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화에 관한 시모음 7)
나비와 산수국 /홍은택
부도탑 아래 산수국이 피었다
연보라빛 잔별처럼 핀 참꽃들을 에워싸고
꿈결인 듯 하늘거리는 헛꽃 잎들
영락없는 나비 날개다
나비는 피어오르는 는개 속을 날고
헛꽃과 참꽃의 윤곽이 흐려지고
발목 젖은 미끈한 적송들 사이로
희끗, 장주莊周의 옷자락을 본 듯하다
장마철 산사, 낮잠에서 깨어
수국 /장옥관
그를 찾으러 꽃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주와 보라와 하양 그리고 둥긂, 물방울이나 무지개 그 속에 갇혀 나 한나절 헤매고 다녔으니 유혹하는 헛꽃처럼 냄새만 흩어놓고 그는 사라졌고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아비 어미의 어처구니를 감싸며 저무는 노을은 이 색에서 저 색으로 번지며 한사코 저를 숨겼다 그는 내가 찾아다니는 것보다 숨는 속도가 늘 빨랐으며 그 작은 나비들이 뭉쳐 빚어 놓은 허망한 빛 숭어리, 이윽고 한숨처럼 연기처럼 흩어져 날아가는 나비 동작 속에 우리는 지워지고 망연한 눈길 속에 꺼졌다 사라진 어제가 있었다고 언제나 믿고 싶었다
수국꽃 질 때 /강연옥
색 바랜 사랑처럼
시들고도 오래도록 달려 있는 수국꽃을 보았네
제 몸 허물 듯 말라갈 때
더욱 짙어지는 향기
몸속에 잠긴 슬픔 한 움큼 짤 때마다
내게로 젖어 들도록
난 바람처럼 마음 펼쳐 보았네
향기 벗는 동안 네 빛깔은 구름빛 노을빛
오래전 사랑이 가슴에서 바래지듯
시들고도 오래도록 달려 있는 수국꽃을 보았네
이젠 빛깔도 향기도 내려놓은 목마름이여
난 네게 바짝 다가서지 못하네
발꿈치 딛는 소리 번져 꽃잎 바스러질까 봐
내 뼈를 부수는 것 같아
먼 옛날 물소리 들리는 사랑처럼 물국화여
내게로 젖어 들도록 멀리서
난 빗물처럼 마음만 펼쳐 보이네
산수국 /문상금
때로 바다에서
산수국을 만났습니다.
일렁이는
잔물결 따라
그대의
빈 자리 마다
물집처럼
떠 있는 산수국
바다 한 번 보면
견딜만하였습니다.
바다 두 번 보면
편안해졌습니다.
내게 산수국 꽃잎같은
흔적을 남게 한 사람
때로 바다에는
쪽빛 같은 산수국이 피나 봅니다.
수국 /강영란
산그늘 하나 발끝에 머물다 옮겨 앉아도 울컥해지는 일인데
가슴에 앉았던 사람 옮겨 앉는 건 얼마나 울컥한 일이겠는가
그러니 그대여 마음껏 아파라
비오는 날에 흰수국 같이
해지는 날에 보라수국 같이
얇은 겹겹
문 닫고 아파라
수국의 아름다운 뜰에서 /은파 오애숙
붉은 수국 피어난
뜰에 매료된 아름다움
무엇과 비교할 수 있으랴
어찌 이리도 연분홍빛
해맑게 휘날리는가
그 옛날 개나리꽃
방실방실 천진난만함에
웃음 짓는 아가 모습 물결쳐
밝고 명랑함의 그 해맑음
가슴에 매료되었지
기억의 산 어귀에
오롯이 군락을 일구워 핀
진홍빛 진달래꽃 그 모습은
젊은 날 애절한 사랑의 기쁨
환희의 송가였던 기억
내 지금 토양에 따라서
얼굴색을 달리하고 있는
아름다운 수국 앞에 있으니
냉담 무정 변심이란 꽃말을
어떤 이가 말하고 있지만
붉게 피고 있는 수국
너의 꽃말 속에 청초했던
그 옛날의 풋풋한 향그럼
이팔청춘 그 꿈의 날개
가슴에 피어나는구려
수국 /김민우
폭염길이 무더워서 누굴 생각해도 미웠다.
하늘은 봐도, 봐도 야속하게 푸르고
땅바닥은 온통 새까매지는데
땅바닥에 붙은 한통속이 온통 새까매지는데
땅바닥에 들러붙는 내 미운 마음이 사실 새까만데
너만은 구레나룻 끝에 송글송글 맺어진 땀방울처럼
툭, 투둑 뭉텅이져 떨어져 내릴 소낙비처럼
하늘을 닮았다.
송이송이 맺힌 작은 하늘들,
내 새까만 마음을 식혀줄 작은 하늘들.
수국이 어렸을 때 /최호일
봄이 머리채를 잡아끌고 다닌다 두 손에 수갑을 차고 날이 밝으면 우는 우리의 날씨 눈을 반쯤
감고 있는 고양이의 잠 A가 Z에게 다가갈 때 다수의 용서 끝에 가끔은 슬퍼지고 소리는 새어 나
가는 것을 막으려고 조그만 틈새로 들어간다 물의 스타킹을 신고 밤으로 만든 옷을 입고
새가 우는 날 신발끈을 고쳐 매고 홀수로 된 날을 피해서 전생에 갔다 짝수를 데리고 갔다 꽃이
피면 머리에 앉은 나비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전생은 코스모스가 해바라기 같고 꽃잎은 시계를 보는 원숭이를 닮았다 시계가 바람에 나부낀다
나는 밤마다 손이 없는 너의 손바닥을 잡았다 얇고 가벼운 잠 속에서 아직 그림이 되지 않은 누드
모델의 오후 오늘은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날씨 수국이 되기에 알맞은 날씨
사람들은 수국을 그린다
수국(水菊)에게 /김세홍
우리 어딘가에서 만나지 않았을까
흙바람 일어가는 유월의 길섶
무슨 기시감으로 발길을 멈추고
나는 그대를 알은체 하는 것인가
옅은 바람 속 홍조 띤 숨결
오래도록 그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이 삶이 끊기지 않는 어느 매듭에서
되풀이 되어 온 기연이 사뭇 수고롭지가 않아
그대 또한 이편 생에서
빈곤하게 떠돌던 날 불러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늘과 맞닿은 인연의 갈피
송이송이 숨결로 다리를 놓아오는
저 길 모퉁이 윤회하는 한 굽이 세상
나를 업어오는 유장한 들숨이 있어
눈멀어 바로 볼 수 없는 그대여
돌아누운 꿈자리엔 어지러운 바람이 불고
향유할 수 없는 마음만 번잡하여라
쪽잠 같은 세월이 분망한 뒤에
언젠가 그대가 있던 길 한번 흔들려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햇살 속으로 쓸려가
그대 업이 가벼워지고 가벼워져 세상 흔적 없을 때
비로소 내 고단함도 멈추지 않을까
우리 어느 길섶에서 다시 만나
무슨 우연으로 이곳을 지나더라도
한동안 내 눈동자에 살아온 그대
희미한 기시감에 미열을 느끼게 되면
그대에게 업혀오는 평안한 날숨을 듣게 되겠지
이 세상 내게로 향해 오는 모든 걸음걸음이
첫 발자국인 그대를 바로 보게 되는 날
내 마음 한자락 꽃 피울 수 있으려나
내 눈길을 찾아온 오롯한 그대
긴 숨결을 받을 수 있으려나
수국 /조병기
생전에 어머니는 수국을 좋아하셨다
선암사 수국처럼
해사하게 곱던 얼굴
아주까리 기름머리
단아하신 쪽빛치마
방그시 뜰에 내려
낮달 하나 품었으리
창포꽃 거느리고
장독가 봉숭아꽃 처마 밑 채송화
올여름엔 모시옷 한 벌 지어 드리리
수국 /박현솔
차오르는 빛깔을 바라보네
꽃망울마다 빛이 넘치고 있어
초록에 하얀색이 고이더니
하늘빛이 고이고, 다시 분홍빛이 고이고
빛깔은 테두리를 둘러 안쪽으로 흘러가고
꽃이 색을 입는 순간은 고요해라
떠날 때처럼 다시 와서 고이는 빛깔들
꽃이 문을 열자 빛이 들어오고
하늘색, 분홍색, 보라색이 스미네
수국이여,
내 것을 버림으로 풍성해진 꽃
나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이룰 수 없는 것들을 버릴 때
오묘한 빛깔이 사방에서 밀려오네
하늘을 닮은,
태양을 닮은 수국이여
홀로 부는 바람에도
그리움으로 안부를 묻는다
떠나간 것들이 모두 돌아오는데
헤어진 것들이 두 손을 내미는데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떠난
너는 왜 돌아오지 않는지
빈자리를 바라보고 있어
네가 서성이던 마당을 보고 있어
함께 바라보던 수평선을 보고서
수국으로 피어나렴
달빛을 보며 글썽이는 눈동자
초록의 눈망울이 어느새 하늘빛으로 물들고
분홍빛으로 어른대고, 보랏빛으로 서성이는데
네가 언제 올지 몰라 빈 뜰만 서성이네
수국 사랑 /나영애
수국 키우기 배워가며
날마다 물 주고 기다린 보람
아담하게 꽃 두 송이 벙글었다
꽃이 피고 퇴색되었을 망정 지지 않는 모습
그와 나 살아온 시간처럼
파란만장하다
당신 처음 만나
열정의 붉은 꽃은 잠시
연둣빛을 주더니
눈물의 남색 빛에 빠질 뻔하다가
백반 처방 두 아이들 덕에
가정의 빛깔은 잃지 않았다
꽃빛인지 나무 빛인지
우리의 여름이 지나고
붉은 피 식어 짐짐해진 지금
수분 빠지고 쭈글거리는
히끄므리한 보랏빛이다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수국 꽃잎이다
수국 꼿질 /강영란
허맹이 문서라도 한 장 받아둘 걸 그랬습니다
바라보다 참고 바라보다 참고
그러다 보면
마음 밖에 둘 날들 있을 거다
거짓말 같은 그 말도
한 번쯤 믿어볼 걸 그랬습니다
내 슬픈 이야기의 끝이 언제나 당신인 것이
때로 따뜻하고 때로 추워서
꽃이 분홍이었다 파래지기도 합니다
수국 꼿질
분홍이 뉘엿에게 덮이는 시간
사랑이 죄가 아니면 이 세상
무엇이 더 죄이겠는가
물어도 대답 없는 꼿이
파랗게 스러집니다
수국이 피어있는 길을 가며 /송주은
청금석 가루
곱게 풀어진 물
은밀하게 머금은 꽃잎들의 군락
이국 모스크의 탑들로 서 있다
하늘 서늘함을 끌어안은
상륜부(上輪部) 연속이
대상의 행렬로 눈 안으로 달려오면
남녘의 물기 머금은 열풍
잠시마나 그림자까지 감춰 버리고
순례객을 삼매에 들도록 하는
사제의 낭송 희미하게 다가와 있다
나는 어느새
수국 그늘 옆에서
세헤라자데의 이야기 속
길 잃은 여행자가 되어 있다
수국은 헛꽃을 피웠네 /장이엽
수국이 헛꽃을 피운 것은 참꽃 때문이었네 암술 수술 총총 박힌 꽃무리가 너무도
작아 벌 나비가 찾지 못할까 봐 보이지 않을까 봐 언덕배기 바람 많은 그곳에 서서
꽃잎 하나하나 다정하게 보듬어 안고 바다를 보면 파란 물을 들이고 노을을 보면
빨강 물을 들이고 탐스러운 헛꽃 송이들 하늘 아래 활짝 펼쳐 놓은 채 오가는 이 눈
코 입 멈춰 세우며 참꽃 열매 뭇별처럼 알알이 영글어가도록 기다려 주었네 흰 등
줄기 야위어 삭아질 때까지 지키고 있었네
제자리에 서 있으려는 몸부림이 그저 삶이었네 비워내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실천이었네
수국 /김도향
백마다 말보다
한 번의 커다란 포옹이
더 좋겠다
울타리 벗어난 헤픈
웃음소리 마음 잡아둘 수 없는
애드벌룬 하늘 아우르는
커다란 음성
대지를 껴안은 커다란 사랑
저것은,
눈 맞추어도 싫지 않는
만월보살님의 큰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