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고교평준화제도가 시행이 된지 40년이 되어 젊은 세대들은 과거의 명문고교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고, 기성세대들도 역시 오래 전의 일이어서 잘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서울과 부산의 경우는 1974년에 고교에 입학하고 1977년에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부터 평준화가 되었고, 대구 광주 인천은 그보다 1년 후에 그리 되었다. 그 외 대전 전주 등 몇 개 대도시는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나서 평준화가 되었다.
중학교의 경우는 서울에서는 1968년도에 입학한 학생들이 마지막으로 시험을 치르고 입학하였고, 그들을 마지막으로 경기중, 서울중 등의 학교는 더 이상 학생을 뽑지 않고 그들이 마지막 졸업생으로서 그 학교들은 폐교되었다. 부산과 대구는 1년 후에 그리되었다.
그러니까 일류중학교는 대부분 아예 없애버렸고, 일류고등학교는 평준화되고도 계속 존속되어 왔다. 또한 그들의 중학교 생활기록부는 중학교가 없어졌으니 해당 계열의 고등학교에서 보관하게 되었다.
나는 60대 초반의 나이로서 어린 시절 중학교입시부터 시험을 치르고 들어간 세대에 속한다.
또한 내가 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우리나라의 경제수준이 낮아 모두들 생활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대학에 입학을 하였어도 돈이 없어 중도에 중퇴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지방의 학생의 경우에는 형편이 안 되어 서울의 일류대학에 들어갈 실력이 되어도 서울로 유학가지 못하고 지방에서 지방대학에 입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그 당시는 무조건 서울대가 최고의 목표였었고, 서울대 전체합격생 숫자로 고등학교의 순위를 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이 그런 점에서 지방의 고등학교는 매우 불리한 여건이었는데, 공부를 잘 했어도 형편이 어려워 서울로 유학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립대학은 포기하였어도 서울대만큼은 꼭 들어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그래도 특히 의과대학과 사범대학의 경우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서울보다는 각자 살고 있는 지방의 대학으로 진학하였다.
주로 서울로 진학하였던 학생들은 법대, 상대, 공대 등에 대부분 집중되었다.
특히 여학생들의 경우는 거의 모두 지방대학으로 진학했다.
내가 대학에 진학하던 1970년대 초에 당시 서울대 한 학년의 전체정원은 약 3,000명이었고, 그 외 규모가 큰 대학들은 약 2,000명이 정원이었다.
작은 대학들 예컨대 한국외국어대, 서강대 등은 1,000명 미만이었다. 그 후 1981년도 입학생들 때부터 대학정원이 한꺼번에 대폭 늘어나서, 현재 많은 대학들의 한 학년 정원이 5,000명에 이른다.
1968학년도까지 대학입학생들은 본고사만 치르고 입학을 하였으나, 1969학년도 대학입학생부터는 대학입학예비고사와 각 대학교마다 별도로 치르는 본고사를 반드시 거쳐야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예비고사에는 전 교과목이 출제가 되어 문과생의 경우에도 물리, 화학 등이 필수과목으로 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1981학년도 대학입시 때부터 예비고사를 학력고사로 바꾸어 실시하였고 동시에 각 대학별 본고사를 폐지하였으며, 또한 대학입학 정원이 2, 3배 이상씩 증원되었다.
과거시절 서울대 전체 합격자 숫자를 비교하면 내가 대학교에 진학하던 1970년대 초를 기준으로 했을 때, 1위는 경기고로서 약 300~400명이 합격하였고, 2위는 서울고로서 약 250명, 3위는 서울에 있는 경복고(景福高)로서 약 200명, 공동 4위와 5위는 경남고와 부산고로서 약 150~180명 정도, 6-7위는 대구에 있는 경북고(慶北高)와 경기여고로서 120~150명, 8~10위는 광주제일고, 전주고(全州高), 대전고로서 각각 100~110명 정도, 11위는 서울에 있는 중앙고로서 약 100명이었다.
12~14위는 용산고, 이화여고, 인천의 제물포고로서 80~90명 정도였고, 그 다음으로는 마산고, 진주고(晉州高), 청주고, 춘천고였으며, 그리고 그 다음 차례는 서울의 숙명여고, 정신여고, 진명여고, 서울대사대부고, 대광고, 보성고, 배재고, 양정고, 중동고, 휘문고, 동성고, 경동고,
부산의 동래고와 동아고, 대구의 경북대사대부고와 계성고, 광주의 광주고, 익산의 남성고, 제주제일고 등이었다.
또한 여고로서 3위인 숙명여고는 약 40~50명 정도 합격하였고 그 다음이 정신여고, 진명여고의 순이었고, 그 외에 무학여고, 수도여고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지방의 여고로는 경남여고, 부산여고, 경북여고, 전남여고, 전주여고, 대전여고, 인천의 인일여고, 청주여고, 춘천여고, 마산여고, 진주여고 등이 명문학교들이었다.
그리고 인천의 제물포고는 1960년대에는 성적이 더 우수하였으나 1970년대에 들면서, 아마도 당시 인천의 우수한 중학생들이 서울의 고교로 진학을 많이 하였던 관계로 그 숫자가 조금 줄어들었다. 그 때 우리나라의 경제가 점점 성장하면서 교통여건이 좋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또 부산고는 1960년대 초까지는 경남고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1960년대 말에 들어 성적이 향상되어 같은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한 가지 더 첨가하면, 여학생들의 경우에는 더욱 더 서울유학을 많이 못하였는데, 지방의 명문 여자고교라고 할지라도 서울대합격자 수는 고작 5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 당시 가난한 나라의 경제형편상 부득이하였던 것이니, 처음부터 서울유학을 포기하고 지방대학으로 진학을 하였다.
그 당시에는 가난하여 아들과 딸 모두를 서울로 유학을 시킬 형편이 되는 부모가 많지 않았고, 또한 남존여비(男尊女卑)사상이 팽배하여 당시의 부모들이 딸보다는 아들에게 더 좋은 교육을 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공부를 못하는 아들은 3류 학교에라도 진학을 시켰으나, 공부를 잘하는 딸에게는 진학을 포기시키고 취업을 하게 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경제형편상 중학교에 다닐 때에 미리 대학진학을 포기하여 그 당시 취업하기 쉬운 실업계고교로 진학을 한 경우 또한 많았으니, 선린상고, 덕수상고, 동대문상고, 서울여상에는 가난하지만 아까운 엘리트들이 꽤 많이 있었다. 또한 지방에서는 부산상고, 대구상고, 광주상고 등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말하였듯이 다른 학과에는 지방학생들이 진학을 잘 하지 않았으니, 많이 진학을 한 법대와 상대만을 놓고 비교를 해보면 그 순위가 달라진다.
1위는 경기고, 공동 2위와 3위는 서로 거의 비슷하게 서울고와 대구에 있는 경북고(慶北高)로서 그 당시 법대와 상대에 각각 약 20~25명 정도씩 합계 약 40~50명 정도 진학을 하였다. 그 외의 나머지 일류고교들은 각각 약 10명 정도씩 입학하였다.
그리고 연세대학교의 전체합격자 수를 비교하면, 배재고에서 가장 많은 합격자를 내었고, 고려대의 경우는 대광고에서 가장 많이 합격하였다.
그리고 과거의 지방 일류고교에서도 서울의 사립대학에는 그리 많이 진학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연고대의 경우에 20~40명씩 정도였고, 규모가 작은 한국외국어대, 서강대 등의 경우에는 10~20명씩 정도만 진학하였다.
지방학생들은 서울대 아니면 지방국립대에 집중 진학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서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숫자를 보면 그 순위는 또 달라졌다. 그 당시 사법고시의 전체 합격자수는 고작 60명에 불과하였는데, 1위는 경기고로서 전체의 3분의 1 이상씩 간혹 거의 절반 가까이 합격한 때도 있었다.
2위는 대구에 있는 경북고(慶北高)로서 전체의 6분의 1 이상 5분의 1 가까운 정도의 합격자숫자를 내어, 위의 2개 고교에서 전체의 절반을 초과하는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이는 당시 전체 판검사들 중 적어도 3분의 1은 경기고출신이고 또한 전체 판검사들 중에서 적어도 6분의 1은 경북고(慶北高) 출신이라는 말이 된다.
3위는 전주고(全州高)로서 약 20분의 1 정도씩 합격자를 배출하였고, 그 외의 다른 명문고교들은 매년 각각 1~3명 정도씩 배출하였으며, 당시 뽑는 인원이 워낙 적어서 일류고교라도 어떤 해는 단 한 명도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 순위는 일제 강점기시대 때부터 수십 년간 거의 변동없이 이어져 왔었다.
1978년 제20회 사법시험(사법고시)에서 모두 100명을 선발하였는데, 1위는 경기고출신이 34명, 2위는 경북고(慶北高)출신이 17명, 3위 전주고(全州高)가 4명, 그리고 서울고가 3명이 합격했었다.
또한 오래 전의 일이어서 기억이 희미하지만, 1972년 사법시험에서 전체 선발인원 60명 중 경북고(慶北高)출신이 12명이 배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 사법고시 선발인원이 점점 늘어 1978년에 100명으로, 1979년에 120명으로 늘었고, 300명을 뽑는 때가 1982년부터 있었으나, 그때는 이미 고교평준화가 시행된 지 오래되어 명문고출신들의 합격자수는 잠시 약간 늘어나서 경기고와 경북고(慶北高)의 경우 합격자가 각각 50명 이상씩이 되었으나 그 기록은 이내 곧 사라졌다. 그리고는 새로운 사립명문고교들이 새로이 등장하게 되었고, 과거의 명문고교들의 대학입시와 고등고시에서의 화려한 역사는 사라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위에서 적은 상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무조건 서울대 전체 합격자수로만 고교순위를 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지방의 학교는 은근히 서울보다 낮은 수준으로 취급해버리는 경향도 많이 있어왔다.
한 가지 더 첨가하면, 오래 전에는 대학입시도 본고사가 있었고, 각 대학마다 과목과 시험내용이 모두 달랐다. 중고교입시도 각 시도단위로 시험문제가 다르게 출제되었으니, 당시는 입시에 지금보다는 재량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1962학년도 중학교입시에서 전국적으로 동일한 시험문제로 1961년 11월에 시험을 치루었는데, 합격점수를 서울사람들은 당연히 1~3위는 경기중, 서울중, 경복중(景福中)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실제 결과는 1위는 경기중, 2위는 대구의 경북중(慶北中)이 되었다. 그 당시의 초등학생 아이들은 1968년에 대학에 진학하였다.
또 한 가지 1966학년도 중학교입시에서는 정답에 대하여 재판을 하는 일까지 생겼다. 1965년 11월에 있은 서울지역 중학교입시에서 한 문제의 정답이 “무우즙”이냐, “디아스타제”냐로 논란이 되었는데, 시험에서 떨어진 학생 몇몇은 2차 중학교에 2차 시험을 쳐서 진학하였고, 후에 재판결과가 정답으로 인정되어 합격처리가 되자, 뒤늦게 경기중학교에 입학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을 흔히 ‘무우즙사건’이라고 하였고, 또한 그때에 ‘치마바람’이라는 유행어도 생겨났다. 당시의 아이들은 1972년에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 당시 1차 시험 학교는 경기중, 서울중, 경복중 등이었고, 2차 학교는 중앙중, 정신여중 등이었다. 대학교도 1차, 2차로 나뉘었는데, 2차 대학교는 성균관대, 한국외국어대, 경희대, 한양대, 동국대 등이었다. 시험응시는 지금과 달리 오직 한 개 학교에만 응시할 수 있었으니, 현재보다 선택의 폭이 좁았다.
2005년 가을 중앙일보를 보니, 지난 세월부터 그 당시까지 우리나라의 많은 분야에서 높이 성공한 인물들의 출신 고교들을 조사하여 통계내어 적은 것이 실려 있었다. 거기에 적힌 고교의 순위를 보니 1위는 경기고출신들로서 가장 많았고,
2위와 3위는 거의 비슷하게 대구에 있는 경북고(慶北高)가 2위, 3위는 서울고였고, 그 다음 4~6위는 거의 비슷하게 경복고(景福高), 경남고, 부산고였다.
또한 그 당시 노무현정권의 국가 중요 직책을 맡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였던데, 그 숫자도 역시 같은 순서였으니, 비록 정권의 변동에 따라 어느 정도의 변화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역시 일류학교의 순위는 큰 차이 없이 그대로 유지가 되는 듯하였다.
또한 그 때에는 각 학군별로 서울대 진학자수를 통계를 내었는데, 서울대에 가장 많은 합격자를 내는 곳은 서울 강남구였고, 공동 2위와 3위는 서울 서초구와 대구 수성구로서 그 숫자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매년 엎치락 뒤치락하였다.
2009년 9월 24일 중앙일보에 실린 내용을 보니 판사 검사 변호사들의 수를 출신고교별로 비교한 것이 있었다. 과거의 명문고출신들이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나이 들어 은퇴한 분들이 많을 텐데,
그들을 제외한 2009년을 기준으로 활동 중인 법조인들의 수를 보니, 경기고출신이 441명, 대구의 경북고(慶北高)출신이 316명, 전주고(全州高) 262명, 서울고 242명, 광주제일고 207명, 대전고 199명, 서울의 경복고(景福高) 168명, 부산고 155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2014년 일간지에 적힌 내용에서, 그동안 고교평준화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대원외국어고 출신의 법조인 수가 1위, 경기고가 2위, 경북고(慶北高)가 3위라고 하였다.
또한 2009년 10월 12일 국회의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국가인재 데이터베이스(DB)에 등록된 사람들의 출신고교를 분석한 결과, 경기고출신이 2559명, 서울고출신이 1528명, 대구의 경북고(慶北高)출신이 1496명, 전주고(全州高) 1464명, 광주제일고 1308명, 대전고 1285명, 서울의 경복고(景福高) 1107명, 부산고 1074명, 진주고(晉州高) 947명, 경남고 936명이었으며,
중앙공무원의 수는 1위 전주고(全州高) 492명, 2위 광주제일고 442명, 3위 대전고 393명이다는 것이 그 다음날 중앙일보에 보도되었다.
그리고 삼권분립제도에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최고위직인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을 2015년 현재까지 모두 배출한 학교는 경기고, 경북고(慶北高), 경남고 세 곳 뿐이다.
그러나 한편 달리 보면, 이제는 생활수준이 높아져 일찍부터 서울로 가족 모두가 이사를 가서 자식들을 어릴 적부터 서울에서 공부시키는 경우가 아주 많아졌고, 당연히 그 중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많을 것이니 이제부터는 지방학생들의 성적순위가 과연 어떻게 될지 의문이 생긴다.
지금 서울 인천과 경기도의 인구가 전체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니, 모든 교육환경에서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더 크게 벌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몇 해 전 신문기사를 보니, 근래에 들어 지방학생들 중 최고 우수한 학생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중하위 수준은 계속 비슷한 수를 유지하나 최우수 수준은 이미 부모들이 일찍 서둘러 그 학생들을 서울로 보냈거나 아니면 그들을 데리고 함께 이사를 갔다는 것이 된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경제수준이 높아졌으니 서울로 유학가는 학생들의 수도 그에 비례하여 많이 늘어나야 할 터인데, 요즘 지방의 학생들이 서울대에 진학하는 수는 기대하는 만큼 많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다.
과거 경남고와 부산고에서 매년 150~180명, 경북고에서 매년 120~150명 정도씩, 광주제일고, 전주고, 대전고에서도 100명 이상씩, 특히 마지막으로 시험을 치고 입학한 경북고 58회 졸업생들의 경우 당시 약 180명이 서울대에 합격하였다.
그것도 앞에서 말했듯이 의과대학, 사범대학 등에는 대부분 지원을 하지 않고 법대, 상대, 공대에만 집중하여 진학을 했는데도 그러했다.
과거보다 풍족한 지금에는 당시보다 2-3배 정도의 수가 진학하여야 할 것인데, 최근에 과연 지방 전체에서 그만한 수의 합격자가 나오는지 의문이다.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도 지방고교 출신들이 서울로 진출하여 서울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그들의 자식들은 어릴 때부터 서울에서 자라게 되어 서울사람이 되는 경우가 아주 많았으니, 예를 들면, 현대그룹의 정주영씨는 강원도출신이나 아들인 정몽구씨는 경복고(景福高)를 나왔고, 정몽준씨는 중앙고를 나왔으며,
쌍용그룹을 창업한 김성곤씨는 대구의 경북고(慶北高)를 다녔으나 아들인 김석원씨는 서울고를 나왔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재벌그룹들의 창업주들도 대부분이 지방출신이었으니, 삼성, 엘지, 효성, 롯데, 국제, 동명목재가 부산경남지역 출신이고, 한일합섬의 창업주 김택수씨는 경남고를 졸업하였다.
코오롱그룹의 창업주는 경북 포항 출신이며, 또 대성그룹의 창업주는 대구상고출신이다. 해태, 삼양, 대상(구 미원)은 전라남북도출신이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흘러 생각을 해보니 내가 나온 학교가 더 좋다, 너가 나온 학교가 더 좋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를 살아보면 아주 특출나게 우수한 극히 소수의 인재가 되거나, 아니면 아주 운이 좋아 뜻밖에 일이 잘 진행되어 순탄하게 살게 되거나,
이 두 가지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이 아무리 일류학교를 나왔든, 힘들고 어렵게 살기는 마찬가지이다.
굳이 그 차이를 비교해 봐도 극히 작은 차이에 불과하다.
지나간 과거의 영광에 취해 자기발전을 위한 노력을 등한히 하여 오히려 어렵게 되는 경우도 많으니, 항상 앞날을 생각하고 그에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고등학생들에게는 대학입시가 가장 큰 목표이겠지만, 대학생활이라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중간 과정일 뿐이지 그것이 끝이 아니고, 또한 일류대학 졸업장이 장래의 성공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그러하니 대학에 가서도 또한 후에 대학을 졸업을 하고나서도 끊임없이 열심히 노력을 계속하여야 한다.
모두 아들 같은 학생들에게 인생을 먼저 더 많이 산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다.
첫댓글 상세하고 정성스런 글 잘 보았습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相反相生, 陰陽對待의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