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8월21일 화요일 >
호우주의보와 호우경보 등 일기 예보가 있었지만
예정대로 성지순례길를 떠나기로 했다.
한국천주교회성지를 모두(111곳) 순례할 목적으로
첫 성지순례지로 삼랑진에 있는 부산교구의 '김범우 묘'로 정했다.
마음이 이끄는데로 찾기도 쉽고 교통도 편리할 것 같아
제일 먼저 정한 곳이었다.
이날따라 남편은 나 혼자 가는 것을 만류했다.
제주 올레길에서 혼자가던 여자가 살해당한 일이며
몇일 전에 성추행범이 전자 발찌를 빼고 살인한 일들을 두고
지금 세상이 어느땐데 겁도없이 혼자 다니느냐며
만류했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기도를 많이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홀로 성지순례를 해보기로 했지만
자신이 서지않고 마음이 자꾸 제자리에 주저 앉으려 했다.
낯선 길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안을 뚫고 용기가 나를 이끌었다.
그것을 하느님의 인도하심이라 믿으며 집을 떠났다.
남편은 기차를 타고갈 나를 위해 역앞까지 태워다 주었다.
뭉실뭉실 흰구름 가득한 하늘, 안개 자욱한 산,
푸른 수초와 강물을 기차안에서 바라보며
떠남에 대한 설레임으로 행복한 마음이었다.
구미에서 7시44분에 출발한 무궁화호는
삼랑진역에 9시21분에 도착했다.
역에서 내려 버스 타는 곳으로 갔다.
버스 3대가 텅 비어 있다 싶었는데
할머니 한 분이 버스 앞좌석에
신발을 벗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계셨다.
버스 타는 곳에서 버스표를 보면
김범우의묘로 가는 차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만어사행 시간표만 A4 용지 한 장에 써 붙여 있는 것 말고는
'김범우묘' 성지로 가는 시간표는 없어서
혹시 차가 없는건 아닌지 당황이 되었다.
성지순례 책자엔 성지가는 버스가 하루 6차례
운행된다고 나왔고 버스 시간까지 있어서
10시 20분 차에 맞추어 1시간 정도 일찍 삼랑진역에
도착하도록 구미에서 출발한 것이었는데 난감했다.
버스에 탄 할머님께 김범우묘를 혹시 아시느냐고
여쭈어보니 할머닌 처음 듣는 곳인지 어리둥절하시더니
아무튼 이 버스는 오만데 다 간다고만 하셨다.
순례 책자를 보고
관할 성당으로 두세번 전화를 했지만
받을 수 없는 전화로 설정이 되어있다는 멘트만 되풀이했다.
수신을 차단할거면 처음부터 전화번호를
올려 놓지 말지 하는 불만이 새어나왔다.
성지 안내 문의를 해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발생되는 사정으로 수신을 차단해 놓은건지 모르겠지만
책자만보고 애써 찾아오는 나 같은 사람에겐
교회의 형식적인 처사가 못마땅했다.
답답해 있는데 좀 젊으신 할머님이 오셔서
다시 여쭈어 보았다.
김범우 김범우 하고 되뇌이시며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니
주소가 어디냐고 물으셨다.
책자를 얼른 보고 '용전리'라 했더니
대뜸 손을 가리키며 앞 차가 그곳을 갈거라며 좀 있으면
기사가 올거라고 하셨다.
김범운가 먼가하는 그곳에는
관광 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래 혼자오는 사람은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이 버스 기사들 모두가
다 뭐시긴가를 믿는다고 하던데 하셔서
내가 짐작으로만 여호와 증인요? 했더니
무릎을 탁 치시며 그렇다고 하셨다.ㅎㅎ
보드블럭에 앉아 계신 할머님과
잠깐 얘기를 하고 있는 사이
할머님이 타고가실 버스 기사님이 왔다.
기사님은 인물도 키도 훤출하시고 외국인같은 외모를 지니셨다.
기사님께 김범우 묘 가는 버스를 다시 물으니 역시 앞 버스를 가리키며
김범우 묘는 장날에만 가고 저 버스가 그곳을 지나는데
2000원(버스비는 1300원) 주면서 고개만뎅이에 내려달라고 하면
기사가 알아서 내려 줄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묘에 참배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고개를 저으셨다.
참배를, 절대적 신에게만 드리는
숭배로 오해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종교적 신념으로 가득차있는 사람에게
시비를 가릴 마음의 여유가 나에겐 없었다.
기사님은 유럽을 여러번 갔다 왔는데
그곳엔 천주교 신자가 80%고
그다음으로 여호와 증인 신자가 많다고 하셨다.
당신이 믿는 종교가
유럽에선 두번째로 인정받고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종교적 입지를 확신시켜주고 싶으신 것이며
그것은 종교적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생각은 또한
내 종교의 우월성에 대한 교만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어쨌거나 인상도 좋고 마음씨 좋아뵈는
기사 아저씨와 친절한 할머님께 고맙다고 인사하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드는 버스로 갔다.
아직 기사가 타지 않은 버스안은 무척 더웠다.
아주머니 한분이 부채를 부치며 덥다덥다 하시더니
기사석 뒤에 걸려있는 바구니에 담긴 부채들 중 두개를 꺼내
나와 뒷자리 청년에게도 주셨다.
"고맙습니다 "
아주머니의 친절이 부채보다 시원했다.
기사님이 오시자 나는 일어나
"김범우 묘를 가는데요
고개만댕이에서 내려달라하면 된다고
저 차 (뒤차를 가리키며)기사님이 그러시던데요."했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2000원을 드렸더니 잔돈을 내주려고 하셨다.
"아니예요 괜찮아요"
하고 얼른 자리로 와서 앉았다.
주로 노인들이 많이 타시는 시골버스의
기사님은 무척 친절하셨다.
차를 타는 노인들에게 일일이 조심해서 타시라 하고
짐도 받아서 올려 놓아 주기도 하고
안부를 묻기도 했다.
바쁠게 전혀 없는 시골 버스의 느긋함과
작은 친절들이 정겹고 편안했다.
경쟁을 싫어하고 돈을 벌기 위해 바쁘게 사는 것을 싫어하는
내 안일한 삶의 속도와 닮아서일 것이다.
10분도 채 못되었을 시간인데 고개만뎅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성지는 거기서 300m쯤가면 된다고 했다.
걸어가다보니 '김범우묘' 표지석이 나왔다.
오른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길엔 사람하나 지나가지 않고 주변엔 공장 건물이 몇 채 있을 뿐이었다.
2, 3백 미터쯤 걸어가니
김범우 묘 비석이 또 있었다.
여기가 성지 초입이었다.
길 옆 작은 주차장엔 관광버스 한 대가 있었다.
'성모동굴성당'봉고차가 내려오더니 멈추었다.
수녀님 두 분과 자매님들이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어떤 자매님이 내가 성지 가는 줄 알고 얼른 타라고 했다.
차에 타자마자
갑자기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성지로 올라가는 숲 길 가에는
올라갈 때는 십자가의 길을 하도록,
내려 올 때는 묵주기도를 하도록 꾸며져 있었다.
성모동굴 성당 버스를 탄 사람들은
십자가의 길을 하려다가 빗발이 치자
성지의 차를 부른 모양이었다..
그들은 관광 버스를 타고 온 부산교구의 신자들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성모동굴성당이 바로 앞에있다.
성모동굴성당은 2011년9월에
부산교구 레지아와 교구민의 협조로 건립되어 봉헌 되었다 한다.
동굴성당 내부
성당 중앙 십자가는
김범우 묘에서 출토된 조각의 묘형을 따서 만든 작품이라고 했다.
내 눈에는 십자가 모형이 열쇠모양으로 보였다.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다'
넉넉하고 강건해 보이는 조선시대 맏며느리 같으신 성모님상과
독일에서 가져왔다는 독특한 감실
성모님상에 자꾸 눈길이 갔다.
11시 미사가 준비되는 동안 나는 우산을 받고
김범우묘로 올라갔다.
묘지는 잔디로 잘 정돈되어 있었고 고즈넉했다.
김범우는 1784년 이벽의 권면으로 입교하였고
이승훈 베드로에게서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 받았다.
그 후 그의 집 명례방 (지금 서울명동성당)에서 종교 집회를 가지게 되었고
이로써 한국천주교회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1785년 '을사추적적발사건'이 발생하면서 지방으로 유배되었고
유배된 후에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주위에 복음을 전파하다 유배 2 년만에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지로 가는 왼쪽의 돌들에 나란히 써있는 초기 한국천주교회 역사
미사가 시작되었다.
신자들은 서울과 부산에서 왔다고 했다.
미사를 집전 하신 분은 부산교구 신부님이셨다.
나는 성지순례를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두려움을 없애주고 용기를 주셔서
한국천주교회의 모든 성지를 다 순례할 수 있게 해주시길 기도했다.
미사후에
부산과 서울에서 온 신자들은 김범우 묘로 향하고
나는 성지를 내려가기로 했다.
성지에서 봉사하는 자매님에게
삼랑진 역으로 가는 버스가 있느냐고 물어보니 잘 모른다고 했다.
그냥 혼자 걸어가보기로 했다.
버스가 오던 길을 생각하면서
삼랑진 역까지 걸을 수 있는 곳까지 걸어가보기로했다.
성지순례 책자에는 삼랑진역부터 김범우묘까지가
도보 구간으로 표시 되어 있다.
잠깐 내렸던 소나기는 멈췄다.
준비해온 식사용 간식을 먹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침에 복숭아 한개만 먹고 왔을 뿐인데 배가 고프지 않았다.
집에선 혼자서도 잘 먹지만 밖에선 혼자 먹는게 익숙치 않았다.
'먹는 물'이라고 돌에 새겨져 있다.
잠깐 내렸던 비로 숲과 길이 촉촉했다.
고불고불 산길을 내려갔다.
꽤 긴 길이고
혼자서 걷는 낯선 산길이 불안하기도 했다.
성지를 올라가면서 하는 십자가의 길,
자연석에 새겨진 성화,
석화라고 해야하나
하여간 독특한 작품의 십자가의 길을 나는 눈으로만 보며 걸었다.
성지를 내려가면서 하는 로사리오 길
성지를 벗어나왔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내렸던 곳으로 향했다.
저 건물이 보이는 곳에서 내렸던 것 같다.
저기까지 올라가고 또 한참을 내려갔다.
이길에서 한참 헷갈렸다.
버스가 온 길이 오른쪽일까 왼쪽일까
삼랑진역 표지판도 없었다.
오른쪽 같았다.
길 눈이 어두운 내가
오른쪽이 맞을거라 생각하면 왼쪽이 맞을지도 모른다.
내 감각을 의심하면서도
일단 오른쪽으로 향했다.
가다 동네에가서 물어보고 잘못 가는거면
멀더라도 다시 되돌아오지 뭐, 하고 생각했다.
김범우 묘에서 여기까지 2.5km 걸어왔다.
이 표지석을 버스타고 오면서 보았으니
이 길이 역으로 가는 길이 확실하다.
아, 혼자가 되면 감각이 예민해져서
평소 어둔한 나도 똑똑해지나보다.
삼랑진역 가는 길로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을 확신하고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홀로 순례길,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자신이 대견해서 사진 한 장 찍어주었다.
역으로 가는 길 중간에서 버스를 만났다.
탈까 걸어갈까 망설였다.
시간 여유가 많으면 이 지방의
이름난 관광지를 한 곳 더 가보리라 생각을 했었으므로
시간을 아끼기 위해 얼른 버스를 세웠다.
반갑게도 아침에 탔던 버스이고 같은 기사님이셨다.
친절한 여호와 증인 기사님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삼랑진역에서 내리기 전에
기사님께 삼랑진 성당을 아시느냐고
거길 가려면 어떤 버스를 타냐고 물어보니
기사님께서 성당까지 태워 주시겠단다.
원래는 역 앞이 종착지인데
일부러 나를 성당까지 태워 주셨다.
다시 버스비도 냈는데
괜찮다며 극구 받지 않으셨다.
고마운 기사님,
종교인들의 좋은 표양은 그 자체로 선교이다.
김범우묘 관할인 삼랑진 성당,
잠깐 들어가 기도하고 바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걸어서 역까지 갔다.
거기서 나는 구미로 가기 위해
바로 역으로 가지 않고 다시 버스를 탔다.
밀양과 삼랑진의 관광지로 내세우는 '만어사'를 가보기 위해서였다.
또 그 친절한 기사님 차를 탔다.
만어사는 김범우묘와 같은 방향이었던 것이다.
오후 1시 40분에 출발했다.
1시 46분 쯤 만어사 초입에서 내렸다.
만어사 가는 길은
오르막길이긴 하지만 30분만 걸으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김범우 묘보다 훨씬 외지고 한적한 산길이었다.
초입부터 오르막 길이더니
가는 길 내내 완만한 길은 나오지 않았다.
오르고 내려오는 동안까지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전선주를 보고 계속 따라가는 길은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주었더라면 뒤돌아 올 수 있었을텐데..
기사님에게 괜한 원망도 했다.
성지순례만으로 그치지 못한 나의 욕심도 원망스러웠다.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헉헉대고 숨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목적지에 대한 궁금증과
목적지에만 도착하기만하면 사람들도 차들도 있을거고
택시든 남의 차든 얻어타고 내려오면 된다 생각하고
쉬지않고 부지런히 걸었다.
평소 땀이 나지 않던 몸은
땀으로 옷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더운데 더운줄도 몰랐다.
낯설고 한적한 산길에 대한 두려움으로
물을 마실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점심도 안먹었는데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되돌아 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목적지의 반이상은 걸은 것 같고
거의 다 와 가는지도 모르는 지점에서 돌아 내려오는 것보다는
오르는 것이 더 빠를거라고 생각했다.
택시 한 대가 내려오고 있었다.
순간 세워서 타고 갈까 생각했지만
몸은 계속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
택시가 사라지자 금새 후회가 되었다.
그냥 타고 내려 갈 것을...
빗방울도 몇 방울씩 떨어졌다.
비까지 온다면 어쩌지 암담해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비는 더이상 오지 않았다.
최근에 혼자 올레길을 걷던 여자가 살해당한 사건이며
묻지마 살인사건 등이 떠오르자 숨이 막힐 듯 불안했다.
묵주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쉬지않고 묵주를 돌렸다.
그러나 가도가도 절은 멀리서나마
그 모습이 보이지않아 답답하고 애가탔다.
암담해져 걷고 있는데
드디어 산속의 건물 한 귀퉁이가 보였다.
아, 다 왔구나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절이 아니었고 '하늘아래 첫집' 이라는 집이었다.
거기서 표지판은 1.2km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더 가야 하는 것이었다.
한숨이 나왔지만 올라가야만 했다.
진퇴양난의 절박함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만어사의 유명한 검은빛 돌들이 나타났다.
이 지방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기도하는 돌이었다.
바위돌을 두드리면 쇳소리가 난다는 신비한 돌이라고 했지만
나는 돌을 두드려보지 못했다.
결국은 도착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절은 아니었다.
오가는 사람 하나도 없고 대웅전도 없었다.
살림집 같은 건물에 불상만 앞에 세워져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촛불과 제물이 놓여있는 움막같은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일반 절이 아니었고 무속인들이 치성을 드리는 절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건 상관없었다
실망은 되었어도 그래도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이 다행이었고
더이상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도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하느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제서야 시간을 볼 수 있는 여유,
물도 마셔야 한다는 여유를 찾았다.
절에서 사는 듯한 여자가 무얼들고 가다가
나를 옆눈길로 한번 쓰윽 쳐다보더니 들어갔다.
여자의 모습도 예삿사람같지않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곳엔 내가 평소 접해보지 않은 음울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일분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뒤돌아 내려왔다.
물조차 쉬면서 마시지 못하고 내려오면서 마셨다.
내려오는 길은 가벼웠다.
산을 오르면서 갖은 상상으로 두려워 했던 마음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조금씩 주님의 빛이 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의 두려움을 단련시키시기위해 그곳으로 데리고 가신 것이라 생각했다.
나의 첫 순례에서 강도 높은 두려움을 겪어내게 함으로써
다음 순례의 여정을 자신있게 하려시는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산을 다 내려와 길가 그늘에 신발을 벗고 풀썩 주저 앉았다.
배낭도 내려놓고, 산길을 오르면서 지녔던
마음의 무거운 짐까지 다 내려놓고나니
날아갈듯 행복해졌다.
비로소 점심으로 준비해온 고구마 한 개와 달걀 두 개를 먹었다.
물도 한 병을 다 마셨다.
4시가 다 되어가는데 3시 50분 버스는 오지 않았다.
그 다음 버스는 5시 차,
걸을 수 있는데 까지 걷다가 5시 차를 만나면
타고 가면 되겠지 생각했다.
걷다가 버스를 만났다.(4시 조금 넘어)
아침부터 네번째 타는 버스, 또 그 기사님이셨다.
나는 하루종일 여호와증인 기사님이 운행하는
버스구간만을 왔다갔다 한 것이었다.
내가 버스에 오르니 반가워 하셨다.
웃으시며 나에게 참 부지런하다고 하셨다.
나는 자신이 나태하다고 여기고 부지런함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다.
그래서 부지런한 사람들을 보면 항상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부지런하다는 소릴 들으면
정말 내가 부지런한가 뒤돌아보게 되고
무엇보다 듣기좋은 말이기도하다.
.
기사님께서는,
사실은 아줌마가 만어사에 간다고 했을때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면 지겨워하고 힘들어 할까봐
거짓말을 한거라고 하셨다.
남자들 걸음으로도 오르막길은 힘들고
오르는데만 1시간은 넘는 거린데
아줌마는 대단하다며 평소 많이 걸으시는 모양이라고 하셨다.
힘든 산길을 걸을 땐
30분 걸릴거라고 터무니없이 시간을 줄여 말한
기사님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힘든 여정을 헤치고 나온 만족감은 이미 지난 원망같은건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두려움과의 싸움에서 지지않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았는가?
삼랑진 역에서 내리면서
기사님에게 큰 소리로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하루 동안 순례의 여정을 무사하게 마치게 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이기도 했다.
삼랑진역에서 4시56분 차를 타고 6시28분 구미에 도착했다.
일부러 일찍 퇴근 하고 마중 나온 남편 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첫댓글 첫 순례 축하합니다^^.
재밌게 잘 봤습니다
전 성당기행중있는데 토요일짧은여행이지만
기쁘게 다닐수있어서 좋았어요~~
모쪼록 계획하신 순례여행에 화이팅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