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수의조선 愛愁─朝鮮 Korean Lament(비가,悲歌)
류지미 2023. 6. 6. 18:16
홍난파 洪蘭坡
洪蘭坡홍영후(洪永厚), 나소운(羅素雲), Y·H생, 도례미(都禮美), 도레미생(生), ㄷㄹㅁ, 솔·파생(生), ㅎㅇㅎ
홍난파 (洪蘭坡 1897~1941) : 본관은 남양(南陽).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고, 필명으로 나소운(羅素雲), Y·H생(生), 도례미(都禮美), 도레미생(生), ㄷㄹㅁ, 솔·파 생(生), ㅎㅇㅎ 등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홍준(洪埻)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형은 한국에서 안이비인후과 영역을 개척한 홍석후(洪錫厚)이다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현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났다. 2세 때 서울 정동으로 이사했다. 아버지 홍준은 미국 장로교 목사인 언더우드가 설립한 새문안교회에서 1892년 세례를 받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외국선교사의 한글성서번역작업에 참가하였으며, 언더우드의 조선어선생이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교회음악에 접하였고 서양음악에 입문하였다. 어릴 때 한학을 수학하였고 사립 영신소학교를 다녔다.
1912년 YMCA 중학부를 졸업.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양악부를 수료한 뒤 1917년까지 동 양악부의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현 동경술대학)에서 2년간 수학을 하였으며, 일본 유학시절인 1919년 음악, 미술, 문학의 3종 예술의 주체로 한 순예술잡지인 <삼광(三光)>을 창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을 역임했다.
귀국 후 1920년 <봉선화>를 작곡했고, 1922년 음악연구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하여 본격적인 작곡 및 연주활동과 평론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에는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고, <세계명작가곡선집>을 편저로 발행했다. 한편 1920년에 단편소설집 <처녀혼>을 썼고 1923년에는 장편소설인 <폭풍을 지난 뒤>를 발표하여 문학적 재질도 과시했다.
192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음악학교에 입학했으며, 1927년 동경시교향악단(NHK교향악단의 전신)의 제1바이올린 주자가 되었고, 1929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중앙보육학교 교수를 거쳐 1931년에 조선음악가협회 상임이사가 되었다.
「봉선화」(1920), 「고향의 봄」(1929) 등의 동요, 「애수의 조선」(1927) 등의 기악곡 등 150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하였으며, 『악전대요』(1916.4) 같은 음악관계 서적과 『조선동요100곡집』(1929.10, 1930.4, 1933.5) 같은 작곡집을 발간하였다.
1931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의 셔우드음악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다가 1933년 2월에 귀국하였다. 그 후 이화여전 강사가 되었고, 홍성유, 이영세 등과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트리오를 조직하여 연주활동을 하였다. 1934년에는 빅터레코드사의 음악고문이 되었고, 1936년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가 되어,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조직, 지휘자로 활약을 하였다. 1938년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1941년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
중국에 있던 안창호는 국내에서 성격이 유사한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동시에 조직되자 두 단체의 합동을 적극 권유했다. 흥사단의 국내 조직은 1926년 1월 통합조직 ‘수양동우회’를 탄생시켰다.
1937년 6월 조선총독부는 동우회 회원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에 착수하여, 1938년 3월까지 모두 18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하였고 이 중 41명을 정식으로 기소하였다.
1937년 6월 홍난파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현제명과 함께 검거되었다.
홍영후는 미국에서 당한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고 있다가 회복되긴 했지만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재발하면서 크게 악화되었다. 종로경찰서에서 72일간의 옥고를 치른 후 건강악화와 강압에 의해 친일 작곡가로 전향했다.
1941년에는 적십자병원, 경성요양원(지금의 삼육서울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게 되면서 뇌결핵으로 이어져 1941년 8월 30일 경성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향년 44세)
애수의조선 愛愁─朝鮮 Korean Lament
* Lament :비가(悲歌)
두도막 노래형식으로 된 '애수의 조선(愛愁─朝鮮)'은 1926년 연악회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서구에서 하나의 경향을 이룬 바이올린 소품, 특히 바이올린의 대가인 크라이슬러(Kreisler,F.)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인디언 라멘트라는 곡조에 대비하여 ‘코리안 라멘트’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32년에 홍난파 자신에 의해서 초연되었고 연주회 때마다 중요한 곡목으로 등장하였다.
‘애수의 조선’이라는 제목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함축되었고, 4분의 3박자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작품의 기조에 특별히 전통적인 기법이 정립되어 있지는 않다. 단지 작곡자가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관계로 자신의 기교적 역량과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는 충분히 화제가 되었다.
1930년대 중반에는 레코드로도 취입되어 한국 바이올린 소품의 전형이 되었다. 당시 일제강점기하에서 억압받던 시대에서 ‘조선’이라는 제목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지녔으며, 1930년대 한국 창작의 상징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홍난파(洪蘭坡, 1898년 4월 10일(음력 3월 19일) ~ 1941년 8월 30일) 홍난파는 한국의 음악가이다.
본관은 남양 홍씨 토홍계이다.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나 홍난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수원군 남양읍 활초리(현재의 화성시 남양동)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YMCA 중등부를 졸업하고 15년 조선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 양악부(洋樂部)를 마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돌아왔다.
20년 '봉선화'를 작곡하고, 22년 연악회(硏樂會)를 조직했으며, 잡지 '음악계'를 발간했다. 26년 다시 도쿄 고등음악학교에 편입하고, 이듬해 도쿄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가 되었다.
31년 귀국, 중앙보육학교 교수 등을 지내고, 미국 셔드우드 음악학교에서 연구한 후 40년 우리나라 최초의 관현악단을 조직, 서양음악 보급에 힘썼다. 우리나라 초창기 악단의 선구적 개척자로서,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민족적 정서와 애수가 담긴 가곡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고향의 봄' 등의 동요 곡을 남겼다. 저서에는 '음악만필' '세계의 악성' 등이 있다.
애수의 조선-홍난파-Korean Lament (비가,悲歌)1931년
(3) 애수의 조선-홍난파, 1931년 - YouTube
작곡연주 : 홍난파, 1931년
애수의 조선
홍난파, 콜럼비아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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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가곡제 2022애수의 조선 Korean Lament
홍난파 작곡, 김한기 편곡 Vn. 이경선, 소리얼필하모닉오케스트라(지휘 김봉미)
(3) 홍난파가곡제 2022 / 애수의 조선 (홍난파 작곡, 김한기 편곡) - Vn. 이경선, 소리얼필하모닉오케스트라(지휘 김봉미) - YouTube
홍난파가곡제
한국가곡 세계화를 위한 송년기획
Hong Lanpa's Music Festival
울 밑에 선 봉선화야
2022년 12월 26일(월) 7:00PM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 콘서트홀
한국가곡 100년의 노래
2022년 12월 27일(화) 7:00PM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 콘서트홀
연주 : 소리얼필하모닉오케스트라(지휘 김봉미)
홍난파가곡제 준비위원장 : 정희준
(사)홍난파의집 대표 : 이문태
(사)홍난파의집 이사장 : 홍익표
예술감독 : 임청화
주최 : (사)홍난파의집
후원 : 서울특별시, (사)난파기념사업회, K CLASSIC GAGOK, 우리은행
협찬 : 라인문화재단, (주)봉선화식품, 유넥스코리아, (사)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 (주)누리엘 봉숭아 물들이기 체험행사
행시장 로비에서 17:30~18:40 동안 양일간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