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은주를 기억하며..
이은주라는
배우를 첨 알게된
것은 우울했던 내
유학생활 어느 하숙집에서
였다.
학교를
다니는 날이 아니면
일을 했기에 쉬는
날이라는 것이 거의
없는 내 삶에
무슨 일로 쉬는
날이 찾아왔고 그날
따라 북적이던 하숙집도
조용해 문득 거실에
놓인 비디오 꾸러미를
보았다. 그곳에는 허름한
재생용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된 <번지 점프를
하다>라는 영화가
있어 그것이 이은주를
처음 보게된 날이다.
이렇게
우연히 보았던 영화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극중
주인공 서인호랑 인태희
이름을 지금까지 기억할
정도로 좋아했고 글도
몇 편 썼다.
그리고 영화를 만든
김대승 감독이나 각본을
쓴 고은님은 어떤
동기로 시나리오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글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나름
추적해 보았다. 이렇듯
그때는 이은주를 기억하는
것이 그 영화를
좋하는 것에 연장선이었다.
물론
그 후로도 이은주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가
나오는 영화를 볼때면
이은주라는 배우를 보려고
택했으나 상당수는 이은주
말고는 크게 건질
것이 없는 범작이거나
심하게는 졸작에 가까워
상당히 아쉬웠다. 특히
변혁이라는 인간이 만든
<주홍글씨>라는 영화는 당최 뭔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유학생은 졸업을 하고
직장을 갖게 되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홀로 지내며 척박한 이민자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우울하게 지내던 2013년 어느
날 홍상수 감독이
만든 ‘오! 수정’을
보게 된다. 홍상수라는
거장이 만든 영화에
이은주가 나왔으니 사실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돌렸다가 받게된
그 감동이랑 영광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은
비단 나 혼자
받는 것이 아니요
2001년
동아 신춘 문예에
영화평론 부분 대상이
바로 “오! 수정’이라니
많은 이들이 그렇게
느꼈음이다.
이런
일들이 반복이 되자
이은주가 내 삶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미처
보지 못했던 이은주
영화들을 다시 구해보기
시작했고 지난 시간
이제는 잊혀진 기사들
사진들까지 구태여 찾아
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호기심내지
관심표현 일 것이다.
하지만
진공 포장 속
같이 조용한 내
삶에 따스한 미소를
보내주는 이은주라는 배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폐허처럼 된
이은주 카페를 찾아
가입하고는 홀로 늦은
열성팬 활동을 시작하거나
10년도
더 지난 이은주
기사를 기어이 찾아내어
그 아래 아련한
댓글을 쓰고 있다.
대게
열혈 팬들이 그렇겠지만
어떤 배우나 가수
등 흔히들 말하는
스타라는 사람이 나만이
가지고 있는 (그
특수한) 내 상처를
어루만줘 주고 그로
인해 기쁨이나 회복을
내가 느끼게 되면
그때 부터 그들은
단순한 스크린 속
영웅이 아니고 내
삶에 거대한 영향력을
주는 구세주로 변하고
만다.
이은주가
지금 그렇다.
이런
날 보고 후배들은
이야기한다.
다
늙어서 무슨 사생팬처럼
그러냐고.
더구나
벌써 10 년 가까이
지난 배우 이야기를
이제사 마치 새로운
것처럼 들고 나와서는
말이지..
하지만
외로움은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느끼듯 위에서
이야기한 팬으로서 마음
역시 나이를 먹는다고
별단 다를 것은
없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사랑스런 사람을
보면 가슴은 뛰니까.
이은주로
인해 난 요즘
행복하다. 하지만 동시에
순간 순간 무척이나
혼돈스럽다.그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여배우를 좋아하는 일은
이루어 질 수도
없을 뿐더러 만날
일도 없기에 내
감정이 느끼기로는 영화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는 꼭 어디선가
살고 있을 거라는
착각이 심하게 든다.
내
감성은 언제나 이성을
이기기에 신문에서 죽었다
말하고 모두가 인정하는
그 죽음이 내게는
도무지 현실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냈던
‘죽음’이라는
단어가 이은주로 인해
새롭게 각인 되고
있다. 죽음이 무섭거나
슬프지 않게 되려고
한다. 이은주도 마주했던
죽음이라 생각하니 측은하며
애닳기 그지 없다.
자유로에
청아 공원이라는 곳이
있단다. 납골당 같은
곳인가 보다.
이제
이은주는 그곳에 영원히
잠들어 있다고 하는데
그 설명을 읽고
다시 사진을 보니
정말로 그 죽음이
조금씩 현실로 느껴지고
숨이 막힐 정도로
애통하기 짝이 없다.
난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며 이런
상황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이은주를 좋아하는 이
마음이 단순 팬심이
아니라 진짜로 연인을
사랑하는 (짝사랑 일지라도)
마음이라고 해도 크게
문제가 없을 듯
하다. 어차피 아무일도
일어 나지 않는
내 삶이기에..
이렇게라도
누군가에게 위로 받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내게는 큰
영광이고 행복이다. 이은주는
지금 내게 그런
위안을 주고 있다.
죽은 이은주가 산
나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팬으로서
그리고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1980년 생이라는
그 아름다운 배우의
이력서 첫 줄을
보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너무 벅차고
만 24세라는 그
다음 설명에서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 온다.
이제
그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 사람의
시계는 마치 그
웃음처럼 멈춰 버리고
말았으나 그 사람이
내게 이렇듯 큰
위안과 사랑을 준다니
현대 종교도 하지
못한 일을 이은주가
내게 해주고 있구나
싶다.
그러니
이은주는 지금 내게
성스런 종교요 사랑스런
애인이며 귀여운 동생이고
착한 친구이다. 이은주로
인해서 내 삶이
조금은 덜 타락하고
착하게 변하려고 까지
한다.
나를
위해선, 이런 행복한
마음이랑 기쁨이 사진
속 이은주 웃음처럼
오래가기를 바라고 그를
위해선, 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리고 기독교에서
용납하지 않는 자살을
했다고는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기도한다.
신은 전능하사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니
말이다.
산
자는 올라갈 수
없다는 천국도, 심지어
그 외아들이며 신
자체인 예수도 죽어서
가야만 했던 천국도
신께서 너무도 사랑한
에녹은 그 죽음마저
안타까워 산채로 하늘로
올리신 전능자 아니신가?
神신,
비록
제가 믿음은 약하나
당신에게 기도합니다.
당신을
사랑했던 당신의 딸
이은주는 비록 당신이
금한 일을 했다고는
하나 당신께선 전능하시니
부디 그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천사가
되게 해주소서.
그게
다 입니다.
다시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로 와서,
이은주
당신이 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수
해 전이건만
이제사
이렇게 기억하고 찾아와
안타까워 하는 것이
아무런 의가 없다고들
하지만
너무
먼 곳에 있어서
이제서야 찾아 왔다고
미안한 말을 전
합니다.
하지만 영화 속 인태희
대사처럼 당신도 내게
꼭 그런 사랑스런
눈으로 괜찮다고.. 따스하게
웃으며 말하실 것같아서
더욱 나를 슬프게
합니다.
이것으로
내 글은 마칩니다.
안녕.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平生)에차마
그대를 잊을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올 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이런 詩(1933),
李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