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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준령을 넘어
一松 韓 吉 洙
2024년 5월 21일은 서울시 시우회 광진구회에서 광진구와 자매결연을 한 태백시를 방문하여 관내에 있는 사회복지시설의 환자들을 위문하는 날이다.
우리들 광진구 시우회 운영위원들이 모이는 구의3동 소공원에 갔더니 계절의 여왕인 5월에 자기 세상을 만난 듯 갖가지 장미꽃들이 한창 제 자랑을 하려고 뽐내고 있기에 이 찬란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한참 넋을 놓고 바라보며 예뻐해 주었다.
광진구청에서 위문품의 지원을 받아서 싣고 광진구의 현직공무원들의 격려 속에 08;00 우리들 시우회 운영위원들 30여 명을 태운 버스가 출발했다.
올림픽대교를 건너 강동구 암사동쪽으로 가다 보면 한강변으로 구암서원 터(구암정)가 나온다.
구암서원은 1667년에 건립된 광주군 구천면 최초의 서원이었다. 이 지역의 유생들은 여기에서 유교적인 학식과 교양을 쌓아 과거에 응시하여 관료로 입신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배출된 구천면 유생들은 둔촌 이 집을 향사하고 있었는데 숙종 때 구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곳에는 이집 이양중 어윤겸 임숙영 등이 배향되었는데 노론에 속하였다. 유생들은 구암서원을 중심으로 향약을 조직하여 유교적 마을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구암서원은 1871년 고종 때 전국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지고 1898년 그 자리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유허비가 남아 있다. 원래 구암서원은 삼국시대의 바위 절(巖寺)터 위에 조성되었던 것인데 지금은 구암정을 건립하여 이를 기념하고 있다.
우리는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하남시를 지나고 있다.
하남시는 인구 329천 여명에 면적은 94.04m2인데 시의 이름인 '하남'은 이름을 지을 당시 백제의 도성으로 알려졌던 하남위례성에서 따온 것이다. 시로 승격하기 전의 지명이 '동부읍'과 '서부면'인지라 이름으로 쓰기엔 부적절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까지 이곳은 광주목과 광주부의 중심지이었다. 읍치가 서부면 궁촌 즉 지금의 춘궁동에 있었고 향교가 동부면 교리 지금의 교산동에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병자호란 이후 읍치가 남한산성으로 이전했다. 광주시의 변천사를 보면 과거의 광주 고을 영역이 광대했었고 변화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0년 광주군 동부면이 동부읍으로 승격되었고 1989년 광주군 동부읍과 중부면 상 산곡리가 하남시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하남시의 볼꺼리로는 남한산성 미사리 조정경기장 광주향교 검단산 팔당댐과 스타필드 하남 등이 있다.
원래 관광지가 전연 없던 이곳에 스타필드 하남이 생기고 나서 시민은 물론 서울과 주변 도시에서도 쇼핑하러 온다. 저 멀리 이천이나 여주 또는 양평이나 춘천에서 올 정도로 이름이 났다. MSG 스피어 라스 베가스에 이어 세계 2번째로 MSG 스피어 공연장을 2025년 착공을 목표로 논의중이라고 하니 하남시의 장래는 양양하다.
하남시에 있는 구산성지도 알아줘야 한다.
은총과 치유의 구산성지는 뒷산이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 해서 이름이 붙여진 구산 마을에 위치하고 있는데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을 비롯한 9명의 순교자 진 묘와 얼이 스며 있는 거룩한 땅이다. 구산마을 신앙의 씨앗은 1830년경 정직과 아량으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던 김성우 성인과 두 동생 덕심, 윤심 세 형제를 통해 뿌리내려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김성우 성인과 형제들은 성사와 신앙생활을 더 잘 하려고 서울로 갔다. 그런데 김성우 성인은 1836년에 입국한 모방 신부를 집에 모시고 우리말과 조선의 풍습을 가르쳤으며 박해의 칼날 아래 풍전등화와 같은 교회 공동체를 보존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수차례 집을 옮겨 다니며 전교 회장직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포도청에 압송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였으나 굳건한 마음으로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오]라는 신앙고백을 남기고 1841년 4월 29일 48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였다.
구산성지를 순례하면 신앙 선조들의 순교사 박해사 생활사 등의 순교 영성을 느낄 수 있으며 지치고 냉담한 이들은 신앙의 열정을 되찾고 진정한 평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교통이 편리하여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으며 조경이 아름다워 드라마와 광고 영화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인근에는 미사리 카페촌과 조정경기장이 있다.
검단산은 높이가 657m이다. 하남시 동쪽 한강변에 솟아 있으며 한강을 사이에 두고 운길산(雲吉山) 예봉산(禮峰山)과 이웃해 있다. 백제 때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이곳에 은거하였다 하여 검단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높이는 관악산(冠岳山:629m)과 비슷하지만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서 광주목의 진산(鎭山)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산세가 특이하다. 가파른 경사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면 사방의 전경이 시원하게 열리고 서서히 정상에 이르는 길이 매우 다채롭다. 이 검단산은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산이라 전해진다. 정상에 오르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양수리와 하남시는 물론이고 서울과 양평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보인다..
이 검단산에는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집단 묘지가 있다..
유길준은 한말의 개화 운동가이며 최초의 국비유학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하였다. 귀국후 7년간 감금되었는데 이때 [서유견문]을 집필하였다.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붕괴되자 일본으로 건너가서 12년간 망명하였다. 순종황제의 특사로 귀국한 뒤 국민교육과 계몽사업에 헌신한 선각자이었다.
유만겸(兪萬兼,1889~1944)은 개화운동가 유길준(兪吉濬)의 장남이며 교육자 유억겸(兪億兼)의 형이다. 1897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907년 귀국하였다. 배재학당과 흥화학교에서 공부하고 1917년 동경제국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1920년 문경군수에 임명되었고 이후 경상남도 서무과장 학무국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하남시를 지나면 廣州시가 나온다.
경기도의 중앙에 있는 광주시(廣州市)는 인구 39만 여명(2020년 6월 현재) 면적 431.05㎢ 행정구역 3읍 4면 3행정동이 있다. 현대의 인물로는 신익희 남덕우 등이 이곳 출신이다.
광주시 초월면의 고속도로변에는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의 묘가 있다.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로 용모가 아름답고 성품이 뛰어났으며 8살 때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으로 일컬어졌다.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하였는데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하였으며 친정집에 옥사(獄事)가 있는 등 연속되는 불운에서 오는 고뇌를 시를 쓰며 달래다가 선조 22년(1589) 27세에 생을 마쳤다. 그녀는 섬세한 필치로 여성 특유의 감상을 노래하여 애상적인 독특한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작품의 일부는 허균에 의해 중국에 전해져 [난설헌집]으로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묘비의 비문은 이숭녕이 지었으며 묘의 우측에는 1985년 전국 시가비 건립동호회에서 세운 시비(詩碑)가 서 있다. 시비에는 허난설헌의 곡자시(哭子詩)가 새겨져 있는데 시의 대상인 두 자녀의 무덤이 난설헌 묘 좌측 전면에 나란히 있다.
우리가 주변의 경관과 묻혀있는 역사를 더듬는 사이에 차는 달렸나 보다.
우리는 치악산 골짝을 올라와서 치악산 휴게소에서 잠간 쉬었다가 또 달려 마침내 태백시에 도착했다.
태백시의 면적은 303.45 km²이며, 인구는 2019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4만3800 여 명에 2만1798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태백 시내를 지나서 훠이 훠이 산 중턱으로 올라가서 태백시 문곡동에 있는 “태백시 실버 요양원”에 도착하니 12;00가 지났다.
우리가 싣고 간 위문품을 모두 꺼내서 정렬을 시키고 나서 우선 기념사진을 찍고 광진구 한수창 회장과 봉금순 요양원장 대행간에 인계 인수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런 뒤에 우리들은 건물 1층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서 간단한 행사를 가졌다. 태백시장을 대신해서 이인숙 행정복지국장이 우리들을 환영한다는 인사말씀이 있었고 한수창 회장은 광진구와 자매결연한 지방자치 단체의 복지시설을 춘추로 위문 격려한다는 우리들의 사명을 설명 해 주었다.
이때 필자가 일어나서 준비해온 책 [망향의 언덕]을 태백시장을 대신해서 이인숙 국장에게 전하고 또 1권은 이 복지시설의 봉금순 대표에게 전했다. 그리고 나서 필자가 말했다.
“쌀은 사람의 배를 부르게 하지만 책은 사람의 정신을 튼튼하게 만드는 재료이다. 그러니 책을 책꽂이에 꽂아만 놓지 말고 적의 활용해 달라.”고 당부를 했다.
이 시설의 설비와 운영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2007. 12. 21 준공한 이 시설은 1.858m2의 3층 건물로 70명 정원에 현재 54명이 입소해 있다고 한다. 이 건물내에 있는 주요시설은 요양실 24실 외에 의무실 물리치료실 면회실 식당 및 조리실이 있고 프로그램실 자원봉사실과 사무실이 있다고 한다. 이곳의 종사자는 39명이 있는데 사무국장 1명 사회복지사 2명 요양보호사 25명이 있으며 간호사 4명 영양사 1명 조리사 4명외에 위생원 1명과 계약의사 1명이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여러차례 태백산을 등반했다가 내려왔던 길가에 석탄박물관이 있는데 우리는 이 마을에 있는 잣두부 전골 전문식당으로 가서 막걸리에 두부 전골로 점심식사를 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식사를 마치고 시내에 있는 황부자 집터라는 우물에 가서 문화관광해설사 신종한씨를 만났다.
태백시의 태백은 태백산에서 따온 이름으로 그 뜻은 크게 밝다는 의미가 있다. 태백산은 '크게 밝은 뫼'이며 '한밝달' 또는 '한배달'로 부르는데 단군신화와도 연관이 있다.
태초에 하늘나라 하느님[환인:桓因]의 아들인 환웅천왕(桓雄天皇)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 를 열어 우리 민족의 터전을 잡았다. 그로 인하여 우리 민족은 하느님의 아들이 내려온 산을 하늘로 통하는 길로 봤고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와 같은 곳으로 믿게 되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 환웅천왕이 내려 온 그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지내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고 그 신비하고 성스러운 신산(神山)을 태백산이라 이름하여 영험스러운 성역(聖域)으로 숭배하여 온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태백산 밑에 형성된 장성읍과 황지읍이 석탄 수요의 증가로 인구가 늘자 삼척군에서 벗어나서 1981년 7월 1일 시로 승격되면서 합하게 되었는데 두 읍이 모두 태백산 밑에 있기에 태백시라 한 것이다.
황지연못(黃池)은 태백시 황지동에 있는 못이다. 낙동강의 발원지로도 알려져 있다. [동국여지승람] [척주지](陟州誌), [대동지지] 등 옛 문헌에도 낙동강의 발원지라고 밝혀 놓고 있다. 연못은 둘레가 100m인 상지(上池) 50m인 중지(中池) 30m인 하지(下池) 등 세 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있다. 상지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수굴이 있어 매일 약 5000 톤의 물이 용출되는데 황지 연못에서 용출된 물은 낙동강 700리의 시발점으로 황지천(黃池川)을 이루고 구문소(求門沼)를 거쳐 낙동강과 합류하여 경상북도 경상남도 및 부산광역시 을숙도에서 남해로 유입된다.
이 황지연못은 태백시 도심에 있어 황지연못을 중심으로 근린공원인 황지공원을 조성했다. 2017년 태백시는 총 84억(보상비 61억원 공원조성 13억 원 철거비 10억 원)의 사업비를 드려서 2016년 말 철거한 메르디앙 부지를 이용해 2507m²의 문화광장을 조성했다. 기존 6.900m²였던 황지 연못공원은 9730m²으로 늘어났다. 문화광장은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가 있어 여름에는 분수대 겨울에는 스케이트 광장으로 이용된다.
구문소(求門沼)는 태백시 동점동 황지천 하구에 있는 소이다. 황지천은 이곳에서 낙동강의 상류인 철암천과 합류한다. 조선 누층군 막골층의 카르스트 지형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전기 고생대의 지질을 볼 수 있다. 역사적 문헌을 살펴보면 [세종실록 지리지]에 '천천'(穿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백 구문소는 전기 고생대 지층 및 하식지형은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구문소 수중지형의 수심 및 서식어종 관찰 결과 고도는 600m 수심 18.2m 암반과 자갈로 퇴적된 바닥에 서식 어종은 메기 송어 꺽지 등이 관찰되었다.
구문소는 강물이 산을 뚫고 지나가며 큰 돌문을 만들고 그 아래 깊은 물웅덩이가 생겼다는 뜻의 '구무소'를 한자로 적은 것으로 '구무'는 옛말로 구멍이나 굴을 뜻하고 '소'는 한자로 물웅덩이를 뜻한다. 강이 산을 뚫고 흐른다고 해서 '뚜루내'라고도 한다. 구문소는 황지천과 철암천이 만나는 곳이다. 황지천과 철암천의 두 물길이 원래 지하에 있던 동굴과 만나 점차 동굴을 넓혔고 지상에도 동굴 모양의 지형을 만들었다. 구문소의 독특한 지형을 보면 5억 년 전 한반도 지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바다 환경에서 만들어진 석회암층에 나타난 다양한 퇴적 구조와 삼엽충 등 옛 생물의 화석이 잘 보존되어 있어 지질 과학 체험 현장으로서의 가치도 높다고 한다.
다음에 우리는 검용소에 가면서 길가에 있는 3수령을 지나게 되었다. 이곳은 높이 920m로 백두대간 낙동정맥의 분기점이며 삼강(三江:한강·낙동강·오십천)의 발원지이다. 이곳에 떨어지는 빗물이 북쪽으로 흘러 한강을 따라 황해로, 동쪽으로 흘러 오십천을 따라 동해로,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을 따라 남해로 흐르는 분수령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하나의 이름이 전하는데, 삼척 지방 백성들이 난리를 피해 이상향(理想鄕)으로 알려진 황지로 가기 위해 이곳을 넘었기 때문에 '피해 오는 고개'라는 뜻으로 피재라고도 한단다.
정상에는 전망대 구실을 하는 정자각과 조형물이 있고 주변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이곳을 통해 분수령목장을 지나 천의봉으로 등반할 수 있다. 주변에 검룡소 금대봉 용연동굴 매봉산 등 관광명소가 많이 있는 요지이다.
우리는 해설사의 안내로 검용소의 입구에 도착했다. 태백 검룡소는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에 있는 소이다. 이곳에서는 1997년부터 매년 태백시에서 한강 발원제를 지낸다고 한다.
이곳은 2010년 8월 18일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금대봉 기슭에 있는 제당굼샘과 고목나무샘 물골의 물구멍이다. 크고 밝은 산 태백(太白)은 백두대간의 중추이자 한반도의 젖줄인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분명 태백은 우리 영토의 모산(母山)이요. 한민족의 식량자원과 목을 축이는 시원지(始原池)라 이를 만하다. 솟아오르는 물이 하도 차고 맑아서 탐방객들이 엎드려 물을 마시기도 한다.
태백이 한반도의 영산임을 서해 바다의 이무기도 잘 알았던 모양이다. 용이 되어 승천하고픈 소망에 이 이무기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 태백의 중턱 금대봉 골까지 다다렀으나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산 중턱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곳이야말로 하늘로 오를 수 있는 최적지라 여겼던 모양이다.
520여 km에 이르는 한강의 발원지인 이곳에 신령스런 용이 산다하여 검룡소(儉龍沼)라 부르지만 이무기는 아직 용이 되지는 못한 것 같다. 한때 인근 주민들이 검룡소를 메워 버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는 승천할 때까지 조신해야 할 이무기가 인근 마을의 소를 잡아먹었기 때문이란다. 지금도 못 아래 암반에는 갈퀴에 긁힌 듯한 자국이 선연하다. 이는 이 못에 오르기 위해 또는 하늘에 오르기 위해 몸부림쳤던 이무기의 발톱 자국이라 한다.
검룡소의 이무기가 언제쯤 용이 되어 승천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무기가 소를 잡아먹은 일과 우리가 선진국 문턱에서 샴페인을 먼저 터뜨린 일과는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이 땅에 다시 한번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 우리가 명실공히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게 될 때 검룡소의 이무기도 이름 그대로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무기든 용이든 하루 수천 톤의 수량을 내뿜는다는 검룡소의 물은 시원지답게 맑고도 차다. 1년 내내 9도를 유지하기에 무더운 여름에도 물이 얼마나 찬지 손발을 담그고 1분을 견디기 어렵다고 한다. 오랜동안 차갑고 맑은 물을 그대로 내뿜어 그 맑음 그대로 서해로 흘러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우리 30여 명의 회원 중에 왕복 3km의 거리에 있는 검용소 현장에 가려는 자는 많지가 않았다. 필자는 여러번 가서 현장을 보았지만 여기까지 힘들게 왔기에 한번 도전해 보려고 나섰더니 내 건강이 염려가 되었던지 이명용 시우가 내 뒤를 따른다. 시원한 숲속이어서 산소 통속을 드나드는 듯 기분도 상쾌했으나 조금 오르는 길에서는 땀이 비즐 비즐 나오기 시작한다. 역시나 산은 산이었다. 가다가 앉아서 쉴만한 곳도 없기에 그냥 걸어 가는데 벌써 갔다가 되 돌아오는 회원도 있다.
예전에는 개천을 따라 그냥 올라갔는데 이번에 보니 나무로 사다리를 만들어서 직접 물을 접하지 못하고 건너다 보도록 만들어 놓았다. 저 바위가 물을 먹음었다가 뱉어내는 것인지 바위에서 매일 2.000톤 가량의 물이 솟아나고 있다고 하니 신비스러운 현장이다.. 저 바위가 어느 곳에 물을 모았다가 인심을 후하게 베푸는지를 모르겠다.
왕복 3km를 걸어서 다시 제자리에 돌아왔더니 노익장을 과시한다고 그러는지 박수소리가 요란하였다.
그러다 보니 지금시각이 4시인데 정암사행은 어려울 것 같아서 필자가 여러 회원들의 아쉬움을 덜어주려고 마이크를 잡고 정암사에 대하여 개략적인 설명을 해 주었다.
정암사는 대한 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자장(慈藏)율사가 636년(선덕여왕 5)에 당(唐)나라에 들어가 문수도량(文殊道場)인 산시성[山西省] 운제사(雲際寺)에서 21일 동안 치성을 올려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하고 석가의 신보(神寶)를 얻어 귀국한 후 전국 각지 5곳에 이를 나누어 모셨는데 그 중 한 곳이 이 정암사이었다고 한다. 신보는 석가의 정골사리(頂骨舍利)와 가사 염주 등인데 지금도 부처님의 진실사리가 사찰 뒤편 함백산에 남아 있는 국보 제332호인 수마노탑(水瑪瑙塔)에 봉안되어 있어 법당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절은 1713년(숙종 39) 중수했는데 낙뢰로 부서져 6년 뒤 중건하였고 최근에 새로 두세 차례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수마노탑은 1964년 9월 4일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20년 6월 25일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 높이 9m, 지대석 너비 3.04m, 상륜 높이 1.7m이다.
정암사 수마노탑은 적멸궁(寂滅宮) 뒤쪽에 있는 회녹색 석회석으로 길이 6.5∼5.8cm, 두께 5∼7cm의 크고 작은 모전석으로 쌓은 탑이다. 지대석은 모를 죽인 화강석으로 6단을 쌓았고 모전석으로 탑신을 받치기 위한 1단의 받침을 형성한 위에 너비 1.78m 높이 1.03m의 사각형 초층 옥신을 모전석으로 15단을 쌓아 만들었다.
옥신 남면 중앙에는 화강석으로 외부 너비 65cm, 높이 70.5cm, 내부 너비 41cm, 높이 59cm의 방광(方框)을 짜고 문비(門扉)는 1장의 판석을 세워 두 짝 문을 나타내었다. 상륜부는 화강석제의 노반(露盤)과 청동제의 상륜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맨 꼭대기 보륜(寶輪) 위에는 병형(甁形)이 얹히고 끝에 풍령(風鈴)이 달렸다. 거작은 아니지만 균형 있고 수법이 정미(精美)하다.
부처님을 대신하여 진신사리를 모신 국내 사찰을 살펴 보자면 설악산 봉정암이 있고 오대산 상원사의 중대 사자암과 영월 사자산 법흥사와 양산 통도사외에 지금 말한 태백 정암산 정암사가 있다.
이 사찰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73호인 정암사의 열목어서식지(熱目魚捿息地)가 있는데 필자가 3번째 갔을 때 비로소 이를 목격한 일이 있다.
필자가 마이크를 잡은 길에 황지에 있는 연못이 조성된 비화를 알려주었다.
옛날 황지 연못 터에 황동지(黃同知)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매우 인색한 노랭이였다. 어느 날 외양간에서 쇠똥을 쳐내고 있는데 남루한 차림의 한 노승이 찾아와 염불을 하며 시주를 청했다. 시주할 양식이 없다는 황부자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말없이 염불만 하고 서 있는 노승을 보자 황부자는 그만 심술이 나서 치우고 있던 쇠똥을 한 삽 퍼서 바랑에 담아 주었다. 노승이 말없이 돌아서는데 마침 부엌에서 아기를 업고 밥을 짓던 며느리 池 氏가 이 광경을 보고 달려와 노승을 붙잡고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며 쇠똥을 털어내고 시아버지 몰래 부엌에서 쌀을 한 바가지 시주하였다. 이때 며느리를 바라보던 노승은
“이 집의 운이 다하여 곧 큰 변고가 있을 터이니 살려거든 날 따라오시오.” 하였다. 며느리가 아이를 업은 채 노승의 뒤를 따라가는데 노승이 말하기를
“절대로 뒤를 돌아다 봐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송이재를 넘어 통리로 해서 도계읍 구사리 산등에 이르렀을 때 며느리는 자기 집 쪽에서 갑자기 뇌성벽력을 치며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나기에 놀라서 노승의 당부를 까막 잊고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때 황부자 집은 땅 밑으로 꺼져 내려가 큰 연못이 되어버렸고 황부자는 큰 이무기가 되어 연못 속에 살게 되었다. 뒤돌아보던 며느리는 돌이 되어 구사리 산등에 서 있는데 미륵바위라고 부르고 있는데 지금도 그 바위가 마치 아이를 등에 업은 듯이 보인다고 한다. 그 옆에는 개 바우라 하여 집에서 며느리 뒤를 따라가던 개가 함께 돌이 되어 있다. 그때 집터는 세 개의 연못으로 변했는데 제일 위쪽의 큰 연못이 황부자의 집터로 마당 늪이라 하고 중간이 방앗간 터로 방앗간 늪이라 하며 아래에 있는 작은 연못이 변소 자리로 통시 늪(통시는 이곳에서 변소를 일컫는 말임)이라 한다. 그래서 황부자의 성을 따서 黃池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차는 열심히 올라오다가 치악휴게소에 잠간 쉬는 틈에 우리 일행 중의 한 사람이 호떡 1개를 사서 필자에게 내밀며 히는 말이 자기 이름이 곽삼석인데 1970년대에 성동구 주택과에 근무 할 때에 나를 과장으로 모셨다면서 인사를 청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아니했다. 그러나 김광수 전회장의 누나인 김해숙은 나에게 인사를 하기에 기억이 생생했다.
우리 차는 초저녁인 20;00경에 구의3동에 도착하여 명가옥에 들려 막걸리로 피로를 풀고 설렁탕으로 가볍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뒤 헤어짐으로서 오늘의 행사는 잘 마무리가 되어 대미를 무사 무탈하게 장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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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길수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