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관한 시모음 58)
겨울 들판 /이상교
겨울 들판이
텅 비었다.
들판이 쉬는 중이다.
풀들도 쉰다.
나무들도 쉬는 중이다.
햇볕도 느릿느릿 내려와 쉬는 중이다.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김인숙
그대와 나의 마음에
빈방이 있는지
똑똑 두드려 봅니다
우리는 잠시 이 세상 왔다가
풀잎에 이슬처럼 돌아가야 하지만
잠시 사는 동안이나마
아늑한 방이 되어 줍시다
가진 게 없어
방 한 칸 세 들어 살지라도
오손도손 얼굴 마주하고
등 기대며 살다 갑시다
찬 바람이 불어오니
뜨끈한 국물이
생각 나는 계절이네요
나의 빈방에
따끈한 저녁상을 차려 놓겠습니다
겨울 채비 /김은식
꼭 안아주는 것
체온을 유지하는 것
마음을 주고받는 것
이불에서 발이 나오면
끌어다 덮어주는 것
방귀 내가 달콤한 것
어느 겨울 오후 /이명기
겨울 잡목 숲에
신의 눈곱인 싸락눈이 내렸다
기억의 간선도로를 타고
지평, 토평, 지나 어디 용문쯤 가서
텅 빈 날들 위로 뿌려지는
그 차가운 것들은
비애였다. 몇 번의 몸 바꿈에도 결국
비가 되기를 거부한 순수였다
무릎이 빠지는 골짜기에서
빈 하늘의 중심에 언 손을 부비는
추운 나무들과
앞서가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까마득한 날의 전생을 들려주는
어느 겨울 오후
지평 토평도 지난 어디 용문쯤 가서
나는 한 마리 짐승을 꿈꾸고 있었다
겨울일기 /변학규
움츠리는 등어리에
갈설대 서걱이고
돌로 새긴 눈초리에
호수물이 솥얼어도
나무도 눈감은 채 떨고 있는
산신의 촉각.
자욱마다 따라가는
발등 터진 신음소리
가슴마다 문을 닫고
불피우는 여윈 손목
바람도 깃발 따라 넋 빠진
천신의 입김.
겨울단상(斷想) /권미영
영혼 잃은 광풍이
핏줄 세운 쉰 울음
꺼이꺼이 흩어 놓은 밤
어둠에 엎드린 자아는
살갗 밑에 켜켜이
통증으로 부화하고
수렁에서 돋아난
속살 같은 아침 햇살에
백발 성성한 나무의 주검은
유리알 같은 눈물 꽃
여윈 가지 끝에 피어 올렸다
겨울 파초 /정군수
백엽상자 너머로 여름은 갔다
계절을 따라서
소리를 감추고 이방인도 갔다
하늘을 덮었던 갑옷
빛나던 방패와 창
노래가 끝나기 전에
파초는 성을 떠났다
남루한 옷으로 갈아입고
영락(零落)한 성주가 되어
이방의 하늘 모퉁이를 돌아서
백엽상자 너머로 사라져갔다
겨울 초입의 소리 /淸草배창호
솔 버섯
피는 절간 뒷산,
낙엽만 밟아도 눈물이 흐르는데
서산에 기울어가는
낙조가 그렇고
입동 바람에
뒹굴어가는 가랑잎마저도
떠나보낸다는 건 차마 서럽다
언제까지 영겁永劫인 줄 몰라도
산죽山竹이 서걱이는 것조차
처연凄然을 갈고 닦는
산사의 풍경 소리
물레방아 되어
가고 옴도 잊을 줄 모른다
겨울로 가는 산길에 /운봉 공재룡
내가 살아온 날들보다
남은 날이 더 짧은 여정
떠나지 못한 낙엽 위에
하얀 사랑이 소복 쌓인다.
가을이 떠나간 빈자리
겨울 오는 산길 모퉁이
두고 온 내 발자국들
어디만큼 흐르다 멈출까.
세월이 깍 아 놓은 삶
남겨진 한 조각 추억들
가냘픈 여인의 숨결같이
겨울로 가는 산길에 서있다.
겨울 속의 봄이야기 /박정만
Ⅰ
뒤울 안에 눈이 온다.
죽은 그림자 머언 기억 밖에서
무수한 어둠을 쓸어내리는
구원한 하늘의 설화.
나는 지금 어둠이 잘려나가는
순간의
분분한 낙하 속에서
눈뜨는 하나의 나무
눈을 뜨는 풀꽃들의
건강한 죽음의 소생을 듣는다.
무수히 작은
아이들의 손뼉소리가 사무쳐 있는
암흑의 깊은 땅 속에서
몸살난 곤충들은 얼마나 앓고
있는가.
사방에 사유(思惟)의 충치를 거느리고
밋밋한 수해(樹海)를 건너오는
찬란한 아침 광선.
수태한 여자의 방문 앞에서
나는,
청솔과 반짝이는 동전 볓 닢을
흔들며
Ⅱ
아침 한때 순금의 부리로
빨갛게
새들은 남은 잔설을 쪼아대고
그때 무어라 귓속말로 읽고 가는
바람의 전언.
수런거리며 은빛 비늘이 돋아
나는
수파(樹皮)의 깊은 안쪽에서부터
몇 개 새순이 자라나고 있는가.
사람의 품사(品詞)들로 점점이
물들어가는 나의 눈과 목소리처럼
예지의 광채가 가지끝에 앵기어
비쭉비쭉 푸른 혈관이 일어서면,
저 유난히 커오르는 숨소리를
내 아내의 어린 살빛은 듣고 있다.
자꾸만 바람 뜨거운 나뭇가지 끝에서
까치들은 한 소절의 노랠 부르며 있고.
Ⅲ
홀연 도련님 눈썹 위에 내려앉는
청아한 뻐꾸기 울음소리.
봄의 젖줄을 잡아당기는
따스한 모정의 촉감을 한줄기씩 내리어
꽃대의 등심(燈心)을 밝히고 섰는
어머니의 축복을 누가 알까.
가가호호 문전마다
신춘대길이라 방을 붙이고,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옮겨앉는 메아리.
시간은 상처난 손을 떨어뜨리며 지나가고
겨울 냉기는 땅강아지 발목 앞에서
바쁘게 무너지고 있었다.
겨울 초입에 서다 /윤용기
겨울비가 며칠간 내리더니
화창한 햇살이 창살을 파고든다
그렇게 웃짓던 새들도
어디론가 떠나가고
이따금 들려오는 찻소리만 들려오는
아파트의 발코니에 서서
이 자리가 어디쯤일까?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2020년을 바라보는
겨울 초입에 서서 내 자신을 돌아 본다
그렇게 앞만보며 앞만보며
달려온 꼭지점이
바로 이곳이란 말이냐?
내 자신을 위해 한 번 정도 돌보며 살아왔어야 하는데도
난 바보처럼
아니,
충견처럼 그렇게 살아 왔다
그 많던 의욕과 도전 정신은 점점
누렇게 물들어가는 가뭄의 낙엽처럼
퇴색해버리고
이제
앙상하게 남은 겨울나무 가지처럼
우두커니
빈 공원에 그렇게 혼자 서 있다
내 친구 새와 벌레, 푸른 잎은
다 어디론가
자기의 갈길을 가고 없는데
난 아직도 갈길 잃어 헤매고 있는 나그네가 되어
62년을 향한 내 인생의 항로는 자욱한 운무가 있는 바닷길
좀 더 열심히 여축할 걸,
좀 더 충실히 살 걸,
걸, 걸 하다보며 인생을 마친다는 어느 철할자의 말처럼
나는 곤궁한 빈자의 가슴에 요동이 친다.
나는 더 높이 더 멀리 날고 싶다고
저 멀리
겨울 수채화 /藝香 도지현
빈 나무 가지에
하얀 꽃이 피었다
그 동안 우울해 하던 나무가
오늘은 빙긋 웃는다
빈한한 모습으로
허공을 맴돌던 눈망울
잠시 느낀 행복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담았다
순백의 도화지에
정화된 마음을 그려 넣으니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그림이 되는데
이 겨울에 그려 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채화다
겨울소리 /거송(巨松) 경규민
멀쩡한 사람을
자라목에 곱사등이로 만들고
코까지 발갛게 달구어 놓고는
그것도 모자라
온몸을 매섭게 휘감아
휘우듬한 채로 종종걸음으로 세워 놓았다.
그런데도
제 성미(性味)를 이기지 못해
나목(裸木)을 세차게 마구 흔들어 대면서
연약한 가지에 매달려
삭이지 못한 분(憤)을 연신 토해낸다
난, 오늘도
커튼을 슬며시 열어젖히고는
앞마당 우물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 가지를 본다
이 겨울에도 /홍경임
이 겨울에도
순백의 옷입고
살을 헤집는 추위를 견디며
묵묵히 하늘의 순리를 따르는
나목이게 하소서
이 겨울에도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돌아보며
가진 것을 나누고 함께 기뻐하는
가난한 마음을 소유한
여인이게 하소서
이 겨울에도
언 땅에 묻히어
머잖아 다가올 초록의 봄날
성찬을 위해 기도드리는
풀꽃이게 하소서.
겨울채비 /이성호
몸의 무게를 줄여야 살 수 있는
나무는 물든 잎을 떨어 뜨려 나를 줄이고
겨울 잠을 청하는 찬피동물들은
되레 몸의 부피를 늘여 긴 동면에 들어간다
기름끼 있는 살의 거죽을 늘려
뚜거운 벽 앞에서 무언의 무장으로 앞을 가린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왕은
철저한 대비와 보양으로 담장을 쌓고 기를 올리며
거친 항해의 돛을 올린다
버리자 가벼운 몸으로 무게를 줄이고 다시 태어나는 준비를 하자
욕망의 끈을 끊고 곳간에 모아둔 양식을 거내 나눠 가지며
마지막 소금이 되는
뼈의 사유로 집을 짓고
눈부신 알곡을 가려 차근차근 밤을 밝히는 시간을 맞자.
초동(初冬)의 서정(抒情) /구상
상강(霜降)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진
고목가지에
서리 핀 아침이 드맑게 펼쳐 있다.
소년 적 죄그만 가슴의 그리움이던
교리방 수녀의 흰 이마가
아련히 떠오른다.
청렬이 결코 설움은 아니련만
내 눈에는 찬 이슬이 맺힌다.
입동(立冬)
헤식어 가는 햇발이
긴 그림자를 끌고
양지를 찾는다.
대지는 번열을 가시고
본래대로 누워 있다.
11월의 일모엔
나의 인생도 회귀에 든다.
초설(初雪)
첫눈을 맞을 양이면
행복한 이에겐 행복이 내려지고
불행한 사람에게 시름이 안겨진다.
보얗게 드리운 밤하늘을
헤치고 가노라면
등불의 거리는 고성소처럼 그윽한데
멀리 어디선가
기항지(奇港地) 없는 뱃고동 같은 게
쉰 소리로 울려온다.
겨울을 기다리며 /신성호
아름다운 눈꽃이 피는
하얀 겨울을 기다리며
바쁘게 달려온 한 해를
맺힌 실타래를 풀어 내듯
한올에 또 한올에
아쉬움와 희망을 번갈아
옥석을 가리는데 고뇌하며
다시는 아쉬움도 후회도
반복하지 않을 한 해를 위해
긴 겨울이 너무 짧아져 버릴까
마음의 조바심을 뒤로하고
겨울이 오면 값진 삶을 위해
아름다운 오색 단풍처럼
꿈과 희망과 행복을 그릴
하얀 겨울이 기다려 진다
겨울 /김수잔
大地를 덮은
침묵의
하얀 눈 위를
바람은 윙윙 소리지른다
기쁨 슬픔 한데 엉긴
부르는 노래에
세월이 담겨 있다
눈 속 대지는
기쁨도 슬픔도 함께
세월 속에 서서히 녹이며
사랑을 움 틔울
봄을 기다리는
작은 몸부림은
쉬지 않는 생명력이다.
겨울 비애 /정태중
엄
마
라는 말
왠지 센티 해지는 건
단풍이 되고
낙엽으로 뒹굴어
어느 집 귀퉁이로 쌓일 때,
머문 바람이
마른 기침 뱉으며
바스락거릴 때였다
그러고는
자꾸 뭉클한 하늘에서
눈물이 떨어지며 똑, 똑 하는데
엄마, 엄마
환청이 자꾸 퍼져 가다가
소리의 끝이 훨훨
회색 하늘로 올라갈 때였다.
사랑방의 겨울 /이원문
이야기의 방
마실방의 어르신들
쇠죽솥에 군불 때고
화롯불 가득 담아
안 오시는 어르신
궁금해 하며 걱정 한다
손 넣어 젓는 막걸리 밤참
한 사발의 막걸리에
김치쪽 안주였나
얼근하게 마신 어르신들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누구의 집인들 이야기 안 할가
이웃 걱정 집안 걱정
내년 농사에 논 밭 걱정
짚어 기다리는 이웃 집 제사 날
혼인날에 혼수 걱정은
누구의 집 걱정일까
환갑까지 겹친 걱정
눈 내린 밤 깊어 간다
겨울 신사(紳士) /정심 김덕성
매섭게 추운 겨울날
그래도 밀물처럼 밀려온 그리움
고소하게 찾아와 언 가슴을
따끈따끈하게 녹인다
칼바람이 매섭게 불어 다쳐도
강한 심장이라 그런가 우뚝 서서
고달파도 건뜻도 하지 않고
긴 묵상을 하는 나목
얼어붙은 메마른 땅에
솜털처럼 포근한 함박눈이 내려
감싸면 좋으련만 내리지 않고
거리두기로 한산한 거리
이중고를 겪으면서
거리 메우던 인파 사라진 거리엔
봄꽃 피우려고 산고를 겪는 신사
겨울나무만 의젓하게 지키고
겨울 휘바람 /鳳岩 정찬열
대설(大雪) 도 지나버린 12월 오후에
창틈사이로 부는 휘휘~쉬 바람 소리는
보이지도 않은 무질서 쾌락의 방랑자
설한(雪寒)의 도미 송을 찬미 한다.
유리창 너머로 시선이 멈추는 곳에
해를 삼 킨 진회색 구름이 춤추듯
자꾸만 도리질로 바꿈질 한다.
구름을 갖고 노는 바람에 밀려져
행여 햇빛이 튕겨 날까 막는가보다
끈질기게 붙어있는 갈참 나뭇잎에
신나게 거들 춤을 추는 산비탈에는
모두 떠났는데 너도 떠나가라 흔든다.
심하게 흔들 대는 바람에 지쳐 버린 잎
갈잎은 떨어져 빙글 돌며 내 돌림 질 하고
빼끗 한 창틈으로 윙윙 대는 애원의 소리
변덕 많고 수다 떠는 바람 의 찬가(讚歌)
겨울 문턱 /정태중
한 번쯤은 마음 다하여 보아주었던가
어떤 생각을 하면
겨울 문턱에 들어선 낙엽들
새 떼 같이 휘날리어 가기도 한다
옷깃으로 손등으로 세월 참 빠르다며 오고
굽은 나무의 뼈에선 휑한 눈물이 고인다고
지난여름의 소나기 몇 방울 솟기도 하는
한 장의 낙엽 부대끼며 붉을 때가 좋았을,
엉거주춤 마주한 손 비비듯
바람 속으로 뒹굴며 가는 찬기 가득한 날
호호 불던 손 주머니에 넣으면
불끈 쥔 손바닥엔 그리움이었을까
못했던 말의 습한 절임이 눅눅히 핀다
새 떼 훨훨 나는 석양이 고와
어떤 생각들이 발아하여 허공 속으로 간다
겨울, 그 칠흑의 불 /홍해리(洪海里)
줄기차던 생명의 노래,
유년의 향그런 이야기들
몸살처럼 물살져 오고
가장 곱고 아름다운 칠흑의 꿈,
그 꿈을 재우는 나무
흐느끼듯 울부짖듯
우주의 악기를 타고 있는
건강한 손가락 가락
하얀 비둘기 떼.
들어 보아라,
저 유연한 날개짓소리
어디서 들려 오는가
어두운 은하의 골짜길 이우는
잠들지 못하는 바다,
무한한 혼을 어둠 속에 묻고
모든 번뇌는 사라져
환상과 지혜도 묻어 버렸다.
또다시 모든 것을 불태울 불씨만
강물이 바다에 안기우듯
한 줌 흙 속에 묻혀 있다.
겨울까치 /권영민
사람들의 마을에
사람 가까이 봄을 노래하던
작은 둥지에 눈이 내리면
너는 꿈을 꾸는가, 꿈을 꾸는가
삭풍이 부는 가지에 기대어
두 어깨를 추스리면
둥근 눈망울엔 지난날의 영상이
꽃을 피워 올리는데
차디찬 눈발에 덮힌 너의 자리
마음 뉘일 곳 어디이던가
봄을 그리며 날개깃 퍼덕이면
안으로 스며드는 뜨거운 불길
하얀 눈물되어 겨울을 녹인다.
겨울 사랑 /임영준
다시 그대를 만날 수 있다면
하얀 눈이 되고 싶습니다
뽀드득 밟히기도 하고
소담스레 뭉쳐지는
정겹기만 한 기쁨이고 싶습니다
영영 그대를 만날 수 없다면
그리움을 꽁꽁 품을 수 있는
만년얼음이고 싶습니다
햇살아래 일렁이면서도
머뭇거리지 않는
뿌리 깊은 아픔이고 싶습니다
겨울 사랑 /유안진
나 혼자서 정리하고
나 혼자서 용서하며
얼었다가 풀렸다가
한겨울도 깊어 갑니다
비바람이건 눈보라이건
나 혼자의 미친 짓입니다
겨울 환상 1. /가영심
-鎭祭
겨울강을 비껴나는 날 새.
꽃잎은 한 잎씩 목숨을 접고
끈적한 시간의 불이 타는데
누군가 심장에다
釘 박는 소리.
모래밭 톱니의 울음으로 깨물면서
분해된 뼈 추스르는 바람.
無垢한 생의 목마름.
네모난 상자 속에 담긴
한 줌 영혼의 소금뼈를
거울강에 뿌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