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최초의 이민족 왕조
원나라 건국 칭기즈 칸-
★ 시대 1271 뇬
(칭기스 칸)
칭기즈 칸이 병사한
뒤 몽골 제국은 분열에 휩
싸였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쿠빌라이였다. 쿠빌라이는
수도를 연경으로 옮기고 국호를 원
으로 바꾸었으니, 원나라는 중국 역사
상 최초의 이민족 왕조였다. 원나라는 백
성을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으로 철저
하게 구분했으며, 이러한 신분 제도는 이후
계층과 민족 간 갈등을 심화시켰다.
원나라(元 ; 중국 대륙에
는 일반적으로 중국이 몽골의 지배를 받
은 시기를 말한다. 몽골족의 정복 왕조 원나
라는 중국과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한 영역을 지
로 쫓겨난 뒤 ("북원"), 유목민 국가로 1635년까지 존속
한 몽골인 왕조로서,몽골 제국의 대칸 직할 세습령이었다.
정식 국호는 대원(大元)이었다.원나라는 송나라 를 멸망시킨
이민족의 정복 국가이며,중국을 식민 지배하였다이후 명나라
에게 중국의 지배권을 물려주게 된다.원나라는 중국을 지배했
으되 한족화 되지는 않았으며,지배층뿐 아니라, 제도 및 문화에
서도기존 몽골 제국의 유목 국가적인 특성을 유지했다. 그 때문
에 원나라라는 호칭 대신 유목민의 나라를 가리키는 울루스라
는 용어를 사용하여 대원 울루스라고 부르기도 한다.중국에게
있어 이 시기는 골인에게 식민 지배를 당한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중국인의 인구가급감하였으며,극심한 민족 차별
정책으로, 중국인들은 하층 민족으로 구분되어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다.
★ 역사
쿠빌라이 칸 이전의 몽골
국가의 현황은 몽골 제국 문서
를 참고하십시오.원나라는 1260년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골 제국의 제5
골 제국의국호를 '대원'으로 고침으로써 성립되
었으며,몽골어로는 다이온 이케 몽골 울루스(Dai
ön Yeke Mongγol Ulus), 즉 '대원대몽고국'(大
元大蒙古國)이다. 원나라는 유목 국가인 몽골 제국의
직계 국가다. 그러면서도 중국화된 명칭과 제도를 사용
하였다.그러나 쿠빌라이가 대칸의 지위에 오르는 과정에
서 쿠빌라이의 몽골제국 전체에 대한 통솔력은 쇠퇴한다.
손인 하이두가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자립하는 등 칸의 권
위가 크게변화하면서 몽골 제국은 재편의 과정에 들어
선 다.이러한 과정 끝에 원나라는 몽골 제국 중 쿠빌라
이의 후계자로 이어지는 대칸의 직접 지배가 미치는
영역으로 사실상 한정된 지배력을 행사하는 쿠빌
라이 가문의 세습령(울루스)이 되었다
이제 궁궐을 짓고 있으니
육지로나갑니다 1249년 11월
최이(崔怡 : 최우)가 죽고 아들인 최항(崔沆)이 정권을 계승했다. 원나 라 조정은 고려에 국왕 친조를 요청했으 며, 60명의 사신단을 고려에 보내(1250년 6월) 국왕이 육지를 나올 것을 종용했지만,고 려 조정은 이들을 강화도의 수창궁(壽昌宮)에서 크게 환대하여 무마시키는 한편, 48명의 사신단을 보내어 원나라를 무마하였다,쿠빌라이칸 때부터 사 원[元]이라는 국호는사용되었지만 이후 서술상의 편 의를위해몽골 제국 = (원나라로사용하기로 한다)당 시 최씨무신정권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도 없이 사 신들을 계속 보내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면서 원나 라를 무마시키기에만 주력하였고, 이 과정에서 계속 원나라와의 약속 을어김으로써 지속 해서 몽골의 침공들을 초래하였다 이것은 결과론적 이야기 지만 왕정복고를 제대로 해서 원나라에 대응하였으면 전국이 초 토화되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다. 문제 는 당시의 실권자가 군사정권의 우두머리였 고, 무조건적인 항몽(抗蒙)만이 자기 정권을 유 지할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초래한 재앙이었다. 1251년 6월 즉위한 멍케칸(헌종 : 1209~1259) 국내를 안정시킨 후 1253년 여름 예구(也古 : Yegü)를 사령관, 아모칸(阿母侃)과 홍복원(洪福源)을 부장으로 하면서,고려 국왕이 친조를 거부하고 출륙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하여 고려 토벌을 명령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최항은 각종 첩자(諜者)들을 동원하여 원나라의 의도를 파악하는 한편,사 신들을 보내 무마하고 원나라의 사신들 을 위해 큰 향연을 베풀기도 하였다(1251 년 10월 24일) 최항은 이현(李峴)과 이지장 (李之藏)을 원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거짓 으로 왕이 출륙을 할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승천 부(昇天府) 백마산성(白馬山城)에 궁궐을 신축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라는 등의 허언(거짓말)으로 무마 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식언(食言)에 질린 원나 라는 이들을 억류시킨 뒤 아투(阿土)등이 이끄는 37 명의 사신단을 고려로 파견하였다. 이전에 최 씨 무 신정권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아는 홍복원(洪福源) 은 “고려가 중성(重城)을 쌓고 있으며 육지로 나가려는 뜻은 조금도 없다.”라고 하면서 군사를동원해 고려를 쳐야 한다고 요청 하였지만, 원나라는 이에 대해 일단은 침묵하였다. 수달 사냥하는 몽골군이 무서워서 못 나갑니다최항이 원나라 사신들을 환대하여 무마 하는 데 주력하면서도 원나라 황제 의 요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변을 주지 않자, 1253년 7월 원나라는 군사적 압박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다 시 침공하였다.1253년 8월 최항이 다시 사신 을 보내 철군을 애걸하자, 사령관 예구는 고려왕 의 친조를 요구하면서 고려왕이 정말로 아파서 친 조를 못하는지를 확인하려 한다고 하였지만, 최항은 이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9월에 최항 은 다시 대장군(大將軍) 고열(高悅)을 예구에게 파견하 여 고려왕은 황제의 성지(聖旨)를 어김없이 받들고 있습 니다. 고려왕은 강화도에서 나와 승천부(昇天府) 백마산 성(白馬山城) 아래에 성곽을 쌓고 궁실을 지었습니다만, 왕이 백마산성 아래의 새 궁궐로 옮기지 못한 것은 왕이 근처에서 수달을 사냥하는 몽골 병사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상식 이하의 허언으로 무 마하려하자, 원나라는 고려가 황제의 요구를 거 절한 것으로 판단하고 다시 각지로 진격하여 고려군을 격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사령관
예구는 음모 사건에 휩쓸려 본
국으로 소환되었다. 예구가 귀환하
게 될 즈음, 고려 조정이 예구에게 전
군이 철수할 것을 애원하자.예구는 국왕의
출륙을 요구하면서 멍꾸다(蒙古大) 등 10인의
사신을 고려에 파견하였다. 멍꾸다는 고종에게
“대군이 들어와 하루에도 사망자가 수없이 발생하
는데 왕께서는 어찌 자기 한 몸만 아끼며, 만민의
생명은 돌보지 않는 것입니까? 왕께서 (하루라도)
빨리 출영하셨으면, 어찌 저 무고한 백성들이 참살
되었겠습니까? 예구 대왕의 말은 곧 황제의 말씀
이요 제가 드리는 말씀은 곧 예구대왕의 말과 같
사옵니다. 오늘이라도 왕께서 출영하여 몽골과
영원히 평화롭게 잘 지내면 어찌 즐겁지 아니
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최항은 이들에게 엄청난
환대를 베풀어 흠뻑 취하게 만들
고,고려왕이 강화도로 돌아오자,고려
가 애걸하고 강조했던 화약(和約)과는 달
리 고려병들은 각지의 몽골병들을 습격하였
다.<고려사>에서는 “교동별초가 평주성외에 복
병하였다가 밤에 오랑캐의 군영(몽골군 진영)에 들
어가 격살함이 심히 많았으며 교위 장자방은 짧은 칼을
가지고 손수 둔장(주둔지역 지구장교) 20여 명을 살해하였
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일단 몽골군이 철수하자 고려는 항상
그래 왔듯이 친몽파들이나 몽골에 투항했던 관리들을 주살(誅殺)
하고 귀양을 보냈다.고려 조정의 이 같은 알 수 없고 치기(稚氣) 어
린 행태들이 계속 원나라에 보고되었다. 이것은 최항이 오직 자기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 어떤 외교적인 레짐(regime)이나 관례(c
onvention)도 무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바로 이행태가
전국민의 고통을 초래한 것이다. 오히려 원나라의 대처가 허
술하고 관대해 보인다. 최항 정권 당시에는 무신정권에 대
한 혐오 분위기와 정상적인 왕정의 복고는물론, 친몽골
적인 분위기가 크게 싹트고 있었다.
1254년 1월 원나라 조정에서는
고려의 태자로 정치적 인질로 온 왕준
(王綧)이 진짜 태자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
져 이른바 친자논쟁(親子論爭)이 있었지만,멍
케칸은 고려가 행한 속임수를 문제 삼지 않았다.
왕준은 몽골 종실의 딸을 아내로 삼았으며,몽골 황
실은 그가 ‘사실상 한 가족’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있
었던 것같다. 1254년 3월 최항은 다시 사신을 파견하
였지만 분노한 원나라는 이들을 모두 감금하였고, 6월
에 최항은 다시 친몽파 사신들을 보내 무마하려하였다.
같은 해 7월 원나라가 두커(多可) 등 사신 50명을 보내자
최항은 고려 고종을 내보내어 환대하지만,두커(多可)는
“왕은 비록 육지로 나오셨지만 (실권자인) 최항(崔沆)과
상서(尙書) 이응렬(李應烈) 등이 나오지 않아 진정으로
항복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힐책한 뒤 몽골에 항
복한 관리들을 처참하게 살해한 문제를 제기했다.그러
자 최항은 이전에 몽골에 항복했던 조방언(趙邦彦) 등
을 역마로 빨리 올라오게 하여 왕으로 하여금 “보세
요, 우리가 모두 주살하지 않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참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다.
몽골군이 철수하자
다시 최항은 모든 악속들
을 파기하기로 결의하였다. 즉
1257년 정월 고려는 “해마다 우리
를 침범하니 바쳐도 소용이 없다”는 구
실로 몽골로 보내는 공물을 중단하였다. 그
런데 이 해 윤사월에 최항(崔沆)이 죽고 그의
아들인 최의(崔竩)가 권력을 이어받았다.고려가
다시 약속을 어기자 몽골군은 군사 작전에 돌입하였
고 1257년 6월 개경(開京)까지 진입하였다.다시 최항
을 이은 최의(崔竩)는 사신을 보내 철병(撤兵)을 애원하
였다. 이 때 원나라는 고려의 선물을 받지도 않았고,다시
국왕의 입조를 요구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최자(崔滋),
김보정(金寶鼎) 등의 대신들이 태자(太子)를 몽골로 보낼 것
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고종은 이를 수락하였다. 이에 다시 몽
골군을 9월 7일 철군하였다.1258년 3월 대사성 류경(柳璥),
김인준(金仁俊 = 別將), 박희실(朴希實) 등이 정변을 일으
켜 실권자인 최의(崔竩)를 살해하였고 이로써 이른바
고려의 대몽항쟁은 끝이 난 것이다.
1258년 12월 고종은 몽골의
모든 조건을 수락하면서 섬에서 나
왔고, 백성들도 섬에서 나와 농사에 전
념하라고 명한 뒤 태자 왕전(王倎)을 몽골
로 출발시켰다(1259년 4월 21일). 사실 조건
이라고 해봐야, 주요 내용은 출륙(出陸)과 친조
(親朝)였다. 그러나 고려는 이후에도 원나라의 각
종 요구들을 듣는 둥 마는 둥 하였고, 원 세조(쿠빌라
이칸)가 제위에 오른 뒤에도 한 번도 입조하지 않았다.
이에 세조는 강경하게 입조를 요구하였고 1264년 가을
원종은 무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도(베이징)에 들
어갔다. 세조는 원종을 맞이하여 두 차례나 연회를 베푸
는 등 극진히 환대하였고 원종은 3년 안에 개경으로 환
도할 것을 약속하였다. 세조는 고려에 남아있던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에 고려 왕실은 임연,
김준(김인준) 등의 발호가 있었
지만 원나라의 도움으로 무사히 왕정
복고(王政復古)를 이루게 되어 정상적인 국
정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남은 무신정권의 세
력들이 삼별초(三別抄)라는 이름으로 진도, 제주도 등
과 무인도로 전전하다가 3년 만에 진압되었다. 최 씨 무신
정권은 강화도를 요새화하면서 국가의 핵심부대인 삼별초의
전선 투입을 제한적으로 하였고, 주력은 주로 최 씨 개인의 경
호에 집중하였다. 이른바 대몽항쟁이라고 하여 산성(山城)과해
도(海島)로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농사도 못 짓고 양식도
없어 굶어 죽는 경우가 많았다. 또 육지에서는 많은 백성들이
죽어 가는데 최 씨 무신정권은 강화도에 화려한 집을 지어놓
고안락한 생활을 했으며 거대한 격구장을 지어 놀이에 열중
하였다. 이들에게 근검절약이나 솔선수범이라는 것은 없
었고 대몽골 철저 항전이라는 것은 정권 유지와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기 위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사>에는 “고종 16년(1229),
최이(최우)가 이웃집 100여 채를 강제로
빼앗아 격구장(擊毬場)을 만들었는데, 동서의
길이가 몇백 보나 되었으며, 바둑판처럼 평탄하였다
. 격구를 할 때마다 반드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물을 뿌
리게 하여 먼지가 나지 않게 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다른 사
람들의 가옥을 헐어 격구장을 확장하니, 강탈한 집이 모두 수백
채에 이르렀다. 날마다 도방(都房)과 마별초(馬別抄)를 모아 격구를
시켰으며 때로는 창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하며 말을 타고 활을 쏘게 하
였다. 고 하였다,이것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무신 정권의 30년대몽항쟁
의 전말이었다. 이상의 약사(略史)로 본다면, 고려의 대몽항쟁은 국민적 자
주 독립 투쟁이 아니라 최 씨 무신정권의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 씨 무신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전국이 병란(兵亂)에 휩쓸려 들어간 것이다. 애당초 원나라는
고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형제의 맹약
을 이루어 세계 경영에 고려가 참가하기를 바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오히려 세계를 지배한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인내심이 의아할 지경이다.
세계를 제패한 원나라의
군대가 왜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코앞의 나라인 약체 고려를 확실하게
군사적인 정벌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
지는 분명히 알려진 바는 없다. 칭기즈칸, 멍
케칸,쿠빌라이칸(원세조) 등의 원나라 지도부가
몽골과고려의 비밀스러운 관계에 대해서 어떤 논평
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끝도 없이 고려의
식언(食言)과 허언(虛言)을 인내하면서 긴 세월을 기다
렸다. 때로는 강경책으로 때로는 인내심을 가지고 대처한
것이다.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무한 인내심의 발휘는 중요한
역사 연구과제이기도 하다. 다만 앞에서 해설했던 카치운(哈
眞) 장군의 말이나 행동,원 세조(쿠빌라이칸)의 고려에 대한 예
찬(禮讚)이 하나의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일반적인 설명은 원나라
가 중국과 세계의 경영이 더욱 절실했기 때문에 고려에 대해서 그만
큼 철저히 정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분석을 보
면,그것은 분명 틀린 설명이다(쿠빌라이칸의 군대는 그 먼 베트남의
열대 밀림까지도 멈추지 않고 진공해 들어갔다. 베트남은 몽골 기병들
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몽골인들은 고려인들을 단순히 외
국인(外國人)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있다.이 몽골
과 고려의 역사적 미스터리(mystery)는 한국인과 몽골인과의 관계
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이 있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다 한 가지 분명
한 사실은 고려의 30여 년 대몽항쟁은 조작 신화(myth)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최 씨 무신정권은 30여 년을 식언(食言), 허언
(虛言),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일관하였다.
몽골군이 침공하면 왕과 태자를
동원하여 항복을 맹서하여 무마하고,
사신단에게 잔치를 벌여 입을 막았으며,그
것도 안 되면 친몽파 사신들을 보내 울며 호소
하고 그러고 난 뒤에는 다시 입을 닦고 친몽파들을
대거 숙청하거나 몽골과 화의(和議)를 주장하던 관리
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해버렸다.이로 인하여 다시 몽골
의 침공을 받았다. 이런 일을 30여 년을 반복하였다.구국 투
쟁의 상징으로 알려진 삼별초(三別抄)도 이상하다. 삼별초는
그러나 우리가 <원사>, <고려사>를 면밀히 보면, 몽골은 고려
에 대해서 형제의 맹약을 철저히 지킨 반면에 고려의 실권자
인 최 씨 군사정권은 철저히 이를 무시하고 오직 자기의 권
력만을 지키기 위해 온갖 악행과 배신을 저지르고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본대로 어떤 때는
현지민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몽골이 설치한 다루가치
들을 몰살시키기도 하고(고종 19년 : 1
232년 7월), 원나라 사신 멍꾸다(蒙古大)
와 고종(高宗)이 만나 화약(和約)을 맺고 평화
분위기가 무르익는데도 고려병들은 각지의 몽골
병들을 습격하여 적지 않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고종 40년 : 1253년 11월).이처럼 원나라를 어린아
이 다루듯이 놀리고 피점령 지역에 파견된 다루가치가
동시에 대량으로 살해당하는 등 원나라 역사상 있기 어
려운 사태가 고려에서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원
나라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인내심을 가지고
대응하였다. 예컨대 같은 경우를 저질렀던 대요수
국(大遼收國)의 왕 야시부(耶厮不)는 70일 만에
제거되고 나라도 사라졌다.
최 씨 무신정권의 이같이
상식을 벗어나고 비합리적이며
때로는 극단적인 조치들은 역으로 이
후 친몽파(親蒙派)들이 증가하는 결과를초
래하게 된다. 1256년경(고종 43년)에 이르면,
최 씨 군사정권에 대한 고려 백성들의 불만과 분노
는 곳곳에서 몽골군을 환영하는 사태로 나타나기 시작
했다.오죽하면 몽골 사신(멍꾸다)이 실권도 없는 왕(고종)
에게 “대군이 들어와 하루에도 사망자가 수없이 발생하는데
왕께서는 어찌 자기 한 몸만 아끼며 만민의 생명은 돌보지 않
는 것입니까? 왕께서 (하루라도) 빨리 출영하셨으면,어찌 저
무고한 백성들이 참살되었겠습니까?(1253년)”라고 한탄하
고 있다.설령 왕이 실권이 없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원나라
가 지원할 터이니 왕이 진실로 백성을 사랑한다면 결단을
내려서 전쟁을 중지시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이름도 찬란한
‘고려의 대몽항쟁 30년사’를 한몽
관계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았
다. 드라마 <기황후>에서 왕유(고려 폐
주)가척결되어야 할 세력으로 지목한 부원배
(附元輩 : 몽골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세력 또는
몽골에 빌붙어 부를 축적하거나 득세하는 세력)를
일제 강점기 친일세력과 동일시하는 것은 분명히 잘
못된 사고다. 친몽(親蒙) 세력은 민족 배신자들이라고
배웠다. 물론 일부는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
에 나라를 황폐화시킨 주범은 실은 최 씨 무신정권이었
다. 최 씨 무신 정권은 사라지면서도 그 잔존 하수인
들이 10여 년을 고려를 괴롭혔다.
당시 최 씨 무신정권의 병폐
들은 <고려사>에 낱낱이 기록되
어있고 인터넷 상에서도 많이 나와 있
기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최충헌
(崔忠獻)이 움직이면 무장한 위병(衛兵)이 반경
10리를 가득 채웠고, 거란군이 침략했을 때도 관군
(官軍)보다 최충헌의 사병(私兵)의 군사력이 더 강했
을 정도였다. 이런 식이니 국난 극복이 제대로 될 리도 없
다. 1226년 최이(崔怡)의 발에 부스럼이 생기자 모든 관리
들이 최이의 부스럼이 낫게 해달라고 소지를 태워대는 바람에
개경의 종이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올랐다고한다(마치 북한 김일
성 가계의 이야기를 보는 듯하다). 최이(崔怡)가 죽자 최항(崔沆)
은 이틀만 상복(喪服)을 입고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아버지의 첩
들을 간음(姦淫)하기 시작했다. 최항이 죽자 최의(崔宜)는 그의
어머니의 가계가 기생(妓生) 집안이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이
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죽였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문서나 책 속에창기(娼妓), 천비(賤婢)
등의 말이 나오면 읽지 않거나 지워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시대였다.
이 시기에 고려 왕실을 확실히 지켜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원나라였다. 과거의
정치가 역사요, 현대의 역사가 정치라는 점과
과거의 역사는 현재와 미래와 쉼 없이 대화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대제국을 건설한 칭기즈
칸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상속한다는 유목민의 관행에
따라 네 명의 아들에게 영토를 분할했다. 그리하여 첫째
아들 주치는 남부 러시아의 초원 지대를,둘째 아들 차가타
이는 서투르키스탄 지역을, 셋째 아들 오고타이는 동투르키
스탄 지역을 받았다.그리고 자신은 몽골 본토와 중국 북부 지
역을 다스리며 이들에게 분할한 지역의 통치권을 중앙에 귀속
시켰다.1227년,칭기즈 칸이 병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칸의 리
에 오른 것은 셋째 오고타이였다.오고타이가 칸이 되는 것에 불
만의 소리도 있었지만, 칭기즈 칸의 유지와 왕자로서의 훌륭한
인품 때문에 무사히 칸이 될 수 있었다.오고타이 칸은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키고,여러 정복 사업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거란 족 출신 야율초재(耶律楚材)를 재상으로 삼아
중앙 정부의 정치 체제를 정비하고, 카라코룸을 수도
로 정하는 등 몽골 제국을한층 발전시켰다.
(넓은 영토를 가진 원나라)
그런데 몽골 제국은 1241년에
오고타이 칸이 사망한 뒤 분열의 조
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고타이 칸의 뒤
를 이어 의 장남 구유크가 쿠릴타이를 통해 칸
이 되었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쿠릴타이였다.칭기
즈 칸의 장남 주치 집안의 바투가 서방 원정 때 생긴 구
유크와의 불화로 쿠릴타이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몽
골 제국의 계승 분쟁은 1248년에 구유크가 사망하자 다시 발
생했다. 오고타이 가문이 칸을 계승하려 하자,바투 가문과 톨루
이 가문이 이를 반대한 것이다.서로가 칸의 계승을 놓고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1251년 바투가 독단적으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톨루이 가문의 장남 몽케가 칸으로 결정되었
다.칸 즉위 후 몽케는 오고타이 가문을 몰락시키는 한편,동생
훌라구에게 서남아시아 정복을 명하고, 자신은 동생
쿠빌라이와 함께 남송 정복에 나섰다.
1259년, 드디어 몽골 제국 성립
후 최고의 분열이 일어났다. 몽케 칸이
남송을 공격하던 중 병사하자, 칸의 자리를
놓고 톨루이 가문 형제들이 내분을 일으킨 것이
다.내분의 주인공은 몽케 칸과 함께 남송을 공격한
쿠빌라이와 막내 동생 아리크 부케였다.몽케 칸이 사망
하자 오고타이 가문은 아리크 부케를 칸에 즉위시키고자
했다.이에 쿠빌라이는 재빠르게 남송과 강화를 맺고,1260
년 개평(開平)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칸에 올랐다.그리고
같은 해 아리크 부케 역시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통해
칸이 됨으로써 몽골 제국에는 두 명의 칸이 존재했다. 이는 당연
히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1260년에 시작
된 이들의 전쟁은 초기에 막상막하였으나,시간이 지나면서 전세는
점차 막강한 군사력과 풍부한 물자를 장악하고 있던 쿠빌라이에게
유리해졌다. 4년 후 승리는 쿠빌라이에게 돌아갔다.하지만 쿠빌라
이는 아리크 부케에게 항복을 받아 낼 수는 있었지만,몽골 제국의
분열은 막을 수 없었다. 쿠빌라이 칸은 카라코룸을 그대로 둔 채
수도를 연경(燕京)으로 옮기고 대도(大都)로 삼았다. 1271년
에는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13세기 몽골 제
국은 킵차크한국, 일한국, 차가타이한국, 오고타이한국
등의 사한국과 원으로 나누어졌으며, 이들의
교류는 점차 소원해졌다.
1268년부터 이미 남송을 공격했던
몽골은 쿠빌라이가 원나라를 성립한 후
본격적으로 남송의 양양(襄陽)을 공격했다.
그러나 남송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남송의 군사
와 백성들은 사력을 다해 무려 5년이나 양양을 지
켜 냈다.남송은 수비대장 여문환(呂文煥)을 중심으로
몽골군에 맞섰지만 1273년에 결국 함락되었다.이어서 바
얀(佰顔)을 총사령관으로 한 원나라 군대는 1274년,악주를
점령하고 양쯔 강을 따라 진군해 1275년에는 건강에 주둔했
다.이제 바얀의 원나라 군대는 남송의 수도 임안과 지척 거리
에 있었다. 그러나 남송은 원나라 군대를 물리치기에 역부족
이었다.네 살의 황제 공제(恭帝)는 각지에서 조직된 의병들
이 수도임안으로 모였음에도 강화를 주장하는 중신들의 의
견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1276년, 남송은 황제의 상징인
'전국(傳國)의 새(璽)'를 바얀에게 바치며 항복했다.
하지만 남송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원나라의 임안 함락 때 탈출한 공제의 형
조시(趙是)가 주전파 중신들에 의해 복주에서
즉위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1278년,조시가
사망하자 남송 조정은 다시 강주로 피신하여 조시의 동
생 조병(趙昺)을 옹립했다. 남송 조정은 원나라 군대를 피
해 광주의 애산(厓山)에 마지막 근거지를 마련하고 장세걸,육
수부 등이 끝까지 항전했다.하지만 남송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1279년, 육수부가 아홉 살이었던 조병을 업고 바다에 투신자살함으
로써 남송은 완전히 멸망했다.이로써 원나라는 중국을 통일하였으며,몽
골 족은 중국 전역을 정복한 최초의 이민족이 되었다.대제 국을 건설한 원
세조 쿠빌라이는 전국적인 통일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그는 민정 기
관으로 중서성(中書省),군정 기관으로 추밀원(樞密院),감찰 기관으로 어사대
(御史臺),재정 기관으로 상서성(尙書省),지방 기관으로 행중서성(行中書省)을
두었다.이 기관들은 기본적으로 중국식 제도를 계승한 것이었으며, 주목할 만한
것은 행중서성의 설치였다. 행중서성은 중앙 중서성에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
는 출장 기관으로, 중서성 소속이 아닌 황제 직속 기관이었다. 행성으로 불린
행중서성은 독자적이고 총체적인 행정 권한을 소유했으며, 총 11개가 설치
되었다. 행중서성은 명, 청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져 성(省)의 기원이 되었다.
원나라는 백성을 네 개의
신분으로 엄격하게 구별하였는
데,가장 상위를 차지했던 계급은 몽
골인이었으며, 그다음으로는 색목인(色
目人), 한인(漢人), 남인(南人)의 순서였다.
여기서 색목인은 몽골인을 제외한 유목민과 아
라비아 인, 유럽 인을 가리키며, 한인은 거란인, 여
진인, 금나라 치하의 한인들을 말하며, 마지막으로 남
인은 남송 치하의 한인들을 말한다. 이러한 신분 제도는
원나라가 정복 전쟁을 할 당시 협력 정도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때문에 마지막까지 저항한 남송 치하의 한인들이 가
장 낮은 등급을 차지했다.원나라의 신분 제도는 사회적뿐만 아
니라 정치적으로 적용되어 몽골인과 색목인은 상위 기관으로 승
진이 가능했으나, 한인과 남인은 제한이 많았다. 그리하여 원나라
시대에 한인들은 승진할 기회가 거의 없었으며, 이후에 부활한 과
거 제도를 통해 관리가 되었어도 서리 정도에 머물렀다. 결국 이
러한 신분 제도는 계층과 민족 간 갈등을 첨예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이후 왕조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했다.한편 원나라
시대에는 광활한 영토를 바탕으로
동서 교류가 활발했다.
교류와 통치를 위해 초원길,
비단길, 바닷길이 개척되었으며,
사신단과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역전 제도가 실시되었다. 그리하여
원나라의 명성이 세계만방에 알려졌으며,서
방 각국의 사절단, 상인, 여행가, 전도사들의 출
입이 빈번해졌다. 특히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
는 중국 여러 도시를 유람하였으며, 관리로 임용되기
도했다.그는 17년간 중국에서 살았는데,후에 원나라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을 펴
유럽 사람들에게 원나라를 소개했다. 원나라가 중국 역
사상 최초의 이민족 왕조였기 때문에 중국 한족에게는
굴욕적인 시대였을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원나라 통치
기간에 중국은 분명 각 민족 간에 활발하게 교류한
것이 사실이다.
ㆍ 1234년 :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
칸이 금나라를 멸망시키다.ㆍ 1259년 :
톨루이 가문 형제 사이에 내분이 발생해
몽골 제국의 분열이 최고조에 이르다.ㆍ
1268년 : 쿠빌라이 칸이 본격적으로
남송 공격을 재개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