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5 章 깊어 가는 마의 그림자
냉운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한 것은 미세한 음향이 귓전을 스친 직후
였다.
스읏 ―.
백 장 밖에서 들리던 음향은 어느덧 동굴 어귀에서 들려왔다.
산짐승이라면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없다. 누군가 절정의 경공을 시전
하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지독히도 빠른 자다.'
냉운의 얼굴은 살기로 덮여 갔다.
같은 순간,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는 독무가 피어오르는 복마동부
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후후……, 한때 이곳을 지옥이라 여긴 적도 있었지.'
청성복마동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너무도 기이했다.
다분히 원한이 섞인 눈빛, 복마동을 부수어야 직성이 풀릴 듯하면서
도 어떤 상념이 거기 어려 있었다.
복면인은 잠시 복잡한 시선으로 복마동부를 바라보았고, 주저함 없이
안으로 날아들었다.
이미 백독불침의 신체인 듯 그는 독무에도 어떤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능공허도로 보법을 밟으며 동부 깊숙이 날아들었다.
잠시 후 그는 열려진 석문 앞에 섰고, 청망이 번득이는 눈으로 내부
를 둘러봤다. 그리고 그의 눈은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냉운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뜻밖이로군. 마도계의 거마나 백도의 냄새나는 노괴(老傀)가 있을
줄 알았는데…….'
냉운의 시선 역시 복면인의 얼굴로 향했다.
'사기(邪氣)로 뭉쳐진 자다. 내가 만난 어떤 마도고수보다 강한 자다
.'
냉운은 복면인의 두 눈이 청광(靑光)을 흘려낸다는 데 적이 놀랬다.
'청색마안공(靑色魔眼功)을 익힌 흔적이 분명하다.'
청색마안공은 천축마공의 한 부류로 극상의 경지까지 도달하면 맨눈
으로 태양을 볼 수 있고, 안공만으로 상대의 눈을 멀게 만들 수 있게
한다.
눈빛이 완연한 푸른빛이라는 건 복면인의 내공이 두 갑자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냉운은 조금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복면인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지금 그는 팔 성의 내공으로 냉운의
눈을 직시하고 있다.
눈에서 흐르는 빛은 가히 청섬(靑閃).
내공이 약한 자라면 눈알이 타 버릴 듯한 통증을 느껴야 하는데 상대
는 여전히 담담한 눈길로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그를 긴장케
하는 것이다.
'으음, 어린놈이 나와 내공이 비슷하다니…….'
그는 답답한 눈길로 냉운을 바라보다 슬쩍 눈길을 청성은옹에게 향했
다. 왜일까, 그의 눈빛에 원한의 불길이 일어나는 것은?
냉운은 그것을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은옹과 원한이 있는 자로군.'
냉운은 그렇게 단정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어이해 여기 왔소?"
"내가 물을 말이다!"
복면인은 차게 말하며 냉운을 향해 일지(一指)를 쳐냈다.
너무도 기습적인 공세.
뇌전을 방불케 하는 지력이 냉운의 심장을 파고들 듯 폭사되어 나갔
다.
이런 기습은 벌써 수차례 성공한 바 있다. 상대에게 공격할 틈을 주
지 않으면 승산이 거의 십 할이라는 것. 이번에도 상대는 속수무책으
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복면인은 냉운의 가슴이 피범벅으로 변하는 걸 상상하며 조소를 띠는
데, 바로 그 순간 냉운의 우수가 슬쩍 흔들려졌다. 지력이 심장을 관
통하기 바로 직전에.
그리고 복면인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력이 허공을 찌른 듯 무산되었고, 항거할 수 없는 잠력이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큭!"
결국 비명은 복면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쿵! 쿵! 쿵!
그는 손가락이 아스라지는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족인을 새긴 채 뒤
로 세 걸음 물러난 후에서 몸을 바로세울 수 있었다.
"이, 이럴 수가……?"
그는 냉운이 자신의 지력을 격파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듯 황망한
눈빛을 띠었다. 그리고 공포의 느낌이 전신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하하……, 그 정도 실력으로는 생사판관(生死判官)인 양 멋대로 행
동할 수 없다. 어떻게 여기 왔는지 말해 봐라!"
냉운은 뒷짐 지며 그제껏 담담하던 두 눈에서 혁혁한 신광(神光)을 폭
사해 냈다.
번갯불을 능가하는 눈빛이었다.
'내공이 오기조원의 경지에 이르렀군.'
복면인은 그제서야 냉운의 내공이 상상을 초월했음을 느끼며 손을 등
뒤로 갖다댔다.
그가 검을 뽑으려는 순간, 냉운이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성격이 너무 급하군. 나는 원한이 없는 사람과는 싸우지 않는 사람
이다."
"괴이한 놈이로군. 그렇다면 지금 원한을 만들어라!"
"하하……, 어떤 원한을 만들면 되겠느냐?"
"쳇! 어린놈이 말할 때마다 비위를 긁는군."
복면인이 눈알을 부라리며 격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수라궁을 청성에서 쫓아낸 게 네놈 짓이겠지?"
"그렇다."
"흐흐……, 수라신궁과 적이 되다니…… 보기보다는 간이 크군."
"수라신궁이 두려우냐?"
"천만에! 수라신궁 따위는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어인 일로 청성파 안에 들어왔느냐?"
"흐흐……, 내가 물을 말이다. 네놈이 대체 누구이기에 청성파를 찾
아 수라신궁 고수들을 죽였는지 알고 싶다."
"나는 냉운이라는 사람이다. 청성파에 온 이유는 알 필요 없다."
냉운이 꾸짖듯 말하는 사이 복면인의 눈빛이 여지없이 흐트러졌다.
마음속에 심한 격동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냉, 냉운이라고?"
복면인이 놀라워하며 냉운의 이름을 되새겼다.
"하하……, 나를 아느냐?"
"무당(武當) 백우자(白羽子)의 팔을 자른 놈이 네놈이구나!"
백우자라는 자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는 냉운이나 팔을 잘랐다는 말
에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유화선자 일타운을 만나러 왔던 마사자의 팔을 자른 적 있지 않은가.
'이 자 역시 신비마제의 부하란 말인가?'
냉운의 얼굴이 굳어졌다.
신비마제가 나타난 것은 불과 일 년 남짓, 그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바 없으나 그의 무공은 이미 천하제일로 알려져 있다.
마도의 거마들을 수족으로 부리는 자,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눈앞의 복면인이 신비마제의 부하라면 그에 관한 소문은 오히려 과소
평가된 것이리라.
'신비마제가 누군지 모르겠군. 능히 일파의 수장이 될 자를 수하로
부리고 있으니…….'
신비마제에 대한 궁금증이 강하게 일어났다.
복면인은 냉운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게 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 문득 눈에 기광이 피어올랐다.
"으음, 이제 보니 네놈의 얼굴이 내가 증오하고 있는 한 녀석의 얼굴
과 아주 흡사하군."
"내가 누구를 닮았단 말이냐?"
"흐흐……, 청성파 안으로 들어온 것으로 미루어 짐작한다면……."
복면인의 음성은 너무도 차가워졌다.
"네놈은 소주 냉가장 사람이 아니냐?"
냉운에게 충격을 주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용모에서 냉가장을 알아내다니……. 선친과 아는 자란 말인가?
'
냉운은 입술을 질끈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는 냉가장주 냉운이다."
순간, 복면인의 눈에서 사라졌던 청광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원한을 풀 수 있겠군. 네 아비가 일찍 죽어 철천지한을 풀지
못했는데……."
복면인이 악랄히 말하며 검자루를 바짝 움켜잡았다.
"잠깐! 가친을 안단 말이냐?"
냉운이 흥분되어 묻자, 복면인이 검자루를 두 치 정도 잡아빼며 이글
이글 타는 눈빛을 던졌다.
"네 아비는 나의 일생을 망쳤다. 그뿐이 아니다. 이 사매(師妹)를 죽
게 한 원흉도 네 아비다!"
"이, 이 사매라니?"
"퉤!"
복면인은 더 말하기 싫다는 듯 침을 뱉으며 검을 길게 끌어냈다.
스르르릉 ―!
백광(白光)이 눈을 찌르는 가운데 무지개 같은 백색 검기가 일어나
냉운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죽어라!"
빛살처럼 다가서는 검파.
하나, 그보다 빠른 것은 냉운의 몸놀림이었다.
냉운은 미끄러지듯 옆으로 일곱 걸음 움직였고, 검초는 애꿎은 허공
을 유린하고 말았다.
'이럴 수가? 아직 그 누구도 피하지 못한 필살검(必殺劍)이 실패로
돌아가다니……. 설마 이놈의 무공이 주인 정도란 말인가?'
복면인은 진짜 겁을 먹은 듯 검을 안고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났다.
"누, 누구의 전인이냐?"
복면인은 냉운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눈치였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더러운 본색이 드러나는 순간이
기도 했다.
냉운은 그의 비겁함을 꾸짖기보다 왜 아버지 냉엽문이 욕을 들어야
하는지 알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내가 누구냐는 것은 이미 밝히지 않았느냐? 이제 네가 누구이냐를
밝힐 차례다."
냉운은 중얼거리듯 말하며 복면인 쪽을 응시했다.
복면인은 냉운의 눈빛에 공포를 느껴야 했다.
냉운의 눈빛은 마공을 금제(禁制)하는 신위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불사신공(不死神功)의 특이한 효능 중 하나였다.
복면인은 압도당함을 느끼며 뒷걸음질쳐 갔다.
"떠나지 못한다."
냉운은 그를 놓아 줄 수 없어 얼른 문 쪽으로 날아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에잇!"
복면인이 양 소매를 어지러히 흔들어대자, 소매 속에서 붉은 독분(毒
粉)이 쏟아져 나와 석실을 가득 메웠다.
"고약한 수작이군."
냉운은 허공에서 몸을 정지시키며 쌍장에서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일
으켜 냈다.
꽝!
석실 안이 화끈 달아올랐다.
석실 안을 가득 덮었던 붉은 독가루가 화광(火光)에 휩싸였다가 흔적
도 없이 사라져 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신비한 복면인도 석실을 벗어나 자취를 감춘 후였
다.
"음……."
냉운은 복면인의 신법이 지극히 쾌속하다는 데 놀라워했고, 그의 신
법이 냉운이 익히 알고 있는 한 가지 신법과 유사하다는 데 놀라워했
다.
'비룡신법(飛龍身法)과 비슷한 신법이었다.'
냉운은 복면인이 비룡신군의 비룡경 안의 신법을 시전했다는 것을 알
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비룡경 안의 무공을 쓰다니…… 대체 누구일까?'
냉운이 복면인의 뒷모습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네, 네가 냉엽문의 아들이냐?"
떨리는 말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청성은옹이 그 사이 정신을 되찾고 냉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정순한 내공이군. 다른 사람이었다면 사흘 내내 잤다가 깨어났
을 텐데…….'
냉운은 청성은옹의 내공에 감탄해하며 청성은옹 앞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와라. 네가 냉엽문의 아들이라니……."
청성은옹이 약간 처량해진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냉엽문은 나를 양부(養父)로 섬겼었다. 네가 냉엽문의 아들이라면
나를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할, 할아버지!"
냉운은 청성은옹이 아버지를 매우 잘 알고 있다는 데 감격해하며 청
성은옹 앞에 가 무릎을 꿇었다.
청성은옹이 멀어 버린 눈을 들어 허공 쪽을 응시하며 추억에 젖은 표
정이 되어 말했다.
"황제가 아니었다면…… 너는 나의 외손자가 되었으리라!"
"예?"
대체 무슨 말인가?
냉운은 벌어진 입을 쉽게 다물 수 없었다.
"냉엽문이 노부의 외동딸 옥경(玉卿)이와 좋아하던 사이였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옥, 옥경이라니요?"
"허허……, 노부는 두 제자와 딸아이 하나를 키웠다. 노부는 딸아이
를 두 제자 중 하나에게 시집보내려 했는데, 냉엽문 네 아버지 덕에
다 틀어졌지!"
천성은옹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냉운은 과거 아버지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청성은옹의 말을 경청했다.
"네 아버지가 황제의 눈에 들어 정령공주를 아낙으로 취하지 않았다
면…… 너는 나의 외손자가 되었을 것이다."
"선부와 할아버지의 따님이 사랑하던 사이였군요?"
"인연이었지. 옥경이는 네 아버지를 보는 순간 반하고 말았다. 그래
서 노부를 찾아와 두 사람 사이가 맺어지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하
나,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결합이었다. 네 아버지는 황제의 누이
동생 정령공주와 정혼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명이니 어쩔 수 없었다.
"
"아……."
"냉엽문은 결국 노부의 딸아이를 아내로 맞지 않았다. 결과, 노부의
딸아이 옥경이는 평생 수절하며 살기로 맹세했고…… 그러다가 참화
에 희생되었다."
"참회라니요?"
"……."
청성은옹은 쉽게 말하지 않았다.
냉운은 청성은옹이 말하기를 기다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 네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구나!"
청성은옹이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으로 보아 말하기가 죽기보다 더 괴로움에
틀림없었다.
"조금 전 여기 다녀간 자가 누군지 아느냐?"
"모, 모릅니다."
"그 녀석이 왜 여기 왔는지 모르느냐?"
"모릅니다. 할아버지는 그가 누군지 아십니까?"
"안다. 그 녀석이 노부를 죽이기 위해 여기 왔다는 것을……."
청성은옹이 눈물을 떨구었다.
'그 사람과 잘 알고 계시는군.'
냉운은 노기인의 눈물에 수많은 번뇌가 서려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
다.
"그, 그 녀석은 방호(方浩)라고 하는 아이다. 원래는 고아였지. 노부
가 주워 기르지 않았다면 지금쯤 거지 두목이 되었을 것이다."
"할, 할아버지가 주워 길렀습니까?"
"그 녀석은 보통 청성신협(靑城神俠)으로 불린다. 네 아버지가 옥경
이의 마음을 빼앗지 않았다면 지금쯤 청성 장문인이 되었을 아이다."
청성신협 방호는 죽은 것으로 소문난 사람이다.
그를 죽인 사람은 청성은옹이라 했다.
청성은옹이 자신이 가장 아끼던 제자 청성신협 방호를 죽인 이유는
아직 비밀이었다.
"그 녀석은 옥경이를 끔찍이도 좋아했었다. 옥경이도 그리 싫은 눈치
는 아니었다. 한데, 냉엽문이 옥경이의 마음을 뺏는 통에 만사가 틀
어지고 말았다. 그 녀석은 네 아버지를 원망했고, 옥경이를 원망했다
. 그러다가…… 큰일을 저지르고 노부 손에 무공을 잃고 청성산을 떠
나야 했다."
"큰일이라니요?"
"짐작해 보면 알 일이지……."
청성은옹이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이십 년 전, 어느 그믐날이었다.
청성은옹의 딸 옥경이 거처에서 벌거벗은 채 하반신에서 피를 쏟아내
며 신음한 일이 있었다.
그녀의 하체는 억센 행위로 인해 형편없이 훼손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끔찍스런 일이었다. 이옥경은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열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일은 청성산 안에 살고 있는 사람도 모르는 비밀지사였다.
천하의 패륜아는 놀랍게도 이옥경이 사형(師兄)이라 부르며 따랐던
청성신협 방호였었다.
방호는 이옥경을 능욕하고 도망치다가 백 리를 못 가서 청성은옹과
강남대협에게 잡혀야 했다.
강남대협은 청성신협을 죽이고자 했으나 청성신협을 다섯 살때부터
기른 청성은옹은 차마 살수를 전개할 수 없었다. 그는 죽이는 것을
포기하고 청성신협의 무공을 폐한 후 살려 주는 쪽을 택했었다.
방호는 그날 이후 죽은 사람으로 소문나게 되었다.
한데, 이십 년만에 나타났으니…….
청성은옹은 착잡해 하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은 세상을 원망하고 있다. 누군가 그 녀석에게 은혜를 베풀
어 다시 무공을 사용하게 해 준 것 같다."
"배후 인물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것이다."
"왜 그를 구해 주었을까요?"
"아, 방호라는 아이는 지극히 단순한 아이다. 어떤 자가 그의 성질을
알고 이용하기 위해 그랬을 것 같다."
"음……."
냉운은 문득 신비마제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이심전심이랄까?
청성은옹이 신비마제를 입에 올리며 말을 계속했다.
"최근 신비마제란 자가 나타나 각 파의 반도(叛徒)들을 모아 극악한
짓을 저지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수라신궁에 의해 이 안으로 끌려와
죽어 간 협사들이 해 준 말이니, 사실일 것이다."
지하 감옥을 덮고 있는 백골은 그리 오래 된 백골이 아니었다.
청성파 사람들에 의해 죽은 사람들이 아니고 수라신궁에 의해 죽은
사람들이었다.
청성은옹은 그들이 죽기 전 한 말에서 당금 강호의 정세에 대한 해박
한 지식을 얻게 됐음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원한을 가진 자들을 규합해 악독한 일에 앞장세운다면 강호는 큰 풍
파를 맞게 된다. 답답하구나……."
청성은옹이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떨구었다.
'비룡신군이 건재하다면 이 난세를 극복할 텐데…….'
청성은옹은 폐물이 된 신세가 비참한지 다시 눈물을 떨구었다.
"할아버지!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냉운은 힘있게 말하며 손을 바짝 세워 청성은옹을 붙잡아 맨 한철삭
을 간단히 잘라냈다.
사삭 ― 삭!
한철삭이 두부같이 잘라지자 청성은옹은 흠칫 놀랬다.
"너의 내공이 이백 년 수위를 훨씬 웃돈단 말이냐?"
"하하……, 할아버지의 매같이 날카로운 눈을 속이기는 힘들군요. 사
실 당금 강호에서 저만한 내공의 소유자는 찾기 힘듭니다."
"음, 너는 어렸을 때 오음절맥에 걸려 영약으로 숨을 부지했다고 알
고 있는데, 어이해 절세고수가 되었느냐?"
"모두 하늘의 보살핌이 있어서지요."
냉운은 낭랑히 말하며 청성은옹을 들쳐 업었다.
청성은옹은 살아났으나 다시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었
다. 오래 못 가 죽을 운세이기도 했다.
그는 영약 삼선단의 힘이 계속될 때까지 살다가 아주 조용히 세상을
떠나야 할 신세였다.
청성은옹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허허……, 네 덕에 다시 사는구나. 강호에 나가 늙은 친구들을 만나
노부가 훌륭한 아이를 손자로 얻었다고 자랑해야겠다."
"저도 할아버지같이 훌륭하신 분을 양할아버지로 모시게 된 것을 여
러 사람에게 소문낼 작정입니다."
냉운은 씩씩하게 말하며 구름을 타고나는 듯한 신법을 시전해 지하
감옥을 쾌속히 빠져나갔다.
청성은옹은 자신이 움직이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냉운의 신법이 워낙 정교한 탓이었다.
휘휙!
냉운은 경미한 파공성을 끌며 텅빈 청성파를 벗어나 녹음에 젖어 있
는 청성산 장인봉 아래를 향해 나는 듯 움직여 갔다.
청성은옹은 그의 등에 업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냉운이 슬며시 혼혈을 점했기 때문이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이얏!"
"도망가지 못한다! 쓰러져라!"
냉운의 고막을 때리는 살기에 찬 목소리가 있었다.
"더 이상 나를 핍박하지 마라!"
낯익은 말소리가 소란스런 가운데 유독 크게 들려왔다.
'귀검사(鬼劍士)가 곤경에 처해 있군.'
냉운은 신법을 돋우어 소리난 곳을 향해 흑선(黑線) 하나를 길게 그
었다.
숲 안.
다리를 절뚝절뚝거리며 일곱 황의승(黃衣僧)의 협공을 피해 나가고
있는 흑의청년 하나가 있었다.
휘휘휙!
황의승들의 도법(刀法)은 구름을 베어낼 듯 뛰어난 것이었으나 흑의
청년의 옷자락 하나 베지 못했다.
흑의청년의 보법은 강호에서 실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무영신보(
無影神步).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 신법을 전개하고 있으니 도법이
무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의승 백 명이 있다 해도 그를 가둘 수 없을 것이다.
"나를 화나게 하지 말라!"
절름발이 청년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듯한 표
정이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는 스르르 풀기를 거듭했다.
"흐흐……, 절름발이! 도망치는 재간만 있구나!"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한다!"
황의승들은 흑의청년의 시체를 보아야만 만족하겠다는 듯 살초를 거
두지 않았다.
도막(刀幕)이 점점 드세어져 갔다.
흑의청년이 비틀비틀 도광 속을 움직여 가고 있을 때였다.
"귀검사! 무슨 일인가?"
저 멀리서 다가서는 흑의인 하나가 있었다.
등에 늙은이 하나를 업고 있는 아주 영준한 약관 청년이었다.
"주인!"
절름발이 청년이 반가워 외치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따당!
계도(戒刀) 두 자루가 그의 옷자락에 의해 잘려져 나가며 청년의 몸
이 찰나지간 전권을 벗어났다.
절름발이는 십장을 날아 청년 바로 앞에 떨어져 내리며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이제 하산하십니까?"
"어이된 일인가?"
"별일 아닙니다. 조무래기들이 시비를 걸어……."
"보통 놈들은 아닌 듯하군. 한데, 왜 싸움을 끝내지 않는가?"
"쓸데없이 살상하지 말라는 것이 바로 주인님의 명령이기에 이제껏
손을 쓰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명을 내리신다면 이 자들을……."
절름발이는 귀검마성의 절학 귀검팔절식을 익힌 냉가장의 충복 귀검
사였다.
노인을 등에 업고 나타난 사람은 물론 귀검사의 주인이자 냉가장의
젊은 장주인 냉운이었다.
냉운과 귀검사가 몇 마디 나누는 사이 일곱 황의승들이 승포 자락을
날리며 두 사람 근처를 완전히 포위했다.
"으흐흐……, 새파란 애송이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놈이었군."
황의승들은 승려답지 않게 흉악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승포 자락에는 손이 여덟 개이고 머리가 네 개인 마두불상(魔
頭佛像)의 수가 놓아져 있었다.
"너희들은 우리 부처님들의 눈에 뜨인 것을 후회해야 한다."
황의승들이 다시 계도를 들어올렸다.
냉운은 입맛 쓰다는 표정으로 귀검사를 향해 물었다.
"이들이 어찌 이렇듯 살기등등하게 날뛰는가?"
"속하도 모르겠습니다. 저들은 비슷한 옷차림을 한 수십 승려 중 떨
어져 나온 한패거리입니다. 근처를 뒤지던 중 속하를 발견하게 되자
다짜고짜 시비를 걸었습니다."
"급한 일이 있는 듯하군. 어서 내막을 알아봐라."
"예."
"좋지 않은 놈들이니, 손에 사정을 봐주지 않아도 된다!"
"주인께 전수받은 신검법을 써 볼 기회가 없어 심심했는데, 마침 잘
되었습니다."
귀검사가 웃으며 허리를 펴는 찰나, 한 자루 계도가 등을 가를 기세
로 다가왔다.
쌩!
황의승 하나가 귀검사의 등판을 향해 직도황룡(直屠黃龍) 일 초를 시
전해 냈다.
위맹한 가세로 다가서는 계도. 하나, 귀검사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
었다.
"승복만 걸치지 않았다면 백정으로 행세할 놈이군."
귀검사가 허리를 비스듬히 틀었다가 왼손을 슬쩍 내저었다.
계도를 내리치던 황의승은 귀검사의 몸이 슬쩍 움직여지는 동시에 손
바닥 그림자가 다가서자 놀라 계도를 횡단무산(橫斷巫山) 백사토신(
白蛇吐身) 수법으로 변화시켜 빠르게 시전해 냈다.
휘휙!
칼 그림자가 현란히 뿌려지는 찰나.
"쓰러져라!"
귀검사가 계도 그림자 속으로 뚫고 들어가며 손바닥을 쳐내자 피가
폭포수같이 분출됐다.
펑!
"으악!"
기선을 잡고 계도를 휘둘러 대던 황의승이 목을 움켜쥐며 실 끊어진
연처럼 오장을 날아올랐다.
코와 입, 그리고 눈두덩이에서 선혈을 뿌리는 것으로 보아 단 일 장
에 오장육부가 가루로 변해 죽었음에 틀림없었다.
"신통치 않은 놈이군."
귀검사는 입맛 쓰다는 표정을 하고 살아 있는 여섯 황의승을 휘둘러
봤다.
황의승들은 전과 달리 사색이 되어 있었다.
볼품없는 절름발이의 본실력은 그들의 상상을 수백 배 초월하는 절세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귀검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로 말하면 냉가장의 호법 귀검사라는 사람이다. 내 뒤에 계신 분
이 바로 냉가장의 장주님이시다. 어서 절을 하고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지 않으면 지금 내 손에 피를 뿌리고 죽어 간 놈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냉, 냉가장……."
황의승들이 언제 냉가장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겠는가!
"썩 무릎을 꿇지 못할까!"
귀검사가 진기를 모아 외치자, 여섯 자루 계도가 땅에 떨어져 뒹굴며
목숨을 구걸하는 소리가 시작되었다.
"살, 살려 주십시오."
"고인(高人)을 몰라뵙고……."
황의승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
렸다.
귀검사가 짐짓 위엄을 부리며 말했다.
"너희들은 어이해 여기 오게 되었느냐? 그리고 무엇을 찾아다니는지
소상히 말해 봐라."
"저, 저희들은 잔혼사의 삼급(三級) 승인(僧人)들입니다."
승려 중 하나가 대표로 말했다.
잔혼사는 강호 삼대거파 중 하나였다.
잔혼사에 몸담고 있는 승려들의 수는 칠천(七千)에 달했다.
그 중 태반이 삼급 승인이고, 일천 정도는 이급 승인이었다.
그리고 일백 명 정도 절세고수가 일급 승인이고, 열 명 정도의 호법
승(護法僧)들이 있었다.
대부분 살인을 밥먹듯 즐기는 자들로 원래는 죄를 짓고 도망쳐 다니
던 도적의 무리들이라 했다.
하나, 잔혼사의 승려들과 싸운다는 것은 금기화된 일이었다.
그럴 경우 십중팔구 아주 무서운 보복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거쳐간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약탈의 도가 한계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의승들은 일단 목숨을 건지고 나중 보복할 속셈으로 솔직히 왜 청
성산에 오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했다.
"저희들은 운남분사(雲南分寺)에서 상승절예를 터득하시고 하북본사(
河北本寺)로 회사(廻寺)하시는 냉면활불(冷面活佛)의 수행승들입니다
."
냉면활불이라는 자는 천하가 알아주는 색마(色魔)였다.
그의 나이는 스물다섯.
하나, 그에게 정조를 잃은 여인의 수는 벌써 일천이 넘었다.
냉면활불은 잔혼사 주지승인 잔혼악승(殘魂惡僧)의 아들이었고, 잔혼
사의 소장문(少掌門)이었다.
그는 십 세가 되기 전부터 여색(女色)에 빠졌고, 여인을 안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였다.
이 년 전, 잔혼악승은 아들이 여색에 빠져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는
것을 우려하다가 묘안을 궁리해 내게 되었다.
그것인즉, 냉면활불을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잔혼사 운남분사로 보내
마공을 연마케 한다는 것이었다.
냉면활불이 지난 이 년 간 과연 여인을 곁에 두지 않고 마공 연마에
만 전념하겠느냐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간 냉면활불은 이 년 간의 마공 수련을 마치고 잔혼사로 돌아오
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근처에서 눈이 번쩍 뜨여지는 일에 처해지게 된 것이었다.
"오늘 새벽녘이었습니다."
황의승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어 갔다.
"청성산을 우회하여 행진을 계속할 때였습니다. 일남일녀가 저희들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다 외상(外傷)을 입고 있었는
데, 그 중 흰옷을 입은 여인의 미색이 지극히 뛰어난 것이 소장문 냉
면활불님의 눈에 뜨이게 되었습니다."
"백, 백의미녀?"
냉운이 흠칫 놀랬다.
'청성파로 들어가려다가 다시 실패한 제소옥과 염방채가 아닐까?'
냉운은 한순간 마음의 동요를 느끼고 말았다.
사실 염방채에 대한 그리움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
었다.
비록 내심을 숨기고 있으나.
황의승려가 겁먹어하며 입을 뗐다.
"그, 그 여인은 놀랍게도 천하삼미(天下三美)의 으뜸이라는 소의금랑
(素衣金 )이었습니다."
냉운의 생각대로였다.
"그, 그래서?"
냉운은 화급한 투로 말하기를 재촉했다.
"소의금랑을 잡기 위해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 그와 함께 있는
천외옥룡이라는 자의 무공이 지극히 뛰어나 수십 명이 죽고 말았습니
다. 그들은 서로 의지해 가며 혈로(血路)를 뚫고 도망쳤습니다."
"어, 어느 쪽으로 갔느냐?"
"청성산으로 들어왔습니다. 냉면활불께서는 직접 그들의 뒤를 쫓는
동시에 고수들을 풀어 근처를 샅샅이 뒤지게 했습니다. 저희들도 그
런 명령에 따라 근처를 뒤졌던 것입니다."
"소의금랑은 많이 다쳤느냐?"
"예. 천외옥룡은 경상이었으나 소의금랑은 천외옥룡 등에 업히지 않
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천외옥룡이 허둥댄 것
으로 보아 그녀의 상처는 촌각을 다투는 것에……."
황의승의 말이 거기 이를 때였다.
펑!
산 동쪽에서 화염을 뿜어내며 산화되는 폭화 하나가 있었다.
"엇?"
황의승이 안면 근육을 씰룩거리며 급히 말했다.
"그, 그들을 발견한 모양입니다. 저것은 잔혼사 특유의 신호입니다."
냉운은 폭화가 일어난 근처, 염방채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데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귀검사를 바라보며 전음입밀로 말했다.
"곧 나를 따르거라."
냉운은 단잠에 빠져 있는 청성은옹의 몸뚱이를 귀검사에게 건네준 후
무영신법의 구결을 외우며 훌쩍 날아 올라갔다.
휙!
냉운은 한순간 검은 점 하나로 변했다.
잔혼사 삼급 승인들은 냉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딱 벌렸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목격한 듯.
"흐흐…… 너희들 중대가리들, 정말 운이 좋았다."
귀검사는 다리를 절뚝절뚝하며 냉운이 사라진 쪽을 향해 비호같이 움
직여 갔다.
휘휙!
귀검사의 신법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냉운은 귀검사가 한쪽 다리를 전다는 데 배려해 무영신법의 모든 정
화를 전수해 주었지 않았던가!
귀검사는 무림에서 두 번째 가는 경공술의 소유자로 불리어 부끄러움
이 없을 사람이었다.
첫째는 물론 냉운이었다.
무영천존의 경공은 천하에 독보(獨步)하는 절세경공이었다.
무영천존은 무림기인전 안 지옥도에서 죽기 백이십 년 간 경공 하나
만을 연구했던 기인이었다.
그의 경공법은 수십 가지에 달했다.
어떤 것은 무영천존마저 익히지 못하고 구결로만 남긴 것이고, 어떤
것은 냉운도 완벽히 익히지 못한 심오난측한 경공법이었다.
경공 일면에서는 논한다면 불사검제도 제일인자 자리를 무영천존에
내주어야 할 것이다.
냉운은 미친 듯 치달려갔다.
급히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냉운은 자신이 염방채를 자신의 목숨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진실을 찾아 빠르게 움직여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