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관한 시모음 56)
겨울 동박새 /소양 김길자
뽀드득 눈 밟는 소리 날까
뒤꿈치 살짝 들고
노래 부르는 것은
달빛 사이로
은밀한 시간 흐르는
고결한 숨결로
한 겹 한 겹
여는 모습 지켜보다
애태우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동백꽃의 기다림이다
겨울이 떠나가며 /박현령
마지막 추위가
어둠 속으로
남자를 데려가고
밤―
마지막 버스가
절망 속으로
여자를 실어가고
어둠―
만취의 길바닥엔
굶주림 같은
목마름 같은
화냥기만 남겨두고
깊은 밤―
열두겹
첩첩
꺼지지 않는
연옥의 불길 속에
활활
사랑을 피워두고
사랑을 피워두고
겨울이
떠나가고 있었다.
수족관의 겨울 /길상호
수족관에 엎드린 廣漁들,
얼마나 낯설었을까 유리 밖으로
눈 내리는 거리 미끄러지는 사람들
실눈으로 훔쳐보다가
눈송이 몇 개 수면에 닿으면
촉수 끝에서 부르르 떠는
생의 갈망도 얼마나 새로웠을까
허기를 잊은 뱃가죽 밑으로
뜰채가 가만히 손바닥 벌리면
마지막까지 내어주기 싫었던
바다의 기억으로 펄떡이는 고기들,
가시로 만든 서까래 흔들리면서
비늘의 기와지붕 무너지는 소리
완공도 되기 전 주저앉은 몸이
미친 듯 부르짖으면
廣漁는 狂漁가 되고 말겠지
눈송이 내려앉을 때마다
죽음은 싱싱하게 살이 오르고
그 무게에 납작하게 깔려
고기들 가쁜 숨 몰아쉬고 있었다
겨울에게 묻는다 /김대원(瑞耕)
북서풍 찬 서리맞아 햇빛마저 사라지는데
어느 새인가 잔솔 밭 가지 사이로 솔새는 날아 둥지 찾는고
원한의 노을 빛은 허무한 세월의 아픔같이 강산을 불태운다
세월이 그리움 덩어리라 흐르면 눈물만 솟고
시간이 아쉬움 덩어리라 흐르면 미련만 남긴다
젊음이 계절에 난도질당해 낙엽 되어 흩어지니
한 맺힌 핏자욱 멍울 자욱
한 없이 한 없이 서러웁다
산이여 강이여 말해 다오
피 빛으로 불타는 하늘이여 말해 보오
너 무엇을 주려고 저렇게 불타고 너 무슨 원한으로 저 태양을 삼키는가?
인간의 무상이 천지에 가득하고 그리움의 동경은 바다를 메우는데
너 무슨 핑계로 대지마저 불태우나
강산을 삼켜 버린 북서풍 찬 서리여
세월을 삼켜 버린 저주받을 겨울이여!
한 마리의 솔새가 해 지는 잔솔 밭 둥지에 앉아] 불타는 천지를 바라보며
파르르 떨고 있다.
어느 겨울날 아침 /김덕성
한겨울 찬바람 속에
사랑을 안고 여전히 떠오르며 태양
웃음꽃 피는 아침
빈 가슴에
사랑이 가득 차오르며
서리꽃을 빛나고
새 꿈을 안은 나그네
봄꽃처럼 따뜻한 눈빛 빛나며
정이 흐르고
인정 많은 세상
축복처럼 햇살이 빛나며 내리는데
반가운 임이 온다는
행복한
아침이어라
겨울의 길목 /주명옥
한 낮의 볕을
나무에 걸어두고
땅거미 매달린
모퉁이 돌아서면
바람이 날을 세우고
낙옆이 쓸리는 길목
고구마 속살 찢기고
몸을 달구는 날엔
옆집 할머니
파리한 잔기침 토하며
이음새로 연결된
겨울 초저녁
휘익 휘어져
왔다 가는 바람의 말
아직도 숨어있는
꼬리달린 여우의 동화
쌍다리 아래서 주워 온
서럽던 이야기
눈동자 속바람이
주름살 사이로 차갑게
흐를 때
이승의 가지 끝에
매달린 홍시 하나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또 내일이다
세월이 별거드냐
잠시 지나고 스치는
그림자인 것을
바람인 것을...
겨울 소망 /虗天 주응규
동토(凍土)의 한파 훑고 온 삭풍이
매서운 눈초리로 싸늘히
가슴 할퀴고 비껴 지나는 자락에
잔설 덮쓰고 오들오들 떨며
숨죽여 잔뜩 웅크린 채
눈 감고 귀 닫습니다
차디찬 적막을 훌뿌리며
앙칼지게 휘젓다 떠난 자리
봄 내음이 아늑히 서려 들면
오랜 설움 삭혀
실살스레 푸릇푸릇 움트는
봄기운에 기대어
늘어지게 기지개 켜고 싶습니다
햇살 새초롬히 비껴드는
가녘으로부터 스칠 듯 감도는
사랑 한 줌, 행복 한 줌,
미소 한 줌 내려받아
기쁨과 슬픔이 부대끼는
정감(情感)을 나누고 싶습니다.
*실살스레: 겉으로 드러나거나 객쩍은 것이 없고 내용이 충실하게.
겨울우화 /이지엽
고추씨 오쟁이에 바람 한 줄 살금 딛고 가는 겨울한낮
입 꽝 벌린 장독대 항아리들 금줄에 걸린 햇살들이
때절은 문지방 애써 기어오르다
고드름 끝에 쨍그랑 부서진다
그러자 직립으로 낙하하는 물방울 그 투명한 속살
그 살결 파고들어 마악 길 떠나려는 찰나
그 밑에 한가하게 한 세월 좋게 넘어가던 고양이가
그만 그 살가운 파고듦에
밥그릇을 뒤엎고 등을 세우며 부르르 떨고 선다
내게 왔다가 가버린 사랑 늘 그러하였다
그 해 겨울 /석기진
(1)
두릎 새순을 삶아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을 봄을 생각하며,
아직은 추운 겨울바람이 깝작대어도 나는 야 모르는척
삼신봉을 올랐네...
어제는 동학사에서, 남매탑에서,
오늘은 청학동에서, 삼성궁에서,
'영혼이 고독하거든 산으로가라!'
유성팬으로 쓴 어느 사나이의 배낭을 쳐다보기도 하며
가끔은 예쁘게도 생긴 아가씨를 만나기도 하며
쓸쓸히 산천 구경을 다녔는데!
등산용 손수건으로 뱃사람처럼 이마를 질끈 동여매고,
늙은 검둥개를 쓰다듬으며 노인네가 손짓을 하였다.
자신의 산장에서 하룻밤이든 여러밤이든 쉬었다가라고 ...
(2)
낙엽송으로 기둥과 서까래를 했다.
황토 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이었다.
대나무로 마루를 깔고 벽을 치장했다...
정답게도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산장이 그만
산과 들과 바람과 또 새들과 모두 친하게 지내겠다는 표정을 지어서
이 염치불구한 나그네는 그만 며칠 묵어 볼 결심을 하고야 말았네...!
(3)
서울 어느 사장님이 사 준 송아지를 길러주고
한 대 들여 놨다는 텔레비전이 외로운 할아버지를위해
폼을 내며 방 안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산나물을 뜯으러 갈 때도 마을을 내려 갈 때도
발발이가 뒤에서고 검둥이가 그 다음에 서고 그 누렁소가
제일 뒤에서 따라 다녔다고,
사장이 마을에서 소를 잡던 날
혼자 마당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할아버지는 그만 이실직고를 하였네.
말린 고사리, 취나물에 고 향긋한 갓나물을 넣어
볶음밥을 지어 한 그릇씩 먹으며
봄이 되어 뒤 대나무 밭에 새초롬한 죽순이 돋으면
같이 뜯어 먹자 한다.
또 고로새 물맛은 가히 감로수 맛이라고 은근히 자랑을 한다.
나는 그저 입맛을 다실 따름이다.
나는 그저 군침을 삼킬 따름이다.
(4)
이 골, 저 골, 천지로 열린 주인 없는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든다.
토종벌을 길러 꿀을 따고 산나물을 뜯어 쌀을 판다...
20대에 마음의 병을 얻어 40년 간 방랑끝에 이렇게 정착한
할아버지의 얼굴에 묻은 웃음 한자락이 그만,
정답게도 바람에 한참을 펄럭이었다...
불일폭포에서 형제봉까지 또 섬진강을 내려다보고
돌아온 이 가슴 속에서도,
한참을 펄럭였다.
아, 아득히도 내 마음 속 아무런 생각들을 헤집고서는
펄럭이었다...
(5)
그 편안한 가운데, 비소로 나는 산천 구경을 다 끝내기로
마음을 먹고서는
그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 혼자서는 고요히도 지는 해를
오래,오래 바라보았네...
그리고 땅거미가 내렸고!
멀리 개짖는 소리가 몇 번 들렸고!
아궁이에 대나무가 '탕''탕''탕'
화약 터지는 소리를 내며 타 들어가서,
하늘의 별들이 놀라 잠시 소란스러웠었네.
겨울 풍경이 있는 도시 /김명선
달빛이 눈맞추는 거리에서
토끼 걸음을 달려오는 노란 모자를 쓴 바람을 만난다
건반 위를 뛰어 다니는 기쁨처럼 석류는 미소를 짓고
발가락 사이에 물끄러미 시선을 주는 어둠이 다가와
안경을 닦아준다
엉뚱한 시간이 흐르고 갈색 가방을 멘 도시는
자신도 모르는 침묵을 혼자 담아서 기억해둔 산사(山寺)를
찾아간다
방해하지 마세요
문안으로 가볍게 걸어오는 팔랑이는 낙엽에게 손을 들어 보인다
안간힘을 다해 급하게 방향을 돌려 달려왔단 말이에요
3악장을 넘어간 베토벤의 폭풍이 끝이 난 것처럼
절대로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고통을 꺼내서 던져 버리는 거에요
하지만 바람은 거기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거기 서서 웃고만 있다
삶이 두 번쯤 반복될 것 같은 얼굴로
그 해 겨울 /선미숙
멀쩡하다가도 눈보라가 친다.
아주 매섭게 몰아친다.
니 아부지 생일 땐 언제나 그려
엄니는 당신의 평탄지 않은 삶을
늘 그렇게 날씨에 빗대어 푸념하셨다.
함께 산 세월 쉰 일곱 해를 채우고
무척 추울 거라는 겨울이 힘을 잃어버린 그 해
아버지는 눈보라 같은 삶을 놓으셨다.
그래도 착하게 사셨으니 가시는 날까지 도와주는 거라고
포근히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사람들은 한 마디씩 건넨다.
쉬는 날이면 저절로 발길이 가는 희망공원
아버지는 영혼의 동무들과 거기 계신다.
그곳은 좋으냐고, 나도 데려가라고,
사진 속 아버지를 보며 한참을 넋두리하고 나오는데
분홍빛 진달래 몇 송이 슬픔 달래듯 눈앞에 어린다.
3월초, 환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말없이 웃는 아버지 얼굴이다.
아직 때가 아닌데 하루가 다르게 잎이 열리는 꽃들!
성급하게 핀 목련은 찬 서리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까맣게 얼어버렸다.
빛깔 잃은 목련을 보고 벚 꽃은 속 모르게 웃고
사람들은 이른 꽃 잔치에 그저 즐겁다.
아버지를 가슴에 묻은 그 해 겨울은 봄처럼 따스했다.
겨울 소네트 /이철건
작약꽃의 저녁강이
산그늘 속으로 저물어 갈 때
넌 기도원 별관으로 날 데리고 갔다
넌 내마음을 읽어 나갔고
내 시린 결핍의 고통을 마음 아파했다
생을 리셋 하고 싶다는 내 말에
말간 우물같은 네 눈이 젖었다
네 안의 어머니
내의처럼 따뜻했다
아침에 커피잔을 들고 우리는
창가에 투명하게 마주 앉았다
창 너머로 산등성이가 말갈기 같았다
하얀 자작나무 숲이
더 이상 슬퍼 보이지 않았다
겨울과수원에서 /석화(石華)
- 누나에게
누나,
지금 꽃은 피여있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살결처럼
내 눈을 간지럽히던 얄포름한 꽃잎
꼬옥 다물었던 입술을 열고
조용히 미소 보내주듯이
한겹한겹 꽃망울 가만히 열고
고이 감싸안았던 향기 꽃살에 피워올리던
이쁜 꽃송이는 어데도 없습니다
누나,
그 파란 잎사귀도 지금 없습니다
다정스러운 손짓같이
가느다란 미풍에도 하느작거리며
이 마음 즐겁게 불러주던 잎파리들
수많은 연두색의 편지봉투처럼
살뜰한 속삭임 가득 새겨안고서
내 머리우에 하늘처럼 펼쳐지던
천잎만잎 푸른 잎사귀들이
지금은 한잎도 보이지 않습니다
누나,
어쩌면 그 고운 두뺨에
발그스레 피여나던 예쁜 홍조인양
알알이 빨갛게 물들어가던 능금
아름다움이 너무해 오히려 얼굴가리고
무슨 비밀스런 사연 품어서
깊이 더 깊이 부끄러운듯 아미를 숙이던
안스러운 그 모습 닮아서일가
휘늘어진 가지마다 잎사귀뒤에 숨어들던
두볼이 빨간 능금알들이 지금 없습니다
색채와 향기
계절과 함께 모두 떠나가버려
그림이 지워진 빈 액틀속같은
겨울과수원
겨울과수원 한가운데로 깊숙히 뻗어간
이 오솔길 한가닥 따라
발걸음 조용히 옮겨딛는 지금
누나,
그래도 나의 가슴엔 한가득
누나의 향기
누나의 촉감
누나의 체온이
그래도 가슴에 한가득 넘쳐남은
무엇때문일가요
누나,
지금 이 겨울과수원 한가운데서...
겨울연가 /최홍윤
눈이 내리더니
하얀 눈이 하염없이 내리더니
내 곁에 여인들이
겨울연가를 부르기 시작 했다
입동이 지나
조선간장 같은 마음이
얼키설키 모여들어 메주콩 쑤고
아마, 이 연가는 팥죽 쑤는
동짓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오늘은
겨울 김장하는 날
소금물에 절인 배추포기가
물먹은 한 사람의 발걸음같이 무겁다
겉절이나
생 절이 같은 사람은 가라
폭 삭은 사람
묵은 김치 같은 사람은 와라
와서 겨울연가를 부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