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가을학기 준비 특강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말씀/사43:1-21
요절/사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오늘 말씀은 가을학기 준비 특강으로 우리에게 방향이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절망적인 그들에게 ‘새 일’을 행하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될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새 일’을 행하실까요?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1절을 보십시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전에도 여기에도 앞으로도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만한 현실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힘든 일들을 겪었겠습니까?
원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강대국 바벨론의 침략으로 그토록 의지하던 성전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성전은 그들에게 있어 특별했습니다. 그들의 삶과 신앙의 근본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바벨론에 와 정착한 이들의 상황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가증스런 우상들을 섬기는 이방인들의 압제를 받으며 살아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도 자신들을 버린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으면 현실의 어려움을 그래도 참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게 더 두려운 것입니다. 주어진 현실의 고통보다도 미래가 없다는 것은 더 큰 지옥이나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강대국 바벨론을 생각하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바벨론에서 그들이 정착해서 살아간 지가 언 70년인데 그들이 돌아가고자 할까요? 정착한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게다가 소수가 돌아간다고 해도 그들이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고 옛날의 영광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인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어려워 보입니다. 불신과 두려움, 실패의식이 들기 시작하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끊없이 추락하고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말은 좋습니다. 사실 누구 하나 두려워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두렵게 만듭니다. 우리 삶 가운데는 비전과 소망을 따라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현실의 두려움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늘 감사하고 기뻐하며 기도하며 살고 싶은데, 늘 주님과 동행하며 찬양하며 예배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고 싶은데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삶의 두려움들이 있을까요? 대입 입시를 둔 고3 학생들에게는 입시가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수능이 100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대학 입시에 따라 내 인생이 결정될 것 같은 생각에 긴장과 두려움이 들 수 있습니다. 이제 코스모스 졸업을 하고 취업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분에게는 취업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생각이 되기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들이 들 수 있습니다. 가정을 이룬 분들에게는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섬기고 교육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현실입니다. 노후 문제나 건강 문제, 사람들과의 관계 문제 등에서도 두려움이 들 때가 참 많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나를 두렵게 합니다. 목자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소망을 갖다가도 현실을 바라보다 보면 두려움이 들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은 감정이나 의지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다른 문제입니다. 주님이 인도하실 승리와 소망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분에게는 고난과 어려움이 주어질지라도 두려워하기보다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때가 오기까지 인내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실 승리와 소망을 어디에서 찾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반드시 승리와 소망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부르심,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가 된 것은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나의 절대적인 보호와 사랑을 받는 나의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뜨거운 사랑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는 거기서부터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특별한 보배로 삼아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 가운데 출애굽시켜 구원하셨습니다. 시내산에서는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 키워가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거두는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죄악되어 우상숭배할 때 하나님은 강대국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시련과 아픔의 과정들을 통해 연단하시고 세상에 사로잡힌 영혼을 일깨우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 진정한 복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기 ‘물과 불’은 삶의 환난이나 고난, 인생의 여러 문제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예 ‘물 가운데로 지나지 않을 것이고 불 가운데로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약속해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에게 환난, 고난, 인생 문제, 이런 것들이 아예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생활과 또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오기까지 물과 강과 불과 불꽃 같은 환난과 여러 시련들을 겪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전쟁 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성을 쌓게 하고 도로를 닦게 했습니다. 그러다 병들면 바벨론 수도의 한복판을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에 내다 버렸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명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꽃이 그들을 사르지 못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소망하던 이스라엘, 고국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막과 광야를 지나면서 많은 시련들을 겪어야 합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온통 바위 산들을 지나면서 길도 제대로 찾기 쉽지 않고, 물도 찾기 쉽지 않고, 들짐승들의 울음소리도 들려오고 그들만의 고독한 행진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해주시고 보호해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기까지 많은 시련들을 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시련들을 없애주시기보다는 그 시련들 가운데 함께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 시련들을 통해 우리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씻어내고 불순물을 소멸시켜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정금 같이 나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또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북아프리카 지역의, 애굽을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희생제물로 삼으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3). 이 말씀은 당시 바벨론 포로들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말씀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어떻게 힘없는 이스라엘을 위해 거대한 애굽을 희생제물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셨습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정복한 이후, 애굽과 애굽 남쪽의 구스와 스바까지 점령할 계획을 세웁니다. 북쪽 페르시아에서 남쪽 애굽을 정복하려면 중간에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 즉 이스라엘을 교두보 삼고 그들의 지지를 구해야 했습니다. 이에 고레스는 칙령을 내려 바벨론에 사로잡혀 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귀환 명령을 내립니다. 성전도 재건하게 하고 나라가 안정을 찾도록 도와줍니다. 세상에 고레스가 그렇게 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에스라서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그렇게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다 자리를 깔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고 부르시는 손길도 이와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쓰디쓴 고난과 시련을 통해 마음을 겸손하게 하시고, 한편으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손길로 구속하시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길을 내십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새 역사를 시작하시고, 끝났다 생각하는 거기서 제일 빠른 길을 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심각한 문제를 만날지라도 두려움이 아니라, 자포자기가 아니라, 원망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십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며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 치르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고 죽기까지 고난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극진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5).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동서남북 사방에서 불러 모으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가로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으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던 바벨론 포로 시대 때도 하나님의 일하심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남은 자, 그루터기’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도 남은 자, 그루터기들을 사방에서 모으고 계십니다. 동서남북에서 불러 모으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진주에서도 하나님은 불러 모으고 계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구원역사는 계속됩니다. 이렇게 불러 모으는 역사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8-13절은 재판정을 배경으로 상정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 민족들과 그들의 우상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셨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하나님만이 참신’이라는 사실을 왜곡해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법정에 모인 여러 나라의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9절이 어렵게 쓰여 있지만 한마디로 이런 말씀입니다. “너희 섬기는 신들 중에 어느 신이 바벨론이 멸망하고 또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귀환할 것을 미리 알려준 적이 있느냐? 그런 신이 있으면 증인들을 세워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해보라(9).” 그러나 모두들 유구무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내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전해준 예언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도 긍휼이 여기시고 그들을 바벨론에서 구원해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0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이유는 그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택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종으로 택한 이유는 주인이신 하나님이 유일한 참 신임을 바로 알고 깨달아 세상에 전하는 증인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있는 신은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나설 수 있겠습니까? 바벨론이 섬기던 ‘마르둑’ 같은 우상들이 나설 수 있겠습니까? 다 가짜입니다. 재판장이 “증인, 일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인지 증언하세요!”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이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예언과 그 예언을 성취하신, 다시 말해 바벨론에서 경험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사실대로 증언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하면서 백성들이 동서남북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가족과 친척들이 생이별을 하고 생사조차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서남북 흩어진 백성들을 다시 불러 모을 것입니다. 아무리 먼 곳으로 흩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땅끝까지 가서 당신의 자녀들을 찾아올 것입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요, 유일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찾아 불러 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생각해 보면 과거 우리도 이스라엘과 같은 부류였습니다. 눈이 있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랬던 우리를 하나님이 변화시키셔서 과거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 주님께로 모으기 위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일생의 사명은 우리가 섬기는 가정과 캠퍼스와 직장과 사회 곳곳의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나서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택하신 또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의 복음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또 다른 증인들로 세울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거두시고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람들을 보내 바벨론을 무너뜨리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사야서 45장에 보면, 페르시아 왕 고레스라고 이름이 명시됩니다. 당시 바벨론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소문났습니다. 성벽 주변에는 커다란 여객선을 타고 다닐 정도로 강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은 바벨론 성은 세상 끝날까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벨론 귀족들이 유프라테스 강에 유람선을 띄워놓고 유유자적하며 유흥을 즐깁니다. 그런데 메대와 페르시아 연합군이 공격해오자,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유흥을 즐기던 배를 타고 도망쳐 버립니다. 성에 남은 자들은 목숨이라도 건지고자 싸움 한번 해보지 않고 성문을 활짝 열고 연합군을 맞이합니다. 역대 최강으로 소문났던 바벨론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과연,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은 창조주요, 왕이십니다(15). 이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바다 가운데에 길이 나고 큰물 가운데 지름길이 생깁니다(16). 출애굽 때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강력한 병거와 말을 탄 기병과 용사라 할지라도 한순간에 엎드러져 다 멸망합니다(17). 과거 출애굽 때 애굽 군대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옛날 일을 꺼내 기억을 되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가 왕년에 홍해를 갈랐고 애굽 군대를 몰살시켰다며 옛날꼰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니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화려했던 과거에만 집착하고 옛날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과거를 뛰어넘어 미래의 더 크고 더 영광스러운 일, 새 일,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과거의 역사 속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새 일은 인간의 계산과 예측을 뛰어넘는 일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광야에 길이 나고 사막에 강이 흐르는 것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광야는 모든 산맥조차 비껴가야 하는 황무한 땅으로, 사막은 풀과 나무가 자랄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영원히 남겨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계산과 예측을 뛰어넘어 험한 광야에 길을 내고, 메마른 사막에 강을 내고 샘을 만들어 길을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 마시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렇게 펼쳐질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 광경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여 묘사합니다.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21).
그런데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것이 홍해를 가른 출애굽의 역사와 비교할 때 과연 더 크고 더 영광스럽고 더 새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19절의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라는 말씀은 메말라 죽어 있는 상태에 생명의 물이 쏟아짐으로 다시 생명이 회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새 일은 가까이는 바벨론에서의 포로 귀환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와 구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속량물로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피를 흘리며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죄로 말미암아 광야 같은 세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이 길을 가는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님은 또 부활 승천 후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사막과 같이 메마른 우리 심령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도록 하셨습니다. “생수의 강이 내게서 흐르네. 저는 자 걷고 눈먼 자 보겠네. 옥문 열고 갇힌 자 푸시는 생수의 강이 내게 흘러넘치네.”
이를 통해 들짐승 같았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도 하나님을 존경하고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삭막한 사막처럼, 험한 광야처럼 죽음으로 가득했던 이 세상 곳곳에 새 생명의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밤하늘을 지켰던 수많은 별들을 비롯한 만유가 회복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고 앞으로 이루어질 이 일들은 홍해 바다가 갈라져 인간의 목숨을 구해줬던 옛날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새 일’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복음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사람의 예측대로 쉽사리 흘러가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처음부터 목자의 예측대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게 된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남을 것 같은 사람은 떠나가고 남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남아 헌신하는 예가 훨씬 많습니다. 최근에 저를 전도해준 1대1 성경공부 목자님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입생 신체검사 때 설문지를 하고 커피도 타주고 만나기로 했는데 시골에 일이 있다고 하며 제가 시골로 내려가 버렸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UBF에 신입생 MT 수양회가 있었는데 이 수양회도 참석하지 못하고 시골일 도와드려야 한다고 시골로 내려가 버려서 그다지 크게 소망을 두지는 않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분명 설문지에 성경공부 꼭 하고 싶다에 체크를 했었는데 목자님은 그다지 소망을 두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 개강하고 나서 봄날 어느 날에 캠퍼스 강의실로 찾아오신 목자님과 처음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목자님은 그다지 소망을 두지 않았던 자를 하나님은 목자로 세우셔서 이렇게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예측불가입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어떤 일이든 이루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처럼 거칠고 사막처럼 메마르며 죄 냄새 풀풀 나는 그런 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인간들의 예상을 깨고 복음을 영접하고 부르심을 따라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의 교만을 깨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고, 또 하나님의 은혜에 눈뜨게 하셨습니다. 만년 양으로 살 것 같던 사람을 말씀으로 뒤집으셔서 목자로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이 새 일을 우리 각자와 우리 교회 공동체 가운데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캠퍼스와 직장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 가운데 길이 나고 샘이 터지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놀라운 생명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증인으로 굳게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사역뿐만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삶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 전반부 내내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한다, 너희는 내것이다를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고백입니다. 그것도 짧게 말한 것이 아니라 전반부 내내 사랑고백하고 있으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나를 자녀삼아주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삶 가운데도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새 일을 싹틔우시고 계십니다. 우리 삶 가운데 주 안에서 복된 일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크고 작은 현실 문제들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선한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지금 우리에게 새 일을 행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I am doing a new thing!” 새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내가'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새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쓰임 받는 도구입니다. ‘I am doing’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께서 지금 새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 내면 가운데, 우리 교회 가운데, 우리 가정 가운데 새 일을 계획하시고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가운데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요, 주님이 되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요, 우리 인생의 설계자가 되십니다. 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 주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삶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