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유령공주 염향은 덜덜 떨며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다듬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옷은 이미 전부 찢어진 상태였다. 그녀는 벌거벗은 몸으로 어느 남자를 마주 대해도 전혀 두렵지 않았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여인 앞에서는 매우 부끄럽게 느껴졌다. 주칠칠이 냉랭하게 말했다. "이곳으로 들어와라, 여기는 약간 어두우니까." 염향은 자신도 모르게 주렴 속의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동굴 안은 건조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빗속보다는 많이 따뜻했다. 염향의 몸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끊임없이 떨어댔다. 주칠칠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돌연 옷을 벗어서 그녀를 덮어줬다. 염향은 마치 어린애가 사탕을 받은 것처럼 옷을 꼭 붙잡고는 자신을 그 옷으로 감쌌다. 마치 전에는 전혀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는 듯이. 염향의 고개는 더욱 아래로 떨구어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다. 너도 불쌍한 여자인 것 같구나." "나를 알고 있나요?" 주칠칠이 담담하게 말했다. "알고 있어." 염향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저를 미워하지 않나요?" "너를 미워해? 내가 왜 너를 미워해야 하지?" "심랑...... 심 공자 그 분......." 주칠칠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닥쳐라! 다시는 내 악에서 그 이름을 입에도 올리지 마라!" 염향은 뒤로 반 걸음 물러서며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이름을 입에도 올리지 말라고요? 왜죠?" 주칠칠의 얼굴이 다시 냉막해지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너는 이제부터 내 악에서 다시는 다른 남자의 이름도 말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나는 왕련화 공자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주칠칠의 태도는 매우 조용했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염향은 마치 채찍질을 당한 느낌이었다. 염향은 다시 반 걸음 뒤로 물러서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이군요. 정말이었군요!" "왜 정말이 아니겠어?" "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은 어째서 그에게 시집을 가려는 것이죠? 당신은 어째서 그처럼 몰염치하고 비겁하고 더러운 남자에게 시집을 가려는 것이죠? 당신은 차라리 돼지에게 시집을 갔으면 갔지 그에게는 가지 말아요." 주칠칠은 화를 내지도 않고 단지 냉소만 흘렸다. "내가 왜 그에게 시집을 가면 안 된다는 것이지?" 염향은 숨을 길게 들이 쉬었다. "당신은 알고 있나요? 그는......." "너는 내 앞에서 그의 험담을 할 필요가 없다.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가 방금 너와 잠을 잤어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염향은 주칠칠의 입에서도 ‘잠을 잔다'라는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염향은 이 순진한 소녀가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너무나 철저하게 변한 것이다. 주칠칠이 물었다. "너는 놀랐느냐?" "비록 놀라기는 했지만 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은 바로 왕 공자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죠. 만약에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미치도록 질투를 할 거예요." "그럴까? 그럴 지도 모르지." "당신이 그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시집을 가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심랑을 미워하고 있기 때문이죠. 당신이 심랑을 미워하는 것은 바로 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즉 당신은 미치도록 심랑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그를 미치도록 미워하는 것이죠." 주칠칠은 이를 악물었다. "네가 또다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면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고 말 테다." "나를 죽이세요. 상관없어요. 나는 그래도 당신에게 말해야겠어요. 당신은 그를 미워해서는 안 되요. 당신은 그처럼 당신을 대해주는 남자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거예요. 만약 한 남자가 심랑이 당신을 대하듯 나를 대해준다면 나는...... 나는....... 나는 당장 그를 위해 죽는다고 해도...... 즐거운 마음으로 죽을 수 있을 거예요." 주칠칠이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영원히 그처럼 나를 대해주는 남자를 만날 수 없을 거라구? 정말로 맞는 말이군. 세상에서 그처럼 양심이 없는 사람도 드물지." "그 분이 당신에게 잘못했다고 생각하나요?" "아주 잘했지. 그는 너무도 내게 잘했지. 너무 잘했어......." 그녀는 미친 듯이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염향이 말했다. "그가 어떻게 당신을 대했는지 당신은 영원히 모를 거예요." 주칠칠은 몸을 돌려 차가운 바위산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목이 메었다. "모르는 것이 제일 좋은 거야. 나는 영원히 알고 싶지 않아." "당신은 왜 그분이 왕 부인과 혼약을 정했는지 아시나요?" 주칠칠이 다시 이를 악물었다.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모르겠어." "당신은 그 분이 왕 부인의 유혹에 못이겨서 승락한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물론이지. 나는 단지 계집애일 뿐이지만 그녀는......." 주칠칠은 갑자기 바위에 엎드려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나는 영원히 될 수가 없어. 하지만 남자들은 모두 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좋아하잖아. 그녀의 그 눈, 그...... 그 허리는 난 정말 구역질이 날 지경이야." "당신은 틀렸어요. 비록 수많은 남자들이 그런 모습을 좋아하지만 심랑만큼은 절대로 틀려요.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런 유혹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심랑 그 분 뿐이니까요." 주칠칠이 목메인 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는 왜...... 왜......." "그 분이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모두 당신을 위한 것이에요. 당신은 알고 있었나요? 만약 그 분이 그 혼약을 승락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당할 결과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아마 당신은 절대로 상상 못할 걸요?" 주칠칠의 몸이 떨렸다. "하지만. 그는......." "그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희생을 하고 무슨 일이라도 해요. 하지만 당신은...... 오히려 그 분을 몰라 줬어요. 당신은 그를 배반했어요. 그 분은 비록 마음 속 가득히 고통을 갖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바로 그가 고통을 당할지언정 당신이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죠." 주칠칠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그녀를 노려보고는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너는 왜 그를 위해 변명하는 거지? 설마 너와 그가......." 염향이 냉소를 쳤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모욕하는 것이에요. 솔직히 나도 그 분을 유혹해 봤어요.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분을 유혹해 봤지요. 다른 어떠한 남자라도 그런 유혹은 견딜 수 없었을 텐데. 하지만 심랑. 그 분은...... 그 분은 아예 나는 안중에도 없었어요. 그의 마음 속에는 오로지 당신뿐이었지요."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뿜더니 서서히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분에게 탄복했어요. 그런 남자를 알게 된다면 그 어느 여자라 해도 다들 탄복할 거예요. 나는 비록 천한 탕녀지만 사람임에는 분명해요. 나는 양심을 저버리고 말하지는 못해요." 주칠칠은 눈물이 다 말라버린 듯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녀는 공허하게, 무감각하게 염향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모든 사람들은 다 심랑을 이해하는 것 같은데 왜 나만 그를 이해하지." "당신은 그를 이해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그를 깊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건 당신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에요. 애정이란 본래가 모든 여자들을 맹목적으로 만드니까요." 주칠칠은 망연자실하게 앉아서는 하염없이 동굴 밖의 빗물 주렴만 바라봤다. 한참 동안 말없이, 그저 눈물만 끊임없이 뺨 위로 흘리고 있었다. 염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도 늦지는 않았어요. 아직은 모든 것을 만회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불행한 여자예요. 평생을 즐거움이라고는 얻을 수 없는 팔자죠. 하지만 당신...... 당신은 아직은 만회할 수 있어요. 당신은 저보다 훨씬 행복할 거예요......." 염향은 이를 악물고 사력을 다해 절대 울지 않으려고 참았지만 결국에는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 마주 보면서 통곡을 했다. 얼마인지 시간이 흘러갔다. 갑자기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물밖에 흘릴 줄 모르는 여자는 모두가 바보야, 그리고 밥통이지." 이 목소리는 비록 냉막했지만 또한 말할 수 없는 교태로움이 감돌고 있었다. 동굴 안에는 분명 다른 사람이 없었는데 이 목소리는 동굴의 깊은 곳에서 전해오고 있었다. 염향과 주칠칠이 급작스레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한 인영이 서 있었다. 유령 같은 백색의 인영이 어두운 동굴 깊은 곳에 서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누구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단지 한 쌍의 반짝이는 눈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 한 쌍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요상한 매력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시키는 대로 다 하게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한 쌍의 눈은 전혀 깜박이지도 않고 그녀들을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여자가 늘 괴롭힘을 당하는 이유는 바로 언제나 눈물만 흘리고 통곡만 할 줄 알기 때문이지. 하지만 눈물은 어떤 일에도 도움이 되지는 않아." 염향은 이 한 쌍의 눈을 보자 전신이 차거워짐을 느끼고 온 몸을 구부렸다. 주칠칠은 가슴을 내밀면서 큰소리로 물었다. "너는 그럼 흘리지 않는단 말이냐?" "전혀!" "그렇다면 전혀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단 말이냐?" 백의 인영이 냉랭하게 답했다. "내가 겪은 고통을 너희들은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지. 하지만 나는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 나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어." 주칠칠이 다시 물었다. "당...... 당신은 그럼 여자가 아니란 말이냐?" 백의 인영이 조용히 말했다. "나는 여자가 아니다. 나는 본래부터 사람이 아니다." 주칠칠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오싹하여 진저리를 쳤다. "네...... 네 말은 대체 무슨 뜻이지?" 백의 인영은 서서히 말했다. "나는 유령이다. 남들은 모두가 나를 유령궁주라고 부르지." 화신사(花神祠)는 황폐하여 다 쓰러져 가는 곳이었다. 비록 쾌활림의 한 구석에 위치해 있었지만 이 새로 가꾼 정원하고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화신사는 분명히 꽃을 사랑하는 한 이름모를 사람이 남긴 것이지 결코 이 정원의 주인이 지은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정원의 주인도 이 사당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만을 믿는가 보다. 아니면 모든 일에 대해 일절 믿지 않는지도 모르고....... 심랑은 화신사로 들어가서는 빗물을 털어냈다. 물론 이미 젖어든 비는 전부 다 털어낼 수는 없지만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바로 그의 마음이 매우 혼란스럽다는 것을 나타낸다. 결국 독고상과 왕련화도 뒤따라서 들어왔다. 그들은 곧장 그 동굴 속으로 뛰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들 마음 속에는 아직도 의구심과 두려움이 남아서 갑작스레 현실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를 않았던 것이다. 독고상이 말했다. "그 산굴은 바로 이 사당 뒤에 있소." 왕련화가 말을 받았다. "주칠칠이 웅묘아를 봤는지 모르겠군요." "그 동굴은 매우 깊고 웅묘아도 동굴 깊은 곳에 숨겨져 있소." "여자는 동굴 깊은 곳으로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오. 주칠칠이 비록 다른 여자와는 틀린 점이 있다지만 결국 여자는 여자 아니겠소?" 독고상이 냉랭하게 말했다. "또 헛소리군." "그렇소. 확실히 헛소리오. 하지만 귀하는 왜 여전히 듣고만 있소? 어서 빨리 들어가서 살펴야 하는 것이 아니오?" 독고상은 안색이 변하더니 막 악으로 뛰쳐가려 했다. 갑자기 심랑이 외쳤다. "잠깐만!" 독고상이 물었다. "당신도 헛소리를 하려는 것이오?" "둘다 어서 이리 와서 이 화신상을 보시오." 신상은 물론 파괴되어 있었다. 이 어두컴컴하고 비오는 날에 이 파괴된 신상에는 더욱 더 음산한 귀기가 서리고 있는 듯했다. 만약 가까이 다가서지 않으면 그 신상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 신상은 시골 아가씨 차림이었다. 왼손으로는 꽃 한 송이를 들어 가슴에 안았고 오른손은 바로 그 꽃의 꽃잎을 가볍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 화신사는 비록 이처럼 낡았지만 신상의 조각만큼은 매우 정교하여 이 어두운 광선 속에서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특히 그 가볍고 부드러운 손짓은 마치 이 ‘화신'이 꽃을 보며 무한한 연민의 정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그녀의 눈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결코 자신의 손에 든 꽃을 보고 있지 않았다. 왕련화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음, 이 신상은 확실히 재미가 있군. 이 신상을 조각한 사람은 아마도 어떤 우의(寓意)를 담은 듯한데 우리는 알아낼 수 없겠군요." 심랑이 말했다. "알아 맞출 수 없는 것이겠지." "더구나 이 화신은 시골 아가씨이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오. 내 기억으로는 옛전설에 따르면 이 화신은 마땅히......." 독고상이 차갑게 왕련화의 말을 가로 막았다. "지금은 고고(考古)를 할 때가 아니오. 이 화신이 남자든 여자든, 늙은이든, 어린애든, 아니면 승려든, 비구니든,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소." 심랑이 말했다. "하지만 이 화신은 우리 모두와 관계가 있소." 독고상이 물었다. "어떤 관계요?" "그녀의 얼굴을 봤소." 왕련화가 엉겁결에 내뱉었다. "아! 맞아, 그녀의 얼굴은......." 독고상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역시 얼굴빛이 변했다. "이 얼굴은 한 사람을 닮았소."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왕련화가 입을 열었다. "그녀를 닮았군." 심랑이 물었다. "독고 형, 당신은 닮았다고 생각하오?" 독고상의 목소리가 가라 앉았다. "그렇소, 칠 할(七割)정도 닮은 것 같소." 화신의 얼굴은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다웠다. 눈썹꼬리와 눈초리에는 뭔가 못다한 비애와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신통하게도 백비비와 칠 할 정도 닮았던 것이다. 왕련화는 넋이 빠질 정도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말이 안 돼." "뭐가 말이 안된다는 것이오?" 독고상의 물음에 왕련화가 말했다. "이 사당은 지은 지는 적어도 십 년은 족히 됐을 거요. 그렇다면 이 신상이 조각됐을 때 백비비는 아직도 육칠 세의 어린애일 뿐인데 그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독고상은 손뼉을 쳤다. "그래, 이 신상을 만든 사람이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백비비가 성장한 후의 모습을 알 수 있었겠소? 이 신상은 비록 그녀와 닮았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우연인 듯하오." "이것은 우연이 아니오." 심랑의 말에 독고상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니라고?" "이 신상은 백비비를 본으로 삼아 만든 것이 아니오." 독고상은 더욱 이상히 여기면서 물었다. "이 신상이 백비비를 본으로 삼아 만든 것이 아니라면 우연이랄 수 있소. 그런데 그대는 이것이 절대로 우연이 아니라고 하니 그럼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오?" 심랑은 눈빛을 고정시켰다. "이 신상은 바로 그녀의 모친이오." 왕련화의 표정이 변했다. "아! 그녀의 모친......." 독고상이 큰소리로 외쳤다. "백비비가 이곳에 온 것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녀 모친의 신상이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오?...... 그리고 그녀의 모친이 또 어떻게 이곳의 화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오?" 심랑이 조용히 말했다. "이 과정에는 절대적인 비밀이 있소." 독고상이 다그쳤다. "비밀? 어떤 비밀이오?" "아직은 나도 확신할 수가 없으니 지금은 말할 수 없소. 왕련화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어쩌면 백비비의 모친은 바로 이곳 사람이고 백비비는 또 이곳에서 태어났을 것이며 성장한 후 중원으로 갔을지도 모르죠." 심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왕련화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백비비의 모친이 보통 시골 여인이라면 남들이 왜 그녀를 화신으로 조각했겠소? 또 백비비의 모친이 평범한 시골 여인이 아니라면 또 어떻게 그녀의 딸이 밖으로 떠돌아다니게 했겠소?" 심랑이 조용히 말했다. "어쩌면 그녀의 유랑은 진짜가 아닐 수 있소." 왕련화가 눈을 크게 떴다. "진짜가 아니라고?" 심랑이 말했다. "어쩌면 백비비의 모친은 본래는 시골 아낙이었지만 후에 기연(奇緣)을 얻어 기인(奇人)이 됐을 것이고....... 어쩌면 무림의 기인일 수도 있을 것이오." 왕련화는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말했다. "무림기인?" 독고상이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십여 년 전에 이런 기인은 없었소." 심랑이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볼 수 없는 무림기인도 있는 겁니다." 독고상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어떤 때는 당신도 무림기인의 진정한 이름을 모르는 경구가 있을 것이오." 왕련화는 참지 못하고 심랑을 다그쳤다. "그녀는 대체 누구요? 그대는 알고 있소?" "어쩌면 알 것 같소." 독고상이 큰소리로 물었다. "알고 있다면 왜 말하지 않는 것이오?" "어쩌면 그녀는 ‘유령군귀'와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오." 독고상의 안색이 변했다. "뭐라고 했소? 당신....... 당신 다시 말해 보시오."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소." "어쨌거나 이 사당이 유령군귀'들과 관계가 있다면 그럼 저 동굴은 혹시...... 아! 맞았소. 저 동굴이 그토록 신비하고 깊숙하다니 유령들이 거처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거처일 것이오." 왕련화의 말에 독고상의 안색이 변했다. "그럼 웅묘아도......." 독고상은 말도 채 끝맺지 못하고 동굴을 향해 달려갔다. 왕련화는 심랑을 바라보았다. 심랑은 겉으로는 비록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그냥 보기에도 매우 억지 같았다. 그의 눈빛에는 근심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만약 내 추리가 불행히 적중했다면, 그럼 이 곳의 모든 상황은 대단한 변화가 일겠지. 나와 그의 일거리는 더욱 많아질 것이고......." 이등용의 시신은 여전히 빗속에 버려져 있었다. 그의 머리는 거의 으깨어져 있어 간신히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독고상이 그를 보았다. "이 자는 혹시 그 이등용......." 심랑이 말했다. "아! 그렇소. 이 자가 바로 이등용이군요." "그가 어떻게 이 곳에서 죽었을까요?" 왕련화의 안색이 변했다. "주칠칠이 동굴 입구에 서 있지 않고 이 이씨 성의 남자도 역시 이런 모양이니...... 혹시 이자가 우연히 주칠칠을 보게 됐고 감히 그녀에게 무례를 범하려 하자 주칠칠이 그를 죽인 것이 아닐까요?" 심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것은 절대 주칠칠이 한 짓이 아니오." 왕련화가 되물었다. "어째서 아니라고 단정하시오?" "주칠칠은 절대로 이렇게 잔혹하게 출수하지는 않소." "‘유령여귀'...... 이것은 혹시 그 ‘유령여귀'의 부하들이 한 짓이 아니오?" 독고상의 말에 심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역시 ‘유령여귀'의 짓은 아닌 것 같소." 독고상이 눈썹을 찌푸렸다. "어째서 아니란 말이오?" 심랑이 말했다. "‘유령여귀'의 행적은 매우 은밀하오. 이것이 만약 ‘유령여귀'의 부하가 저지른 짓이라면 결코 시신을 그들의 은신처 가까이에 두지는 않을 것이오." 독고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그의 긴 한숨 속에는 사실 너무도 많은 탄복의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심랑은 언제나 그들보다 한단계 높았다. 또 남들은 전혀 생각해내지 못할 일들을 그만은 언제나 생각해낸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왕련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다그쳤다. "만약 이것이 주칠칠이 한 짓도 아니고 또 '유령여귀'가 한 짓도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짓이란 말이오?" 심랑이 말했다. "이곳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온 적이 있소." 왕련화가 물었다. "다른 사람?" "비록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여자라는 것은 단정할 수 있소." 독고상은 잠시 생각하면서 되물었다. "여자라...... 이 쾌활림에는 여자가 많지 않는데, 더구나 살인을 할 수 있는 여자는 더욱 많지 않고......." 왕련화가 웃음을 흘렸다. "많이는 필요없소, 딱 한 명이면 족하오." 독고상은 매섭게 그를 노려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단숨에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비가 오는 날이라 동굴 안은 더욱 어두웠다. 십여 걸음을 걸었는데도 마주오는 사람의 얼굴조차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독고상과 왕련화의 눈은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독고상이 물었다. "주칠칠이 바로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왕련화가 말했다. "그녀는 다른 곳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오." "그런데 왜 보이지가 않지?" 왕련화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웅묘아도 혹시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그는 함부로 나돌아다닐 수가 없소." "하지만 지금 그 사람은 어디 있소?" 두 사람은 비록 말씨름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내심 누구보다도 다급했다. 분명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사람이 온데간데없어지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독고상은 자기도 모르게 왕련화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보기에...... 그 두 사람, 혹시 변을 당하지나 않았을까?" 왕련화가 담담하게 말했다. "난 마누라가 없어졌는데도 아무렇지 않은데 당신은 뭐가 그리 초조하오?" 독고상은 이를 갈았다. "넌....... 넌 사람도 아니야." "독고 형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냉랭한데 뜻밖에도 속은 매우 뜨거운 사람이군요. 하지만 독고 형도 알아두시오. 내가 초조해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들은 절대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오." "왜?" "‘유령여귀'는 그들을 죽일 이유가 없소." 독고상이 웃음을 흘렸다. "사람을 죽일 때 꼭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유령여귀'는 그들을 죽이지 않을 이유가 있소." "응?" "그들을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것이 더욱 소용이 되기 때문이오." 독고상은 고개를 돌려 심랑을 바라봤다. 심랑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났다. 독고상은 심랑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에 일리가 있다고 보시오?" 심랑이 탄식을 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왕련화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이곳에서 그들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이오. 우리들이 ‘유령여귀'의 소굴만 찾게되면 그들은 저절로 찾아질 테니까." 독고상이 다시 물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 소굴이 어디 있단 말이오? 여태 아무런 단서도 없지 않소?" 왕련화가 답했다. "그들의 소굴은 아마도 바로 이 동굴 속에 있을 것이오." 독고상이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아시오? 어떻게 알았소? 당신은 가본 적이 있소?" 심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 형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소. 그들의 소굴은 분명히 이 동굴 속에 있을 것이오. 왜냐하면 이 동굴 입구에는 들어 간 흔적만 있었지 나온 흔적은 없기 때문이오." 독고상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중얼거렸다. "당신들은 그런 것들을 벌써 다 봤군요." 그는 스스로 남들보다 월등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악에서 그는 갑자기 자신이 바보에다가 장님까지 된 것 같았다. 왕련화가 말했다. "지금 문제는 이 동굴이 과연 얼마나 큰가? 또 얼마나 깊은 가......?" 그의 입은 말하고 있었지만 눈은 독고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독고상이 천천히 입을 뗐다. "이 동굴 깊은 곳은 자신의 다섯 손가락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소. 그곳은 또 음산하고 습기가 많으며 거미줄이 도처에 쳐져 있으니 지금까지 그곳에 누가 들어갔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맞소. 귀신 소굴이 이 동굴 안에 있다지만 따로 비밀통로가 있을 것이오. 게다가 분명히 함정과 매복도 있을 것이오. 우리가 이렇게 무조건 들어간다면 아마도 다시 돌아오기는 매우 힘들 것이." 독고상이 물었다. "만약 이렇게 들어가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오?" "먼저 세밀한 준비가 있어야 하오. 즉 횃불, 긴 밧줄, 비상 식량...... 한 가지도 절대 빠져서는 안 되오." 독고상이 냉소를 쳤다. "준비라고? 그 준비가 다 끝날 때쯤이면 이미 늦었을 걸?" 심랑이 입을 열었다. "그렇소. 지금 이 시각도 매우 촉박한 시기오. 쾌락왕은 더이상 끌 수가 없소.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계획은 전부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오. 다만......." 그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동굴 속에는 무수한 함정이 있을 것이오. 그것은 분명 은밀하게 가려져 있소 또 수천 개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만약 길을 잃게 된다면 아마도 이곳에 갇혀 죽게 될 것이오." 왕련화가 맞장구를 쳤다. "바로 그렇소." 독고상이 차갑게 웃음 지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이대로 놔둔다는 것이오?" 왕련화가 조용히 말했다. "나보고 다른 일을 하라면 하겠지만 나더러 죽으라고 한다면 미안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소." 독고상이 분노를 터뜨렸다. "구할 사람이 누구인지 당신은 잊었단 말이오?" "누구의 생명이건 간에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소." "이......." 독고상이 말을 하기도 전에 심랑이 소리를 낮추도록 제지했다. "조용하시오." 독고상은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동굴 깊은 곳에서 한 점의 불빛이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