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에너지가 폭발하는 인간 서사극 <혈의 누> 중간 점검 | ||
[필름 2.0 2004-11-30 21:00] | ||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 공포 사극 <혈의 누>가 촬영 막바지에 들어갔다. 전남 장흥 숲 속 빽빽한 나무 사이, 김대승 감독과 배우 차승원, 현장 스탭들이 촘촘히 들어박혀 촬영에 열중하고 있었다. 사건의 외연과 인물 내면 심리를 촘촘히 엮어내느라 여념이 없는 이들을 만나 <혈의 누> 완성본의 모습을 미리 더듬어봤다 "이랴, 이랴." 말을 타고 산길을 내달리는 차승원의 얼굴에 핏줄이 솟는다. 그는 김대승의 두 번째 연출작 <혈의 누>에서 조선 말엽의 군관 이원규로 추적 장면을 찍고 있는 중이다. 차승원이 타고 있는 말은 경주마 출신이지만 이미 기력이 쇠한 폐마로, 산등성이를 오르내릴 때마다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차승원이 한번 내렸다 다시 타면 말은 그를 꺼려하며 가끔 달리는 도중에도 속력을 내라는 주인의 채찍질에 멈칫댄다. 전남 장흥 남도대학 근처의 침엽수림에서 촬영 중인 추적 장면은 이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액션 신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일정으로 바쁜 정두홍 무술감독의 얼굴도 보인다. 그는 김대승 감독의 이런저런 주문에 두 손을 모으고 진지하게 경청한다. 옆에는 최영환 촬영감독이 표정의 변화 없이 등장인물과 말이 달리고, 카메가도 같이 움직이는 동작의 조화를 계산한다. 화면의 속도감과 화면 속 인물의 속도감이 적절히 맞아떨어지는지를 계속 체크한다. 몇 차례 계속된 리허설 후에 시작된 촬영은 좀처럼 OK 사인이 떨어지지 않는다. 말이 액션 신을 감당하기에는 기력이 달리는 것이 뚜렷해지자 배우와 스탭들 모두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말을 타고 용의자를 추적하며 언덕을 내달리던 차승원이 낙마했다. 부하 군관 역을 맡은 배우가 타고 있던 말이 다가오자 차승원의 말이 길 바깥쪽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스탭들이 재빠르게 낙마한 차승원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김대승 감독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베테랑 정두홍 무술감독의 표정은 오히려 심상하다. 영화 현장에서 얻은 온갖 상처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그는 자신의 액션스쿨 출신의 무술 스탭들 부상에 대해 냉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대승 감독은 "어, 자꾸 이러면 안 되겠는데"라고 중얼거리고 정두홍 씨는 "대역 준비할까요?"라고 말한다. 부드럽게 목소리지만 현장의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야기와 심리의 합일
김대승이 슬쩍 흘린 말에 따르면 <혈의 누>는 추리 공포 사극 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과 같은 인간 서사물의 품격을 이루려는 야심을 품은 영화다. “이건 주인공 이원규를 연기하는 차승원 씨와 합의한 부분이다. 이원규는 장발장 같은 인물이다.”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시장으로까지 출세하지만 전과자 출신인 자신의 진짜 신분을 감추고 있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어느 날 이웃 마을에서 장발장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대신 갇힌 다른 사람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장발장은 자수할 것을 결심하지만 마침 마차가 없다.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현재의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선행을 더 많이 하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니겠느냐는 또 다른 마음속 목소리 때문에 갈등하던 장발장에게 한 소년이 자기 집에 마차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때 장발장은 결정을 머뭇거린다. 그는 비겁한 사람이다. 그러나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바로 그 비슷한 얘기"라고 김대승은 말했다. <혈의 누>가 감춘 야심이 그렇다면, 연출과 배우의 기량과 탄탄한 이야기 구성이 행복하게 조화를 이룬다면, 내년 한국 영화계는 흐뭇한 하나의 미학적 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김대승은 <번지점프를 하다> 이후 3년여를 기다리며 두 번째 영화를 준비했다. 도중에 기획이 미뤄진 아이템을 접고 그는 <혈의 누> 연출 제의를 받아들였다. 미궁처럼 꼬인 플롯의 해결책을 찾아 그는 스스로 시나리오를 고치고 또 고쳤다. 김대승은 자본주의 영화 산업이 요구하는 작업 속도의 규율에 어울리는 감독이 아니다. 만족스런 시나리오가 나올 때까지 끈질기게 작업을 거듭한다. 현장에서도 등장 인물들의 대사를 계속 고치고 다듬고 상황을 다시 만든다. 정해진 콘티가 없는 상황에서 생물처럼 현장에서 뼈대와 살을 만지는 작업 방식은 스탭들을 지치게 했다. “촬영 초반은 지옥의 나날이었다. 스탭들 모두 뭘 찍는지도 모르면서 격한 노동 강도에 허덕였다. 지금 현장 분위기는 완전히 천국으로 바뀌었다. 이젠 모두 영화가 어떤 꼴일지 가늠할 수 있게 됐다.” 심리적 에너지를 추적한다
“이원규는 멋있어 보이지만 실은 비겁한 인물"이라고 차승원은 말했다. 그리곤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요?” <혈의 누>에서 이원규가 직면하는 운명의 아이러니는 거창하게 말하면 계급 사회의 틀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양반과 기층 민중이 겪는 갈등의 드라마라는 것이고 그 외연이 이 영화의 테두리 내에서 접수된다는 것이다. 차승원에게 있어서 간단하지 않은 인물을 연기하는 것은 도전에 가깝다. 결말에서 관객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궁금하다 했더니 "나도 그렇다"고 김대승이 거든다. “거기서 복합적인 감동이 생겨나지 않으면 영화는 실패한 것이다.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감독은 말했다. 낮 촬영이 많아 해가 짧아지면서 오후 다섯 시면 철수하는 상황에서도 김대승 감독은 늘 주경야독이다. 낮에는 촬영하고 밤에는 시나리오를 다시 읽으며 수정하는 것이다. 마치 수도사처럼 생활하는 그의 곁에서 최영환 촬영감독이나 정두홍 무술감독의 태도도 진지하고 과묵하다. <혈의 누> 촬영현장 분위기는 조용한 편이다. 카메라 뒤편에서 스탭들이 농담을 주고받을 때도 소곤거린다. 영화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편안함이 공유되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 6월 말에 크랭크인한 <혈의 누>는 11월 15일 현재 90% 가까운 분량을 찍었다. 원래 더 일찍 크랭크업 예정이었지만 태풍 때문에 촬영이 미뤄져 개봉 일정도 내년 2월로 연기됐다. 영화 중반 이원규의 수사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말 추적 액션 신을 찍던 날, 촬영현장에서 현장 편집본을 엿봤더니 움직임이 많은 속도감 있는 편집으로 구성돼 있었다. 컷과 컷이 연결될 때 기어 변속을 올릴 때처럼 탄력을 받아 앞으로 튀어 나가는 듯한 느낌으로 이어지는 화면들을 보며 차승원이 “그림 좋고!”라고 추임새를 넣는다. 영화 전체가 이런 식이냐고 물었더니 김성제 PD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김대승 감독은 상황 설정 화면도 잘 쓰지 않는 감독이다. 빡빡하게 상황과 인물의 감정을 군더더기 없이 찍고 편집하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영화 중반 이후 드라마가 클라이맥스로 가면서 화면 호흡이 빨라진다. 움직임도 많아진다. 옆에서 봐도 그걸 느낄 수 있다.” 김대승 감독은 “아마 등장인물의 심리적 에너지를 따라가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남은 길, 낙마란 없다
물론이다. <혈의 누>는 드물게 만들어지는 추리 공포 사극이자 영화적인 맛을 느끼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하는 선 굵은 작품이다. 대형 화면의 품에서 음모와 회한, 배신이 과다한 폭력의 에너지로 분출되는 이 영화는 공포를 통해 결국 슬픔에 가닿게 되는, 또는 인물들의 운명에서 시대의 한계로 가닿게 되는 그런 복합적인 기운을 품은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결과를 알게 되기까지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