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시는 아버지(눅 15:20-24)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KBS(한국방송공사)에서,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무려 138일에 걸쳐, 453시간 45분 동안,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라는 타이틀로,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을 진행하였는데, 그때 그 방송을 통하여, 10,189명의 이산가족이 만났습니다. 그때, KBS 주변은 헤어진 가족을 찾고자,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가족을 찾는 벽보가 끝없이 나붙었습니다. 헤어진 가족의 인상착의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그러한 내용을 적은 판을 들고, 그 주변을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방송을 보면서, 함께 울고, 함께 기뻐했던 일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 방송은,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현실화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방송 이후, 어느 덧, 40년의 세월이 또 흘렀지만, 6.25 전쟁으로 헤어진 후, 아직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집에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쟁이 아니어도,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실종된 후, 만나지 못하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실종된 가족을 찾기 위하여, 전단지를 들고, 전국 구석구석을 찾아 헤매며, 하루빨리, 실종된 가족이 집에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다시는 이 땅 위에 전쟁의 고통과 헤어짐과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아픔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3가지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은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고, 8-10절은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고, 11-32절은 집 나간 탕자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린 목자는 그 잃어버린 양을 찾기까지,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찾아다녔습니다.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은 그 드라크마를 찾기 위하여, 등불을 켜고, 온 집 안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갔을 때부터, 마을 입구에 나가,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면, 얼마나 기다릴 수 있습니까? 한 시간입니까? 아니면, 하루라도 기다릴 수 있습니까? 기다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호등 앞에 서 있을 때, 빨간 불에서 파란불로 바뀌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왜 빨리 바뀌지 않지”라고, 다급해 할 때도 있습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위험을 안고, 빨간불에 건너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안될 일입니다.
기다림은 쉬운 것 같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약속된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어렵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둘째 아들을 왜 기다렸습니다. 왜 기다렸을까요? 그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고 해서,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기본으로 하여, 착실하게 사업을 하거나, 장사를 하여, 재산을 증식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둘째 아들은 재산을 늘리는 데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 쓰기에 바빴습니다. 백년, 천년 동안,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허랑방탕하게 돈을 마구 썼기에, 가진 재산은 금방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돈 많은 부잣집 아들에서, 하루 아침에, 아무것도 없는 알거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아들을 기다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달라고 했을 때,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재산을 몽땅 가지고 집을 나갔을 때, 마음이 더 많이 아팠을 것입니다.
허랑방탕하게 지내고 있는 아들에 관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을 것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주인의 눈치 때문에 먹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당장 그 아들에게로 달려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픈 마음을 부둥켜안고,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집 나간 아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잘못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매일 같이 마을 밖에 나와, 먼 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아들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버지는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알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한눈에 알아보고 달려갔습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뜨겁게 솟구쳐 올랐습니다. 아버지는 돼지 냄새가 물씬 풍겼을 아들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습니다. 정말로,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품에 안겨서, “아버지 제가 철이 없어서 하늘과 아버지에게,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아들로 여기지 마시고, 품꾼의 하나로만 여겨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그런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귀에는 아들의 그런 말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미 아버지는 아들이 집에 돌아온 것으로, 그간의 모든 잘못을 다 용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들로 인하여 아팠던 마음이 아들을 보는 순간, 눈 녹듯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야기를 영적으로 설명하자면, 여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하고,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의미합니다.
집 나간 자녀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다리시는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용서로 나타났습니다.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그 말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죄를 추궁하거나,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용서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둘째 아들은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오히려, 동네 잔치가 열렸습니다. 도저히,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렇게 쉽게 용서할 수가 있는 문제입니까? 벌 대신에 잔치라니요.
세상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알거지가 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 대부분 받아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전박대 당할 것이 뻔합니다. 설령 받아주었다고 해도, 집 나갈 때, 가지고 나간 돈 때문에, 모질게 구박받으며 살 것이, 너무나도 뻔합니다. 간신히, 집에 들어왔다고 해도, 하루하루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구박받으며, 눈치 보고, 있는 둥, 없는 둥, 그렇게 천덕꾸러기 신세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라고 말하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동네 잔치를 열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아들에게 입히고,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아들의 발에 신을 신겨 주었습니다. 알거지가 되어 돌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가 아버지의 아들임을 온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선포했습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마냥 기뻐했습니다.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집 나간 아들이 집에 돌아온 기쁨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에 대하여,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라고 말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았을 때, 너무나도 기쁘고 즐거워,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다”라고 말했던 목자처럼, 아버지는 그 아들이 비록 아무것도 없는 알거지가 되어 돌아왔지만, 집나간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뻐했습니다.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동네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드라크마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 등불을 켜고, 집 안 구석구석을 쓸면서, 부지런히 찾던 중, 그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다”라고 외쳤던 여인처럼, 그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라고 외치며,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열고, 아들을 찾은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사 30:18)라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왜 기다리십니까?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금방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왜 12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다음에, 비가 왔을까요? 노아가 방주 만드는 것을 천천히 했기 때문일까요? 방주 만들면서, 게으름을 피웠기 때문에, 1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간 것일까요?
베드로 사도는 노아의 방주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는데, 베드로전서 3:20절을 보면,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고 말했고, 베드로후서 2:5절을 보면,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 동안, 의를 전파했습니다. 한 마디로, “온 세상이 비로 멸망할 것이다.”라는 것을 전파했습니다.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전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을 들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금방 비가 내리지 않고, 1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버리고,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120년 동안을 기다리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애 3:40-41)라고 외쳤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 6:1-2)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 한 가운데에서, 죄악을 범하며, 스스로 멸망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잘못한 일이 있을지라도,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라고 말했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은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시 27:9,38:21)라고 말했습니다.
죄를 범한 다윗은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말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1-12)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나를 버리지 마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외쳐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9,18)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늙어, 백발이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는 것은 아닌가?”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거나 떠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습니다. 가지고 나간 돈을 다 갖고 돌아오면, 그때는 받아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냄새나는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오면, 받아줄지 말지, 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렇지 않겠습니다.”라고 만 번을 외치면, 받아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아무런 조건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습니다.
아버지의 기다림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아버지의 받아줌은 용서였습니다.
마을 밖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을 보았을 때, 이미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했습니다. 아니, 그 전에, 이미 용서했습니다. 동네 밖에 나와 기다릴 때, 이미 용서하고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돈을 달라고 할 때, 돈을 가지고 집을 나갈 때, 이미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축 쳐진 몰골로 돌아오는 아들을 향해 달려가, 그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용서했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아주 깨끗하게 정리했기 때문에, 받아준 것이 아닙니다.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린 돈도 원래대로 다 되돌아 놓았기에, 아들로 받아 준 것이 아닙니다. 돼지 냄새가 가득한 옷을 다 벗어버리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었기 때문에, 받아준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냄새가 남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을 안아 주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습니다.(시 103:12)
히스기야는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보십니다.
여러분! 기다려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돌아오면, 용서하고 받아줄 수 있지만, 내일 돌아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 3:20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께서 언제까지,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실까요? 오늘 문을 열면, 들어 오시겠지만, 내일 문을 열면, 들어오지 않으실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문을 열 때까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집 안에 있어도 자녀요, 집 밖에 나가있어도 자녀입니다. 착실하게 살아도 자녀요, 허랑방탕하게 살아도 자녀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도 자녀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도 자녀입니다.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녀가 아니라, 집 안에서, 착실하게 살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항상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아버지의 집이요, 우리가 머물러 있어야 할 곳은 아버지의 품임을 항상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 우리는 아들로서,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습니다.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집 나간 아들도 사랑하고, 집 안에 있는 아들도 사랑하십니다.
집 안에서, 아버지의 품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아버지 품 안에서,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예비해 놓으신 은혜를 사모하오니, 우리에게 더욱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 품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 위에, 우리의 직장과 학업과 교회 위에 풍성한 복을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