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당의 입김이 천하를 호령하다
정학수(경기도사 편찬위원회 집필위원)
최근에 대형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이를 미리 예언했다하여 항간에 유
명해진 점쟁이들이 있다. 무슨 보살이니 도사니 하는 이들은 대기업에 초빙되어
신입사원을 뽑을 때에 면접관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자문을 해주기도 했었다고 한다. 평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다가도 곤경에 처하거
나 결정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
울인다. 첨단 과학의 시대에 살면서도 운수를 점쳐 보고 그들이 제시하는 처방
에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체계적인 교리와 의식 그리고 조직을 갖춘 종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속으
로 대표되는 민간신앙이 아직까지 전승되고 있는 것은 생명력을 유지할 만한 그
만한 역할을 갖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렇다면 불교국가인 고려에서 이러한
무속은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귀신을 숭배한 사람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사람들은 병이 나서 아파도 약
을 먹지 않고 오직 귀신을 섬길 줄만 알아 저주하여 이겨내기를 일삼는다. 본래
귀신을 섬겨 주문과 방술을 알 따름이다. 백성들이 재난이나 질병이 생기면 개
경 북쪽에 있는 숭산신사에 가서 옷과 말을 바치고 기도한다”고 하여, 고려 사
람들이 귀신을 무척 숭배한다고 기록하였다. 불과 두어 달 머물다간 외국인의
눈에 비친 오만하고 과장 섞인 내용이기는 해도, 고려시대 민간에 성행한 무풍
의 정도를 짐작케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무풍에 관한 기록은 이미 태조 때부터
나타나고 있다.
918년(태조1)에 담당 관리가 “전대의 임금도 해마다 한겨울에 팔관재를 크게
베풀어 복을 빌었으니 그 제도를 따르자”고 건의하자 태조는 이를 받아들여 그
해 11월에 팔관회를 열었다. 팔관회는 원래 출가하지 않은 일반 신도들이 이날
하루 동안만은 여덟가지 계율을 지키면서 승려처럼 경건하게 살아보고자 만든
불교의 법회였다.
그런데 이 때에 벌어진 모습을 보면 이 행사가 순수한 불교 행사는 아니었던
듯하다. 대궐 안 넓은 광장에 갖가지 등불을 설치하여 밤이 새도록 땅에 가득히
광명을 비추었다. 또 두 곳에 각각 높이가 15미터나 되는 연꽃 형상의 채색 무
대를 높게 설치하고 그 위에서 온갖 유희를 벌였다. 사선악부라는 악단이 나와
흥을 돋구었으며, 용. 봉황. 코끼리. 말. 수레. 배의 가장 행렬이 벌어졌다. 모든
관원이 정복 차림으로 예를 행하였으며, 밤낮으로 즐기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개
경을 뒤덮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경건한 불교 법회라기보다는 음가무가 벌어지
는 신명나는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이 때 태조는 위봉루에 올라 이를 관람하고, 그 명칭을 ‘부처를 공양하고 귀
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이라 하였다. 그가 남긴 훈요10조에는 팔관회에서 즐겁
게 하는 귀신의 종류가 구체적으로 거명되어 있다. 하늘, 큰 산, 큰 강, 그리고
바다의 용이 바로 그것들이다. 더욱이 국가에서는 이 신령들에게 대왕이나 장군
이니 하는 작호를 내려 주었으니, 그 신들의 이름은 오늘날 무당들이 섬기는 것
과 다를 바 없다. 그러면 개인적인 신앙 형태는 어떠했을까.
무인집권기의 권력자인 이의민은 본래 글을 모르며 무당을 믿었다고 한다. 고
향인 경주에 나무로 깎아 만든 귀신상이 있었는데 그 곳 사람들은 이를 두두을
이라고 불렀다. 이의민은 집안에 당을 짓고 그 귀신을 맞아다가 날마다 제사하
면서 복을 빌었다. 그것이 신통했는지 그는 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
하여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당에서 이상한 곡성이 들려왔다.
그가 괴상히 여기고 물으니, “내가 너의 집을 오랫동안 지켜주었는데 이제 하
늘이 화를 내리려 하니 내가 의탁할 곳이 없어서 울고 있다”라고 하였다. 과연
얼마 안 있어 그는 최충헌 형제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하였다.
이처럼 지배층 가운데서도 집안에 신당을 마련하여 귀신을 섬기는 경우가 있
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개인적인 신당을 갖추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들은
안녕을 위하여 귀신에게 의뢰할 일이 생기면 명산 대천에 있는 신당에 찾아가
빌거나 무당에게 굿을 청하였다. 이규보의 글을 보면, 이 때에 벌어진 굿판의 모
습은 오늘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규보가 개경에 살 때 이웃에 무당집이 있었는데, 날마다 많은 남녀들이 구
름같이 모이고 북, 장구 등의 시끄러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무당은 주름진
얼굴, 반백의 머리에 대략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들보에 닿을 듯이 동동
뛰는 중간중간에 새소리 같은 목소리로 늦을락 빠를락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예
언이 신통하게 잘 맞는다 하여 신도들은 손비빔하며 곡식과 옷감 등을 바쳤다고
한다. 타고 있는 두 자루의 촛불에 떡이며 고기, 과일로 질편하게 차린 굿상 뒤
신당의 벽에는 무신도가 액자처럼 모셔져 있고, 신이 내려오는 길목인 신간과
굿상 곁에는 굿을 차린 사람이 바친 재물이 수북이 쌓여 있는 모습을 쉽게 상상
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사회는 위로는 국가. 왕실에서부터 아래로는 지배층과 일반 백성
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생사화복에 관한 것을 귀신에게 상당히 의존하였다.
서슬 푸른 무당의 권세
고려시대에는 지방관이 임지에 부임하면 그 지방의 유력한 신들을 찾아 인사
를 드려야 했다. 만약 이것을 어기면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한 때 등주(함경남
도 안변)의 성황신이 여러 번 무당에게 내려 국가의 길흉과 화복을 신통히 알아
맞추었다. 그 지방의 관리였던 함유일은 성황당에 제사할 때 고개만 숙이고 절
하지 않았다 하여 파면당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토속신들과 그 신들을 섬기는 무당들의 권세가 대단하였
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이같은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 신령들이 국토를 지
켜주고 백성을 보살펴 준다고 여겼고, 권력이나 재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불가
항력의 재난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사람들의 바람을 신령과 교감하는 무당을 불러
기우제를 지냈다. 1021년(현종 12)에는 뜰 가운데에 흙으로 용을 빚어 놓고 남녀
무당들을 모아 비가 오기를 빌었고, 1132년(인종11)에는 관청 앞에 무당 300여
명을 모아 놓고 비를 빌었으며, 6월에 또 무당을 모아서 비를 빌었다고 한다.
1173년(명종3)에는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개울과 우물이 모두 마르고 곡식
들이 말랐으며 전염병까지 발생하여 사람들이 많이 굶어죽었다. 그러다 보니 심
지어는 사람의 고기를 파는자가 있게 되자 무당을 모아 놓고 비를 빌었으며, 근
신들을 전국에 파견하여 명산 대천에서 또 빌었다. 이런 때에 왕은 불기운을 멀
리하고 물기운을 끌어오기 위하여 물과 관련되는 것이면 명산 대천 어디에든 기
우제를 지내고, 여기에서 무당을 동원하여 의식을 담당케 하였다.
1146년(인종24) 왕이 병들자 무당에게 점을 쳐 보게 하니 모반죄로 축출당한
척준경이 그 병의 원인이라른 점괘가 나왔다. 이에 왕은 무당의 지시에 따라 척
준경에게 문하시랑평장사라른 벼슬을 추증하고 그 자손들에게 관작을 주었다.
그리고 내시를 파견하여 김제군에 신축한 벽골제의 뚝을 헐어버리게 하였다. 이
사례는 무당의 점복과 치병의 기능을 동시에 보여준다.
한편 무당과 관련된 폐단도 많았다. 고종 때 홍복원은 자신의 집에 머물던 왕
족인 영녕공 준을 미워하여 무당을 시켜 몰래 저주하게 하였다. 그 무당은 왕준
의 형상대로 나무인형을 만들어 손을 묶고 머리에 못을 박은 다음 땅에 묻거나
우물에 넣어 저주하였다. 또 충렬왕 때에는 무당과 술승들이 공주를 저주하여
병들어 죽게 한 사건이 있었다.
영험하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던 신령의 권위를 빌려 위세를 떨치고 농간을 부
린 무당의 사례도 있다. 충렬왕 때 심양이라는 사람이 공주 지방의 관리가 되었
을 때의 일이다.
장성 지방에 한 여자가 있었는데, “금성대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네가 만약
금성신다의 무당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반드시 네 부모를 죽일테다’라고 하였
기 때문에 놀라운 나머지 무당이 되었다”라고 떠벌였다. 그 때 그녀는 같은 지
방 사람인 공윤구와 사통하고 있었다. 그녀가 귀신의 말이라 하면서 “내가 장
차 원나라에 가겠는데 반드시 공윤구를 데리고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
여 나주의 수령이 역마를 그에게 내주었다. 나주출신의 관리가 왕에게 그 무당
이 신기하고 영험하다고 말했으므로 왕은 그 무당을 맞아다가 접대하려 하였다.
때문에 무당 일행이 지나가는 고을에서는 수령이 예복을 입고 교외에까지 나가
서 맞이하여 후하게 접대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공주에 도착하였으나 심양은 그
들을 맞이하지 않았다. 무당이 화를 내면서 귀신의 말이라며 “나는 반드시 심
양에게 재앙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고는 되돌아가 다른 곳에서 숙박하였다. 심
양이 사람을 시켜 그들을 엿보게 하였더니 그녀는 공윤구와 함께 자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체포하여 문초하자 모든 사실을 자백하였다.
무당들은 귀신을 전문적으로 받들면서 신령과 교감하는 역할을 국가로부터도
인정받아 사회의 안정을 가져오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위와 같이 때로는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을 악용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민초의 동반자 무당
무당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과 의례 그리고 신봉자 집단 등으로 이루어진 종교
형태를 무속. 무교. 무격신앙이라고 하는데, 이는 흔히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
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신앙이라는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민간신아의 부류에
넣어 부르고 있다. 우리가 민간신앙하면 으레 무속신앙을 떠올리는 것은 무속이
지니고 있는 전문성 이외에도 오히려 민초들의 사고와 종교의식이 무속신아에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속의 중심인 무당은 인간의 생사
화복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임을 자처하고 있고 민초들은 그것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것이다.
잦은 자연재해와 전쟁 그리고 힘있는 자들 밑에서 시달이며 춥고 배고픈 생활
을 하던 민초들에게근 유교나 불교가 강조하는 정신적 윤리성이나 내세적 구원
의 의식이 자리잡을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현세에 굶지 않고 병들어 죽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 당면 문제가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
었다. 따라서 무속은 민초들에게 베풀어 주는 역할, 곧 불안의 해소와 생활에 희
망을 주고 삶의 이상과 의미를 부여하는 중대한 종교적 기능을 해왔던 것이다.
무속은 불교와 같은 종교가 수용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
이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조선의 단군신화에 무속적 요
소들이 나타나고 있어 무속이 고조선 시기를 전후해서 이미 우리 문화 속에 자
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초기 유교적 사관에 입각하여 편찬한 <고려사>에서는 고려시대의 무속
을 음사라 하여 세상에서 마땅히 없어져야 할 것으로 모았다. 남녀가 굿판에 모
여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유교적인 안목에서 부정적으로 본 것은 당연한 것이
고, 또 가나호 굿을 빙자하여 간통, 재산축적 등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였으니
더욱 비판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시각은 앞의 함유일의 사례
에서 보았고, 무속을 몰아내야겠다는 의도에서 쓴 이규보의 글에도 강조하고 있
지만 특히 무인집권기에 현덕수라는 사람이 겪은 일에도 그와 같은 무속의 폐해
가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일찍이 안남도호부사가 되었을 때 정사가 청렴하고 밝았으므로 아전과
백성이 그를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음사를 미워하여 무당을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아전이 여자무당과 그 남편까지
잡아와서 현덕수가 신문하였는데, “이 무당은 여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
러자 동료들이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여자가 아니면 어찌 남편이 있을 수 있
는가.”라고 하였다. 현덕수가 곧 사람을 시켜 무당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남자였다. 예전부터 무당이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술수를 핑계하고 사대부의 집
에 드나들면서 몰래 부녀자를 간음하기도 하였다. 몸을 더럽힌 자는 부끄러워서
감히 남에게 알릴 수 없었으므로 이르는 곳마다 그러한 병폐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음지에서도 뿌리 내린 무속신앙
이 밖에도 <고려사>에는 음사로 치부하는 무당 관련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물론 그 대부분은 후세를 경계하기 위한 의도에서 서술된 것이다. 무속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고려시대에는 무속이 엄연히
존재하였고 또한 자뭇 성행하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시 유학자들은 무속을 미신, 국가재정 낭비등의 이유로 배척하였는데, 인종
때에는 무당을 도성 밖으로 몰아내거나 궁중 출입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그 후
무당이 주관하는 국가 제사를 중지하고, 일부 지방관은 무당을 탄압했으며, 나아
가 국가에서 무당에게 세금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후 무당의 활동을 어
느 정도 제약하고 천시하는 경향을 낳기도 하였으나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
다.
우리 역사에서 종교는 사회통합과 정치이념의 확립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려시대의 주요한 종교는 불교였다. 불교는 왕실과 지배층을 비롯하여
민간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지를 받았으니, 개인의 신앙 대상일 뿐 아니라 국
가 사회의 지도사상이었다. 흔히 고려시대라 하면 팔만대장경을 떠올리듯이, 고
려는 우리에게 불교적 이미지를 강하게 남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으려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보면, 절
박한 곤경에 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에든 매달리려고 한다. 그럴 때면
고상하고 숭엄한 천상의 멀리 있는 신보다는 나를 직접 겨냥하여 속시원히 말해
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점쟁이나 무당들이 더욱 절실한 믿음의 대상이 되었
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속은 신앙의 대상이기 이전에 일상적으로 집안신이나
마을신, 성황신 등을 모시는 것과 같이 민초들에게 있어서는 생활의 한 부분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