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관한 시모음 59)
겨울 편지 /김윤진
찬 겨울 거리는
황량하고 건조하기만 하다
아침에 받아 본 당신의 편지
일렁이는 가슴 부여잡고
다만, 친구로만 남아 주길
풀잎같이 싱그러운 이슬 꽃이길
더듬어 본 당신의 심상을
청송 같은 당신을
부서진 수정의 눈으로
사랑의 발라드를 연주했죠
뜨거운 피가 가슴에서
초초한 숨결을
요정의 날개에 달아 주었죠
이제, 무한한 이야기는
요정에게 귀를 기울이기로 하죠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김민소
소중한 사람이여 겨울이
성숙한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쓸쓸했던 우리들의 뒤란에도
함박눈이 찾아와 수다를 떨겠지요
나목을 만들고 떠난 가을을
다시는 원망하지 말기로 해요
삶은 어제를 위해 있는것이 아니라
오늘때문에 존재하는 것
참을 수 없었던 이별도
겹겹이 쌓아 두었던 그리움도
벽난로에 모두 넣어
가슴 뭉클한 詩로 만들어요
하늘이 부르는 날이
언제가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지상에 남아있는 동안은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려야 하는 것
소중한 사람이여
이 겨울엔 인연의 길목마다
하얀 우체국이란 현판을 달기로 해요
그대에게 달려가는 눈꽃 편지가
행여, 길을 잃지 않도록
겨울잠 /김수잔
햇살 한 줌 인색하게
진회색, 아니 까맣게 덮고선
칼바람 불어 재끼더니
기어이 저질렀어
윙윙 울며 그 산고
밤새 치른 끝에
하얀 세상 낳았구나
지금껏 잘 버티면서
눈만 뜨면 조잘대던
뜰의 파란 잔디도
솜이불에 긴 겨울잠 들려는데
나도 그들처럼 하얗게 덮고
긴 밤을 곱게 잠들 수 있을까..?
내 마음 훔친
창밖 세상이 하얗게 웃는다.
겨울 /정태중
춥다
입동을 먹었다
보일러 밥통엔
희연 안개 피고
고드름 하나
연통끝에서 차갑게 핀다
마음엔
한 송이 꽃 하얗게 입춘 그립다
가을 정사(精思) /설백 최영희
사랑만치 뜨거운 것이 또 있으랴
거리를 나서 보면 안다
그 어지러운 심사
사랑은 언제나 또 한 아픔이다
한바탕 꿈이었나 보다
어지러운 거리를 보며
그 또한
사랑한 흔적이 아니던가
가을이
씁쓸히 웃고 있다.
겨울 상수리나무잎 /류인순
칼바람 부는 겨울 산
얼마를 더 버텨내야
편안하게 내려놓을 수 있을는지
바스락거리는 몸으로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려도
거센 눈보라 삭풍에 어깨 부르르 떨며
떨어질 줄 모르고 눈물겹도록 붙어 있다
푸른 시절 지나
황금빛 화려한 잔치 끝나고도
앙상한 가지에 간당간당 매달려
새봄 움틀 겨울눈 감싸 안고
초록빛 그리움 하나 키우며
오늘도 그렇게 바람막이로 서 있다.
술에 태워 보내는 겨울 /한천희
한 잔의 술로 흩어진 영혼은
가슴 깊이 잠들어 있는 너의
앙상한 기억을 깨운다
죽음으로 모든 것을 버린 광야
냉정한 이성에 얼어버린 대지를
한줄기 눈물로 깨우려는 미련
이것이 욕심이란 걸’
끝없이 넓어진 들판의 편안함이
비우고 또 비운 고독이다
잊을 수 없을 것 같던 그 가을
술로 기억을 취하게 하고
허공에 던져버린 너의 얼굴은
왜 자꾸 회오리바람 타고
돌아오는 건지
하늘이 내리는 하안 꿈들
알코올에 젖은 영혼에 쌓이면
넓은 들판을 파릇하게 채우려
새로운 사랑의 욕망을 섞은
술을 빚고
그 향기에 취해 기다림에 잠이 든다
겨울 이야기 /염인덕
툇마루에 앉아 있으면
잡이 일듯 말 듯한 별들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토방 위에 검정 고무신
밤사이 하얀 옷 갈아입고
반짝반짝 빛나 있는 모습들
아침부터 작은 방 안에서
우리 형제 시끌시끌 뒤엉켜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
.
철없던 그 시절이
지금도 가끔 생각이나
그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많다.
겨울 가뭄 /김동현
휑하니 강은 어깨부터
바짝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드디어, 화다닥
미쳐버린 화냥년처럼 엎어져
추한 치골마저 드러내놓고
널부러지고 말았다.
르완다 내전에서 총맞어 죽은
열 다섯 소녀의 주검이
통째로 나뒹굴던 앙상한 갈비뼈가
누런 진물로 녹아내리며
강심으로 솟아 올랐다.
이런 곡절 지닌 갈비뼈로
흙을 발라 빚어내면
새봄 꽃 필 적엔
강도 함께 소생할지 몰라.
겨울은 지나간다 /혜인 박근철
겨울이 제아무리 춥다 하고
밤이 길다 하지만
나는 믿네
동지 지나면
겨울이 서서히 간다는 것을
여러 해 살면서 내성이 생겨
견디기 힘든 한파라도
때가 되면 지나가니
곱이 곱이 넘다 보면
넘어가는 것을
그때 다시 논두렁에 개구리 뛰고
버들강아지 진달래
노래할 것이라
나는 믿네
지나간다. 분명 겨울은 지나간다.
하얀 겨울에 쓴 편지 /매화 문회숙
섬진강 건너 외딴집 굴뚝엔
돌이 엄마 아침밥 하시는지
파란 연기 모락모락 피어나고
강기슭 따라 산기슭 바위에
물새가 앉아 있는 나룻배에도
하얀 동화 나라같이 아름답다.
서울로 떠난 그 사람 생각에
숙이 가슴이 콩콩 뛰는 것은
함박눈 내리면 온다고 했는데
긴긴밤에 그리움 가득히 담아
꿈길로 편지 쓰는 하얀 겨울
창가엔 함박눈 조용히 쌓인다.
겨울날, 장승업의 활물도(活物圖) /황동규
세상살이 끓는 죽 먹는 것 같을 때면
속절없이 세잔의 정물 앞에 서곤 했으나,
금시 방바닥에 쏟아져 구르고 터지기 직전
식탁보에 몸 붙이고 있는 사과 오렌지 물병을 마주 보며
뜨거운 죽 눈감고 삼키곤 했으나,
아 일월(日月)의 먼지!
이제는 혀도 닳고
목구멍 데게 하던 죽도 설핏 식었으니
장승업의 빛 바랜 한지(韓紙) 활물도(活物圖) 구석에
슬며시 게로 기어 들어가
그냥 편히 놀고 있는 붓이랑 벼루랑 아직 살아 있는 조개랑
며칠씩 계속 싹 트고 있는 겨울 무랑
어렵지 않게 함께 뒹굴며 나머지 날을 날까.
내일인가 모렌가
하늘에 나무에 집에 바람 속에
생사람 못살게 굴 봄빛 터질 때
잽싸게 살고 싶어하는 것 다 밖으로 내보내고
게마저 나가고 싶어한다면 집게발 들려 내보내고
어느 날 문득 생각나 털이개로 먼지 털듯 목숨을 털면
목숨 한 장 붙어살던
몸의 진면목 비로소 나타날까.
겨울 가로수 /정태중
숭숭한 머리 긁적이다가 헐벗은 가로수를 본다
그도 다 떨구어진 몸이 가려운지
가끔 잔가지 흔들며 비듬 같은 각질
바람에 헹구는데, 정렬된 간격은 호퍼*의 슬픔 같다
슬프기로 말하자면 이제 갓 옮겨온 가로수에
지지대로 쓰인 사목에 비교할까마는
살아있어도 죽음 같은 도심의 겨울 가로수가
휑한 마음에 뿌리를 내린다
만약에, 아주 만약의 일인데
늦가을 무렵 화려한 도시의 길 떠나
그들만이 사는 야산에 옮겨졌더라면
겨울바람 앞에서도 잎 내어 주지 않는
얽히고설킨 잡목처럼 마른잎 남겼을 테지
오늘, 유난히 추운 날
산에 나무 여럿, 서로 부둥켜안거나 얽히어서
마른 잎 바싹바싹 등 긁어 주는데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나도 등 가려우면
거기로 가서 겨울 가로수가 될 수 있을까.
*호퍼: 에드워드 호퍼
슬픔을 그리는 화가지만 슬픈 그림속에 따뜻함이 있다
찾아온 겨울 /매향 도현영
찬바람에 옷깃 여미는 밤
따뜻한 품속 비집고 들어와
공허한 마음을 애무한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향기는
계절의 뒤안길에 숨은 듯
벌판의 빈 그림자만 무성한
가을 끝자락
향긋한 내음, 영근 열매도
자연의 섭리 따라
한편의 삶에 위안 주며
흐르는 세월의 허무를 달랜다
천사의 해 맑은 모습으로
떠나감을 서러워 말자
또 다른 행복의 계절은
내 인생 언저리에 있는 것을
마음 흔들리지 말자
활활 타오른 불꽃 같은 단풍
마음속의 만추를
아름답게 스케치하여
기억으로 남겨두자
겨울,
시린 가슴 녹이며 구들장에 누워
훈훈한 정담 나누는
인생을 안겨줄지 모르는
겨울 산사 /김시천
눈 온다
누가 또 한 소식 하는구나
아무도 그 위에 발자국 남기지 마라
애썼다
그만 들어가 쉬어라
아니 너희들 말고
저기, 저 울 너머 산밑에
마른풀들 말이다
겨울의 일상 /박목월
가는 눈발이 무시로 내리는 지방.
사람들은 가난했다.
빈 주머니를 덜렁거리며
생활주변을 맴도는 그들의
허전한 발자국.
마른 풀 한줌의 일상.
밤이면
얼음조각에 부서지는 별빛을 밟고
삐걱거리는 겨울의 물지게.
다만
마을어구에
고목 한 그루
언 땅에 뿌리를 펴고
그 참음의 상징
그 의지의 화신.
사람들은 가난했다.
모가 날카롭게 빛나는 눈발이 무시로 내리는
땅 위에
가난한 탓으로 처절하게 아름다운
그들의 겨울.
그들의 신앙.
겨울이 오는데 /문장우
오늘 화랑공원에서
마음의 문을 열고보니 늦은 가을이 떠나고
차가운 겨울 손님이 찾아온다
새벽 짙은 안개속 소리없는 보슬비 내리고
아직 잠들지 못한 가로등 하나
불 밝히고 있는데
가슴 저리던 기억들은
이제 소리없이 잠들고
간 밤의 혼란한 꿈을 지우기 위한
부슬비 가만히 내리고 있어
내일의 행복한 꿈을 안고
얼마나 마음을 부수었던가
그리웠던 날들은 이제 떠나간다
다시 오지 않는다
생각의 잔가지를 밀치며
겨울로 다가선다
안개속 화랑공원에 비에 젖은 단풍나무
이제 한 그루,한 그루
호젓이 꽃 피는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
젖어든다 겨울향기 속으로 /최갑연
젖어든다 내 가슴이
촉촉한 물기를 닦아낸
마른 잎에 언저리에서
설렘이 꽃으로 피어난다
언제나 그랬듯이
바라보는 것으로 좋고
느낄 수 있음에 좋은
당신의 깊은 향기가 좋다
젖어든다 내 심장에
온몸에 불길을 뻗어내고
황홀한 삶의 언덕에
당신과 나의 사랑이 젖어든다
겨울 별자리 /이현서
수억 광년 연대기를 건너온
부드러운 요람의 평화가 중심을 잡아요
눈송이 사각거리는 겨울밤
구유에 누인 아기예수처럼
신생아실 아기바구니에서 잠을 자는 아기들
부드러운 물의 자장을 따라 흘러왔을 시간들을
태엽을 풀 듯 풀고 있어요
어느 날 신이 한 줄기 빛을 뽑아 순한 영혼을 불어 넣었어요
천천히 페활량이 부풀어 오르고
먼 우주 발원지에서 채집된
빛의 알갱이들이 첫 보폭을 디뎌요
천사의 지문이 묻은 인중 아래 분홍빛 입술이 오물거려요
찰랑 고요를 깨는 파문이 기원을 더듬어요
구불구불한 원시의 숲을 지나
빛의 따뜻한 손이 자음과 모음을 새겨넣어요
한꺼번에 쏟아지는 물비린내
순한 영혼들이 아가미를 뻐금거리며 겨울 별자리로 박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