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華城)을 돌아보면서...
1학년7반 김진순
하늘이 약간 우울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등교하는 아침,흐릿한 하늘일지라도 마음이 맑아지는 것은 왜 일까? 우리 학교 체험활동하는 날이라서 그럴것이다.어릴적 부푼 가슴 그대로의 느낌은 아닐지라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대문을 나섰다.아! 못가면 어떻게 하지,슬금슬금 찿아오는 걱정을 끌어 안고 교실문을 들어섰다.그 미소와 함께 비가 올까봐 걱정을 하는 마음은 해소한 것은 비가와도 체험활동을 간다는 소식이었다.
우리가 출발을 하려고 할때 반가운 햇님이 살짝 얼굴을 드러내고 미소를 지어주었다.우리는 줄줄이 체험활동의 장소로 이동을 했다.걸어서 십분거리에 있는 장안문.우리는 오늘 수원 화성을 돌아보기로 했다.수원시내에 가깝게 있으면서도 잘 둘러보지 못한것을 오늘은 둘러보기로 한것이다.
-화성에 들어가면서-
수원화성은 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지금으로부터 2백여년 전인 1796년10월,정조시대 조선왕조의 문화적 역량이 결집되어 탄생되었다.정조는 화산 아래 원래 수원을 팔달산 아래현재의 수원으로 옮긴후,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는 천하명당 하산에다 사도세자 소를 옮겨 쓴다. 그리고는 그 후인 1794년부터 현재의 수원에 사도세자의 묘소를 옹위하는 새로운 계획 도시를 건설하였다고 한다.이때 정조는 사도세자 묘소가 있는 화산(花山)의 화자를 따다가 같은 의미의 화(華)로 바꾸어 이 신도시를 화성(華城)이라 명명하게 된다.
정조로서의 화성 신도시 건설은 그의 애닮은 꿈의 실현과정이었다.정조는 화성을 건설하여,장차 1804년이 되면 왕위를 왕세자에게 넘겨준후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그곳에 가서 살고자 하였다.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수원은 정조에게는 선산이있어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정조는 이곳에 물러난 후 영조와의 약속때문에 자신이 이루어 낼수 없었던 사도세자의 완전한 복권을 신왕으로하여금 추진하도록 하여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려 하였다.그러므로 화성은 정조가 상왕으로서 옹거할때를 대비한 여러시설물들의 갖추어진 대도시를 지향하면서 건설되었다.600칸의 달하는 대규모의 행궁이 건설되었고,여러가지 도시기반시설등이 들어섰으며,그 주위에 6Km의 달하는 화성 성곽을 둘러치게 되었다.
정조가 백성 및 신료들과 더불어 윤택하고 활기찬 생활을 영위할수 있도록 화성 신도시는 첨단의 농업과 상업기설을 갖춘 개혁의 시범도시로 태어났다.이곳으로 서울과 삼남지방을 잇는 교통로가 지나고 대규모의 시장이 개설되었으며 첨단 영농방식으로 경영하는 국영농장도 설치되었다.또한 곳곳에 수원춘 팔경과 추팔경의 명승지들이 조성되어 아름다운 도시 환경도 갖추어졋다.화성에서 전통문화의 세련성을 찿아보려면 이러한 신도시의 후신인수원에는 화성의 울타리인 성곽외에도 이러한 생활문화의 유적과경관들이 아직 곳곳에 남아 있다.
-유적에는-
정조대의 시대적 과제였던 외래문화와 조선 전통문화의 융합들이 창의적으로 구현되었다.화성신도시의 여러가지 시설물들은 기능성과 외관을 함께 살리게 되었고,그 결과 비상시와 평상시의 기능를 동시에 충족시키면서도 주변 자연과도 어울리는 아름다운 외관을 가지게 되었다.정조대의 세련된 문화수준이 투영되고 화성은 조선후기 문화의 결정체이자 민족준화의 위대한 금자탑으로 오늘날까지 빛을 발하고 있다.
-답사-
과천에서 옛길을 따라 지지대의 고개를 넘고 노송지대를 지나 화성의 농업시설이었던 만석 거주 저수지 옆길로 장안문까지는 과거에는 한 나절 길이었지만 지금은 자동차로 30분 거리라고 한다.정조가 사도세자인 아버지를 묻으려고 지지대 길을 오를때,너무도 힘겹게 힘겹게 천천히 올랐다고 하고 돌아오는 길엔 왜 이리도 빨리가는가,천천히 아버지를 떠나 보낸 마음이 얼마나 아리고 아프면 그리했을까? 그 길을 맛보아 했지만 학교에서는 가까운 장안문이기 때문에 그 곳 장안문으로 부터 올라가기 시작했다.아무도 자료없이 누군가의 해설을 해주는 이도 없이 따라 갔기 때문에 그 궁금증을 해소 하기 위해 언니에게 자료를 얻었다. 외곽을 따라서 올라가는길,주변경관이 너무나 아름다움에 취해 보았다.팔달산의 정상인 군사 취휘소인 서장대까지 갑자기 뜨거워진 햇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올라 화성전체를 조감해 보았다.그리고는 곧바로 화서문을 지나고 서북공돈심을 거쳐 북수문과 보화를 올리던 봉돈을 보았다.어느시설물이나 개성적이지만 특히 정조가 달맞이 하였다던 방화수류정과 용연의 경관에서는 인공이 자연과 너무나 잘 어우려져 이루어낸 우리나라 특유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선인들이 이 곳에 건축기법과 외래건축기법을 유합시켜 특색있는 외관을 지닌 조선후기 제일의 정자를 이루어냈다.비상시에는 군사지휘소이자 평상시에는 유락의 명소로서의 기능성과 외관도 이곳에서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나타내고 있다.화성성곽을 따라 올라가다 돌아오는길에는 정조가 노후를 보내고자 햇던 화성행궁의 머리가 보였다.화성낙성연등 여러 행사가 열렸던 곳 낙남헌과 정조의 초상화가 걸렸던 정조의 사당,화녕전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그렇게 여유로운 시간이 아니였기에 정조가 그 건물들의 쓸쓸한 뜨락을 거닐며 시대의 격랑속에 잠겨버린 정조의 꿈들을 생각해 보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화성의 문화유산들과의 부실과 졸속-
오늘날 우리에게는 문화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기도 한 화성,2백년전 정조시대의 선인들은 화성건설공사의 모든 과정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하여[화성성역의 궤]라는 세계의 유례가 없는 완전보고서를 남겨 놓았다.모든 공사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고 있어 이자료에 있어 당시에는 부실과 졸속을 원칙으로 배제할수 있었으며,훗날 훼손된 화성의 완전한 복원이 가능하였다.한국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셰계적이라는 말들을 하지만,이는 화성에서도 그대로 들어맞는 말이다.정조시대에 화성에 구현된 저 세련된 문화수준과 조형감각,그리고 한국적 정취와 개성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화성에는 일제시대 이래, 일본사람들에 의한 오해와 왜곡이 아직껏 얼룩을 남기고 있다.화성을 흔히 '수원성'이라고들 부르는데,사실은 이 이름이 일제침략기에 일본사람들이 그들 눈에 특이하게 비췬 수원의 성곽에 주목하여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저들이 성곽만을 문화재로 지정한 이후 지금껏 화성에 대한 우리 인식은 이를 답습하여 급기야 세계문화유산으로도 화성을 군사건물이라 설명을 하면서 성곽만을 등록해 놓기에 이러렀다.우리의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인식 수준이 이처럼 후진적인 데 머물러 있다.2백년전에 신도시 화성을 감동속에 둘러보고도 돌아오는 길에 아무것도 모르고 어벙했던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참 으로 무겁다.그러나 자료를 본 지금은 나는 정조시대의 역사적 진실앞에서 오늘 우리의 문화의식의 후진성을 절감해 보았다.다시 한번 성을 따라 전통 문화유산을 탐사하는 값진 시간을 내어 보도록 해야 겠다.
-화성 탐방을 마치면서-
가까우면서도 우리가 쉽게 잊고 사는곳,너무나 자주 보기 때문에 귀하게 여기지 못했던 우리의 화성,우리의 체험 활동은 짧지만 시간 문화유산 해설사도 없이 자유로운 탐방이었지만 기행문이라는 커다란 숙제를 내 주신 선생님,부담스럼기만 했던 숙제를 안고도 자료를 찿아 헤메이는 동안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화성에 대해 좀 더 깊이를 알게 되었고,정조의 효성이 지극함을 다시 가슴으로 느끼게 된것,그것 또한 큰 수확이라 여겨진디.빙~둘러싼 성곽 또한 옹벽으로 되어 있다는것,화성을 건축할때,정약용의 거중기가 그 진가를 발휘했다는 사실,이런 일까지도 알게 됨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이제 우리의 문화유산을 귀중히 여기며 관심을 갖고 보는 연습이 필요하리라.이번 기행을 거울로 삼으면....
2005년 6월 17일 화성체험 학습중에서
첫댓글 후배님! 추카 드립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작업해 주시고 전국 학예경연대회와 같은 곳에 출전 하셔서 학교와 개인의 명예를 드높여 주시길 빌께요 다시한번 진심으로 추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