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가 안겨준 선물
4월을 맞으면 천주교에 입교 세례를 받던 성당화단에 만개해 그윽한 향을 품어내던 라일락 그 향이 새롭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준 잊을 수 없는 두 형제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라일락 향처럼 그 향기를 더 발한다. 신앙 대선배인 한 형제는 대부님이 되어준 분이고 다른 형제는 고등학교 후배면서 신앙선배였던 분이다.
세례는 1989년 4월15일 대전 선화동 성당에서 있었으니 오는 4월15일이면 영세 25년, 은경축이 되는 날이다.
대부가 되어준 신앙 선배인 형제와는 군을 제대한 후 새내기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1968년 이른 봄에 처음 만나게 되었다. 선배와는 직장생활 활동 일선이 같았기에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선배는 활자매체에서, 나는 전파매체에서 매체와 소속직장은 다르지만 같은 취재 보도 분야애서 성질이 같은 일을 하는 사이였다.
선배는 내가 써낸 뉴스가 나가는 것을 청취하고 종종 빠진 뉴스를 알려주기도 하고 뉴스에 대한 청취소감을 말해주고 격려도 하며 미처 취재하지 못한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선배는 열차편에 작성한 기사를 역송 하고 나서 잘 다니는 막걸리 단골집으로 불러내어 취재 기법, 기사작성 요령, 동료기자들과의 관계, 기관출입기자로서 갖춰야할 기본자세 등 여러 가지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 술자리에서 일어선 선배는 술도 깰 겸 걸어서 집에 간다며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고 걸어갔다. 한동안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선배를 따라갔다. 선배의 집도 알아 둘 겸 못다 한 이야기도 더 할 겸. 인동 철도 굴다리 밑을 지날 때 선배는 여기서 얼마만 더 가면 바로 내 집이라며 손으로 가리켰다. 집이 더 가까워지자 선배는 머뭇거리며 서더니‘ 믿음이 있느냐?’고 물어 없다고 하자 ‘성당에 나와 보라. 괜찮은 곳이라’며 쳐다보더니 ‘한번 생각해 보라’고. 그 때가 1969년 중추, 넓고 맑은 밤하늘에 뜬 달빛은 유난히도 밝았다.
이와 같은 선배의 권유로 1989년 세례를 받기까지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문제는 세례를 받으려면 성당에서 실시하는 6개월간의 예비자 교리를 받아야 하는데 사제관에서 저녁에 실시하는 특별교리에 어떻게 참석하느냐가 문제였다. 직장생활을 하는 몸인데다 시간에 맞춰 유천동에서 선화동까지 어떻게 가야하는 지 교통문제. 그러나 이 문제는 후배가 매일 퇴근하면 우리 집에 자기 차를 가지고 (그 당시 나는 차가 없었다) 부인과 함께 와서 이미 영세를 한 몸이면서도 우리와 함께 다시 예비자 교리 6개월간을 받았다.
예비자 교리를 받을 자격(?)을 심사하는 찰고를 무사히 마쳤다.
찰고가 끝난 후 선배를 대부로 모시기로 마음을 먹고 예비자교리를 다 마치고 ‘제가 부활영세를 하게 되었는데 대부님으로 모시고 싶다’며 뜻을 받아주시길 바랐다. 대부님의 첫 반응은 놀랍게도 ‘아니, 영세를 받는다고?!’ 그러더니 곧 껄껄 웃으시며 쾌히 승낙을 했다. 아내도 함께 영세를 한다고 하자 대모는 정했느냐? 며 ‘내 아내를 대모로 하면 어떠냐?’ 하여 두말 할 필요 없이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드디어 1989년 부활절을 앞둔 4월15일 선배님- 시몬을 대부로, 부인- 수산나 자매님을 대모로 하여 나는 대건 안드레아, 아내는 마리아로 영세를 해 주님의 자녀로 각각 태어났다. 같은 해 5월28일에는 두 분을 대부와 대모로 하여 견진성사도 받았다.
그러나 영세이후 세례를 왜 받았는지, 하느님은 정말로 계시기나 한지... 후회도 되고 의심스런 마음도 들게 하는 그칠 줄 모르는 병고로 인한 시련과 고통이라는 너무나 긴 터널이 계속 되었다.
첫 터널은 영세 후 5년차가 되던 1993년 9월 초 가을, 나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뇌경색이라는 병마가 찾아온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집안 병력도 들어보지 못한 뇌에 흐르는 피가 막혀 사지에 마비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입원생활을 거쳐 퇴원하게 되었으나 좌편마비라는 후유증을 얻었다.
그러나 이건 또 웬일? 편마비 후유증을 앓는 나의 병간호와 병원을 갈 때마다 간병에 온통 심혈을 기울이던 아내, 마리아가 1995년 3월 새 봄이 새 생명 부활의 잔치를 펴기 시작할 때 서울로 큰 대학병원을 찾아 엄청난 병명을 얻고 뇌수술을 해야만 했다. 마리아는 수술진의 장담과는 달리 나처럼 좌편마비라는 후유증을 얻어 지체장애 3급의 몸이 되어 병원을 나와야 했다. 두 사람은 좌편 마비된 몸을 조금이라도 재활시켜보려고 시간만 나면 병원을 찾아 통증과 재활치료에 힘쓰며 서로 위로 격려하며 운동도 하며 투병을 열심히 해왔다.
뇌경색 10년째가 되던 2002년 봄 나는 또 후두암 판정을 받고 성대를 모두 절제해 내는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수술이 남긴 또 하나의 후유증은 언어장애. 또 1~2년마다 인공후드를 갈아 끼워야만 하는 진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뇌경색으로 얻은 후유증으로 지체장애3급 장애자가 되고 나서 언어장애후유증까지 겹쳐 중증 2급 장애자가 되었다.
그러나 병마라는 터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리아는 신장암 수술, 골절되고 좁아진 척추 수술 2회 후유증으로 하지부종, 신장 암 수술이후 이어진 탈장으로 수술 2회 등 영세 이후 지나온 터널만도 이렇게 많았고 아직 지나고 있는 긴 터널이 있으며 또 어떤 터널이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
허지만 계속 되는 병마로 이어진 터널은 병마라는 고통과 수난을 통할 적마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키우고 키워줘 이제는 어떠한 병마, 아무리 긴 터널이 나타나도 주님과 함께라면 터널을 지나면 새 빛을 볼 수 있다는 굳은 마음이 나와 마리아 안에서 자라고 있어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이러한 마음은 영세 이후 계속 된 병마로 인한 시련과 고통이라는 터널을 잘 지나도록 이끌어주신 주님에게 얻어진 지팡이-선물이라 여겨져 세례의 고마움을 다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시몬 대부님과 수산나 대모님, 안셀모 형제와 크리스티나 자매님, 은경축을 맞으니 저와 마리아가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음에 다시 감사드리며 늘 주님과 함께 하며 동행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2014. 4. 9.
ㅇ
첫댓글 "주님은 너희들이 감내할 환난만 주신다"라는 말이 떠오르네..끝도 없이 이어진 그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온 천규의 지난 삶을 생각해 보니 내가 겪은 시험은 너무나 미약한 것이었는데도 그렇게 힘들게 받아들였던 내가 부끄러워지는구려. 천규의 환한 미소를 먹음은 얼굴을 보면 누구도 그런 엄청난 시험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 못할 것이네. 다시한번 주님에 대한 믿음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일깨워준 천규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천규!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