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6 章 시세를 아는 자가 준걸
대략 뜨거운 차 한 잔이 차게 식을 시간이 지났을까.
창! 창! 창!
냉운은 한적한 골짜기 안에서 터져 나오는 쇳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기군."
냉운은 달리는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일백여
장을 전진해 갔다.
높은 나무도 그의 앞길에 방해가 되지 못했다. 칼끝 같은 삐죽삐죽한
바윗돌도 냉운의 경신술 앞에서는 아무 장애가 되지 못했다. 냉운은
수백 장을 호흡 한 번 없이 빠르게 전진해 나갔고, 소리 없이 곡구
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우선 눈에 띄는 건 황금으로 만들어진 가마 위에 올라 음흉히 웃는
젊은 뚱보 화상의 뒷모습이었다.
"으하하하……!"
그의 웃음소리는 산천초목을 들썩이고도 남을 정도로 우렁찼다.
"천하삼미(天下三美)의 주인은 천하주인(天下主人)이다. 장차 천하의
주인이 될 냉면활불께서 천하삼미를 얻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다.
"
젊은 화상은 어울리지 않는 오색승포(五色僧袍)를 걸치고 있었다.
그가 올라 있는 가마 근처, 체격이 각각 다른 열여덟 백의승(白衣僧)
, 머리를 자르지 않은 녹의여승(綠衣女僧) 이십사인이 도열해 있었다.
잔혼십팔나한(殘魂十八羅漢)과 이십사나찰(二十四羅刹)이라 불리우는
잔혼사의 일급 고수들이었다.
그 중 이십사 나찰은 냉면활불의 첩이기도 했다.
그들뿐이 아니었다.
삼백 정도 되는 승려들이 골짜기 안을 그득 메우고 있었다.
창! 창!
쇳소리는 맨 앞쪽에서 들려왔다.
골짜기가 끝나는 곳에 솟아 있는 사십여 장 높은 암벽 밑, 전신을 피
로 물들인 채 한 자루 보검을 질풍같이 쳐내고 있는 백삼청년 하나가
있었다.
수십 군데 검상(劍傷)을 입었으나 몸놀림은 천룡같이 날쌨고, 검을
흔들 때마다 이 장 길이 검기(劍氣)를 흘려 쇠와 돌을 마구 잘라내고
있었다.
그 뒤쪽, 힘없이 앉아 있는 백의여인 하나가 있었다.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선혈로 물들이고 있는 스무 살 안쪽의 미인이
었다.
낯빛이 백짓장같이 창백했고 입술은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복부 쪽을 움켜쥐고 있었다.
접시만한 구멍이 나 있고, 피고름이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
이었다.
화약(火藥)이 뱃가죽 근처에서 터진 듯 상처 부위는 검게 타 있었다.
"다가오는 자는 용서 없다."
백삼청년은 사자후를 토해내며 장검을 잇달아 그어댔다.
휘휘휙!
검 끝에서 핏빛 검화가 만들어졌다.
청성파의 여러 가지 수법 중 가장 무섭다는 홍광천쇄검강(紅光天碎劍
)이 시전되는 것이었다.
그 위력은 무쌍(無雙)이라고 하지 않던가!
홍광천쇄검강은 비룡신군의 비룡구식(飛龍九式), 망망신니의 항마신
공(降魔神功)과 함께 강호에서 알아주는 삼대절기(三大絶技)였다.
그것은 과거지사에 불과했다.
사대마경이 출현한 후 삼기의 무공은 이류 무공으로 전락하고 만 것
이다.
홍광천쇄검강에 저항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아홉이었고, 하나같이 흑
포를 입은 노승들이었다.
"으헤헤……, 검을 놓는 것이 좋다."
"어리석은 놈! 구 장로(長老)에게 덤비다니……."
"네놈의 내공이 어이해 네 아비 강남대협보다도 강한지 모르겠으나
구 장로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이 년 전, 본사의 공격 아래 천 장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은 네 아비의 뒤를 따르게 해 주마!"
구 장로들의 연환 공격은 가히 신품(神品)이었다.
그것은 잔혼마경(殘魂魔經) 안에서 전수된 잔혼구룡대진(殘魂九龍大
陣)이라는 것이었다.
우르르릉 ―!
구 장로의 손바닥이 합해질 때마다 번천지복할 장풍이 일어났다.
백삼청년은 혼신진기를 다해서야 합격술에 저항할 수 있었다.
'아, 한 분 정체 모를 기인께 삼선단을 얻어 복용한 후 내공이 일취
월장했으나…… 모든 게 허사구나.'
피투성이 백삼청년은 천외옥룡 제소옥이었다.
'청성파의 무공은 마경의 마공에 비해 훨씬 아래다. 나는 초식 면에
서 뒤지기 때문에 승리를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천외옥룡이 그래도 버티는 이유는 내공이 막강하기 때문이었다.
휘휘휙!
그는 청성의 진산보검(鎭山寶劍) 천섬신검(天閃神劍)을 풍차같이 돌
리며 구 장로의 협공을 막아갔으나 패색이 역력한 싸움이었다.
'큰일이군. 홍광천쇄검강은 내공 소모가 큰 무공인데…….'
제소옥은 현기증을 느꼈다.
"으음……."
간간이 들리는 염방채의 신음 소리가 없었다면 벌써 몸을 빼 도망쳤
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제소옥은 몸을 향해 몰아쳐 오는 구 장로의 장세를 검 끝으로 흩뜨리
며 다시 홍광천쇄검강을 일으켜 냈다.
휘잉!
핏빛 검기가 일순 수 장 길이를 이루었다.
"좋은 수법!"
"청성은옹보다 낫군."
잔혼사구 장노는 감히 막지 못하고 진세를 삼 장 뒤쪽으로 물리었다.
파파팍!
제소옥의 검기는 지면에 균열을 만드는 것으로 무산되었다.
"천외옥룡! 어서 항복해라."
"소의금랑을 내놓으면 네놈은 놓아 주겠다."
구 장로들이 다시 다가서며 진세를 배가시켰다.
제소옥은 오장육부가 터지는 듯한 압박감 속에서 진기를 모아 사자후
신공으로 외쳤다.
"어느 누구도 소의금랑을 데려가지 못한다!"
천지를 뒤흔드는 말소리였다.
다 죽어 가는 자의 입에서 그런 말소리가 터져 나올 줄이야 누가 알
았겠는가!
"소의금랑과 나는 한날 태어나지 못했으나 한날 죽기로 맹세한 사이
다. 같이 죽을 수는 있으나, 헤어지지는 못한다!"
제소옥은 용감무쌍히 외치며 다시 검을 바로 세웠다.
"고약한 놈! 천하삼미의 으뜸 소외금랑은 천하제일인의 아내가 되어
야 마땅하거늘, 감히 네 여인으로 할 수 있느냐?"
금가마 위의 냉면활불이 비곗살로 뭉쳐진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말소리는 제소옥의 사자후를 능가했다.
그의 내공이 제소옥보다 한 수 위라는 증거였다.
"소의금랑은 본좌의 정실부인이 될 것이다. 둘째 부인은 백화궁의 일
타운이 될 것이고, 셋째 부인은…… 흐흐, 바로 네놈의 동생 강남미
연자(江南美蓮子) 제소청(帝少靑)이다."
"닥…… 쳐라!"
제소옥이 검을 세우며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리우는 신비마제가 건드리지 못한 문파가 본좌의
잔혼사이다. 그 이유는 본좌의 무공이 신비마제를 능가하기 때문이다
. 본좌는 장차 신비마제를 비롯한 강호의 고수들을 격파하고 천하제
일인이 될 작정이다. 그 이후 삼미를 한 침실 안에 두고 인생의 환락
을 줄 작정이다."
냉면활불은 득의해 말하며 넓적한 손바닥을 활짝 폈다.
뼈가 없이 살로만 이루어진 듯 부들부들한 손바닥이었다.
"구 장로는 이제 물러나게! 십팔나한이 나서야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네!"
"예."
잔혼사 구 장로가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거의 같은 순간.
"잔혼십팔나한!"
가마를 에워싸고 있던 열여덟 백의승려가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
다.
구 장로를 능가하는 수법이었다.
아주 멋들어지게 날아올라가던 잔혼십팔나한이 허공에서 진세를 이루
며 지면을 향해 떨어져 내리려는 찰나였다.
펑!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그들을 향해 날아가는 한 줄기 금광이 있었
다.
그것도 잠깐.
우르르르릉 ―!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하며 피보라가 골짜기의 하늘을 벌겋게 물들였
다.
"으악!"
"큭!"
열여덟 개 수급이 혈우(血雨)와 함께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금광을 끌며 날아들던 물건이 잔혼십팔나한을 거의 같은 순간 목 없
는 시체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탄지지간의 변괴가 중인을 침묵시켰다.
금광이 어디서 나타났다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아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 어검술(馭劍術)……."
냉면활불이 사색이 되어 말을 더듬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 중 자초지종을 알아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 자루 금검이 어검술에 의해 날아와 잔혼십팔나한을 시체로 만들고
높은 절벽 위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절벽 위 나타나 있는 흑의인 하나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
흑의괴인의 냉소성이 피비린내에 혼비백산한 사람들의 주위를 끌었다
.
"저, 저기다!"
모든 사람의 눈길이 절벽 위로 향해졌다.
"저 사람이 십팔나한을 죽였다.
"무, 무서운 고수다."
잔혼사 고수들은 누가 명하지도 않았는데도 한 군데로 모여들어 만약
의 경우에 대비했다.
"으음……."
냉면활불은 냉정을 잃고 가마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 어느 고인이시오?"
그는 제법 준수한 편이었으나 너무도 뚱뚱해 보잘것없는 용모로 여겨
졌다. 하나, 눈빛만은 매서웠다.
"하하하……!"
절벽 위 나타나 있는 흑의괴인이 처절히 웃어 제쳤다.
"으으……!"
"크으으……!"
잔혼사 승려들이 고막을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흑의괴인의 웃음소리가 비수같이 고막 속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흑
의괴인은 한참 웃다가 입을 꾹 다물고 두 줄기 신령스러운 눈빛을 폭
사해 냈다.
"네가 우두머리냐?"
냉면활불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었다.
흑의괴인과의 거리는 사십 장에 달했다.
그러나 흑의괴인의 말소리는 바로 곁에서 말하는 것 같아 아주 또렷
이 들렸다.
천리전음술(千里傳音術)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그렇소."
냉면활불은 겁먹어하며 혼신 공력을 끌어올렸다.
"흥!"
흑의괴인이 눈을 부릅떴다.
'지독히도 냉혹한 놈이군.'
냉면활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흑의괴인이 무슨 말을 하나 지켜보
았다.
"더러운 놈들과 긴 말 하고 싶지 않다. 간단히 말하겠다."
흑의괴인의 음성이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군마를 굴복시키는 세존(世尊)의 사자후 그대로였다.
"죽고 싶지 않은 자는 당장 한 팔을 잘라라."
"팔을 자르다니……."
"그럴 수 없다."
잔혼사 고수들이 분한 표정을 하고 냉면활불을 바라봤다.
잔혼사는 이제껏 남에게 수모받은 역사가 없는 방파였다.
몇 달 전, 당금 천하의 일인자라는 신비마제가 잔혼사를 찾아 잔혼악
승과 천 초를 겨루어 잔혼악승의 손가락 세 개를 꺾은 것은 아주 예
외적인 일이었다.
그 이외 잔혼사가 명예를 잃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수라신궁도 감히 잔혼사와 맞상대하지 않았다.
잔혼사 중들이 지독히 흉악해 상대로 할 경우 아주 큰 희생을 치를
것이 뻔하기 때문이 아니던가!
"소장문, 놈을 그대로 놔두시렵니까?"
이십사 나찰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소장문, 구 장로가 놈을 잡아오겠습니다."
구 장로가 절벽 위쪽을 손가락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냉면활불은 무표정했다.
그가 이처럼 심각했던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얼마 후.
"시세(時勢)를 아는 것이 준걸(俊傑)이지."
묵묵히 있던 냉면활불이 중얼거리며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드디어 공격의 명령이 떨어질 것인가?
냉면활불의 오른손이 힘차게 떨어져 내리며 그의 왼쪽 어깨뼈 부위에
서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뚝!
냉면활불의 왼쪽 팔이 가마 밑으로 떨어지며 펄쩍펄쩍 뛰었다.
"소, 소장문!"
"이럴 수가?"
잔혼사 승려들이 눈을 까뒤집으며 냉면활불을 올려다봤다.
냉면활불은 냉막한 표정 가운데 고통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휘하들을 둘러보며 무뚝뚝이 말했다.
"각기 팔 하나씩을 떼어내라!"
"예?"
"저, 저놈에게 굴복한단 말씀입니까?"
모두 분함을 참지 못하는 눈치였다.
냉면활불은 상처 부위를 지혈하며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잔혼사의 법은 장문인의 명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다. 이후에도 계속
잔혼사 사람으로 머물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 말대로 해야 한다!"
냉면활불은 엄히 말한 후 고개를 들어 절벽 끝에 나타나 있는 흑의괴
인을 번쩍 올려다봤다.
"말대로 했다."
"좋다. 가도 좋다!"
"오늘은 때가 아닌 듯해 그냥 떠나가는 것이다. 원한을 잊지는 않겠
다!"
"하하……, 복수하겠느냐?"
"네, 네 목을 자를 순간이 있으리라!"
냉면활불은 독랄히 말하며 오른손을 불끈 쥐었다.
"하하하……, 복수하러 온다면 도전을 받아 주겠다!"
흑의괴인은 앙천대소를 터뜨려 냉면활불의 노화에 불을 지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지금은 네게 비해 하수이나 백 일 안에 너보다 고수가 될 것이다.
그때, 너를 찾겠다. 그때를 위해 네놈의 별호를 알고 싶다."
이글이글 타는 눈동자.
수백 부하들 앞에서 패배를 인정하며 팔을 자른 자치고는 매우 독기(
毒氣) 있는 모습이었다.
'언제고 큰일을 저지를 놈이군. 팔 하나만을 자르고 살려 주는 게 잘
못된 판단일지 모르겠군.'
흑의괴인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모두 그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절정어검술을 시전해 잔혼사의 십팔나한을 시체로 만들 수 있는 사람
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강호사존 정도의 고수가 그에 속하리라.
"나는……."
흑의괴인이 천천히 입을 뗐다.
"나는 협맹(俠盟)의 태상맹주(太上盟主)다!"
흑의괴인은 재빨리 말하며 소매 속에서 네모난 정방형의 금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천하협사지맹(天下俠士之盟) 태상맹주신패(太上盟主神牌)>
"협, 협맹의 태상맹주라니……?"
냉면활불 이하 모든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협맹의 태상맹주라면 삼기의 우두머리인 비룡신군이 아니었던가? 비
룡신군은 죽었다는데, 그가 지니고 있던 신패를 갖고 있는 자가 나타
나다니…….'
중인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협맹은 완전히 멸망한 문파였다. 협맹의 잔당은 극소수였고 그 우두
머리는 천외옥룡 제소옥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제소옥을 수 배 능가하는 무공의 소유자가 태상맹주 자리를 맡고 있
다면 이후 강호 판도가 달라질 것이다.
흑의괴인은 신패를 거두어들이며 절벽 아래쪽을 향해 꾸짖듯 말했다.
"협맹을 어지럽힌 문파는 혈채를 갚아야 한다. 얼마 후 내가 너희들
의 본거지를 찾을 것이다. 그때 이전 잔혼사를 떠나지 않는 자는 다
시 나를 만나 황천 구경을 하게 될 것이다."
흑의괴인은 투박스럽게 말하며 소매를 가볍게 흔들었다.
우르르르릉 ―!
파공성이 일어나며 철수신공(鐵袖神功)이 발휘되었다.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절벽 바로 아래 우뚝 서 있던 거대한 바위가
쩌억 갈라지며 땅 속으로 세 자 정도 파묻혀 들어갔다.
"소, 소림 백보신권(百步神拳)보다 더 먼 거리를 치다니……."
"무, 무서운 현공강기(玄空 氣)다!"
잔혼사 승려들은 그제서야 냉면활불이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협맹의 태상맹주라 자신을 밝힌 자. 그의 무공은 강호사존을 능가할
정도로 강했다. 냉면활불은 흑의괴인이 어검술을 쓸 때 그것을 알았
고, 나머지 사람들은 막강한 강기를 보고서야 그것을 알게 된 것이었
다.
"가자."
냉면활불이 먼저 날아올랐다.
직후, 잔혹한 음성이 뒤를 따랐다.
"나중 네놈이 죽는 꼴을 보기 위해 오늘 팔을 자른다!"
잔혼사 구 장로가 앞장서 한 팔을 잘라냈다.
스슥 ―.
혈화(血花)가 피어올랐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팔을 잘라낸다는 것은 어지간한 정신력을 갖고
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 잔혼사라는 이름은 명불허전이었다.
파팍!
"으윽!"
"내가 사제 팔을 자를 테니, 사제가 내 팔을 자르게!"
"협맹 태상맹주가 죽는 모습을 보기 위해 팔 하나를 희생한다."
이를 악물고 제 팔을 잘라내는 자, 차마 자신의 팔을 자를 수 없기에
남에게 맡기는 자.
잠시 후, 수백 개의 팔뚝이 골짜기를 가득 덮었다.
절벽 위에 서 있던 흑의괴인이 놀랄 정도로 지독한 혈겁이었다.
'천하 삼대거파의 이름이 허명은 아니었군. 이런 자들이었기에 십만
리 중원(中原)을 주름잡는 것이겠지.'
흑의괴인은 피가 내를 이루는 것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흘렸다.
잔혼사 무리들은 외팔이가 되어 골짜기를 빠져나갔다.
천하삼미의 하나인 소의금랑의 몸뚱이 값으로는 모자람이 없는 피의
보답이었다.
휘익!
곡풍(谷風)이 불어나와 피 냄새를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이런 처참한 일이 없어져야 하는데…… 무림인들의 마음에 드리워진
마성(魔性)의 그늘은 언제나 가실 것인가?'
흑의괴인은 혈풍 속에서 얼음 알 같이 영롱한 감각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는 냉운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나타난 데에는 필설로 형용하지 못
할 착잡한 마음이 있었다.
냉운은 잔혼사 무리들이 다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허공을 밟으며 골
짜기 아래로 내려섰다.
제소옥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얼른 무릎을 꿇었다.
"정, 정녕 태상맹주십니까?"
제소옥은 냉운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냉운의 변성법은 어떤 사람의 귀라도 속일 수 있는 것이었으니, 제소
옥의 둔함을 탓할 수 없는 일이었다.
냉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년인의 말소리를 흉내 내 말했다.
"자네는 강남대협의 아들인 천외옥룡 제소옥인가?"
"그, 그렇습니다."
제소옥이 고개를 땅에 댔다.
"흠, 자네가 소맹주라는 지위를 잊지 않고 권토중래를 위해 청춘을
바친다는 것을 알고 있네!"
"감, 감사합니다."
제소옥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한 투로 물었다.
"비룡신군과 어떤 사이신지요?"
"비룡신군은 나의 은인(恩人)이시네. 나는 그분의 유지를 이어 협맹
태상맹주가 되었네. 과분한 영예네."
"태상맹주! 어찌하여 이제야 나타나셨습니까? 그리고 제 아버님의 생
사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알지 못하네."
"아, 아버님은 돌아가신 듯합니다. 살아 계시다면 이제껏 소식이 없
지는 않았겠지요. 분한 일입니다."
제소옥은 원통히 말하다가 앞으로 푹 쓰러졌다.
"크으으……!"
그는 몹시 괴로운지 가슴을 쥐어뜯으며 코로 피를 흘려냈다.
"많이 다쳤군."
냉운이 다가서자.
"저, 저는 괜찮습니다. 저기 있는 여인네를 먼저 구해 주십시오. 저
여인은 망망신니의 전인이며, 동시에 협맹의 호법입니다."
제소옥이 염방채 쪽을 가리켰다.
'염방채가 망망신니의 전인이었군. 삼 년 전에 비해 무공이 급증했다
여겼더니, 그런 사연이 있었군.'
염방채는 염가장이 수라신궁에 의해 멸망되는 순간, 삼기의 하나인
망망신니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리고 일 년 간 신공을 익히고 최근에
야 강호로 나왔고, 소의금랑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었다.
냉운은 귀음곡 앞에서 만난 일이 있는 망망신니의 추악한 모습을 되
새기며 염방채 쪽으로 걸어갔다.
염방채는 실신 중이었다.
가장 큰 상처는 복부에 난 외상(外傷)이었다.
제소옥이 치를 떨며 말했다.
"청성파 안에서 입은 상처입니다. 청성파를 점거하고 있는 수라신궁
의 도배들이 화기(火器)를 던져 이렇게 되었습니다."
"흠, 애석하게 됐군."
"예?"
"너무 서둘렀네."
"어, 어인 말씀입니까?"
"청성파는 빈집이 되었네. 자네가 하루 늦게 들어갔다면 이런 낭패를
겪지는 않았을 것이네."
"아, 그럼 태상맹주께서 벌써……?"
제소옥은 냉운을 신같이 존경하는 눈치였다.
그는 감개무량해하며 말을 이었다.
"사, 사조(師祖)는 어찌 되셨는지요?"
"청성은옹은 구출되었네."
"맹주의 은혜가 하해(河海) 같습니다."
"허허…… 칭찬 들을 처지는 아니니, 더 이상 부추겨 말하지 말게."
냉운은 약간 처량히 말하며 염방채의 상세를 살펴보았다.
'큰일이군. 치료가 늦어 아주 심각한 상태가 되었군.'
냉운은 염방채가 사경을 헤맨다는 데 긴장하며 품안에서 푸른 옥병을
꺼내 얼른 마개를 땄다.
금단 한 알이 굴러 나왔다.
지켜보고 있던 제소옥은 그것이 삼선단이라는 데 경악했다.
"지, 지난번 저를 구하신 분이 바로 태상맹주셨군요?"
제소옥은 염가장 안에서 슬쩍 스쳐 지나갔던 흑의인이 바로 눈앞의
협맹 태상맹주라는 데 경악했다.
'진정 대협객(大俠客)이시다.'
제소옥은 냉운이 공을 바라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감
격하게 되었다.
냉운은 마지막 남은 삼선단을 염방채의 입에 넣어 준 후 염방채의 천
령개에 손을 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몸 근처로 신령스러운 흰 기류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짙어져 냉운과 염방채의 몸을 완전히 에워싸 제소
옥이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절, 절세내공(絶世內功)이다. 이제 협맹이 되살아나는 것은 시간문
제다!"
제소옥은 또 한 번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흰 기류는 짙게 형성되어 한동안 흐트러지지 않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대략 밥 한 끼가 먹을 시간이 지나갔을 때였다.
"으음……."
이제껏 죽은 듯하고 있던 염방채가 신음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됐군."
냉운은 그 순간 진기를 거두어들였다.
그의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진기를 과다하게 사용했기 때문
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한 일이니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냉운은 염방채가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얼른 눈길을 돌리며 중
년인의 말투로 엄히 말했다.
"운기행공에 들어가시오!"
염방채가 얼떨떨해하자 제소옥이 얼른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오! 이분은 우리 협맹의 태상맹주이시라오!"
"네에?"
"자세한 이야기는 차후에 하겠소. 우선 운기행공해 상세를 치유하시
오!"
제소옥은 염방채가 살아났다는 데 안도의 숨을 내쉬며 염방채의 고운
손목을 살짝 붙잡았다.
염방채는 부끄러운 듯 귓뿌리를 빨갛게 물들이며 손을 살짝 빼내며
눈을 감고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냉운은 괴로웠으나 마음을 숨기고 무뚝뚝이 말했다.
"제 소협의 상처는 스스로 치료할 수 있네."
"제, 제 힘으로요?"
"놀랄 것 없네. 내가 한 가지 심법(心法)을 전수하겠네. 심법대로 운
용하면 상세를 회복할 수 있을 걸세!"
"감, 감사합니다."
"감사할 처지가 아니니 고마워할 것 없네."
냉운은 짤막히 말한 후 한 가지 오묘한 심법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봉황천극신공(鳳凰天極神功)이라는 것으로 강호에는 이름나지 않은
절세적 신공이었다.
가장 특이한 것은 요상(療傷)의 힘이었다.
제소옥은 냉운이 준 삼선단을 복용해 임독양맥이 타통된 후인지라 그
힘을 제대로 이용한다면 지금보다 세 배 강한 고수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을 잘 아는 냉운이기에 약을 주는 대신 신공을 전수해 주는 것이
다.
제소옥은 총명한 청년인지라 어려운 구결을 쉽게 이해하고 곧 운기행
공에 들어갔다.
냉운은 그들이 깨어나기를 지켜보며 씁쓸히 웃었다.
'제소옥은 나보다 더 염방채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염방채는 나를 따
르기보다 제소옥을 따르는 것이 낫겠구나.'
그는 염방채를 단념하리라 생각하고 한숨을 끊지 못했다.
얼마 후, 냉운은 그들이 운기행공을 거의 다 마쳤다는 것을 알고 호
법(護法) 서기를 중단하고 몸을 일으켰다.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이제 이 두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든 쉽게 패
하지 않으리라.'
냉운은 떠나기로 생각하고 염방채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염방채의 얼굴이 전보다 더 아름답게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도화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독하던 내외상(內外傷)
이 완전히 나아 본래의 아름다운 용모가 그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다시 낭자를 찾지 않겠소.'
냉운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을 슬쩍 휘둘렀다.
파파파팍!
지면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제소옥과 염방채 앞, 용사비등한 필체가 세 치 깊이로 쓰여져 나갔다.
<당분간 은거(隱居)하며 때를 기다리시오.>
냉운은 글쓰기를 마친 후 홀연히 날아올랐다.
휙!
냉운은 단숨에 수십 길 절벽을 날아올랐다.
냉운이 지면에 발을 대는 순간 곁으로 다가서는 흑삼청년 하나가 있
었다.
냉가장원의 충복 귀검사였다.
"주, 주인! 염 소저를 두고 떠나시겠습니까?"
귀검사는 냉운이 염방채를 제소옥에게 맡기고 떠난다는 것을 쉽게 이
해할 수 없는 눈치였다.
"귀검사! 모든 사람이 다 충정을 갖고 있지는 않다네. 특히 남녀지간
에 있어서는……."
"예? 염 낭자가 변심했습니까?"
"그것은 아니네."
"그러면 왜?"
"하하……, 변했다면 내가 변했지 않는가?"
냉운은 웃으며 먼저 몸을 날렸다.
귀검사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냉운의 뒤를 쫓아 음침한 숲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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