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영희 시인>>
<<성영희 시인의 양력>>
* 충남 태안 출생.
* 한국 문인협회, 수필문학 회원
* 한국서정문학 작가회의 부회장
* 청라문학 운영위원, 편집위원
* <제10회 시흥문학상 전국 공모> 시부문 우수상
* 2009년 부평 삶의 문학상 전국 공모> 시부문 우수상
* 2009년 한국서정문학 작가회 대상 수상 >
* 2017 《경인일보》,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시집 : 『섬, 생을 물질하다』, 『귀로산다』.
* 공저 : 『맨발로 우는 바람』 외 다수.
* 〈농어촌문학상〉 〈동서문학상〉 〈시흥문학상〉 수상.
<<성영희 시인의 시>>
페인트공/성영희
그에게 깨끗한 옷이란 없다
한 가닥 밧줄을 뽑으며 사는 사내
거미처럼 외벽에 붙어
어느 날은 창과 벽을 묻혀오고
또 어떤 날은 흘러내리는 지붕을 묻혀 돌아온다
사다리를 오르거나 밧줄을 타거나
한결같이 허공에 뜬 얼룩진 옷
얼마나 더 흘러내려야 저 절벽 꼭대기에
깃발 하나 꽂을 수 있나
저것은 공중에 찍힌 데칼코마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작업복이다
저렇게 화려한 옷이
일상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끊임없이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 거미가 정글을 탈출할 때
죽음에 쓸 밑줄까지 품고 나오듯
공중을 거쳐 안착한 거미들의 거푸집
하루 열두 번씩 변한다는 카멜레온도
마지막엔 저 색깔을 찾는다는데
하나의 직업과 함께 끝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내려온 벽면에는 푸른 싹이 자라고
너덜거리는 작업복에도
온갖 색의 싹들이 돋아나 있다
미역귀/성영희
미역은 귀로 산다
바위를 파고 듣는 미역줄기들
견내량 세찬 물길에 소용돌이로 붙어살다가
12첩 반상에 진수(珍羞)로 올려 졌다고 했던가
깜깜한 청력으로도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
귀로 자생하는 유연한 물살은
해초들의 텃밭 아닐까
미역을 따고나면 바위는 한동안 난청을 앓는다
돌의 포자인가,
물의 갈기인가, 움켜쥔 귀를 놓으면
어지러운 소리들은 수면 위로 올라와
물결이 된다
파도가 지날 때마다
온몸으로 흘려 쓰는 해초들의 수중악보
흘려 쓴 음표라고 함부로 고쳐 부르지 마라
얇고 가느다란 음파로도 춤을 추는
물의 하체다
저 깊은 곳으로부터 헤엄쳐 온 물의 후음이
긴 파도를 펼치는 시간
잠에서 깬 귀들이 쫑긋쫑긋 햇살을 읽는다
물결을 말리면 저런 모양이 될까
햇살을 만나면 야멸치게 물의 뼈를 버리는
바짝 마른 파도 한 뭇
여름궁전/성영희
폐허를 두들겨 빨면 저렇게 흰 바람 펄럭이는 궁전이 된다. 매일 바람으로 축조되었다 저녁이면 무너지는 여름궁전은 물에 뿌리를 둔 가업만이 지을 수 있다. 젖은 것들이 마르는 계단, 셔츠는 그늘을 입고 펄럭인다.
몸을 씻으면 죄가 씻긴다는 갠지스 강 기슭에서 두들겨 맞다 이내 성자처럼 깨끗해지는 옷들, 어제 죽은 이의 사리*를 계단에 펼쳐 놓고 내일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헹구는 도비왈라들, 거품 빠진 신분들이 명상처럼 마르고 있다.
이 강에서 고요한 것은 연기 뿐,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밤이면 강물은 다시 태엽을 감고 소리를 잃은 것들은 물결이 된다. 화장장의 연기도 무시로 강물 따라 흐른다. 앞 물결과 뒷 물결이 섞여 흐르는 이곳에 오늘이 있고 산자만이 빤 옷을 육신에 걸칠 수 있는 내일이 있다.
물소리를 베고 잠들면 잠결에도 물이 흐를까, 사내들의 팔뚝은 강기슭을 닮았다 끊임없이 궁전을 세우지만 그 안에 들 수 없는 불가촉 타지마할, 하얗게 펄럭이는 그들만의 궁전이다
* 인도의 여자 의상
꽃무릇/성영희
무리를 지으면 쓸쓸하지 않나
절간 뜰을 물들이며 흘러나간 꽃무릇이
산언덕을 지나 개울 건너
울창한 고목의 틈새까지 물들이고 있다.
여린 꽃대 밀어 올려
왕관의 군락을 이룬 도솔산 기슭
꽃에 잘린 발목은 어디에 두고
붉은 가슴들만 출렁이는가
제풀에 지지 않은 꽃이 있던가
그러니, 꽃을 두고 약속하는 일
그처럼 헛된 일도 없을 것이지만
저기, 천년고찰 지루한 부처님도
해마다 꽃에 불려나와
객승과 떠중이들에게 은근하게
파계를 부추기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화사한 말이든
무릇을 앞뒤로 붙여
허망하지 않은 일 있던가
꽃이란 무릇, 홀로 아름다우면 위험하다는 듯
같이 피고 같이 죽자고
구월의 산문(山門)을 끌고
꽃무릇, 불심에 든 소나무들 끌고 간다.
돌을 웃기다/성영희
웃음 한 번 웃는 데 천 년이 걸리는 얼굴을 보았어요
오래 전 사람들은 저 웃음을 화난 얼굴로 기억하겠지요 이끼를 아시나요 투박한 표정 하나 웃게 하려고 정 붙일 데 없는 돌을 기어오르는 녹음의 손가락들, 눈비 바람 별 온갖 꽃들이 살랑거린다 한들 손가락 간지럼만 할까요 석상 발끝에서 생겨 몇 백 년씩 기어오르는 이끼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돌이 웃을 생각을 다 했겠어요 그저 스쳐 지나는 것들에게 공을 돌리기엔 돌의 미소가 참 묵직하지 않나요
이쯤이면 저도 표정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오래 지키면 부릅뜬 마음도 가물가물 사라지고 말까 봐 돌부처도 살살 발가락을 움직였을 거예요
내 얼굴에는 얼마의 시간이 살고 있는 것일까요 어느 간지럼을 출발해서 지금 막 도착해 있는 웃음 하나 생각해 보면 오래전에 잃어버린 나의 다른 이름은 아닐는지 돌아갈 궤도를 생각하면 표정 하나도 함부로 고쳐 짓지 말아야 해요
양지바른 무덤 옆에 햇살 찡그리듯 웃고 있는 석상이 있어요 몸이 무덤인지 무덤이 몸인지 한자리에서 천 년, 자심慈心이 흘러 눈꼬리가 흐릿해요
각주/성영희
바다를 향하여 각주들이 달려 있다.
표류하듯 떠 있는 문장의 귀환을 기다리다
녹이 슨 것들은 붉은 해가 된다.
붉다는 것은 간절하다는 것
파란 종이에 둥둥 떠 있는 문장들을
저기 묶어두고 싶다.
무게가 없는 습성은 쉽게 가라앉지 못한다.
물과 바람결이 섞여 만들어진
새파란 바다 한 장,
둥둥 떠 있는 문장들로 지중해 모래알을 읽고
수천 킬로 협곡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바람의 발을 거든다.
물속에도 쉼표가 있다.
잘못 건너뛴 물의 뼈가
수평을 뚫고 솟아오르는 것은
바다의 중심도 흔들릴 수 있다는 것
무수한 포물선이
순간, 각주에 묶인다.
떠오르지 않는 짐작 하나가
침몰 한 척을 품고 있다.
가라앉은 것들의 이름을 정리하는 동안
또다시 부유하는 몇 개의 인용
빈 각주에 묶어둘 출렁이는 물결이 내겐 없다.
진한 잉크 냄새만
시동(始動)으로 남을 것이다.
외포리/성영희
해 지자 불빛 몇 물에 뜬다
거꾸로 박힌 집들이 붉은 웃음을 흘리는 해안
길과 산과 꽃들도 지워져
등대 홀로 일기를 쓴다
사르 사르 사르르
초저녁 별 서넛
숙제처럼 떠서
새우가 새우젓 되고, 새우깡이 갈매기 밥 되는 세상을
받아 적다가 갸우뚱,
빈 개펄에 비밀을 푼다
바다가 사람을 위로하는 곳 외포리
서쪽으로 난 넓은 창으로 삼보2호가 돌아오고
즐거운 편지처럼 열리는 운율
환하다,
물 위에 뜬 작은 마을
사랑/성영희
어느 겨울 밤, 비좁은 방안에 옹기종기 잠이 들었다
새벽녘이었을까
생솔가지 타는 냄새에 잠이 깨어 마루에 놓인 요강에 앉아 있을 때였다
부엌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살금살금 일광문 사이로 들여다보는데,
“보슈 애들 깨기 전에 언능유, 그란디 지가 그리 좋남유”
“...말허믄 뭣혀”
다다닥 다다닥 아궁이속 생솔가지 불꽃 튀며 타오르고 있었다
연장의 공식 / 성영희
무쇠들, 화덕 앞에 몰려 있다
강한 것 같지만 연하고 푸르스름한 살을 가지고 있는 쇠
잘 벼린 낫날은 무쇠의 가장 깊은 살이다
뼈가 살을 베는 것은 본 적 없으나
살은 살을 벨 수 있는 것
투박한 모루에 불꽃으로 상기되는 소리들이 박혀 있다
연약한 속을 끄집어내는 불꽃과
두드릴수록 가늘어지는 비명들
펄펄 끓는 불의 의중에 따라 길들여진 것이
연장의 모양이라면
불꽃은 가늘고 긴 계절을 불러내는 혀다
불의 뼈를 두드리는 사내가 있다 창을 열면 가까이 와 있는 국적 없는 별들, 낮 동안 쏘아올린 불꽃 중 어느 하나는 아주 먼 곳까지 튀었을 것 같다
자루 하나 끼우면
끼니가 되거나 공사가 되기도 하는 쇠의 근성
쟁기질을 하는 사람과 칼을 휘두르는 사람은 모두
뜨거운 손잡이를 쥐고 있는 것이다
검은빛을 다 버린 다음에야
다시 번쩍거리는 연장의 공식
날아가지 않고 부리로 들어가서
뼈가 되는 불꽃들
어린 새 한 마리가 푸른 불꽃 속에서 파닥거린다
간다, 라는 말/성영희
가고 싶은 곳에는
가고 싶은 곳과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반반이다
횡단보도 중간지점에서 문득
뒤돌아 서성이다 맞는다
급한 경적 같은 것
배냇 웃음과 주름 말씀만 접었다 폈다 포개는
어머니 입에 붙은 헛말, 가야지
난처한 귀를 두 개나 가진 옆 할머니를 붙잡고
함께 가자고 한다
어머니 정말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가고 싶은 곳이 다 귀찮아질 때
요새 같은 마지노선
편도의 티켓을 끊고 개찰을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왔다는 말도 과거로 가면
간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앓기 전에는 모르는 신열같이
기억에서 한 겹씩 얇아질 때마다 가까워지는 종착지
내일이 있어 내일로 가는 것처럼
제일 가기 싫은 곳이 가고 싶은 곳 되는
어머니의 그곳,
종/성영희
누군가 문간에 걸어둔 모자 같다.
어떤 날은 길고 가느다란 소리만 가득해서
테가 다 풀릴 것 같다.
오후의 종소리는 적막한 문에 귀를 부른다.
어느 경내이거나
미신을 몰아내던 예배당 같은,
그러나 지금 여기
한 그릇 손님을 부르는 밥의 종교
문은 안쪽을 먹여 살린다
쫑긋, 안팎으로 모은 넓은귀다.
손을 모으는 사람, 고개를 돌리는 사람
종은 사람을 구별하여 소리 내지 않는다.
드문드문 환해지는 문
소리만으로도 문은 화들짝 반갑다
꽃피는 날에는 종소리도 들떠
여행을 떠난 것일까
문이 열리면 꺼져가던 혀들이 잠깐
타올랐다, 도로 식었다.
모자를 고쳐 쓰고 퇴장하는 종들
종종 울렸으면,
야 생/성영희
고구마 밭, 풀을 뽑는데
건너편 밭으로 자꾸 눈이 간다.
나무도 숲도 아닌 밭 전체에 펼쳐진 거대한 초록 물결
멀리서 보면 둥근 물건들을
초록 포장으로 덮어 놓은 것 같은데
시선이 묶인 것을 보신 아버지
속엣 것은 사과나무고 겉엣 것은 칡덩굴이라 하신다.
점령
바람 불어도 꼼짝 않는 저,
하나의 생이 다른 하나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기막힌 현장을 아버지도 나도 고발하지 않는다.
뽑아놓은 잡초더미 속으로 땅 개비 한 마리 살림을 나고
밥/성영희
이삭도 패지 않은 논두렁 사이 빨간 립스틱 바른 스쿠터가 지나가네
mp3 꼽고 찰랑찰랑 가네
푸른 볏 잎 세우러 가는지
마른 논에 물꼬 트러 가는지
멥쌀 같은 허벅지 출렁이는 젖무덤
어느 헛땀에 흠뻑 젖었나, 투덜투덜 스쿠터가 돌아가네
딸린 식구처럼 온종일 착착 달라붙은
아가야 여그도 냉커피, 귓등으로
노을지네
사내들,
물 오른 볏 잎처럼 꼿꼿하게 집으로 가네
찔레꽃 당신/성영희
마늘쪽 영그는 밭두렁 지나
경운기 발자국 무수히 찍힌 들녘을 지나
소풍 가시네
벼모종 새파랗게 올라온 무논을 지나
들찔레 흐드러진 언덕을 지나
가시네
물 한통 들지 않고 도시락도 없이
태어나서 처음, 베옷 한 벌 제대로 입었는데
어이 저리 가벼운가, 흔들흔들
가시네
들판 깨우던 경운기소리 들리지 않네
흔들던 손 보이지 않네
길마다 찔레꽃 흐드러지고
흔적마다 눈물방울꽃도 피었는데
논두렁에 삽 찔러 놓고
어디로 가시나
먹으라 배불리 먹으라
종자쌀까지 보내주던 아버지
이제 다 가셨나
희디 흰 찔레꽃 향기 골고루 나눠주고 웃네
뻐꾹, 뻐꾹,
운문사, 비밀의 숲/성영희
나 다시 태어난다면
운문사 극락교 너머 비밀의 숲에
이름 없는 한 포기 풀꽃으로 살고 싶네
구름도 쉬어가는 이목소 맑은 물
갈 봄 없이 내려와 얼굴을 씻는 소나무 곁에
정갈한 수건 한 장 두 손으로 받들고
비구니 꽃으로 늙어가도 좋겠네
이른 아침,
호거산 병풍을 펴는 예불소리에 눈 뜨고
깊은 밤, 구름문 열고 산책 나온 달빛,
그 하얀 발자국 소리를 베고 잠이 들겠네
문살을 스치는 바람에도 일어나 합장하고
오백년 소나무가 땅을 향해 경배하는 겸손을 배우겠네
그대, 마음이 슬프거나 어지럽다면 함께 가지 않겠나
호거산 줄기 속 연꽃처럼 피어난
운문사 극락교 너머 비밀의 숲으로,
목탁 속 같은 이 골짜기
몸속을 울리고 나오는 독경 소리들
비스듬히 열린 장지문에 저녁햇살로 살면 또 어떠하겠나,
우리, 가슴을 열면 하늘문도 열리는 것을
감자 싹/성영희
지펠 속 신선 실
덮어 놓은 신문지를 밀고 뾰족
감자 싹이 올라왔다
굵고 싱싱할수록
단단하고 탐스럽던 감자는 쪼글쪼글
쓴물 단물 다 바치고
녹말가루 묻어 날 듯 부드러워진
팔순 어머니 뱃가죽 같다
저 춥고 어두운 서랍 안에서
어떻게 싹을 틔웠을까
절망이 깊을수록 더욱 간절해
식어가는 심장에 꽃불 켜는가,
제 몸 소진해서라도 다시 살고 싶은 생이
껍질을 뚫고 깨어나
덩굴을 이루듯 어둠을 밀어냈다
도려낸 싹 차마 버릴 수 없어
화분에 옮겨 심고
흙 꾹꾹 다지는데
자신을 바쳐 뽑아 낸 또 다른 생이
불끈, 힘줄처럼 팽팽하다
해녀들/성영희
푸른 수면(水面)에 행성 몇 개 떠있다
풀 한 포기 바위 한 덩이 없지만
한사람 필사적으로 매달려 살기엔 맞춤한
물위의 별들
우주 밖을 유영하는 탐사선처럼
무중력을 수리 중이다
나잠어법엔 숨 참는 기술이 우주복이다
아가미를 빌려 발굴하는 별의 잔해들
외계생명체 같기도 하고 무슨 혹 같기도 한
시원한 맛의 시원(始原)이 작은 분화구에서
촉수를 뻐끔거리고 있다
빗창 하나로 수중 텃밭을 다 일궈도
해녀들이 들어간 바다는 감쪽같이 오리발을 내민다
대기 밖을 떠돌다가도
어획이 풀리면 다시 둥둥 떠오르는 별들
여자 팔자 뒤웅박이라지만 물속처럼 참고 살다보면
태왁 없이도 달뜨는 날 있을 거라고
포말로 뱉어 놓은 새하얀 숨비소리
해녀들은 시집 갈 때
수심도 함께 데리고 간다
납덩이같은 중력에 이끌려
젖은 채로 피고 젖은 채로 늙는다
입어관행(入漁慣行)다툼도 없이
각자의 행성을 등에 지고 걸어가는
구부정한 해녀들
축축한 물 자국을 따라가면
으슬으슬 춥던 수다들이 왁자지껄 마르는
불턱*이 있다
*이전 해녀들의 간이 휴게소, 지금은 탈의장
오동집/성영희
오류동 기찻길 옆 수선 집에는 배냇웃음을 가지고 나온 여자가 있다 한 여름 이파리
뒤에 숨어서 까맣게 익어가는 오동나무 열매처럼 간간이 드러나는 삐뚤어진 웃음,
여자는 아침을 수선해서 오후를 벽에 건다. 그 옛날 증기를 내뿜으며 출발하던 기관
열차처럼 뭉툭한 옷 선을 마무리하는 스팀다리미는 그녀의 오랜 직장이다.
유행지난 코트, 찢어진 청바지도 감쪽같이 수선하지만 아무리 고쳐 웃어도 헐렁하기
만 한 그녀의 웃음, 치맛단을 즐겨 줄이는 생머리도 수선불가 민머리도 오동집을 말
할 땐 입삐뚤네 그런다. 한번은 삐뚤어진 입도 수선했으면 오죽 좋겠냐고 해서 골목
이 한나절 쫙 펴졌다는데, 삶도 죽음도 그녀의 재봉틀에선 한 낱 천조각일 뿐,
오동집 앞에는 죽다 살아났다는 오동나무가 있다 그늘이 넓어서 쓸쓸도 긴 오후, 새
들은 죽은 가지도 마다하지 않고 햇살을 물어 나르지만 햇살은 푸른 소란을 다 박음
질하고서야 그늘을 꺼낸다. 자투리 시간도 한 땀 한 땀 잇다보면 그럴듯한 나무로 열
매까지 맺는다는데
입삐뚤네 얼굴에는 새들이 산다. 청실의 부리와 홍실의 날개가 하루에도 수백 번 밑
실을 뽑아 올리며 짹짹거린다. 불편도 수선하면 새것이 될까, 장롱에 처박힌 거북한
옷들도 오동집에 오면 어깨를 편다.
깃발/성영희
찢어진 깃발 끝에
바람이 매달려 있다
오랜 비행을 끝낸 새의 꽁지처럼
제 끝을 갉아 먹으며 달리고 있다
나부끼는 올마다 어린 꽃잎들의 아우성
몇 가닥 폐 울음이 절정이다
긴 겨울도 넘치는 논물도
날아가는 새의 꽁지로 빠져 나간다
깃발은 오래 된 새의 조상인가
어떤 새가 저렇게 바람사이를 뚫고 날아다닐 수 있나
깃발의 일이란
바람 속에서 바람을 견디는 것
때때로 방향을 바꾸어 사방으로 날려 싶지만
떠도는 이름은 정처가 없어
탈 없는 밤의 소지 같다
깃대를 움켜쥔 깃발이 바람을 버리고 있다
찢겨져 나간 조각들은 다 어느 별로 돌아가
구멍난 날개를 깁고 있을까
편서풍에 실린 환청이
부은 얼굴로 떠돌다 간다
꽃무릇/성영희
무리를 지으면 쓸쓸하지 않나
절간 뜰을 물들이며 흘러나간 꽃무릇이
산언덕을 지나 개울 건너
울창한 고목의 틈새까지 물들이고 있다.
여린 꽃대 밀어 올려
왕관의 군락을 이룬 도솔산 기슭
꽃에 잘린 발목은 어디에 두고
붉은 가슴들만 출렁이는가
제풀에 지지 않은 꽃이 있던가
그러니, 꽃을 두고 약속하는 일
그처럼 헛된 일도 없을 것이지만
저기, 천년고찰 지루한 부처님도
해마다 꽃에 불려나와
객승과 떠중이들에게 은근하게
파계를 부추기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화사한 말이든
무릇을 앞 뒤로 붙여
허망하지 않은 일 있던가
꽃이란 무릇, 홀로 아름다우면 위험하다는 듯
같이 피고 같이 죽자고
구월의 산문(山門)을 끌고
꽃무릇, 불심에 든 소나무들 끌고 간다.
좁교/성영희
오색 깃발을 지나면서 꽃길이려니 했다.
번식은 빈번한 실족이려니 했다.
설산이 아래로만 흐르는 짐승이라면
마을의 호흡으로 태어난 좁교는 무더운 짐승이다.
한 마리의 냉온을 분리해서 만든 짐꾼들
히말라야쿰부에 가면 궁극을 타전하는 동물이 있다.
태생胎生이라는 것이 때로 난생卵生이나 화생化生보다도 비루해서
번식의 본능마저 거세당한 당초의 멍에는
평생 멍에를 얹고 산다.
흔들리는 다리. 펄럭이는 룽다*
바람소리 말고는 그 어떤 소리도 태우지 않는 바람의 말,
발굽소리만 요란하게 협곡을 내달린다.
소리만 남기고
형체는 세상 밖으로 날아간다.
티벳 사람들은 고산과 평지의 교배라는
이중적 동물을 만들어 히말라야를 오른다.
등에는 오로지 짐,
허공 한번 치받지 못하는 측은한 뿔
설산은 매일의 고행이려니 했다.
사람의 숨소리로 살구꽃 피고 지는 마을
몸이 곧 짐이라는 듯
살구나무아래 좁교가 꿈속이려니 쉰다.
*하양 빨강 초록 파랑 노란색의 오색 깃발, 티베트어
햇살 핫 팩/성영희
한 사내가 나무그늘 아래서 낮잠을 잔다.
발목 근처에서 끊긴 그늘
두 발을 햇살이 덮고 있다.
어느 사막이라도 걷는 중인지
뜨거운 발가락이 꼼지락 거리고
차가운 발가락이 오그라든다.
어떤 부재가 웅크리고 있는 곳은 추운 곳이다.
혹한과 뙤약볕을 번갈아서 건넜을 저 맨발
집으로 걸어가지 못하는
부재의 방향이 여러 갈래로 굳어져 있다.
바깥 잠이 길어질수록 드러나는 험상궂은 허물들
직립의 날들을 드러눕히고 사내는
무슨 햇살로 한낮을 건너려는 것일까,
한 줌 바람에도 발을 거둬들이는 사내
이불이란 것이 따뜻한 것만은 아니어서
한 여름에는 그늘이 이불이다.
장마/성영희
비 내리는 강가
청둥오리 한 마리 머리를 쳐 박고 연신 자맥질 중이다.
뒤집힌 강물 속에서 무엇을 솎아낸 것일까
아름다운 지느러미와 꼬리를 삼키고
물갈퀴마다 꽃이 피는 지금은
산허리도 부푸는 장마철
물이, 물의 것들이 날아올라 풀숲에 든다.
물이 쏟아지는 철인데
날아가는 물이 대수롭냐고, 빗줄기에
울음의 곡을 붙인다.
저 장마의 바깥에는
염천(炎天)이 들어앉은 마음들이 또 몇이나
물속을 뒤지고 있을 것인가.
빗물로 와서 강물로 흘러가면 그뿐인
그러나 마음 한번 독하게 먹으면
세상도 발칵 뒤집고 마는
저 작은 빗방울들
슬픔이란 범람과 혼탁을 거쳐
가을 강물 속같이 투명에 이르는 일
쏟아지는 수 억 만개의 과녁을 다 받아내고
짧은 파장으로 범람하는 일
퉁퉁 부운 이름들만 물안개처럼 떠도는
비의 계절을
자맥질로 뒤지는 오리들,
아름다운 대칭/성영희
대칭을 이룬 수사슴의 뿔은
야생의 서열,
사나운 번식기와 짝짓기를 고르는 암컷 사슴도
저 늠름한 뿔 하나면 제압과 선택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지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고 볼품없는 뿔은
수난의 시절을 보냈다는 증거
산매화 흩날리다 정착한 등에는
희고 고운 꽃잎들이 압화처럼 눌려 있지
풀과 이끼와 나뭇잎들의 습성이
눈송이처럼 스며 있지
혹자는 지상의 별자리라 한다지
우아하게 움직이는 넝쿨이라 한다지
까만 눈망울을 반짝이며
암컷을 기다리는 순정도
빼어난 뿔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하지
길고 부드러운 속눈썹엔
숲의 고요가 매달려 있어
우연히 산속에서 수사슴을 만난다면
놀라거나 도망칠 일이 아니지
싸움에서 이긴 수사슴이
정중하고 경건하게
뿔의 갈래를 더듬으며 대칭을
바로잡고 있는 중일 지도 모르니까
춤/성영희
땅도 오래되면 춤추듯 출렁거린다
그 옛날 바람이거나 파도였던 곳,
억겁의 시간을 견디고 나니
춤출 일만 남았다는 듯
그 위에 핀 풀들도 흔들린다
내 놓고 추기가 부끄러워서
지층 깊숙이 출렁이는 형상들을 밀어 넣고
가로의 춤만 꺼내 흔든다
태고로부터 쌓아 온 바람과 파도와 자갈들의 말
행간 어디쯤에서 한 호흡 쉬어야겠다는 듯
휴(休), 휘어진 층리
그 틈을 빌려 꽃들이 핀다
춤추는 땅,
지층 사이사이에 몇천 년이 들어 있다
몇천 년이란 저렇게 얇거나 출렁이는 것이어서
오랜 시간이 눌러 놓았을 바람의 연대를
절벽마다 융기마다 우뚝 내거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층은 바람이 낳은 거대한 생산물이므로
땅도 이따금 덩실 춤추는 것이 아닐까
춤추다 굳은 땅은
퇴적도 곡선이다
창문이 발끈,/성영희
창문이 발끈, 불빛이 들어간다
저녁의 불빛들은 모두 창문이 된다
커튼을 치면 안쪽의 의중이 되고
걷으면 대답이 되는 바깥
집의 주인은 그러니까 창문의 불빛이다
모든 외출은 캄캄하므로
불빛 없는 창문은 사람이 꺼진 것이다
여름 창문에는 여름의 영혼이 있어
날벌레들이 기웃거리고
겨울 창문에는 서리는 것들이 있어
찬바람이 기웃거린다
오래 전에 기웃거렸던 창문 하나를 우연히 찾았을 때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다면
커튼이 걷히고 발끈,
옛 그림자 하나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창을 갖는다는 것은 언제든지
나를 잠그거나 열 수 있는 은밀한
고리 하나를 가졌다는 것이다
불 밝히지 않고 있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날벌레의 기억이었던가
바람의 틈이었든가
생각하면 여전히 발끈, 치솟는
뜨듯한 기억
찬물/성영희
그립다는 말이다.
여차하면 꽁꽁 얼어버리겠다는
냉정한 의중이지만
사무치게 얼었다가
서서히 녹았다는 증거다.
먼 우주도 지구가 그리우면
별빛으로 지나가거나
비로 내리거나
눈송이로 펑펑 쏟아지듯이
그리하여 한 대접 찬물로
장독대에 놓이기도 하듯이
흰 꽃으로 무장한 저 눈송이들도
누군가의 그리움이 만든
갈 데까지 간 결정체다
내리다 머문 곳이 다 저의
운명 자리라는 듯
글썽이는 눈꽃들을 보라
그리움도 식으면
찬물이 된다.
그 찬물 마시고
속이나 차리라 한다.
칠월을 순지르다/성영희
열대성 고기압이 아지랑이 도는 콩밭. 아무리 순을 쳐내도 쑥쑥 자라는 한낮의 더위처럼 웃자란 칠월이
콩밭을 에워싸고 있다.
칠월은 일 년 중 가장 빠른 달
잘려나간 것들은 금세 시들지만 남아 있는 것들은 햇살을 묻혀 부지런히 열매를 수습한다. 키가 낮아진
고랑 꼬투리 안에서 말똥말똥 영그는 콩은 아직 철을 몰라서 철없는 눈.
나는 푸른 잎겨드랑이에서 총상화서(總狀花序)로 피었던 나비다. 저 작은 방 안에서 옹기종기 칠월을 자
랐고 새까만 콩알처럼 뛰쳐나갈 때만 기다렸었다. 자를수록 웃자라던 내 칠월은 엄마의 가을을 송두리째
뽑고 달아난 바람 쓰러진 계절, 꽃이 피기도 전에 도복(倒伏)할까 두려웠던 엄마는 아플 줄 알면서도 웃자
라는 내 순을 조심스럽게 잘라주고 지지대를 세웠다.
찌는 콩밭 고랑에서 잘린 채 숨죽이는 어린 순들을 보면 꽃눈으로 깜박인 풋 시절이 아슴하다.
웃자란 순을 지르고 나니 한결 가지런해진 칠월의 텃밭처럼 매미 소리 베개 삼아 더위를 순지르는 늙은 엄
마의 짧은 오수가 목하, 가지런하다.
시에게 절하다/성영희
벚꽃 피면 만나요, 하고 썼는데
코로나 19로 발이 묶였다
봄여름가을이 저 홀로 피었다 졌다
눈꽃 피면 갈게요, 라고 썼는데
지독한 바이러스가
설원도 잠식해 버렸다
그렇게 일 년 반이 지나고
올가을엔 꼭 만나요, 라고 썼는데
델타 변이 증가로
가족의 발도 묶여 버렸다
시가 아니었다면
긴 고립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웠을까
문득, 자주 시에게 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