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인들은 어떤 의료혜택을 받았나
김미엽(성신여대 박사과정)
고려의 옛 풍속은 사람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고 귀신을 섬길 줄만알 뿐이고
저주하여 이겨내기를 일삼는다... 1118년(예종 13)에 고려 사신이 와서 글을 올려
의원을 보내 의술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자 황제가 허락하여 남줄을 고려에 보냈
는데 두 해 만에 돌아왔다. 그 뒤로부터 의술에 능통한 자가 많아져 보제사의
동쪽에 약국을 세우고 세 등급의 관원을 두니, 첫째 태의, 둘째 의학, 셋째 국생
이라 하여 푸른 옷차립에 나무로 만든 홀을 들고 날마다 임무를 다하였다.
윗 글은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의 기록으로 고려는 송나라의 도움으로
의술을 익혀 의료혜택을 받게 되었음을 알려 주는 기사이다. 그렇다면 고려 사
람들은 병이 생겼을 때 서긍이 언급한것처럼 약을 먹지 않고 귀신만을 섬겼을
까? 또 예종 때에 와서야 송나라의 도움으로 의원과 약국이 생겼을까? 지금이야
의료보험이 국민복지의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행해지므로 병원과 약국이 멀지 않
게 느껴지고 있지만, 당시 고려 사람들은 어떻게 병을 치료했으며, 병원과 약국
은 어떠하였을까?
각종 병원
고려를 세운 왕건은 건국 초기부터 의원을 지방에 파견하여 하픈 자들을 치료
하게 하였다. 본격적인 의료기관인 상약국과 태의감은 목종 때인 1000년경에 이
미 설립되었다. 그러므로 고려가 중국에서 의술을 배워 처음 의사가 생겼다는
<고려도경>의 기록은 과장된 것이다.
상약국은 주로 왕실의 건강을 책임지는 일을 담당하였다. 태의감은 왕실뿐만
아니라 전염병에 대한 치료, 약품 제조, 일반 관리들의 건강관리를 담당하였다.
요즘 각 기관에서 건강진단을 하는 것처럼 성종 때에는 문관 5품 이상 무관 4품
이상인 고급관리로서 질병이 있는 자를 소속 관청에서 보고하여 태의감에서 치
료하게 하였다. 또 새로 임명된 자 가운데 신병이 있어서 휴가를 청하면 6품 이
상은 태의감에서 치료하기도 하였다.
이 두 기관은 개경에 있었는데 국가의 최고 의료기관으로서 왕실내의 병을 치
료하는 것이 최우선 임무였다. 따라서 문종이 중풍에 걸렸을 때 이 두 곳 의원
들이 총동원되어 온갖 의술을 행하였다. 병에 차도가 없자 송나라와 일본의 의
사를 구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치료하지 못했다.
이 외에도 1022년(현종 13)에 설치되어 태자의 의료를 담당하였던 동궁의관,
문종 때 설치되어 임금이 사용할 약을 관장하였던 한림원의관, 지금의 군의관에
해당하는 군의가 있었다.
의료혜택, 민중에게는 먼 길
앞에 언급한 기관들이 중앙에서 지배층의 질병을 치료하였다면 일반 백성을
상대로 의료행위를 하였던 것으로는 동, 서배비원과 제위보, 혜민국을 들 수 있
다. 동배비원과 서대비원은 1036년(정종 2)에 개경에는 2곳, 서경에는 1곳을 설
치하여 의원을 전속시켰다. 제위보는 963년(광종 14)에 처음 설치되어 빈민과 행
려환자의 구호와 치료를 담당하였다. 혜민국은 1114년(예종 4)에 전염병을 치료
하고 약을 판매하기 위해 설치된 약국이었다.
지방의 경우에도 일찍부터 수령과 함께 의사를 파견하였고, 보건소 격인 약점
을 설치하였다. 930년(태조 13) 각 지방에 의학원을 두었으며, 그 후 동경(경주)
과 남경(서울)에도 의사를 배치하였다. 문종 때에는 대도시에는 의사 1명씩을 파
견하였고, 국경지대에도 의사 1명을 파견하여 질병치료를 담당하게 하였다.
약점은 전국적으로 설치하였는데, 인구에 비례하여 약점사라는 관리를 배치하
였다. 약점사는 1018년(현종 9)에 큰 지역은 4명, 중간 지역은 2명, 작은 지역은
1명씩 배치하였다.이들 약점의 경비는 국가에서 지급하였다.
그러나 동, 서대비원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지적과 지방에 파견된 의사
들이 부잣집만 찾아가 진료하고 가난한 집은 치료를 제대로 해주지 않아, 원래
국가에서 의사를 설치한 본분을 잊고 있다고 개탄하는 글이 임금에게 보고되었
을 정도로, 일반 백성이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것은 쉽지 않은 듯하다.
전문의, 하늘의 별따기
현재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국가에서 실시하는 의
사면허시험에 합격하여야 한다. 고려시대 의사가 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과거를 통하는 방법으로 기술고시격인 잡업에 합격하여 의사가 되는 것
이다. 958년(광종 9) 처음 시작된 과거에 의업이 있을 정도로 고려국가는 초기부
터 의사 양성에 관심이 많았다. 이후 1136년(인종 14)부터 태의감에서 예비시험
을 통해 1차 합격자를 뽑고, 그들을 교육하여 다시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다. 이
때 시험과목은 현재의 내과에 해당하는 의업과 외과에 해당하는 주금업으로 나
뉘었다. 시험을 보았던 책은 다음과 같다.
의업: <본초경><명당경><맥경><침경><난경><구경>
주금업: <본초경><명당경><맥경><침경><유연자방><창저론>
이 책들은 대부분 중국의 의학서로서 통일신라기에 우리 나라에 들어왔던 것
으로 추정되며, 현재도 한의학에서 기본 서적으로 학습되고 있다. 그러나 시험과
목이 너무나 어려워서 시험에 응시하는 자가 매우 적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의료
시험에 합격하기가 무척 힘들었고, 이에 의한 의사 양성은 수월하지 않았던 것
으로 보인다.
의사가 되는 또 다른 하나의 길은 도제교육을 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
의한 양성은 민간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뛰어난 의술을 통해 전격적으로 궁주
의 의사로 박탁되었는데, 대부분 의술은 가업으로 삼고 있었다. 충선왕 때 활약
한 설경성과 무신집권자인 최이의 다리종기에 고약을 만들어 주어 치료 하였던
임정의 처가가 그 예이다. 이 외에도 사찰에서 전해 내려오는 불교의학을 전수
받은 경우도 있었다. <고려사>열전에 입전되어 있는 이상로는 승려에게서 의술
을 배워 의종의 발에 난 병을 침으로 고쳤으며 충혜왕 때 활약하였던 승려 복산
은 충혜왕과 관계하여 임질에 걸렸던 황씨를 치료하기도 하였다.
신토불이 의학서, 평균수명 늘리다
일반 고려 백성은 어떤 수준의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까? 동양 의학은 서양의
의술처럼 임상학적인 시술보다 약재의 배합을 통해 약을 지어서 병을 치료한다.
따라서 그러한 사실을 담은 의서를 통해 당시 의술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
다.
현재 고려의 의학서가 남아 있는 것은 극히 적다. 그러나 당시 기록에 의하면
많은 의학서가 인쇄되거나 수입되어 유통되었다고 한다. 1091년(선종 8)에는 전
란으로 많은 서적이 없어진 송나라가 오히려 고려사신을 통해 중국에 없는 서적
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그 중에는 의학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좋은 의학서라 하더라도 그 책에 사용되는 약재가 우리 나라의 것이 아
니면 약의 처방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고려의 경우 중국의 의서에
의지하였던 만큼 약재의 수입을 중요시하였고, 이러한 모습은 <고려도경>에 “
약재만은 현금으로 장사한다”는 기록과 100여 가지의 약재를 수입한 문종 때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약재를 사용하는 의학책의 간행은 비싼
수입약재를 사용할 수 있는 일부 지배층의 질병만을 치료하는 수준에서 이제 일
반 백성들까지도 의료의 혜택을 넓힐 수 있는 아주 획기적인 일이었다.
고려의 의학책으로서 제일 먼저 편찬된 것은 예종에서 인종 때에 활약한 김영
석(?~ 1167)의 <제중립효방>이다. 이 책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묘지명에
의하면 중국과 신라의 의학책을 종합, 정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신라 이
래의 전통적인 처방전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책의 내용은 <향약집성
방>에 단지 한 조목만이 전해지고 있다.
한쪽에 맞은 중풍으로 손과 발을 쓰지 못하고 아리고 아픈 것을 치료하는 데
에는 솔잎 5말쯤을 소금 2되와 같이 쪄서 뜨거울 때 자루에 넣어 탈난 데를 찜
질하고, 식으면 다시 쪄서 나을 때까지 계속한다.
여기서 중풍을 치료하는 데에 솔잎과 소금만을 사용하고 있으며, 솔잎이라는
토산 약재를 사용한 것은 고려의 독자적인 의학수준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후 최종준의 <어의촬요방>이 출간되었다. 당시 재상으로 있었던 최종준은
예전에 출간되었던 의학책이 심하게 훼손되는 것을 애석히 여겨 1226년(고종
13) 국왕의 허락 아래 그것을 다시 출간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복간이 아니라 여
러 처방전을 첨부하여 새로운 의학책의 면모를 갖춘 것이었다. 그 내용은 <향약
집성방>에 12개의 처방전이 전하고 있는데, 그 처방전은 중국의 의학 지식을 단
순히 발췌한 것이 아닌 고려에서 터득된 경험을 바탕으로 약을 조제하고 있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토산약재의 활용을 적극적으로 강구한 것은 고종 23년
(1236)경 정안이 편찬했다고 추정되는 <향약구급방>이다. 이 책은 당시 민간에
서 이용되었던 응급조치법들을 모은 것으로 당시 몽고의 침략을 피해 임시수도
로 삼았던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과 함께 간행되었다. <팔만대장경>이 부처
의 힘에 의존하여 외적의 침입을 물리칠 것을 기원한 것이라면, <향약구급방>
은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다
루고 있는 질병의 증세는 다음과 같다.
상권: 음식의 독, 고기의 독, 버섯 따위의 독, 약으로 인한 독, 게를 잘못 먹어
생긴 독, 가시뼈를 삼켰을 경우, 딸국질이 날 경우, 갑자기 졸도하였을 경우, 목
매달아 죽었을 경우, 열병으로 죽었을 경우, 물에 빠져 죽었을 경우, 술에 중독
되었을 경우, 술을 다리는 법, 뼈가 부러졌을 경우, 쇠붙이에 찔리거나 베였을
경우, 열이 있고 떨려 마치 디프테리아 같은 증세, 혀가 무거우며 입안에 상처가
생긴 경우, 이빨이 썩었을 경우
중권: 여러 가지 종류의 상처나 뾰루지들(피부병), 항문에서 고름이 흘러내릴
경우, 대소변이 꽉 막혔을 경우, 성기에서 물이 질질 흐를 경우, 소변에 피가 섞
여 나올 경우, 성기가 가렵거나 상처 났을 경우, 코피가 쏟아질 경우, 눈병, 귀병,
입술병
하권: 부인의 여러 가지 증세. 어린이의 여러 증세. 아이가 잘못해서 물건을
삼켰을 경우, 중풍, 미쳐서 날뛸 경우, 학질, 두통
이 책은 현재 전하는 우리 나라의 가장 오래된 의학서로서, 다음의 세 가지
특징과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토산약재류를 소개하는 부록을 실었다. 창포, 국
화, 지황, 인삼 등 180여 종에 대한 속명, 약의 맛, 효능과 독성, 채취방법을 서술
하여 일반인에게 약재를 쉽게 구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보다 손쉬운 치료를 가
능케 하고 있다. 둘째는 하권에 부인과 1개 항목과 소아과 2개 항목 등이 각각
설정되어 출산과 더불어 신생아와 영아의 사망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인구증가에 기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셋째는 책의 명칭 ‘구급방’이라는 데
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응급조치를 위한 것이다. 즉 전문적인 의사가 아니더
라도 일반인 등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향약구급방)의 편찬으로 고려인들은 크게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약재의 토산화는 인간의 평균수명을 늘리는 데 기여하였다.
최고의 의료 혜택을 받은 고려 국왕의 평균수명은 43.93세이다. 가장 장수한
왕은 충렬왕으로 73세였고, 그 다음으로 고종이 68세, 태조 왕건이 67세였다. 가
장 단명한 왕은 12살에 죽은 충목왕이었다. 그런데 왕의 평균수명은 무인정변을
기점으로 전기(태조~ 의종)에는 39.39세인 데 반해, 후기(명종~ 공양왕)는 49. 79
세로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묘지명을 통해 산출되는 자녀의 조사
의 발생빈도와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고려 전기의 경우 수입된 값비싼 약
재는 백성들이 쉽게 이용할 수 없었던 반면에, 후기로 가면서 토산약재를 이용
한 의학서의 보급으로 백성들은 의료 혜택을 많이 받았다. 이는 무엇보다도 <향
약구급방>의 기여가 컸다. 그 후 편찬된 <향약혜민경험방>, <삼화자향약방>,
<향약간이방>, <동인경헙방>등도 모두 토산약재를 중심으로 하였다. 이는 조선
전기에 <향약집성방>으로 집대성되어 토산약재를 통한 치료의 절정기를 맞이하
게 되었다.
사람 살리던 이름난 약손
당시 국가간의 교류는 의학서와 의사 양성의 경우도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고
려시대에는 중국의 유명한 의사도 많이 들어 왔다. 이들 외국인 의사들은 주로
왕실 치료와 의술 교육을 담당하였다.
문종 때 마세안이라는 송나라 의사는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방문하여 의술을
가르쳤다. 한편 1279년 (충렬왕 5)에는 원나라 세조가 연덕신이라는 의사를 보냈
다. 그는 특히 방중술에 뛰어나 고려왕의 총애를 받았다. 연덕신은 양기를 보완
하는 환약을 조제하여 왕으로 하여금 복용케 하였는데 고려의 관리 오윤부라는
사람은 이 약이 왕의 몸에 좋지 못하여 자손을 번성하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
적하면서 분통히 여겼다. 결국 공주가 해마다 태기가 있었으나 왕이 연덕신이
지은 환약을 복용함으로 인해 17년간 임신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의 의사가 고려와 왔을 뿐 아니라 고려인으로 중국에 가서 이름을
빛낸 자도 있었다. 원 간섭기에 활약하였던 설경성은 경주사람으로 설총의 후예
임을 자처하면서 통일신라 전통 의술을 익혀 대대로 의술을 업으로 삼았다. 그
는 상약국의 의원으로 발탁되어 충렬왕의 병을 고쳤고 이후 충렬왕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런데 원나라 세조가 병이 나서 고려에 의원을 구하다 충렬왕의 비인
안평공주가 그를 원나라에 보냈다. 설경성은 원세조를 위해 약을 조제하였고 그
약이 효험을 보자 원나라에서는 그를 궁중에 머물게 하였다. 2년이 지나 그가
고려로 돌아가려 하자 원세조는 그를 만류하였고, 결국 가족을 데리고 원으로
돌아오도록 당부하면서 보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원나라로 돌아가지 않았다. 뒤
에 원나라 성종이 병이 들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그를 치료하였다. 그는 키가
크고 풍채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이 곧고 후덕하였다. 비록 원나라 황제와 고려
왕에게 신임을 받았으나 자손을 위해 은혜를 구하지 않았으며, 원나라 공주가
고려출신의 비를 모함하자 원 황실에서 간여하여 그로 하여금 이 일에 참여하게
하였으나 잘못된 사실을 밝히고 오직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였다고 한다.
일반 백성을 위해 의술을 베푼 사람으로서는 채홍철과 배덕표를 들 수 있다.
채홍철은 충렬왕 때에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일찍 이 집 북쪽에 전단원이라는 집
을 짓고 승려를 두어 약을 조제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받고는 그곳을 ‘사람을 살리는 집’이라 불렀다고 한다.
공민왕 때의 배덕표는 관직에서 물러나 김해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약초를 캐어 정성껏 조제하여 동네에서 병자가 생기면 곧 치료해 주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면 자신의 곡식을 나누어 주었으며, 백성들이 곤란한 일을
당하면 관청에 가서 구원하여 주었다. 그 자신도 병이 있어서 항상 지황을 이용
해서 치료하였고, 이 지황을 뜰 안에 길렀으므로 아호를 황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환자를 치료하고 도운 배덕표, 그는 바로 고려의
백성을 돌본 슈바이처이며 고려를 지킨 의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