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떠들던 노르망디 상륙작전 70주년에 이어 올해는 2차대전 종전 70주년이 되는 해 입니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 메이커에서 종전 관련 WW II 관련 아이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간만에 실기체 정리 좀 해봤습니다.
오늘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무기중 하나인 LCVPs (Landing Craft, Vehicle and Personnel), 그리고 LCM( Landing Craft, Mechanized) 의 베이스가 된 배가 있습니다. 일명 '하긴스 보트 ( Higgins Boat)'로 불리는 넘인데요.. 우리에게는 라이언일병 구하기 영화에서 첫 장면 상륙작전에 등장하면서 큰 인상을 남긴 바로 그 상륙함선 입니다.
함정의 전통적인 보트들은 상륙작전에 투입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는데 특히 바다가 거칠 경우 노출된 엔진이 침수되는 경우가 많았다.
1937년에 실시된 제3회 함대상륙훈련(FLEX 3)에서는 많은 보트들이 손상을 피하기 위하여 접안을 거부함으로써 병사들이 깊은 물 속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이 훈련에서 33피트짜리 보트 2척이 침수되어 침몰했으며, 많은 보트의 키와 프로펠러가 손상을 입었다.
미해군은 유사시 상륙작전에 투입할 수 있도록 민간 보트 중에서 적당한 후보를 찾아 보았으나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민간 보트들은 프로펠러를 보호할 스케그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선체 자체도 기중기로 들어 올릴만큼 강하지 못했다.
엔진의 종류는 놀랄만큼 다양하여 군수 부문의 악몽이나 마찬가지였고, 선체의 크기 또한 제멋대로여서 함정 내에 효율적으로 수납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까지 해병대는 불만을 가지면서도 상륙작전시 전통적인 함정 보트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1932년에 해병대는 경포와 경전차를 양륙하기 위하여 50피트짜리 모터런치에 장착하는 보트 리그 A(Boat Rig A)라는 장비를 고안했다.
해안에 도착하여 이 장비를 설치하면 약 2톤 정도의 무게를 가지는 경야포나 경전차를 양륙할 수 있었으며 설치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30분이었다.
(보트 리그 A)
1938년에 실시된 제4회 함대상륙훈련(FLEX 4)에서 해병대는 보트 리그 A 의 개량형을 시험했다.
철마(Iron Horse)라고 불리던 이 장비는 한 번 설치해 놓으면 해안에 그대로 서 있었다.
따라서 몇 개의 철마를 설치해 놓으면 주정들이 돌아가면서 거기에 뱃머리를 갖다대고 내부의 램프(ramp)와 연결하여 양륙할 수 있었다.
1940년 8월 현재 미해군은 철마 6개와 보트에 설치할 램프 11개를 보유했고, 철마 5개와 램프 10개가 제작 중에 있었다.
원본 :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 http://blog.naver.com/imkcs0425/60166781279
9. 히긴스 보트( Higgins Boat)
1932년이 되자 해병대는 더 이상 A형 바지처럼 100 명 이상이 타는 커다란 상륙주정을 원하지 않았다.
커다란 상륙주정은 적의 기관총 앞에 표적을 한꺼번에 갖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34년 3월에 해병대는 미해군에게 새로운 소형 상륙주정 2가지를 요구했다.
X 보트라고 불린 첫번째 상륙주정은 1개 분대(12명)을 싣고 15노트의 속력으로 해안으로 쇄도할 것이었다.
승무원은 6명으로 정장,기관총 사수 2명, 그리고 수병 3명이었다.
선체는 적의 소화기를 방어할 수 있도록 6.4mm 두께의 철판을 두르고 기관총 4정을 장비할 것이었다.
Y 보트라고 이름붙인 2번째 상륙주정은 2개 분대 24명과 반장(section leader)을 포함해 25명을 수송할 수 있었다.
대대 규모의 상륙작전에서 제1파는 13척의 X 보트, 제2파는 13척의 Y 보트로 상륙하며, 제3파부터는 전통적인 함정보트로 상륙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즈음 루이지애나 주에서 보트를 제작하던 앤드류 잭슨 히긴스(Andrew Jackson Higgins)라는 사업가가 유레카(Eureka)라는 보트를 팔기 위하여 해병장비위원회를 찾아왔다.
그가 1926년부터 만들고 있던 유레카는 루이지애나의 습지에서 사용하기 위한 보트로 히긴스는 유레카를 주로 나무꾼이나 사냥꾼에게 판다고 소개했으나 실제로는 주로 밀수꾼이나 밀주를 만드는 범죄자들이 사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히긴스의 주요 고객이 누구이건 유레카는 해병대가 좋아할만한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앤드류 히긴스)
길이가 30피트 5인치(약 9.3m)인 유레카는 속력이 20노트로 빠르고 흘수가 얕았으며 튼튼했다.
루이지애나의 습지에 떠다니는 통나무를 비롯한 장애물을 뛰어넘기 위하여 유레카는 펠리컨 부리처럼 생긴 선수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모양은 바닷가에 접안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프로펠러와 키는 스케그로 보호되고 있었다.
해병대는 유레카를 마음에 들어했으나 돈이 없었다.
1934년의 미해군 예산은 3억 5천만 달러 정도였는데 이 정도 금액은 전쟁 발발 이후인 1943년의 미해군에게는 겨우 4일 동안 사용할 예산에 불과했다.
건조수리국(C&R)은 해병대가 요구한 X 보트와 Y 보트를 통합한 18인 - 21인승 상륙주정을 개발하기로 하고 몇몇 시제품을 만들어 보았으나 신통한 물건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건조수리국은 민간 보트를 채용하기로 하고 1936년에 구매 공고를 내었다.
당시 히긴스에게도 구매 제안이 들어왔으나 미해군의 빈약한 구매력에 실망한 히긴스는 응하지 않았다.
이 결정은 히긴스의 커다란 실수로서 이후 히긴스와 건조수리국(1940년 이후에는 함선국) 사이의 질긴 악연이 시작되었다.
건조수리국은 구매 제안에 응한 5개 회사의 보트를 1척씩 사서 1936년 가을에 뉴저지 주의 메이 만에서 성능 시험을 실시했다.
이후 필라델피아 해군조선소에서 필요한 개조를 실시한 다음 1937년 초에 실시된 제3회 함대상륙훈련(FLEX 3)에서 본격적인 평가를 실시했다.
여기에서 레드 뱅크 요트 회사(Red Bank Yacht Corporation)의 32피트(약 9.8m)짜리 낚시용 보트가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함선수리국은 레드뱅크 보트를 소폭 개량했다.
우선 길이를 약간 줄여서 30피트 6인치(약 9.3m)로 만들고 각진 뒷부분을 둥그렇게 처리하여 선미에서 들이치는 파도가 갈라져 앞으로 지나갈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개조한 보트를 함선수리국의 보트란 뜻으로 뷰로 보트(Bureau Boat)라고 불렀는데 뷰로 보트는 A 형 바지 이후 건조수리국이 실로 10년 만에 채택한 상륙주정이었다.
함선수리국은 웰린 사에 뷰로 보트를 금속으로도 제작하도록 주문했다.
건조수리국은 1938년 초에 실시된 제4회 함대상륙훈련(FLEX 4)에 뷰로 보트를 선보였는데 해병대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뷰로 보트에 탑승한 병사들은 상체가 흠뻑 젖은 채 상륙해야 했으며, 스케그로 보호받지 못하는 프로펠러와 키는 일단 접안하면 해안의 모래에 처박혀서 제대로 후진하지 못했다.
해병대는 자신들이 4년 전에 보았던 유레카가 뷰로 보트보다 훨씬 좋았다고 생각했다.
이때 히긴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유레카를 미해군에 팔기 위하여 안달이 나 있었다.
온갖 연줄을 총동원하여 어렵사리 건조수리국의 상륙정 담당인 랠프 맥도웰 준장을 만난 히긴스는 유레카에게 딱 한번만 성능을 증명할 기회를 달라고 매달려 겨우 허락을 받았다.
유레카의 성능시험은 1938년 3월에 뉴올리언스에 기항한 구축함 소머즈에서 실시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아직 유레카를 잊지 못하던 해병대가 이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고 곧 히긴스와 의기투합하여 건조수리국에 압력을 넣었다.
건조수리국은 뒤늦게 끼어든 히긴스의 행동이 적잖이 불쾌했지만 1938년 5월에 성능평가를 위하여 유레카를 1척 주문했고, 11월에는 목제 유레카 2척과 금속으로 만든 유레카 2척을 추가로 주문했다.
상륙주정으로 유레카를 선정해 달라는 해병대의 요청을 받은 건조수리국은 1939년 초에 실시되는 제5회 함대상륙훈련(FLEX 5)에서 공개 평가를 실시하여 최종적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평가에 앞서 건조수리국은 해병대와의 논의를 거쳐 상륙주정의 조건을 정해 공고했다.
1. 길이는 30피트(약 9.1m) 이내, 무게는 10,000 파운드(4,540 kg) 이하일 것
2. 탑승 인원은 18명 이상, 보급품 탑재량은 5,000 파운드(2,270kg) 이상일 것
3, 최고 속력은 10노트 이상, 항속거리는 75 해리(약 140km) 이상일 것
4. 흘수는 얕을수록 좋으며, 높은 파도 속에서도 접안이 가능해야 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안에서 후진이 가능할 것(필요하면 후방 닻을 이용해도 무방)
5. 전방에 기관총을 장착할 수 있어야 하며, 개솔린 엔진과 연료탱크, 승무원을 적의 소화기 사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갑을 갖출 것
뷰로 보트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건조수리국은 유레카 이외에 1937년의 평가에서 탈락했던 회사들도 모두 자신들의 보트를 조건에 맞도록 개량하여 참가를 허용했다.
히긴스도 유레카를 다시 개량했고, 건조수리국도 프로펠러와 키를 스케그로 감싸는 등 뷰로 보트를 개량했다.
그리하여 제5회 함대상륙훈련 기간 도중인 1939년 1월 28일부터 2월 4일까지 1주일 동안 총 18척의 보트들이 푸에르토리코의 쿨레브라 해안에서 미해군의 상륙주정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평가 결과 유레카와 뷰로 보트가 경쟁자들을 압도했으나 둘 중에 누가 더 뛰어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건조수리국은 유레카와 뷰로 보트의 성능이 막상막하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뷰로 보트가 약간만 개량하면 가장 우수한 상륙주정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해병대는 반대로 유레카를 열렬히 지지했는데, 해병대 사령관은 해군이 제공한 전용 보트를 사양하고 히긴스에게서 유레카를 1척 얻어서 훈련기간 내내 타고 다녔다.
1936년 6월에 건조수리국은 최종 평가를 위하여 개량형 뷰로 보트 1척을 웰린 사에 주문했고, 히긴스에게 목제 유레카 1척을 추가로 주문했다.
8월에 건조수리국은 히긴스에게 목제 유레카 6척과 함께 금속제 뷰로 보트 8척을 주문하면서 만일 히긴스가 유레카를 포기한다면 뷰로 보트 생산을 맡길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었으나 해병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히긴스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레카는 뷰로 보트에 대하여 뛰어난 성능을 과시했는데, 특히 접안 후에 다시 후진하는 능력에서 뷰로 보트는 유레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40년 5월 25일부터 6월 1일까지 1 주일에 걸쳐 샌 클레멘트에서 실시된 소규모 상륙훈련이 끝나자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해군의 작전부대들도 공개적으로 유레카를 지지하고 나섰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진 함선국은 유레카 62척을 발주했다.
이때 함선국은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유레카 연료탱크의 용량을 910리터에서 절반인 455리터로 줄였다.
히긴스는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으나 건조수리국의 생각은 달랐다.
건조수리국은 뷰로 보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유레카 62척과 동시에 금속제 뷰로 보트 45척을 별도로 발주했다.
유레카는 1940년 9월에 버지니아 해안에서 실시한 성능 시험에서 다시금 뷰로 보트에 대하여 압도적인 성능을 과시했고, 이로써 뷰로 보트는 최종적으로 탈락했다.
자존심을 완전히 구긴 건조수리국은 히긴스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건조수리국은 상륙주정을 결정하기 전에 1940년 8월에 시험운항을 한 크리스 크래프트(Chris Craft)사의 프로펠러 2개 짜리 보트와 유레카의 성능 비교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레카는 다시 공개 평가 시험에서 크리스 크래프트 보트의 도전을 물리쳤다.
그러자 건조수리국은 추가 발주를 앞두고 유레카의 가격을 사정없이 후려치려고 했고, 히긴스가 거부하자 계약을 질질 끌었다.
유레카의 대량 생산을 위하여 융자를 받아 생산능력을 확충했던 히긴스는 당장 자금압박을 받아 파산위기에 몰렸다.
이때 영국해군이 히긴스를 구했다.
1940년 6월에 유럽으로부터 치욕스럽게 쫓겨난 영국은 독일 점령 하의 유럽 해안에 히트앤드런 방식의 기습공격을 가할 수 있는 상륙주정을 원했는데, 우연히 유레카를 보게 된 영국해군은 즉시 히긴스와 접촉했다.
영국해군이 원한 것은 18명을 태울 수 있는 유레카의 2배인 36인승의 상륙주정이었으며, 1941년이 되기 전에 양산형의 납품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는데 히긴스는 즉석에서 수락했다.
그리하여 1940년 7월에 영국해군은 히긴스에게 50척의 유레카를 발주했다.
히긴스는 유레카의 엔진은 그대로 두고 길이를 36피트 8인치(약 11.2m)로 늘린 새로운 유레카를 설계했다.
이 새로운 유레카는 36피트-유레카로 불렸고, 기존의 유레카는 30피트-유레카로 불리게 되었다.
히긴스는 설계, 시제품 생산, 시험 및 문제점 보완, 그리고 양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하여 최초의 유레카가 영국의 포츠머스 항에 도착한 것은 1940년 11월이었다.
영국해군은 자신들의 상륙주정보다 5노트나 빠른 15노트의 속력을 내는 유레카의 성능에 만족했다.
1941년 초에 콘월 해안에서 유레카의 성능을 시험한 영국해군은 보고서에서 일부 단점을 지적하면서도 전체적으로 탁월한 상륙주정이라고 칭찬했다.
이로써 영국해군은 히긴스를 파산의 위기에서 구했을 뿐만 아니라 사업가로서 그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
당시 영국해군은 상륙함정의 설계에 있어서 미국해군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한 영국해군에게서 유레카를 주문받기 전까지 미해군이 보는 히긴스의 인상은 대체로 건조수리국의 인상과 비슷했다.
즉 루이지애나 촌구석에서 범죄자들에게 보트나 팔면서 입에 풀칠하던 주제에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해병대를 꾀어 감히 미해군의 상륙정 시장을 넘보는 정체가 모호한 반 사기꾼이라는 부정적인 인상이었다.
그런데 일단 영국해군으로부터 유레카의 주문을 받아내자 히긴스에 대한 미해군의 인상은 전통의 영국해군으로부터 인정받은 유력한 사업가로 바뀌었다.
사업가의 나라인 미국에서 이것은 커다란 잇점이었다.
영국해군의 주문을 따내고 나서 자신감이 생긴 히긴스는 계약을 질질 끌던 건조수리국에 역공을 가했다.
1940년 8월에 히긴스는 앞으로 조달할 유레카는 기존의 30피트-유레카 대신 새로운 36피트-유레카로 바꾸자고 건조수리국에 제안했다.
그는 36피트-유레카가 30피트-유레카와 같은 엔진을 장착하고서도 여전히 빠르며, 수송인원은 2배인데도 가격은 약간만 더 비싸다고 말했다.
수송함에 실을 수 있는 상륙주정의 숫자 제한 때문에 상륙주정의 대형화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던 해병대도 히긴스에게 동조했다.
건조수리국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애당초 상륙주정의 길이를 30피트로 제한한 이유가 미국 화물선의 규격 때문이었고 이것은 자존심 문제를 떠나 쉽게 물러설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러자 해병대와 히긴스는 이 문제를 상륙정 위원회(Landing Boat Commission)로 들고 갔다.
상륙정 위원회는 해병대와 히긴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335척의 36피트-유레카를 발주하라고 해군성에 요청했고, 해군성은 1940년 9월 20일에 단 1척도 깎지 않고 그대로 승인했다.
역사는 히긴스와 해병대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민간 화물선들을 병력수송함으로 사용하려면 어차피 개조작업을 거쳐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36피트-유레카를 실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공간이 작아서 36피트-유레카를 싣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되던 고속수송함들도 나중에 모두 별다른 어려움없이 36피트-유레카를 실을 수 있도록 개량되었다.
히긴스는 발주자인 건조수리국이 꼬투리를 잡지 못하도록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다.
영국해군에 납품한 36피트-유레카는 30피트-유레카보다 배 밑바닥의 각도인 선저구배(deadrise)를 크게 잡았는데 이럴 경우 속력을 비롯한 항해 능력은 좋아지지만 접안했을 때 후진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 있었다.
히긴스는 자비로 선저구배를 줄인 36피트-유레카를 만들어 수출형의 36피트-유레카와 성능을 비교했는데 선저구배를 줄인 새로운 유레카가 더 뛰어난 성능을 보였다.
(선저구배)
그리하여 선저구배를 줄인 새로운 36피트-유레카가 미해군의 상륙정으로 채택되었다.
36피트-유레카는 1934년에 해병대가 요청했던 Y 보트와 성격이 비슷하여 처음에는 Y 보트로 불렸다가 곧 Y로 시작되는 접두어를 쓰는 잡용정들과의 구별을 위하여 T 보트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LBP(Landing Boat, Personnel)로 불리다가 1942년 7월에 대형병력상륙정(LCP(L) = Landing Craft, Personnel, Large)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기존의 30피트-유레카는 중형병력상륙정(LCP(M) = Landing Craft, Personnel, Medium)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대형병력상륙정)
영국해군이 대형병력상륙정(LCPL)에 대해 가진 불만 중의 하나는 방어력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미해군은 상륙주정의 경우 속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대형병력상륙정의 내부에 6.4mm 짜리 철판으로 이루어진 격벽 3개를 설치하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영국은 끝내 선체를 6.4mm 철판으로 감쌌다.
문제는 대형병력상륙정의 무게가 3,680kg 인데 방어용 철판의 무게가 2,950kg 라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속력이 뚝 떨어졌는데 영국도 나중에 렌드리스로 받은 대형병력상륙정에는 따로 철판을 보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뷰로 보트와 유레카 및 대형병력상륙정 그리고 다른 소형 상륙주정들의 제원은 다음과 같다.
(소형상륙주정들. 출처 : U.S. Amphibious Ships and Crafts, P.80)
대형병력상륙정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꾸준히 생산되어 종전시까지 총 2,250척이 생산되었으며, 렌드리스로 영국에 599 척이 공여되었다.
대형병력상륙정 이외에도 히긴스는 상륙주정의 채택 과정에서 함선국과 여러번 충돌했으며 그때마다 승리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한 상륙주정들은 거의 모두가 히긴스가 설계한 것들이거나 그 개량형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상륙주정들을 통틀어 히긴스 보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레카와 동시대의 소형 상륙주정들은 대부분 개솔린 엔진을 사용했는데 가벼우면서도 출력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솔린 엔진의 연료인 휘발유는 위험했고, 점화 플러그가 물에 젖을 위험이 있었다.
미해군은 1939년 12월에 피스톤과 실린더 블록을 알루미늄으로 만든 경량형 디젤 엔진을 개발했으나 출력이 150마력으로 다소 약했다.
결국 제너럴 모터스 사의 마린 그레이 디젤 엔진이 채택되었다.
225마력의 출력을 가진 마린 그레이 디젤 엔진 하나로 소형상륙주정들을, 2개로 기계화 상륙정(Landing Craft, Mechanized)을, 3개로 전차상륙정(LCT = Landing Craft, Tank)을 움직였다.
마린 그레이 디젤엔진 4개를 하나로 묶은 쿼드 엔진은 110피트(약 34m)짜리 구잠정이나 대형보병상륙정(LCI(L) = Landing Craft, Infantry, Large) 에 사용되었다.
전체적으로 18종류의 마린 그레이 디젤 엔진이 미국 상륙함정의 80% 에 채택되었다.
제너럴 모터스 사는 가변피치 프로펠러도 생산했는데 가변피치 프로펠러를 채택하면 감속에 필요한 기어의 수가 줄어들어 배의 중량이 가벼워지고, 운용하기 편한 장점이 있었으나 속력 면에서 불리하여 전쟁 중에는 대형보병상륙정(LCI(L) = Landing Craft, Infantry, Large)만이 채택했다.
대형병력상륙정에 탄 병사들은 상륙하기 위하여 뱃전에서 옆으로 뛰어 내려야만 했다.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히긴스는 영국해군형에는 뱃머리에 걸쳐놓고 병사들이 뛰어내리는 철판을 장착했었으나 대형병력상륙정에서는 제거해 버렸다.
병사들의 상륙 방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과 사고 방식이 필요했다.
그 실마리는 전혀 뜻밖의 곳으로부터 주어졌다.
원본 :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 http://blog.naver.com/imkcs0425/60166932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