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자 시인>>
<<유계자 시인의 양력>>
* 충남 홍성에서 태어남,
*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을 졸업.
* 2016년<애지>로 등단.
* 시집 : 『오래 오래 오래』,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 2013년 웅진문학상(시부문)을 수상, 제8회 애지문학 작품상 수상.
<<유계자 시인의 시>>
지상을 지나가는 저녁/유계자
지상을 지나가는 저녁 무렵
당신이 떨어뜨린 약속은 소나기가 되고
아끼던 부레옥잠은 슬며시 부레없는 꽃으로 피어났다
꽃은 꽃말을 위해 애쓰고 그늘에 놓인 뿌리는 머리칼처럼 길어졌다
함부로 길어진 고독이란 말을 단단히 묶지만
묶을수록 자세를 바꿔보려는 몇 컷의 웃음
거울 속으로 발을 들이밀자 반성 없이 따라온 길이 널려있고
아직 첫 장을 완성하지 못한 말들은 서랍 안에서 분주하다
달빛을 등지고 걸어간 길과
파도를 데리고 걸어간 당신
나는 당신에게 몇 번이나 목화솜 같은 이름이었을까
차가운 곳에 익숙해진 근황은 아찔한 단애가 될까
얕은 주머니에서
뒤집힌 사랑이 주르르 쏱아져 내리고
노트 속에 빼곡히 적힌 붉은 물집에 버물리를 슬쩍 발라두었다
지척에 붐비는 당신은 무성하지만
당신과의 추억에는 색이 남아있지 않다
맨드라미 아래/ 유계자
사랑니에서 통증이 왔다
의자는 스스로 나를 눕힌다
반사경을 쓴 의사가 차가운 치경으로 혀를 누르자 눈부신 조
명이 입안을 환히 밝힌다
사랑이 읽히고 있다
붉은 맨드라미 아래서 한 사람을 기다리는 맨드라미가 되어가
던 기억이 뢴트겐의 그림자에 복사되는 저녁
바람의 뒷골목에서 두근거리던 붉은 눈동자가 보인다
아픈 것들은 쉽게 뽑히지 않는데, 넘어지면 일어나기 어려운
뿌리가 쉽게 뽑혔다
돌아오는 길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던 한 사람의 이름이 희미해졌다
보지 않고 잊을 수 있다면 보고 있어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고등어 가장/유계자
기어코 오래된 냉장고가 말썽을 부린다
바다를 기억하는 것들이 많아서인지
윙윙 삐거덕 파도가 친다
켜켜이 쌓인 성에를 거두며
이참에 가볍고 대가리 없는
것들은 따로 넣어두고
단단한 나무 도마를 꺼냈다
무엇이든 올려주세요
해동이 어려운 파도이건 잡생각이든
칼의 처분만 기다리는 도마
푸르게 얼어붙은 고등어가
실직한 가장의 손에 들려 있다
단 한번이라도 도마에 오르면 끝장이다
동그란 눈이 꺼림직 하다는 듯,
자꾸만 칼의 각도가 빗나가는
어설픈 그의 손놀림
여기저기로 튕기쳐 나가는 고등어의 반항
칼자루를 쥔 자는 언제나 타인이었다
평생 칼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천성
도마질도 쉽지 않다며 두런두런 중얼거린다
고장난 계절/유계자
그리움의 방향으로 돌아눕는 날은
날짜마다 동그라미가 생겼다
볼륨을 낮춘 음악은 의자 밑으로 가라앉고
오래 머문 생각은 받침이 빠져나가 삐걱거린다
낡은 스탠드가 낡은 글자들을 읽는 동안
빠르게 교체되는 어둠은 covid-19
꼼짝없이 방에 갇혀 기도가 되지 않는 글자들을 거꾸로 읽으며 방언을 흉내 내도 쓴맛이 빠지지 않는 발음은 오래 차가웠다
너와 내가 금지곡처럼 간절해지는 한나절
젖은 슬픔들은 햇빛에 마르지도 않는다
고장난 시간을 조립하며
웅크리고 앉아있어도 생의 한 부분이 자글자글 끓어오른다
라푼젤, 그대의 머리칼을 다오
빛나는 봄의 심장을 빌려야겠다
환촉(幻觸)/유계자
마지막까지 그들은 자신을 숨기고 싶었을까
죽은 자 대신
창에 갇힌 냄새가 밖으로 기어 나와 부음을 알렸다
자꾸만 번져가는 자살과 고독사
유서 대신 빈칸이 더 많은 이력서와
독촉장과 미납고지서가 쌓이고
외롭게 살다간
한 사람의 편도가 접히는 밤
죽음이 빠져나간 자리에 특수청소부가 들어간다
체념과 한숨이 먼저 수거되고
눌어붙은 그늘을 박박 긁어내고서야
마지막까지 버티던 생의 바닥이 정리되는 것이다
한 청년도 고시원에서 서둘러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다
해외여행을 위해 비행기를 예약해 놓고 캐리어도 준비해놓고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보라카이 해변을 걷고 있을지 모른다
유품들을 정리하고 나오는 오후
인기척에 재빠르게 몸을 숨기던 벌레들
우르르 몰려다니며 저녁을 뜯는 습성을 치워도
영락없이 잠의 언저리에 붙어
부풀어 오르는 가려움
손톱을 세워 벅벅 긁어도 잡히지 않는
환촉(幻觸)에 시달리는 밤이 온다
버려진다는 것/유계자
버려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독기가 없다는 것은 더 슬픈 일이다
순하디 순한 것들도
버려지는 순간 독기를 품는 법,
버림당한 풀뿌리를 보아라
암팡지게 흙을 붙잡고
몸을 세우는 저 뜨거움을
버림받는다고 절망할 일은 아니다
차라리 왜 버리느냐고 따져 물을 일이다
한번쯤 속 시원히 물어뜯을 일이다
빳빳하게 날 세운 혈기로
씩씩하게 일어나 세상을 걸을 일이다
우리는 무언가 수없이 버리고
버려지고 버림당했다.
내가 버린 저 하수마저도
반짝반짝 일어나
죽을 각오로 강을 헤엄쳐간다
독기어린 눈으로 새 숨길을 찾아 나선다.
오래 오래 오래/유계자
모래밭에 구령을 맞추는 갯메꽃이 있지
바다를 향해 쨍쨍하게 나팔 하나씩 빼어 물면
자갈자갈 거품 문 게들이 발바닥에 짠 내음을 불러들이지
뱃길 따라갔던 갈매기들이
먼 바다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는 안부를 더러 물고 오지
외할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갯메꽃 입술 가까이 대고 따개비 같은 주문을 외워
오래오래오래
숨 한번 크게 들이쉬고 중얼거리면
메꽃 속에서 긴 밧줄을 타고 꽃씨 닮은 개미들이 줄줄이 기어 나오지
하나 둘 개미를 세며 기다려 줘야 해
외삼촌을 기다리는 외할머니처럼
그러는 동안 밀물이 찰싹찰싹 발등을 간질이지
눈물 비린내 묻은
오늘도 남은 사람들은 혼자 갯메꽃 주문을 외우며
물수제비를 던지
퐁퐁퐁 물발자국 딛고 오라고
해가 지도록
바다 회사/유계자
회장은 달
회사명은 밀물과 썰물
조금 때만 쉴 수 있는 어머니는 달이 채용한 2교대 근무자
철썩,
백사장이 바다의 육중한 문을 열면
발 도장을 찍고 물컹물컹 갯벌 자판을 두드려 바지락과 소라를 클릭한다
낌새 빠른 낙지는 이미 뻘 속으로 돌진하고
짱뚱어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을 살피느라 정신없고
농게는 언제나 게 구멍으로 줄행랑치기 바쁘다
성깔 있는 갈매기는 과장되게 끼룩 끼끼룩거리며 잔소리를 해댄다
가끔 물풀에 갇힌 새우와 키조개를 거저 얻기도 하지만
실적 없는 날은 녹초가 되어 비린내만 안고 퇴근한다
평생 누구 앞에서 손 비비는 거 질색인데
겨울바람에 손 싹싹 비벼대도 승진은 꿈도 꾸지 못했다
자별하다고 느낀 달의 거리마저 멀어지자
수십 년간 충실했던 밀물과 썰물 회사를 정리하였다
파도 같은 박수 소리
근속 훈장 하나 받아보니 구멍 숭숭 뚫린 직업병이었다
달빛/유계자
한밤중 오줌이 마려워 마당으로 나왔는데
지붕을 타고 내려오는 달빛이 마당에 흥건했다
사랑방 창호지를 열고 흘러나오는
-석탄 백탄 타느은데 연기만 풀풀 나구요
-이내 가슴은 타느은데 연기도 아니 나구요
굴뚝 뒤에선 소쩍 소쩍 소쩍......
눈꺼풀에 남은 잠을 갸웃거리며 살금살금 귀를 세웠다
열 살쯤 내 입속으로 흘러든 노랫가락은 머리와 꼬리도 모른 채 흥얼거렸다
달빛을 넘어
세상에 귀 기울이는 동안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할아버지 나이를 지나서야
할머니 없는 빈방의 적막함이 곡조로 타던 사발가라는 걸 알았다.
포릇한 추억은 시간의 보습에 찍혀 녹슬어가고
발목을 적시는 어둠에 비틀거리다가
아파트 사이에 낀 어스름 달빛에 문득,
연기 없이 애가 타던 그 봄밤을 만나곤 한다
밥/유계자
젖이 마른 퓨마가 TV에서
정글로 먹을거리를 찾아 나선다
둬 시간 숨죽여 기다렸다가
과나코 숨통을 향해 달려들지만
한 수 배운 뒷발에 밟혀 허탕의 시간으로 돌아오고
굶주린 새끼들마저
제 그림자를 숨기고 달려들지만
발 빠른 밥한테 저만치 나가떨어지고 만다
며칠을
주위의 반짝이는 눈빛을 제치고
숨죽인 호흡으로 기다리다 한순간 과나코의 숨통을 물었다
이레 만에 제 몸보다 큰 밥을 번 것이다
우리는 정글의 맹수처럼
다른 이의 목숨을 밥으로 먹고 살아간다
객지로 밥 벌러 나간 친구 남편은
삼 년 만에 다른 여자의 밥이 됐다고 가슴을 치며 오열했다
밥은 잘못 다루면 오히려 밥이 되기도 한다
인디언 치마/유계자
별거 있간디 철사 끊어 허리 질끈 매고 면도칼 하나 주머니에 챙기는 거여 짠물에 들어가야 혀
그놈 잡으려면 가슴팍은 아니더라도 허리는 적셔야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겨 굴 버케 하나는 까
야지 굴 냄새 솔솔 풍기면 망둥이가 덥석 물지 그놈 잡아 지느러미 떼고 미끼로 쓰고 또 한 놈 잡
아 떼고 잡히는 대로 허리춤에 꿰는 거여 손맛이 워떻고 땡기고 자시고 할 것 없지 덥석덥석 굴
인지 지 동무 살떼긴지 무는 통에 금세 허리가 휘청해져 무는 걸로 치면 망둥이나 여편네나 매한
가지여 성님 성님 하면서 지 살떼기 쬐금 떼어 주니께 몸뚱어리까지 다 내놓은 거지 심성은 착한
데 귀가 얇아서 몇 년 중동 가서 죽도록 벌어 부쳤더니 집에 돌아와 보니 기가 막히데 사기꾼 헌
티 보증서서 다 털어먹고 뼈 빠지게 기름칠한 돈은 모조리 불 땐 거여 한 칸 있던 집마저 붉은 딱
지 붙고 길거리로 나앉았지 달랑 거시기만 남었더라고 여편네 허고 새끼는 친정 보내 놓고 낡은
텐트 하나 가지고 나왔지 뭐 하것나 여름내 갯바닥 댕겼지 덥석덥석 물기 좋아하는 그 망둥이 철
사줄에 죽 걸치고 나오면 영락없이 후루루루...... 애들이 놀던 인디언 치마여 속은 타고 지팡이
하나 짚고 온 산이 떠나가도록 소리치고 싶었지 펄쩍펄쩍 망둥이 치마 입고 인디언 놀이 신나게
한바탕 하고 싶었다니께
붉은 맨드라미 아래/유계자
사랑니에서 통증이 왔다
의자는 스스로 나를 눕힌다
반사경을 쓴 의사가 차가운 치경으로 혀를 누르자 눈부신 조명이 입안을 환히 밝힌다
사랑이 읽히고 있다
붉은 맨드라미 아래서 한 사람을 기다리다 맨드라미가 되어가던 기억이 뢴트겐의 그림자에 복사되는 저녁
바람의 뒷골목에서 두근거리던 붉은 눈동자가 보인다
아픈 것들은 쉽게 뽑히지 않는데, 넘어지면 일어나기 어려운 뿌리가 쉽게 뽑혔다
돌아오는 길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던 한 사람의 이름이 희미해져갔다
보지 않고 잊을 수 있다면 보고 있어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순대국밥/유계자
반복과 어긋남의 앰뷸런스 소리가 새벽을 찢는다
수술을 마친 의사가 푸른 천을 걷어내자
스테인리스 그릇에 검붉은 응어리가 보였다
남편의 속을 본 것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누군가로
때론 아버지란 이름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으나
내겐 한 자루 연필 속 흑심 같았다
닳을수록 써내려가기 위해
고집을 방패막이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 고집이
암 덩어리 하나 키웠으니 나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이다
순대국밥집에서
다대기를 넣으려다 다시 들려오는 앰뷸런스 사이렌
울컥, 슬픔이 솟구친다
몇 번의 험한 그늘이 훓고 간
너덜너덜 물러진 고집
다시 한 번 탱탱하게 부풀어 올라
씹히지 않는 고집이어도 좋겠다고 혼잣말을 하며
뿌리/유계자
지상의 병실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순간
저쪽에서 이쪽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세상
날숨과 들숨 사이 뒤엉킨 눈물이
경계를 넘어
또 다른 계절로 옮겨가고 있다
언젠가 지하로 내려가신 외할머니를 보고
이제 진짜 고아가 되었네 라며 어머니가 울었다
나는 고아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웃는 척 했다
나무의 뿌리도 지하로 내려가고
삶의 뿌리도 바닥을 더듬는다
요즘은 뿌리를 쉽게 버리고 달콤한 열매만 찾는다
뿌리가 잘려지면 나무는 어떻게 될까
또 누군가 칼로 뿌리를 잘랐다고 TV 뉴스가 소란하다
연출자/유계자
어제는 청각을 잃은 오류투성이
언제나 서문을 지나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면
헤어진 적 없는 너와 안녕을 고하고
오래 지속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싱거워지듯,
다음 페이지를 잊지 않으려고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뉘엿뉘엿
하루가 저문다
애환의 날들이 짝을 지어 잠복을 하고
틸란드시아의 긴 수염은 이승의 그늘진 무대 뒷면까지 자란다
주섬주섬 발을 빼고 소품을 챙겨 무대 밖으로 사라지는 난색에도
어린 숨소리까지 줄로 재는
뜨끔거리는 기침 하나 한 번의 눈웃음까지도
극으로 치닫고
그리운 것들은 모두 난독이 된다
다시 불이 꺼지고 그림자들이 멀어졌다
큐!
사람의 히스토리는 한 줄에 끝나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각본은 오늘도 방문을 연다
병동의 상련(相憐)/유계자
벌레가 갉아먹은 곳 도려내고 독한 약을 친다
밤낮으로 며칠씩 약을 뿌리다 보니
반들거리던 이파리들 다 떨어져 나간다
발바닥은 느릅나무 껍질처럼 딱딱해지고 몸피들은 바스러진다
누군가의 죽음이 내 손톱 밑 가시만 못하다는 말이 뒤를 따라다닌다
안대를 쓰고 십팔 층에서 뛰어내린 젊은 죽음이
뉴스로 날아올라도
마음을 찌르던 통증은 금세 시들해진다
병실마다 약병을 매달고 다니는 사람들
복도에서 슬며시 눈을 돌린다
전화기 너머 엄마 언제 오느냐고 재촉하는 울음 섞인 아이의 목소리를
주머니에 구겨 넣는 젊은 여자
절로 알게 되는 상련(相憐)에
몇 번 약을 쳤느냐고 묻지 않는다
창밖을 바라보는 퀭한 남자의 눈에
풀 한 포기 없는 마당을 헤집는 가느다란 붉은 비둘기의 발목이 지나간다
언젠가 이웃집 담을 밀치던 바람의 발바닥도 지나간다
유기된 지 오래 보이는 털이 굳어 버린 개 한 마리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부르르 몸을 한번 털어낸다
또 한 계절이 흔들렸다
고장난 계절/유계자
그리움의 방향으로 돌아눕는 날은
날짜마다 동그라미가 생겼다
볼륨을 낮춘 음악은 의자 밑으로 가라앉고
오래 머문 생각은 받침이 빠져나가 삐걱거린다
낡은 스탠드가 낡은 글자들을 읽는 동안
빠르게 교체되는 어둠은 covid-19
꼼짝없이 방에 갇혀 기도가 되지 않는 글자들을 거꾸로 읽으며 방언을 흉내 내도
쓴맛이 빠지지 않는 발음은 오래 차가웠다
너와 내가 금지곡처럼 간절해지는 한나절
젖은 슬픔들은 햇빛에 마르지도 않는다
고장난 시간을 조립하며
웅크리고 앉아있어도 생의 한 부분이 자글자글 끓어오른다
라푼젤, 그대의 머리칼을 다오
빛나는 봄의 심장을 빌려야겠다
물소리/유계자
철퍽철퍽
한나절 수차를 밟는 염부의 걸음이 방금 걷어 올린 미역처럼 후줄근하다
소금창고 가는 길, 짊어진 소금가마가 기우뚱
바닷물 저장고에 떨어져 버렸다
염천에 점심이나 먹고 건져야겠다며
담배 한 대 피우고 소금을 찾으러 갔더니
빈 가마만 동동
바닷물이 낳은 소금
서둘러 왔던 곳으로 돌아가 버리고
선술집에서 만난 소금꽃 같던 여자
날 못 믿느냐며
함초같이 붉은 입술로 평생 수차의 지팡이가 되어주겠다던 그 여자
소금처럼 짜디짠 눈물까지 저당 잡히고는 걸음을 지워버렸다
수차를 굴리다가
수차례 사금파리 같은 이름 다 잊었노라
염판에 엎드려 저녁노을에게 큰소리치다가
철벅철벅
세상은 잘도 돌아가는데
온종일 돌아도 염천은 염전
맨발의 염부는 딱 한 번 염천을 벗어나 바다로 돌아가고
세상에서 건진 것은 어느새 세상으로 돌아간다
나는 폐염(閉鹽)을 지날 때마다 철퍽철퍽 쏟아지던 물소리를 받아내곤 한다
바닥의 그늘/유계자
봄볕에 눈이 찔린
광어 도다리가 수족관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다
감나무가 그늘을 밀고 들어오자
생(生)을 맞대고 차마 한 눈씩만 바라보고 있다
저만치서
밀물 들어오는 소리가 자박자박 들리자
눈이 번쩍 떠지는 도다리
지느러미를 흔들어 다른 도다리를 깨워 돌아갈 바다를 말하려는 순간
거친 손 하나가
수족관에서 광어 한 마리를 낚아챈다
바다는 없고 바닥은 있어
바다와 바닥이 동시에 파닥거린다
바닥에 있는 것들은 함부로 돌아갈 수 없다고 순식간 썰어버린다
사람들에겐
잘근잘근 씹는 버릇이 있다
고기를 굽다/유계자
모처럼 동창들이 바닷가 펜션에 모여
숯을 올리고 불을 붙인다
새까만 숯에도
그늘이 있는지 쉽게 붙지 않는다
한참을 퍼덕거리다 옹이진 자리가 환하게 불이 일자
주식투자로 집 두어 채 말아먹었다는
별명이 주꾸미인 친구가 집게를 들고 자리를 잡는다
뭐든 한방에 해치워야 한다고
성급히 석쇠에 올려놓은 살덩이 후루룩 타버린다
몇 번이고 뒤집어야 해
불 조절 안 되면 손이라도 빨라야지
치고 빼고 뒤집고 보기 좋게 놔야 한다며
중소기업 사장인 문어가 훈수를 둔다
말단 공무원 넙치가 슬며시 집게를 받아들고
슬슬 익혀야지
급하게 익히면 속은 핏물이야
숯불도 벌겋게 익어가는 동안
단번에 구워지는 인생은 없다며
아파트 경비원 하다 잘려
이제는 막노동하기도 힘들다는 등 굽은 새우는 연신 술잔을 들다가
빈 잔마다 채워봐
저 바닷물이 출렁이는 것은 내 눈물이 넘쳐서 그래
너스레를 떨며 건배사를 외친다
삶은
고기를 굽는 것이다!
벌겋게 달궈진 석쇠 위에
지글지글 세상이 구워지고 있었다
가위눌림/유계자
마름질하는 어머니 손에서 자투리 천들이 태어나요
깡똥한 소매가 마구 자라요
드르륵 몇 번만 구르면 내 꿈을 재단할 수 있을까요
벽장 속의 죽은 종이인형
침 묻은 연필로 꾹꾹 눌러 심장을 그려 줘요
그녀의 몸엔 검은 벨벳 물결무늬가 어울려요
발목이 생겨나면 한들걸음을 가르치고 싶어요
밤새 부르튼 발바닥을 시침질하는 밤
목련이 피어요 한 그릇 밥은 되지 않아요
뚝뚝 목련을 잘라요
삐뚤거리는 가위질로 물관의 기억을 끊으며 박제된 봄밤을 키워요
흰 핏물이 흘러
아직 밤이 환해요
내 꿈을 분칠하기 바쁜
물결무늬 소매는 자라지 않아요
천수만 그 바닷가/유계자
평생 갯벌 농사짓던 손에
몇 푼의 지폐가 쥐어졌다
천수만 입구를 폐유조선이 막아서자
물이 좋다는 소문이 소문을 낳고
꾼들이 모여들어 싹쓸이를 해갔다
뚜우뚜우
미루나무를 감고 오르던 능소화가
다급하게 나팔을 울려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촘촘히 정박해 있던 집들은
하나둘 파도에 휩쓸려가고
어느 암초에 걸려 난파가 되었는지
소식이 끊어졌다
그 이듬해 여름 작은 도시에서
겨우 닻을 내렸다는 소식이 한통 날아들었다
마디마디 푸른 눈금을 지나
밤새 혈압이 오르던 능소화가 나팔을 버렸다
그 바닷가에서는
능소화가 피면 덩달아 슬픔의 눈금도 올라간다
느티나무 그 여자/유계자
느티나무 그 여자 허름한 트럭에 실려 반쯤 허물어진 까치집을 품고 아스팔트를 지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난생처음 세상 밖으로 이파리를 출렁거리며 달려온 것이다 단 몇
시간 만에 몇 푼의 돈으로 결정된 기구한 운명, 지닌 것이라곤 기둥 몇 개 남은 까치집
이 전부였다 발이 묶여 순순히 따라오긴 했어도 자꾸 불안한지 그렁그렁한 잎사귀를
떨군다 네 개의 바퀴가 주춤주춤 붉은색 대문 앞에 멈춰 서자 때마침 덩치 큰 포크레
인은 평생 뼈를 묻어야 한다며 느티나무를 번쩍 구덩이 속으로 밀쳐 넣는다 너무도 순
식간의 일이어서 까치집 기둥 하나가 풀썩 발밑으로 널브러졌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이리저리 밑둥까지 들춰보고는 다들 한 마디씩, 푸른 대문집 미끄덩한 소나무는 너
무 뻔질나서 영 못 쓰게 되었고 저 아랫동네 꼬패집은 당최 단감이 열리지 않아 잘라
버렸다고 철철 말을 쏟아 붓는다
느티나무 그 여자의 지주
사방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고 가지고르기를 한다면
잎겨드랑이에 수꽃 암꽃 필 때까지만 참아준다면
땅 밑을 흐르는 샘물 콸콸 퍼 올리고 싶다는
소외의 고독으로 지쳐 있는 그 누구에게
천년이 지나도 마르지 않을
이마 짚으며 그늘이 되어 줄
느티나무 그 여자의 속내까지
아직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