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4 章 청성의 사신(死神)
청성산(靑城山) 기슭.
과거 장도릉(張道凌) 범장생(范長生) 두광정(杜光庭) 같은 방사(方士
)들이 은거해 선도(仙道)에 들었다던 성(城) 모양의 연봉(蓮峰)을 향
해 나는 듯 달리는 두 명의 흑의인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절름발이였다.
하나, 그의 신법은 두 다리가 멀쩡한 사람이라 해도 따르지 못할 정
도로 쾌속했다. 기우뚱거리며 움직이는데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이십
여 장씩 전진해 나간다.
더욱 놀라운 것은 파공성조차 흘리지 않는다는 것.
그림자와 함께 움직인다는 추영신보(追影神步)!
과거 경공의 신이라 불렸던 무영천존의 신법이 재현됐단 말인가?
더욱 놀라운 것은 함께 움직이는 흑의 젊은이였다. 그는 천천히 걸음
을 내디디는데, 실상 몸이 나아가는 속도는 섬전과 같이 빨랐다.
지금 그는 오성의 내공만으로 움직이고 있다. 전력을 다한다면 아마
형체조차 남기지 않을 것이다.
무림기인전주 냉운, 그는 이미 경공 분야에서 불사검제의 수준을 능
가했다. 불사비기에 무영천존의 비결을 가미해 창안한 불사무영술(不
死無影術). 천하 경공사에 아직 나타나지 않은 천외천의 비기라 할
수 있었다.
냉운은 자신이 무림기인전 출신임을 충복 귀검사에게도 알리지 않았
다.
무림기인전은 무림인의 꿈. 그 꿈이 깨어진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아마도 강호상은 광풍에 휘말릴 것이다. 사대마경으로 일어난 혼란
을 천 배 능가하는 대광란의 소요가.
바로 그 때문에 냉운은 귀검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귀검!"
냉운은 산중턱에 이르자 뒤를 따르는 귀검사를 불렀다.
"예, 주인!"
귀검사가 얼른 허리를 숙였다.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게!"
"예."
귀검사는 냉운의 명이 그 어떤 것이건 완벽히 이행해야 할 지상명령
으로 여기는 듯 주저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냉운은 그 사이 수십 장 밖으로 날아올랐다.
귀검사는 냉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냉가장을 피로 씻은 자가 죽을 날이 머지않았구나! 그 누가 주인어
른의 절세무공에 상대가 되겠는가?"
귀검사는 희희낙락해하며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냉운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청성산에서 가장 높다는 장인봉(丈人峰).
거대한 규모를 차지하고 있는 장원 하나가 표표한 자세로 만학천봉을
굽어보고 있다. 자연이 이룩한 성곽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지은 건축
물들. 누각의 높고 낮음이 근처의 암괴가 절묘한 조화를 이룩했기에
산 자체가 하나의 장원으로 보인다.
한때 백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던 청성파의 근거지이다.
무림삼기의 하나인 청성은옹이 있고, 협맹주인 강남대협 제영천이 버
티고 있는 곳. 그곳은 백도무림의 한 축을 이룩한 위대한 영토였다.
욱일승천으로 일어난 삼대거파에게 세력을 많이 상실하긴 했으나 청
성파를 얕볼 문파는 많지 않다.
정오경.
검은빛이 번뜩하더니 흑삼을 두른 청년 하나가 청성파로 향하는 산길
에 모습을 나타냈다.
귀검사와 헤어져 혼자 길을 재촉한 냉운이었다.
"비룡신군께서 전하라 하신 물건을 이제야 전하게 되었군. 그 사이
협맹은 멸망했으니 청성은옹(靑城隱翁)께서 아직 살아 계실지 모르겠
군."
냉운은 길쭉한 가죽 보따리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과거 귀음곡 앞에서 건네받은 협맹의 물건이었다. 귀음곡 안
으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삼 년 전, 여기 오게 되었을 것이다.
완만하던 산길은 중턱에 이르며 가파른 경사를 만들었다. 청성파로
향하는 길은 길이라 부를 수도 없는 길이다. 청성의 제자들은 대부분
무림의 고수들. 그들에게 굳이 길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청성문
하가 특히 경신술에 능한 것은 이런 곳에서 수련을 했기에 빠른 몸놀
림을 간직하게 되었는지도.
냉운의 걸음이 멈춰진 것은 암벽 사이로 난 길을 오른 직후였다.
그는 근처로 다가서는 인기척을 느꼈고, 그 순간 그를 포위해 들 듯
일단의 무리들이 떨어져 내렸다.
"멈춰라!"
"어느 놈이 감히 청성으로 가려 하느냐?"
그들의 호통 소리가 청성산의 하늘을 깨어 버릴 듯 날카로웠다.
'살기등등한 사람들이군.'
냉운은 청의인들이 하나같이 상당 수준의 무공을 익힌 고수라는 것을
알고 적이 감탄했다.
'협맹이 무너졌다는 말은 헛소문이었단 말인가?'
냉운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그들 눈에 흐르는 잔혹한 살광을 발견한
후였다.
청성파의 무공은 웅휘를 그 장기로 하고 있다. 한데, 앞을 가로막고
선 자들에게선 그런 기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공을 익힌 흔적이 있다.'
냉운은 은연중 살기를 끌어올렸다.
청의무사의 수는 모두 여덟, 그들은 이미 냉운의 퇴로를 봉쇄하고 있
다. 그들의 손은 이미 검자루에 닿아 있다. 여차하면 검을 뽑아내 쳐
낼 기세였다.
냉운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담담하기만 했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가 청의무사들을 긴장시켰다.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 선한 자는 오지 않고, 온
자는 선하지 않다는 말대로 좋은 뜻을 갖고 온 놈은 아니겠지!"
무사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거칠게 말을 했다.
"나는 한 분을 찾아왔소. 시비를 일으키려 오지 않았소?"
"어느 놈을 찾아왔느냐? 장인봉 일대가 금지(禁地)로 화했다는 것을
모르고 오지는 않았을 테지?"
"청성이 금지로 변했단 말이오?"
냉운이 오히려 반문했다.
"그렇다. 청성파는 봉문중이다. 누구를 찾아왔는지 모르나 만날 수
없다."
청성파는 이 년 전 무너졌다. 협맹이 무너지면서 더불어 그 현판이
내려진 것이다. 강호 무사라면 다 아는 사실을 냉운만이 모르고 있는
것이다.
"소생은 냉운이라는 사람이오! 나는 한 분 고인(高人)의 명을 받고
이곳 청성파의 원로이시자 강호의 존자(尊者)이신 청성은옹을 찾아왔
소!"
냉운은 태연하게 용건을 말했고, 청의무사들은 그 순간 아연 긴장하
게 되었다.
청성은옹은 외인을 만나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 그를 찾아왔다면 무
림계의 거물이 분명하다. 하나, 냉운의 외양에는 무공을 익혔다는 흔
적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신광을 갈무리할 정도의 고수자라면 은연중 기도로 타인을 압도하는
데, 냉운에게는 그런 것조차 없지 않은가.
또한 청성파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모른 건 강호인이 아니라는 반증이
다.
청의인들의 포위망이 조금 느슨해졌다.
"흐흐……, 이제 보니 어젯밤 도망친 천외옥룡이란 놈의 패거리군."
"미친놈이로군. 소의금랑이란 계집년하고 함께 와 청성은옹을 구해
가려다가 실패하자, 이제는 닭 모가지 하나를 비틀지 못할 서생 놈을
보내다니……."
"수라신궁(修羅神宮)의 무서움을 아직도 알지 못하는군. 본궁은 신비
마제도 어쩌지 못하는 천하대파(天下大派)임을 아직 깨닫지 못하다니
……."
모두 한 마디씩 떠들어댔고, 그러는 가운데 냉운의 얼굴이 굳어졌다.
'염 낭자가 이곳을 다녀갔단 말인가?'
냉운은 한 발 늦은 셈이었다.
하루만 빨리 왔다면 냉가장에서 서먹서먹하게 헤어졌단 염방채를 만
날 수 있었을 것이다.
냉운은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염방채는 냉운이 일타운과 묘한 관계
에 있다 여기며 떠나갔다. 그녀가 제소옥의 여인이 된 것과 그것은
별개의 일이다. 자신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녀가
알지 못하고 떠났다는 게 못내 서운했다.
냉운의 얼굴에 그늘이 만들어졌다.
청의무사들은 냉운이 수라신궁에 겁을 먹었다 오해를 했으며, 성질
급한 무사 하나의 검을 뽑아들게 만들었다.
"협맹의 잔당이라면 죽어야 한다."
치리리릿 ―.
검은 비폭쇄혼(飛瀑碎魂)의 변화를 일으키며 냉운의 허리를 향해 비
스듬히 다가왔다.
모두들 냉운의 허리가 양단된다 여기는 순간, 너무도 뜻밖의 일이 벌
어졌다.
현란하게 일던 검광이 어느 틈엔가 사라졌으며, 서슬 퍼런 검날이 냉
운의 손아귀에 잡혀 있지 않은가!
냉운이 어떻게 검날을 움켜쥐었는지 알아본 사람은 없다. 심지어 검
을 쳐낸 장본인조차.
"맨손으로 검날을 움켜쥐다니……!"
검을 쳐낸 무사가 안간힘을 쓰며 검을 회수하려 했다. 혼신의 공력을
끌어올리자 이마에 지렁이 같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검에 가한 힘은 수천 근의 경력. 하되, 검은 태산에 눌린 듯 움직이
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검신을 타고 전해지는 가공할 열류에 몸
뚱이가 불이 붙는 듯 뜨거워졌다.
"크으!"
삼십 년 수련해 쌓은 내공이 한순간 허물어짐을 느꼈다.
그는 결국 한 모금 검은 피를 게워내며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
았다.
"감히 수라궁의 무사를 해치다니!"
"일제히 놈을 쳐라!"
청의검사들이 흥분한 듯 일제히 날아오르며 냉운을 향해 독랄한 검초
를 휘둘러 댔다.
수라마검초(修羅魔劍招)!
오로지 사혈만을 공격한다. 지난 이 년 간 무수한 협사들이 그 아래
고혼이 되었다.
쉬쉭 ―.
일곱 자루 장검이 검광을 토해내며 삼 장 이내를 검풍에 휩싸이게 하
는 찰나, 냉운의 두 손이 가볍게 합쳐졌다가 좌우를 향해 비스듬히
뿌려졌다.
"무영수(無影手)!"
우르르르릉 ―!
희디흰 두 손바닥이 천 개의 손바닥 그림자를 만들며 청의검사들의
눈을 아찔하게 했다.
하늘이 희게 물드는 듯했다.
청의검사들은 어떻게 해야 냉운의 장식(掌式)에서 벗어날지를 몰라
허둥대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순간.
"혈마참수(血魔斬手)!"
노한 목소리와 함께 희디흰 손바닥 그림자가 핏빛으로 물들어 가며
뇌성을 일으켰다.
꽈르르릉 ―!
적룡(赤龍)이 화염을 토하는 듯했다.
근처 십 장 이내가 적무(赤舞)에 잠기며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아비
규환의 지옥도를 장식했다.
"크으으으……!"
"악!"
청의검사들의 몸뚱이가 훌훌 날아올랐다.
제 형체를 갖고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머리통이 완전히 으스러져 버린 자, 복부에 물통만한 구멍을 갖고 오
장육부를 쏟아내는 자.
심지어 상반신은 으스러지고 하반신만 남아 실 끊어진 연같이 날아오
르는 자도 있었다.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냉운은 한동안 손을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오대불귀객의 무공이 이처럼 악독하다니…… 단지 칠 성 공력을 사
용했는데…….'
냉운은 단 하나도 살지 못했다는 데 큰 충격을 느꼈다.
복수를 하기 위해 익힌 무공이 저지른 참상은 너무도 잔혹했다. 시체
에서 흘러내린 피. 핏물 위로 냉가장의 잔혹했던 참상이 스쳐 지나간
다.
냉운은 흔들렸던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육백여 원혼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원한을 해결할 때까지 독심장
부가 되어야 한다.'
냉운은 살수를 전개한 손을 슬쩍 바라보더니 바람같이 날아올랐다.
청성파까지는 백여 장.
냉운은 몇 번의 움직임만에 청성파의 장원 앞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
장원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한때 수십 명의 무사들이 도열해 있었
을 공터엔 스산한 바람만이 스쳐 지나간다.
사람은 보이지 않으나 일대엔 이미 살기가 팽배해 있다.
냉운은 천이통으로 건물 안을 살피며 눈빛을 차갑게 했다.
'꽤 많군. 저들 모두 수라궁의 무리라면 오늘 대살계는 피할 수 없다
.'
냉운은 거침없이 정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가 삼 장 앞으로 다가섰을 때, 검은빛을 띤 화살 하나가 미간을 향
해 날아들었다.
냉운은 피하지 않은 채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는 동작으로 화살의 허
리를 거머쥐었다.
화살 끝에 쪽지가 매어져 있었다.
<협맹의 절세고수! 돌아가지 않으면 청성은옹의 시체를 보게 되리라.
>
급히 흘려 쓴 글이다.
냉운이 일초신위로 청의무사들을 참살한 것을 알고 있기에 모습을 드
러내지 않은 채 청성은옹의 목숨으로 협박을 하는 것이리라.
'청성은옹이 아직 살아 계시는군. 그렇다면 아주 늦은 것은 아니다.'
냉운은 허리춤에 달려 있는 보따리를 어루만졌다.
냉운이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떠, 떠나라!"
청성파 안에서 더듬는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혼비백산해 있음에 틀림없었다.
"청, 청성은옹은 내 손에 있다. 네가…… 그곳에서 한 걸음이라도 더
전진한다면 청성은옹은 즉시 죽는다."
중년인의 말소리였다.
"흠, 너는 누구냐?"
냉운은 느긋하게 뒷짐을 지었다.
청성파 안에 수백의 무리들이 도사리고 있으나 냉운은 조금도 위축되
지 않았다. 떨고 있는 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중년인이었다.
"나, 나는 수라신군께 이곳을 지키라는 명을 받은 사람이다."
"이곳은 청성파의 땅이거늘, 어찌 수라신궁이 축객령을 내린단 말이
냐."
"청성파는 이 년 전에 사라졌다. 이곳은 수라신궁의 영토이다. 어서
물러가라!"
"난 인정할 수 없다."
냉운은 차갑게 말하며 청성파를 향해 미끄러지듯 움직여 갔다.
순간, 건물 안에서 시꺼먼 쇠구슬 수십 개가 날아들었다.
냉운은 냉소치며 가볍게 일 장을 내뻗었다.
경력이 쇠구슬을 밀어내는 순간, 이게 웬일인가?
콰콰쾅 ―!
쇠구슬이 돌연 폭발하며 검은 연기를 피워내는 것이 아닌가!
수라마화탄(修羅魔火彈).
수라신궁이 즐겨 쓰는 암기인 바, 폭발의 위력보다 무서운 것은 검은
연기에 내포된 독약이다. 들이마시면 그 즉시 오장육부가 썩어 버리
는 응혈부시독(凝血腐屍毒). 백독불침의 경지에 이르지 않는다면 검
은 연기와 함께 고혼이 되어야 한다.
"어리석은 놈! 수라마화탄을 감히 장력으로 밀어내다니"
연기가 가실 무렵, 청성파 안에서 득의에 찬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성분타는 난공불락이다. 천외옥룡과 소의금랑도 감히 다가오지 못
한 곳이거늘……."
음흉히 말하는 자는 오십 정도 되어 보이는 홍의중년인이었다. 그의
오관은 검흔으로 인해 잘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무수한 싸움을 이겨낸 역전의 고수.
그는 검은 연기가 젊은 고수 하나를 콩가루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심
하지 않으며 득의만만해했다.
"제법 뛰어난 놈이었는데……."
그가 중얼거릴 때였다.
"하하……, 이제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이군."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청아한 목소리가 있었다.
"흑!"
홍의중년인은 눈알이 튀어나오는 듯 놀라워하며 등을 돌려보았다.
죽었다 여기던 흑삼청년이 삼 장 뒤쪽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
가.
바로 냉운이었다.
"네, 네가 어찌해서 살아났단 말이냐?"
홍의인의 얼굴이 샛노랗게 물들어갔다.
"시시한 독탄 따위로 어찌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냉운의 눈에서 살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이놈의 얼굴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삼 년 전, 나에게 일장을
쳤던 놈을…….'
삼 년 전, 강호초행에 나선 그를 길을 막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
수를 전개했던 자. 그 자의 이름이 추혼수라라고 했던가?
냉운의 검미가 칼날처럼 일어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너는 추혼수라(追魂修羅)라는 자가 아니냐?"
"네놈이 나를 안단 말이냐?"
추혼수라는 죽음의 공포와 함께 신비함을 느꼈다. 한 번 본 적도 없
는 자가 아는 척을 하다니?
추혼수라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하긴 그런 시시한 일쯤 기억하고 있을 리 없겠지."
냉운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추혼수라를 향해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
였다.
"오 초를 양보해 주겠다."
"뭐, 뭐라고?"
"오 초를 양보해 준 후 너를 죽이겠다는 말이다."
"으으, 오만한 놈이군."
추혼수라는 수라신궁의 호법(護法) 지위에 올라 있는 자였다.
그의 무공이 뛰어나지 않다면 이곳을 지키는 지위에 있지 못했을 것
이다.
'오 초라면 승산이 있다. 궁주께 전수받은 수라혈장(修羅血掌)의 다
섯 초식을 사용한다면…….'
추혼수라는 죽은 할아버지를 본 듯 반가워하며 급히 두 손바닥을 십
자로 교차했다가 활짝 펼쳐냈다. 이미 수백 번의 혈전을 경험한 바
있는 마도계의 거물다운 쾌속한 행동이었다.
"교전수라(交戰修羅)!"
우르르릉 ―!
근처가 뒤흔들리며 무수한 장영이 일어났다.
'마경(魔經) 안의 수법이군.'
냉운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한다.
강호를 풍파에 휩쓸 게 한 사대마경은 불사검제에게 제압된 바 있는
일마제와 삼마왕의 유물. 그것을 회수하는 것 또한 냉운의 소명이다.
냉가장에 전해졌던 마패가 누구 것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냉운은 수라신궁이 냉가장의 원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얼른 무영
신보(無影神步)를 시전했다.
검은 안개가 흐르는 듯하며 냉운의 몸뚱이가 전권(戰圈)을 벗어났다.
추혼수라는 눈을 의심하는 가운데 살초를 잇달아 쳐냈다. 수라재현(
修羅再現), 역강행주(逆江行舟), 단사성선(單絲成線)…….
추혼수라의 쌍장이 천수불(千手佛)의 손같이 변화무쌍히 움직였다.
어느 것이 실상(實像)이고 어느 것이 허상(虛像)인지 분간되지 않았
다. 하나, 냉운의 보법은 그의 마공이 따르지 못할 정도로 쾌속절륜
한 무영보법이 아니던가!
추혼수라는 사 초를 허비하고 최후 초식으로 혈운봉천(血雲封天)의
무서운 수법을 시전해 냈다.
"죽어라!"
그의 목소리가 긴 여운을 끌며 삼 장 내를 장영으로 뒤덮었다.
하나, 냉운은 그의 눈으로 살필 수 없는 장소에 이르러 있는 후였다.
냉운은 허공을 밟으며 사 장 올라갔다가 혈운봉천 초식이 끝나는 찰
나 낙성유향지(落星流香指)라는 신지(神指)를 시전해 냈다.
슥 ―.
푸른 기류가 흐르며 담담한 전단향( 檀香)이 번져 나간다.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무당 천뢰경 안의 수법이 그것이었다.
"안 돼!"
추혼수라는 기겁을 하며 피하려 했으나 지력은 그보다 빠르게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꽝!
그의 머리통이 잘 익은 수박같이 박살나며 뇌수가 핏물과 함께 뿌려
졌다.
추혼수라는 냉운이 삼 년 전, 자신에게 얻어맞고 초주검이 되었던 방
랑 소년의 화신이라는 것을 저승에 가서야 알 것이다. 그곳에서 냉운
이 무림기인전주였음을 알게 된다면 허망히 죽은 게 아님을 알게 될
지도.
냉운이 살인자답지 않게 청수한 모습을 유지하고 서 있을 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일단의 청의인들이 모여들었다.
청의는 수라신궁을 상징하는 색이다.
푸른 물결이 덮쳐오듯 수라신궁의 무사들은 거대한 동심원을 펼치며
냉운을 포위해 들었다.
꾸역꾸역 모여드는 무사들의 수는 무려 이백이 넘었다. 청성을 점거
한 수라신궁의 무사 대부분이 집결한 듯했다.
모든 것은 냉운의 의도대로였다.
그가 초 수를 끌면서 추혼수라를 척살한 것은 그들을 한 곳으로 끌어
모으려 했기 때문이다.
강호상에서 가장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수라신궁.
궁주(宮主)는 수라천마(修羅天魔)라는 자였고, 강호사존(江湖四尊)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다.
강호사존은 당금 천하를 뒤흔드는 네 명의 고수를 말하는 것으로, 수
라천마 이외에 백화궁의 태상궁주(太上宮主)이자 백화궁의 창건자인
백화귀모(百花鬼母), 잔혼사의 주지승 잔혼악승(殘魂惡僧), 그리고
최근 강호에 나타나 무적으로 군림하는 신비마제(神秘魔帝)가 있었다.
강호사존을 직접 본 사람은 드물었다.
그들의 지위는 신(神)과 같아 범인이 가까이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
다.
수라신궁에는 수만 명의 고수가 있고, 그 중에는 과거 일세를 풍미하
던 기인이사가 허다하다고 했다.
천하 어디를 가도 그들의 세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당금 무림
계의 판도였다.
하나, 냉운은 수라신궁이 얼마나 무서운 집단인지 알지 못했다. 알려
고 하지도 않았다.
"수라신궁의 사람을 해치다니……."
"네놈은 여기서 뼈를 묻어야 한다."
백 수십 명 고수들의 손에는 암기와 화기가 들려 있었다.
"하하하……!"
냉운은 겁먹어하기는커녕 크게 웃어 제쳤다.
웃음소리에 실려 있는 진기(眞氣)는 중인에게 고통을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막강한 내공의 소유자군.'
'추혼수라를 간단히 죽인 것으로 보아 보통 놈이 아니다. 하나, 중과
부적이 아니겠는가?'
모두 두려워하는 가운데 승리를 확신하는 미묘한 눈빛이었다.
앞에 나서 있는 자들은 키가 일 장(丈)이나 되고 몸집이 작은 동산만
한 거인(巨人) 아홉이었다.
수라구궁신(修羅九宮神)이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외공(外功)을 터득해 몸이 강철같이 단단했고, 그 위 갑옷을 걸쳐 도
검에 찔려도 상처 하나 나지 않을 정도였다.
"으하하하……!"
그들의 입이 벌어지며 청성산을 들썩이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파란 애송이가 감히 살인을 하다니……."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수라구궁신이 발을 쿵쿵 구르며 냉운을 깔아뭉갤 듯 포악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미련한 놈들이군."
냉운은 중얼거리듯 하며 오른손을 비스듬히 쳐들었다.
그의 손이 팔굽 부분까지 백옥(白玉) 같은 흰빛으로 물들었다.
'백옥천강장법(白玉天 掌法)의 위력은 금석(金石)을 부술 수 있는
것이니, 이놈들이 착용하고 있는 갑옷을 박살낼 수 있으리라.'
냉운은 비웃는 듯한 얼굴을 하고 수라구궁신이 바짝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쿵! 쿵!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깊은 족인이 파여졌다.
"와……!"
"가루로 만들어 주마! 추혼수라의 혈채를 받아내겠다."
수라구궁신의 거대한 몸집이 냉운의 상대적으로 왜소한 몸집을 중인
의 시야에서 가리는 찰나, 신룡음(神龍吟)같이 낭랑한 호통과 함께
희게 변한 손바닥이 수백 개 장영을 만들었다.
수라구궁신은 눈앞이 희게 물드는 듯한 환각에 빠지며 당황해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섬전 같은 장법을 어찌 피하겠는가?
무영천존의 장법은 쾌속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손이 쳐들려짐과
동시에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갔다.
펑! 펑!
"으악!"
"크으으……!"
수라구궁신의 몸뚱이가 거대한 피떡으로 변해 허공으로 날아 올라갔
다. 혈우(血雨)가 청성파의 흙바닥을 벌겋게 물들었다.
냉운은 잇달아 삼초구식(三招九式)을 시전한 후 언제 손을 펼쳤냐 싶
게 두 손을 팔짱끼고 있었다.
수라신궁은 모두 시체로 변해 뒹굴고 있었다.
그들의 앞가슴 백색 장인(掌印) 하나가 선명히 남아 있었다. 바로 심
장 부분에 새겨진 백색 장인이었다.
- 무영천존은 그림자도 남기지 않는다. 백색 장인만이 그가 다녀갔
음을 증명할 뿐이다.
무영천존이 천하제일인으로 군림할 때 강호상에 알려진 신화이다. 그
림자도 남기지 않은 채 상대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영살인술이 무려
이백여 년만에 재현된 것이다.
"사, 사신(死神)이다."
"천하고수다!"
포위망이 일시에 뒤로 물리어졌다.
냉운은 도망치는 자는 쫓지 않는 듯 앙천대소를 터뜨리다가 냉혹한
투로 꾸짖어 말했다.
"수라신궁은 내 손에 멸망한다. 가서 궁주에게 냉운이라는 사람이 염
가장의 혈채를 받으러 간다고 전해라!"
"……."
모두 싸울 뜻을 버린 후였다.
냉운은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아 살기를 거두어들이며 논에 뜨이
는 자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청성은옹은 어디 계시냐?"
"지, 지하 감옥에 있다."
"지하 감옥은 어디에 있느냐?"
"입구는 이곳에서 일 리(里) 떨어진 곳이다. 하나, 그곳은 들어갈 수
있을 뿐 나오지 못하는 장소이다."
겁먹어 말하는 자는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청의장한이었다.
"나올 수 없는 장소라고?"
냉운의 눈가에 푸른 그늘이 생겼다.
다시 살기가 일어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청성은옹은 언제 그 안에 갇혔느냐?"
"지, 지난해 갇혔다."
"그럼……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란 말이냐?"
"……."
청의장한은 아무 대답도 못했다.
"간악한 놈들! 청성은옹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마치 연금해 둔 양
소문내다니……."
냉운은 치를 떨며 우장을 힘껏 쳐냈다.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십 장 밖 우뚝 서 있던 이층 누각 하나가 절반
정도 허물어져 근처를 휩쓸어 버렸다.
"이, 이럴 수가……?"
모두 눈을 의심했다.
십 장 먼 거리를 격해 수만 근 경력(勁力)을 발휘해 낼 수 있는 사람
이 있다고는 믿지 않았던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냉운이 시전한 수법은 천마인(天魔刃)이라는 수법이었다.
살기가 워낙 강해 사람을 상대로 시전해 내기에는 양심이 허락지 않
는 지독한 수법이 천마인 수법이었다.
냉운은 일 초 신위를 보인 후 나직하나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을
토해냈다.
"이후에도 수라신궁에 남아 있는 자는 저런 꼴이 되어 죽을 것이다."
냉운은 짧게 말하며 훌쩍 날아 올라갔다.
"모두 도망가자!"
"저놈은 살인마다!"
"인간으로서는 상대할 수 없는 자다!"
수라신궁 무사들은 그제서야 얼어붙었던 두 발이 풀린 듯 줄행랑쳐
청성파의 담을 뛰어넘었다.
시체 열구가 남아 있을 뿐 곧 정적이 시작되었다.
휘익!
냉운은 흑영으로 화해 일 리를 움직여 거대한 동구(洞口) 어귀에 이
르게 되었다. 가로 일 장, 높이 이 장 되는 동구의 안쪽에서 곰팡내
가 풍겨 나왔다.
그 바로 앞.
<청성복마동(靑城伏魔洞).
극악한 죄를 지은 자를 가두는 장소이다. 빠진 자는 돌아 나오지 못
한다.>
표면에 이끼를 갖고 있는 청석비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청성은옹이 이런 음침한 동굴 안에 갇히셨단 말인가? 이곳은 청성파
가 만든 감옥이거늘, 청성의 기인 청성은옹이 여기 갇혀 계신단 말인
가?"
냉운은 곰팡내에서 독기(毒氣)를 맡을 수 있었다.
하나, 그는 만독불침지신(萬毒不侵之身)의 불사내공(不死內功)을 갖
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독기를 두려워한다면 무림기인전주의 자격이
부끄러울 것이다.
게다가 그는 벽독신주라는 피독주(避毒珠)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 독화탄의 공세에서 거뜬히 살아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그
런 연유에서였다.
냉운은 독연을 맡아가며 동구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안으로 삼 장 들어가자 철책 하나가 나타났다.
어른 머리만한 자물쇠로 묶어져 있는 철책 앞, 아무렇게나 내던진 도
검(刀劍)이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 지키고 있었음에 틀림없어 보였다.
"내가 왔기 때문에 도망쳤겠군."
냉운은 중얼거리며 철책 쪽을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어댔다.
무형의 강기가 일어났고, 오리알 굵기의 철책이 나무젓가락같이 부러
지며 길을 만들었다.
철책을 파괴하고 열 걸음 정도 걸어 들어가자 지하로 향한 계단이 나
타났다.
그 근처는 흑무(黑舞)에 잠겨 있었다.
"시체 썩은 독이군."
냉운은 코를 찡그리며 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독벌레가 슬슬 기어 다녔고, 양쪽 벽면에는 독이끼가 세 치 길이로 돋
아나 귀신의 머리카락같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계단은 사십팔 개로 끝이 났다.
그 밑에는 매우 거대한 지하동부(地下洞府)가 있었다.
도처에 백골(白骨)이 뒹굴고 있었고, 썩은 물이 고인 웅덩이에 부패
한 시체가 둥둥 떠 있기도 했다.
악취가 심해 코가 마비될 정도였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냉운은 진창을 딛었으나 신발 바닥에 흙을 묻히지 않았다.
초상비행술(草上飛行術)을 시전하며 걸음을 내디디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소?"
냉운은 사람을 찾지 못하자 진기를 모아 동부가 뒤흔들릴 정도로 크
게 소리치게 되었다.
웅! 웅!
지하 동부가 여음으로 인해 메아리를 만들며 귀기(鬼氣)를 흘렸다.
어디선가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곳이 지옥이라 해도 수긍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참혹
한 감옥 안.
"누, 누구냐?"
냉운의 말이 여음을 맺기 전, 어디선가 다 죽어 가는 말소리가 대답
으로 들려왔다.
'사람이 있군.'
냉운은 급히 소리난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한 번 움직여 십 수 장을 전진한 냉운의 눈 안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석문(石門) 하나가 있었다.
그곳은 옥중옥(獄中獄)이었다.
그 안에 갇히는 자는 탈출할 위험이 많은 자이니라.
아니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대역죄인이거나.
석문은 아주 두꺼웠다.
"누, 누가 여기 들어왔느냐?"
석문 안에서 지극히 창노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갈라질 대로 갈라진 음성이었다. 냉운이 아니라면 알아들을 수 없이
미약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어, 어떤 사람이기에 수라신궁의 고수들을 물리치고 이 안으로 왔느
냐? 혹, 수라신궁의 앞잡이가 아니냐? 그렇다면 돌아가라!"
안에 있는 사람은 사람 말소리를 아주 오랜만에 듣는 듯 지극히 큰
반응을 나타내며 말을 한시도 끊지 않았다.
"노부는 힘이 없어 잡혔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냉운은 안에 있는 사람이 청성은옹이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며 손바닥
을 내밀어 잠력을 발휘해 냈다.
으드득 ―.
문 안쪽에서 쇠 빗장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 근이 넘는 석문이 아주 둔탁한 소리를 내며 안으로 활짝 열려졌다
. 냉운은 석문이 열리는 순간, 사람이라고 하기 힘든 괴인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사지(四肢)를 한철삭(寒鐵索)으로 결박당한 백발노인이 석대 위에 앉
아 냉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 생김새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주름과 백발이 전면을 덮고 있기 때문이었다.
괴노인의 눈은 백안(白眼)이고 눈가에 진물이 그득했다.
노인은 장님이었다.
냉운은 그의 비참한 모습에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었다.
"아!"
냉운이 탄성을 지르자, 노인이 안면근육을 씰룩씰룩하며 떠듬떠듬 말
했다.
"누, 누구냐?"
"아, 저는 냉운이라는 젊은이입니다. 노인은…… 청성은옹이시겠지요
?"
"그, 그렇다. 노부는 청성은옹이다. 한데 냉운이라는 이름은 알지 못
한다. 왜 노부를 찾아왔느냐?"
"저는 비룡신군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비, 비룡신군? 그는 삼 년 전에 죽었다. 네가 노부를 속이는구나!"
청성은옹이 불끈 화를 냈다.
"비룡신군께서 돌아가셨단 말씀입니까?"
냉운이 흠칫해 묻자.
"그, 그는 죽었다. 반도에게 죽었다. 삼기(三奇)는 여섯 제자를 두었
는데, 그 중 셋이 배반했다. 그놈들은 죽어야 한다."
청성은옹이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냉운은 조심조심 다가가 청겅은옹의 상세를 살펴보았다.
'죽기 직전이군. 대라신선이라 해도 구할 수 없구나.'
냉운은 청성은옹이 사선 위를 밟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냉운이 왔기 때문에 회광반조(廻光反照)의 기현상으로 잠깐 밝
은 정신을 되찾았을 뿐, 거의 다 죽게 된 상태였다.
이제껏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비룡신군은 기인전을 찾던 중 입은 내상으로 인해 반도에게 패해 죽
었다. 그는 삼기 중 가장 불행한 사람이지. 비룡협(飛龍俠)이 늙은
친구를 개 끌 듯 끌고 가는 것을 보면서도 막지 못했으니……."
"비, 비룡협이라니요?"
"비룡협 범중안(范中安)을 모르느냐? 그놈은 비룡신군에게 무공을 배
워 비룡신군을 죽이는 것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악독한 놈이다."
범중안이라면…….
오래 전 백화궁주를 만났을 때 그 이름을 듣지 않았던가?
청성은옹이 피를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모, 모두 그놈이 죽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버젓이 살아 있었다.
망망신니가 그놈을 발견해 비룡신군에게 연락했었지. 비룡신군은 그
놈을 쫓아갔고…… 노부도 그냥 있을 수 없어 제자들을 끌고 비룡신
군을 따랐었다. 하나, 비룡협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놈은 비룡경의
무공에 통달해 비룡신군 이외 사람들은 그놈을 쫓을 수 없었다. 놈은
…… 비룡신군이 나서기를 유인했던 것이다."
"……."
냉운은 말없이 들었다.
망망신니가 비룡신군에게 반도가 나타났다는 말을 전할 때, 냉운은
그곳에 있었다. 그때 비룡신군의 당황했던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크으! 모두 놈에게 속고 말았던 거지. 놈은 그때 이미 비룡신군을
능가하고 있었는데…… 놈이 정체를 나타낸 것이 비룡신군을 유인하
려는 함정임을 몰랐던 거지."
청성은옹은 너무도 비통히 말했다.
"그놈은 비룡신군을 능가하는 고수가 되어 있었다. 비룡신군은 놈을
쫓다가 우리들 눈앞에서 놈에게 잡히고 말았다."
"으음……."
냉운의 준수한 얼굴이 참혹히 일그러졌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비룡협은 비룡신군을 잡아 거꾸로 들고 나
타나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이 늙은이 하나를 죽이는 것으로 그치
나, 삼 년 후에는 천하의 모든 바보들을 죽일 테다. 내가 다시 나타
날 순간을 기다려라!' 놈은 이렇게 저주하며 홀연히 사라져 갔다."
"극악한 놈!"
"놈의 신법은 지극히 빨라 아무도 쫓지 못했다. 하나, 우리는 추격을
단념할 수가 없어 계속 뒤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러다
가 협맹이 분열되기를 기다렸던 수라신궁의 포위에 말려들어 떼죽음
을 당하고 말았다. 노부는 몇몇 협객(俠客)들에 의해 구차한 목숨을
건지고 청성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나, 돌아오지 않은 것만도 못
하게 되었다. 다시 잡히게 되었으니……."
청성은옹은 일세의 기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영화에 불과했다.
그는 무림기인전을 찾아 귀음곡 안으로 들어갔다가 두 다리를 잃는
참화를 겪어야 했고, 결국 수라신궁에 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화는 무림기인전에서 벌어진 셈이었다.
무림삼기가 건재했다면 이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강남대협과 염 백부는 그때 실종되셨군. 그분들이 해를 당했다면,
수라신궁을 절대 그냥 두지 않겠다.'
냉운이 속으로 다짐을 거듭할 때, 누그러든 청성은옹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냉, 냉씨 소년이라고 했나?"
청성은옹이 한동안 과격한 투로 말하다가 원래의 수양을 되찾은 듯했
다.
"왜 여기 왔는지 자세히 말해 보게!"
"저는 귀음곡 앞을 지키고 계시던 비룡신군을 만나 은옹께 협맹의 물
건을 전하라는 명을 받았었습니다. 삼 년 전인데, 이제야 오게 되었
습니다."
"협, 협맹의 물건이라니?"
"태상맹주패(太上盟主牌)와……."
"그, 그것을 자네가 갖고 있나?"
"예!"
냉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성은옹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멀어 버린
눈을 들어 석실 천장을 바라봤다.
"아무 가치도 없는 물건이지. 강호는 마도(魔道)의 것이 되었으니…
… 협맹의 신패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자네 갖게!"
천성은옹은 한숨 섞어 말하며 고개를 힘없이 떨구었다.
"은옹!"
냉운은 청성은옹이 곧 죽게 되었다는 데 놀라며 품안에서 삼선단 한
알을 꺼내 청성은옹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대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이것을 복용하시면 최소한 보름은 더
사실 수 있습니다. 밝은 세상을 보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냉운은 청성은옹의 명문혈(命門穴)을 짚고 불사검제의 독문신공을 사
용해 삼선단의 약기운을 사지백해로 풀어 넣어 주었다.
"으음……."
청성은옹은 아주 오랜만에 좋은 기분을 느끼며 곧 단잠에 빠져 들어
갔다.
그는 적어도 보름간은 죽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다. 이분은 선친과도 잘 아시던 분이
니, 돌아가시기 전 원을 풀어드려야 한다."
냉운은 보름이 되기 전, 수라신궁을 제명시키리라 맹세했다.
천하를 장악한 수라신궁을 단신으로 궤멸시키려 하다니…… 그것도
단신으로.
하나, 냉운의 결심을 안다면 달아나야 할 쪽은 수라신궁일 것이다.
무림기인전주인 그를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냉운의 결심이 흐려지지 않는 한 수라신궁의 운명은 보름으로 한정됐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