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에서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냈고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했던 김영환(51) 전(前) 의원은 치과의사이다. TV 뉴스에 자주 비치는 정부 여당의 대변인을 한 탓에 얼굴만 봐도 그를 알아보는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그의 인생 역정만큼이나 자격증도 많고 색다른 직함도 많다.
1980년대 노동운동을 하면서 전리품으로 얻은 1급 전기공사기사와 소방안전기사 등 기술 자격증이 6개나 된다. 문단에 등단해 시집을 3권 펴낸 시인이기도 하다.
조선일보사 인물정보 DB에 실린 그에 인물평은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나 사고의 폭도 넓어 운동권 같지 않다’고 쓰여 있다(운동권은 모두 사고의 폭이 좁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에디터 이종혜|사진 송득규
치과의사 출신이지만 재야 출신 정치인 이미지가 더 강한 그가 한때 치과 원장으로서도 상당히 성공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흥미를 끈다.
그는 최근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진 이후 지역구였던 경기도 안산에 ‘e-믿음 치과’를 개업했다. 이번이 낙선 이후 처음 하는 인터뷰란다. 중견의 정치인 답지 않게 그는 약간 쑥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병원 그만둔 게 96년이니까 10년만에 치과의사로 돌아왔네요. 내가 한때 병원을 좀 요란하게 했죠. 종로에도 했고, 강남역 한복판에도 크게 했고. 지금으로 치면 프랜차이즈 형태의 치과병원을 한 셈이죠. 의사를 여럿 두고 말이죠.”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투옥 경험과 수년간의 도피 생활, 위장취업 등의 경력. 그가 잘 나가는 치과의사가 됐다니….
그는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73학번이다. 졸업은 88년도에 했다. 치과의사가 되는 데 15년 걸렸다. 77년도에 투옥 당하고 제적도 여러 번 당했다.
“박정희 정권 때 치대에 입학해서, 전두환 정권 때 제적되서, 노태우 정권에 복학했고, 김영삼 정권에 개업해서, 김대중 정권에 문 닫고 정치하다가 노무현 정권에서 다시 병원을 열었네요(웃음).”
치대 학생 신분의 소멸과 부활, 치과의사 면허의 효용성이 한국 정치의 상황과 맞물려 온 셈이다. 요즘 그는 무슨 호칭으로 불리는지 궁금했다.
“역시 의원이라고 부르더라구요. 그게 제일 이미지가 강했던 모양이예요. 8년이니까. 장관은 1년이 좀 안됐고. 사실 치과의사 원장 한 것도 8년인데…. 하기야 치과도 의원이니까(웃음).”
그에게 치과의사의 길은 계륵이었다고 한다. 노동운동을 하는 젊은 전사가 가지고 있기에는 순도를 떨어뜨리는 거추장스러움이었고,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쉬운 삶의 무기였던 것이다.
“두 번 제적 이후 86년도에 세 번째 복학할 때였는데, 매번 본과 3학년 마치고 늘 제적됐기 때문에 미련이 남는 겁니다. 저는 치과의사를 안하려고 했어요. 노동운동에 전념하기 위해서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 시절에는 그런 자세가 열병처럼 있었어요. 운동을 하면서 <낚시춘추>라는 데서 프리랜서 기자도 하고, 전기 기술 학원에서 강사도 했고, 노가다도 하는 등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죠.
꿈은 늘 혁명의 열정에 불타있었거든. 하지만 그 과정 자체는 얽히고 설킨 생활에다 삶은 고달프고 가난한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때마다 자꾸 생각나는 것이 임상실습 1년만 하면 치과의사 될 수 있다는 거였죠.
의사가 되면 다른 식으로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예과 2학년쯤 하고 때려 쳤으면 아예 그런 생각을 접었을 텐데 말이죠. 결국은 복학 조치 있을때마다 학교로 돌아가게 된거죠.”
그는 늦깍이로 복학했어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운동하다 학교에서 ‘짤리는’ 건 괜찮은데, ‘공부 못해서 짤리는’ 건 좀 그렇다는 생각이었다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졸업하자마자 개업을 했다. 그때나 이제나 그의 치과 이름은 항상 ‘믿음 치과’란다. 그는 90년대 초반 종로에서 치과를 크게 키웠다. 치기공사를 20명이나 고용할 정도로 그의 치과병원은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서울에서 개인 병원으로 가장 큰 규모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봤을 거예요. 경험이 짧고 습득한 학업 능력에 비하면 병원이 너무 잘 됐으니까. 저도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지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에게 내가 모르는 사회적 능력이 생겼더라구요.
투옥, 수배, 노동자 생활 등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정말로 다양한 인간관계를 갖게 되었어요. 제가 개업했을 때 이미 병원을 채우고 남을 만큼의 엄청난 사회적 기반이 있었던 거에요.
예를 들어 민노총에서 환자를 보내고, <말>지 기자들이 환자를 데려오며, 정당에 가있는 사람들도 보내지만 국정원에서 날 따라다니던 사람도 환자를 보내오는 식이죠. 한쪽 치료대에 국정원 직원이 누워 있는데 저쪽에는 비전향 장기수가 환자로 누워 있었지요. 좌우 통일전선이 내 병원을 통해 만들어지는 거지요(웃음)”
그의 병원이 이념적으로 공동경비구역 JSA, 비무장지대 였다면 비즈니스면에서는 남보다 앞서서 환자 중심, 고객 만족 병원을 내걸었다고 한다.
“환자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거고, 내가 가진 건 병원에 대한 철학, 인간 중심의 사고 방식이라고 할까요? 그런 걸 난 운동을 하면서 체득한거죠.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이라는 게 대중을 중심에 놓고 조직하고, 인간의 힘을 결집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거잖아요. 그걸 병원에도 적용했던 거죠. 환자의 만족도를 높이고, 어떻게 하면 환자들과의 좋은 관계로 가져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말이죠.
사회운동이나 기업 활동, 그리고 정치는 같은 점이 참 많아요.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이 중요하고, 조직이 중요하죠” 일종의 운동권적 병원 경영이론이다.
한창 병원을 키우던 그에게 재야에서 정치 입문 제안이 들어온다. 그도 솔깃했다. 병원은 잘 나갔지만 그에게 진료실은 좁게 느껴졌다. 민주당을 통해 서울 서초구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서 당시 거물이던 박찬종 전 의원과 붙어보라는 말에 입당 원서에 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그는 지구당 위원장조차 되지 못했다.
거기에도 경쟁자가 많았다. 인생 새옹지마 일까. 그의 말을 빌리면, 그때 위원장이 돼서 국민회의나 민주당 간판으로 강남지역 선거에 계속 나갔으면 지금까지 물 먹고 있을 것이란다.
이후 당내 사정으로 경기도 안산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거기서 보란 듯이 내리 2선을 했다. 민주당에서 수도권에 처음 출전해 당선된 경우는 그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 이변에는 그의 좋은 인상이 크게 기여했단다.
“DJP 연합하면서 서로 악수하는 기념 사진을 찍었는데 내가 제일 중요한 자리에 배석하고 서 있었어요. 젊고 정치 안할 것 같은 인상이라서 당에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군요”
그는 충청도 산골 부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안나온 무학자였고, 시골 중국집 주방장이었다. 어머니는 행상을 했다. 5남매 중 맏이인 그를 공부 시킬려고 서울로 보냈더니 그가 운동권이 되는 바람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노동운동하던 시절에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은 보시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한때는 부모님 원망한 적이 있었죠. 집안에 보증 서줄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내 재능의 90% 이상은 부모님한테 받은 것이더라구요.
아버님이 말 솜씨가 좋아 동네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냈는데 내가 그걸 받았죠. 또 혐오감이 덜 가는 인상과 건강한 육체, 이런 걸 부모님이 주셔서 내가 여기까지 온 거지요. 또 감옥에 갇혀서 보니까 내가 글재주가 있더라고요.
그 때부터 시를 썼고요. 정치에 이렇게 자질이 있는 줄 알았으면 일찍 입문해서 국회의장이라도 하는 건데(웃음)”
그에게 과학기술부 장관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자신의 업적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과기부 직원들에게 ‘김영환 장관’ 있을 때 무슨 일이 이뤄졌는지 전화 한 통만 걸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는 정치를 하면서 의사나 치과의사라는 이미지를 묻었다. 그의 정체성도 그런 걸까.
“처음에는 치과의사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벗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죠. 내가 만약 8년 동안 국회의원하면서 보건복지위원회에 들어가 불소화 사업이나 주장했다면 어떻게 됐겠어요. 나는 그런 거 하지 않고 정보통신 분야를 섭렵했죠.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에 관한 의정 활동을 두루 한 끝에 과기부 장관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 낙선하고 보니까,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게 간단치 않더라구요.
기업에 가기엔 경험이 모자라고, 내가 굉장한 문호라고 생각하지만 글을 써서 먹고 살기에는 어딘가 허술해 보이고, 전기 기술자로 돌아가기도 그렇고 말이죠. 그래서 보니까 결국 치과의사로 가더라고요. 치과의사인 것이 불행 중 다행이죠. 배수진을 치거나 퇴각할 때나 치과의사라는 것이 있었으니까요”
그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파동으로 3선에 실패했다. 지금도 민주당에 남은 것에 후회는 없단다. 낙선한 이후 그는 신변을 정리하고 프랑스에서 유랑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돌아와서는 병원을 차렸다.
진료를 하지 않지만 당장 병원을 열심히 꾸려가야 할 대표 원장이다. 다시 생활고도 걱정해야 한다. 그는 정치를 하면서 재산을 늘리기는커녕 그동안 벌어놓은 재산을 곶감 빼먹듯 빼먹었다고 한다.
그에게 최근 논의되고 있는 의료산업 발전이나 영리병원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가장 우수하고 유능한 인재들이 의료계에 진출해 있고 진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의과대학에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영재라 불리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국가 인적 자원의 최첨병 영재들이 가는 만큼, 국익과 국가를 위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 인력 수준과 역량이면 아마 GDP의 반 이상은 여기서 나와야 한다고 봐요. 정부도 그런 측면에서 의료산업을 봐야 한다고 봅니다. 의료인도 의료 사업해서 자본을 모았다면 이런 변화의 시기 속에서 국제경쟁력을 가지는 의료산업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의료를 독점적으로 의료인들이 해왔잖아요. 그걸 통해 어찌됐든 이 사회의 존경과 부를 축적했단 말이에요. 그분들이 그걸 의료산업에 결집해야죠”
인터뷰 말미에 그가 의사들에게 하는 말은 통렬했다.
“나는 젊은 의사들에게 큰 꿈을 가지라고 말해요. 의사를 통해서 무엇을 할지 고민해야죠. 의사라고 해서 사회의 역사, 정치적 현실에서 예외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의사들의 두뇌나 능력에 비해서 사회 문제나 역사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적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의사들이 왜소화 되는 건 의사들의 의식적인 노력이 부족한 거죠.
저는 의사들이 좀더 과감히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무리 망해도 의사잖아요? 제가 10년 만에 정치하다 의사로 돌아왔는데도 의사이지 않습니까?
굉장히 똑똑했던 치과대학 동료들이 요즘 꿈과 힘이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저 친구가 치과의사 안되고 처음부터 길바닥에 나앉아서 장사를 했거나 정치를 했으면 클린턴이나 블레어 수준은 됐을 텐테, 팔자 더러워서 의사 되고 나니까 쪼그라들어서 저렇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막말로 의사는 뭘 하든 망해도 다시 의사 하면 되거든요. 의사이기 때문에 과감한 도전과 개척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는 겁니다.”
듣고 보니 그랬다. 그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보였다. 긴 시간 그와의 인터뷰 뒤에 느낀 것은 의사라는 것이 삶의 수단으로 활용되건 목적으로 쓰이건, 가끔 배수진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치열함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끊임없이 삶의 관성을 거부하며 이세상의 소금 같은 길을 걸어 가시는 도전정신과 창의 적인 모습에서 신지식인의 모습을 봅니다..늘 새로운 변신을 기대 해봅니다..희망의 모습으로....
의원님의 한 말ㅇ씀 한 말씀이 희망입니다...희망의 바이러스...
걸렸나봐요 행복 바이러스에.. 의원님의 인터뷰 내용이나 글 자체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엑기스 내용입니다.
왜 의원님을 좋아할수 밖에 없는지 알수 있겠내요
진와사 대천명... 이란 말이 생각이 나네요... 와는 개구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