜서 한 말이요, 호걸(豪傑)의 선비는 그렇지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공자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성인(聖人)으로서 나이 또한 어리지 않았지만 오히려 하학의 공부를 그만두지 못했는데, 더구나 공자에게 미치지 못하면서 대번에 하학을 내팽개치고 힘쓰지 않더라도 천리에 상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는 분명 불가에서 주장하는 돈오(頓悟)의 가르침입니다.” 하였다.
네 번째 편지의 대략에 “주신 편지에 ‘경을 주로 하여 마음을 보전한다.〔主敬存心〕’라고 하셨으니 안을 곧게 하는 공부는 있으나, 의(義)를 실천하여 밖을 방정하게 하는 성찰 공부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어찌 옷의 옷깃만 얻고 옷자락들을 잘라 내며, 그물의 벼리만 얻고 그물눈들을 끊어 버린 격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형체는 본디 먼저 골수(骨髓)가 있은 뒤라야 피부가 그에 힘입어 튼실하게 붙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골수만을 얻고 피부를 일절 다 제거해 버린다면 어떻게 사람의 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골수마저도 반드시 말라서 쓸 곳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더구나 이미 피부를 제거한 데다 골수마저 온전하지 못한 경우라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앞서 ‘항상 존양 공부를 하여 대본을 세움으로써 온갖 변화에 대응하는 주재가 되게 한다.’라고 한 것은 본디 어르신이 말씀하신 ‘경을 주로 하여 마음을 보존해서 먼저 그 본체를 확립한다.’라는 것이니, 애당초 그 주장을 헐뜯어 폐기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또 “‘먼저 그 본체가 서고 난 뒤에 아래로 인사를 배운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도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아래로 인사를 배울 때에 당연히 항상 경을 주로 하여 마음을 보존해야 하는 것이지, 어찌 인사를 배제하고 그 마음만을 지켜서 반드시 그 본체가 선 다음에야 비로소 아래로 인사를 배우겠습니까. 이른바 ‘본체가 먼저 서면 온갖 변화에 맞추어 운용함이 순전하게 한 이(理)의 바름에서 나와 어떤 상황에서도 마땅함을 얻게 된다.’라는 것은 진실로 성현이 남긴 경전(經傳)의 뜻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순전하게 한 이의 바름에서 나와 어떤 상황에서도 마땅함을 얻게 된다.’라는 것은 바로 자연스럽게 도에 맞는 성인의 지극한 경지이니, 본체가 이미 선 뒤에 얼마간의 공부가 있다 해도 대번에 여기에 이르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또 ‘만물이 한 이에서 생겨난다.’라는 것은, 인자(仁者)는 천리의 공변됨에 순수하여 털끝만 한 인욕(人欲)의 사사로움도 없기 때문에 천지 만물과 일체(一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체가 되는 속에서도 친함과 소원함, 멀고 가까움,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의 구분은 자연히 어지럽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인(仁)이라는 것은 사람다움이다.’라고 하고, 맹자는 ‘시비(是非)를 판단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고,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또 ‘어진 사람이라야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인자는 비록 만물을 일체로 삼지만,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의 공변됨은 또한 그 속에서 행해져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 〈차망기당운(次忘機堂韻)〉 5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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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포시집(灌圃詩集) 어득강(魚得江)생년1470년(성종 1)몰년1550년(명종 5)자자유(子游)호관포당(灌圃堂), 혼돈산인(渾沌山人)본관함종(咸從)
灌圃先生詩集追錄 / 追錄 / 奉呈晦齋道契
曾看紫玉山中好。公作書堂爲此溪。今日英靈却驚怪。生曾不見駭鷄犀。
混沌溪山容我老。靑年住此白烏頭。世人皆識吾貧鬼。萬斛烟霞富可羞。
奉次惠韻 晦齋
自知踈懶合幽棲。卜築由來愛紫溪。捐彈始悟忘眞鵲。處世猶嫌照水犀。
多公早占溪山勝。投紱淸朝未白頭。自嘆平生心事謬。養眞經世兩堪羞。
회재집 제3권 / 율시(律詩) 절구(絶句) / 주신 시에 삼가 차운하다〔奉次惠韻〕
게을러서 은거 생활 맞는 줄을 잘 알기에 / 自知疏懶合幽棲
본래부터 사랑한 자계에 집 지었네 / 卜築由來愛紫溪
진작 잊은 걸 깨닫고 새총을 버렸으나 / 捐彈始悟忘眞鵲
처세에는 수서를 비추는 게 혐의쩍네 / 處世猶嫌照水犀
부럽게도 공은 일찍 경치 좋은 곳 차지해 / 多公早占溪山勝
늙기 전에 맑은 조정 벼슬 그만두었지요 / 投紱淸朝未白頭
나는 평생 일과 마음 어긋남을 탄식하니 / 自嘆平生心事謬
성품 함양 세상 경영 둘 다 못해 부끄럽소 / 養眞經世兩堪羞
평생 두 가지 일에 뜻을 두었지만 지금까지 이루지 못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주-D001] 진작(眞鵲) …… 버렸으나 : 장자(莊子)가 조릉(雕陵)이라는 곳의 울타리 안에서 산책을 하는데 이상한 까치가 장자의 이마를 스쳐 날아가서 밤나무 숲에 내려앉았다. 장자가 새총을 들고 살금살금 다가가서 그 까치를 잡으려고 하다가 보니, 그 이상한 까치는 사마귀를 노리는 데 정신이 팔려 사냥꾼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사마귀는 나무 그늘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노리는 데 정신이 팔려 까치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 줄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모든 사물이 서로 해를 끼치는 관계임을 알고는 새총을 버리고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하는 순간에 산지기가 쫓아와서 장자를 호되게 꾸짖었다. 이 일로 장자가 며칠 동안 불쾌해하였으므로 제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장자가 “나는 바깥의 형체에 정신을 빼앗겨 자신을 잊어버렸다. 나는 조릉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서 내 몸을 잊었고, 이상한 까치가 내 이마를 스치고 밤나무 숲으로 들어간 것을 보고는 나의 본모습을 잊었다. 그런데 산지기가 나를 밤을 훔친 범죄자로 여겼기 때문에 불쾌해하는 것이다.” 하였다. 《莊子 山木》 진작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 즉 참된 자아이다. 장자가 새를 잡으려다가 자신이 형체에 정신을 빼앗겨 자신의 본모습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고 새총을 내려놓았던 것처럼, 세속과 물질적인 욕망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말한다. 즉 세속적인 부귀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자계산에 은거하려 했다는 뜻이다. 까치와 관련된 고사이므로 아래 구의 ‘수서(水犀)’와 대(對)를 맞추기 위해서 이렇게 쓴 것이다.
[주-D002] 처세에는 …… 혐의쩍네 : 세속적인 물욕이나 부귀영화를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에 나와 벼슬살이를 함에 있어서는 작은 일에도 시시비비를 가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혐의쩍다는 뜻이다. 수서(水犀)는 무소뿔을 가리킨다. 무소뿔에 불을 붙여 비추면 깊은 물속의 괴물(怪物)들을 다 볼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진(晉)나라 온교(溫嶠)가 우저기(牛渚磯)에 이르렀는데, 그 물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데다 그 속에 온갖 괴물들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온교가 무소뿔에 불을 붙여 비추어 보니 온갖 기이한 형상을 한 수족(水族)들이 다 보였다고 한다. 《晉書 卷67 溫嶠列傳》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