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 박세당 사랑채에서] 정병경
ㅡ강직한 성품ㅡ
실학의 체취가 서린 '서계사랑채' 정원에 꽃길이 이어진다. 봄기운이 남아있어 지천에 핀 꽃과 푸르름을 더한다. 임금이 내린 벼슬도 뜻에 맞지 않아 거부한 서계 박세당의 고택으로 나선다. 서계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랑채는 고즈넉하다.
사랑채 뜰에서 웨딩마치가 종택 정원에 울려퍼진다. 영국에서 유학 시절 윈드서핑을 즐기며 서로 마음이 통한 사이가 되어 드디어 하나가 되는 날이다. 주인공이 이종사촌의 딸 조윤서와 조카사위 주원우이다. 자유분방한 세대에 태어나 박세당 고택에서 백년가약을 맺는 건 특별한 인연이다. 서계의 학식과 선비 정신을 이어받기를 기대해본다.
사랑채 뜰에는 조선시대 후기부터 400년을 지켜온 거목 은행나무가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사랑채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해와 달과 별을 비롯해 사물의 움직임을 필름으로 담아낸 저장고이며 만물을 비추는 거울이다. 봄기운의 여운으로 핀 꽃과 초목은 향기를 더한다.
수락산 정기를 받은 사랑채는 면면히 이어오면서 무언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하루를 마감하고 펼쳐지는 노을에 오랜 세월의 색채가 물들어있다. 학식과 덕목이 남다른 서계의 혼을 담은 사랑채는 후대에게 선물로 남긴 문화유산이다.
조선 후기에는 당파ㆍ학파 논쟁이 극에 달해 관련된 학자들은 피해를 입게된다. 조선 숙종 때 실학자인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1629~1703)이 그 중 한 사람이다. 박세당 고택은 수락산을 등지고 서쪽의 도봉산이 마주보이는 의정부시 장암동 197번지에 자리했다. 한국동란으로 고택이 소실되어 사랑채만 남았는데 후에 개축해 옛 모습을 되찾아 역사를 이어간다.
정매당征邁堂과 누산樓山, 관어정觀魚亭의 배치가 조화롭다. 띠살문 문양은 우리가 살던 한옥의 모습이다. 사랑채 뒤에 명인당明仁堂은 서계와 부친인 하석瑕石 박정朴正(1596~1632)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이다.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이 종일 해를 마주하는 넓은 터에 자리잡았다. 봄ㆍ가을 시즌엔 야외 결혼식과 스켓치 장소로 이용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다.
서계가 정계 은퇴 후 학문 연구와 후학을 양성한 사랑채는 여전히 발길이 이어진다. '농자천하지대본'을 중시한 서계는 농업과 관련한 저서 '색경穡經'을 47세인 1676년에 편찬한다. 대학ㆍ중용 등 사서오경을 쉽게 풀이한 '사변록'과 '서계집'이 후대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서계는 유아 시절부터 시련을 겪게된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일곱 살에 큰형 박세규를 잃는다. 1649년에 모친과 이듬해 셋째 형마저 세상을 떠난다. 37세 되는 해인 1666년에 부인 의령 남씨와 사별한다. 50세 되는 해에 정쟁으로 두 아들을 먼저 보내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서계의 둘째 아들 박태보는 윤증 제자로서 소론 핵심 가문에 입지를 굳힌다. 1686년 인현왕후 민씨 폐위를 반대해 유배 중 노량진에서 3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노강서원은 박태보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본래 김시습의 사당인 청절사淸節祠 터에 세운 것이다. 소론의 영수 남구만은 서계의 처남이고 박세채는 8촌간으로 학문적 신념이 투철한 가문이다.
서계는 문과에 장원 후 부수찬과 예조참의, 승지를 거쳐 홍문관교리, 병조좌랑을 역임한다. 결국 당쟁에 휘말려 40대에 관직을 버리고 후학 양성에 이바지한다. 70세에 중추부 판사로 기로소의 영예를 얻게되지만 거부한다. 1703년 74세에 지은 백헌 이경석의 신도비명 사건으로 노론에 지탄을 받는다. 이경석을 봉황에 비유하고 송시열을 올빼미로 비유한 것이다. 정파를 떠나 정의로움에 치우친 서계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은 인물이다.
성리학은 송나라 주희가 집대성한 주자학이다. 송시열은 최고의 학문으로 숭상하다가 비난을 받게 된다. 윤증과 허목, 윤휴, 박세당은 이에 휩쓸리지 않는다.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인물들이다. 결국 사문난적(유학을 어지럽히는 도적)으로 몰려 죽음을 맞는다. 국교인 유가사상을 배척하고 학자들이 외면한 도가사상에 심취한다는게 이유이다.
박세당 묘역으로 발길을 돌린다. 고택의 뒤편 가파른 산 언덕에 사각 봉분이 서쪽 도봉산을 향해 있다. 장암동 산 146ㅡ1번지이다. 의령남씨宜寧南氏와 광주정씨光州鄭氏 두 부인과 함께 삼위 합장묘에 잠들어있다. 왕릉에 버금가는 묘역은 잘 관리되고있다. 묘역 아래에 서계의 행적을 새긴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명 마지막 부분의 글을 본다.
梟鳳殊性(효봉수성)
올빼미는 봉황과 성품이 다른지라
載怒載嗔(재노재진)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네
不善者惡(불선자악)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君子何病(군자하병)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
我銘載石(아명재석)
나의 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人其來敬(인기래경)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
송자宋子가 역정逆情을 낼만큼 직설적으로 비판한 서계의 비명碑銘이다. 후대에도 읽혀지는 모습을 보니 평소 돈독한 관계였으면 명문銘文이 달라졌을 것이다.
서계의 성품이 담긴 종택에서 두 사람은 혼인 서약서를 읽는다. 만인과 사랑채 지킴이인 은행나무가 듣고 있다.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하늘의 구름은 축하객의 꽃다발로 여겨진다. 고택 정원에 잔잔히 울려퍼지는 음악은 서계의 주례사로 들린다. 사랑채에서 맺어진 인연을 법고창신法古創新하며 세세생생 사랑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2024.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