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대사(義湘大師, 625년∼702년)
신비의 선비화
“찰가닥 찰가닥”
배를 짜는 소녀의 입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무릉도원 복숭아는 그물안에 걸려있고
사랑앞에 목단화는 꽃중에도 군자일세
붉고붉은 봉선화는 장독간서 춤을추고
보기좋은 작약화는 여인마다 희롱하고
부석사의 선비화는 의상대사 지팡이고
사시장춘 무궁화는 우리나라 꽃이라네
세 개의 소엽에 적황색 꽃을 피는 선비화는 1천3백년전 의상대가사 중국으로 유학갈 때 기념으로 심은 지팡이에서 핀 꽃이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誌)에
“의상대사가 도를 깨치고 서역 화산으로 떠나려할 때 자기의 표적을 남기기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대사가 거처하던 방문앞에 꽂아 놓았는데 거기서 잎이 나고 가지가 뻗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고 있다.“
하였다. 한가지 신기한 것은 처마밑에 심어져 있어 비와 이슬을 맞지 않는데도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퇴계 이황(李滉)선생이 이곳에 왔다가 이런 시를 지었다.
탁옥정정기사문(擢玉亭亭倚寺門)
승언석장화영근(僧言錫杖化靈根)
장두자유조계수(杖頭自有曹溪水)
불차건곤우로은(不借乾坤雨露恩)
옥같이 빼어난줄기 절문에 비겼는데
지팡이가 신령스런 나무뿌리 되었다네.
지팡이끝 그 자체에 조계수가 있었던가
천지간에 비 이슬 없어도 절로 자라는구나.
전설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이 지팡이를 꽂으면서
"이 지팡이에서 가지와 잎이 나 말라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으리라“
하였다 하는데 진실로 의상대사의 정신은 1,3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생생히 살아 파도치고 있다.
조선조 광해군 때 경상감사 정조(鄭造)가 이 소식을 듣고 부석사에 와서,
“옛 선인도 이것을 지팡이로 하여 지펐으니 나도 또한 지팡이를 만들어 짚어볼까.”
하고 그 나무를 베어 지팡이를 만들어 짚었는데, 그는 인조 계해년에 적으로 몰려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 나무는 아직까지 죽지 않고 다시 새순이 나 자라고 있다.
그로부터 “이 나무를 베면 죽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박대(朴臺)가 부석사에 와서 공부하다가 이 소문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가지 하나를 꺾었다. 스님들이 보고 관에 고발하자 감사가 듣고
“그것이 진실로 영험이 있다면 화와 복은 인과대로 될 것이다.”
하고 놓아주었는데 그 후 박대는 등제(等第)하여 미호(渼糊)의 유상(兪相)이 되고 박대 또한 출세하였다.
또 순홍지(順興誌)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영천 집의 박홍준(朴弘儁)이 이 나무의 신기한 이야기를 듣고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은 하지 말라” 하여 장도칼로 가지 하나를 잘랐는데 박홍준은 무사했으나 나무에서 새순이 나서 더욱 싱싱하게 자랐다.
모두가 의상대사의 자비심의 발로로 생각하고 참회 감사하였다.
하여간 이 나무는 높이 자라면 천장에 부딪칠까 보아 언제나 그 높이 그 모습으로 자라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이 나무를 삶아먹으면 아기 없는 사람이 아기를 낳고 병든 사람이 병이 낳는다” 하여 피해를 많이 입고 있기 때문에 처마밑에 철책을 만들어 특별히 보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의상대사 이야기는 신비로부터 시작된다.
의상대사 자료
의상대사에 관한 역사적인 자료는 전기미상의 부석본비(浮石本碑)를 중심으로 최치원의 부석존자비(浮石尊者碑 : 義相傳), 삼국유사(三國遺事),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송고승전(宋高僧傳) 등 10수종이 있다.
첫째 부석본비는 현존하지 않지만 그의 편린이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藏舍利條)에 나타나고 둘째 최치원의 부석존자전도 현존하지는 않지만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과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안함전(安含傳),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百花道場發願文略解) 등에 기술되어 있어 그 단편을 알 수 있다.
셋째 삼국유사는 부석본비와 의상전(부석존자비) 중국화엄종 자료들을 인용하여 기록하였는데, 삼국유사 권4, 5의 의해 의상전교가 그것이다. 특히 “의상전교”는 최치원의 의상전교를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삼국유사 권3, 4 탑상조에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조(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條) 5권 9 효선조에 “진정사효선쌍미조(眞定師孝善雙美條) 2권 2, 기이 문호왕법민조(文虎王法敏條)가 그것이다.
넷째 각훈의 해동고승전에는 직접적으로 의상의 전기가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해동고승전 안함전에 의상대사의 출생년대를 언급하고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다섯째 최치원 찬 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海東華嚴初祖忌晨願文)은 의천의 원종문류에 기록되어 있어 알 수 있는 것이고,
여섯째 체원(體元)의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百花道場發願文略解)는 최치원의 본전을 의지하여 기록한 것으로 의상의 약전이 첫머리에 보여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일곱째 찬녕(贊寧)의 송고승전은 그 의해편에 원효와 함께 의상전이 기록되어 있다.
여덟째 삼국사기 자료는 삼국사기 제7권 신라본기(新羅本紀)7 문무왕 21년조에 의상대사의 기록이 나오고
아홉째 박인량의 “해동화엄시조 부석존자찬병서(海東華嚴始祖 浮石尊者?序)는 원종문류 22에 있어 볼 수 있다.
최근의 자료로서는 채영(采永)의 불조원류(佛祖源流)와 각안(覺岸)의 동사열전(東師列傳),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와 조연기 역사서 “의상전기와 저서”, 법계오조약기(法界五祖略記)의 지엄조, 화엄법계의경(華嚴法界義鏡) 하, 육학승전(六學僧傳), 고승적요(高僧摘要) 등이 있고, 이종익박사님께서 쓰신 전기소설 ‘의상대사’가 있다.
의상대사 생애 : 생몰연대
이로써 보면 의상대사는 신라 계림 출신 한신(韓信) 장군의 아들로 성은 김씨이고 무덕 8년(625)에 탄생하였다. 그런데 송고승전에는 성이 박씨로 되어 있고, 해동고승전 안함전에는 출생년대가 진평왕 건복 42(620)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鎌田武雄)은 신라불교사 서설에서 “신라에서는 태종 무열왕에 의해 왕조가 교체되었는데 골제가 성골(聖骨)에서 진골(眞骨)로 바뀌어 박씨 성가가 김씨 성가로 바뀌어졌기 때문에 직계가 김씨는 아니지만 의상이 왕족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박씨라고 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하였다.
또 김영태 저 한국불교사에서는 “진평왕이 건복이라고 개원한 것은 즉위년대가 아니고 진평왕 6년부터이므로 건복 42년은 47년에 해당된다” 하였다.
그런데 부석본비에서는 의상대사의 생몰년대가 “당 무덕 8년(625)에 생하여 장안 2년 임인(702) 78세로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고, 백화도량발원문약해에서는 “장안 원년 신축 3월(701) 78세로 좌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보면 의상대사는 당 무덕 8년 서기 625년에 탄생한 것이 틀림없고 단지 입멸년대가 약해와 부석본비 사이에 1년이 차이가 난다.
일곱째 찬녕(贊寧)의 송고승전은 그 의해편에 원효와 함께 의상전이 기록되어 있다.
여덟째 삼국사기 자료는 삼국사기 제7권 신라본기(新羅本紀)7 문무왕 21년조에 의상대사의 기록이 나오고
아홉째 박인량의 “해동화엄시조 부석존자찬병서(海東華嚴始祖 浮石尊者?序)는 원종문류 22에 있어 볼 수 있다.
최근의 자료로서는 채영(采永)의 불조원류(佛祖源流)와 각안(覺岸)의 동사열전(東師列傳),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와 조연기 역사서 “의상전기와 저서”, 법계오조약기(法界五祖略記)의 지엄조, 화엄법계의경(華嚴法界義鏡) 하, 육학승전(六學僧傳), 고승적요(高僧摘要) 등이 있고, 이종익박사님께서 쓰신 전기소설 ‘의상대사’가 있다.
의상대사 생애 : 아버지 한신장군과 어머니 선나부인
이종익박사의 전기소설에는 의상대사 가정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지공자(日芝公子)는 신라 제26대 진평왕 42년(620) 3월15일 신라 왕실 김씨 한시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신공은 신라 제22대 지증왕의 5대손으로써 대대로 문무대신을 지내온 혁혁한 귀족명문이다.
그리고 일지공자의 어머니도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22대 손으로서 신라 제8대 아달라왕의 14세손 대아손(6품관) 세덕공(世德公)의 따님 선나부인(先那夫人)이다.
선나부인이 공자를 밸 적에 하늘에서는 해가 솟고, 땅에서는 쟁반만한 붉은 지초(芝草)가 솟아나 태양과 마주보며 밝은 광채를 발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일지(日芝)라 부르게 되었고, 일지 밑에는 세 살 손아래 되는 여동생 소희(素姬)가 있었다.
집은 양산촌 신라 시조 박혁거세 임금님의 묘지 5능을 거쳐 문천 밖 흥륜사 북쪽에 있었다.
안팎으로 두 겹 접채집에 궁벽으로 장식한 정자와 누각이 있었고 500m가 넘는 담벽 옆에는 갖가지 꽃과 나무가 무성하였으며, 닭?개?염소?돼지 등 5축이 자라고 있었다.
일지동자는 늘 수십 명의 노비들에 에워싸여 생활을 하였고 소희도 그들과 친구가 되어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찬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여뿌고나.
저 한 쌍의 비둘기여,
신선 같은 동자는 호숫가에 노니는데
요조 같은 숙녀는 물 가운데 꽃이로다.
한 나무에 두 가지 나서
동서로 무성하니
하늘의 태양인가
땅 위의 지초인가
믿음직스러운 장군의 아들이요
홍도 같은 여인의 딸이로다.“
의상대사 생애 : 재가생활
아버지 한신공은 청년 장교로서 고구려군을 우수성(지금 춘천)에서 물리치고 11품 내마(奈麻)에서 4품으로 진급 황금보기당주(黃衿步奇幢主)가 되었다. 따라서 일지와 소희는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면서 효경, 논어, 예기 등 유서를 익혔다. 그런데 그 뒤 얼마 있다가 백제군이 속함(速含) 앵잠(櫻岑) 등 여러 성으로 쳐들어와 5천 정병을 거느리고 나갔다가 함몰하고 그 벌로써 다시 12품 내마가 되어 갑옷 대신 군노복(軍奴服)을 입고 초라하고도 암담한 생활을 하였다. 어머니 선나는 그때부터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고 선도산 신령님과 닭슬아지 한배검, 흥륜사 부처님께 나아가 기도드렸다. 아버지가 다시 대가야성 전쟁에 나아가자 더욱더 용맹심을 내어 기도하였으나 먼저부터 쇠약한 몸이 깊은 병에 걸리게 되어 마침내 죽게 된다. 한신장군이 용춘장군(김춘추의 아버지)의 선봉이 되어 진지에 깊이 들어갔으나 이번에도 적군에 포위되어 꼭 죽게 되었는데 꿈에 아내가 나타나 “지금 적군이 눈앞에 있는데 잠은 무슨 잠을 그렇게 자고 있소. 속히 군대를 분산하여 야밤에 작전하시오.” 하여 일어나 군대를 정비하고 현지를 급습하여 적병을 물리쳤다. 때는 27대 선덕여왕(덕만부인)이 즉위한 때라 다시 어중내마에 승진하고 삼천보기당주가 되어 국군의 중책을 담당하게 되었다. 집에 와서 보니 30대 젊은 아내는 죽고 어린아이들은 그의 처제 월지부인에게 맡겨져 자라고 있었다. 나라에서는 죽은 아내를 위해 꽃등(花燈) 천 개를 하사하여 49재, 백일재를 지내게 하고 1주년 제사 때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주었다. 그런데 그때 한신공은 고종사촌누이인 소판 박정훈공의 딸 달아기(月牙)와 가깝게 되어 선나부인의 뒤를 잇게 되었다. 한신공은 여기서 윤필(尹弼)과 문희(文姬) 두 아이를 낳았다. 계모 월아부인은 아이를 나면서부터 더욱 사나워져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짜증을 내고 그 화풀이를 일지와 소희에게 하였다. 아버지는 보다 못해 외직을 지망하여 우수주 대도독이 되어 나갔다. 이모 월지부인은 일찍이 남편을 잃고 오직 외동딸 묘화낭(문희) 하나만 데리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일지와 소희를 자기의 자식처럼 길렀다. 그리고 장차 일지가 성장함에 따라 문희를 일지의 부인이 되게 할까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월아부인은 남편이 외지로 나간 뒤 홀로 외로움을 참지 못해 아버지의 경호원 복득이와 눈이 맞아 사통하고 또 얼마 있다가는 늙은 총각 박기문을 만나 타락했다가 그의 행적을 알게 된 소희를 타살케 한다. 이 일로 인해서 복득이와 박기문은 사형을 당하고 월아부인은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가 마침내 죽는다.
의상대사 생애 : 화랑무
화랑무(花郞舞) 신라 청년들은 대개 세 가지의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첫째는 화랑이 되어 부귀 공명하는 것으로써 부모님께 효도 하고 둘째는 군인이 되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무공을 세워 국가의 훈장을 받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출가 수도하여 도를 통함으로써 국사 왕사가 되는 것이었다. 의상은 군인대장의 아들로써 부귀영화를 함께 누려가며 세속 학문을 익혔다. 그런데 화랑출신인 그의 아버지의 생활을 볼 때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위로는 나라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아래로는 가정생활에 충실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정에 충실하다보면 국가에 소홀하게 되고, 국가에 충실하다 보면 가정에 소홀해졌다. 우수주 전쟁의 승리로 상품을 얻었던 아버지가 속함 앵잠 등 두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받았던 벼슬아치도 도리어 반납하고 죄인 노비의 옷을 입고 거리를 걸어다니게 되어 충격 받은 어머니까지 돌아가셨다. 다시 또 가야성 전투에서 성공함으로써 한나라 당주가 되어 재혼까지 하였지만, 한 여자를 잘못 얻음으로써 개인의 위신과 가정의 명예가 한꺼번에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 “아, 이것이 인생인가!” 아직 나이 어린 어린이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요 의혹이었다. 이모님 또한 일찍이 군인 남편을 전쟁터에서 잃고 청상과부가 되어 외동딸 하나를 거느리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흥망성쇠 길흉화복이 그대로 인생의 길이구나???.” 어쩌다가 벼슬 하나를 얻으면 지렁이가 개천을 뛰어 용이 된 듯 감격해 하고, 조금 떨어지면 하늘이 무너져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공포에 떨었다. 그런데 하루는 국빈공댁에서 꽃 잔치를 베푼다고 통지가 왔다. 국빈공은 덕만왕의 아버지 되는 진평왕의 둘째 동생으로써 덕만왕의 숙부가 되는 분이다. 지위도 지위려니와 성년이 된 딸이 있었으므로 선을 뵈이기 위해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국내 귀공자 집안으로써 15세 이상 된 청년들을 빠짐없이 데리고 와서 재능을 보여 달라는 청이었다. 국빈공 집은 계림 동쪽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 왕공 귀족들이 사는 집 사이에 끼어 있었다. 두 세 겹으로 둘러싸인 금벽(金壁)과 주란사창(朱欄紗窓)에 당홍도가 만발한 넓은 정원에는 청?황?적?백의 아름다운 연못을 가지고 있었다. 초대된 분들이 5품 이상 벼슬하시는 분들이라 김용춘, 김서현 장군이며 김유신, 김춘추 등 큰 벼슬아치를 하시는 분들이 윗자리에 앉아 있고 수품 상대등 대상과 사신 서불한 대신 아리내 대장군등 50여 명이 그 아랫자리에 질서있게 앉아 있는데 선덕여왕이 금관을 쓰고 들어오더니 높은 자리에 앉았다. 한신장군은 50여명의 대장들 틈에 끼어 일지와 함께 앉아 있었다. 먼저 작설차 한잔씩을 따라 상견례를 대신 한 뒤 누(樓) 다락을 내려와 삼색 모란꽃을 관람하고 다음에 다시 누에 오르니 풍성한 주안상이 놓여 있었다. 술을 한 잔씩 하고 나니 은은하게 관현악이 울려 퍼졌다. 당악(唐樂), 국악(國樂)이 순서로 나오더니 다음에는 향악(鄕樂) 가락이 퍼지자 무녀들이 춤을 추었다. 점심식사가 끝난 뒤에는 맑은 차로써 입을 행구고 다시 젊은 청년들의 화랑무예를 구경하게 되었다. 일지공자는 덕만부인의 부름을 받고 널뛰기, 투호(投壺), 활쏘기를 하고 끝으로 화랑검무를 추어 그 인기가 절정에 올랐다. 봉접탐화무(蜂蝶探花舞) 춘풍수양무(春風垂楊舞) 원앙롱수무(鴛鴦弄水舞) 비련축수무(飛戀蹴水舞)가 나오자 피리, 퉁소, 젓대, 거문고, 가야금, 비파가 한꺼번에 울어대며 화랑의 노래가 합창으로 흘러나왔다. 어화 우리는 서라벌 사나이 서라벌이 있으니 우리가 있고 우리가 있으니 서라벌이 있네 어화 우리는 서라벌 사나이 살아도 서라벌 죽어도 서라벌 서라벌 칼위에 대적이 없네 양산 부리에 흰말이 우니 한배 밝은님 우리 앞에 오시고 깊은숲 속에서 흰닭이 우니 알지 할배검 우리님 오셨네 어화 우리는 서라벌 사나이 일지는 이 소리에 맞추어 관우출관무(關羽出關舞) 조자룡검무(趙子龍檢舞) 선학희천무(仙鶴戱天舞) 황취롱풍무(荒鷲弄風舞)를 추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이 일어서서 박수를 치자 홍연정 위에 앉아 있던 귀공자집 따님들까지도 몰려나와 환호성을 올렸다. 일지는 다시 용기를 내어 비룡롱주무(飛龍弄珠舞) 준마종횡무(駿馬縱橫舞) 선인위기무(仙人圍碁舞) 등 열 두 장면을 완전히 연출하니 사람들은 경탄하여 환호성을 올렸다. “일지공자 만세???, 일지공자 만세???,” 우울했던 한신공도 마음이 후련히 풀려나갔다. 덕만왕이 칭찬하였다. “네 재주 참 기특하구나. 이것은 우리 서라벌의 자랑이요, 복이로다. 길이 잘 보존하라.” 그리고 청?홍 비단 한 필씩을 상으로 내렸다. 사실 이 춤은 아버지께서 늘 뒤뜰에서 남몰래 연습하시던 것을 눈여겨보고 익힌 것이었다. 꽃 잔치가 끝난 뒤 국빈공 집에서는 일지공자를 승만공주의 부마로 간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논이 되었다. 그러나 일지는 이미 세상의 무상을 느낀 지 오래라 임금님 아니라 임금님의 후보자가 된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약속해 놓은 묘화와의 관계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번은 외지에 나갔다 오니 그동안 나라가 바뀌어 선덕여왕이 승하하시고 진덕여왕이 보위에 올라 당나라에 주달하게 되자 많은 사은품을 보내는 가운데 다섯 명의 여자 공주도 끼게 되었다. 진평왕 말년부터 시작되어 문무왕 8년에 당 고종이 금지하면서부터 끝이 났지만 18세 이상 귀족 집안의 딸 전국의 미희 가운데 다섯 명을 선출하여 당황제께 선물로 보내는 것이 곧 이 여자 사은품인데 그 가운데 묘화가 끼어 있었다. 그런데 이 묘화는 당나라 배를 타고 등주에 이르기 직전 물에 빠져 자살하여 그를 데리고 가던 사신들까지 문책을 당하게 될 형편에 놓여있었다.
출가의지
일지낭자는 이 추풍낙엽과 같은 인생의 숙명 속에서 밤낮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월성 동쪽 10리 거리에 있는 황복사를 찾아갔다. 거기에는 나이 90이 넘은 안함법사가 계셨기 때문이다. 일지공자는 스님께 삼배를 드리고 말하였다. “스님 저는 한산주 도독군주 한신 일길찬의 아들 일지입니다. 세상의 무상을 느끼고 출가할 뜻을 가지고 왔으니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안함법사는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였다. “응. 세속을 뛰어나서 불도를 배우겠다 하는 그 뜻은 장하다만 네가 능히 세속을 뛰어나서 불도를 배울 수 있겠느냐.” “예. 이 죄 많은 몸을 제도하여 주십시오.” “아니다. 세상의 왕이나 장군 노릇하기는 쉬워도 도를 닦기는 쉽지 않느니라.” “아닙니다. 법사님 저는 기필코 출가하여 도를 닦고 싶습니다.” 안함법사는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법화경 묘음보살품 게송을 생각하였다. 끝없는 세계에 풍진은 소진하고 수없는 중생 업보가 아득하구나. 애욕의 바다 물결이 도도한데 그래서 그 이름을 무진의라 하였던가. 그리고 말씀하였다. “내가 진정 출가를 원한다면 아버지와 나라 임금님께 가서 허락을 맡아 오너라.” 그리하여 일지공자는 아버지 한신장군께 가서 아뢰었다. “아버지 소자는 출가하여 도를 닦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어 그게 무슨 말이냐. 나라에서는 너의 혼사를 구하기 위하여 일찍이 국빈공댁에서 꽃잔치를 베풀고 그 후 묘희까지도 희생하게 되었는데, 이제와서 모든 일이 가닥이 잡히게 되는 찰나 네가 출가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저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침이슬 저녁연기와 같아 보입니다. 저는 일찍이 아버지의 패전으로 걱정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보았고, 사랑하던 동생 소희의 죽음을 보았으며, 그 다음에는 달 엄마의 죽음도 보았습니다. 한 계급 오르고 내리는 것이 달이 커졌다 작아지는 것 같으며, 세상의 영화가 일출 일몰과 같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애인까지도 물에 빠져 죽게 한 사람이 나라의 부마가 된들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제 눈앞에서 만도 세 임금님의 자리가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자리가 얼마나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만 너마저 나를 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살겠느냐. 너도 나처럼 삶이 평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첫째는 나라가 통일되기 전에는 전쟁이 그치지 않을 것이고, 둘째는 가정이 애초부터 이 지경이 되었으니 평안할 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를 희망한 것입니다. 삼계의 유전은 세속의 은애(恩愛)속에 얽혀있다 하였습니다. 제가 유전의 세계를 벗어나 반드시 어머니와 소희, 그리고 달엄마와 묘희의 혼을 구제코자 합니다.” “장하다. 나도 네 엄마가 가신 뒤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명예와 사랑에 얽혀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내 마음이 정 그러하다면 내 몫까지 도를 닦고 세상을 구해다오. 기쁜 마음으로 너의 출가를 허락하노라.” 아버지의 눈에서 한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일지공자는 가련한 윤필 남매를 껴않고 함께 흐느껴 울다가 자리를 떴다. 말을 타고 대전을 향해 달렸으나 전혀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내전 별감을 통하여 승만왕의 특별면회를 요청했다. 승만왕께서는 평소 사랑했던 일지공자가 온다는 말을 듣고 내전으로 안내했다. 반갑게 맞아 차를 대접하며 그동안 안부를 물었다. “그래 그동안 무고하였는가?” “예. 마마님 덕분에 안가태평하옵니다. 상감님께서도 옥체 건강하시나이까?” “만인지상(萬人至上)은 빙설과 같은 자리라 항상 조심조심 살아가고 있네. 그런데 어인일로 이렇게 나를 찾았는가?” 승만부인의 눈 가운데는 외로움과 아쉬움이 깃들어 있는 듯 하였다. 그러나 일지는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예. 황공하온 말씀이오나 임금님의 은혜를 입고자 왔습니다. 소신이 몸을 받아 국가와 부모님께 많은 은혜를 지고 살았으나 이것만으로써는 그 은혜를 갚을 길 없어 저 원광법사와 자장율사처럼 출가하여 도를 닦고자 합니다. 허락하여 주옵소서.” 한편 생각하면 남편으로 모시고 살면서 국가대사를 함께 의논하고 살고 싶었던 것이 승만부인의 생각이었으나 이제 보위에 오르고 보니 그 같은 생각은 한가지 꿈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좋아하던 사람을 남의 품안에 넣은 것보다는 차라리 청정한 몸으로 우러러보며 장차 국사 왕사로 모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쉽게 허락하고 말았다. “그대의 몸은 개인의 몸이 아니고 이미 국가대사에 봉공한 귀한 몸으로 알고 있네. 그런데 왕후장상으로서가 아니고 청정도인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창조코자 한다니 그의 원력과 신심에 노라지 아니할 수 없네. 진심으로 그대 뜻이 그러하다면 나라에서도 허락하는 수밖에 없지….” 이렇게 하여 승낙을 받은 일지공자는 그날밤 늦도록까지 승만부인께서 베풀어주신 만찬을 들고 돌아왔다. 한편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였다. 임금의 고귀한 자리에 앉아있지만 한사람으로써의 승만부인은 진실로 외롭고 쓸쓸한 여인임을 느꼈으며, 그토록 깊은 집념을 가지고 사랑하는 애인까지 떼어놓게 하고자 당나라 선물로 묘희를 보내 차가운 물에 혼을 담그게 한 여인으로 생각하면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여인이었다. 일지는 그 길로 집에 돌아가 어린 동생들을 보모에게 맡기고 황복사로 길을 떠났다.
출가지 황복사
출가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의상전교에서는 “29세에 경사(京寺)를 의지하여 황복사에서 머리를 깍았다.” 하고 부석본비에서는 “초세(?歲)에 출가했다” 하였으며, 송고승전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영기(英奇) 하였는데 성장하자 곧 출가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의상전교의 출가년대와 스님 나이 29세가 서기653년이 된다. 그러면 동자료에서 제2차 입당 시기가 650~655년 사이가 되므로 출가 전에 입당한 것으로 되어 이치상 맞지 않다. 그러므로 출가년대는 부석본비의 15세 설, 즉 “초세출가” 설을 써야 한다. 그러면 “초세”란 무슨 말인가. 자어(字語)에“?”는 ‘어린 풀“ ’어린나이‘라 했으니 동자 총각시절을 의미 한다. 황복사는 경주시 구황동 낭산(狼山) 동쪽 기슭에 있었다. 건립년대와 그 후의 사실은 알 수 없고 의상대사가 이 절에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귀의하였다는 사실이 삼국유사 의상전교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현재는 산기슭 높은 지대 위에 3층석탑과 금당지 그리고 기단에 새겨진 12지상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안함법사는 일지공자의 수계를 황복사에서 하지 않고 황궁사찰 황룡사 금강계단에서 하기로 작정하고 의발을 준비하였다. 황룡사는 24대 진흥왕이 월성궁쪽에 새로 궁을 지으려다가 황룡이 나타나 궁을 철회하고 그 궁을 절로 만든 유명한 절이다. 선덕여왕 14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 갔다가 돌아온 뒤 9층탑을 세워 호국불교의 근본도량을 만들고 또 거기 금강계단을 세워 보름마다 계법을 설하여 불교운동을 실천했던 곳이다. 자장율사는 신라 왕족 소판(3품 벼슬) 무림공(茂林公)의 아들로 선덕여왕 5년 당나라의 청량산에 들어가 문수보살을 친히 뵙고 부처님의 정골사리와 의발등을 얻어와 오대산, 설악산, 지리산, 태백산 등 명산에 절을 짓고 사리탑을 조성하였으며, 이 황룡사에는 특별히 9층탑을 세워 이웃나라의 침입을 막고 삼국통일을 기원하였던 곳이다. 자장율사가 전계아사리가 되고 안함법사가 교수아사리가 되고 국교대덕이 갈마아사리가 되어 계를 받았는데 승만대왕까지 나와 증명해주었다. 일지공자는 이 자리에서 계를 받고 스님이 되어 그 이름을 ‘의상’이라 받게 되었다. “너의 이름은 이제부터 의상이라 불러라.” 그런데 그 의상을 어떤 책에서는“義相”이라 쓰고 어떤 책에서는 “義湘” 또는 “義想”이라 써 혼돈을 일으키고 있으나 발음의 상은 똑같음으로 여기서는 한문 표기를 하지 않고 그냥 “의상”이라 부르겠다.
안함법사의 법문
출가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의상전교에서는 “29세에 경사(京寺)를 의지하여 황복사에서 머리를 깍았다.” 하고 부석본비에서는 “초세(?歲)에 출가했다” 하였으며, 송고승전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영기(英奇) 하였는데 성장하자 곧 출가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의상전교의 출가년대와 스님 나이 29세가 서기653년이 된다. 그러면 동자료에서 제2차 입당 시기가 650~655년 사이가 되므로 출가 전에 입당한 것으로 되어 이치상 맞지 않다. 그러므로 출가년대는 부석본비의 15세 설, 즉 “초세출가” 설을 써야 한다. 그러면 “초세”란 무슨 말인가. 자어(字語)에“?”는 ‘어린 풀“ ’어린나이‘라 했으니 동자 총각시절을 의미 한다. 황복사는 경주시 구황동 낭산(狼山) 동쪽 기슭에 있었다. 건립년대와 그 후의 사실은 알 수 없고 의상대사가 이 절에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귀의하였다는 사실이 삼국유사 의상전교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현재는 산기슭 높은 지대 위에 3층석탑과 금당지 그리고 기단에 새겨진 12지상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안함법사는 일지공자의 수계를 황복사에서 하지 않고 황궁사찰 황룡사 금강계단에서 하기로 작정하고 의발을 준비하였다. 황룡사는 24대 진흥왕이 월성궁쪽에 새로 궁을 지으려다가 황룡이 나타나 궁을 철회하고 그 궁을 절로 만든 유명한 절이다. 선덕여왕 14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 갔다가 돌아온 뒤 9층탑을 세워 호국불교의 근본도량을 만들고 또 거기 금강계단을 세워 보름마다 계법을 설하여 불교운동을 실천했던 곳이다. 자장율사는 신라 왕족 소판(3품 벼슬) 무림공(茂林公)의 아들로 선덕여왕 5년 당나라의 청량산에 들어가 문수보살을 친히 뵙고 부처님의 정골사리와 의발등을 얻어와 오대산, 설악산, 지리산, 태백산 등 명산에 절을 짓고 사리탑을 조성하였으며, 이 황룡사에는 특별히 9층탑을 세워 이웃나라의 침입을 막고 삼국통일을 기원하였던 곳이다. 자장율사가 전계아사리가 되고 안함법사가 교수아사리가 되고 국교대덕이 갈마아사리가 되어 계를 받았는데 승만대왕까지 나와 증명해주었다. 일지공자는 이 자리에서 계를 받고 스님이 되어 그 이름을 ‘의상’이라 받게 되었다. “너의 이름은 이제부터 의상이라 불러라.” 그런데 그 의상을 어떤 책에서는“義相”이라 쓰고 어떤 책에서는 “義湘” 또는 “義想”이라 써 혼돈을 일으키고 있으나 발음의 상은 똑같음으로 여기서는 한문 표기를 하지 않고 그냥 “의상”이라 부르겠다.
영취산 반고굴
스승을 잃은 의상은 초상 후 49재를 정성스럽게 모시고 천일기도를 시작하여 스승의 대상을 모셨다. 승만임금님께서도 많은 재물을 보시하여 풍족하게 재를 모셨다. 의상대사가 스승의 말씀을 의지하여 원효대사를 찾아가고자 짐을 챙기고 있는데 궁중에서 시녀가 왔다. “승만임금님께서 손수 정성드려 지으신 것이니 스님께서 꼭 받아 입으시라 하십니다.” 짐을 풀어보니 명주로 만든 가사장삼에 속옷까지 두 벌이 들어있고 또 비단으로 만든 이부자리가 들어 있었다. “고맙소. 내 부지런히 공부하여 이 비단과 같은 불법을 이 나라에 펴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의상대사는 그 옷을 부처님 앞에 올려놓고 야반에 도망치듯 영취산으로 향하였다. 영취산은 경주에서 약 2백리 떨어져 있는 삽량주(?良州:지금 양산)에 있었다. 옛부터 많은 도인들이 이 산에 몸을 숨겨 공부했다는 말을 들었다. 과연 산이 깊고 물이 맑아 세상의 티끌이 한꺼번에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멀리 바라보니 서쪽 골짜기에서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 저기에 도인이 사나 보다.” 하고 건너가니 나무장작을 패던 사람이 쳐다보고 반겨 맞는다. “아, 이 사람, 일지랑 아닌가.” “허, 새밝이 형님(誓撞) 여기서 뭘하고 계십니까?” “자네 기다리고 있지. 내 자네가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네. 그런데 어찌하여 여기까지 왔는가.” “안함스님의 유언을 따라 왔습니다.” “그분이야말로 부처님 화신이야. 자네 구해줄려고 세상에 나오신 분일세.” 원효대사는 박 ? 석 ? 김(朴?昔?金) 3성이 아직 나라를 세우기 전에 6부 촌장시대에 6부 부족장을 지내던 할아버지의 자손이다. 나라에서 귀족과 대신들에게 최 ? 이 ? 정 ? 설 ? 손 ? 배(崔?李?鄭?薛?孫?裴)6성을 나누어 주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설씨성을 가진 잉피공(仍皮公)의 손자로서 아버지는 담내말(談乃末)이다. 원효는 진평왕 39년(617 삽량주에서 탄생하여 의상보다 여덟살 손위가 된다. 의상과는 내외종 4촌으로 한신공의 누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매우 가까운 친척이다. 그러므로 의상은 어려서부터 원효와 교우가 있었는데 원효가 18세 되던 해 화랑 낭도로 뽑혀 출전한 뒤로는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원효는 여러번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워 대사(大舍)위를 거쳐 황금서당(黃金誓撞)에 이르렀으므로 새밝이서당랑이라 부른 것이다. “새밝”이란 첫 새벽이란 뜻이다. 해가 밝아오는 첫새벽을 “새밝”이라 하였으므로 한문으로는 “원효(元曉)라 썼던 것이다. 사실 신라라는 말도”새(新)“ ”별(羅)“이라는 나라말에서 나온 것인데 ”새로 나타난 밝은 세계“라는 뜻이니 원효는 곧 신라의 밝은 세계를 창조한 대표적 인물로 인식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저녁밥을 먹고 차담이 한참 무르익어 졌을 때 물었다. “새밝이형님. 내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무슨 질문인가?” “세상 사람들이 발심(發心) 발심하는데 그 발심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 그거 좋은 말이지. 깨달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야. 세상에는 깨달은 사람도 있고 깨닫지 못한 사람도 있거든.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거든. 그러므로 중생과 부처를 보고 지옥과 천당을 보고 깨닫는 마음을 일으켜 복된 삶을 해야한다는 말이지.” “개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는 어데 있습니까?” “깨달은 사람은 언제나 평온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의상대사는 화로 가로 바싹 다가앉으며 물었다.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깨달은 사람들은 오랜 세월 욕심을 버리고 고행한 까닭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끝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지. 막지 않는 천당에 누가 가지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천당 가는 사람은 적고 달램이 없는 악도에 들어가는 사람은 많아. 모두가 삼독번뇌를 자기집 재물로 삼고 이 몸과 5욕락으로써 낙을 삼는 까닭이지. 세상에 누가 도 닦고자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애욕에 얽힌 까닭이야. 비록 산에 들어가 도를 닦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힘을 따라 선행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야.” “형님은 언제 반고굴로 들어왔습니까?” “한참 되었어. 세상 욕락을 등지면 성현이 되고, 어려운 일을 참고 견디면 부처님이 된다는 말을 듣고 참고 견디며 실천해 보고자 노력하고 있지. 재물을 아끼고 탐하는 악마보다 자비보시로 법왕자가 되기를 희망하였지만 잘 되지 않더라고 그래서 차라리 높은 산 험한 골짜기에 들어가면 어떨까 하여 왔더니 내 생각이 딱 맞았어. 여기 와서 보니 볼 것도 없고 들을 것도 없으니 저절로 그 마음이 평온하게 되어 욕심을 부리려 해도 부릴 것이 없게 되더구만.” “장하십니다. 수행은 어떻게 하십니까?” “풀뿌리 나무과일로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목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셔 갈증을 쉬지. 사실 보니 맛있는 음식 아무리 먹여 길러도 이 몸은 결코 사라지고 부드러운 옷을 입어 사랑이 기를 지라도 이 몸은 결코 부셔지고 마는 것이거든….” 이 말을 듣고 나니 승만여왕께서 보내온 명주 가사장삼과 속옷 두 벌을 가지고 올까도 생각했는데 안가지고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때 기러기 두 마리가 허공을 나르며 “끼욱” 하고 소리쳤다. 원효스님이 바라보면서 껄껄 웃었다. “저게 나의 벗이야. 저놈이 남으로 가면 천하에 가을이 온줄 알고, 저놈이 북으로 가면 천하에 봄이 온 것을 알지….” “법당은 어디 있습니까?” “법당은 무슨 법당이야. 동굴이 그대로 법당이지. 자 우리 일어나 예불이나 드리세.” 하고 일어섰다. 뒷뜰로 돌아가니 동굴 하나가 나왔는데 그곳이 곧 반고굴이었다. 거적대기 하나 걸고 조그마한 부처님 한분 모셔놓고 예불을 드렸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예불이 끝나자 반야심경을 한번 독송하고 원효대사는 108배를 드린 뒤 그 자리에 앉아 두 시간 동안을 좌선하였다. 처음 당한 의상으로서는 무릎뼈가 아프고 궁둥이가 시려 견디기 힘들었다. 원효대사가 말했다. “절하는 무릎이 얼음같을지라도 불 생각하는 마음이 없어야 되고, 주린창자가 에이는 것 같을지라도 밥 생각이 없어야 된다네.” “그런데 형님.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 오면서도 허송세월 많이 했어요.” “지금도 늦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게.” 몇일 동안 원효스님 말씀을 듣고 함께 살다보니 도인이 다 된 것 같이 느껴졌다. 밤길도 걱정되지 않고 먹고 입는 것도 차차 적응이 되어갔기 때문이다.
낭지스님
원효대사가 말했다. “가세 오늘은 우리선생님을 소개해 줄테니.” “선생님이라뇨?“ “가보면 알 수 있어. 그분이 언젠가 자네가 계 받을 무렵 상래상래(相來相來)하시며 나에게 좋은 도반이 올 것이라고 예언한 일이 있거든….” “아. 나도 생각이 납니다. 안함스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효(曉)자를 든 사람과 벗하고 지(智)가 든 사람을 스승삼아 공부하라 하셨습니다. 이제 알고보니 바로 그게 그 말씀이시군요.” “그분이야말로 앉아 3세를 보고 서서 시방세계를 통철한 분이시지.” 원효와 의상은 이렇게 주고 받으며 낭지법사가 살고 있다는 혁목암(赫木庵)으로 올라갔다. 법사는 보이지 않았다. 17,8세 되어보이는 시봉이 있다가 말했다. “달포전에 입정에 들어 계시다가 종적이 없어졌습니다.” 낭지스님이 입정해 있던 방을 들여다보니 자리 뒤에는 흰 코끼리를 타고 계신 보현보살상이 그려져 있었다. 사미행자가 말했다. “스승님을 꼭 뵙고자 하면 저 보살님께 정성스럽게 기도드려 보세요.” 원효와 의상은 도토리를 삶아 먹으며 보현보살님께 무수히 절하며 빌었다. “보살님. 스승님을 꼭 뵙고싶습니다.” 이렇게 일주일을 기도드리니 하루는 갑자기 한 노스님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의상과 원효가 감격하여 흐느껴 울며 구배(九拜)를 하니 노스님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씀하였다. “그동안 잘들 있었는가?” “예. 저희들은 잘 있었습니다만 스승님은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셨습니까?” “응. 중국 청량산에서 두순화상(杜順和尙)께서 화엄경을 설하여 들으러 갔다 왔지.” 하고 자연스럽게 말씀하였다. 낭지법사는 화엄경의 10지 보살로 시방세계 어느 곳이든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다녀오곤 하였다. 한번은 두순화상이 화엄경을 설하실 때 그 절 주지가 대중에게 “이 절 밖에 사시는 분들은 오실 때 꽃이나 나무 하나씩을 가지고 오십시오.” 하였는데 스님께서 영취산의 나무 한 가지를 꺾어다 드렸다. 그런데 두순화상이 보고 “이 나무는 범어 달레가로써 중국말로는 혁(赫)이라 번역한다. 그런데 이 나무를 보니 인도의 혁목이 아니고 해동의 혁목이 틀림없어. 신라 영취산에 계신 스님이 이곳에 다녀갔을 것이다.” 하여 이 스님이 사시는 암자를 혁목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낭지스님께서 말씀하였다. “내 너희들을 보니 아직 그릇이 깨끗이 되지 않았다. 이 몸은 구정물 투성이인데 아직도 깨끗한 것으로 착각하고 세상에서 받은 것은 거의 모두가 고통거리인데 아직도 그대들 마음속에 즐거운 장남감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세상은 무상한 것인데 영원한 것처럼 느끼고 있고, 실제 나라는 것은 없는 것인데 ‘내가 도를 닦는다’ 하는 마음 때문에 내가 그 속에 꽉 차 있다. 그릇이 더러우면 아무리 깨끗한 음식을 그 속에 담아도 소용이 없다. 음식 또한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더러운 음식이 꽉 차 있으면 새로운 음식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어. 그러니 생각의 그릇을 비우고 깨끗이 청소하도록 하라. 몸은 깨끗치 못한 것이고 받는 것은 모두가 고통이며 마음은 무상한 것이고 나는 무아한 것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원효와 의상은 스님의 법문을 마치 얼음을 밟아가듯 귀담아 듣고 내려와 손발이 달도록 정진하였다.
고달산 도인
원효와 의상은 이렇게 5,6년 동안 피나는 정진을 하다가 하루는 낭지스님 계신 곳을 찾았다.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어도 단번에 스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원효대사가 말했다. “제행이 무상한 것이 생멸법이라 하더니 스님 사시는 것은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 생멸이 멸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나도 난 것이 아니고 멸해도 멸한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자네들 그 도리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잘 깨닫고 멋있게 사시는 도인 한 번 만나 뵙고 싶은가?“ “그런 도인이 어디 있습니까. 계시기만 하다면 당장이라도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조용히 눈을 감고 입정에 들게.” 원효와 의상이 정에 들어 한식경이 지났다. 그런데 눈앞에 밝은빛이 번쩍 나타나 눈을 떠보니 분명 앉아있는 좌복은 틀림없이 혁목암 것인데 눈앞의 경계는 전혀 알 수 없는 딴 세상이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백제 고달산 비래방장(飛來方丈)일세. 자네들 일어나 저 보덕화상(普德和尙)에게 절하게.” 쳐다보니 앞에는 하얀 눈썹을 가진 거룩한 도인이 앉아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나니 말씀하였다. “저분이 고구려 도인 보덕화상이네. 고구려 임금님 보장왕(寶藏王)께서 도교를 받아들여 불교를 박대하므로 백제 땅으로 날아오신 것일세. 사람만 온 것이 아니라 집까지 함께 떼어 가지고 날아왔기 때문에 비래방장이라 하는 것이네. 고구려는 얼마 가지 않아 망할 것이야. 바른법을 등지고 사법을 행하면 세상이 뒤집어지고 마는 것이지.” 과연 그 뒤 얼마 있지 않아 고구려는 멸망하고 백제 땅은 신라에 귀속되어 보덕화상은 승통에 오르게 되었다. 보덕화상이 말했다.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네. 인연이 다으면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이고,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게 되는 것이니 만난인연 소중히 여기고 살소.” 원효대사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열반경에 정통하여 금강법신을 얻었다고 들었는데 열반의 도리는 어떠합니까?” “여래의 진수(眞髓)요 부처님의 고향일세. 모든 중생이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적멸의 고향에 돌아가 금강법신을 얻고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불성을 깨달아 해탈자재하게 되는 것이네. 마치 고향을 떠난 행자가 고향에 돌아와 할 일을 잊은 듯 열락(悅樂)을 맛보는 것이 곧 열반의 진수이네.” 의상대사가 물었다. “비래방장은 유마거사의 방장을 그대로 날려보낸 집인 것 같은데 유마의 진수가 어디 있습니까?” “불이(不二)에 있지. 원래세상은 둘이 아니야. 출가 재가가 둘이 아니고 염정, 귀천, 일이(一異), 단상(斷常)이 한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잘 알지 못하므로 대궐속에 살면서도 항상 가난한 짓만 하고 있지. 방장은 곧 우리의 마음의 고향이니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쓸 줄 알면 이렇게 날려 허공세계를 마음대로 유행할 수 있지. 원래 내가 살던 곳은 고구려 반룡산 연복사였거든. 그러나 우리가 올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둘이 아니고 장차는 신라도 한 통속이 될 것이네. 그러므로 유마힐은 떳떳한 도 아닌 것(非道)을 행할 줄 아는 사람이 불도를 통달한다 한 것이네.” 참으로 듣지 못한 것을 듣고 보지 못한 것을 본 것 같아 원효와 의상의 눈에는 새로운 불법이 번쩍이게 되었다. 그러면 과연 그때 신라와 백제 거리가 천리가 넘고 고구려와 백제 사이가 2천리가 넘었는데 이러한 신통이 어떻게 가능 했을까 하는 것은 범부들의 근심이고 실제 이들의 행방을 증명한 글 가운데는 고려 대각국사의 시가 있다. 열반방등교(涅槃方等敎) 전수자오사(傳授自吾師) 양성횡경일(兩聖橫經日) 고승독보시(高僧獨步時) 종연임남북(從緣任南北) 재도절영수(在道絶迎隨) 가석비방후(可惜飛方後) 동명고국위(東明故國危) 열반 방등교는 우리스승으로부터 전해받았네. 두 선인 경을 배우던 날 큰스님 홀로 걸어 내려온 때이네. 인연따라 남북에 맡기는데 도에는 맞고 따른 것이 따로 없다네. 가석다 방장을 들어 날리던 날 동명왕의 옛나라가 위태하게 되었으니. 여기서 두 성인은 원효와 의상이다. 비방영첨첨남지(飛方靈瞻瞻南地) 구은유종예차문(舊隱遺?禮此問) 부석분황증문도(浮石芬皇曾聞道) 개연장상미지환(槪然長想未知還) 방장 날려 신령스럽게 남쪽지방에 보냈는데 숨어 사시던 옛 자취 찾아 이곳에서 문안드렸네. 부석 분황이 일찍이 찾아 뵙고 도를 물었으니 감개하여 그지없는 생각 돌아갈 길마저 잊었네. 여기서도 부석과 분황은 의상대사와 원효대사를 말한다. 이글은 대각국사 문집 제 17권 89에 있다. 보덕스님은 “불법은 누구를 의지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그 마음을 관하여 깨닫는 것”이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생각을 그치고 그 그친놈을 관해보라. 생각이 고요해지면 만상이 그 가운데 나타나게 되어 있다.”
승만경 법문
이렇게 전주 고달산에서 세월가는 줄 모르고 원효스님과 의상대사는 열심히 법문을 듣고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신라에서 손님이 왔다고 하여 나가보니 옛날 군중에서 보았던 해자(楷子)였다. “그대가 어찌하여 여기 왔는가?” “승만부인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왔습니다. 의상스님께서 황복사에 계실 때 승만부인께서 손수 지으신 이부자리를 황복사 불단 위에 놓아두시고 영취산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제가 친히 임금님을 모시고 영취산에 가 그 자취를 찾았으나 영영 그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수년을 두고 물색하던차에 두스님이 백제 땅에 가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저를 삭발시켜 스님으로 가장 하여 여기까지 보내신 것입니다. 지금 승만대왕께서는 환후가 짙어 오늘 내일 하고 계시니 돌아가시기 전에 가서 위안을 들여야 될 것 같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보덕화상께서 “승만사자후일승방편방광경”을 내보이시며, “이것이 승만대왕의 약이니 이 경을 가지고 가 의상이 직접 읽어주고 설법하면 병이 쾌차하리니 그대들은 지체없이 떠나라.” 하셨다. “신라와 백제는 아직 전쟁중이라 국경을 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 걱정은 할 것 없다. 옹호신장님들이 무얼하는 사람들이겠느냐. 단지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원효대사가 물었다. “큰스님 장차 저희들이 어떻게 불법을 펴야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원효의 대법인연은 중도(中道)에 있고, 의상은 중토(中土)에 있다. 그리고 의상은 부석(浮石)에서 유통이 시작될 것이고 원효는 분황(芬皇)에서 이루어질 것이니 그리 알라. 그대들은 이제부터 남을 위해 설법하여도 크게 그르침이 없을 것이니 내 법사의 칭호를 주노라.” 하시고 마정수기(摩頂授記)하였다. 세 사람은 짐을 꾸려 길을 나섰다. 밤낮 이틀이 지나고 나니 국경선에 이르렀으나 순라꾼들이 보고도 말하지 아니하였다. 신장님의 가호로 눈이 가려진 것이다. 내전에 이르러보니 승만대왕은 기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상이 왔습니다.” 하니 “의상대사가?” 하고 일어나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대사가 옆에 가 앉아 문안하고 승만사자후일승방편방광경을 읽으니 벌떡 일어나 앉더니 물었다. “그게 무슨 경이오?” “승만대왕의 전생경입니다.” “그게 어디서 난 것이요?” “고구려에서오신 보덕스님이 주신 경입니다.” 하고 전후사정을 다 말씀드렸다. 경전을 듣고 있던 승만부인이 말씀하였다. “오, 이 경은 정말로 나와 인연이 깊은 경전입니다. 나는 전생에 바사익왕의 딸 승만으로 태어나 아유타국으로 시집갔고 저의 남편은 아유타국 임금님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 국반공은 바사익왕이시고 어머니는 말리부인입니다. 그런데 내가 전생의 인연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왕공 귀족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병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잘못된 마음을 진심으로 참회하여 용서를 빕니다.” 경전을 읽고 있던 의상대사가 고개를 들어보니 병석에 누워있던 승만대왕이 어느새 일어나 합장하고 앉아 설법을 하는데 얼굴에서 밝은 광채가 쏟아져 마치 영산회상이 재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죄송합니다. 대왕님. 소승의 생각이 비루하여 임금님께서 정성드려 만든 이부자리도 버리고 영취산으로 떠났는데 대법을 공부하다보니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전생에 그토록 깊은 인연이 한데 모였으니 이제 애정의 물이 흐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일찍이 깨달았으면 사람들도 상하지 않고 해탈 하는건데 저로 인하여 심려를 끼치게 되어 죄송합니다.” “참회는 진짜 이 사람이 해야 할 일이오. 그러나 이제 지난 일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잘못되어 돌아가신 영혼들을 위안하고 우리 앞으로 부처님의 거룩한 심부름꾼이 되어 부처님 당시 승만부인과 같이 일승보살도를 실천하겠습니다.” 하시고 황복사에서 가져온 보따리를 내놓았다. “이것은 진심으로 내 정성이 담긴 옷이니 스님께서 입어주시면 내 죄업이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받아 입겠습니다.” 승만대왕과 의상대사는 스님과 신도로써 손색없는 위치에서 털끗 만큼도 눈가림 없이 일불제자의 행을 실천해 보였다. 의상대사가 말했다. “승만대왕마마. 오늘 저희들이 이 왕궁에서 행복의 문을 연 것처럼 저희 어머님과 동생 소희의 영혼도 이렇게 기쁘게 해드리고 싶고, 또 한산주 도독으로 외롭게 계신 아버님의 마음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우리 둘만 즐거우면 이는 소승이지요. 어서 일승불교를 실천하여 만 중생을 기쁘게 해주십시오 대사님….” 모처럼 두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웃음을 머금고 헤어졌다.
사랑이 헤어지는 고통
의상대사는 승만부인을 뵙고 그 길로 어머니 묘소가 있는 선도산 송림(松林)속으로 들어갔다. 그 옆에는 소희를 지키던 시녀 애옥의 무덤도 있었다. 의상대사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인생이란 어차피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렇게 뼈아픈 사랑 속에서 뼈저린 눈물을 흘러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머니….” 외마디 소리로 땅에 엎드린 의상대사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얼마만큼 쏟아진 눈물이 다시 솟아나지 않을 무렵 가만히 무릎꿇고 앉아서 다생부모십종대은을 외웠다. ? 배속에 넣고 수호해주신 은혜 ? 태어날 때 고생시키던 은혜 ? 자식 낳고 근심 잊은 은혜 ? 쓴 것 먹고 단 것 주신 은혜 ? 젖은 자리 갈아주신 은혜 ? 젖 먹여서 양육하시던 은혜 ? 먼길 갈 때 잊지 못한 은혜 ? 자식 위해 악업 지은 은혜 ? 끝까지 잊지 않고 어여삐 여겨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나무에서 두 가지가 태어나 비바람에 먼저 꺾여진 동생 소희에게 반야심경을 한 번 독송해주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디사바하“ 그리고 말했다. 은애와 사랑 이별의 고통에서 영원히 떠나려고 머리 깎고 옷 갈아입고 세상을 뛰어났으나 오히려 지난 세상 흐르고 남은 눈물 있어 도리어 오늘 이 산승의 얼굴 적시는구나. 의상대사는 다시 집으로 가 복숭아꽃 활짝 핀 동산을 보고 시를 읊었다. 해마다 피는 꽃 빛은 같건만 때때로 바뀐 사람들 모습은 같지 않구나. 사람의 모습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으나 복숭아꽃은 여전히 웃고 있구나 이때 10여 명의 하인들과 윤필이 남매가 뛰어 나와 울부짖으며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매달렸다. “공자님. 저희들도 절에 가서 공자님 모시고 나무하고 물긷고 밥짓고 빨래할래요. 그리고 법문 듣고 깨치고 십사오니 저희들의 길을 인도해 주세요.” “그래 좋다. 우선 너희들의 문서를 가져오너라. 오늘 내가 아버님께 말씀드려 너희들을 양민이 되게 하고 장차 희망 따라 자유인이 되게 하리라.” 하고 아버지를 찾아가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였다. “나는 그 집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 모든 것은 스님의 생각을 따라 처리하세요. 나는 현재 있는 이 자리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노비의 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해방시켜 주었으며 의상대사 앞으로 물려 받은 재산을 나누어주고 그 집을 ‘기원사’라는 절을 만들어 월지부인과 묘화랑 소희 등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자장국통의 중국이야기
의상대사는 아버지 한신공을 배알하고 서라벌로 돌아와 황복사에서 원효스님을 만났다. 원효대사가 말했다. “오늘은 국통 자장 큰스님을 뵙고 나라의 불법에 대해 토론 하기로 하세.” “좋습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간단히 차와 담을 준비해 가지고 자장율사가 계신 황룡사로 갔다. 인사를 드리니 대뜸 물었다. “원효는 누구에게서 삭발했는가?” “군대에 있다가 스스로 불가에 들어가 자수로 삭발했습니다.” “그런소리. 우리 불법에는 중이 제머리 못깎는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나 혼자 머리 깎고 나 혼자 스님이 돼. 그렇게 되면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네.” “낭지스님께서는 아직까지 그런 말씀을 한 번도 하시지 않았는데요.” “낭지스님이나 보덕화상은 불보살의 화현으로 인간세상의 사람이 아니야. 인간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의 법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네. 부처님도 처음에는 계율을 따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였지. 그런데 사람 덜된 사람들이 흉내를 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계율을 제정한 것이네. 그러므로 덜된 사람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계를 받지만, 다된 사람은 중생을 위해 계를 지키게 되어 있네. 내 나라의 임금님께 아뢰어 놓을 것이니 머리 깎고 다시 계를 받도록 하소.” “예. 스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원효스님은 정식으로 스님이 되기로 하였다. 자장율사는 신라불교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었다. 자장율사는 묻지 않는데도 중국불교와 국제불교 상황에 대해서 장시간 설명해 주었다. “부처님 돌아가신 뒤 608년 대던 해 중국에 처음 불교가 들어왔다. 후한 명제가 꿈속에서 부처님을 뵙고 진경(秦景)등을 서역에 보내 불법을 구하니 가섭 마등, 축법난 등이 42장경 등을 가지고 낙양에 와 백마사를 창건함으로써 중국불교가 시작된다. 후한 황제 건화 1년(불기 691)에는 안식국태자 안세고가 낙양에 들어와 아육왕본생경등을 번역하였는데 그 해가 인도에 서는 쿠산왕조 카니슈카왕이 제4 결집을 하던 해이다. 불기 710년 월지국 출신 지루가참이 와서 이듬해 도행반야경과 반주삼매경을 번역하고 그 다음 해에는 안현이 엄불조와 함께 법경경을 번역한다. 불가 764년 중국은 위(魏), 촉(蜀), 오(吳)의 세 나라로 분립되고 791년에는 강승회가 건업에 들어와 포교하고 798년에는 서진(西晉) 대시 1년에 축법호가 장안에 들어와서 정법화경등 150부의 경전을 번역하고 이때부터 노장사상과 연관을 가진 격의불교(格義佛敎)가 싹트게 된다. 불기 854년 불도징이 낙양에 들어오고 861년 사마예가 건업에 수도를 정하고 동진(東晋)을 세웠다. 908년에는 도안스님이 종리중경목록(綜理衆輕目錄)을 저술하여 지금까지 중국에 들어온 모든 경전을 총정리 했다. 불기 916년(서기 372) 고구려 소수림 2년 전진왕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로 하여금 불상과 경문을 보냄으로써 고구려에 최초로 불교가 수입된다. 2년 후 아도스님이 중국에서 들어와 이듬해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지으니 이것이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사찰이다. 불기 928년(384) 백제 침류왕 1년 인도승 마라난다가 중국 동진으로부터 황해를 건너와 불교를 전하고 이듬해 한산주(지금 경기도 광주)에 불사를 창건하고 승려 10명을 두었다. 불기 930년 북방 선비족 탁발규가 북위를 세우고 934년 동진의 혜원스님이 백련사를 결성하였다. 943년 동진의 법현이 중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인도 기행에 나서고 945년 5호16국의 하나인 후진 홍시 3년 서역에서 구마라집스님이 장안에 와서 마하반야바라밀다경과 묘법연화경, 아미타경 등 300여 권을 번역한다. 946년 북위의 승려 장교가 스스로 무상왕이라 칭하고 도당을 모아 반란하다가 진압되었다. 958년 법현스님이 인도에서 돌아와 불국기(佛國記)를 저술하고 969년 구겸지가 도단을 설치 13년간 무진 애를 씀으로써 북위 세조가 조칙으로 척불하여 50세 이하 출가자를 금지하고 불교지도자 현고스님과 혜승스님을 화형하였다. 989년 북위 태무제는 각주에 조칙을 내려 배불훼석을 단행하였다. 996년(452) 본가야의 8대 진지왕 2년 김수로왕이 허왕후를 맞아 결혼하고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김해에 왕후사를 건립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북위 고종이 왕위에 올라 불교의 부흥을 조칙으로 선포하였다. 불기 1001년(457) 인도에서는 무착보살이 아유다국에서 유가사지론과 대승장엄경론을 지어 유가불교를 일으켰고 1017년에는 북위 승려 혜은이 반란을 일으켰다 곧 실패되었다. 1048년에는 양무제가 도교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고 1053년에는 북위 승려 혜왕이 반란을 도모하다 토벌되었으며 1054년에는 광수가 진주에서 모반을 하다가 살해되었다. 1056년에는 양무제가 승전등 10인의 학승을 섭산 서하사에 보내어 승랑에게 대법을 배우게 하고 1058년에는 북위 승려 승소가 반란을 일으키다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1059년에는 북위 승려 법령이 기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죽었고, 불기 1071년(527) 이차돈 순교로 신라불교가 공인되었다. 1078년(534) 달마대사가 신광에서 선을 전하고 입적했으며, 1094년에는 고왕이 제위에 올라 북제(北齊)를 건설하였다. 1095년 고구려에서 온 혜랑법사를 승통을 삼고 백고좌법회와 팔관회를 시작하였다. 1096년 백제 성왕때 노리사계가 일본에 불교를 처음 전하고 1101년 중국의 진패선(陳覇先)이 제위에 올라 국호를 진(陳)이라 하였다. 1193년 중국 북주의 고군자가 칙명을 내려 승려, 유생, 도사, 문무백관 2천여 명을 불러 궁중에서 삼교논쟁 대회를 열고 1118년 고조가 조칙을 내려 불교를 금지하는 법란이 생겼다. 그리하여 불교 사원과 불교 경전을 파괴해 모두 불사르고 비구 비구니는 환속시키고 사원재산을 몰수, 관료와 종친에게 분배하였는데 1122년에 북주 고조가 망했다. 1133년(583) 우리나라 원광법사가 진(陳)나라에 들어가 구법 하였고, 1125년 수 문제가 제위에 올라 법난 때 파괴된 사탑을 재건하고 1129년 스스로 불교 신자가 된 것을 공포하였다. 1146년 백제 승려 관륵은 일본에 건너가서 역학, 한문, 지리학, 둔갑술을 전하고 일본불교의 승정이 되었으며, 1148년 중국의 수 양제가 수 문제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1162년 이연에게 멸망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1165년 당 고조 때 도교인 부박이 불교를 비판하는 글을 황제에게 올려 1170년 사원과 승려를 국가에서 관리하도록 조칙을 내렸다. 1172년 당태종은 전사자들을 위해 각 사찰에서 천도재를 지내도록 하였고, 1173년 현장법사가 인도구법에 나서 나란타사에 유학하였다. 1180년 우리나라 선덕여왕이 병이 나서 황룡사에서 백고좌법회를 열어 인왕경을 강의하였고, 바로 그해 내가 중국에 들어갔다가 10년 공부 후 돌아와 9층탑을 세우고 황룡사를 지어 대작불사를 하고 있다. 이와같이 여러 나라의 불교 역사를 보면 바른 법은 경?율?론 3장을 의지하여 계?정?혜 3학을 닦음으로써 이루어지고 스님들이 세상의 권력과 결탁하여 권력과 명예를 갖게 되면 타락하게 되므로 나는 신라불교의 기강을 확립하고 나라와 백성들을 복되게 하고자 한다.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목숨을 걸고 구도 전법에 나섰으며, 스스로 자신들이 겪은 여행경험과 구도전법의 실상을 기록하여 후배 제자들에게 큰 교훈이 되게 하고 있다. 불법은 언제 어느 곳에 있어서나 자신의 깨달음과 중생의 깨달음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지만 풍토 지리가 다르고 언어 음식이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불법을 닦고 펴고 있는가를 보기 위해서는 해외 유학도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중국을 다녀왔다고 해서가 아니라 중국은 역시 중국이었다. 동?서?남?북의 모든 문물이 한데 모여 중국식으로 재요리 된 뒤 유통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긍지와 자존심을 가지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 있어서 진취적인 기상을 가지고 있다. 도교, 이슬람교가 다소 성행하고 있었지만 역시 불교를 따라갈 수는 없었고 여러 많은 민족들이 불교라는 큰 바다속에서 함께 먹고 놀고 뛰어 대해일미(大海一味)를 형성하고 있었다. 중화의 정신은 곧 불교의 화합정신이고 대각정신이다. 그러므로 중국과 불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이 있었다. 단지 위나라를 중심으로 불교를 가장한 정치 경제인들이 민중을 선동하다 정부의 적이 된 경우가 없지 않았는데 그러기 때문에 동북 장정에서는 불교를 펴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장장 두 시간을 법문을 듣고 나니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우리도 큰 나라에 가서 불법을 구경하고 새로운 문물을 배워오도록 하자.” 그래서 먼저 그들은 국가에 승낙을 받고 다음에 가정에 통지하기로 하였는데, 승만대왕께서는 의상대사가 자기 곁을 떠나지 않고 있기를 바랬으므로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추천할 수 없고 개인적으로 가고 싶으면 가라고 하여 두 사람은 사비를 들여 비자없이 출국하게 되었다.
입당구법
입당구법(入唐求法) 입당에 대한 학설은 여러 학설이 일치하지 않는다. 송고승전에서는 “총장 2년(669)”으로 기록되어 있고, 의상전교에는 “영휘(650~659)초”로 기록되어 있으며, 약해에서는 “영휘 6년 경술”로 되어 있고, 부석본비에는 “영휘 원년 경술(650)” 또는 “용삭원년 신유(661)”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선 송고승전에 학설이 맞지 않는 것은 의상이 입당 후 스승으로 모신 지엄(智嚴) 스님이 668년에 입적하였고, 의상이 지엄에게 인가 받고 일승법계도가 완성된 것이 총장 원년(668) 7월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약해의 영휘 6년은 영휘 원년(경술년)이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의상의 입당년대는 부석본비의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보면 의상대사는 신라 김한신의 아들로 진평왕 47년 (건복 42년 당 무덕 8년 625)에 태어나 78세(702)로 입적한다. 어려서 황복사에 출가하여 8세 위인 원효(617~686)를 만나 함께 입당을 꾀하게 되는데 영휘 원년(경술 650)에는 고구려 땅에 이르렀다가 간첩으로 몰려 잡혀 고생하다가 돌아왔고, 용삭원년 신유(661)에 입당하여 귀착하게 된다. 말하자면 15세 출가 25세 입당하려 하였다가 실패하고 36세때 이르러 성공하게 되는데 이것도 부석본비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고 의상전교와 송고승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의상이 원효와 함께 요동땅에 이르렀을때 고구려 순라꾼들이 첩자로 몰아 수개월 동안을 구금되어 있다가 풀려난 것으로 의상전교에 기록되어 있고, 송고승전에는 의상이 2차로 해로를 이용하여 배를 타고 입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661년은 660년 백제가 멸한 뒤이다. 그러므로 당나라와 신라의 해로가 열린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송고승전에 기록된 것을 간추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원효법사와 함께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당주 경계에서 배를 기다리는데 큰비를 만나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토감(土龕)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비바람을 피하게 되었으나 이틑날 아침에보니 고분에 해골바가지가 옆에 있었다. 천장에서는 가랑비가 흘러내리고 땅은 진흙으로 발라 한 발짝도 움직이지 어려웠다. “내가 어찌 이 귀신소굴에서 지냈단 말인가!” 생각하니 온 몸이 떨리고 두려웠다. 그런데 순간 한 생각이 났다. “한 생각이 나면 온갖 법이 생기고 한 생각 없어지면 온갖 법이 다 없어진다 하였는데 부처님께서는 어찌 나를 속였겠는가. 3계가 오직 한 생각에 달려있으니 다른 법이 없도다.” 하고 구당입법을 포기 고향을 돌아왔다. 이에 의상대사는 외로운 그림자를 바라보고 죽을 각오를 하고 물러서지 아니했다. 그런데 어떤데서는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도를 깨달았다 하나 송고승전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선묘아가씨 이야기
입당구법의 시기와 이용한 선박과 도착한 지점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일치하지 않는다. 삼국유사 의상전교에서는 “영휘 초에 당사(唐使)의 배를 타고 갔다”고 되어있고 송고승전에는 “총장 2년 상선을 타고 중국에 도착하여 한 신사의 집에 이르렀다”하였다. 또 의상전교에서는 “처음 양주에 이르러 주장(州將) 유지인의 청으로 관아에 머물며 공양을 받았다.” 하였는데. 송고승전에는 “처음 등주에 이르렀을 때 그 신사의 집에 ”뛰어난 미모의 소녀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이름이 선묘였다. 처음 보고 교태를 부려 스님을 유인했으나 스님께서 흔들림이 없으므로 여자가 마음을 고쳐먹고 ‘세세생생 화상에 귀의하여 대승법을 성취하고자 하오니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반드시 단월이 되어 스님께서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 드리겠습니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상대사가 중국 유학을 계획한 가운데는 자신을 사모하다가 죽은 묘화랑을 달래기 위한데도 목적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남양에서 배를 타고 등주에 이르기까지 의상대사는 계속해서 부처님 명호를 부르며 불쌍하게 간 고혼을 달랬다고 한다. 그런데 배에서 내리자마자 또 다른 여인을 만나게 되니 두렵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옛날처럼 속반진반(俗半眞半)이 아니고 완전히 진(眞)속에 서서 속(俗)을 바라보는 입장이 되었으므로 단번에 정을 끊고 신앙심으로 그 마음을 치유시켜 신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편 생각하면 묘화랑 같이 외롭고 쓸쓸한 여인을 지키다가 승만왕 같은 귀족처녀에게도 그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했는데 하물며 객지에 나와 한 여인의 정에 빳는다고 한다면 출가한 보람을 어디에서 찾을 것이며, 또 국가의 체면은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생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의상대사의 구도정신은 이러한 역경을 겪으면 겪을수록 더욱 철저해졌으며 그 누구도 감히 꺾을 수 없는 당간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스승 지엄화상
의상대사는 이렇게 중국에 들어가 유지인의 집에서 선묘아가씨의 시봉을 받고 있다가 종남산 지상사 지엄화상을 찾아가게 된다. 상전(湘傳)에서는 “지엄스님을 뵈었다”하고, 부석본비에서도 “지엄스님께 나아가 배웠다” 하며, 송고승전에서는 “의상대사가 장안 종남산 지엄화상 삼장소에 나아갔다” 하였다. 장안은 주(周) 이후 진(秦), 한(漢)을 거쳐 양나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제국들의 수도로써 사용하여 매우 웅장하고 규모 있는 대도시였다. 남쪽으로는 위수(渭水)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살수(살水) 패수(覇水)가 흐르고, 서쪽으로는 풍수(豊水)가 지나 동서의 길이가 180리 남북이 150리나 되어 주위가 600여 리가 넘는 대도시였다. 장방형의 성곽 속에는 백만의 대인구가 살고 있었으니 동 춘명문, 남 명덕문, 서 금광문, 북 광화문이 북의 황궁을 에워싸고 있었다. 성내는 태극전, 함원전, 선정전, 자선전 등 수많은 궁궐과 대루 ? 각 ? 사가 즐비하고 황성 밖으로는 백만 시민이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또 해동고승전에서도 “종남산 지엄존자에게 찾아갔다” 하였는데 의상전교에서는 “종남산 지상사 지엄화상을 찾아갔다” 하고 지엄화상께서 하신 말씀까지 기록하고 있다. “ ‘내가 지난 밤 꿈에 해동의 큰 나무가 기엽이 번성하여 신주(神州:중국)를 덮었는데 그 위에 봉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가 온 세상을 비치고 있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튿날 의상대사가 오니 특별히 맞으면서 ‘내가 어제 저녁 자네가 입실하는 꿈을 꾸었노라.’ 하셨다. 의상이 화엄의 오묘한 이치를 깊은데까지 분석하니 지엄은 영특한 제자를 만난 것을 기뻐하였다. 또한 의상은 더욱 새로운 이치를 발견하여 깊은 것을 끌어내고 숨은 곳을 찾아내니 스승보다 났게 되었다.“ 고 하였다. 큰 나무는 화엄경을 가르키고 신령한 뿌리는 용수보살이 용궁에서 화엄경을 가져온 것을 의미하고 한 줄기가 중국에 뻗고 한 가지가 해동에 뻗었다 한 것은 중국과 해동 두 나라에 화엄경이 크게 성장할 징조를 이야기한 것이다. 사실 지엄스님은 당시 화엄의 새로운 학풍을 일으켜 문하에 법장(693~712)과 같은 위대한 제자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의상이 그 문하에 들어오니 지엄스님은 의상을 특별히 대우하고 의상 또한 홍장 1년(668) 10월 29일 입적할 때까지 스승을 하늘처럼 받들어 입적 3개월 전 7월18일 “화엄일승법계도”를 인가 받았다. 종남산은 장안 남쪽 50리 정도에 있는 진령(秦嶺)이다. 동서 500여리나 뻗은 큰 산맥으로 남산, 종남산, 태을산, 초산, 교산, 진산이라고도 불렀다. 이 산은 당나라 초 화엄종사 두순화상을 비롯 화상의 제자 지엄법사. 그의 제자 현수대사가 화엄학을 천명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지엄은 성이 조씨이고 위가 지엄이다. 운화존자(蕓華尊者)라고도 부르고 뒤에 받은 시호가 지상(至相)이다. 수나라 문제 2년에 태어나 12세에 두순(杜順)의 제자가 되어 상족 달(澾)법사에게 화엄을 배우고 뒤에 법상(法常)으로부터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웠으며, 지정(智正)에게서 십지론(十地論)을 배웠다. 그의 문하에는 도성(道成), 박진(薄塵)이 있었으나 뛰어나지 못하고 장차 의상과 현수(賢首)가 해동화엄과 중국화엄을 계승하게 된다. 스님은 27세시 화엄경수현기(華嚴經搜玄記) 9권을 지어 진본화엄경을 글자 따라 주해를 내고 화엄경공목장(華嚴經孔目章) 4권과 오십요문답(五十要問答) 2권, 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 1권, 육상장(六相章) 1권을 지어 두순의 학설을 부연하였으나 아직 화엄이 완성단계는 이르지 못했다.
도선율사의 천공 이야기
삼국유사 “천축소장사리”와 “의상전”에는 의상의 인격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실려 있다. “옛적에 의상대사가 입당하여 종남산 지상사 지엄존자에게 와서 수업할 때 이웃에 도선율사(道宣律師)가 있어 천공(天供)을 받고 있었다. 하루는 도선율사가 의상대사를 청하여 재를 올리고자 청했으므로 의상대사가 가서 좌성하고 앉아 있으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 천공이 오지 않았다. 의상이 할 수 없이 빈 발우로 돌아가자 그때서야 천사가 내려왔다. 율사가 물었다. ‘왜이리 늦었느냐?’ ‘동네에 금강신장들이 꽉 차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이에 도선율사는 의상대사를 신장들이 호위하고 다닌 것으로 알고 그 도의 수승함에 탄복하고 천공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다시 지엄과 의상 두 스님을 초청하여 공양하였다.“ 도선(596-667)은 의상보다 29세 손위로서 의상이 입당하였을 때(661) 66세였다. 도선율사는 그 뒤 6년 있다가 72세로 입적하였으니 이 사건은 입적 1년 전쯤의 일이 아닌가 추측된다. 하여간 화엄신장은 일반호법신장과 그 위치가 달라 감히 범인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신장들이었다. 어찌 율문을 전공한 계사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한국에 들어와 크게 작용하므로 한국에 있어서의 화엄신장 사상이 더욱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상전(湘傳)에는 그때 의상대사가 도선율사를 통해 부처님의 치아 하나를 내려달라 부탁한 글이 있다. “스님께서 이미 천제의 공경을 받고 계시니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듣건데 부처님의 40개 치아 가운데 하나를 제석궁에 모시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우리 인간계에 잠깐 내려주도록 청해주십시오 하니 율사가 뒤에 천사에게 전하여 7일을 한정하고 보내주어 상공께서 지극히 공경한 마음으로 친견하였다.” 지금 그 장소는 중국 촉의 진군에 있는 정업사에 있다. 정업사는 중국 율종 3파의 하나인 남산종이 있던 자리인데 도선율사가 지은 절이다. 의상대사는 바로 이 절에 하루 왕래하여 도선율사와 교류하였던 것이다. 천공지(天供地)는 정업사에서 약 100m 떨어져 있는 바위 언덕으로서 일반적으로 오르내리기 어려운 골짜기이다. 일찍이 시사월간지 편집위원이신 정순태작가님도 27m쯤 갔다가 현장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10m 남겨 놓고 그냥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같이 같다 사진을 찍은 권태균기자님의 사진을 보면 참으로 험악한 살골짜기인 것 같다
구국의 횃불
하루는 의상대사께서 법계관문을 하고 있는데 밤중에 첩자가 왔다. “큰일났습니다. 지금 당황제께서 30만 대군으로 서라벌을 쳐들어가려고 연회주에서 군함을 1,500척을 조성하여 군사무기까지 다 실어놓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본국에서 김양도(金良圖)장군을 따라 이곳에 왔는데 당나라에서 김장군을 잡아 가두었기 때문에 장군의 명령을 따라 은근히 스님을 찾아 뵈었아오니 재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시어 나라를 구해주십시오.” “알았네. 내 그렇지 않아도 입당목적이 완수되었기 때문에 본국에 들어가 전법하려던 참인데 잘 되었네.” 첩자를 보내고 나서 생각하니 그동안 조국에 대해서 너무 무심한 것 같았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당고종이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기로 하고 대장군 이세적(李世勣)을 요동행군대총관, 유인궤(劉仁軌)를 부총관으로 하여 고구려 군을 쳐서 깨뜨리고 귀족 대신 20만명을 포로로 데려왔다. 그러나 당나라는 그 고구려 땅을 신라에 귀속시키지 않고 아홉 개의 도독부와 42군으로 만들어 안동도호부를 설정, 설인귀(薛仁貴)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하였다. 사실 당나라는 그 보다 앞서 장군 소정방에게 신라 대신 김인문에게 13만 대군을 주어 신라 장군 김유신과 합세하여 백제를 치게 하고 백제의 왕자 백관 대신 등 1만2천명을 당나나로 옮기고 여기에 웅진도독부를 만들어 왕문도, 유인원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러니 이제 신라만 쳐버리면 한반도 전체를 손아귀에 넣게 되므로 이런 꾀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신라에는 중국에서 공부하고 가신 자장국통과 명랑법사, 낭지스님 같은 분이 있고, 또 국내에서 대도를 성취한 원효스님 같은 이가 있으므로 제천 선신들이 옹호하여 별일이 생기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그동안 승만부인(진성여왕)이 승하하고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이 되었다가 다시 그의 아들 법민(法敏)이 왕이 되면서 당나라 사람들의 잔꾀를 꿰뚫어보고 도리어 백제 왕족과 백성들을 동원 당나라 유진군(留鎭軍)들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법민왕은 오래전부터 옛 땅을 탈환하기 위해 백제 땅에 군사를 보내 마침내 웅진도독부에 소속되어 있는 장군들을 잡아 가둔 뒤 80여 성을 탈환하였기 때문에 당나라에서는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왕이 다시 고구려 유민들을 동원하여 당나라에 대항하게 하니 당나라에서는 최후의 일전으로 신라를 점령코자 대책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 고종은 30만 대군을 양성하여 등주, 청도, 해주 등 연해주 일대에 군대를 배치하고 군함을 만들어 쳐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상대사는 개인의 공부 때문에 조국 강산에 대한 보국정신이 해이해진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면서 이튿날 지엄스님 묘에 나아가 고유하였다. “스승과 제자는 만겁의 인연이라 당연히 3년 상을 보고 법답게 후계자를 정하여 전법하고 떠나는 것이 옳을 일이오나 나라의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제자가 가서 싸움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도를 찾겠아오니 도와주시옵소서. 그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화엄회상에서 다시 만나 전법도생의 역군이 되기를 손모아 빕니다.” 그리고 법장스님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본국에 들어가 전법포교 하여야겠으니 이곳 일은 자네가 맡아 하도록 하게.” 법장스님은 펄펄 뛰었다. “안됩니다. 이 어린 동생을 버리시고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오직 의상스님을 스승삼아 공부하고 있는데 스님께서 떠나시면 누구를 의지하여 공부하여야 합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 신라와 당나라는 형제국과 같아서 배만 타면 아무런 장애없이 서로 왕래하게 되어 있으니 사람을 보내 서로 답하도록 하세. 우리 부처님께서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하였는데 화엄 법문을 들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학문만을 위해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다른 한 곳은 법이 빠지지 않겠는가. 법장은 법장대로 후배를 양성하고 나는 나대로 본국에 돌아가 인재를 양성하여 지엄 큰스님의 뜻에 보답하도록 하세.” 듣고보니 이 또한 큰 의의가 있는 것 같았다. 잘못하면 불법을 공부한다는 사람이 법의 아귀가 되고 말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정히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쪼록 법체를 잘 보호하시기 바랍니다.” 법장스님은 바로 이 사실을 국가에 알리어 떠날 채비에 분주하였다. 원래 그는 강거국(康居國)출신으로 조부 때 당나라에 귀화하였다. 조부의 독실한 불심 때문에 일찍이 불가에 귀의하여 16세에 아육왕 탑 앞에서 손가락 하나를 다 태워 공양하고 17세에 출가 태백사에 있다가 지엄화상의 도력을 듣고 종남산에 이르러 화엄경을 전교한지 10년만에 스승을 이별하였던 것이다. 장차 나라에서는 현수대사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한다. 의상대사는 법장스님이 마련해준 교통편으로 왔던 길을 따라 등주로 떠났으니 때는 함형원년 서기 690년 11월 초3일이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아가씨
입국 초부터 신세를 많이 졌던 유지인장군집에 들려 인사를 하니 극구 칭찬하였다. “한 나라의 공자로써 출가 입산하여 도닦은 것만도 장한데 중국에까지 유학하여 천하 제일의 법사에게 의지(義持)의 호를 받고 법맥을 계승해 가게 되었으니 진실로 칭찬할 일입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자량(資糧) 덕분에 공부하는데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라의 명령을 받고 배가 준비되었으니 바로 떠나겠습니다. 그런데 선묘아가씨는 어디 갔습니까?” “스님을 위해 기도 드린다고 나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종남산에 들어가신 뒤 오늘까지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상스님께서 배에 올라 막 포구를 떠나자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스님, 스님, 의상스님. 나 좀 보고 가십시오.” 그러나 배는 이미 떠나 세찬바람을 타게 되었으므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선묘아가씨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동안 지어놓았던 가사 장삼을 가지고 나와 가슴에 앉고 외쳤다. “스님 이것은 소녀가 스님께 드리기 위해 정성을 모아 지은 법복입니다. 진실로 내마음을 부처님께서 아신다면 스님께서 꼭 입으실 수 있도록 바람이 날려다 줄 것입니다.” 하고 바다 가운데 던졌다. 순간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그 옷 보따리를 밀고 나아가 배 가운데 앉아 있는 의상대사 앞에 떨어졌다. 보자기를 펼쳐보니 중국에서 제일가는 면직으로 가사장삼 한 벌씩이 들어 있었다. “감사하오. 기필코 은혜에 보답하리다.” 의상대사는 두 손을 모아 빌었다. 그때 선묘아가씨는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이미 스님께 바친 몸 이생에서 다하지 못한 사랑을 저생에 가서라도 따라다니며 스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 법의 꽃이 이 세상에 활짝 피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 곳을 향하여 절을 세 번 하였다. “어머니 아버지 용서하세요. 저는 의상대사를 따라 호법용(護法龍)이 되겠습니다. 세계와 인류를 위해서 법을 지키는 신장이 되고자 하니 상심하지 마시고 나머지 생을 잘 보존하시옵소서. 죄송합니다.” 하고 물속에 깊이 뛰어들었다. 선묘의 몸은 두 세 번 나왔다 가라앉았다 하더니 펑퍼짐한 치마포기에 연꽃처럼 쌓여 황해바다로 달려갔다. 얼마만큼 떠내려가던 몸이 갑자기 검은 용으로 변하여 물결치며 달려갔다. 의상대사의 배는 황해 가운데 이르러 큰 태풍을 만났다. 11월 설한풍에 돛대가 꺾일 정도로 바람이 새어 뒤집어졌다 엎어졌다 돛대 끝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파도가 휩쓸었다. 선묘 용이 생각하였다. “아, 잘 왔구나. 내가 오지 않았으면 의상대사는 반드시 고기 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고 등허리에 짊어지고 순식간에 남양포구에 도착하였다. 뱃등이 온통 용의 비늘로 가득하고 바닷물이 피바다가 되었다. “오, 선묘아가씨. 당신 덕분에 나는 무사히 도착하였지만 얼마나 아프십니까?” 하고 바다를 바라보니 10m도 넘은 큰 용이 물위에 푹 솟아 올랐는데 온 몸은 빨갛게 벗겨졌어도 그 얼굴엔 환희의 미소가 있었다.
호국법회
호국법회(護國法會 ) 의상법사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법민왕이 대신 장군 궁주들을 총동원하여 풍악을 울리고 10여리 밖엣까지 마중을 나왔다. 먼저 궁중에 들어가 찬란한 환영법회를 보았다. 왕과 귀족대신 비빈들이 구름처럼 몰려 환영하였다. 임금님께서 환영사를 하였다. “멀고 먼 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스님의 구도 소식을 외국 사신들을 통하여 잘 들었습니다. 종남산 도인 도선율사께서도 큰 스승으로 받들어 모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황공하신 말씀입니다. 고국을 등지고 만리 창파를 건너 당나라에 강 있었기 때문에 조국을 저버린 죄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출가 사문으로써 직접 군진에 나아가 나라를 수호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아침 저녁으로 예불 드릴 때마다 우순풍 조민안락하고 천하가 태평하기를 축원하였습니다.” 이렇게 인사말이 끝나자 합원대중이 사자좌에 올려 모시고 청법을 하였다. 차경심심의(此經甚深義) 대중심갈앙(大衆心渴仰) 유원대법사(唯願大法師) 광위중생설(廣爲衆生說) 이 경의 깊고 깊은 뜻을 대중들이 목말라 우러르고 있사오니 오직 원컨대 법사님께서는 널리 중생을 위해 설해주십시오. 애절한 청법의 발원이 이루어지자 법사님께서는 법좌에 올라 말씀하였다. “원래 법이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을 보면, 첫째는 마음을 깨닫고 그 마음을 원만하게 씀으로써 자기자리가 금지(金地)가 되도록 하고, 둘째는 깨달음의 빛이 널리 사바세계를 비쳐 그늘진 곳이 없도록 해야하며, 셋째는 대자대비의 집에 깨달음의 자리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박 ? 석 ? 김 등 성씨를 가지고 다투어 왔으며, 동 ? 서 ? 남 ? 북 사람이 사는 장소를 가지고 중앙과 변방을 따져 왔습니다. 그러나 천지가 원래 한 통속이고 만물이 한 집안 식구라면 어찌 그 마음을 가지고 차별해서야 되겠습니까. 중국도 오랜 세월 전쟁의 실마리가 씨족과 영토 전쟁이었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지금 당나라에서는 그동안 나당연합군을 만들어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었는데 그 주도권까지 빼앗기 위해 양도독부를 위협하고 있다고 하여 화가 나 있습니다. 화를 가라앉히기에는 창칼만 가지고서는 되지 않습니다. 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철저히 막고 감시를 하되 화를 푸는 방법을 생각하여 사람을 상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여야 합니다.“ 한 장군이 있다가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전쟁을 하지 않고 승리하는 일이겠습니까?” “종교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엄스님 밑에 가서 800여 명 중국 사람들과 겨루어 마침내 제일좌에 올라 법을 받듯 당나라 임금님 마음을 회유하고 군신들의 마음을 달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법당을 짓고 당 황실을 위해 기도 하여야 합니다. “아니, 적군이 눈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법당을 짓고 기도한다고 일이 해결되겠습니까?” “당나라 임금님도 전쟁을 하여 백성들이 많이 죽는 것을 원치 않고 있습니다. 전쟁에 소모할 비용을 100분의 1만 들여 믿음을 형성하게 되면 가능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 금강불괴의 법을 배워오신 명랑법사가 계시니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위해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당황의 수복과 그동안 전쟁통에 비명횡사하신 모든 영혼들을 위해 기도드립시다.” 국교대사가 듣고 있다가 환영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일찍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풍속을 잘 모르기 때문에 혼자만 생각해왔는데 당장 금광사 명랑법사를 모셔 의논하도록 합시다.” 이렇게 하여 낭산(狼山) 밑에 4천왕사를 짓고 화엄신장을 모셔 유가밀교(瑜伽密敎)를 실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겨울철이 되어 공사가 어려우므로 대나무를 베어 울을 치고 당간지주를 곳곳에 세워 중국에서 선물로 받아온 비단천에 “당황만세.” “황후만세.” “왕자만세.” 의 기를 써서 거니 속은 텅텅 비었을지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하였다. 나라에서는 당나라 사신을 모셔 실정을 보이고자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황제마마께 아뢰었다. “신라 국민들이 의상대사의 교훈을 받고 4천왕사를 지어 유가밀교를 실천하고 있사오니 황제께서는 굽어살피시옵소서.” “그럴 리가 있느냐. 신라에서는 당군을 척결하기 위하여 온갖 계교를 다 부리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먼저번에는 그랬을지라도 의상대사가 지엄화상의 법을 받아가지고 가서 화엄의 원융법으로 백성들을 새롭게 다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장 사신을 보내 다시 한번 확인하라.” 한 겨울 눈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여러 척의 사신배가 신라에 닿아 실정을 보니 겉으로 보기에는 5색이 찬란하나 내면을 보니 텅빈 집이었다. “이것이 무슨 법당이요.” “한 겨울에 토목불사를 일으킬 수 없어 우선 임시법당을 짓고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중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하고 사신들을 후히 대접하고 의상대사에게 안내하였다. 의상대사는 그동안 중국에 가서 신세진 이야기를 많이 하고 법장스님께 편지를 보내고 또 당황께 선물 보따리를 준비하여 한 보따리씩을 주었다. 사신들이 배에 돌아와 귀국하면서 의논하였다. “이 겨울철에 전쟁을 해 보아야 사람만 상하지 별 볼일이 없을 것 같으니 화해의 말로 전쟁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우리 두말 하지 않기로 합시다.” 하고 당황에게 가서 보고 하니 당황은 기쁜 마음으로 찬탄하고 다시는 신라와 싸우지 않기도 다짐하였다. 모두 이것은 의상대사의 부사의한 해탈법문에 영향받은 것이다. 전쟁과 평화가 오직 한 생각에 달렸다는 화엄법문을 현실적으로 실천해 보인 것이다.
천축산 불영사
천축산 불영사(佛影寺) 의상대사는 이렇게 1년 동안을 국내외 사정으로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 이듬해 봄이 되니 당나라에서 화해를 요청해 와 두 나라가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 나라에서 명랑법사와 의상대사에게 왕사 국사의 자리를 내리고 정치고문으로써 지극히 존경하였다. 소문이 퍼지자 경향 각지에서 친견코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종남산 구도시절이 그립구나.” “그러시다면 조용히 산천구경을 한번 떠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느 곳이 좋겠느냐.” “멀리 가기는 그러니 동해안 구경이 어떨까요.” “좋다.” 그리하여 시봉 몇 사람과 함께 동해바다로 나아갔다. 아진포(지금 포항)에 이르니 망망한 바다가 속을 시원하게 하였다. 영덕 선사(지금 평해) 울진 쪽으로 배를 타고 나아가니 산천경계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그런데 하루는 해안에 노을이 가득하고 뒤쪽에 오색구름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님은 한참 쳐다보다가 배를 내려 걷기 시작하였다. 해안 10여리 길을 걸어 산봉우리에 올라가니 마치 오색구름이 한 조각 연꽃으로 변해있었다. “아, 참으로 기이하도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금수강산이라 불렀던가 보다. 마치 부처님 나라 영축산과 같구나….” 그래서 장차 이산 이름을 천축산(天竺山)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시자가 말했다. “구슬 같은 물이 너무도 시원하고 답니다.” “사람이 이곳에 나서 살게 된다면 그대로 신선이 되겠구나.” “그러데 이곳은 독룡이 있어 사람이 살기 어렵다 하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 용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보자.” 시자는 스님을 모시고 용소(龍沼) 앞으로 나아갔다. 큰 너래 바위 앞에 깊은 호수가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였다. 스님은 한참동안 앉아 법계관을 하다가 법성게를 읊었다. 호수 속에서 용 한 마리가 나와 꿈틀 움직이더니 그 큰 호수가 파도 속에 휩쓸렸다. “어, 그 놈 참 대단한 힘을 가졌구나.” 그때 금강신장들이 나타나더니 호숫가를 에워쌌다. 보살들도 나타났다. 8금강 4보살이 둘러서 있는 가운데 10대 명왕이 그의 권속들과 함께 2중 3중으로 둘러쌌다. 그때 하늘에서 한 용이 쏜살같이 내려오더니 물 속으로 들어갔다. 검은 용 다섯 마리가 몸부림치며 쫓겨다니다가 동쪽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러면 그렇지 지가 무슨 재주로 우리 큰스님의 법력을 이기려고.” 스님은 한참 동안 물속을 들여보다가 물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용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 "선묘아가씨 고맙습니다. 황해바다에서 나를 구해준 것도 고마운데 여기까지 와서 나의 일을 도와주십니까.“ 물속에서 보글보글 물거품이 올라오더니 소리가 났다. “스승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이곳에 아름다운 절을 지어 중생교화의 터전이 되게 하겠습니다.” “고맙소.” 그런데 그때 그 못속에 부처님 그림자가 찬란하게 나타났다. 의상대사는 소리질렀다. “아, 저 부처님 그림자를 보라.” 그리하여 의상대사는 장차 그곳 호수를 메우고 절을 짓고 이름을 불영사(佛影寺)라 불렀다. 먼저 붉은 안개가 서렸던 곳은 단하동(丹霞洞), 바닷가에 구름이 낀 곳은 해운봉(海蕓峰 다섯 마리의 용이 살던 곳은 용혈(龍穴), 그들 용이 날아가다 잠깐 쉰 곳은 오룡대(伍龍臺), 그들 용이 이사가서 살게된 곳은 용추(龍湫), 학들이 머무는 곳은 학소대(鶴巢臺)라 각각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불영사를 짓고 의상대사가 그곳에 머문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들어 동경(경주) 시내가 텅텅비게 되므로 나라에서는 스님을 다시 모셔 경용사에서 법회를 보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1년만에 의상대사는 서울(경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경사에서 수년 동안 포교활동을 하다가 다시 머리를 잠깐 식히기 위해 불영사에 들어가니 선사촌에 살던 신도 한 분이 즐겨 맞으며 “우리 부처님 다시 돌아오셨다.” 하여 불귀사(佛歸寺)로 이름을 바꾸어 불렀다. 이 글은 고려말 공민왕 19년 한림학사로 있던 유백유(柳伯儒)가 기록한 불영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조 초 울진 현령 백극재(白克齋)가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 부임을 받아왔다가 하룻밤 자고 그대로 죽자 그의 부인이 너무도 억울하여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곳 어느 곳에 영험한 절이 없느냐?” “불영사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체를 그곳으로 모셔라.” 부인은 부처님께 간절히 빌었다. “부처님 저의 남편이 어려운 가운데서 간신히 과거에 급제하여 현령벼슬을 받아 왔는데 하루 사이에 갑자기 쓰러져 죽으니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부처님 신통력으로 꼭 살려주십시오.” 3일 밤낮을 식음을 전폐하고 몸부림치다 보니 갑자기 관속에서 피묻은 한 귀신이 머리를 풀고 떠나면서 “10생원결이로다.” 하였다. 그래 관속을 자세히 살펴보니 죽은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그 법당을 환생전(還生殿)이라 하고 관을 두었던 요사채를 환희료(歡喜寮)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또한 조선조 태종 8년 안동부판관 이문명(李文明)의 글에 실려 나온다. 그 부인은 감사 은혜의 보답으로 법화경 7권을 금자로 써서 부처님께 바쳤다 한다. 어떻든 의상대사는 이렇게 하여 귀국 후 최초의 사찰을 짓고 틈나는대로 그곳에 가서 신심도 요양하고 중생들도 제접하였다.
부석사의 창건
문무왕 15년은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옮겨간 해다. 당나라 군대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 그 유민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평양에 도호부를 두었으나 지나치게 백성들을 괴롭게 하여 살 수 없으므로 반란군들이 일어나자 이를 도와 격파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해 나라는 서남쪽으로 백제군의 침략이 쉬었고, 북쪽으로는 고구려군의 침략이 끝이 났으며, 당나라 군대까지 압록강 밖으로 물러갔으니 명자 그대로 태평성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전쟁에 나아가 희생된 영혼들을 달래고 집에 남아있는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갖가지 재를 지내고 경전을 설하여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의상대사는 그동안 천축산에 불영사를 지어 스스로 자신의 수행지로 삼고 지역 주민들을 제도하는데 힘을 기울려 왔으나 이제는 국가의 동량이 될 정신적인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 속에서는 오직 승패와 생사의 두 갈래길이 있기 때문에 정의 호국심으로 충만해 있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국민 정신이 해이해지면서 탐욕의 덩어리로 뒤바뀔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 국교대찰(國敎大刹)을 지을 것인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비몽사몽간에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북쪽으로 나아가 보십시오.” 어쩌면 선묘아가씨의 소리 같기도 하였다. 스님께서는 이튿날 문무대왕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호국 기원도량의 건립을 위해 산천경계를 구경코자합니다.” “길이 험할터이니 종관 몇 사람을 딸려 보내겠습니다.” 그리하여 의상대사는 종자 몇 사람과 함께 내이골(지금의 영주)을 지나 기목전(풍기)에 이르니 거벌산(순흥) 일대에 오색구름이 찬란하게 피어있었다. 천천히 구름을 따라 산밑으로 나아가니 작은 산봉우리들이 연꽃처럼 피어나고 봉황이 날개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하늘에 뜻밖에 큰 돌덩이가 떠다니다가 점점 밑으로 가라앉으니 그 밑에 살던 사람들이 겁에 질려 모두 뛰어나와 도망쳤다. 하늘에서는 와그랑 뚝딱 벼락치는 소리가 나 쳐다보니 불빛 장검이 하늘높이 솟아 번쩍거렸다. “아이 무서워.” “우린 이제 다 죽었네.” 하고 오백여 명의 무리들이 움막집에서 막 쏟아져 나오자 바위는 벼락치는 소리를 내며 땅으로 내려앉았다. 스님이 그 앞으로 나아가니 또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이곳이 명당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별일이 없고 오직 도망치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예. 고구려 패잔병들입니다. 나라는 망하고 갈 곳이 없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초근목피로 주린 창자를 달래고 있습니다.” 종자 몇 사람이 “어허, 그대들이 순흥의 때도둑이로구나.” 하며, 앞으로 나서자 스님께서 말렸다. “옛날에는 먹고살게 없으니 도둑질을 했겠지만 지금이야 그러할리 있겠느냐. 내가 이곳에 큰절을 짓고자 하는데 돕겠느냐.” “돕고 말구요. 먹고 입는 것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지 성실하게 해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그대들의 거처를 이 산 넘어 골짜기에 정하고 이곳에는 절을 짓도록 하자.” 도둑들은 환호성을 울렸다. “돌 벼락으로 꼭 죽을줄만 알았는데 스님 덕분에 일거리까지 생겼네 그려.” 오백여 명이 석달을 공사하고 나니 근사한 법당이 되었다. 나라의 임금님을 비롯하여 공경대부와 남녀노소가 한데 어울려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니 온산천이 영산회상으로 변하였다. “도둑놈 소굴이 불지도량으로 변했습니다.” 순흥부사가 이렇게 말하니 문무대왕께서 칭찬하였다. “창칼로 싸워 이길 것을 뜬 바위로 한 순간에 교화하였으니 이는 다 의상대사의 도력이요.” 500여명의 일꾼들과 경향각지에서 몰려온 2천여 명의 청장년들이 모두 출가하기를 희망하여 한 곳에 모여 화엄경을 듣게 되니 이것이 한국 화엄종의 대본산 부석사가 형성되게 된 동기이다. 산은 큰산이 봉황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으므로 봉황산이라 이름하고, 절은 뜬 돌이 내려앉아 터를 잡았으므로 부석사(浮石寺)라 이름을 짓게 되었다. 의상대사가 걱정하였다. “절이 잘 지어져 대중이 살기는 편안하게 되었으나 이 많은 사람들이 마실 물이 넉넉치못해 걱정이로구나.” 그런데 그 날 밤 꿈에 선묘아가씨가 나타나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법당 마루방 밑에 내 몸체가 숨어 있으니 나의 가슴을 톡 치면 감로수가 나올 것이니 3천명은 먹고 남을 것입니다.” 이튿날 의상대사가 법당 마루방을 뚫고 내려가보니 용비늘이 선명한 큰 바위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그 가슴팍에 부풀어 오른 젖꼭지가 있어 지팡이로 살짝 건드리니 단샘물이 솟아나왔다. 어디선가 소리가 났다. “살아서는 친히 모시지 못했으나 죽어서라도 스님의 뱃속까지 시원하게 해드리기 위해 여기 감로수를 제공했으니 맛있게 잡수시옵소서.” 의상대사는 “이는 필시 선묘아가씨의 원력이요 사랑의 표적이로다.” 하고 그 위에 사당을 지어 선묘아가씨의 영정을 모시게 하고 3천 제자를 길러 그의 은혜에 감사하였다.
금정산 범어사
문무왕 19년 5월 왜적이 수십 척의 배를 몰고 동해안에 침입하였다. 전력을 다해 쳐부수고 수십 명을 포로로 잡아 탐문하니 일본이 그해 7월, 10만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치고자 500척의 배를 만들어 놓았다 한다. 왕이 걱정이 되어 분황사에 나아가 예불하는데 비몽사몽간에 허공에서 소리가 들렸다. “거량산(居梁山) 밑 황금우물(金井)이 솟는 곳에 절을 짓고 노사나불과 문수, 보현, 미륵보살을 모시고 39위신장을 불러 호위하게 한 뒤 3 ? 7일 동안 100법사를 모시고 정진한다면 알바가 있으리라.” “왜 하필이면 금정산이옵니까?” “그곳은 옛날 임나시대부터 왜적들의 근거지가 된 곳이니 여기 왜놈들이 발을 붙이면 신라에 반드시 큰 화가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왕이 예불 후 신하들에게 말하니 “이 일은 의상법사님께서 가장 잘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사람을 보내 의상대사를 모시고 금정산에 올라가니 청정한 물 속에 고기들이 놀고 있었다. 스님께서 3 ? 7일 동안 기도한 뒤 100법사를 모시고 100일 동안 화엄법회를 하였다. 법회가 끝나자 경향 각지에서 모여온 대중들이 궐기대회를 하고 금정산 밑에 호국사찰을 지었다. 그 이름이 범어사(梵魚寺)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큰 비바람이 몰아쳐 동쪽 우산도(울릉도)를 향해 오던 배와 대마도에 머물러 있던 배들이 산산 조각이 났다. 문무왕은 육지에 올라와 있는 왜적들을 포로로 잡아 부산성(釜山城)과 안북하변에 철성을 쌓는 데 투입하고 왕 21년 6월에는 서라벌 30여리에 성을 쌓고 궁성을 새롭게 단장코자 계획하였다. 그리고 의상대사에게 물었다. “월성 동쪽에 성을 쌓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감께서 진실로 정사를 바로 하고 교화를 진실하게 하신다면 비록 돌로 집을 짓고 풀이 우거진 숲속에 계시면서 땅에 선을 그어 ‘이것이 성이다’ 하더라도 한 사람도 넘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사와 교화가 바르지 못하면 큰 성을 쌓아 높이가 하늘에 닿는다 하더라도 재해(災害)가 없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문무대왕은 바로 궁성의 수리와 대성의 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바른 정사와 바른 교화에 전력하다가 21년 7월 명을 버림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산과 물도 서로 바뀌고 인생도 그 가운데 무상을 면치 못하게 되어있다.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만승의 천자들이 죽고 나면 한줌의 훍이 되는 것은 정한 이치이니 쓸데없이 재물과 인력을 허비하여 묘지를 만들지 말고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주면 내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리라.” 지의(智義)법사가 이 말씀을 듣고 말했다. “용은 축생이온데 어찌 축생의 몸을 스스로 자청하시나이까?” “내 이미 세간의 영화를 버린 지 오래되었거니와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서는 내 호국룡이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인 줄압니다. 선묘아가씨도 용이 되어 불법을 돕는데 내가 죽어 나라를 지킨다면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소.” 왕이 승하하자 나라에서는 임금님의 육체를 화장하여 동해에 뿌리고 시호를 ‘문무대왕’이라 하고 그 유물을 대왕암 바위 속에 갈무려 놓았다. 그런데 임금님께서 용이 되어 바다 위를 떠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태자 정명(政明)이 신문왕이 되어 즉위 2년에 감은사(感恩寺)를 짓고 호국의 여가에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감은사를 짓게된 동기이다.
천성산 원효암
의상대사가 이렇게 금정산에 범어사를 짓고 호국불사를 완성하자 원효대사가 와서 구경하고 말했다. “수고 많았네. 중이 중노릇을 잘못하면 하늘 땅 아래 침 밷을 곳 없다더니 자넨 절도 잘 짓고 도량도 잘 가꾸네 그려.” “모두가 형님 덕분입니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으니 저 천성산 토굴속에 들어가 좀 쉬었다 가도록 하소.” 이 말을 듣고 우리들은 양산 톨게이트에서 통도사 언양 표지판을 따라 35번 국도로 올라가 양산 세관 방향에서 우측도로로 빠지니 대석마을이 나왔다. 절에 연락하여 봉고차 한 대가 내려와 삼거리 입구에서 차를 갈아타고 40분 동안 비포장 도로를 올라가니 원효암이 나왔다. 운전기사가 말하였다. “천성산 원효암은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산 16번지에 위치한 천년고찰의 관음도량입니다. 신라 진흥왕 39년 오뉴월에 태어나 수많은 불교경전의 저술과 법력으로 민중의 눈을 뜨게 하였고, 만세에 덕음을 베푸신 해동성자 원효대사께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창건한 청정도량입니다. 해발 900미터의 정상에 위치한 원효암은 태고의 숨결이 흐르는 탈속한 성지이자 많은 수도자와 불자들의 귀의처가 될만한 곳입니다. 여기서 울려퍼지는 범종과 목탁소리는 속세의 번뇌를 해탈시키고 자성을 깨우치는 법음으로 들려옵니다. 어느 때 당나라 장안의 운제사 도량에 하늘에 둥둥 떠있는 소반이 있었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절의 대중이 소반을 따라 나오는 순간 큰방의 대들보가 무너져 내려앉았습니다. 땅에 떨어진 소반에는 해동원효 척반구중(海東元曉 擲盤求衆) 이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이를 본 천명의 대중이 도력 높은 원효스님을 찾아 신라까지 오니 성사께서는 원효암을 비롯하여 수십 개의 암자를 마련하여 이들을 지도하였고, 화엄경을 가르치던 사자봉 산 정상에는 방석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곳을 화엄벌이라 하였습니다. 이중 이곳에서 992명이 성인이 되었고, 여덟 명은 대구 팔공산(八空山)으로 가서 득도하여 천명의 성인이 배출되었으므로 천성산(千聖山)이라 이름하게 된 것입니다. 원효성사께서 대중을 교화하며 정진하였던 자연 암굴이었던 이곳이 1,400여 년의 법맥을 이어 온 유서 깊은 명산 기도도량입니다.“ 청정도량 원효암은 불보살님의 가피와 서기가 서려 있는 곳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참배객들이 사찰순례를 하고 있었으며, 많은 영험과 설화가 남아 있는 곳이었다. 1991년 7월 20일 오후 8시경 비는 오지 않고 천둥번개가 2시간여 동안 이어지더니 천성산 사자봉을 향해 불기둥을 내뿜었고 불기둥에 맞은 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날이 밝아 주변을 살펴보니 기묘하게 새겨진 암벽에 부처님의 형상이 조각을 한 듯이 현현하게 나타났습니다. 당시 통도사 방장이셨던 월하(月下) 큰스님께서 왕림하시어 하늘빛이 빚었다 하여 천광이라 하였고, 동방에는 정유리광세계에 약사여래가 상주하시므로 천광약사여래(天光藥師如來)라 명명하였습니다. 천성산의 산세는 잠자는 사자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종을 쳐 사자를 깨우면 국운이 융성하고 남북통일이 빨리 이루어진다고 통도사 경봉스님이 말씀하여 사자의 귀 뿌리에 종각을 짓고 범종을 달았습니다.“ 과연 산은 깊고 물은 맑았다. 인법당 뒤로 자리한 미륵전 일명 용왕전에서 흘러나오는 감로수는 가뭄이 있더라도 줄지 않고 오래 두어도 변질되지 않는다 하였다. 물을 한 바가지를 떠서 마셔보니 참으로 달고 시원하였다. 원효암 주위에는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는 듯한 바위들이 있는데 의상대 뒤편에는 관음바위가 우뚝 솟아있고 원효대 뒤쪽에는 거북바위가 큰바다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인법당 뒤에 힘차게 서 있는 바위는 신장바위라 하였다. 이 바위들은 원효대사가 원효암을 떠날 때에 제자들에게 “저 바위가 떨어지면 내가 열반한 것으로 알라.” 유언하였는데 지금까지 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원효암은 기도 발원의 장소로써 지역의 불자들이 대를 이어 찾는 기도처였으며, 청명한 날에는 멀리 부산과 대마도가 보이고 양산과 울산 바다가 보이는 천혜의 경관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잠깐 의상대사가 머무시던 곳에 가서 쉬었다가 불전 뒤 3성각으로 가니 칠성 산신 독성 탱화 옆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옆에는 서산대사의 시가 걸려 있었다. 방초삼춘일(芳草三春日) 심진과호계(尋眞過虎溪) 화비풍약력(花飛風弱力) 산정조철제(山靜鳥喆啼) 명간금상주(鳴癎琴常奏) 층봉검불재(層峯劒不齋) 운심승입정(蕓深僧入定) 송노학능루(松老鶴能樓) 저국인하거(著局人何去) 대태로욕미(對笞路慾迷) 야력청몽라(夜力淸夢羅) 이월향창저(梨月向窓低) 풀 향기 그윽한 춘삼월에 선경을 찾아 호계를 지나니 산들바람에 꽃들이 날으고 고요한 산에서 새들이 지저귀네. 흐르는 시내 거문고 소리같고 높은 봉우리 칼처럼 뾰족하다 구름 깊은 골에 산승은 선정에 들어있고 늙은 소나무 속에 학들이 졸고 있네. 바둑두던 사람 어디로 갔는가 길에는 이끼 끼어 찾는 자 없네. 밤에 맑은 꿈 깨니 둥근 달이 창가에 서려 있구나.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서 천만대중을 거느리고 화엄경을 강의하였기 때문에 천성산 화엄벌이라 부른다 하였는데 산봉우리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산 정상에까지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천년 고찰이 그대로 남아 원효 의상의 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어 감개무량하였다. 의상대사는 이곳에서 원효대사와 함께 장차 이 나라 국민들을 무슨 방법으로 교화할 것인가를 의논하다 의상은 양양 낙산사로 가고 원효는 엿판을 짊어지고 거리의 화주가 되었다 한다.
낙가산 관음도량
의상대사가 금정산에 범어사를 창건하고 원효대사와 함께 천성산에 이르러 장래 국민들을 순화시킬 방법을 구상하였다. “화엄법은 보현, 문수의 법문이 중심인데 문수의 지혜로 정사(正邪)를 가리고 보현의 행원으로 바른 일을 하다보면 집안과 길거리의 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거리의 행자들은 누가 거두어주는 것이 옳겠습니까?” 의상이 이렇게 묻자 원효가 말했다. “53선지식 가운데 제 27번째 관음이 있지 않은가. 대비방편문으로 갖가지 몸을 나투고 갖가지 신통력을 부려 한 중생도 버리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우리 신라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성자라고 생각하네.” “좋습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관음성지는 보타낙가산으로 이해되고 중국에서도 남해열도에 보타낙가산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어느 곳이 보타낙가산이 되겠습니까?” “남해에도 보리도량이 있고 강화에도 성지가 될만한 곳이 있으나 동해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그리하여 의상대사는 시자 한두 사람을 데리고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슬라주(강릉)을 거쳐 익령(翼嶺: 양양)에 이르니 푸른숲 사이로 검은 파도가 치고 있는데 작은 산봉우리 하나가 바닷가에 돌출해 있었다. 의상스님은 그곳에 자리를 정하고 7일 동안을 기도하였다.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뵙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였다. 그러나 7일을 일념으로 기도했는데도 아무런 기미가 없자 다시 3 ? 7일 동안을 기도하였다. 역시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내 이렇게 기도하여도 진실로 감응이 없다면 차라리 몸을 바꿔 진신을 친견하리라.” 하고 그 몸을 통째로 바다에 던졌다. 그랬더니 수건을 쓴 한 할머니가 나타나 치마로 안아 받으면서. “이 미친 중아 떨어지면 죽는데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느냐?” 하고 꾸짖었다. 눈을 떠보니 사람은 간곳이 없고 떨어졌던 몸은 그대로 산봉우리 위에 서 있었다. 의상대사는 꼿꼿이 선채로 다시 3일 동안 삼매에 들었다. 그런데 제3일 아침 동해에 햇빛이 막 솟아오를 무렵 멀리서 홍련 하나가 아련히 떠올랐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위에 찬란한 모습을 한 관세음보살이 서 있었다. 점점 가까이 오면서 더욱 그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때 푸른색의 새 한 마리와 멥새 한 마리가 나타나. “스님께서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뵙고자 하거든 저리로 가십시오.” 하며 길을 인도하였다. 언덕길을 따라 한참 돌아가니 큰 굴이 있었는데 관세음보살이 자비광명 속에 은근히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다가 수정염주 한 벌을 주었다. 또 관세음보살을 옆에서 모시고 다니던 바다용왕이 턱 밑에 있는 여의주를 뽑아주며, “장차 이 관세음보살님께서 머무실 곳에는 푸른 대나무와 검정 대나무가 날 것이고 그 사이에 전단향토가 있을 것이니 스님께서 본 대로 조성해 모시면 말세 중생들의 큰 복전이 될 것입니다.” 하고 굴속으로 들어갔다. 의상대사는 감격하여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받아가지고 산위로 올라오니 과연 산중턱에 푸른 대나무와 검정 대나무가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향냄새가 진동하는 전단향토가 있었다. 의상대사는 바로 그곳에 절을 짓고 낙산사라는 이름을 붙이고 전단향토로 관세음보살을 조성하여 모셨다. 뒤에 사람들이 의상대사가 기도하던 장소를 ‘의상대’라 부르고 의상대사께서 직접 홍련을 탄 관세음보살을 만난 곳에 홍련암을 짓고 기도하니 오늘날의 낙산사와 홍련암, 의상대가 그렇게 하여 생긴 것이다. 의상대사는 낙산사에 관음보살을 모시고 백화도량발원문을 지어 읽었다. "머리 숙여 귀의하옵나이다. 저 보살 관음대성의 대원경지와 제자의 고요한 성품을 깨달은 본 마음에, 우리 스님 수월도량에 장엄된 무진한 상호와 이 제자의 공화와 같은 몸 흘러가는 모습은 의 ? 정(依?正), 정 ? 예(淨?穢), 고 ? 락(苦?樂)이 같지 안사오나 지금 관세음보살의 거울 가운데 비친 관음대성께서는 정성스런 발원을 들으시고 가피를 주시옵소서. 오직 원컨대 제자는 세세에 태어나는 곳마다 관세음보살을 스승 삼아 부르며 관세음보살이 아미타불을 머리에 이고 계시듯 또한 관음대성을 머리에 이고 10대원과 6대서 천수천안 대자대비로서 똑같이 몸을 버리고 받아 이 세계와 저 세계가고 머무는 곳마다 모양 따라 그림자가 나타나듯 항상 설법을 듣고 진화(眞化)를 도와 널리 법계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대비주를 외우고 보살명호를 불러 똑같이 원통삼매의 성해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또 원하옵니다. 제자가 이 몸을 버릴 때는 친히 대성께서 방광으로 접인하여 두려운 마음 없애고 몸과 마음을 기쁘게 하여 일찰나간에 바로 백연화도량에 가 나서 모든 보살들과 함께 바른 법을 듣고 진리의 흐르는 물에 들어가 생각생각을 더욱 밝히고 여래의 무상법을 발하게 하옵소서.“ 관세음보살의 10대원은 ① 속히 일체법을 알고 ② 지혜의 눈을 얻고 ③ 일제중생을 제도하되 ④ 편리한 방법으로 ⑤ 반야선에 태워 ⑥ 고통의 바다를 건너 ⑦ 계와 선정을 완성하고 ⑧ 원적산에 올라가 ⑨ 하염없는 집을 짓고 ⑩ 법성신과 같이 하겠다. 한 것이고, 6대서는 ① 내가 만일 도산지옥에 들어가면 칼이 토막토막 부서지고 ② 화탕지옥에 들어가면 화탕지옥이 마르고 ③ 일반지옥에 들어가면 일반지옥이 소멸되고 ④ 아귀세계에 가면 아귀들이 배부르고 ⑤ 축생세계에 가면 축생들이 지혜를 얻고 ⑥ 수라세계에 가면 수라들이 악심을 버리게 하겠습니다. 한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의상대사가 관음진신을 친견한 내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의상대사가 자리를 펴 물위에 띄우고 천룡팔부들의 시종일 인도하여 굴안에 들어가 침례하니 공중에서 수정염주 한 벌을 주시므로 받아가지고 물러나오는데 동해 용왕이 또 여의주 한개를 주었다. 대사가 받아가지고 나와 다시 7일을 재계하고야 이에 참모습을 뵈니, 관세음보살이 일러 가로되, ‘이 자리 위의 산꼭대기에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바로 그 자리에 법전을 짓는 것이 좋으리라’ 하였다. 대사가 듣고 굴에서 나와 보니 과연 대나무가 솟아난지라 이에 금당(金堂)을 짓고 관음존상을 조성하여 모시니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형상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 듯하고, 대나무는 도로 없어졌으니 바로 보살의 진신이 머무른 곳이다.” 그리고 또 원효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신 내력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뒤 원효법사(元曉法師)가 자취를 찾아 보살진신에 참배 하고자 하여 남쪽 교외의 논에 이르자 어떤 흰옷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법사가 장난삼아 벼를 얻자 하니, 벼가 황무하다고 대답하였다. 가다가 다시 다리 밑에 이르러 한 여자가 월수백(月水帛:여자의 서답)을 빨고 있는 것을 보았다. 법사가 먹을 물을 청하니 여인은 더러운 물을 떠서 주었다. 법사가 ‘그 물을 쏟아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그때 소나무 위에 푸른새 한 마리가 있어서 휴제호화상(休醍?和尙)이라 부르고는 홀연히 보이지 않고 소나무 밑에는 벗어진 신 한 짝이 있었다. 법사가 절에 가서 보니 관세음보살의 좌대 밑에 아까 봤던 벗어진 신 한 짝이 있어 그제서야 아까 만난 성녀가 관세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하였다. 법사가 성굴에 들어가 참 모습을 보려하니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했다.“ 이 글을 보고 어떤 이들은 원효대사는 파계승이기 때문에 진신을 친견하지 못했다 하나 옛 사람들이 평하였다. “이는 두 사람의 불교관의 차이에서 생긴 설화다. 말하자면 의상대사는 천지자연의 이상불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바다 가운데 뜬 보살을 보고 원효스님은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 여성을 그대로 관음 화신으로 보았기 때문에 월수백을 빠는 여인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게 된 것이다.” 의미있는 말씀이다. 같은 태양도 하늘에서 보면 왼쪽으로 돌아가는 것같이 보이는데 지상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보인다.
일본에 모셔진 의상대사의 초상
일본 교토 고산사에는 일찍 의상대사와 선묘아가씨, 그리고 원효대사의 상을 그려 명신(明神)으로 모셨다. 명신이란 훌륭한 사람을 부처님처럼 받들어 모시는 것을 말한다. 고산사는 가마쿠라시대(1286) 명혜(明惠)스님이 중흥시킨 화엄종사찰이다. 지금도 고산사가 있는 도가노산 전체를 일본사적으로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하고 있다. 사찰 안에는 국보 7건 일반문화재 50개가 지정되어 있는 건물 이외에도 많은 문화재가 교토박물관과 도쿄박물관에 옮겨져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 국보로 지정된 화엄연기회권(華嚴緣起繪卷) 6권은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데 그 중 4권은 의상과 선묘 설화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고, 2권은 원효 의상의 행적을 담은 것이다. 이 그림은 어찌하여 그렸는지 그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1762년 고산사 승정이었던 일지오(일지오)스님이 쓴 보수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번 양대 경진의 진영을 유심(有深) 등의 지원에 의하여 받들어 보수했다. 후대를 위하여 기록한다.” 일본 화엄종의 태두인 명혜가 무엇 때문에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의 영정을 그려 모시고 또 선묘아가씨까지 섬기게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명혜스님은 명문귀족 출신이다. 8세에 그의 어머니가 병들어 죽고 아버지는 당시일본의 최강자 요리모토와 싸우다가 전사 하였다. 9세에 고산사 밑에 있는 신호사(新護寺)에 들어가 불도 수업을 받고 나라에 있는 일본 최대 사찰 동대사에 들어가 공부, 학두(學頭)로써 화엄학을 강의하였다. 고아였던 명혜스님은 석가모니부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관세음보살을 어머니로 생각하며 오직 불도에만 전념했지만 당시 학승들은 출세와 명예를 위해 공부할 뿐 불교적 실천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직업적인 승려직을 탈출하기 위해서 청정히 계율을 지키면서 수행에만 열심하였다. 그런데 고도바 상청께서 이 소식을 듣고 석수원을 명혜스님의 학문소로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로부터 명혜는 고산사를 중흥시켜 일본화엄의 종주가 되게 하였다. 청순무사(淸純無私)했던 일본 최고의 수행자 명혜스님은 진정한 불제자로 추앙 받았으며, 그 또한 석존에 대한 지극한 신앙이 오른쪽 귀를 조금씩 잘라 부처님께 육신공양을 올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19세기 말 일본종교는 타락할대로 타락해 있었다.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출가해 수행하고 있는 스님들이 2,3명의 여인을 거느리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사찰은 음주가무의 연희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생각하면 한번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으면 끝이 나기 때문에 죽기 전에 한번 즐겨보자는 막가는 인생이 불러일으킨 사회풍조였다. 13세기 초 일본 교토의 조정과 가마쿠라 막부가 충돌하면 보통 10만에서 20만 이상의 병졸들이 동원되었는데 1회 싸움에 만명 이만명이 희생되는 것은 예사적인 일이었다.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죽었다고 하지만 남아 있는 유족들이 살수 없으므로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 즐비하고 전쟁 미망인들은 밤거리의 여인들이 되어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하여 이때 명혜성인은 여인의 애끓는 사랑을 뿌리치고 구도 일념으로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국을 전화의 불구덩이에서 건져내고자 그의 사랑의 완성을 위해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의 몸을 받아 끝가지 불도를 완성하게 한 선묘아가씨를 구도전법의 모델로 삼아 화엄회권을 만들지 않았는가 추측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이같은 고백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도 여자와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일어나는 사랑의 불꽃을 삼매의 불로 꺼 흥분을 가라앉히고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육체적으로는 계를 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이미 파계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1219년 승구(承久)의 난 이후에 고산사 아래쪽에 선묘니사(善妙尼寺)를 창건하여 전쟁 미망인들을 대거 교화 구제하였다고 한다. 현재 그 자리는 고웅(高雄)소학교가 들어서 철거되었으나 역사상에는 그 자취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동대사는 신라화엄이 수입된 최초의 화엄대학이었기 때문에 명혜성인을 의상대사의 교학을 의지하여 교수하였다고 한다. 1천년 일본 수도 가운데 700년 수도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명혜성인은 타락한 일본 스님들보다는 청정한 신라 스님들을 모델로 하여 일본 불교를 중흥코자 혼신했던 것이다. 신라의 심상(審祥)스님은 이곳에 와서 법화경에서 신라화엄을 강의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일본 화엄과 신라 화엄이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도인전법
도인전법(圖印傳法) 의상대사가 이렇게 경주 분황사에서 구국의 화엄법회를 본 이후로 영축산. 태백산, 금정산, 보타산, 금강산을 돌아다니며 제자들을 양성하는 가운데 3국은 완전히 통일되고 불국정토가 그 가운데서 싹터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스님의 나이 70에 이르렀다. 이제 본사에 들어가 회향할 것을 생각하니 연운만리(煙蕓萬里) 생각 또한 끝이 없었다. ‘잘 지냈다. 잘 지냈어. 인간 칠십고래희라 하였는데 내 나이 70, 풍전등화와 같은 인생을 뜬구름처럼 걸림없이 살았으니 말이다.’ 스스로 찬탄하고 부석사로 돌아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제자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동안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해인도(海印圖)를 꺼내주었다. “이 도장은 일찍이 내가 중국 유학 때 지엄 큰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법계도이다. 백지와 같은 법계를 바라보면서 중생과 부처를 보라.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중생들의 근기를 살펴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제도하라. 그동안 내가 머물렀던 태백산 부석사와 금강산 마하연, 금정산 범어사, 익령의 낙산사, 원주 비마라사와 비슬산 옥천사, 가야산 해인사, 지리산 화엄사, 경주 황복사, 하가산 학암사는 대법이 만대에 유전할 곳이니 혹 게으른 마음이 생기거든 이 도량을 순례하며 용맹 정진하라. 우리 부처님께서 마지막 부탁하시기를 자기를 등불로 삼고 남을 등불로 삼지 말라 하였고, 자기를 의지하고 남을 의지하지 말라 하였으니 너희들도 법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요의(了義)를 의지하고 불요의(不了義)를 의지하지 말며 지혜를 의지하고 지식을 의지하지 말라. 정의가 없는 곳에는 불의가 성하니 법이니 뜻을 따르고 말을 따르지 아니하면 반드시 대법이 밝혀질 것이다.“ 합원대중은 모두 숙연한 가운데 스님의 법문을 듣고 위로 불도를 구하고 밑으로 중생을 구하는 데 게으름이 없이 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전해진 법계도기가 일본, 한국, 중국에 유포되면서 약간씩 차이가 있어 최근까지도 그 논문이 유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