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7 章 장문인의 벗
하남(河南) 경내(境內)로 들어서는 흑의인 하나가 있었다.
삼경이 지난지라 밤은 어두울 대로 어두워져 있다. 으스름한 달빛을
받으며 걷는 그의 모습은 너무도 고독해 보였다.
그의 등에는 한 자루 고검(古劍)이 메어져 있고 허리춤에는 은빛 보
따리가 매달려 있었다.
그는 축지성촌신법(縮地成寸身法)이라는 광세경신법(廣世輕身法)을
시전해 바람보다 빨리 움직이는 중이었다.
"청성은옹이 돌아가시기 전 청성파를 피로 물들인 수라천마(修羅天魔
)의 수급을 선물하리라."
그의 중얼거리는 말소리는 너무도 차가웠다.
매우 상심해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젊은이의 상심이라면 필경 정인(情人)에 관한 것이리라.
'염 낭자 잘못은 없다. 모두 내가 무심한 탓이다.'
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만들어진다.
삼 년이란 시간은 그를 무림기인전주로 만들어 주었으나, 정혼자의
마음을 앗아간 것이다.
냉운은 상념을 떨쳐내려는 듯 신법을 더욱 빠르게 했다.
얼마를 달렸을까.
냉운은 아주 높은 산 근처에 이르게 되었다.
"태실봉(太室峰)이군."
그는 밤하늘에 솟아나 있는 장엄 고봉을 올려다보며 달리는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다.
'오대산(五臺山)까지는 먼 길이다. 서둘러야 한다.'
그는 태실봉을 거쳐 북상(北上)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준마(駿馬)를 구해 우회하는 길을 택해 말에 박차를
가할 것이었으나, 냉운은 천리준마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자신의
두 다리 쪽을 택했다.
어둠이 점점 짙어졌다.
우우!
승냥이 소리 같기도 하고 밤 부엉이 소리 같기도 한 기분 나쁜 소리
가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아주 조용한 밤이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쉬어야 하는 시각에 돌아다니는 것은 천리를
어기는 일이다."
그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근처의 야경을 살폈다.
'이런 곳에 별원(別院)을 짓고 독서하며 지낸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
군.'
근처에 한 권의 책과 한 잔의 차가 없음을 서운해했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천 리 이상을 달려야 하는 처지가 아닌가!
"일신의 향락은 잊어야 한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휘익!
거무스레한 그림자가 길게 이어지는 듯했다.
섬전같이 움직이던 그가 태실봉을 지나 소실봉(少室峰) 근처에 이를
때였다.
땡! 땡! 땡!
갑자기 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종성(鐘聲)이 연이어졌다.
땡! 땡! 땡!
급박히 울리는 것으로 보아 종 소리가 나는 곳에서 화급한 일이 벌어
지고 있다는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었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일까?"
냉운은 종 소리가 들려지는 곳을 향해 안력을 돋구었다.
숲에 가려져 있는 소실봉 중턱.
아주 거대한 사찰의 담이 수십 리에 걸쳐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저곳은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는 숭산(崇山) 소림사(少林
寺)가 아닐까?"
냉운은 놀라워하며 방향을 바꿔 사찰을 향해 움직여 갔다.
강호무림계가 만들어진 이래 늘상 거인으로 군림하고 있는 대소림사.
숭산의 주봉인 태실봉보다 소실봉을 유명하게 만든 대찰 소림사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강호무림계를 굽어본 지 어언 천 년.
소림의 권위는 그 동안 약할 대로 약해져 있었다. 삼 년 전, 장문인
천법대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소림은 반 봉문에 들었고, 소림의
권위는 더욱 위축되어 갔다.
능운은 인자한 노승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공대사께서 날 기억하실지 모르겠군.'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반도 오선을 풀어 주었던 오공의 얼
굴을 그리며 소실봉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가 사찰에서 오 리 떨어진 곳으로 이를 때였다.
"멈추시오!"
"아미타불……, 소시주는 걸음을 멈추시오."
급박한 말 소리와 함께 숲속에서 뛰어나와 흑의청년을 가로막는 이
인의 회의노승이 있었다.
노승들은 청년이 순순히 발을 세우자 합장(合掌)하며 침착히 말했다.
"그대로 가신다면 소림사에 이르게 되니, 이곳에서 걸음을 돌리시오!
"
"종 소리를 흘려낸 곳이 소림사가 분명하군요?"
청년이 청아한 말소리로 말했다.
'소림을 모르다니…… 검을 메고 있는데 무가 출신이 아니란 말인가?
'
노승들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냉운을 바라봤고, 이내 감탄의 눈빛이
되었다.
'사기가 없는 청년이군.'
'문약해 보이는 것이 약간 흠일 뿐, 가히 인중룡(人中龍)이다.'
회의노승들은 냉운의 빼어난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냉운이 미소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저는 종 소리에 끌려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어인 일인지요?"
"아미타불……, 소림사 내의 일이오. 시주는 상관하지 마시고 가던
길을 계속하시오."
회의노승들 길을 터줄 눈치가 아니었다.
'급한 일이 있기는 있군.'
냉운은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때였다. 소림사 쪽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폭음이 있지 않은가!
일이 점점 크게 번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아미타불……, 어서 돌아가시오."
회의노승들도 그 소리를 알아들은 듯 초조히 하산(下山)을 명했다.
냉운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회의노승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찰나, 냉운이 소림사 쪽을 가리키며
웃으며 말했다.
"저는 소림사에 외인(外人)이 아니오. 소림사의 승려 중 저를 소림사
로 청한 스님 한 분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저의 친구가 되시는 분이
랄까요?"
"아미타불……, 본사에 친구가 있는 사람이 어찌 한둘이겠소? 급한
일로 방문객을 사절하는 것이니, 어서 돌아가시오!"
노승의 태도는 완강했다.
"흠, 그분께서는 언제 소림사로 들리라고 간곡히 권하셨는데…… 제
가 그냥 돌아간다면 그분이 서운해 하실 것입니다."
냉운도 떠날 자세가 아니었다.
"아미타불……, 본사의 어떤 승려가 친구인가?"
회의노승 하나가 짜증스럽다는 듯 조급히 물었다.
"오공(悟空)이라는 법호를 가진 스님이십니다."
냉운의 대답이 떨어지자 노승들이 일제히 상반신을 휘청였다.
"장, 장문사존(掌門師尊)의 벗이란 말씀이오?"
"아, 오공선사께서 그 사이 소림 장문인이 되셨군요?"
냉운이 반가워하자 회의노승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한참 전음입
밀로 밀담을 나누었다.
얼마 후, 우측에 선 노승이 합장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장문사조는 친구가 없기로 유명하신 분이거늘, 어이
한 사연으로 친구가 되었소?"
아주 정중해진 말투였다.
"하하……, 오공선사를 뵙는다면 모든 의문이 풀릴 것입니다. 지금
소림사에 환란이 생긴 듯하니 친구 된 도리로 도와드리는 것이 도리
일 듯합니다."
"소시주의 뜻은 고마우나 도움이 필요 없는 일이오!"
"종소리로 보아 급한 일 같은데?"
"아미타불……, 급한 일이나 도움은 필요 없는 일이오."
"혹, 제가 만용을 일삼는 사람인 줄 오해하시고 제가 소림사 안으로
드는 것을 거절하시는 것인지요?"
그의 눈에서 신광이 폭사되었다.
"으음……."
"아미타불……."
회의노승들은 놀라워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하하……, 저는 철부지가 아닙니다. 냉운(冷雲)이라는 사람이 풋내
기가 아니라는 것을……."
순간, 노승들의 얼굴에 놀라움과 당혹의 빛이 어우러졌다.
"소시주가 바로 냉가장주 본인이란 말이오."
"옥, 옥면살성자(玉面煞聖者)란 말이오? 신비마제의 부하를 꺾은 냉
가장의 젊은 장주 옥면살성자 냉운 본인이시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발 없는 소문이 천 리 간다고 하나, 냉운 두 자 이름이 옥면살성자라
는 거창한 외호를 갖고 있을 줄이야?
'내가 옥면살성자라고 불리게 되다니…… 강호 친구들의 입심이 상당
하군.'
냉운은 자신이 유명한 인물이 되어간다는 데 기이함을 느끼며 그렇다
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
회의노승들이 얼른 허리를 숙였다.
"용과 호랑이가 서로 사귄다더니, 본사의 장문사존께서 강호의 젊은
영웅 옥면살성자와 친구인 줄……."
"어서 소림을 도와주십시오."
노승들의 태도가 완전히 변했다.
냉운은 침착한 표정을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소림에 풍운이 일다니…… 대체 어인 일입니까?"
"신비마령전(神秘魔令箭)이 나타났소. 소림 장문인의 지위를 내놓으
라며……."
"감, 감히……."
냉운은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어 순간적으로 오십 장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회의노승들은 냉운이 찰나지간 자취를 감추자 얼떨떨해하다가 과연
그렇구나, 하는 식으로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천 년의 전통을 갖고 있는 소림사.
달마대사(達磨大師) 이후 선종(禪宗)의 요람이었고, 무림의 태산북두
로 벡도무림계를 이끌어 오고 있다. 세력이 약해졌다 하나 소림은 아
직도 백도의 정신적 지주이다.
그 전통이 무너진다면 백도는 협맹이 무너진 것보다 더한 충격에 휩
싸일 것이다.
냉운은 화급한 마음에 혼신공력을 다해 무영비급 안의 신법 중 가장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천섬유공(天閃流空)의 신법을 시전했다. 희
미한 그림자가 남을 뿐 사람이 지나간다는 것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
도였다.
몸을 날리기 십여 차례, 냉운은 마침내 소림의 경내로 들어서게 되었
다.
펑! 펑! 펑!
폭발음은 더욱 요란하게 들렸다.
냉운은 담장을 뛰어넘었고, 몇 개의 전각을 가로지른 끝에 대웅전 앞
에 이를 수 있었다.
천여 명이 동시에 머무를 수 있는 거대한 마당.
거대한 진식(陣式)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안에서 혼전이 벌어지고 있
었다. 외곽을 포위한 사람들은 소림의 승인들, 그 안을 좌충우돌하고
있는 자들은 한패거리의 복면인들이었다.
모두 흑의였고, 단 한 사람만이 홍색 장포에 홍색 복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흑의복면인들의 수는 사십 명 정도였다. 그들은 홍의복면인을 중심으
로 부챗살같이 퍼져 나가며 눈에 뜨이는 소림 승려들을 무참히 학살
하는 중이었다.
소림 승려들은 그들을 대나한진으로 몰아넣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잡
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복면인들에게 살육의 빌미를 제공하는
형국이 된 셈이었다.
펑!
"으악!"
폭음이 일 때마다 비명 소리가 뒤따랐다.
"으하하하……!"
홍의복면인이 통쾌히 웃어 제쳤다.
그의 발 앞, 전신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백의노승 하나가 있었다. 그
는 방금 전 싸움에 패해 나뒹군 듯 수많은 상처 부위에서 붉은 피를
많이 흘려내고 있었다.
"나한대진(羅漢大陣) 정도로 마사자(魔使者)와 마객(魔客)들을 당할
것 같으냐? 희생을 줄이고 싶으면 어서 항복해라!"
복면인은 득의해 웃으며 발을 들어 백의노승의 목덜미를 밟았다.
"아미타불……."
백의노승은 고통보다 더한 모욕감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승려의 신세가 아니었다면 자결했으리라.
"으하하……, 오공의 목숨을 아끼는 자라면 당장 항복해라!"
홍의복면인의 호통이 끝나는 찰나, 나한대진을 구성해 연환공격을 펼
치던 소림 승려들이 수중의 계도를 집어던지며 아주 멀리 물러나기
시작했다.
"장문인을 구해야 한다."
"일단 진세를 거둬라!"
승려들은 피눈물을 씹으며 항복의 순간을 머리에 떠올렸다.
"흐흐흐……, 의당 그래야지!"
홍의복면인이 득의해 웃으며 팔짱을 끼며 중인을 쏘아보았다.
승리의 쾌감을 띠고 있는 눈빛이 군승들에게 모멸감을 주었다.
"어리석은 놈들. 삼 년 전, 본좌를 따랐어야 했다."
홍의복면인의 중얼거리는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
리였다.
그의 눈빛은 혈광을 띠고 있었다. 한 가지 마공(魔功)을 익혔기 때문
에 눈빛이 마귀의 눈빛같이 불그레한 것이다.
"흐흐흐……,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지."
홍의복면인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방 웃음을 터뜨렸다.
복면인들은 웃고 승려들은 울 때였다.
"흥! 누군가 했더니……."
어디선가 차가운 말소리가 들려와 중인을 놀라게 했다.
대웅전 높은 처마 위에 우뚝 서 있는 흑삼청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이었다.
그가 언제 그 위로 올라갔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누, 누구냐?"
홍의복면인이 흠칫 놀라며 수세를 취했다.
"오선! 소림사는 노괴(老怪)를 키워 준 곳이거늘, 감히 신비마제의
부하가 되어 소림사를 능욕하다니……."
냉운의 말이 중인에게 크나큰 놀라움을 주었다.
홍의복면인에게 붙잡혀 있는 백의승려가 그 말에 한숨 쉬며.
"오선(悟禪) 사형(師兄)이었구려. 어쩐지 소림절기를 다 알고 있다
했더니……."
"그렇다, 오공(悟空)!"
홍의복면인이 복면을 힘껏 찢어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노인이었다.
앞머리 부분은 대머리였다. 머리가 안 나는 이유는, 노인이 어렸을
때 계인(戒印)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오선이다!"
"천법장문인(天法掌門人)을 살해하고 도망간 오선이다!"
소림 승려들이 그제서야 홍의복면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삼 년 전, 오십 년 세월 동안 소림사를 다스려 온 천법선사를 살해하
고 도망친 천법의 수제자 오선이 마사자로 화신해 나타난 것이었다.
"흐흐……, 마사자가 된 이유는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소림사 정종
무공을 꺾는 길은 마공을 익히는 길뿐이었지!"
오선이 자위하는 투로 말했다.
아주 독랄한 목소리였다.
"신비마제께서 내게 절학을 전수해 주셨다. 이제 나는 신비마제의 명
에 따라 소림의 새로운 장문인이 되는 것이다."
순간.
"그럴 수 없다!"
대웅보전 처마 위로 올라가 있던 냉운이 허공을 밟으며 오선 쪽으로
번개같이 움직여 갔다.
"서, 서라!"
오선이 오공의 목에 힘을 가하려 했다. 더 다가서면 죽일 듯.
"고약한 수작이군."
냉운은 차마 더 갈 수 없다는 듯 허공에서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왼손을 소매 속으로 감추며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중인의 눈길이 냉운에게 집중되었다.
냉운은 한 잎 가랑잎같이 천천히 떨어져 내리며 말을 이었다.
"불학을 배웠으니,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을 알 텐데?"
허공에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당금 천하에 몇이나 되겠는가?
오선은 냉운의 신비한 무공에 겁을 내며 오공의 목을 밟은 발을 조금
도 움직이지 않았다.
"웬 놈이냐?"
"하하……, 나를 모르시오?"
냉운은 아주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숨을 한 번 쉴 수 있는 시간마다 한 자 정도 내려서는 통에 언뜻 보
면 허공에서 정지된 듯 보였다.
"누구냐?"
"노괴를 구한 은인이라 할 수 있지."
"뭐라고?"
"삼 년 전, 내 덕에 살았다는 것을 잊었소?"
냉운이 비웃어 말하자, 오선이 몸을 움찔했다.
"그, 그때 꼬마 놈이란 말이……."
그가 말을 더듬는 찰나였다.
냉운의 왼손이 소매 속에서 빠져나오는 듯하며 흰빛 하나가 오선의
관자놀이를 향해 섬전같이 다가섰다.
"암, 암기를……."
오선이 기겁하며 몸을 빼려 했다.
하나, 날아드는 흰빛 물체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선은 공포를 견딜 수 없는 듯 눈을 질끈 감았고, 마지막으로 망막
에 비추었던 휜 물체는 그의 머리통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피잉!
오선의 두개골을 박살낸 물건은 그 즉시 방향을 틀어 다시 냉운의 왼
손 안으로 쥐어졌다. 냉운은 흰빛을 띠고 있는 물체를 살피다가 왼손
식지(食指)에 가볍게 끼웠다.
그것은 한 개의 옥환(玉環)이었다.
무영옥환(無影玉環)이라고 불리어지는 무영천존의 신표이자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암기였다.
냉운은 무영옥환을 거두는 찰나 양 손 십지(十指)에 공력을 주입해
잇달아 네 번 퉁겨냈다. 천뢰강지(天雷 指)라는 무당에서 절전된 지
력이 시전되며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뒤따랐다.
"으윽!"
"흑!"
소림사를 철저히 유린하던 마객들이 허리를 꺾으며 나뒹굴었다. 반
금강불괴에 달한 몸뚱이도 지력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그들은 너무도 공포스러운 나머지 달아나야 한다는 것도 잊었다. 언
제나 타인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자들, 그들 역시 죽음 앞에서는 공
포를 느꼈고, 단말마의 비명만을 남긴 채 시체로 화해 버렸다.
신비마제는 이제 더 이상 공포라 할 수 없다.
단신으로 마객들을 섬멸한 냉운, 그가 이룩한 공포의 밤은 신비마제
의 명성을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이니까.
냉운은 마객들을 섬멸한 후 오공선사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스님……."
냉운은 차가운 땅에 무릎을 꿇으며 오공선사의 몸을 부축했다.
"아미타불……, 소시주가 장수할 관상이라는 것을 알았지."
오공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피묻은 손으로 냉운의 머리를 쓰다듬었
다.
"스님 덕분에 한 목숨 건져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허허……, 옥면살성자 냉운이라는 이름이 들릴 때 삼 년 전 빈승과
인연을 맺었던 냉가장의 소년을 기억했었네. 생각대로군."
오공은 지극히 피로한 듯 눈을 꼭 감았다.
냉운은 한숨 쉬며 근처를 향해 말했다.
"소생은 길이 급해 장문인을 돌봐 드리지 못하니, 어느 분이건 오셔
서 장문인을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오공이 눈을 희미하게 뜨고 자상히 말했다.
"빈승은 걱정 말게. 며칠 쉬면 다 나을 것이네. 어서 떠나게. 나머지
일은 소시주 없이도 잘 무마될 수 있네."
"죄송합니다."
"아미타불……, 미간에 검은 기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앞길에 대살겁
(大殺劫)이 있을 것 같군. 어디로 가는 길인가?"
"수라신궁으로 갑니다."
"아……."
오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띠며 천천히 말했다.
"수라신궁은 강호에서 가장 거대한 문파이네. 절세적 무공을 갖고 있
다고 방심해선 안 되네."
"명심하겠습니다."
"수라신궁을 보호하고 있는 삼관(三關)을 돌파하면 그리 큰 난관이
없을 것이네."
"예."
"수라신궁은 자네를 막지 못할 것이네. 하나, 수라신궁은 이미 위세
를 상실한 문파이네. 신비마제를 경계하게."
"명심하겠습니다."
"어서 떠나게. 두 어깨에 협의도(俠義道)의 운명을 걸머진 젊은이를
궁벽한 사찰 안에 붙잡을 수는 없지."
오공은 말을 마치며 근처를 향해 말했다.
"약왕전주(藥王殿主)는 가서 태환단(太丸丹) 한 갑을 갖고 오시게나.
옥면살성자께 드릴 수 있는 선물이라면 그것뿐일 것 같네."
"예."
근처에 둘러서 있던 승려 중 하나가 얼른 몸을 날렸다.
얼마 후, 냉운은 소림의 비전 성약 중 가장 뛰어난 약효를 갖고 있는
태환단이 가득 든 나무갑 하나를 품안에 넣게 되었다.
소림 승려들이 존경하며 바라보는 눈초리가 그를 용기백배하게 했다.
'불사검제 사부께서 명하신 탕마지도를 위해 행공하다가 죽어 간다
해도 후회하지는 않겠다.'
냉운은 소림사에 머물며 오공선사와 환담하고 싶었으나 발걸음을 떼
는 쪽을 택했다.
뎅! 뎅!
그윽한 종소리가 사내에 가득했다.
소림의 귀빈이 소림을 떠나는 것을 섭섭히 생각한다는 종 소리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