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숙 시인>>
<<김경숙 시인의 양력>>
* 1958년 강원도 화천 출생
* 1979년 서울 상명여고(문예부 활동) 졸업
* 2016년 서울디지털대학 문학창작학과 졸업
* 2005년 1월 시동인 〈시사랑문화모임〉 창립 초대회장
* 2005년 12월 엔솔로지 『경일문학』 창간호 편집 발간
* 2007년 6월 한국바다문학상 우수상수상
* 2007년 10월 『월간문학』 신인상 등단
* 2008년 11월 『수필시대』 수필부문 신인상 당선
* 시집 : 『소리들이 건너다』, 『이별 없는 길을 묻다』, 『먼 바다 가까운 산울임』, 『얼룩을 읽다』, 『빗소리 시청료』, 『먼지력曆』.
* 수필집 : 『우리 시대의 나그네』,
* 2013년 세종문화예술상 문학대상 수상
* 2015년 2월 (사)한국문인협회 공로패 수상
* 2015년 3월 부산시단 작품상수상
* 2015년 9월 한국해양문학상 우수상 수상
* 2017년 『모던포엠』 문학상 본상 수상
* 2018년 9월 부산문학상 본상 수상
* 2018년 1월 『모던포엠』 편집위원
<<김경숙 시인의 시>>
풀비/김경숙
풀비 지나간 자리마다
격자 문살 도톰하게 살이 차오르고
누렇던 달빛 깨끗해진다
엄마가 풀비로 달빛을 쓸 때, 여러 겹 덧발라진 자리가 먹구름 층층 포개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들창문과 달이 서로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중이었다 문종이가 말라가면서 환하게 달의 뼈가 보였고 풀벌레소리 투명해지자 한층 밝아진 문살이 팽팽하게 달빛을 펴고 있었다 밝음을 표시하는 방식으로 어둑한 문살만한 것이 없다는 것, 부지런한 엄마에게 배웠다
꽃 핀 싸리나무를 엮어
마당을 쓸 때, 후드득 떨어지는 꽃들 마냥
덜 풀어진 밀가루 덩어리들이
툭툭 문살 위에 꽃으로 불거졌다
풀비 지나가고
불을 켜면 방안이 따뜻하게 비쳤고
불을 끄면 마당이 포근하게 빛났다
고리 이야기/김경숙
어제 뽑은 인형엔
모두 고리가 달려있었습니다
매달릴 수 있어야하고 매달려야만 한다는
안간힘으로 들렸습니다
첫아이를 학교에 보낼 때
문득, 아이를 가방에 매달아 보낸다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방은 잉여의 부피 같아서
사람이 옮길 수 있는 최대의 무게니까요
아이는 그 후로 쭉, 지금껏
가방에 매달려 살고 있습니다
모든 꽃들의 꼭지도 알고 보면 고리입니다
모과가 없는 모과나무나
탱자가 없는 탱자나무울타리는 없으니까요
자꾸 늙어가는 몸 어딘 가에도
망가졌거나 아직 단단해지지 않은
고리 하나쯤 있을 것입니다만
유독 가을만 깊어서 고리를 사이에 두고
여물거나 자꾸만 파치가 되려 합니다
그러니 매달리는 일과
매달려야만 하는 일들 사이엔
절그럭거리거나 삐거덕거리는
고리 하나쯤 있어도 무방하겠습니다
꽃의 졸음/김경숙
한낮 화단에
꽃들이 목을 꺾고 졸음에 빠져있다
식물은 꺾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지만
사람에겐 꺾이는, 꺾여야만 하는 곳이 많다
식물은 선선해지는 저녁 무렵
옅은 먹빛이 잠을 불러들이겠지만
사람은 무의식 중에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는 목을 가누는 것이다
더위가 가득 든 식물의 졸음과
그늘이 꾸벅꾸벅 흔들리는 사람의 졸음은
한낮이 곤한 이유처럼
노곤한 방심에 든다
여름이란, 아래가 받치는 날들이다
기둥 하나 없이도 막중한 한낮의 폭염을 받치고
초록으로 햇살을 향해 맞불을 놓는
아래의 목록에 슬쩍 끼어들어
가장 환한 날을 탕진하는 것이다
저 햇살 아래 꽃들
목마른 뿌리의 근심을 목에다 두고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마당을 나누다/김경숙
우리 집 마당에는 낮의 마당과 밤의 마당이 있다
낮의 마당에선 뙤약볕을 빌려 고추를 말려도 좋고
바지랑대 걸쳐놓고 속옷을 널어도 좋겠지만
무엇보다 금 긋고 자리 깔아
온갖 마당놀이를 하는 한마당이 제격이다
다만, 밤의 마당은
눈 밝은 것들에게 내어주자
두더지 두꺼비 반딧불이, 간혹가다
고라니나 멧돼지 가족들까지
마당에 놀러와 유유히 달빛을 굴려도 좋겠다
밤의 말을 쓰는 것들은
밤의 마당을 쓰고
말놀이하는 사람은
낮의 마당을 쓰게 하자는 것이다
그어 놓은 실금도 없이
둥글거나 네모난 규칙 없이도
그저 캄캄한 밤 하나로 마당을 놀다 가는 것들
낯익은 발자국에 고인 이슬을 쓸어내며
낮이 해야 할 일을
밤이 하는 것을 가끔 본다
당겨야 쓸모 있는/김경숙
적당한 거리란 고무줄에 해당되는
간격이 아니므로
고무줄의 거리를 믿지 않기로 한다
당길수록 더 불안해지는 거리들
서로의 쓸모를 원한다면
몇 배수 숨어있는
고무줄의 거리를 다 끄집어 내야한다
한 손아귀에 움켜쥐었다고
감추었다고 다 끝나는 인연이 아니다
늘이고 또 늘인다 해도
모자라는 간극은 늘 아쉽기만 해서
직선의 간격은 믿을 수 없으므로
당겼다 놓으면 재빨리
저의 탄력 속으로 숨어버리는
그런 사랑을 갖고 놀은 경험이 있다
팽팽한 고무줄처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당겨야만 쓸모가 있는
꼭 그런 사람들이 있다
술래잡기/김경숙
고작 열을 세고 우리는
어둠을 뒤지는 사이가 되었다
조금 느리게 혹은 조금 빠르게 숫자를 세었을 뿐인데
서로 찾고 숨는 사이가 되었다
세상의 미로들도 하나 둘
열까지 세다 보면 엉키고 설켜서
결국엔 입구와 출구가
서로 입장이 바뀌기도 한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모든 문들
그 문을 열면 당장 찾아질 것 같은데
어둑해지는 골목마다
아, 모퉁이들은 왜 또 이렇게 많은 걸까
쉽게 찾아지지 않는 우리는
웃음 속으로 숨고
웃는 순간에만 찾아내는
환한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의 근육/김경숙
숨어있다가
때가 되면 불끈 솟아오르는 근육들
그 투명한 근육을 밟고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소금쟁이를
한낱 미물이라 지칭하겠지만
그 물속 구름을 다 밟고
진창 휘늘어진 초록을 밟고 있어
하늘과 바닥 그 어느 쪽에도 없는
존재인 양 가볍기만 하다
물의 근육이 아름다운 것은
불끈 힘주어 파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돌 하나를 들일 때도
슬쩍 바람이 스쳐 가도
울퉁불퉁 알통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소금쟁이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하늘과 바닥을
동시에 밟고 사는 것이다
발효/김경숙
발효들은 다 아궁이가 있다
장작불이나 가스 불 없이도
부글부글 잘도 끓어 넘친다
풋것들, 풋내들
쉬이 상하는 것들 푹 끓여서
제풀에 지친 것들
어떤 반론도 없이
촉매도 본질도 다 사라지고 나면
진이 다 빠질 대로 빠져
고스란히 효험만 남는다
저, 초록들
불기 하나 없이 끓는다
한번쯤 검붉게 혹은 샛노랗게
끝을 태워본 적이 있는 것들
끓어 넘친 뒤
긴 방부의 시간에 드는 진액들
진열장에 다소곳하다
그러나 누군가 잡아 흔들면
펑, 제 머리도 날려버리고 마는
영특하고 영악한
발효
무지개꽃 뜬다/김경숙
비바람 퍼붓는 폐차장에
지붕 없이 창문도 없이
뒤엉킨 차들이 묵묵히 젖는다
더 젖다가 질퍽한 웅덩이가 생기고
둥둥 무지개 뜬다
한때 속도를 다그치던
엔진 속엔 고요의 계기판이
제로의 속도로 잠들어 있지만
때론 요동치던 힘들도 심심할 때가 있는 것이어서
속도를 놓아버린 연료들
활짝 무지개색을 퍼뜨린다
언감생신 하늘 한 귀퉁이는 엄두도 못 내고
며칠 질퍽하다 마를 웅덩이들을 골라
무지개 꽃 피워놓는다
망가진 것들의 최후가
모두 꽃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저 땅의 깊숙한 곳엔
아직도 검은 원유들 가득해서
꽃들이 달리고 풀들이 달리고
땅에 발 딛는 것들 모두 달려서
빗물이 피워낸 저 꽃을
그냥 믿기로 한다
애기똥풀꽃/김경숙
먹은 것이라곤
어미 젖뿐인 애기가 누던
노르스름한 똥
애기똥풀은 저렇게 성성해질 때까지
씹는 것 입에 대지 않고
미지근한 햇살 젖,
요람인 듯 흔들흔들 바람 젖,
까르르, 이슬 젖만 먹고 있었구나
나는 아이도 다 키웠으면서
한참 지난 육아 경력자이면서
손이며 옷이며 온통 똥칠이다
쌉쌀한 냄새
칭얼거린 날이 많아서
여린 속은 이미 쓴맛이 진동하는구나
젖을 쓴맛으로 바꿔 쟁여놓고
노란 꽃으로 배설하고 있는
쓰디쓴 봄날의 애기똥풀
봄이든 가을이든
세상 모든 입들아
쓴맛을 삼키고도 활짝 웃고 서 있는
저 꽃의 속만 같아라
채집된 과오/김경숙
과오를 채집하다 보면
봄볕에 따갑게 부끄럽다
철없음을 나이별로 분류하고
얼굴 온도를 붉히다 보면
과장된 날개로 붕붕 날았던 기억들을
압정으로 눌러 놓고 싶다
계절별로 채집된 과오들
부풀려진 날개는 제각각 다르지만
공중을 휘젓던 기고만장과
지상에 뿌렸던 휘청거림은 종류가 같다
채집된 과오가 늘어날 때마다
두꺼워지는 반성은 무겁기만 했고
점점 넓은 채집판이 쌓여서
더러는 타인의 갈피를 빌리기도 했고
때로는 뒷장에 슬쩍 끼워 넣기도 했다
두 벌 날개들
얇은 봄볕은 어떤 걸 감춰도 환하게 비치는데
투명해진 과오들은 오히려 아름답다고
따사로운 바람은 채집 낱장을
파르륵, 넘어가고 있다
낙엽/김경숙
날마다 길이 되는 여자를 보아
가는 듯 오는 듯
가을비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스스로 바닥이 되는 여자
낯익은 길목에서 함께 꽃피우며
웃음이었을
눈물이었을
뜨거운 전생이었을 여자
저문 골목에서 추위를 부둥켜안고
귀뚜라미 울음이 빼곡한
만장을 펄럭이며
돌담을 따라 걷고 있는 여자
젖은 길모퉁이를 돌아서며
웃는 듯 우는 듯
야윈 어깨로 허공을 흔들어보며
자꾸 눈물이 되는 여자를 보아
먼지력曆/김경숙
먼지는 날짜에서 피어난 부피다
훅 불면 날아오르는 먼지들은 날개들의 반대파이거나 꽃의 대역代役이다 피어오르고 난 뒤엔 반드시 지는 일종이지만 우수수 지지는 않는다 혹자는 가라앉지 못하므로 분한 마음일수도 있겠다
깃털을 품고 있는 고요한 일습一襲일 것이다 평생 외출해본 적 없는 가구들을 들어내면 숨죽여 살아온 날들이 어깨를 펴고 공중으로 솟구친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시간의 부스러기들이 소리 없이 눈부시다
외면과 방치 사이에 헐거워진 틈, 틈을 털어 내다보면, 놀라 창밖으로 달아나려는 자욱한 방위들, 햇살을 젓는 야윈 헛날개짓이 반짝이며 뒤엉키다 힘없이 주저앉는다
먼지력, 이보다 더 견고한 달력이 있을까
나무둥치에 번져가는 나이테 같기도 한
바닥을 벗어나려던 절박했던 순간들이
들풀거미 줄같이 소복하다
너무도 헐거워서 날아가는 것조차 잊고 있는 먼지들, 그 시간의 허물이 날개의 부력이다 오래되면 흐릿한 시야가 되고 마는
먼지는 사물이 벗어놓은 날짜다
눈물 겹/김경숙
양파는 눈물 뭉치라고 말해놓고
겹겹으로 운다
지난 늦가을 여린 양파를 심을 때
이웃에 사는 황조롱이가
텃밭 근처에 앉아서 혀를 찼는데
나는 한겨울 추위가 이렇게 뭉쳐질 줄 몰랐다
아무래도 양파는 슬픈 식물이어서
고작 껍질만 뒤적거려도 눈물부터 쏟는가 보다
아무렴
껍질 없는 슬픔이 어디 있는가
누구나 두 눈에 수천 겹
양파 껍질이 들어있다는 것
벗기고 벗겨도 남아있는 저녁은 또
속껍질을 글썽이며 어두워진다
소리 없이 눈물만 찔끔거리는 사람과
눈물은 없고 울음만 요란한 새가
같은 일로 울 때가 있듯
익은 봄,
몸통 반 쯤 밖으로 드러내놓고 있는
양파밭에 가면 동고비 울음소리 요란하다
살짝 벗겨진 양파는 눈물 뭉치
그렇다면 수천 겹 눈물이 감싸고 있는
눈은 또 얼마나 깊고 슬픈 곳인가
퇴적/김경숙
입춘지절, 동백공원에서
문상(問喪)도 아닌
동백의 두상만 조문하고 왔다
아버지가 첫울음을 운, 그 방에서 할아버지가 꽃 같은 나이에 세상을 뜬 그 아랫목에서 할머니가 또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태어났고 동생은 키가 훌쩍 컸다고 했다
동백은 제 밑을 살피는 꽃, 꽃이 아니고 나무여도 좋을 동백은 왜 하필 꽃피기 좋은 계절에 뚝뚝 지냐고 묻지
만 사실 나무도 제 밑을 환하게 밝히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슬하이든 또 어느 나무 밑이든 다 퇴적이 되는 것이어서 쌓는 일로 더 깊이 뿌리를 박아내는 것,
살아온 흔적들을 더 환하게 쌓아가며 종(種)을 보존하는 일로 처연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람 하나 죽어나가지 않은 집 몇 채나 될까
위에서 피고
밑에서 죽는 동백의 환한 퇴적처럼
봄의 타이머/김경숙
봄엔 돌아가는 것들이 많다
보기 싫어 돌리는 고개와는 다르게
자꾸 한눈을 파는 사이
정말 눈 한쪽이 사라지는 일 같은
나는 즐겁다
한눈파는 내 눈이
겨우내 묶어두었던 눈을 풀어주자
굳이 두 다리와 몸이 따라갈 필요도 없이
눈꺼풀로 두근거리는 곳곳의 봄봄
연두 바람 뒤로 꽃잎들 돌아가고 봄비가 돌고 돌아 아지랑이로 날아오르고 치맛자락 휘돌아 발끝이 돌고 책장을
넘기던 고개가 돌아간다
다 봄의 타이머들
두 눈 뜨고 잠시 봄볕에 나갔다 돌아온 것 같은데
사라진 것들이 많다
오색나비 따라 아장 걷는 아이 눈웃음, 행주 삶는 냄새, 철없이 방싯거리던 햇살과 시시로 눈 맞추던 창밖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봄이 돌아가는 어느 마을에선
분명, 새살림 나는 집 있겠다
연못/김경숙
연못은 주름 창고입니다
할머니도 할머니의 할머니도 모두 연못에서 주름을 얻어왔다고 합니다 작은 돌멩이 하나 들고 연못으로 주름을
얻으러 가는 엄마 뒤를몰래 따라가 본 적 있습니다
풍덩, 엄마 얼굴로 뛰어드는
주름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자칫 이라는 말, 깜짝 놀란다는 말, 속울음 삼킨다는 말, 수장이라는 말, 모두 연못에게서 배운 소중한 주름들입니
다
연못은 우리 마을에서 제일 큰 거울이었습니다 하늘 뚜껑이라고도 했습니다 그 거울에 생긴 주름은 문질러 지우려
할수록 더 많이 생겨났습니다 겨울이면 거울이 두꺼운 얼음으로 덮이곤 했습니다 그때 돌을 던져 얻은 주름은 사람
이 마지막으로 얻는 주름이라 했습니다 마지막 얼굴로 받은 주름은 봄이 오면 모두 녹아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나는 철이 없게도 돌멩이 대신
꽃가지를 꺾어 들고 갔습니다
연못 가득 노란 꽃밭 만들어
산국 피는 속도로 늙어가고 싶었습니다
주름투성이 얼굴들이 가득 들어있는 연못에 주름을 한 꺼풀 벗겨내면 산 그림자도 개구리 울음소리도 신발을 찾으러
들어간 앳된 외삼촌 이마까지도 늙지 않는 싱싱한 풍경이기만 합니다
문득, 연못이 작은 돌멩이 하나로 잠깐 늙어가듯
사람은 연못이 담긴 눈으로 오래 늙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점에서 두 시간/김경숙
싸늘한 플랫폼을 빠져나와
아픈 눈물들이 뒤엉켜 혼절하는 대합실에서
무궁한 쪽으로 환승하기 위해
지고 온 짐 꾸러미들을 하차하는 데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이별이 통보되지 않은 영정 사진틀에
검은 리본이 울다 웃다 사선으로 분리되고 있는 동안
무궁한 저 쪽으로 편승하려는 종점에서는
타는 불구덩이라도 제발 평안하기를 빌며
개찰구 앞에서 입술을 깨무는 시간
무너지려는 계단을 올라가서
벽을 움켜잡은 시계는 가슴을 뜯어내며
신음소리만 쏟아내고 있다
지나온 길을 축축하게 복제 중인 매표소에서
뼛속까지 켜켜이 뭉쳐 놓았던 짐 꾸러미들을
말끔히 내려놓았는지
두 시간을 담금질한 승객은
환하게 웃으며 한 줌 재로 발권되었다
밤이 되기 전에
무릉천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겠다
단맛으로 죽다/김경숙
사과 반쪽
숨결 앓는 소리도 없이
침대 밑에서 한쪽을 닫는 중이다
껍질 잃은 쪽부터 야위고 있다
변색은 망진(望診)과
청진(聽診)으로 앓는 시간
바람을 뼛속에 들인 사과는
단맛으로 겨우 연명해가는 중이다
맛으로 치자면 호사스런 죽음
끝내 단것을 뿌리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깜빡 잊고 있던 반쪽들
단맛으로 멀어지거나 잊히고 있는 중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해후
추억도 없이 시드는 반쪽을
문득, 만나질 때도 있는 것이다
돌아선 등
굽어진 껍질 쪽은 아직 표정이 남아있는
단맛들이 끝까지 몰려 있다
기억해보면 누구나
그런 인연 하나쯤은 다 있다
탑을 접다/김경숙
돌덩이를 다듬고 접어
염화미소
부처 되듯
망치와 톱질소리 쌓여
단아한
절 한 채 되듯
헐값의 껍질들을
접고 또 쌓아
기울어진 리어카에
위대한 탑이 되었다
순간이 하루를 쌓고
하루가 생사를 접어
죽음너머까지 이어지듯
탑이란 늘
간절한 순간들을 잇고 있는 것이다
구석을 키우다/김경숙
구석을 키우다 보면 점점
앞쪽과는 멀어지게 되는데
구석에 구석을 몰아넣고 키우는
당돌한 구석들 때문이다
돌 틈이 민물 지느러미를 숨겨놓고 있듯, 환한 꽃들이 낙화를 숨
겨놓고 있듯, 펄럭이는 게양들이 바람의 날개를 숨겨놓고 있듯, 멀
어지는 앞쪽이 아득할수록 내가 돌보는 구석은 조금씩 어두워지는
데 그 구석마다 쌓아놓은 체온들로 가득하다
더는 밀려날 수 없는
막다른 것들이 가득 숨어 자라고 있는
마음 구석이라는 곳
오래 숨겨놓았던 구석들 중 어떤 구석은 이미 백주대낮이 된지 오
래고 농염을 핑계로 주책을 돌보고 있는 구석도 있다 그래서 가끔
마음이 뻐근해질 때면 구석으로부터의 협박이라 짐작해보기도 한다
구석이 넓어지고 있으니
내가 숨어있을 궁리도 많아지겠다
읽히는 책/김경숙
너무 멀어서
어둠이라는 책엔
깜빡이는 문자들이 많다
먼 글자들 속엔 진공의 상상력이 있어
뾰족한 문체로 쓴 자술서들은
어느 책력의 날짜들이 되었까
공전과 자전을 반복하는
절기(節氣) 속 글자들은
밤의 둥근 페이지를 따라
문자 이전 그 팽창하는
문명을 지금도 집필하고 있다
한 알의 문자 속에서
봄이 왔고 꽃이 피어났다
반짝이는 문자로 이주를 꿈꾸는
문맹의 책을 쓰고 싶을 때가 있다
뚫린 지붕 꼭대기로
끼니마다 연기를 흘려보내고
별들의 교본을 받아 적다보면
저 먼 문자들도 사실은
뜨겁게 끓고 있거나
활활 불붙어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밤이 가장 빛나는 문명이다
나무 유골/김경숙
책은 모두 굶어죽은
나무귀신이다
책이 나무 유골이라고 여기고 난 다음부터 서가는 거대한 묘지가 된다 반듯한 봉분으로 장식한 묘
지 앞에 크고 작은 비석이 가지런히 모여 있거나 여기저기 쌓여있다
펼치면, 귀신들이 입속말로 생시를 음독한다
귀신은 사연이 많은 허상들
타이핑을 빌려 서재를 떠돌고 있다
오래된 서재에선 습습한 습의襲衣의 냄새가 난다 울긋불긋 만장輓章들이 사방으로 빼곡하다 향을
피우듯 등을 밝혀가며 날마다 지루한 유언에 밑줄 치거나 자서전 모서리를 접어가며 필사하는 독
자들은 모두 상주일까
사람 입술을 빌려 독송하는
귀신들의 수업시간
나무귀신들이 떼 지어 떠도는 책장
그 중 절반은 이승에 있는 저자들이다
뼈대 없는 지식들이
생과 사를 구분 없이 떠돌고 있다
바람개비/김경숙
아버지는 바람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연 사흘쯤 사라졌다 돌아오는 날이면
지하 단칸방에 날선 회오리가 일었다
집어 던진 세간이 미닫이를 부쉈다
그때 어머닌 깨어진 어둠을 끌어안고
밤새 거친 눈물을 깁고 계셨다
아버지는 눈물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들판을 쏘다니다 바람에 얻어맞아
집으로 돌아온 날 눈물 바람이 일었다
기저귀에 엉켜 붙은 얼룩이 당신 몫인 냥
구린내 나는 바람을 삶아 헹구며
날마다 허리가 굽어가던 어머니는
바람을 안고 세검정 가파른 골목마다
새우젓 비린내를 이고 나르면서
머리카락이 소금에 허옇게 절여질 즈음에야
툭하면 깨어지던 미닫이문을 버리고
비로소 방 두 칸짜리 집을 장만했다
아버지 저 세상으로 돌아가신 뒤
삼십 년이 지나도록 그 바람을 못 잊어
달빛 어른거리는 소리에도 창을 열고
어둠에게 안부를 묻는 어머니
꽃샘추위/김경숙
지나 온 날들
다 고백하지 못해
접어 둔 사연 남았는지
시샘 찬 눈빛으로
조심스레 걸어가는
여린 목덜미를 붙잡는다
얼어붙은 꽃신 속에
살포시 드러낸 고운 실루엣
매서운 늦바람 유혹에
단단히 여며보지만
울컥 쏟아 낸 눈물
가지마다 숨어들어
밤새 홍매화를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