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군의 포로가 된 한국군들............
[1]전쟁초기- 6월25일 개전부터 한강교가 폭파될때까지 한강이북지역에 투입된 한국군 부대는 1사단,2사단,7사단,3사단22연대 수도경비사령부등 총 4개사단의 병력이었습니다.
한강교가 폭파된후 퇴로가 막힌 이들은 모든 중장비와 차량,개인화기들을 버리고 분산철수를 했는데 전쟁전 98.000명이던 한국군 총병력이 개전후 4일만에 22,000명수준으로줄어들고 말았습니다.
[2]초산,온정리전투-50년10월 초산에 진격한 한국군 6사단 7연대와 온정리로 진출한 2연대는 중국군에 포위되어 각각 분산철수2개연대 병력중 총 75%의 병력손실을 입었고,7연대장교중 부연대장(최영수 중령),2대대장(김종수 중령),3대대장(조한섭 소령)이 포로가 되었고,12명의 중대장중 7명정도가 생환했습니다.
[3]덕천,영원전투-50년 11월26일 중국군의 공세에 한국군 2군단소속인 덕천의 7사단과 영원의 8사단이 분산철수 이때 세연대장(박승일,고근흥대령,김영로중령)이 포로가 되고,한연대장(박광혁 중령)은 전사 사단의 거의 모든 중화기와 차량을 손실당하고 미 8군의 동측방이 노출됨으로써 모든 작전이 망쳐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4]횡성전투-51년 2월 강원도 횡성에서 8사단이 중국군에 포위되어 분산철수, 105미리곡사포 14문, 차량 68대, 통신장비 249대,박격포 87문, 로켓포 137문, 기관총 164정, 칼빈소총 2,389정, M-1소총 4,096정의 장비손실과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된장교 323명중 10연대장(권순태 중령)과 참모전원, 16연대 부연대장,7명의 대대장, 30명의 중대장이 포함.사단전체의인명손실 7,142명
[5]사창리 전투-51년 4월 중국군의 춘계공세시 가평북방의 사창리와 화악산 일대에서 한국군 6사단이 중국군의 공격을 받고분산철수 소총 2,263정,자동화기 168정,로켓포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차량 87대의 손실을 입었고,6사단을 화력지원하던 미 지원포병도 105미리 곡사포 15문,4.2인치 박격포 13문, 242대의 무전기 차량 73대 손실을 입었습니다.
[6]현리 전투-51년 5월 16일 중국군의 5월공세시 현리지역에서 포위된 한국군 3군단소속 3사단과 9사단은 하진부리 방면으로 분산철수,양개 사단이 보유한 모든 중화기와 차량,보급품을 망실,하진부리에서 병력을 수습한 결과 3사단은 3,621명이 귀환 정원의 34.3%,9사단은 4,582명이 귀환 정원의 40%정도를 수습,그 후에도 병력들의 복귀가 계속 이어져 5월 27일까지 70%정도의 병력과 30%정도의 장비수습이 이루어짐, 한달이 걸려 귀환한 병사도 있었습니다. 조창호 소위도 이때 포로가 되었습니다.
[7]금성전투-53년 7월 13일 중국군의 마지막 대공세시 금성돌출부를 방어하던 한국군 수도사단,6사단,3사단,8사단,5사단 장병들 이 많은 희생을 당했습니다. 병력손실은 모두 합쳐 20,000명이상의 전사자,포로가 발생했으며,특히 수도사단 1연대는연대 지휘소가 피습 작전지도차 나온 부사단장(임익순 대령)이 포로가 되고,지원나온 기갑연대장(육근수 대령)이 전사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귀환 국군포로인 양순용 일등병도 이때 포로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