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6일 오늘의 역사
2023년 멕시코 고속도로에서 버스가 절벽 아래로 추락 최소 27명 사망
2020년 영화음악의 연금술사로 불린 엔니오 모리코네(이탈리아) 사망(93세)
2019년 서원 9곳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우리나라 14번째)
(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도동서원 남계서원 필암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
2018년 리비아에서 한국인 1명 피납
리비아 한국인 납치 사건은 2018년 7월 6일, 리비아 서부 자발 하사우나 지역에서 무장민병대 10명이 수로관리회사 ANC사 캠프에 침입해 물품을 약탈하고 한국인 1명과 필리핀인 3명을 납치하였다
한동안 정부의 엠바고로 납치 사실이 숨겨졌으나, 페이스북에 납치된 인원들의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납치 사실이 알려졌다.
사건 발생 27일이 지나서야 외교부가 이 사건을 공개하면서 여론의 역풍이 불었다.
또 한국인과 대한민국 국민의 납치 사실을 진작에 알고 구출 작전 수행을 지시까지 했음에도 휴가를 떠난 문재인을 향한 비난 여론도 거세게 일었다
우리정부는 피랍사건 후 외교부와 국가정보원을 중심으로 ‘범정부 합동 TF’를 구성해 리비아 정부는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요 우방국 정부와 공조해 인질 억류지역 위치 및 신변안전을 확인하면서 석방 노력을 기울여왔다.
2019년 2월 서울에서 개최된 한.UAE 정상회담에서 모하메드 왕세제가 문재인 대통령께 우리 국민이 석방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약속한 것을 계기로, UAE 정부가 사건 해결에 적극 나서면서 우리국민이 안전하게 귀환하는 성과를 이끌어 냈다
이들은 억류 315일 만에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2015년 재일동포 3세 유도선수 안창림 광주유니버시아드 73kg급에서 5연속 한판승으로 금메달
2013년 캐나다 퀘백 유조열차 셰일가스 폭발 47명 실종, 전원 사망 추정
2009년 '베트남전 기획자' 맥나마라 전 미국 국방장관 별세
191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맥나마라는 1946년 자동차기업 포드에 입사해 1960년 사장까지 오른 경제인 출신.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요청으로 국방장관에 취임하면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맥나마라는 1960년대 초반 미국을 베트남전 개입으로 이끈 장본인으로 비판 받기도 한다. 그는 케네디 정부의 베트남전 참전을 정당화하다가, 196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군사개입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해 1967년 평화협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1968년 국방장관을 사임한 이후에는 세계은행 총재에 취임해 1981년까지 재직하면서 가난한 국가들을 돕기 위해 헌신했다.
맥나마라는 1996년 출간한 자서전에서 베트남전을 '수치의 전쟁, 실패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당시 자신의 저지른 과오를 솔직히 인정했다. 2003년에는 '전쟁의 안개'란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해 베트남전에 관련된 당시 행정부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기도 했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 재산 기부,
2007년 대선 때 BBK설립 관련 광운대 동영상 유포로 위기를 맞자 대선 10일 앞두고 재산기부 약속, 대통령 취임 후 '전재산 사회환원' 공약 지키라는 압박에 331억4200만원 상당의 자산 청계재단에 출연, 2010년 3월 첫 번째 장학생 451명 선발해 장학금 지급. 그 뒤 장학금 액수 계속 줄고 있으며 청계재단은 은행에서 50억 원 대출해 이명박 빚 갚음
2005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2012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런던 확정
2004년 최후의 마에스트로(거장) 카를로스 클라이버 타계
클라이버는 1930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명한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 부친이 나치정권에 항거하면서 1935년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수학했다. 클라이버는 1954년 독일 포츠담에서 지휘자로 데뷔, 독일·스위스·이탈리아 오페라무대서 이름을 날렸다. 뮌헨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빈 필하모닉과 즐겨 공연했다. 그가 완벽주의 예혼을 담아낸 ‘장미의 기사’ ‘오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 ‘엘렉트라’ 등 오페라와 ‘브람스 교향곡 4번’ ‘베토벤 교향곡 5번, 7번’은 걸작으로 꼽힌다.
2004년 런던 하이드파크에 다이애나 추모 분수 제막
지난 97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빈을 기리는 분수가 런던 하이드파크 내에 생겼다. 시어머니였던 엘리자베스 2세는 지난 6일 열린 ‘다이애나 분수’ 제막식에서 “그녀는 주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내 손자(윌리엄과 해리 왕자)들에게도 많은 행복을 줬고, 사람들을 완전히 바꾸게 만든 사람이었다”는 내용의 추모 연설을 했다.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상태에서 97년 숨진 뒤 소원해졌던 다이애나의 친정 스펜서가(家)와 왕가인 윈저가 사람들은 이날 기념식에서 다이애나 사후 처음으로 함께했다. ‘다이애나 분수’는 작년 6월 착공해 1년 만에 하이드파크 서펜타인 호수 남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4년 주간조선, 국내 첫 신문사 발행 시사잡지 ‘신조선’ 창간호 발견해 일반에 공개
2004년 7월 6일 주간조선이 국내 언론사가 발행한 최초의 잡지 ‘신조선(新朝鮮)’ 창간호 원본을 찾아내 일반에 처음 공개했다.
조선일보사가 1927년 2월 10일자로 발간한 이 잡지는 안재홍 당시 조선일보 주필의 ‘20년 후의 극동정세’를 비롯, 정치·경제·사회·이데올로기·문예·과학·역사·스포츠·어린이 관련 기사·해설을 50쪽 분량으로 보도했다. 가격은 10전(錢)이었다.
‘신조선’은 지금까지 신문사가 발간한 최초의 잡지로 인정받아온 동아일보사의 ‘신동아(新東亞)’(1931년 11월 1일자)보다 4년여 앞서 발행된 것이다.
‘신조선’ 창간호에는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 조선일보 편집고문 문일평,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 최초의 러시아 특파원 김준연 등 일제하 애국지사들이 필자로 참여했다.
2000년 사법사상 최초의 대법관 인사청문회
2000년 7월 6일~7일 양일에 걸쳐 사법사상 최초의 대법관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박재윤 이강국 강신욱 배기원 이규홍 손지열 대법관 제청자를 상대로 열린 인사청문회는 국회의원들의 준비부족과 정파적 이해 그리고 인사청문회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보자 역시 자신들의 철학보다는 핵심을 비켜가는 답변으로 일관, 인사청문회의 운영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대법관 후보들의 답변이 대체적으로 형식적이어서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점과 활발한 논쟁과 토론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물론 진솔하고 자기반성적인 답변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대법관 후보들의 답변이 너무 정치적이다 못해 눈치보기식이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1998년 국산 중어뢰 ‘백상어’ 개발
1998년 7월 6일 잠수함에 탑재돼 적의 수상 함정이나 잠수함을 공격할 수 있는 중어뢰 ‘백상어’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됐다. 가격은 1발당 9억5천여만원이다. 당시 실전배치돼 있는 일부 209형 잠수함은 1발당 22억원에 달하는 독일제 어뢰 ‘수트’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개발로 모두 2천여억원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게 됐다.
‘백상어’는 ‘수트’가 잠수함에서 선으로 유도하는 유선 유도 방식인데 비해 적 함정의 소리를 스스로 추적해 공격하는 첨단 능동형 음향 호밍 어뢰이다. TNT 폭약 3백70kg에 버금가는 강력한 파괴력도 갖고 있다.
1990년 국방과학연구소의 주도 아래 lg정밀 등 13개 업체와 연구소 등이 참여해 개발에 착수했으며 국산화율이 94.3%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제원은 사정거리 30여km, 최고 속도 35노트(시속 65km),길이 6m,무게 1.1t,직경 19인치(4백83mm)이다.
1998년 미국 영화배우 ‘카우보이의 왕’ 로이 로저스 사망
지난 1911년 11월 5일 태어나 트럭 운전사와 복숭아농장 일꾼, 컨트리뮤직 가수로 전전했던 로저스는 37년 할리우드 리퍼블릭스튜디오에서 주급 75달러를 받고 노래하는 카우보이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로저스는 43년부터 54년까지 12년동안 기타와 6연발 권총을 둘러멘 매력적인 모습으로 ‘카우보이의 왕’이란 칭호를 받으며 일약스타덤에 올라섰으며 여론조사에서 흥행수익 1위를 기록했다.
그가 출연한 ‘서부의 별들 아래’와 ‘애리조나의 노래’ 등 87편의 영화는 특히 미국의 소도시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51년부터 57년까지 방영된 TV 연속극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는 결혼 14개월만에 첫 아내를 잃는 불운을 겪은 뒤 지난 47년 영화와 TV연속극에서 공연했던 데일 에반스와 재혼했으며 67년6월 애플 밸리의 자택에서 1백45㎞ 떨어진 곳에 자신의 애장품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1998년7눵6일 자택에서 출혈성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
1995년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 방한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이 김영삼대통령의 초청으로 2박3일간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하기 위해 1995년 7월 6일 오후 특별기편으로 공식 방한했다.
만델라대통령은 7일 오전 청와대에서 김영삼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두나라간 외교, 민주화투쟁 경험과 개혁,경제적 협력방안 등을 협의했다. 두 대통령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무대에서 계속 긴밀히 협조해 나가기로 하고,북한이 하루빨리 고립에서 벗어나 교류와 협력의 세계 조류에 합류해야 한다는데도 인식을 같이했다.
만델라 대통령은 한국의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하는 한편,남아공이 오는 2004년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도록 한국이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으며,김대통령은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3단계 통일방안 제시
민주적 절차의 존중, 공존공영의 정신, 민족 복리의 정신을 기조로
1단계 화해협력-2단계 남북연합-3단계 1개 국가의 통일
1991년 가또 일본 관방장관 종군위안부 1차조사결과 발표, 일본정부 관여 인정 강제성은 부인
1990년 몰라데노프 불가리아 대통령 학생과 야당의 압력으로 사임
1989년 카다르 헝가리 전 공산당 서기장 사망
카다르 전 서기장은 1956년 집권한 뒤 1970년대 헝가리를 다른 동구권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번창하고 개방적 국가로 이끈 인물이다.
농촌 출신인 카다르는 그의 나이 19세였던 1931년 불법단체로 규정됐던 헝가리 공산당에 들어갔다.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혁명에 성공했으며, 마티아스 라코시 정권 아래서 카다르는 내무장관에 임명됐다. 이미 카다르의 급신장을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라코시는 1951년 카다르에게 간첩죄와 반역죄를 뒤집어씌우고 티토주의자라고 몰아붙이며 그를 체포해 버렸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죽자 라코시 정권은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고, 카다르는 1954년 감옥에서 풀려나 복권됐다.
점증하는 국민들의 불만으로 라코시는 1956년 권좌에서 물러났으며, 거리로 몰려나온 수많은 학생들은 그 해 10월 23일 언론자유, 소련군 철수, 다당제 실시 등을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소련군이 진주하고 봉기가 진압되자 카다르는 소련의 도움으로 정권을 장악했으며 1958년 6월에는 나지 전 총리와 추종자들을 사형시키는 등 강권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나지가 사망한지 석달이 되기 전에 카다르는 경제개혁을 단행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헝가리는 조심스럽지만 자유주의 노선을 걷게 되었다.
1983년 서울 IPU(국제의회연맹) 중국가입 제의
1982년 미소전략무기감축협상(START) 개시
1982년 12회 대한국제회의 개막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로 제9대 대통령에 박정희 당선
1978년 오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으로 제9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공화당의 단일 후보로 나선 박정희 현직 대통령이 당선됐다.
출석 대의원 2,578명 가운데 2,577명으로부터 찬성표를 받았다.
나머지 한 표는 무효였다.
그는 이로써 1963년 직접선거로 5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5선을 기록하게 됐다.
하지만 박정희 그는 이듬해 10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이른바 유신체제 아래서 치러진 두 번째 대통령 선거였다.
첫 번째 선거였던 1972년 12월23일의 8대 대선처럼 9대 대선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졌고, 박정희 자신이 의장인 이른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였고, 무효 1표를 빼면 박정희가 100% 지지를 얻었다.
8대 대선에서 두 표였던 무효표는 9대 대선에서는 한 표로 줄었다.
유신체제 시절의 대통령 선거라는 것이 비장.공포와 코믹.익살을 버무려놓고 있던 터라, 도대체 그 한 표의 무효표는 어떻게 나오게 됐을까가 세간의 화젯거리였다.
물론 그것은 은밀한 곳에서의 화제였다.
긴급조치에 따르면 유신헌법을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해 비상군법회의에 넘긴 뒤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긴급조치를 비방한 자 역시 똑 같이 처벌할 수 있었다. 긴급조치는 그 조치를 비판하는 사람을 바로 그 조치로 처벌하는 재귀적(再歸的) 희극성까지 겸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 희극성은 합법적인 15년 이하 징역과 불법적인 고문이 통치자 멋대로 남발되고 저질러질 수 있었던 그 시절에는 끔찍한 비극성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제가 붙인 공화국 번호판을 떼어내고 새 번호판을 붙인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5.16 군사반란으로 제3공화국을 선포하더니, 대통령 직선제가 귀찮아졌는지 다시 군대를 앞세워 체육관 선거 제도를 도입하고는 그것을 제4공화국이라고 우겼다.
그 때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었다
1977년 온 나라에 큰 비(-7.10) 사망 235명 실종 40명 이재민 6만여 명
1976년 중국 인민해방군 ‘건군의 아버지’ 주덕 사망
1886년 사천성에서 태어난 주덕은 1911년 신해혁명 때 운남의 무장봉기에 참여, 지방 군벌 내에서 기반을 굳혔으나 1922년 프랑스를 경유,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에서 주은래를 만나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6년 귀국해 북벌에 참가했고 1928년 정강산에서 모택동 부대와 합류했다. 당시의 홍군이 ‘주모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의 군사능력은 뛰어났다. 1937년에는 국공합작으로 홍군을 개칭한 국민 혁명군 팔로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항일전을 지휘했다.
팔로군과 신4군을 합친 인민해방군의 초대 총사령관인 채로 1949년 건국을 맞은 주덕은 이후 국가 부주석, ‘10원수’ 서열 1위, 정치국 상무위원 등을 거쳤지만 정치적으로는 두드러진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문화대혁명 중에는 ‘4인방’의 군 원로들을 향한 공격을 비판하여, 임표나 강청 등 급진파로부터 “모택동에게 반대했다”고 규탄받아 정치국원으로 한때 격하되었지만 실각하지는 않고, 임표 추락사 이후 이날 사망할 때까지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유지했다.
1975년 코모로, 프랑스로부터 독립
1974년 시인 신석정 사망
1971년 재즈의 황제 루이 암스트롱 사망
1971년 사법파동
1971년7월 6일 서울지방 검찰청 공안부 검사들이 서울형사 지방법원 항소 3부의 2판사와 입회서기에 대해 구속 영장을 신청하면서 국가배상법을 둘러싼 사법부와 행정부의 갈등사건인 사법파동이 일어났다.
피의사실은 재판부가 증인검증을 위해 제주시로 출장했을 때 비행기탑승료․주대(酒代)․여관비 등의 명목으로 9만여 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배경은 대법원이 군인․군속 등 특수신분인 경우 국가배상청구권을 제한한 국가배상법 제2조 1항 단서조항을 인간의 존엄, 평등권, 국가배상청구권에 반한다는 위헌결정을 내린 데 대해 정부가 보복조치한 데서 기인한다.
이 사건의 여파로 100여 명의 판사가 집단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르러 당시 사법부 및 정계에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한국 사법사에 사법권의 침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1970년 미국, 주한미군 감축 정식통고
1970년 경남 마산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1억 년 전 동물 두개골 화석 발견
1966년 말라위, 영국연방내 공화국으로 독립
1964년 소련, 유엔 가맹국에 유엔 상비군 설치를 제안
1964년 키프로스 비무장지대 설치 위해 유엔군이 그리스 무장해제
1962년 한국-모로코 국교 수립
1962년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 사망
1961년 북한, 소련과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 조인
1960년 콩고, 레오폴드빌서 군대반란
1960년 정치 폭력배 공판
고려대생 습격사건의 주범들인 이정재와 유지광 등 '정치폭력배' 26명에 대한 첫 공판이 1960년 오늘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렸다.
피고들은 석 달 전인 4월 18일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행진을 벌이던 고려대생들을 습격해 2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혐의로 기소됐다.
이 사건은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피고들은 이날 공판에서 고려대생 습격사건이 반공청년단과 경찰이 공모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1959년 프랑스, 자르 관리권을 서독에 반환
1953년 유네스코(UNESCO) 한국지부 설치
1952년 세계평화평의회, 베를린서 특별총회
1950년 부산에 한미연합해군방위사령부 설치안 가결(총사령관에 맥아더)
1950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피랍
1947년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웰 지역에 UFO 잔해로 추정되는 물체 발견
2차대전 종전 2년뒤인 1947년 7월 히틀러의 유럽침공을 압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우주인이 지구를 침략했던 것이다. 이날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웰 지역에서 UFO 잔해로 추정되는 물체가 발견됐다.
언론은 물론 미 정부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외계인 5~6명이 비행접시 부근에서 사체로 발견됐고, 몇몇 외계인은 생존해 있었다. 맥 브라젤이란 농부는 자신의 목장에 떨어진 UFO의 파편을 보유하고 있다". 이전까지 생소했던 `UFO`(미확인비행물체)의 데뷔였다.
그러나 충격적인 이 사실은 곧 바로 부인된다. 미 정부의 해명자료는 `비행접시가 아니라 기상관측 풍선의 잔해`였다. 그럼에도 1947년 7월의 해프닝이 일으킨 UFO 열풍은 1947년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주전자 뚜껑을 찍은뒤 UFO라 주장하는 사람도 끊이질 않았다. `X파일`이란 드라마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제작사에 거금을 안겨줬다. 전쟁도 끝난지 2년이 지나 조금 한가해진 인류가 눈을 외부에 돌려 신기한 것을 찾았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1947년 7월의 해프닝 22년뒤, 지구인은 소속원을 달에 보냈으나 달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던 원주민 토끼를 만날수는 없었다.
1935년 제14대 달라이 라마 출생
1933년 미국 프로야구 첫 올스타전 개막
1933년 7월 6일 시카고 코미스키 파크에서 미국 야구 팬들의 열전인 올스타전이 처음으로 개최됐다.
1845년 알렉산더 크라이트와 그의 친구들로 구성된 뉴욕클럽에서 시작된 미국야구는 1850년대 뉴욕, 시카고 등지를 시작으로 야구클럽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1870년대에 들어 이내 미국인의 대중스포츠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876년 2월 메이저리그의 원조인 내셔날리그가 탄생했고, 1901년에는 아메리칸리그, 1905년에는 월드 시리즈가 탄생했다. 그리고 1933년 오늘 미국 시카고 트리뷴지(誌)의 스포츠 담당기자 아치 워드의 제안에 따라 올스타전이 탄생했다.
출범 초기 미국 프로야구의 최대 행사인 월드시리즈의 권위에 손상을 입힐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올스타전은 일반 팬들의 투표로 선발된 선수들의 맹활약으로 미국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 단, 투수는 국내와 다르게 팬투표를 거치지 않고 감독이 뽑은 선수가 출전하도록 했다. 참가선수 인원은 50명으로 제한했고, 감독 자리는 전년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팀의 사령탑에 주어지도록 했다.
이날 수용인원 4만9천명인 야구장은 올스타전을 보려는 팬들로 성황을 이뤘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코니 마크 감독과 뉴욕 쟈이언츠의 존 마그로 감독의 지휘 아래 펼쳐진 경기 우승은 베이브 루스의 2런 홈런에 힘입은 전자(4대2)에게 돌아갔다. 올스타전에서 벌어들인 입장료 등의 이익은 선수들의 후생자금으로 쓰였다.
1931년 카보런덤 발견, 흑연 제조방법을 완성한 미국의 발명가 애치슨 사망
1929년 중화민국, 신국도를 남경으로 결정
1928년 미국 워너브라더스사, 세계최초의 발성영화 `뉴욕의 등` 제작
1928년 미국에서 세계 최초의 발성영화 '뉴욕의 빛' 이 상영되었다.
우리 나라에서의 유성 영화 첫 작품은 1935년에 나온 춘향전이었다.
화면과 동시에 말과 음악 등이 나오는 유성 영화를 미국의 발명가 토마스 알바 에디슨이 발명,에디슨이 1889년 처음 발명한 영화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무성 영화였다.
1923년 소련연방, 연방국 헌법 제정
1921년 몽고 인민혁명정부 수립
1921년 이라크 바스라 지방 58.8℃ 세계최고기온 기록
1917년 영국장교 Th.E.로렌스가 지휘하는 아랍반군이 터키군의 요충지 아카바를 점령
1915년 대만의 대남서 항일봉기(서래암사건) 일어남
1914년 선린고교 한국학생, 일본학생과 충돌
1909년 일본 각의,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건 의결
1908년 로버트 피어리 북극 탐험 위해 뉴욕 출발
1907년 광복회 안휘성에서 봉기 실패
1907년 호남학회 창설
1906년 궁금령(宮禁令) 발포 송병준 어전회의에서 고종의 양위 주장
1905년 이승만, 윤병구. 미국 대통령을 방문하고 한국독립청원서 제출
1898(조선 고종 35) 대한철도공사(사장 박기종) 경의철도 부설권 획득
1893년 프랑스 작가 모파상 사망
노르망디의 미로메닐에서 태어난 모파상은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하던 중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참전한다. 전쟁은 그를 극심한 염전(厭戰) 감정에 빠지게 해 그의 발걸음을 문학으로 돌리게 했다.
1880년 모파상은 졸라를 포함한 6명의 젊은 작가들이 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취재한 단편집 `메당 야화`에 자신의 출세작인 중편소설 `비곗덩어리`를 싣는다. 1883년에는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을 발표함으로써 문명(文名)을 더욱 높였고,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이 낳은 걸작으로까지 평가받았다. 27세부터 신경증세를 앓아왔으나 고통속에서도 불과 10년간의 문단생활에서 단편소설 약 300편, 기행문 3권, 시집 1권, 희곡 몇 편 외에 `벨아미`(1885) `몽토리올`(1887) `피에르와 장`(1888) `죽음처럼 강하다`(1889) `우리들의 마음`(1890) 등의 장편소설을 썼다.
모파상은 사망 한 해 전에 니스에서 자살을 기도했으나 살아남아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다가 이날 숨졌다.
1885년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모로아 태어남
1880(조선 고종 17) 수신사 김홍집 일행 도쿄 도착
1877년 스페인의 대통령(1931-36) 알칼라 사모라 출생
1854년 `옴의 법칙`을 발견한 독일의 물리학자 옴 사망
1851년 최초의 전동기 발명한 데이번포트 사망
1832년 멕시코 황제를 지낸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 출생
1796년 러시아의 황제(1825-55) 니콜라이1세 출생
1599년 권율장군 사망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장군이 1599년 7월 6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62세였다. 장군은 1537년(중종 32년) 영의정 권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45세인 1582년 식년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에 급제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 목사로 부임한 권율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군사를 모집, 곽영, 이광 등과 함께 4만명의 군사로 경기도 용인에서 왜군과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광주로 되돌아온 권율은 의병을 다시 모집, 3천여명으로 충남 이치에서 적과 싸워 고바야카와의 대부대를 참패시켰다. 이 승리로 왜군들은 그후 다시 전라도 지방을 넘보지 못했으며, 이 싸움은 임진왜란 7년에 걸친 전투중 육군의 3대첩의 하나로 손꼽힌다. 권율은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 군사와 승병 8천여명을 이끌고 서울 탈환에 나섰다. 서울로 향하던 중 수원의 독왕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친 권율은 경기-충청-전라도의 관군 및 의병 총지휘관이 되어 1593년 2월 28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들어갔다. 이때 왜군들은 북쪽에서 서울로 퇴각 중 경기 벽제관에서 명나라 군사에 승리한 터라 사기가 드높은 때였다.
마침내 2월 12일 왜군들은 3만여명의 군사로 행주산성에 쳐들어왔다. 왜군은 이날 하루에만 9회에 걸쳐 산성을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 2만4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다. 권율의 행주대첩은 김시민의 진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승리로 권율은 도원수의 자리에 올랐다.
1535년 영국 사상가 토마스 모어 대법관시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단두대에서 처형
소설 `유토피아`의 작가 토마스 모어가 1535년 7월 6일 58세로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그는 법률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재학중이던 옥스퍼드대를 중퇴하고 런던법학원에 입학했으나, 대학 재학중에 르네상스 문화운동을 접하면서 인문주의자와의 교류를 시작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1511)도 모어의 집에 기거하며 쓴 것이다. 인문주의자란 르네상스 시기에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들을 연구하고 새로 편찬하던 학자들을 뜻한다. 법학원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으며 의회에도 진출했다.
1515년 통상외교문제로 네덜란드에 건너간 모어는 임무를 끝마치고 그곳을 여행하며 이상적 국가상을 그린 명저 `유토피아`를 쓰기 시작해 이듬해 귀국한 후 완성했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어원으로 `아무 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지만 오늘날에는 이상향과 동일시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유토피아`는 미지의 땅에서 실현된 종교적 관용, 평화주의, 교육평등 등을 묘사함으로써 중세말기의 유럽사회를 비판한 작품이다. 라틴어로 쓰여진 이 작품은 그의 사후 1551년에 영역됐다.
그는 탁월한 수완과 식견으로 헨리 8세의 신임을 얻어 1529년에는 대법관에 임명되었으나, 왕의 이혼에 끝내 동의하지 않아 1532년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534년 반역죄로 런던탑에 갇혔다가, 1535년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1935년 로마교황은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주었다.
1533년 서사시 `성난 오를란도`로 유명한 이탈리아 시인 아리오스토 사망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화형
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가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는 살아서 화형 당했지만 위클리프는 이미 죽어있던 사람이었으므로 시신이 파헤쳐져 화형에 처한 다음 강물에 던져졌다.
위클리프는 기존 교회질서를 신랄히 비판하고 교회개혁을 부르짖었던 사람이었고, 후스는 루터보다 1백년 전에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설교를 열정적으로 하면서 16세기 `종교개혁 전야의 종소리`를 울린 사람이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16차 공의회로, 목적은 주로 세명의 교황으로 분열된 그리스도교 세계를 재통일하라는 것이었으나 위클리프와 후스의 사상을 조사하고 교회를 개혁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공의회는 교회의 전체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는다는 내용의 교령 `사크로상타`를 공포하고, 또 교회의 올바른 정치를 위해서 공의회를 자주 열어야 한다고 공포했다.
공의회는 위클리프의 45개 조항과 후스의 30개 조항을 단죄한 뒤, 이들을 구제가 불가능한 이단으로 공포하고 세속 권력에 넘겨 화형당하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