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포천]옥병서원(玉屛書院), 창옥병암각문(蒼玉屛巖刻文)
답사는 즐거워/문화재답사 2020. 2. 8. 23:02
옥병서원(玉屛書院), 창옥병암각문(蒼玉屛巖刻文)
박순선생 신도비가 있는 곳에 박순선생을 기리는 옥병서원이 있다. 문은 잠겨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담 너머로 안을 조망할 수는 있다. 근자에 복원한 곳이다. 이곳에서 영평천으로 내려가면 박순선생이 선조로부터 받은 윤음(綸音:임금의 말씀) 8자 송균절조(松筠節操) 수월정신(水月精神)이 새겨져 있는데 한석봉 글씨이다. 그 옆으로 박순선생 시가 새겨져 있다. 사진으로 소개한다. |
옥병서원(玉屛書院)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주원리에 있는, 박순(朴淳)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조선 후기 서원. 박순의 자는 화숙, 호는 사암, 본관은 충주이다. 1553년(명종 8)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대사헌, 대사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다. 선조가 ‘송균절조수월정신(松筠節操水月精神)’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청렴하고도 강직하였다. 나주의 월정 서원, 광주의 월봉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사암집(思菴集)』이 있다. 1658년(효종 9)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박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8년(숙종 24)에 이의건(李義健)과 김수항(金壽恒)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713년에 ‘옥병(玉屛)’이라고 사액되었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 터에 매안(埋安)하고 단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1926년에 김성대(金聲大)·이화보(李和甫)·윤봉양(尹鳳陽)을 추가로 제향하였고, 1978년에 이명우(李命雨)를 회장으로 한 옥병 서원 복원 추진회를 결성하여 1980년에 복원하였다. 1986년 4월 9일 포천시 향토 유적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창옥병암각문(蒼玉屛巖刻文)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암각문. 창옥병(蒼玉屛)은 포천시 창수면에 있는 영평 8경의 하나이며, 글씨를 쓴 사람은 당시 대명필가인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 바위에 새긴 이는 신이(辛夷)라는 사람이다. 창옥병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1523~1589]이 즐겨 찾던 경승지이다. 15년간 영의정에 재직하던 그가 영평으로 거처를 옮긴 때는 1586년(선조 19) 8월이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탄핵을 받았다. 이때 선조는 여러 차례 만류하였지만 스스로 물러나 지금의 포천시 창수면 옥병동에 거주하였다. 박순은 거처를 영평에 자리 잡은 뒤 창옥병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지내면서 1588년(선조 21) 빼어난 8개소에 이름을 붙였다.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688번지에 옥병 서원이 위치하며, 옥병 서원 아래로는 영평천이 흐르는데 이곳에 창옥병 암각문(蒼玉屛巖刻文)이 새겨져 있다. 선조가 윤음(綸音:임금의 말씀) 8자 송균절조(松筠節操) 수월정신(水月精神)을 써서 하교한 글과 박순 선생의 「제이양정벽(題二養亭壁)」이라는 시를 김수증이 1700년경에 써서 암각한 글도 있다. 창옥병 암각문은 관련한 사실이 문헌 자료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어 구전에 근거하거나, 단순히 경승지를 유람하다 즉흥적으로 각자한 자료와 구별된다. 또한 하나의 암각문이 각자된 것이 아니라, 무려 11점의 암각문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시된다. 우리나라 서예사에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디지털포천문화대전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포천시 향토유적 제26호(서원), 향토유적 제41호
|
문화재명칭 | 옥병서원(玉屛書院), 창옥병암각문(蒼玉屛巖刻文)
|
소재지 | 경기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210(서원), 주원리 687-1 |
관리자(연락처) | 포천시
|
▼ 옥병서원(玉屛書院) 안내판
▼ 옥병서원(玉屛書院) 홍살문
▼ 옥병서원(玉屛書院) 현판
▼ 옥병서원(玉屛書院) 중앙에 숭현각(崇賢閣), 좌에 창옥제, 우에 송월당이 있다.
▼ 옥병서원(玉屛書院) 앞 영평천에는 창옥병암각문(蒼玉屛巖刻文)이 있다. 안내판
▼ 영평천으로 내려가는 계단
▼ 창옥병 암각문(蒼玉屛 巖刻文) 안내판
▼ 창옥병 암각문(蒼玉屛 巖刻文)... 송균절조(松筠節操) 수월정신(水月精神)
▼ 창옥병 암각문(蒼玉屛 巖刻文)... 선조가 내린 윤음(綸音:임금의 말씀) 8자를 새겼다. 글씨는 한석봉의 글씨.
...........................
Yanghoonshik
2022년 10월 4일 오후 04:03
포천 사암 박순의 옥병서원 답사
사암 박순(思菴 朴淳, 1523~1589)은 본관은 충주이며,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이다.
그는 1553년 정시 문과에 장원급제한 이후 대사헌, 대사간 등 청요직을 거치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 정승생활을 14년여 동안 역임한 조선 중기 문신이다.
그가 정계 은퇴 후 고향에 가지 않고 이곳 영평으로 와서 배견와(拜鵑窩)를 짓고 여생을 마무리한 것은 아마도 외동딸때문으로 보인다. 근처에 이양정(二養亭)을 짓고 문우들과 시와 술을 벗하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기묘명현(己卯名賢) 목사(牧使) 박상(朴祥)이 그의 중부(仲父)다.
옥병서원(玉屛書院)은 포천 향토유적으로 충주박씨 사암 박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효종 9년(1658) 세웠다. 숙종 24년(1698) 이의건(李義健)과 김수항(金壽恒)을 추가 배향하였고, 숙종이 1713년 옥병(玉屛)’이라고 사액하였다. 사우(祠宇)인 숭현각에는 박순을 주벽(主壁)으로 이의건· 김수항·김성대·윤봉양·이화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6년 복구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1981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하니 40여 년 된 셈이다.
서원 좌측 앞쪽에는 총탄을 맞아 훼손 된 듯한 우암 송시열의 신도비가 서 있고 그곳에서 몇 발짝 옆에 새롭게 세운 신도비도 있다. 서원 현판은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로 보인다.
서원에서 나와 우측 길로 돌아 마을 안 길 따라 500여 미터 가다보면 우측 야산 위에 사암의 묘소가 있다. 묘 둘레석에 글이 있는데, 좌측 사암은 선조가 내린 8자 윤음 중에서 4글자를 따서 적은 송균수월(松筠水月)과 부인 개성고씨 묘에는 청신배덕(淸愼配德)이 새겨져 있다. 가볍게 묵념을 하고 봉분을 돌아보며 최근 세운 기념비의 시문을 읽다가 내려왔다. 다시 서원 앞 주차장으로 돌아와 아래를 내려다 보니 멀찍이 영평천이 흘러내린다.
이곳 영평 천변의 암벽에 암각한 글자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이곳을 창옥병이라 일컫는다.
아내와 함께 영평천으로 내려갔다. 천변의 바위를 따라 산재한 암각문을 찾아 보니 산금대(散襟臺), 토운상(吐雲床), 청냉담(清泠潭), 수경대(水鏡臺) 등이 보인다.
먼저 세로로 두 글자씩 새겨진 것은 송균절조(松筠節操)수월정신(水月精神) 8자다. 이는 선조 임금이 탄핵으로 물러나는 박순에게 “영의정은 절조(節操)가 송균(松筠)같고 정신(精神)은 수월(水月)같은 현상”이라는 뜻으로 교서를 내렸는데 이 내용을 각자한 것이다.
수경대에 사암 박순의시
<제이양정벽>이 각자되어 있다. 정자 이름 이양(二養)은 ‘덕과 몸 두 가지를 기른다’는 의미로 송나라의 도학자 정이천(程伊川 , 1033~1107)의 뜻을 취한 것이다.
곡조시시문일개(谷鳥時時聞一箇)
-때때로 한 번씩 들려오는 산 새소리
광상적적산군서(匡床寂寂散群書)
-쓸쓸한 평상엔 책들만 널브러졌다.
매련백학대전수(每憐白鶴臺前水)
-늘 안타깝다! 백학대 앞의 시냇물
재출산문변대어(纔出山門便帶淤)
-겨우 산문 나서면 곧 흙탕물 될 텐데
당시 사암은 화담 서경덕의 문인이자 정사룡, 박은과 더불어 당시풍의 시를 쓴 인물이다. <수경대>시는 만년에 이곳에 은거하며 정치생활의 맛(?)을 담아낸 소감처럼 보인다.
한 참을 둘러보던 영평천에서 나와 포천 창수면 오가리에 있는 금수정(金水亭)으로 향했다. 조선후기 3대 명승지(금강산, 도봉산, 금수정)로 알려진 이 곳은 원래 금수정(錦水亭)의 비단금을 쇠금으로 바꾼 듯하다. 바로 주변에 안동 김씨의 고택이 있는데 이들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금수정 정자 주변에선 기이한 새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곳 풍광과 부조화스럽게 큰 규모로 놓인 척약재 김구용의 한시, 봉래 양사언의 시조 빗돌 등은 현대식 위용을 자랑한다.
정자로 오르니 사방으로 문사들의 시문과 중수기 등이 즐비하고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개안이 되는 듯 멀리 경치들이 들어온다!
주로 조선조 인물들의 시문인데, 봉래 양사언, 사암 박순, 한음 이덕형, 동주 이민구, 상촌 신흠, 농암 김창협, 서계 박세당 등의 시문과 번암 채제공의 중수기가 걸려 있어 이곳이 명사들이 찾았던 곳이라 짐작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