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 ♪♬ ~
하늘을 보기 부끄러워 삿갓을 썼다는 시대의 풍운아 난고 김병연!
어쩌면 우리들에게 바람직한 삶을 살아 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닌지.......
조선시대의 혁신의 아이콘이자 현재는 무소유를 실천하여 수많은 민초들의 아픔을 어루만진 분이기에 언제나 이곳을 오면 마음이 참 편해진다.
나의 발길은 또다시 뜬구름처럼 이리저리 흘러가겠지만 난고 김삿갓은 이곳에서 우리시대 아픈 사회상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의 수고로움으로 산행을 했지만 등로가 뚜렷하지 못해 참 말이 많은 산행이다.
발걸음이 빠른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 긴 코스를 하나 더 잡은 것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 혼선이 와서 알바를 몇 번씩해야
했고 지맥산행에 익숙한 난 등로가 좋다는 생각을 했지만 모두가 나와 같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와 책상 머리에 앉아 마대산을 검색하니 마대산의 모든 지도엔 이 코스가 안내되어 있었으니 답사를 하지 않고서는
다른 누가 여길 탐사하더라도 똑 같은 실수를 할 개연성을 갖추고 있었다.
등로가 명확치 않아 알바의 책임을 모두 산대장에게 전가하는 것은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옳았지만, 너 때문에" 라는 사고는 난고 김병연이 삿갓을 쓰고 방랑했던 원인이었을 것이다.
가족 야유회를 반납하고 산행에 동참한 사무국장이나
산행을 포기하고 음식을 만들어 주신 분들이 계셨기에 산과 물 속에서 즐거움을 느낀 하루였기에 감사드립니다.
난고 김삿갓 유적지
난고 김삿갓의 문학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백일장에서 조부를 욕되게 하는 시를 썼다는 자책감으로 평생 방랑 시인을 지낸 방랑시인 김삿갓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문학적 위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시비와 문학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김삿갓의 묘와 생가가 있다. 김삿갓 유적지는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곳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준령의 북단과 남단에 위치하며, 경북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3도 접경지역으로 산맥의 형상이 노루가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노루목이라 불려오고 있다. 또한 김삿갓 유적지내에 흐르는 '곡동천'은 여름철에는 유리알처럼 맑고 풍부한 수량이 기암괴석 사이로 넘쳐 흐르고 가을에는 형언각색 단풍으로 인하여 보는 이의 가슴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곳이다. 이처럼 산자수려한 고산준령 풍운속에 청운의 푸른 꿈을 접고 해학과 재치와 풍류로 한 세상을 살다간 조선 후기 방랑시인이자 천재시인인 김삿갓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난고 김병연 묘소와 주거지가 있다.
난고 김병연 선생은 원래 전라도 동복(지금의 전라도 화순군)에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둘째 아들 익균이 주거지인김삿갓면 노루목 바로 이 곳 골짜기에 묻어 주었으며, 그의 묘소는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정암 박영국선생의 노력으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김삿갓의 시대 정신과 "문화예술 魂"을 추모하고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 하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김삿갓 계곡을 자연문화의 중심지, 문예인의 순례지, 김삿갓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하는 시선(時仙)으로 승화시켜 문화관광자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 `98년도부터 매년 10월초에는 "난고 김삿갓문화큰잔치"가 개최된다. 또한 강원도 시책사업인 『강원의 얼 선양사업』이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추진되어 유적지내 조경 및 도로포장 등 기반시설이 조성되어 쾌적한 관광지로 탈바꿈 하였으며 특히, 2003년 10월 "난고 김삿갓 문학관"이 개관되어 선생의 문학세계를 한 곳에 연구적으로 전시해 관광객들에게 교육 효과를 거양하고 있다.
난고 김삿갓
선생은 안동김씨의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선평의 후예로 조는 선천부사 익순이고 부 안근과 모 함평이씨 사이의 이남이다. 순조 7년 정묘(1807년) 3월 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출생하였고 휘(諱)는 병연 자는 성심 호는 난고(蘭皐)이다. 순조 12년 임신(1812)선생 육세때 조부 익순이 홍경래란에 관련되어 3월 9일 복주(覆誅)되자 연루(連累)를 피하여 황해도 곡산에서 숨어 자랐다. (익순은 고종 정유년에 신원(伸寃)되고 순종 무신에 복작(復爵)되다) 그후 익순에 대한 문죄는 본인에 국한하기로한 조정 결정이 알려져서 선생은 모친과 함께 곡산을 떠나 광주, 이천, 가평을 전전하다가 평창을 거쳐 영월 삼옥에 정착하였다.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자랐던 선생은 20세때 영월도호부 동헌 백일장에서 조부를 지탄한 죄책으로 번민끝에 궁벽(窮僻)한 산협(山峽)인 이곳 어둔으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22세에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으며 김삿갓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선생은 57세로 운명할 때까지 전국을 두루 유랑하였으며 인간사 모든 것을 시제로 락운성시(落韻成詩)하였다. 또한 선생의 과시는 후세 과거 지망자들의 교범으로 쓰여졌을 뿐더러 특히 평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읊어 빛나는 서민문학을 남기었다. 철종 14년 계해(1863) 3월 29일 전라도 동복에서 작고한 것을 3년후 둘째 아들 익균이 현재의 묘소로 이장하였다. 1982년 10월 17일 세상에서 잊혀졌던 선생의 묘소를 박영국은 김영배, 이상기등의 증언으로 이곳에서 찾아 내었다.
※ 자료 『김삿갓의 유산』중 시선 난고선생사적 기문 -영월군청-
전망대(총각봉)에서
마대산(馬垈山 1,052m )
마대산(1,052m)은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김삿갓계곡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태백산에서 이어져온 백두대간이 선달산을 넘어서고 고치령과 마항치 사이에 형제봉(1,032봉)을 일으키고 북쪽으로 가지쳐 달아나는 능선상의 끝머리에 솟은 산이다. 소백산맥의 지맥에 해당하며, 삼봉(668m)·수리봉 등이 연봉을 이루고 있다. 주변에는 어래산(1,064m)·태화산(1,027m)·형제봉(1,178m)·응봉산(1,013m)·망경대산(1,088m) 등이 솟아 있다. 주능선은 동서방향으로 놓여 있으며, 북쪽사면에 비해 남쪽사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남한강이 마대산의 서쪽을 북류하며, 옥동천과 동대천이 산계의 북쪽과 남쪽 하곡을 각각 서류하여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노루목-어둔이-선낙골-마대산산정부-맞대로, 배틀말-마대산산정부-가재골로 이어지는 등산로 등이 있다. 마대산 등산코스는 김삿갓유적지가 있는 와석리 노루목에서 오르내리는 코스가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노루목에서 어둔이계곡을 경유하여 정상에 오른 다음, 남릉상 어둔이재를 경유해 다시 어둔이계곡으로 내려오거나, 또는 정상에서 북릉을 타고 쌍소나무가 있는 삼거리에 이르러 선낙골을 경유해 다시 노루목으로 내려서는 코스가 그것이다. 다음으로는 고씨동굴에서부터 약 2km 거리인 대야리 맞대골을 경유해 정상에 오르는 코스가 인기 있었다. 그러나 이 코스는 수년 전 계곡 안에 미륵대도 영월선원이라는 대형 건물이 들어선 후부터 등산을 즐기는 이들의 발길이 줄어들었다.
위대장이 이렇게 후미를 위하여 리본을 붙이면서 산행을 했건만
리본을 볼 수 없었다는 말도 하고 ..........
첫댓글 산행은 알바를 조금은 해봐야 묘미를 압니다^^ 김삿갓을 상세히도 조사해서 올리셨네요.
오늘날 더욱 난고어른이 그리워짐니다.
난고선생에 대한 여러면모를 알렬주셔서 감시함니다.
언제 이런 조사까지 다해서 올리다니 ? 가장 더운 이 시기에 잘 놀았습니다.
역쉬 배려하는 마음 최곱니다^^
바닥조에서도 안전한 산행이 되기를 바래는 말들을 나누었는데,
힘든 알바를 여러번 경험하신 분들이 계셨다는 후문을 들었네요.
다행히 사고없이 무사히 산행을 마무리 할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마대산을 오르지 못하고, 김삿갓의 유적지를 둘러보진 못했지만, 상세한 자료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배려해주신 덕분에 무사히 산행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과 글 모두 잘 읽었습니다
한세기 풍류를 즐기신 김삿갓선생의 후대에 난고 선생의 뒤지지 않을 뫼벗 선생님이 우리들 곁에 계시기에 늘 즐거운 발걸음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