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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11]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마르 7,24-30
그때에 24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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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테마] : 삶의 모든 것을 주님 발 앞으로 가져가자 <독서 : 1열왕 11,4-13 / 복음 : 마르 7,24-30>
인생 여정을 가다 보면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 기회를 통해 한 단계 도약하는 은총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좌절하며 힘겨운 순간순간을 원망으로 지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교도인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부인은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맞닥뜨린 한계 상황 앞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찾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한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상황 한가운데 서 있는 이 여인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좌절하며 포기하거나 원망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우상을 찾아 위안을 받거나 요행을 바라지 않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겸허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절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면 누구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마귀가 들렸다는 것은 양심과 자유의지로 자신의 삶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지 못하고, 나쁜 힘에 얽매여 이끌려 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이방인이든 유다인이든 모든 인간이 구원되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믿음을 갖고 예수님 발 앞으로 가져가도록 합시다. 절박한 상황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문제를 그분 발 앞으로 가지고 가서 그분의 자비를 청하는 믿음을 가지도록 합시다.............◆
[말씀자료 : 김미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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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5주간 목요일 I 묵상기도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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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 ▷
예수님, 당신이 무한히 선하시며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죄인일지라도 그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저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당신이 아닌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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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실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그들이 실망하지 않고 빠른 시일내에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오늘의 복음 : [다해] 연중 제5주간 목요일 / 세계 병자의 날 마르 7,24-30
그때에 24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3.blog.daum.net%2Fimage%2F22%2Fblog%2F2008%2F08%2F09%2F00%2F52%2F489c6bb40b3d7%26filename%3Dda_icon05.gif)
영적독서 : 내면의 자아
예수님은 우리가 계명을 어겨도, 설령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지라도 하늘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법규 준수자들인 바리사이를 닮아서는 안 되며, 그랬다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바리사이들이 고집하는 법규 준수는 외형적인 것이었다. 율법은 사람들과 동떨어진 객관적인 것으로 우리 내면에 자리잡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한결같이 내면에서 우러나는 종교 실천을 강조하셨다. 하느님 나라에 관여하는 것은 내면의 자아다. 그분은 우리에게 내면으로 들어가라고, 거룩함은 내면의 상태라고 주장하신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평화를 발견한다. 외적 규범을 아무리 지킨다 해도 내면의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주지는 않는다. …오직 내면이 온전히 통합되어 힘을 지닐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율법을 실현할 수 있다.............<메릴린 거스틴,「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여덟 가지 열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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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5주간 목요일(2010-02-11) I 복음묵상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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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 † 유다인의 머릿속을 뒤집는 작업
지난 이틀간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말 그대로 지키고 따르며 소중히 여기던 조상들의 전통을 ’사람이 만든 계명’으로 단언하시고, 이를 과감히 폐기하심으로써 정결에 대한 새로운 계명을 세우신 것을 보았다. 이제 세상에서 사람과 또 사람과 하느님의 관계를 더럽히는 것은 모두가 사람의 마음에서 밖으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이다.
예수께서 유다인들의 전통과 관습을 폐기하신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런 일들이 누적되어 예수께 대한 유다인 지도계층을 적대감은 계속 커져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중은 전통이나 관습 따위의 외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머릿속에 든 생각까지 바꾸는데 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일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만이 하느님 야훼로부터 간택된 백성이며 자기들만이 구원 받으리라는 배타적인 선민사상(選民思想)과 구원관에 사로 잡혀있었다. 비참했던 바빌론 유배 생활을 몸소 체험한 것을 시작으로 주변 강대국의 끊임없는 침략과 지배, 그리고 문화적인 압박을 통하여 그들의 선민사상과 구원관은 메시아사상과 함께 더욱 고조되어갔다.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 그들의 메시아사상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해방과 메시아의 직접적 통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메시아는 비천한 마구간 출신의 나자렛 평민으로 등장한다. 그분은 백성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천상의 왕국을 선포하시며, 로마제국의 세력을 내어 몰기는커녕 가난하고 구박받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억압받는 이들에게 지상의 행복보다는 천상의 행복을 약속하신다. 이것이 곧 예수께서 의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구원관을 보편화시키는 작업이다. 비록 이러한 메시아의 참된 정체를 유다인들이 외면하더라도 이 작업이 관철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이방인 지역의 선교를 떠나신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 찾아가신 ’띠로’는 시리아의 페니키아(시로페니키아) 지방에 속한 도시로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서쪽으로 약 5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현재 레바논에 속하는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이다. 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곳에 도착하여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집에 계시려 했으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한 여인 때문에 들키게 되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 머물러 잠시 생각해 보면, 몇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이 생긴다. 첫째, 예수께서 혼자 띠로까지 먼길을 가셨을 리는 없다. 오늘 복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보도하는 마태오복음(15,21-28)을 보면 분명히 제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띠로와 시돈의 이방인지역 선교여행에 제자들이 함께 있었고, 군중도 대거 동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 따라서 예수께서 ’조용히 계시려 했으나 들키게 된 일’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메시아의 정체성이 점점 밝혀지고 있음을 예고하는 마르코복음사가 특유의 편집기법으로 풀이된다. 이 의도가 악령이 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여인은 선민(選民)도 아니고, 선민들로부터 비난받던 한 이방인이다. 그런데 이 여인이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를 찾아와 딸에 대한 치유의 간청과 함께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27절)는 예수님의 말씀과 이에 대한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28절)라는 여인의 대답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구원관이 메아리치지만 여인의 대답으로 그 메아리가 즉시 멈춘다.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에 주위의 이스라엘 군중은 처음에 사뭇 기뻐하였을 것이나, 여인의 대답을 알아들은 사람은 즉시 안색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행동은 곧 이방인 여인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제 이방인들도 구원의 범주에 포함된다. 이방인 여인의 탄복할 믿음을 바탕으로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의 머릿속 생각까지 엎어버리셨다. 이스라엘 백성이건 이방인이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참 메시아로 모시고 그 분께 믿음을 두는 자는 다 하느님의 백성이다. 이들이 곧 신약의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며 이를 우리는 교회라 부르는 것이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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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이방 여인의 믿음과 구원
주님은 갈릴래아를 떠나 이방인의 땅인 티로와 시돈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의 활동에 있어서 주님께서 이방인의 땅으로 가신 일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당시에는 이방인과 친교를 나누거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러가지 가르침과 기적을 보고도 끝내 거부하는 유다인들에게 발걸음을 돌리셨습니다. 그리고 도무지 복음의 은총을 누릴 수 없는 이방인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주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너서 티로와 시돈 지역으로 가신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선택 받은 백성이 자신을 거부하게 되자, 이방인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은총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방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으며, 이방인들에게 제 2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용서하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후에 사도 바오로가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바오로는 유다인들이 복음을 거절했을 때에, 이방인을 향해 그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I.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딸을 치유하심
1. 이방지역 티로 지방으로 가시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마르 7,24)
주님은 카파르나움을 떠나 북서쪽으로 약 20리쯤 떨어진 페니키아(현재의 레바논)에 있는 항구 도시인 티로와 시돈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곳을 찾으신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곳을 찾으신 첫 번째 이유는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주님을 거부하고 배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거듭된 가르침과 기적을 보고도 계속해서 거부하는 군중들을 보시고, 그들로부터 발 걸음을 돌리셨습니다.
유다인들이 복음을 거부함에 따라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유다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거부하였지만, 이방인들은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고 주님을 진정한 마음으로 맞이하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을 선민이라 생각하고, 다른 민족들을 신의 선택에서 제외된 이방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로 선민이라고 자랑하며 메시아를 거부하는 유다인을 떠나,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주님께서 발길을 옮기신 곳이 어디입니까? 티로는 바알 숭배의 본고장으로써 엘리야 때부터 유다인들이 가장 혐오했던 곳이었습니다. 주님을 찾아온 시리아 페니키아(시리아에 속한 페니키아) 역시 선택 받지 못한 이방인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다인들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돌려 이러한 이방인의 땅으로 가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또 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방인의 마을로 가신 두 번째 이유는 주님께서 마지막 남은 시간을 제자들과 보내시면서 제자들을 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곧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 자신을 이어 복음 전파의 활동을 감당할 제자들을 훈련한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가능한 티로 지방에서 한 집에 머물면서 개인적으로 제자들을 훈련하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곳에서 무리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제자 훈련에 전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주님은 은밀하게 행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 역시 주님에 대한 소문이 전파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태 15,21)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마르 7,25-26)
그 때에 그 곳에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가진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주님을 찾아와서 엎드렸습니다. 마태오는 그녀가 "가나안 여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태 15,22), 가나안 족은 노아 때에 저주받은 함의 아들, 즉 가나안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들은 저주 받은 민족으로서 여호수아 때에 팔레스티나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 의해서 쫓겨난 민족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관점에서는 이 여인은 저주받은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사이들은 이러한 여인과는 접촉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마르코는 이 여인이 "그리스(헬라)인"으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헬라)인"이라는 말은 그녀가 하느님의 약속 안에 들어있지 않은 이방인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리아 페니키아는 시리아에 있는 페니키아 출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녀는 신앙적으로 그리스(헬라)인, 즉 이교도였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 지역 사람들이 주로 섬겼던 아쎄라(아스타롯)을 섬기던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거짓과 타락, 그리고 고상한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아쎄라 여신을 숭배하면서 나름대로 종교에 독실한 신자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자기의 딸이 마귀에 들린 후에 아쎄라의 힘을 빌려 자기 딸을 고쳐 보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섬기던 아쎄라 신이 그녀의 딸을 고쳐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녀는 유다인 중에 모든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 갈릴래아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갈릴래아로 찾아가서 주님을 만나려고 생각했겠지만 경계지역을 자유롭게 넘다들을 수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애타게 고민하고 있던 중에, 병을 고치는 유다인이 그 여인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주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주님에게 오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믿던 종교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찾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불교를 믿는 사람이 신부나 목사에게 찾아오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는 자기 딸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이러한 편견과 장벽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또 그녀는 자신이 주님께 거절 당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딸의 상황이 너무도 절박했기 때문에, 그녀는 이러한 일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 여인은 모든 두려움과 거부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극복하고 주님을 찾아 와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그녀는 주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기로 약속된 메시아라는 말을 전해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유다인들이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했을 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그녀는 주님을 찾아가서 자기 딸을 구해 달라고 간절하게 소리 지르면서 요청했습니다. 전승에는 이 여자가 첫 번째로 그리스도교로 개종인 이교도였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3. 대답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3)
그러나 주님은 처음에 그녀의 요청에 대해서 냉담하게 반응하셨습니다. 마태오는 이때에 주님께서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간절하게 부르짖는 한 여인에게 계속해서 냉담하게 반응하는 것을 본 제자들은 민망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주님께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녀가 계속해서 간절히 요청하는 것을 보고 주님께 가서 그 여인의 간청을 듣고 문제를 해결해서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생각해 보면 이 여인이 얼마나 간절하게 주님께 매달렸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4. 요청을 거부하시는 예수님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5,24-26)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27)
제자들의 요청이 있게 되자, 대답을 하지 않으시던 주님께서 마침내 입을 여셨습니다. 마태오는 이때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이 기록은 마르코복음에는 없고 마태오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오는 유다인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강조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도 그녀의 부르짖음을 중단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주님께 와서 절하면서 또 다시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지만, 이번에는 그냥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번에는 더 심한 말로 대답하셨습니다.
주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발언은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심각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대답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모욕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원래 "어린 강아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헬라어에는 "개"라는 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퀴온"이라는 말인데, 이는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썩은 고기를 먹고 약탈하는 늑대를 닮은 개를 의미합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개에 대해서는 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탐심이나 정욕에 굶주린 사람, 부정한 삶을 살고 거룩한 것을 모르는 사람 등의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마태 7,6 ; 필리 3,2 ; 2베드 2,22 ; 묵시 22,15).
또한 헬라어에서 "개"를 가리키는 또 다른 말은 "퀴나리온"입니다. 퀴나리온은 유대인의 가정에서 기르던 애완용 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퀴나리온"은 어린 아이들이 집에서 데리고 노는 몸집이 작은 개였습니다(마태 15,26-27 ; 마르 7,27-28).
오늘 복음에서 사용된 "강아지"는 바로 애완용 개를 가리키는 "퀴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신 말씀은 부정적이고 적개심을 품은 표현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주님은 이 말씀을 하면서 강아지를 대하는 온화하고 인정어린 태도를 취하셨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표현한 것과 비교해 보면, 이방인을 개의 새끼, 즉 강아지라고 표현하신 것에 대해 너무 놀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5. 왜 주님은 그녀의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하셨는가?
그러면 왜 주님은 자기의 딸을 고쳐 달라는 이방 여인의 요청을 계속해서 거절하셨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첫째 이유는 주님의 선교 계획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시되 먼저 선택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후에 제자들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은 유다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이며, 따라서 아직은 이방인에게 은혜를 베풀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자신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제자들을 훈련하신 후에 그들을 통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계획하셨습니다(마태 28,18-20).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을 파견할 때에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6)"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님은 딸을 고쳐달라는 이방 여인에게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고 선언하셨습니다.
2) 둘째 이유는 제자들의 훈련에 집중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주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제자들을 복음 전도의 사목자로 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주님은 이 일을 방해받지 않고 하기 위해서 갈릴래아를 떠나서 이방인의 땅으로 왔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가능한 자신의 모든 시간을 제자들에게 투신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녀를 위해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녀의 딸을 고치면 그 일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일로인해 제자 훈련이 방해받기를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병 고치는 일이 중요하긴 했지만, 지금 주님에게 중요한 것은 제자를 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3) 셋째로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녀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녀가 가진 큰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부러 어렵고 수치스러운 발언을 하셨습니다. 만일 그녀의 믿음이 나약했다면 주님은 그녀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시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에게 불굴의 믿음이 있는 것을 아시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녀의 믿음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그녀의 믿음을 통해서 제자들을 교훈하기를 원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녀가 선택 받지 못한 이방인이었지만, 주님은 그녀가 구원받기에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여인의 요청을 거듭해서 거절하면서, 그녀가 가진 큰 믿음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II.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주님은 이방인들이 사는 티로와 시돈 지역에서 제자 훈련에 전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주님은 은밀히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한 여인이 주님의 소문을 듣고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여자는 시리아 페니키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 와서 엎드려서 마귀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님께 여자가 뒤에서 소리를 지르니, 요청을 들어주어 보냅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요청을 듣고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또 다시 예수께 와서 절하면서 도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에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녀의 거듭된 요청에 냉정하게 반응하셨습니다.
1. 강아지들도 상 밑에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마르 7,28)
그러나 그 여인은 거듭된 주님의 냉정한 반응을 보고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은 일단 주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오랫 동안 하느님의 약속 밖에 있던 이방인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녀는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이었고, 또 저주받은 가나안 족의 후손이었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자녀들이었다면, 그녀는 그 밑에서 은총을 기다리는 개와 같았습니다. 또 지금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훈련하기 위해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할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방 여인을 위해서 관심을 쏟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주님께 요청할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녀는 그대로 중단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참된 메시아라면 작은 은혜는 베풀어 줄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녀는 참된 신이라면 이방 여인에게도 베풀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주님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온전한 은총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단지 하느님의 자녀들이 먹다가 떨어뜨린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를 요구했습니다. 그녀는 개와 같은 이방인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베푸는 복된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싫다고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이방 여인은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라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은혜에도 감사하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믿음입니까? 이러한 그녀의 믿음은 주님의 은총을 거절하던 유다인과 크게 대조되었습니다.
2.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ㄱ)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 7,29)
이러한 대답을 들은 주님은 마침내 그녀의 요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이때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마태오와 마르코는 약간씩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르코는 이때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 7,29)" 그러나 마태오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그녀는 주님께서 개 취급을 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지 않고, 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개에게 주는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도 만족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그녀의 대답에 크게 만족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녀가 이방인이었지만 은혜를 받을 믿음이 있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확인하고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주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며 주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유다인들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방인의 땅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은총을 구하는 이방인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그녀가 유다인들보다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가난해 있었으며,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3. 응답을 받는 믿음의 사람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8ㄴ)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마르 7,30)
그녀는 그녀의 딸로부터 마귀가 나갔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주님에게 확증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주님에게 자기 딸을 낫게 하기 위해서 자기 집으로 가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즉시 집으로 떠났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마치 이방인 백인대장의 완전한 믿음과 같았습니다. 이방인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라고 고백하여 주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이방인의 땅에서 놀라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녀가 주님의 말을 믿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자기 딸이 침상에 편히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말씀대로 마귀가 그녀의 딸로부터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네 딸이 나았다"고 하신 그 순간에 이미 그녀의 딸은 완전히 낫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이 사실을 확인한 후에 주님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녀는 최초로 주님을 믿은 이방인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인의 믿음은 주님을 단죄하고 거부하던 유다인과는 전혀 다른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유다인들이 복음을 거부함에 따라, 장차 복음의 은총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것을 예고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유다인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거부하였으며, 이로 인해 결국 복음은 이방인에게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이방인들이 주님을 먼저 믿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말씀자료 : 두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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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빵 부스러기 속에서 보는 작은 생명의 불꽃
저는 개인적으로 개신교 복음성가 중에 "작은 불꽃 하나가"라는 찬미가를 아주 좋아합니다. 일단 수도원에서 벗어나 외부에 볼일이 있어서 나갈 때는 입에다 이 찬미노래를 달고 다닙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을 일으키어 - 곧 주위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 - 주님의 사랑 이 같이 한번 경험하면 그의 사랑 모두에게 전하고 싶으리"
그런데 이 가사의 배경을 알아보면 의미심장한 내용입니다. 그 음악을 작곡한 시대 상황은 미국 전역이 히피 돌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들은 히피들을 아주 싫어 했습니다. 그런데 L.A에서 사목을 하던 스미스 목사는 교회에서 히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스미스는 롱비치 해변가에 가서 히피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을 교회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전도하며 말씀으로 양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헌신적으로 봉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별히 히피들은 노래에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은총을 받고 찬양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찬미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찬미가가 '마라나타'라 합니다. 즉 우리들이 부르는 복음송입니다. 우리들이 부르면서 은혜 받는 복음송들이 히피들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작은 불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마리화나 담배 핀 그 조그마한 불꽃들을 상징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작은 불꽃들이, 정말 보잘 것 없는, 인생을 망치게 했던 불꽃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니까, 그 작은 불꽃이 큰 불꽃이 되고, 또 모여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녹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히피들에게서 그런 찬양이 나오리라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 믿음이 나오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이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닌 분들에게서 발견되는 것들이라 생각을 합니다. 아니면 모태 신앙인들이 갖는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정말 이런 분들에게만 있는 특징들일까요? 모태신앙을 가진 자들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도 모태 신앙인이니까 하는 말입니다. 모태신앙인이 어떤 자인지 아십니까? 모태신앙이란 바로 기도도 못해, 사랑도 못해, 봉사도 못해, 전도도 못해....이런 자들이 모태신앙인들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좋은 신앙이란 어떤 신앙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떤 믿음들을 보고 기뻐하셨나요? 교회에 오래 다니는 것, 이런 시간적인 믿음을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교회에서 직책을 가졌다는 것... 이런 위치적인 믿음을 좋아하실까요? 주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주님이 축복하시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요? 오늘복음에는 주님으로부터 축복받는 자의 대표적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1. 가나안 여인의 청원에 대한 예수님의 침묵
오늘 성경 말씀을 봅시다. 오늘 성경은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에 관한 말씀입니다. 25, 26절을 함께 성독해 봅시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지금 딸이 아주 더러운 영이 들려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을 마태오 복음 15장에 보며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가나안 족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고 있는 족입니다. 저주받은 족속입니다. 이 여인이 바로 그런 여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인(헬라인)이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리스(헬라)인이라는 말은 헬라 종교전통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잡다한 우상과 잡다한 문화에 젖어있는 환경 속에 살았던 여인입니다. 하느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더러운 영에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의학으로도 풀 수 없는 고통스러운 문제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딸이 더러운 영에 들려서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미친 사람처럼 방황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어머니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정말 감당키 어려운 기가 막힌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여인이 살던 티로라는 마을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찾아갔습니다. 마르코가 전하는 오늘복음에 보면 "그분 발 앞에 엎드려....그분께 청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마태오복음 15장에 보면 이 상황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이 여인이 예수께 찾아와 먼저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이 여인은 악을 써버립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 절규하는듯한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뜻밖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마귀를 쫓아내거나 병 고침 받기를 원해서 온 사람들에게 아무런 침묵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 대해서는 냉정하게도 단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이 가나안 여인이 계속 소리를 지르니까 침묵하시다가 기껏하시는 말씀이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못고쳐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어떤 경우든지 병든 자를 거절하지 않고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 만큼은 안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예수님이 계시는 집안까지 쳐들어와 그 발 아래 엎드려 절하며 간청합니다. 제 딸을 고쳐주십시오.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애절하게 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한 마디 하시는데 그 말씀이 더 충격적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주님은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하는 여인에게 개들에게 자녀의 것을 주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란 유대인을 말하겠지요. 개란 이 여인과 같은 이방인을 말하겠지요. 내 백성에게 줄 것을 빼앗아 개와 같은 이방인인 너에게 줄 수 없어...그러시는 것입니다.
우리 같았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들이 개 취급을 당합니다. 그래도 구걸을 하겠습니까? 어떤 신학자는 이 장면에서 이 여인의 마음을 묘사하기를 이 여인의 마음이 산산조각이 났다. 더 이상 기댈 것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기가막힐 일이 아닙니까? 그렇게 구했는데도 개취급을 당하니까! 그런데 이 여인은 정말 놀라운 말을 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옳습니다. 저를 개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저에게 그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다시말하면 저를 어떻게 취급해 주셔도 좋습니다. 다만 주님의 조그마한 은혜만 주셔도 됩니다. 그 은혜를 주십시오!!!!!!!
저는 이 여인의 이 고백에서 백인대장의 고백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인이 병들었을 때 예수님께 나와서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가시려하지 주님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만 하셔도 됩니다. 큰 것 바라지 않았습니다. 부스러기라도, 말씀만 해주셔도, 쳐다보시가만 하여도, 감사합니다. 감격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얼마나 겸손한 믿음입니까? 이 얼마나 가난한 믿음입니까? 정말 귀한 믿음입니다. 다 큰 것만 받으려고 하는데 이 여인이 작은 것 하나를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 여자의 믿음이 예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진 것입니다. 그렇게 무시를 당하는데도 이 여인은 화를 내거나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한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옳습니다, 그렇습니다"라고 그 어떤 모욕적인 말씀에도 순종하였습니다. 자식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교와 우상을 섬기던 습관과 생활 양태를 포함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말속에서 진정한 믿음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 여인은 구원 밖에 있었던 이방인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었던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유대인들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간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믿음입니까? 믿음이 좋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여인은 믿음에 대해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1.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한가지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감수했습니다. 심지어 이 여인이 개처럼 취급 당하는 수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예수님에게로 갔다가 안되면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그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하고만 결정을 지어야 하겠다, 예수님이 아니면 다른 대안이 없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받겠다 생각을 하였습니다. 한길, 한 촛점 이것이 이 여인에게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축복하시던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 공통된 점이 있는데 그들의 인생을 다 한가지로 향하여 달려갔다는 점입니다. 에즈라 예언자의 삶의 목표는 이것이었습니다. "에즈라는 주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규정과 법을 가르치기로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에즈 7,10)" 모세도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와 하느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도 이런 삶이었습니다. 바오로도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양육하면서 살았습니다.
할 길로 향하여 가는 믿음, 이것을 주님이 귀히 여기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견고한 심지를 기뻐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넘어지지 않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을 늘 가까이 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영원히 영접하고 살아가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인생에는 분명히 한가지 관점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지점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돈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가 관점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많은 학문과 지식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가 관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생의 목표, 인생의 사명이라고 합니다. 이 여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사명만 있었습니다. 내 딸을 고쳐야 하겠다. 그리고 예수님 아니면 다른 대안이 없다. 이 여인은 지금 한가지만 가지고 나갔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빵이나 부스러기를 가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바오로를 보십시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필립 4,12) 바오로에게는 배부름, 배고픔, 풍부한 환경, 궁핍한 환경 이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주님을 전해 주며 예수님의 생명으로 그들을 양육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가 감옥에 가든, 그가 돌에 맞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부스러기라도 문제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사오정과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오정을 우리는 무시하지만 정말 때론 우리들에게는 사오정과 같은 우직함이 있어야합니다. 어느날 사오정이 양식집, 레스토랑에 갔습니다. 주인이 와서 무엇을 드실까요? 주문하였습니다. 사오정이 주문을 합니다. "돈까스와 우유 주세요." 주인이 말합니다. "돈까스는 없습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돈까스와 커피주세요" 아니 돈까스가 없다니까요! 주인이 화가 나가지고 돈까스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오정이 무어라 했는지 아십니까? "아 예 알았어요. 그러면 돈까스만 주세요."
집요하게 자기의 메뉴만 고집하는 우직함, 자기의 것만 하려고 고집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 믿음 생활에 필요합니다. 하느님! 이것이 저의 길입니다. 이 길은 주님을 위해서 꼭 필요한 길입니다. 주님 복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감사합니다. 주님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어떤 환경도 좋습니다. 주님 제 딸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부스러기라도 좋습니다. 이런 믿음이 주님이 축복하시는 믿음입니다.
2. 시험을 이겨내는 인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여인은 간청을 하고 예수님은 거절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병자들은 바로 치료하셨는데 이 여인에게만큼은 모욕을 하면서 거절하셨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시면서 이 여인과 그 딸을 개처럼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보고 잘못 생각하면 흥분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편파적이시지! 누구에게는 빵을 주고 누구는 개만도 못하단 말이야! 같은 사람을 왜 이리 편견을 하시지! 예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사랑이 아니잖아! 자기편만 좋아하고!
여러분 예수님이 편견을 가지시고 자기 사람들만 사랑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편견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 박대를 하신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이 아닐까요? 만약 편견이었다면 끝가지 이 여인의 딸의 병을 고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편견이란 쉽사리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편견들, 백인과 흑인의 편견들 얼마나 오래 갑니까? 편견이란 쉬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이방여인에게 편견을 가지셨다면 이 여인에 대해서 예수님은 끝가지 멸시를 하든지 개 취급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여인에게 '야! 이 여인의 믿음이 크구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이 여인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시험, 즉 테스트를 한 것입니다. 이 여인이 정말 얼마만한 믿음을 가졌느냐? 나를 얼마만큼 바라보느냐, 나에게 얼마만큼 간구하느냐? 이것을 보신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 복음 앞에서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바리사이들나 율사를 포함한 유다종교지도자들, 그리고 따라다니는 군중들, 거기에다가 제자를 포함하여... 모두에게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려는 의도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은 여러분들이 믿거나 말거나 테스트입니다. 우리의 삶은 테스트입니다. 날마다 살아가는 내 모습을 하느님이 보고 계십니다. 날마다 우리를 보십니다. TV에 보면 몰래 카메라가 있지요. 몰래 숨어서 그 사람의 행동 하나 하나를 살펴보지요. 내 행동 하나 하나가 날마다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감시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사건 앞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가? 어떻게 대응하시겠어요? 짜증을 부리겠어요? 불평을 하겠어요? 화를 내겠어요? 하느님을 떠나겠어요?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거절하는 사건 앞에 주여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하였습니다. 큰 것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은혜라도 좋다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 여인에게 반응을 하십니다. 너 합격했다. 이 여인은 합격하였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보면 "아, 여인이여! 네 믿음이 참 크구나!",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귀한 믿음은 시험에 합격하는 믿음입니다. 어려움 가운데에서 넘어지지 않는 믿음, 유혹이 와도 넘어지지 않는 믿음 그런 믿음을 주님은 귀하게 보십니다.
3. 주님의 말씀에 매달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8절은 오늘복음의 클라이막스입니다. 다 같이 성독해 봅시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보면서 이 여자는 '자존심도 없는가봐...'라고 흥분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여인은 자존심을 내세우기 전에 이미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에는 주님 이외는 아무것도 들어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오로지 주님으로만 충만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처음 나왔는데 예수님을 향하여 무어라 부르고 있습니까? "주님!"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마태 15,27ㄱ)" 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주님이란 말은 예수님을 하나의 병을 고치는 것만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자기의 인생을 새롭게 하시고, 내 인생을 하느님의 인생처럼 나들 수 있는 구원자로, 나의 주님, 메시아로 인정하는 전적인 신뢰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 상당히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메시아의 약속이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60,61,62장을 읽어보면 나옵니다. 여기에 가난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다고 나옵니다. 이 여인은 지금 이 말씀을 꼭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존심이기 전에 먼저 주님이 말씀을 하시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 이방인입니다. 당신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구약성경에서 말씀하기를 우리들에게도 구원을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먼저는 유대인이지만 그 다음에는 이방인에게도 은혜를 주신다고 했지 않습니까? 먼저는 이스라엘이에요. 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 다음에는 이방인이 나도 포함되지 않아요. 저는 지금 이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빵이 아니라 자녀들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에게 주십시오."
이 여인은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엎드렸습니다. 구약에서 하신 말씀을 붙들고 주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맞아요. 성경의 말씀은 먼저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로마인입니다. 그 다음에는 헬라인입니다. 그 다음에는 가나안 사람들입니다. 맞아요. 주님 말씀이 백번 천번 맞아요. 저는 구원이 먼저 유대인에게 올 줄을 압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나도, 이 천한 가나안 사람도 포함되지 안습니까. 저를 포함시켜 주세요.
“주여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나)…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여러분 얼마나 놀랍고 감동적이며 지혜로운 청입니까?. 부스러기라도 주세요....이것을 주님이 귀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 대로 이루어 지기를 원하는 자들, 그 말씀대로 하면 내게 손해가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적은 것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을 붙들고 청하고 살아가는 자들 주님은 이런 자들을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은총 받은 사람들에게는 증거가 있습니다. 은총 받는 사람들을 보면 먼저 말씀을 붙듭니다. 말씀에 대한 애정, 말씀에 대한 사랑이 나타납니다. 말씀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열망하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대하고 말씀을 들을 때면 눈이 초롱초롱 빛이 납니다. 은총을 받는 사람과 받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말씀과 나와 거리, 하느님의 말씀이 나와 얼마나 거리가 있는가,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얼마가 감격하고 감동하는가... 이 차이입니다. 말씀과 나의 거리는 하느님과 나 사이의 거리이다. 이것이 은총을 판단하는 근거입니다.
은총을 받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나에게 다가옵니다. 그 말씀이 나에게 양식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말씀을 붙드는 사람, 그들은 반드시 은총을 받고야 맙니다.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벽마다 일어나서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말씀을 붙드는 사람 이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무궁한 축복이 넘칠 것입니다. 하루를 마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마치는 사람 하느님의 지극한 축복이 넘칠 것입니다. 삶의 걸음걸음마다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하느님의 그 무궁하신 축복을 맛볼 것입니다. 이 세상이 표현할 수 없는 그 평안, 그 자유,그 기쁨을 맞볼 것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붙들고 주 앞에 엎드립니다. 이렇게 간구하는 여인에게 주님께서는 왜 부스러기를 주겠어요. 이방인에게 유대인과 동일하게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으니. 그래서 이 여인에게 명령하십니다. 마르코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고 전하고, 마태오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 이었지만, 개처럼 취급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그 부스러기라도 갈망했던 이 여인에게 주님은 부스러기가 아니라 엄청난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딸의 병을 고쳐주신 것 뿐만이 아니라, 마태오복음에 보면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그 믿음을 축복하셔서 대대에 이르도록 이 여인이 만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을 축복하셨습니다. 커다란 은총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얻었습니다. 이 여인의 딸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더러운 악령에게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가정에 샬롬, 하느님의 평화가 임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자들에게 이런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어떤 시험이 와도 하느님을 계속 신뢰하는 자들에게 이런 축복이 내릴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넘치는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의지하십시오.
주여, 부스러기라도 주시옵소서. 그럴 때 큰 은총이 넘칠 것입니다..............◆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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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와 함께하는 묵상> : † 경계선 없는 파스카적 사랑
1947년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된 두 나라 접경에서는 갈등이 잦았습니다. 이른바 소와 돼지의 분쟁. 파키스탄 쪽에서 소를 잡아 흉칙하게 꾸며 인도 쪽 마을로 보내면(인도의 힌두교는 소를 신성시한다), 흥분한 인도 사람들은 돼지를 잡아 파키스탄으로 보냅니다(돼지는 파키스탄의 이슬람의 금기다). 급기야 양쪽 사람 모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종교적 적대감을 중심으로 두 나라가 분리되는 과정에서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무참히 학살당했습니다.
종교간의 갈등이 빚어내는 비극이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역사적으로 빚어진 참혹하고 비열한 학살의 배후에는 언제나 근본주의적 종교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중동을 비롯한 세계 여러 곳에서 종교 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마호멧의 만화 풍자사건으로 아랍권민족과 기독권 민족간에 유럽 전역이 시끄럽습니다. 서로 다른 종교는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종교는 다른 종교를 배타하고 적대시해야 하는 것일까요? 서로 다른 종교가 화해하고 협력하는 길은 없을까요?
오늘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하필이면 티로 지역으로 가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필이라 함은, 그 직전에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정결법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셨기 때문입니다.
정결법이 무엇입니까? 정(깨끗함)과 부정(더러움)을 가르는 법 아닙니까? 이른바 淨과 不淨, 유대인과 이방인, 거룩한 땅과 비속한 땅, 유대교와 우상종교, 하느님의 자녀와 강아지들을 가르는 법 아닌가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정결례를 그 핵심으로부터 부정하고 나서 저 이방인들의 지역인 티로로 가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리스인(그리스인이라 함은 그녀의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말한다),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가서는 안 될 땅에 가셔서, 만나서는 안 될 여인을 만나신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그 여인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고쳐 주실 뿐 아니라 그 여인의 믿음(마태오복음에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한다)을 돋보이게 드러내셨습니다. 고통당하는 딸을 위해 사람을 자녀와 강아지로 나누는 종교적 분리의 담을 무너뜨려 버린 여인의 믿음은 얼마나 큰 사건입니까!.....다시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분리주의의 경계를 넘어오신 예수님의 사랑은 또 얼마나 위대합니까! 이 담을 넘은 만남에서 생명을 구원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을 가르는 경계를 이렇게 넘어오셨습니다. 티로 라는 그곳이 바로 하느님과 인간을 가르는 세속의 경계선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기간 내내 언제나 하느님과 사람을 가르는 모든 담을 넘어가셨습니다. 사실 십자가야말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물어 버린 화해의 능력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오늘 교회가 이 십자가로 또 다시 가르는 철벽을 쌓는다면 얼마나 참담한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선교 무대가 이스라엘 선민사상에서 탈피해서 이방인 지역으로 확대되어 나가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 당시 띠로 지방과 시돈 지방은 이방인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리아 페니키아라는 지역은 시리아 지방의 일부로서 더 멀리 있는 이방인 지역이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이방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거부당하고, 이스라엘 백성이라 해서 무조건 다 구원받는다는 사상이 무너지는 현장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을 진실한 희망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믿는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구원의 보편사상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깨끗하고, 이방인이라 해서 무조건 다 불결하다는 사고방식도 깨 버리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마귀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어머니에게 아주 모욕적인 말씀을 하신 대목을 들으면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을 아무런 해석 없이 들을 때 우리는 너무나 혹독하고 모욕적인 표현이라고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아지”라는 단어는 그 당시 보통 사람들이 쓰던 욕설로서의 표현인 쿠온(kuon) 즉 개새끼가 아니라, 귀염 받는 작은 개 즉 강아지라는 뜻을 가진 쿠나리온(kunarion)을 쓰심으로서 모욕적인 말투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어조는 자애로움과 유머 감각이 섞인 단순한 통과의례에 불과하다고 보면 편하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이방인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을 그대로 표출하시면서 그녀의 반응을 살피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 여인은 예수님의 가혹한 시험에 무사히 통과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그 여인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주어먹지 않습니까?”
정말 참을성 있고 유머 감각까지 있는 그 여인의 재치 있고 믿음 돈독한 대답은 아주 제짝을 찾은 한 쌍의 유머러스한 대화처럼 보입니다. 만일 여기서 그 여인이 자존심이 상한다고 불쾌한 표정을 짓고 돌아갔다면 여인의 딸은 영영 구제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참을성 있고 확고부동한 믿음은 결과적으로는 위대한 구마 이적을 낳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의 확고부동한 믿음과 모욕적인 언사까지도 참아낼 수 있는 도량 있는 인내심은 매우 좋은 결과를 유발해 냈다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유대인들의 편견과 아집이 여지없이 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철저하게도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서 이방인들에 대한 배척 정신은 살인적일 만큼 철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이란 자기네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이방인들은 무조건 다 저주받아야 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대 이방인 구마 이적은 아주 놀라운 사건으로서 확실하게 구원의 개방성과 보편성을 자리매김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항구한 믿음과 인내심이 낳은 위대한 구원의 보편성은 단순히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기회가 균등하게 이루어진다는 신학적인 해석으로만 끝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 사회에는 학연이나 지연 등을 따지면서 집단 이기주의와 더불어 철저한 개인주의가 팽배해지고 있다는 것을 너나없이 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의지와 하느님의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은 우리 인간들의 편협하고 옹색한 선민주의를 여지없이 깨고 들어오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시는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폭넓은 사랑의 사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수도원을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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