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교 5번째 시집, "사랑을 체납한 환쟁이", 평설)
詩ㆍ書ㆍ畵의 경계를 허물다
이 승 하 (시인․중앙대 교수)
김철교 시인은 이력이 남다르다. 그는 서울대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나와 영국문학의 오솔길 등을 펴낸 영문학자이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경영학과 교수를 수십 년 동안 하고 이제 정년퇴임을 맞이하였다. 젊은 날에는 국제그룹 종합기획실 해외투자사업팀 과장을 했으며 (사)미래경제연구원장을 역임했다. 그러다 중앙대 대학원 경영학과에서 석ㆍ박사학위를 했으므로 경영학 교수를 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2001년에 시로 등단한 이후 4권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이고 수필로도 등단해 2권의 산문집을 상재했는데 이를 일종의 외도라고 해야 할까? 김철교 시인의 외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림에 대한 놀라운 감식안과 유려한 필체로 월간 시문학에 회화론인 「화폭에서 시를 읽다」를 연재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그는 화가이다. 여러 차례 단체전에 자신이 공들여 그린 그림을 출품하였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목원대학에서 감리교 신학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심리학과 상담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전문가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상담심리치료학회 정회원으로 있다. 팔방미인도 이런 팔방미인이 없다. 옛날에 사대부 양반들은 詩ㆍ書ㆍ畵를 할 줄 알아야 된다고 했는데 김철교 시인이야말로 현대의 양반이 아닐까. 게다가 중인계급이 담당하던 경영까지 하고 있으니 십방미인이다.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이해할 줄 아는 시인이어서 그런지 시집의 제일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시도 신윤복의 풍속화인 <미인도>를 소재로 한 것이다. 여러 그림에 대한 인상기가 제1부에 자리를 잡고 있다.
1. 畵:화가들의 그림과 자신의 그림
구름머리를 무겁게 이고
고고히 누구를 꼬나보는가
손에 든 노리개를 준
선비의 뒷모습을
붙들고 싶은가
저 불룩한 치마폭에는
얼마나 많은 남자들의
그림자를 담고 있으랴
그러나 사랑이 담길 가슴은
빈약하기만 하구나
퍼주고 퍼주어도
돌아오지 못할 사랑으로
메말라가고 있으니
수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
젊은 자태로 있는 것은
사랑은 썩지 않기 때문일까?
―「썩지 않는 사랑」 전문
구름머리와 손에 든 노리개, 불룩한 치마폭과 빈약한 가슴 볼륨 등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고 세세히 언어로써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림 감상에 머물지 않고 시인은 그림이 나온 지 25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이 시점에서 어찌하여 이 그림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화판이며 물감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선비에 대한 이 미인의 연모의 정이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그림 속 미인은 늘 젊은 자태 그대로이고, 이처럼 예술작품에 묘사된 사랑은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홍도의 <서당>을 부제로 삼은 시를 보자. 소재는 그림이지만 작품에 대한 감상이라기보다는 지금 이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한 현실풍자시에 가깝다.
이 시대 고관대작 글 보따리에 가득한
자식을 위해 위장 전입한 두툼한 기록과
육법전서 속에서만 살고 있는 정의라는 단어와
빛바랜 강남땅 개발예정 보물지도가
청문회 때만 되면 튀어나와
매문(賣文)하는 주인을 고발하고 있다
―「매맞는 강남부자 아들놈」 제3연
서당 훈장이 어린 학동을 혼내자 당사자 학동은 울고 있고 나머지 학동들은 킬킬대며 웃는 그림을 보고 시인은 “까불던 졸부 자식”을 풍자하기로 마음먹는다. 졸부는 자식을 위해 위장 전입을 일삼고 치부를 위해 투기를 일삼는다. 이 나라 고위층의 일상화된 불법과 탈법,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는 도구로 김홍도의 그림을 가져온 것이다.
박수근의 유명한 <빨래터>다. 시인에게는 경매사상 근대 미술품 최고가인 45억 2,000만 원을 기록했다거나 위작 논란에 휩싸인 것이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 그림을 보고는 상상력의 날개를 활짝 펴고서 그림 속 상황을 추적한다.
맨 왼쪽 혼자인 아주머니는
조금은 있어 보이네요
자랑을 많이 하다 왕따 당했나보군요
두 명의 젊은 부인은
시댁 흉보느라
얼굴에는 어둠이 켜켜이 쌓여 있네요
저기 좀 늙수그레한 세 아주머니들을 보세요
엉덩이 펑퍼짐한 수다쟁이- 아마 매파인가 봐요
이 마을 저 마을 소식 전하느라 빨래도 잊고 있네요
옆 아주머니들은 그저 듣고만 있지요
아침 며느리 투정이 가슴에 거슬려
사실은 누구 말도 들리지 않아요
―「빨래터에서 한(恨)을 씻다」 부분
이 시는 그림에 대한 시인 나름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제일 먼 곳에 3명, 중간지점에 2명, 제일 가까운 곳에 1명의 아낙이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런 상황이 아닐까, 재미있는 추리를 해보고 있다. 우리가 시를 읽고도 이런저런 해석을 해보는 것처럼 시인이 그림을 앞에 놓고 화가가 이런 의도로 그린 것이 아닐까 해석을 해보는 것이 시가 된 것이다. 시인은 김환기의 <항아리와 매화가지>, 이왈종의 <제주생활의 중도>를 보고 느낀 것을 시로 쓴다. 외국 화가인 고흐의 <슬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과 <꿈>, 르느와르의 <쿠션에 기댄 누드>, 샤갈의 <도시 위에서>,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 달리의 <시간의 숭고>를 소재로 하여 시를 쓴다. 이 모든 시편에 대한 감상은 어려우므로 렘브란트의 그림만 보자.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탕자의 귀향 이야기를 화가는 바탕으로 하여 그림을 그렸고 시인은 그 그림을 보고 다음과 같이 시를 썼다.
사랑의 빛이 검은색으로 칠해지는
그날
이 세상은 문을 닫고
새로운 캔버스엔
하나님은 에덴을 다시 그리시겠지만
패악의 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여의도 서쪽 거대한 무덤 속을 들여다보면
또다시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야 하지만
끝까지 참으실 것이다
이 세상에 무지개를 주신 것을
기억하시는 한
―「신(神)의 인내」 후반부
‘탕자의 귀향’ 이야기는 신약성서 루카 복음서 제15장에 나온다. 유산을 미리 받은 작은아들이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비난과 호통을 감수하고 무일푼의 상태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오히려 환대하고 감싸준다는 결말로 끝난다.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맞고 환대하는 아버지 역할을 가톨릭교회가 담당하려고 이 일화는 자주 인용된다. 시인은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성경 내용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패악의 게임”을 벌이는 국회의원들을 신은 과연 용서하실까? 하고 생각해본다. 세상을 물바다로 만들어 노아의 방주를 다시 띄울 것인가? 아니, 신이 끝까지 인내할 것이라고 믿어본다. “이 세상에 무지개를 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는 한 최후의 심판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런 시를 써본 것이다. 그림에 대한 시인의 해석을 추적해보면 그것만으로 해설의 지면이 다 차버릴 테니 여기서 멈추기로 하고, 이제 김철교 화가의 아틀리에를 방문하기로 하자.
말로 글로 보여줄 수 없는
그러나 가슴으로만 명징하게 볼 수 있는
단 하나뿐인 나의 그림입니다
어디엔가 붙박이로 걸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빨갛고 노랗고 하얀 장미로 덮인
미로 속으로
조금도 막힘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는 그림」 마지막 연
이 시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유를 밝힌 시가 아닐까 여겨진다. 말로도 글로도 보여줄 수 없는 마음의 어떤 부분을 그림으로 그려놓는 것인데, 이 그림은 “가슴으로만 볼 수 있는/ 단 하나뿐인 나의 그림”이다. 보통의 그림처럼 “어디엔가 붙박이로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빨갛고 노랗고 하얀 장미로 덮인/ 미로 속으로/ 조금도 막힘없이 흐르고 있”으므로 자연을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껴 그린 그 자연, 그 감정 그대로라는 것이다. 자연을 본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면 시인이지만 회화로 표현하면 화가가 된다. 어떤 광경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리하여 “투명한 빛으로 만들어진/ 그림 속 주인공은/ 액자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바다에서 대지에서/ 조금도 막힘없이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제3부 ‘사랑의 아틀리에’는 자신의 그린 그림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 온갖 사물을 시각적 이미지로써 구현해낸 시를 모은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로 그린 회화작품이다.
내 눈길이
마법의 지팡이가 되어
던지는 곳마다
메마른 들에서도
붉은 장미가 피어나게 하소서
―「마법의 지팡이」 마지막 연
가을을 생각하기엔 아직은 이른 때에
붉은 꽃 이파리 달콤한 혀로
벌과 나비 그리고
대지 가득한 바람과 입맞춤하며
꽃봉오릿적 꿈을
열심히 하늘 화폭에 펼쳐보렴
―「까칠한 백일홍」 마지막 연
부활하신 내님
무덤가에 피어
하늘가는 밝은 길을
앞서 가던 꽃
―「아네모네」 첫 연
제3부의 시는 이와 같이 어느 것 할 것 없이 강렬한 색채 이미지를 갖고 우리의 시각을 자극한다. 시를 읽으면 우리는 뇌리에 시인의 언어로 그린 그림을 떠올리며 하나의 화폭을 그리게 된다. 메마른 들에서도 붉은 장미가 피어나는 마법을 보고 감탄하다가 일찍 핀 백일홍을 보고 꽃봉오릿적 꿈을 하늘 화폭에 펼쳐보게 한다. 아네모네는 “부활하신 내님”을 연상시키고 몽당연필의 “닳고 닳아/ 뭉툭한 몸매는/ 삶을 달관한/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이처럼 시인은 활자와 회화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하고 있다.
2. 詩:시의 정의를 찾아서
제2부의 시는 거의 다 ‘詩’에 대한 시이다. 자신의 시론을 ‘시의 정의’ 13편의 시를 통해 펼쳐나가고 있다. 연작시 제1번은 시인에 대한 정의로서 “자연이 작곡한/ 악보 속의/ 낮은 음자리표”가 시인이라고 보았다.
시한부 인생에게 주어지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한평생을 곱씹으며
파노라마처럼 회상하는
한.줄.한.줄.
―「병상일기」 전문
시라는 것이 병상일지와 다를 바 없다……. 맞는 말이다. 그것도 시한부 인생에게 주어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지나온 전 생애를 한 줄 한 줄 파노라마처럼 회상하며 쓰는 시라는 것! 그런 각오로 앞으로 시를 쓰겠다고 시인 자신 이 시를 쓰며 다짐해보았을 것이다. 시란 “가슴 깊은 골목에 드리워진/ 원형(原形)의 그림자가/ 뛰쳐나와 외치는/ 신에게도 보내는 편지”(「시인의 바벨탑」)이기도 하고, “투박한 농부가 일 년 내내/ 땀으로 수확하여/ 손으로 직접 짠 삼베”(「삼베 옷」)이기도 하다. “수천 년을 두고 바닷가에서/ 팽팽하게 대립하는/ 발자국과 파도의 밀고 당김/ 인간과 자연의 줄다리기”(「파도와 발자국」)이기도 하고, “사십여 년을/ 센 불과 약한 불에/ 달이고 달여서 응축시킨/ 진액”(「에스프레소」)이기도 하다. 쉽게 탄생하는 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 뼈를 깎는 고통과 오랜 인고의 시간이 필요함을 계속해서 역설하고 있다.
「병상일기」에서 시 쓰기의 어려움을 말했지만 바리데기의 여행에 못지않은 긴 고행의 기간이 소요되어야 제대로 된 시가 나옴을 다음과 같은 시에서 말하고 있다.
불사약을 구하러
저승세계를 지나 신선세계로 가서는
나무하기 3년, 물긷기 3년, 불때기 3년
아직도 밥은 뜸이 들지 않았는가?
이미 죽어버린 시(詩)도 다시 살아나
모두의 가슴에 둥지를 틀고
만신(萬神)의 왕이 될 수 있는 꿈
버리지 못하고
바리데기 되어 시를 쓰고 있다
―「바리데기」 후반부
바리데기공주 이야기는 일종의 저승 여행담이다. 오구굿, 즉 해원 굿의 한마당으로서 오구굿이 시작되어 제일 먼저 오구풀이 마당이 시작되는데, 이 오구풀이가 바로 바리데기공주의 여행담이다. 다른 서사무가도 그러하지만 바리공주 설화, 혹은 신화도 서역 서천국에 가서 아버지를 살리기 위한 불사약을 구해 오는 이야기에는 불교의 영향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아무튼 바리데기는 불사약을 구해 와 아버지를 살리고, 나중에는 사람의 죽음을 관장하는 신, 즉 무당들의 신이 되어 추앙의 대상이 된다. 시인은 바리데기가 불사약을 구해 오기 위해 다년간 엄청난 고생을 했듯이 나도 시를 쓰면서 이 정도의 고생을 하리라, 각오하고 있다. 스스로 바리데기가 되어 불사약과 다를 바 없는 시를 쓰고 있으니, 시인은 지상에서 사라져도 시는 남아서 불사하리라. “이미 죽어버린 시(詩)도 다시 살아나/ 모두의 가슴에 둥지를 틀고/ 만신(萬神)의 왕”이 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쓰는 이가 바로 김철교 시인이다.
3. 書:새로운 세상을 향한 나그네의 발걸음
詩ㆍ書ㆍ畵 중의 ‘書’는 글씨나 서예를 말하는 것이지만 해설자는 ‘學文’이나 ‘經世’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시는 골방에서 쓰는 것이지만 시인은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보고 듣고 느껴야 한다. 제4부 ‘나그네의 지팡이’는 세상 곳곳에 대한 현지답사 이후에 쓴 일종의 여행기이다.
세상살이 흥건한 땀 식히려고
여행객은 기차를 타고
단숨에 달려간다
구경꾼도 순례객도 주교까지도
도저히 구별되지 않는 나라가
내님 나라려니 오직
꽃잎마다 사랑 새긴
들꽃 하나 가슴 깊이 품을 일이다
―「캔터베리 가는 기차」 부분
영어교육과를 나온 시인은 영문학사를 수놓은 시인과 수필가들의 대표작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생애와 작품세계와 유적지를 살펴본 영국문학의 오솔길을 낸 적도 있는 만큼 영문학에 관한 한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이다. 영문학을 산문으로 풀어낸 책도 냈지만 영국 체류시에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일련의 시로 썼으니 「캔터베리 가는 기차」 「단두대의 아름다운 모가지」 「도자기 속의 여인들」 「수선화 정원」 「또다시 무너지는 런던다리」 「서펀타인 호수에서 그리는 수채화」 「짧고도 긴 편지」 등이다. 이 가운데 한 편만 본다.
부잣집 따님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가슴앓이하던 산책길 풀꽃들도
저 세상으로 간 그림자 못 잊어
이슬로 글썽이고 있다
셸리의 아내 웨스트브룩은
남편의 가슴팍에 자리잡은 바람구멍을 막지 못하고는
호수에 몸을 던져 수련 꽃으로 떠 있고
서쪽 궁전 주인이 된 다이애나
먼 이국에서 꺾여서는
이곳 빈 정원에 흰 국화꽃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다
―「서펀타인 호수에서 그리는 수채화」 부분
영국 런던의 하이드 파크(Hyde Park)에는 80개가 넘는 공원이 있는데 서펀타인 호수(The Serpentine)를 끼고 있는 공원이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공원은 160만㎡에 이르는 넓은 면적인데 아름다운 연못과 주위의 수목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공원을 거닐다 보면 도시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휴식처에 동화한다. 이 아름다운 공원의 서펀타인 호수가 영문학을 공부한 시인에게는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비극의 장소로 다가온다. 1941년, 서섹스 근처의 자택에서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호주머니 속에 돌을 잔뜩 넣고서 오즈 강에 몸을 던져 죽은 버지니아 울프, 시인 셸리의 조강지처로 서펀타인 호수에 “남편의 바람기가 싫어 몸을 던진” 웨스트브룩, 그리고 프랑스 파리의 센 강변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를 차례로 떠올리며 이 시를 썼다. 세 명 여성이 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이들 여인의 주변에 있는 남자들이 세 사람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탓이리라. 시인은 “오가는 관광객만이 이곳저곳/ 이승을 카메라에 담으며 가슴 짠할 뿐/ 백조가 슬픈 이야기는 다 주어 먹어버렸다// 호수 위에 조용히 떠 있는 꽃봉오리들은/ 숨진 여인들은 닮으려 애쓰지 않아도/ 옹골찬 외로움으로 아름답기만 하다”고 하면서 쓸쓸한 감회에 사로잡히고, 또한 애도의 마음을 갖는다.
「우리의 진시황릉」에서는 “옥좌에 오르면서부터/ 무덤을 쌓기 시작한다/ 사후에 거처할 또 다른 황궁을” 하면서 권력과 영광의 이면에는 폭력과 광기가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시인은 중국 고대사회의 황릉에 대한 시적 묘사에 멈추지 않고 “(주식과 채권과 부동산으로/ 우리는 성을 쌓고 있다/ 언젠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불안한 성벽)”이라고 하면서 지금 이 땅의 현실을 비판하는 소재로 진시황릉을 적절히 이용한다. 그래서 제목이 ‘우리의 진시황릉’인 것이다.
미국의 데스밸리에 가서는 “돈 벌어 오겠다는 내님은/ 그 어느 곳에 해골로 구르고 있나/ 아직 저승 갈 노잣돈조차/ 마련하지 못해/ 황야를 이리저리 헤매는 것은 아닌지”(「395번 국도의 아지랑이」) 하면서 그 옛날 서부개척시대의 골드러시와 6ㆍ25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땅에 불어제친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을 비판하기도 한다. “예순을 갓 넘긴/ 나성에 사는 할머니”의 “멀리 두고 온/ 그리움, 외로움, 서글픔”(「옛날 처녀」)을 다룬 시에는 재미교포 할머니의 인생유전이 담겨 있다.
시인의 여행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大東韻府群玉의 선덕여왕과 지귀의 설화에 이르기도 하고, 제주도 서사 무가 「세경 본풀이」에 나오는 자청비와 문도령 설화에 이르기도 한다. 두 설화의 내용을 안다면 “세상 모든 사랑을/ 내 좁은 가슴에 모아서는/ 사랑 불에 푹 고아/ 말갛게 정제하여/ 상사병을 이기는 환(丸)이나 만들어야겠네”(「선덕여왕과 지귀의 사랑불」)이나 “나의 비루먹은 詩여”(「나의 뮤즈, 자청비」) 같은 결구가 큰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시집의 제5부를 장식하고 있는 11편의 시는 ‘시극을 위한 아리아’라는 제목 그대로 장차 쓰고자 준비를 하고 있는 시극에 들어가는 아리아, 즉 가장 핵심 되는 부분을 모아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어떤 시는 전후좌우 맥락 파악이 안 되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고 어떤 시는 강한 사회비판의식으로 말미암아 바짝 긴장하게 된다. 편편의 시에 대한 이해는 독자의 몫으로 남기고, 시집의 제일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두 편의 시에 대한 해설을 끝으로 글쓰기를 마치고자 한다.
야곱은 147년을 마감하면서
고난과 축복으로 삶을 완성시키신
은총을 비로소 환하게 보았다
누구나 평생 이승에서의 발자국들이
한 폭의 그림으로 새겨진 천을 들고
그분 앞에 서리라
씨줄이라는 고난과 날줄이라는 축복으로
그림을 짜 가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이미 밑그림은 그리셨고
우리는 다만
색칠하고 향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삶의 방정식」 전문
이 시도 김철교 시인의 시론으로 읽힌다. 기독교인으로서 그분(신) 앞에 서서 “씨줄이라는 고난과 날줄이라는 축복으로/ 그림을 짜 가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손(신)이 이미 밑그림을 다 그려놓았고, 우리는 다만 “색칠하고 향기를 만들어가”고 있을 뿐이다. 신의 예정조화에 대한 믿음을 갖고 순명하며 시를 쓰고 있는 시인―바로 김철교이다. 유한자인 인간이 아무리 치부를 하고 권력을 가져본들 마지막 가는 길은 심판자인 하느님 앞이라는 신앙,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시이기도 하다.
이승에서 어설피 엮인 이야기지만
화폭 속에서든
다음 세상에서든
언젠가는 한 송이 꽃으로 용궁에서 솟아올라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잔치를 베풀겠습니다
―「향기로운 이별여행」 마지막 연
시인은 제부도에 가서 석양을 보며 이 시에 대한 구상을 했을 것이다. 저 석양을 우리에게 선물한 그 어떤 절대적인 힘을 우리는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김철교 시인은 詩ㆍ書ㆍ畵를 다 다루는 예술가이다. “세상의 두꺼운 벽을/ 한 방울 한 방울 사랑의 물방울로/ 꿰뚫겠다는 다짐이/ 바다를 흥건히 핏빛으로 적시고” 있다고 한다. 대단한 각오이다. 신의 위임을 받고서 인간세상에서 어설피 엮인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하고 화폭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리라. 다음 세상에서는? 시의 마지막에 가서 말한 대로 하늘나라에 가서도 온 세상 떠들썩하게 말의 잔치를 베풀고 천상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이제 시인은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지만 이와 같이 詩ㆍ書ㆍ畵의 완성을 위해 새로이 길을 떠나겠다고 하니 전도가 양양하기를 빈다.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결실을 앞으로의 활동을 통해 거두기를 바란다. 뿌린 자, 거두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