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퇴진!! 계엄령 철폐!! 김대중 석방!!
" 전두환이 누구야? " 보통사람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온통 거리로 몰려나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치 축제라도 하는듯했다.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다녔다.
버스, 택시, 화물차, 자가용 할 것없이 광주시내 모든 차들이 하는 일을 정지한 채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피 끓는 젊은 청춘들이 도청 앞으로 금남로 거리로 모두 뛰쳐나왔다.
사람이 많이 탈 수 있는 시내버스 시외버스 고속버스 버스란 버스는 빠짐없이 거리로 나왔다.
버스에는 구호를 외치는 대학생 고등학생 정의에 불타는 젊은 남자들로 꽉 차 있었다.
길에 구경 나온 시민들은 버스가 지나가면 잘한다고 구호를 외쳐주며 박수 쳐주고 같이 호응해 주었다.
학생들은 신이 나서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며 온 광주시내를 돌고 돌았다.
광주시민은 모두 한 마음이 되었다. 광주시내가 전부 마비되었다.
엄마들은 모두 내 자식들 같다며 김밥과 주먹밥을 싸서 버스만 지나가면 차에 밀어 넣어주었다.
동네마다 슈퍼마켓의 빵이며 음료수가 모두 동이 났다. 슈퍼마켓 주인들은 아낌없이 스스로 다 내어주었다.
나는 아직 결혼 전 남자하고 축제처럼 도청에도 가고 광주공원에도 갔다. 목이 쉰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연설을 들었다.
어디든 집 밖에만 나가면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큰 남동생은 처음 진원지인 전남대 학생이였고 둘째는 고등학생, 막내는 중학생이었다.
5월 18일 계엄군이 사람을 찔러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리어카에 죽은 사람을 싣고 도청 앞으로 갔다.
그 광경을 본 학생들은 눈이 뒤집히고 악에 받쳤다. 그때부터 계엄군과 싸움이 시작되었다.학생과 시민들은 맨주먹과 온몸으로 대들다가 죽어갔다.
막내 중학생은 친구들과 전남대에 구경 갔다가 눈앞에서 대학생 형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걸 보고 혼비백산이 되어 돌아왔다. 너무 놀라서 피가 거꾸로 솟았다며 한나절을 물구나무서 있었다.
큰 동생은 공부만 하는 사람이라 걱정이 안 됐는데 둘째 고등학생이 문제였다. 둘째는 며칠 동안 버스를 타고 다녔다고 했다.
둘째는 키가 크고 등치가 커서 대학생인 줄 알고 주었는지 장총을 들고 집으로 왔다.
시민군이 결성되어 총기 창고를 털어 외곽으로 쫓겨간 계엄군과 맞서야 한다며 나눠주었다고 했다.
엄마는 총을 보는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기절할 뻔했다. 끔찍한 6.25가 생각났다고 했다.
6.25 때 좌익들은 밤마다 우리 집으로 아들들을 내놓으라며 쫓아다녔다. 우리 집에는 주목받은 아들이 세명이나 있었다.
큰아들인 아버지는 시청공무원, 둘째 아들은 교장선생님, 셋째 아들은 경찰공무원이었다. 잡히기만 하면 몰살당할 판이었다.
세 아들은 뒷산에 굴을 파고 들어갔다. 그놈들은 할머니에게 어디에 숨겼는지 말하지 않으면 총으로 쏴 죽인다고 총구를 가슴과 머리에 대고 곧 쏴 죽일 것처럼 협박했다. 그래도 통하지 않자 죽창으로 찔러 죽인다며 할머니 몸을 여기저기 찔러대며 마루에서 토방으로 , 토방에서 마당으로 굴러 떨어지길 수없이 당했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며느리들은 숨어서 사시나무 떨듯 가슴을 졸였다고 했다. 그렇게 쏴 죽이고 찔러 죽인다고 협박해 놓고 배만 고프면 우리 집에 와서 밥을 해 내라고 윽박질렀다. 며느리들은 무서워 벌벌 떨면서 가마솥에 밥을 해서 먹였다고 했다. 그놈들은 총알 탄을 만든다면서 놋쇠그릇도 한벌 빼앗아 갔다. 할머니는 한벌은 땅속에 묻어놔서 안 뺏겼다고 좋아하셨다. 전쟁이 끝난 뒤 동네사람들은 우리 집이 그나마 인심이 좋아서 아들들을 안 죽였을 거라고 했다. 우리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고라실이라는 동네남자들은 모조리 잡아다 죽였다. 여자들은 모두 과부가 되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엄마는 아들이 가져온 장총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아무도 몰래 밤중에 총을 하수도 구멍에 넣어버렸다고 했다. 그날부터 엄마는 동생을 방에 가두고 문을 걸어 잠궜다.
27일 시민군들에 의해 외곽으로 쫓겨갔던 계엄군과 거기에 엄청난 공수부대가 더해져 시민군과 대치하며 밤새워 새벽까지 총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전쟁이 난것 같았다.우리는 너무 무서웠다. 그날 새벽 시골에 있어야 할 외삼촌아들이 죽을 상이 되어 나타났다.
시골에서 올라와 밤새 싸우다 옆에서 같이 싸우던 친구들은 총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너는 안 죽었으니 다행이라고 했다.
도청은 공수부대에 의해 함락되었고, 거기 있던 시민군과 학생들은 모두 수갑을 채워 다 쓸어갔다.
5.18이 끝난 뒤 광주시민들은 모두 다 망했다. 그나마 공무원들과 선생님들만 괜찮았고 다들 형편이 어려워졌다.
우리는 예정대로 그해 10월에 결혼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편의 잘 되었던 사업체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충장로 건물에서 나온 전세금은 다락에 넣어놓고 솔솔 빼 쓰기 좋았다. 남편은 할 일이 없어지니 그 돈으로 도박까지 했다.꽤 많은 돈이었는데 송두리째 다 까먹었다,
엄마는 여자도 자기개발을 해야 된다며 내게 미용을 배우라고 권했다. 나는 연년생 둘째를 임신 중이었다. 나는 싫다고 했다.
엄마는 많은 딸 중에 너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엄마가 하고 싶었던 꿈이었으니 네가 하면 좋겠다고 했다. 남편은 반대했다.
반대하니 오기가 발동해서 더 하고 싶었다. 그때 나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나는 학원은 비싸서 엄두도 못 내고 여성회관에 등록했다. 시에서 운영하는데 여서 기본만 가르쳐 주었다. 나는 마네킹을 사놓고 애들 키우며 파마. 컷트. 셋팅. 신부화장을 집에서 연습했다.
1차 이론은 책을 사서 금방 합격했다. 2차 실기가 문제였다. 심사위원이 분야마다 다르다 보니 한가지점수만 낮아도 떨어졌다.
여러 번 도전 끝에 결국 합격했다. 나는 집에서 사사로이 파마를 해주고 미용실을 차리기 전까지 생활비를 벌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