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문제 하느님 안에서 단일성 혹은 복수성에 속하는 것들에 대하여
제1절 : 하느님 안에 삼일성 즉 삼위일체가 존재하는가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 안에서의 삼일성 즉 삼위일체는 위격들의 어떤 한정된 수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 위격의 복수성이 주어지는 것처럼 삼일성 혹은 삼위일체의 명칭이 사용되어야 한다.
그것은 복수성이 비한정적으로 표시한 바로, 그것을 삼일성 혹은 삼위일체는 한정적으로 표시하기 때문이다
1.사실 하느님 안에서의 모든 명칭은 실체를 표시하든지 관계를 표시한다.
그런데 삼일성의 명칭은 실체를 표시하지 않는다.
[만일 실체를 표시한다면] 그것은 각 위격들에 빈술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관계를 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어떤 다른 것에 대한, 즉 대타적 명칭으로 지칭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일성 즉 삼위일체의 명칭은 하느님 안에서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삼일성의 명칭이 어원적으로 마치 셋의[셋이] 하나인 것처럼 표현되는 데 의거해서는 세 위격의 하나의 본질을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말의 고유성 즉 고유한 의미에 따라서는 하나의 본질의 위격들의 수를 표시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성부가 삼일성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성부가 세 위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삼일성의 명칭]은 위격들의 관계 자체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상호 관계되는 위격들의 수를 표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명칭으로서는 타자와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그 밖에도 삼일성이라는 명칭은 다수를 표시하기 때문에 집합적 명사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명칭은 하느님께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집합적 명사에 함죽되는 일성이 최소한의 일성인 데 반해 하느님 안에서의 일성은 최고의 一性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일성이라는 명칭은 하느님께 적합하지 않다.
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집합적 명사는 두 가지를 내포한다.
즉 자주체 혹은 주체의 복수성과 어떤 단일성 즉 어떤 질서의 단일성을 내포한다.
예컨대 국민은 어떤 질서 하에 포함된 사람들의 다수이다.
그러므로, 첫째에 관한 한 삼일성이란 명칭은 집합적 명사들과 일치한다.
그러나 둘째에 관한 한 그것은 다르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삼일성 안에는 질서의 단일성 만이 있을 뿐 아니라 이와 더불어 본질의 단일성도 있기 때문이다.
제2절 : 성자는 성부께 대해 타자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를 위한 신앙론」이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질은 하나다.
이 본질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기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위격적으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다른 이, 즉 타자다”
라고 한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히에로니무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무질서하게 한 말들로 인해 이단에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해 말할 때 신중하게 그리고 절도 있게 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론」 제1권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보다 더 오류를 범할 위험한 곳도 없고 이보다 더 어떤 것을 탐구하는 데 있어 힘든 곳도 없으며 이보다 더 어떤 것을 결실 풍부하게 발견하는 곳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 말할 때 두 가지 대립되는 오류를 경계해야 하며 이 양자 사이에 중용의 길을 가야 한다.
그 두 가지 오류란, 위격들의 셋 즉 위격들의 三性과 더불어 실체들의 셋 즉 실체들의 三性을 주장한 아리우스의 오류와, 본질의 하나 즉 본질의 一性과 더불어 위격의 하나 즉 위격의 一性을 주장한 사벨리우스의 오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리우스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 하느님 안에서 차별과 차이의 명칭을 피하여야 한다.
그것은 본질의 一性이 상실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우리는 관계적인 대당성 때문에 구별의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권위 있는 저서에 위격들의 차별이나 차이[라는 표현이] 발견될지라도 거기서 말하는 차별이나 차이는 구별의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하느님의 본질의 단순성이 제거되지 않기 위해 분리의 명칭과 전체를 부분으로 쪼개는 것으로서의 구분의 명칭도 피하여야 한다.
또한 균등성이 제거되지 않기 위해 같지 않다는 것, 즉 不同(같지 않음)의 명칭도 피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유사성이 제거되지 않기 위해 전혀 다른 것의 명칭과 불일치의 명칭도 피하여야 한다.
사실 암브로시우스는 그의 ‘신앙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서로 다른 것, 즉 불일치하는 것은 없고 거기에는 다만 하나의 신성이 있을 뿐이다."
또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힐라리우스에 의해서도 "하느님 안에는 이방적인 것, 전혀 다른 어떤 것도, 분리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한편 사벨리우스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 단독[의 명칭]을 피하여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 본질의 공통가능성이 제거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힐라리우스는 「삼위일체론」 제7권에서 "성부와 성자를 단독적인 하느님으로 하는 것은 모독이다”라고 한다.
우리는 또한 단일자의 명칭도 피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힐라리우스는 같은 책에서 "단독자이며 단일자라는 사고는 하느님에서 배제된다"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일적 혹은 독생성자라고는 한다.
그것은 하느님께는 복수의 아들들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단일의 즉 단독의 하느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성이 복수[의 위격]에 공통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혼돈한 자의 명칭도 피한다.
그것은 위격 사이에서 본성의 질서가 제거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암브로시우스는 「신앙론」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하나인 것은 혼돈된 것이 아니고, 차이가 없는 것은 다양할 수 없다"라고 한다.
또한 고독자의 명칭도 피하여야 한다.
그것은 세 위격의 반려(伴侶 - 짝이 되는 동무)성이 제거되지 않기 위해서다.
사실 힐라리우스는 「삼위일체론」제4권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고독한 자라고도, 차별적인 자라고도 고백하면 안 된다"라고 한다.
남성으로 해석된 타자라는 명칭은 자주체 혹은 주체의 구별만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자는 성부께 대한 타자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그 이유는 성자는 성부께 대한 다른 위격이며 다른 자주체인 것처럼, 그것은 또한 하느님의 본성을 갖는 다른 주체이기 때문이다.
1.타자란 실체의 차이성의 관계사다.
그러므로 만일 성자가 성부께 대해 타자라면 성자는 성부와 차별되는 존재로 생각된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론」 제7권 에서 말하는 바에 반대된다.
즉 “우리가 세 위격을 말할 때 [세 위격의] 차별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데 반대된다.
그러므로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즉 타자는 일종의 개별적 명사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주체의 측면에서 이해된다.
따라서 타자이기 위해서는 hypostasis 혹은 Persona라는 의미로 실체의 구별이 있으면 충분하다.
그런데 차별은 본질로서의 실체의 구별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자는 성부께 대한 타자 일지라도 차별되는 자라고 할 수는 없다
2.그 밖에도 서로 다른 것들은 그 어떤 것들이든 어떤 모양으로 서로 차이가 난다.
즉 상위(相違 - 서로 달라서 어긋남)하다.
그러므로 성자가 성부께 대해 타자라면, 성자는 성부와 서로 다른 자라는 귀결이 된다.
이것은 암브로시우스의 「신앙론』 제1권에 위배된다.
즉 암브로시우스는 여기서 "성부와 성자는 신성으로 하나다. 거기에는 실체의 차이도 없고 또 어떠한 차별성도 없다"라고 한다.
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즉 차이 혹은 相違는 형상의 구별을 내포한다.
하느님 안에 하나의 형상만이 있다.
그것은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제2장 제6절에서 ‘그는 하느님의 형상이었기 때문에'라고 하는 데서도 명백한 바다.
그러므로 차이 나는 자 혹은 相違를 한 자의 명칭은 인용된 권위에 의해서도 명백한 바와 같이 고유한 의미로 하느님께 적합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다마스케누스가 하느님의 위격들 사이에 차이의 명칭을 쓰는 것은 관계적인 고유성이 형상의 양태로 표시되는 데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자주체들은 실체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특정한 고유성에 의해 서로 다르다.
여기서 차이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구별의 의미로 해석된다.
제3절 : ‘홀로’, ‘오직…만’, ‘유독’ 또는 ‘유일한’이라는 배타사가 하느님 안에서 본질적 명사에 부과될 수 있는가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Solus(홀로..)’라는 말은 주체 자체의 서술사(즉 속성)으로서 이해될 수도 있고 공서술사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데 서술사는 어떤 주체에 대해 표시된 사물을 무조건적으로 적용하는 표현이다.
이런 것은 예컨대 흰 사람이라고 할 때 사람에 대한 흰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홀로 만이’란 표현이 이런 의미로 이해된다면 이런 말은 하느님에 있어서 어떤 명사와도 절대로 결부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결부되는 명사들에 고독성을 부과할 것이고 이런 경우 하느님이 고독한 존재라는 귀결이 될 것이며 이런 것은 앞서 말한 것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모든 것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의 경우와 같이 공서술사는 주어에 대한 설명어(술어)의 질서를 내포하는 말이다.
그리고 ‘홀로 ···만이'란 말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이런 solus란 말이 다른 모든 주체를 술어의 동참에서 배제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홀로 소크라테스만이 쓰고 있다'라고 할 때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고독하다고 이해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같이 많은 사람이 있지만 쓰는 데 있어서는 그와 같이 하고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양태로라면 '홀로'라는 말은 하느님 이외의 모든 것을 술어의 하느님과의 동참에서 배제한다는 한에서 하느님 안에서의 본질적인 어떤 명사에 결부되는 데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는다.
예컨대 하느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에 '홀로 하느님만이 영원하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이다.
제4절 : 배타사가 위격적 명사에 부과될 수 있는가
'홀로 성부만이 하느님이다'라는 명제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즉 '성부는 하느님이다'라는 명제와 ‘성부께 대한 어떠한 타자도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명제다.
그런데 둘째 것은 거짓이다.
그 이유는 성자는 성부께 대해 타자이며 또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홀로 성부만이 하느님이다'라는 명제도 거짓이다.
이와 비슷한 다른 경우들에도 같은 이치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홀로 성부만이 하느님이다'라고 할 때 이 명제는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즉 ‘홀로'가 성부께 대해 고독을 주는 것이라면 (자체) 서술적으로 [즉 속성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그런 명제는 거짓이다.
그런데 공서술적으로 이해된다면 그런 명제는 또다시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타자들을, 주체의 형상을 같이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배제한다면 그런 명제는 참이다.
이 경우 '홀로 성부만이 하느님이다'는 '그와 더불어 다른 어떤 자도 성부가 아닌 그런 자는 하느님이다'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론」제6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해석에 따른 것이다.
즉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홀로 성부만이라고 하는 것은 성부가 성자와 성령에게서 분리되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더불어 성부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는 관용적 화법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홀로 그만이 성부라고 불리는 이는 하느님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어떤 함축이 이해되는 경우는 별도인 것이다.
그러나 본래적 의미로는 [이 '홀로'는] 다른 것들을 술어의 동참에서 배제한다.
이 경우 남성으로서의 타자를 배제한다면 이 명제는 거짓이다.
그러나 다만 중성으로서의 타물 즉 다른 어떤 것만을 배제한다면 그 명제는 참이다.
그 이유는 성자는 성부께 대해 타자 즉 다른 이고, 타물 즉 다른 어떤 것은 아니며 성령의 경우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로'란 말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래적으로는 주어(주체)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타물보다는 오히려 타자를 배제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런 표현을 마구 일반화시키면 안 된다.
그러나 권위 있는 서책에서 이런 표현이 발견될 때에는 경건하게 그런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제32문제 하느님의 위격들의 인식에 대하여
제1절 : 하느님의 위격들의 삼위성, 삼위일체성이 자연적 이성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가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자연적 이성에 의해 하느님의 위격들의 삼위성의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자연적 이성에 의해 하느님의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피조물에서부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것은 위에서 제시된 바다.
그런데 피조물이 하느님의 인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은 결과가 원인으로 이끌어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적 이성에 의해 하느님께 대해 인식될 수 있는 것은 다만 하느님이 만유의 근원인 데 따라 하느님께 필연적으로 적합한 사항 뿐이다.
우리는 이 점을 위에서 신론의 기초로 삼았다.
하느님 창조능력은 전삼위에게 공통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느님의 본질의 일성에 속하는 것이고 위격들의 구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이성에 의해 하느님께,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본질의 일성에 관한 것들이고 위격들의 구별에 관한 것들은 아니다.
그런데 위격들의 삼위성을 자연적 이성으로 증명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신앙을 두 가지 모양으로 손상시킨다.
첫째로는 신앙 자체의 품위에 관한 것인데, 신앙의 품위는 신앙이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볼 수 없는 사물들과 관련하는 것이라는 데 성립된다.
그러므로 사도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 제11장 제1절에서 믿음은 '나타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또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제2장 제6절에서 '우리는 완전한 자들에게만 지혜를 말하는데, 이는 현세의 지혜나 혹은 이 현세 통치자들의 지혜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비롭고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한다'라고 한다.
둘째로는 다른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하여 가는 유익성에 관한 것이다.
사실 어떤 사람이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설득력 없는 논거들을 도입할 때는 불신자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즉 그들은 우리가 그런 논거들에 근거하여, 그런 논거들 때문에 믿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에 속하는 것들은 그것들을 증명하려고 시도되어야 할 것들이 아니다.
권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권위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별도다.
그리고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앙을 선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옹호하는 것으로 족하다.
따라서 디오니시우스는 신명론 제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누가 말씀들에 (즉 거룩한 말씀들에) 전적으로 반대한다면 그는 우리의 철학에서 멀리 있다. 그러나 그가 말씀들에, 즉 거룩한 말씀들에 유의한다면 그도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규범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위격들의 인식은 우리에게 두 가지 양태로 필요하였다.
그 한 양태로는 사물들의 창조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즉 ‘하느님은 만물을 자기의 말씀으로 만들었다'고 함으로써, 하느님이 사물들을 그 본성의 필연성에서 산출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오류가 배제된다.
또 하느님 안에는 사랑의 발출이 있다고 함으로써, 하느님이 피조물을 산출한 것은 어떤 필요 때문에 한 것도 아니고 어떤 다른 외적 원인 때문에 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자기의 선성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이 제시된다.
그러므로 모세도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창세 1,1)’라고 한 다음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창세 1,3) 하셨다고 첨가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빛을 좋게 보시었다'(창세 1,4)라고 하였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승인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다른 작업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창세 1,6 이하)[고 기록되었다].
또 다른 양태는 더 중요한 것인데 인류의 구원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한 것이다.
즉 인류의 구원은 육화된 성자와 성령의 은사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제2절 : 우리가 하느님 안에 인식된 표징들을 조정(措定 - 존재를 긍정하거나 내용을 명백히 규정하는 일)해야 하는가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프래포시티누스는 위격들의 단순성에 유의하여 하느님 안에는 고유성들과 인식적 표징들을 조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즉 이런 것들이 발견되는 데서는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을 위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나는 친절한 당신께 호소한다'라는 의미로 '나는 당신의 친절에 호소한다'라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 안에서도 부성이 말해질 때 하느님 아버지가 이해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하느님의 경우 우리가 구체적인 명사들과 추상적인 명사들을 같이 사용할지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단순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데 따라 명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지성은 하느님의 단순성이 그 자체로서 고찰되어야 하는 데 따라서는 하느님의 단순성 자체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 지성은 자기의 양태를 따라 하느님께 관한 것들을 파악하고 명명한다.
다시 말해 우리 지성은 그 인식을 얻는 감각적인 것들 안에 발견되는 한에서 그런 것들을 파악하고 명명한다.
감각적인 것들에 있어서 우리는 단순한 형상들을 표시하기 위하여 추상적 명사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자립하는 사물들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명사들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께 관한 것들을 표시하기 위해서도 그 단순성을 위해서는 추상적 명사들로 표시하고 그 자존성과 완결성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명사들을 사용한다.
그런데 추상적으로 표시하는 명칭들과 구체적으로 표시하는 명칭들은, 예컨대 신성과 하느님을 혹은 지혜와 지자(智者 - 슬기로운 자)를 말하는 경우와 같이 다만 본질적인 명칭들만을 표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부성과 성부를 말하는 것과 같이 위격적인 것들도 표시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그럴 수밖에 없게 하는 요인은 주로 두 가지다.
첫째로는 이단자들의 항변이다.
즉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인 하느님이며 세 위격들이라고 고백하는 경우, ‘무엇에 의해 그들이 하나인 하느님인가?’ 또 '무엇에 의해 그들은 세 위격들인가?'라고 질문하는 자들에게 '그들은 본질에 의해 혹은 신성으로 하나다'라고 대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것들로 말미암아 위격들이 구별된다고 대답할 수 있는 어떤 추상적 명사들이 있어야 했다.
어떤 명사들은 부성 혹은 자성과 같이 추상적으로 표시되는 고유성들이거나 인식적 표징들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본질은 ‘무엇'으로 표시되고 위격은 ‘누구'로 표시되며 고유성은 '무엇으로' 로 표시된다.
둘째로는 하느님 안에서 하나의 위격이 두 위격들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 발견된다.
예컨대 성부의 위격은 성자의 위격과 성령의 위격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관계로서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자와 성령도 하나의 같은 관계로 성부와 관계될 것이다.
또 이런 경우 관계만이 하느님 안에서 삼위를 성립시킬 것이 어서 성자와 성령은 두 위격이 아니라는 귀결이 될 것이겠다.
또한 프래포시티누스가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은 하나의 양태로 피조물들과 관계하지만 피조물들은 다양한 양태로 하느님과 관계되는 것처럼 성부는 하나의 관계로 성자와 성령께 관계되지만 이 두 위격은 두 관계로 성부께 관계된다고 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관계적인 것의 종적인 근거는 다른 어떤 것과 관계를 갖는 데 성립되기 때문에 두 관계 가 있는 경우 대립적인 편에서는 하나의 관계만이 그 두 관계에 상응 한다면 이 두 관계는 종적으로 서로 다른 관계들이 아니라고 필연적으로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으로서의 관계와 아버지로서의 관계는 다른 종류의 관계이어야 한다.
이것은 그것에 대응하는 아들과 종의 차이성에 근거한다.
그런데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하나의 같은 관계로 하느님과 관계되지만 이와는 달리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같은 성격의 관계들로 성부와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자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께는 피조물에 대한 실재적 관계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사고 상의 관계들을 다수화시키는 것은 부적절한 것이 아니다.
이와는 달리 성부 안에는 성자와 성령께 관련되는 실재적인 관계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성자와 성령이 그것들로 인해 성부와 관련되는 두 관계에 상응하게 성부 안에도 성부가 그것들로 말미암아 성자와 성령과 관련되는 두 관계가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부의 위격은 하나뿐이기 때문에 이런 관계들은 추상적으로 따로따로 표시될 필요가 있었으며 이런 것들이 고유성들과 인식적 표징들로 불린다.
하느님 안에서 인식적 표징들은 사물로서가 아니라 그것들로 말미암아 위격들이 인식되는 어떤 개념들로 표시된다.
인식적 표징들이나 관계들 자체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 안에 실재적으로 존재할지라도.
그러므로 본질적 혹은 위격적 어떤 작용과의 질서를 갖는 것들은 인식적 표징들에 대해 말해질 수 없다.
이런 것은 인식적 표징들의 표시의 방법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성이 낳는다'라든가 ‘창조한다'라고 할 수 없으며, 또 '부성은 지자다'라든가 ‘부성은 인식자다'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작용과의 질서를 갖지 않으며 하느님으로부터 피조물의 조건들을 제거하는 본질적인 것들은 인식적 표징들에 대해 서술될 수 있다.
예컨대 '부성은 영원하다' 라든가 '무량하다' 등 이와 비슷한 경우는 어떤 것이든 다 서술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위격적인 실체사들과 본질적인 실체사들은 실제로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인식적 표징들에 대해 서술될 수 있다.
즉 ‘부성은 하느님이다' 또는 ‘부성은 성부다'라고 말할 수 있다.
제3절 : 인식적 표징은 다섯인가
더 많은 인식적 표징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성부는 어떤 자로부터도 유래되지 않기 때문에 무기원성이라고 하는 인식적 표징이 획득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으로부터 다른 위격이 유래되지 않으며 따라서 제6의 인식적 표징을 획득해 야 하는 것이 되겠다.
그 밖에도 마치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발출한다는 것이 성부와 성자에게 공통적인 것처럼 성자와 성령이 성부로부터 발출한다는 것도 성자와 성령에게 공통적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에게 공통된 하나의 인식적 표징이 주어지는 것처럼 성자와 성령께도 공통된 하나의 인식적 표징이 주어져야 한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인식적 표징은 하느님의 위격을 인식하는 고유한 근거가 되는 그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위격들은 그 기원에 따라 다수화된다.
그리고 기원에 속한다는 것은 '타자가 그것으로부터 유래되는 그런 자'가 있고 또 '타자로부터 유래되는 자'가 있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양태를 따라 위격이 식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부의 위격은 타자로부터 유래된다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떠한 자로부터도 유래되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식별될 수 있다.
이렇게 이런 측면에서 성부의 인식적 표징은 '무기원성'이다.
그러나 어떤 자가 성부로부터 유래한다는 한에서는 성부는 두 가지 모양으로 식별된다.
즉 성자가 성부로부터 유래한다는 한에서는 부성의 인식적 표징으로 식별되고 성령이 성부로부터 유래한다는 한에서는 공통적인 영기발의 인식적 표징으로 식별된다.
성자는 타자로부터 출생함으로써 유래된다는 것을 통해 식별된다.
이렇게 성자는 '자성을 통해' 식별된다.
또한 성자는 타자 즉 성령이 성자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통해서 식별될 수 있다.
이때 성자는 성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통적 영기발로 식별된다.
성령은 타자로부터 혹은 타자들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에 의해 식별될 수 있다.
이때 그것은 발출로써 식별된다.
그러나 성령은 타자가 그(성령)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에 의해 식별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의 어느 위격도 성령으로부터 발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는 다섯 인식적 표징이 있는 것이다.
즉 무기원성, 부성, 자성, 공통적 영기발 그리고 '발생'인 것이다.
이것들 중 넷만이 '관계'다.
그것은 무기원성은 환원에 의해서가 아니면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에 말하게 되겠다.
또한 넷만이 '고유성'이다.
그것은 공통적 영기발은 두 위격에 공통적이어서 고유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세 인식적 표징만이 위격적이다.
즉 세 인식적 표징이 위격들을 구성한다.
다시 말해 ‘부성'과 '자성'과 ‘발생'이 위격들을 구성한다.
그것은 무기원성과 '공통적 영기발'은 '위격들의 인식적 표징들'이라고 불리지만 '위격적 인식 표징'이라고는 불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에 더 명백히 되겠다.
제4절 : 인식적 표징들에 대해 상반되는 견해를 취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인식적 표징들에 대한 신앙조항들이 없다.
그러므로 인식적 표징들에 대해 이것이나 저것의 다른 견해들을 취하는 것이 허용된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어떤 것이 신앙조항에 속한다는 데는 두 가지 양태가 있다.
그 한 가지 양태는 직접적인데 '하느님은 삼위이고 일체다’라든가 '하느님의 아들이 육화되었다' 등등과 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요한 것들로 전달된 것들의 경우다.
이런 것들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이단을 초래하는 것이다.
특히 완고하게 그런 설을 고집한다면 그런 것이다.
또 하나의 양태는 간접적으로 신앙에 속하는 것인데, 어떤 것을 결과적으로 신앙에 상반되게 하 는 것들이 신앙에 속하는 경우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사무엘은 엘나의 아들이 아니었다'라고 한다면 그런 것이다.
그것은 이런 설에서 성경은 거짓이라는 귀결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에 관해 그것에서 신앙에 상반되는 어떤 것이 귀결된다는 것이 고려되거나 결 정되기 전에는 이단의 위험 없이 어떤 잘못된 견해를 가질 수 있다.
특히 완고하게 그런 설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그렇다.
그러나 그것에서 신앙에 상반되는 어떤 것이 귀결된다는 것이 명백하게 된 후에도 그리고 특히 교회에 의해 결정된 경우에도 이런 오류를 범한다면 이단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전에는 이단으로 여겨지지 않던 것들이 지금은 이단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많다.
그것은 지금 그런 것들에서 어떤 귀결들이 따라오는지가 더 명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인식적 표징들에 관해 신앙에 상반되는 어떤 것을 주장할 의도는 없이 상반된 견해를 갖는 어떤 사람들은 이단의 위험 없이 그런 견해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신앙에 상반되는 어떤 것이 귀결될 것을 고려에 넣으면서(알면서)도 인식적 표징들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갖는다면 그는 이단에 떨어지는 것이 되겠다.
그리고 이런 것을 통해 이론들에 대한 해답도 명백해진다.
제33문제 성부의 위격에 대하여
제1절 : 근원이라는 것이 성부께 적합한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 제4권에서 "성부는 천주성 전체의 근원이다"라고 한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근원이란 명칭이 표시하는 것은 어떤 것이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것 이외의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것이 그것으로부터 어떤 모양으로든 발출하여 오는 그것은 다 근원이라고 한다.
또 그 역도 眞이다.
그런데 성부는 그로부터 타자가 발출하여 오는 분이기 때문에 성부는 근원이라는 것이 귀결된다.
제2절 : ‘성부’라는 명칭은 하느님 위격의 고유한 양태의 명칭인가
「시편」 제88편 제27절에서는 '그는 나를 당신은 내 아버지입니다 라고 부르겠다'라고 한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각 위격의 고유한 명칭은 그 위격이 다른 모든 위격에서, 그것으로 인해 구별되는 것을 표시하는 그런 명칭이다.
예컨대 사람의 개념에는 혼과 육체가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의 개념에는 이 혼과 이 육체가 속한다.
이것은 「형이상학」 제7권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이런 것들[이 혼과 이 육체]로 인해 이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서 구별된다.
그런데 성부의 위격이 다른 모든 위격에서 구별되는 것은 부성이다.
따라서 부성을 표시하는 성부란 명칭은 성부의 위격에 고유한 명칭이다.
제3절 : 하느님에 있어서 성부라는 명칭은 그것이 위격적으로 취해지는 데 근거하여 더 먼저(우선적으로) 말해지는가
영원한 것은 시간적인 것에 선행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성자의 성부인데 피조물의 아버지인 것은 시간에서다.
따라서 하느님에 있어서의 부성은 피조물과의 관련에서보다는 성자와의 관련에서 더 먼저라는 양태로 말해진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명칭의 개념 전부가 그 안에 완전하게 보존되는 것에 대해 서술되는 명칭은, 명칭의 개념이 어떤 점에서 그 안에 보존되는 것에 대해 서술되는 명칭보다 더 먼저 즉 선행적으로라고 말해진다.
명칭이 후자에 대해 말해지는 것은 마치 명칭이 그 안에 완전하게 보존되는 것(전자)과의 유사성에 의해 말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모든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것에서 취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자라는 명칭은 사자의 개념 전체가 그 안에 보존되어 있어 사자라고 고유하게 물리는 동물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과감이나 용기 등과 같이 사자의 개념에 속하는 어떤 부분이 그 안에서 발견되는 어떤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경우보다도 더 먼저라고 불린다.
즉 후자에 대해 그것이 말해지는 것은 전자와의 유사성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에서 명백해진 바와 같이 부성과 자성의 완전한 개념이 성부인 하느님 안과 성자인 하느님 안에 발견된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의 본성과 영광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조물에 있어서는 자성이 하느님과의 관련에서 발견되는 것 이지만 완전한 개념(의미)에 의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본성이 같은 하나가 아니고 오히려 어떤 유사성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유사성은 아들인 것, 자성의 참된 의미에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더욱 완전한 것이 된다.
즉 하느님이 어떤 피조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경우 그것은 다만 [하느님의] 흔적의 유사성 때문이다.
예컨대 비이성적인 피조물의 경우가 그렇다.
여기 대해 「욥기」 제38장 제28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가 비의 아버지인가, 또 누가 이슬의 방울들을 낳았는가?'
또 어떤 피조물의, 즉 이성적 피조물의 [아버지라고 하는] 경우는 그것은 모상의 유사성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신명기」 제32장 제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너를 소유하고 만들고 창조하신 네 아버지가 아니시냐?'
또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은총의 유사성에 의해 아버지인 것이다.
즉 그들은 그 받은 은총의 선물에 의해 영원한 영광의 상속으로 정해졌다는 데 근거하여 입양사자라고 불리는 경우다.
여기 대해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제8장 제16-17절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친히 우리의 영에게 증거하신다. 그런데 자녀라면 또한 상속자다.’
또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벌써 영광의 상속을 차지하는 한에서 영광의 유사성에 근거해 말해지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로마 신자들 에게 보낸 서간 제5장 제2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들의 영광의 희망 안에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유로 인해 다음과 같은 것이 명백해진다.
즉 하느님 안에서 위격의 위격과 관련되는 데 근거하여 [성립되는] 부성이 하느님의 피조물과 관련되는 데 근거하여 [성립되는] 부성보다 더 먼저 말해지는 것이 명백하다.
제4절 : 낳아지지 않는 것(낳아지지 않은 존재)이 성부께 고유한 것인가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피조물계에서 제1근원과 제2근원이 발견되는 것과 같이 더 선• 후가 없는 하느님의 위격들에서도 '근원에서 오지 않는 근원' 즉 성부와, '근원으로부터 오는 근원' 즉 성자가 발견된다.
그런데 피조물계에서는 어떤 제1근원이 두 가지 모양으로 식별된다.
그 하나의 양태로는 그것이 제1근원인 한 그것으로부터 유래하는 것들에 대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에 의해 식별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한 가지 양태로는 그것이 제1근원인 한 타자로부터 유래되지 않는다는 것에 의해 식별된다.
그러므로 성부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에게서 발출하는 위격들과의 관계를 통해 부성과 공통적인 영기발, 기발에 의해 식별된다.
그러나 '근원에서 오지 않은 근거'인 한에서는 타자로부터 유래되지 않는 것에 의해 식별된다.
즉 이런 것이 ‘무기원성'이라는 고유성에 속한다.
'낳아지지 않은 자'라는 명칭은 이런 고유성을 표시한다.
제34문제 성자의 위격에 대하여
제1절 : 말씀은 하느님에 있어 위격적 명칭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 제7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자가 성부께 관계되는 것처럼 말씀도 그 자체가 그의 말씀인 것에 관계된다."
그런데 성자는 관계적으로 말해지기 때문에 위격적 명사다.
그러므로 말씀 또한 위격적 명사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말씀의 명칭은 고유한 의미로 취해진(해석된)다면 위격적 명칭이지 결코 본질적 명칭이 아니다.
이것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야 한다.
'말'은 우리 안에서 세 가지 양태로 고유하게, 즉 본래적으로 말해진다.
그런데 넷째 양태로는 비고유적으로 즉 형상적으로(구상적으로) 말해진다.
우리에 있어서 더 명백하게 또 더 일반적으로 말이라고 불리는 것은 음성으로 발해지는 말이다.
이런 말은 외적인 말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즉 음성 자체와 음성의 의미와 관련하여 내적인 말에서 발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론 제1권에 따르면 음성은 지성의 개념을 표시한다.
또한 음성은 그의 ‘혼론’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표상에서 발출한다.
표시적이 아닌 음성은 말이라고 할 수 없다.
외적인 음성이 말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정신의 내부적 개념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또 근원적으로는 정신의 내적 개념이 말이라 불리고 둘째로는 내적 개념의 표시적 음성 자체가 말이라 불리고 셋째로는 음성의 표상 자체가 말이라 불린다.
다마스케누스가 그의 저서 제1권 제13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말의 이런 세 양태를 제시 한다.
즉 "말은 지성의 본성적 움직임이다. 그것은 마치 빛과 광휘와 같은 것이다.
지성은 그런 움직임에 의해 움직이고 인식하며 사유한다."
이것은 첫째에 관한 것이다.
"또다시 말은 말로 발성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발음된다." 이것은 셋째에 관한 것이다.
"또다시 말은 사자(使者)다. 즉 지성작용의 사자다." 이것은 둘째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넷째 양태로는 말이 형상적으로 말해지는 경우다.
즉 말로 표시되거나 행해지는 것이 말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형상적으로 불리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이것은 내가 네게 한 말이다' 혹은 '이것은 왕이 명령한 말이다'라고 하는 경우 단순히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말로든 혹은 또 그것을 명령하는 사람의 말로든 간에 그런 말로 표시되는 어떤 사태를 지시하여 말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하느님 안에서 말이 고유하게 즉 본래적으로 말해지는 것은 말이 지성의 개념을 표시하는 데 의해서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 제15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것이 음성으로 소리 나기 전뿐만 아니라 또한 그 소리의 표상들이 사유로 휩싸이기 전에 벌써 한처음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 그 말씀에 유사한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의 개념 자체는 그 의미상 타자로부터, 즉 그 개념을 갖는 자의 앎으로부터 발출하는
것을 갖는다.
그러므로 말은 하느님 안에서 고유하게 즉 본래적으로 말해지는 데 따라서는 그것이 타자로부터 발출하는 어떤 것을 표시한다.
이런 것은 하느님 안에서 위격적 명칭들의 개념에 속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위격들이 벌써 말한 바와 같이 기원에 의해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명칭은 하느님 안에서 고유하게 즉 본래적으로 사용되는 한에서 그것은 본질적 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위격적으로만 취해진다.
제2절 : 말씀은 성자께 고유한 명칭인가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 안에서 고유하게 즉 본래적으로 말해지는 말씀은 위격적으로 이해되며 성자의 위격에 고유한 명칭이다.
사실 말씀은 지성의 어떤 유출을 표시한다.
그런데 하느님 안에서 지성의 유출에 의해 발출하는 위격은 성자라 불리며 이런 발출은 출생이라 불린다.
이것은 위에서 제시된 바와 같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는 오로지 성자만이 고유한 의미로 말씀이라고 불린다는 귀결이 된다.
제3절 : 말씀의 명칭에는 피조물과의 관련이 포함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83문제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씀의 명칭에는 "성부께 대한 관련만이 표시될 뿐만 아니라 또한 말씀을 통해 작업적 능력으로 만들어진 것들과의 관련도 표시된다"라고 한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말씀 안에는 피조물에 대한 관련이 포함된다.
그것은 하느님이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모든 피조물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신 안에 회임되는 말은 현실적으로 인식되는 모든 것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들의 다양성에 따라 다양한 말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하나의 작용으로 자신과 만물을 인식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단일의 혹은 유일의 말씀은 성부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피조물들도 표현한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의 지식이 하느님께 대해서는 인식적일 뿐이지만 피조물에 대해서는 인식적이며 조성(造成 - 무엇을 만들어서 이룸)적인 즉 창조적인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도 성부인 하느님 안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표현적일 뿐이지만 피조물에 대해서는 표현적이며 또 작용적이다.
이 때문에 「시편」 제32편 제9절에서는 ‘주님의 말씀이 계시자 [만물이] 이루어졌다'라고 한다. ‘즉 말씀 안에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사물들의 창조의 근거가 포함된다.
제35문제 모습(혹은 모상)에 대하여
제1절 : 모습(모상)은 하느님 안에서 위격적으로 말해지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모습이란 것보다 더 부조리한 것이 있는가?"
그러므로 하느님에 있어 모상(模像 - 모방하여 만든 상)은 상대적 명칭이다.
따라서 명칭은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模像이라는 개념에는 유사가 속한다.
그렇다고 어떠한 유사이든지 다 模像의 개념에 충족(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사물의 종 안에 있는 유사, 혹은 적어도 종의 어떤 표시에 있어서의 유사이어야 한다.
그런데 물체적 사물들에서의 종의 표시는 무엇보다도 형상인 것으로 생각된다.
즉 우리는 종을 달리하는 동물들의 색깔들은 다르지 않고 형상들이 다른 것을 본다.
따라서 벽에 어떤 사물의 색채가 칠해진다면 형상이 그려지지 않는 한 그것이 모상이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種이나 형상의 유사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모상의 조건으로서는 기원이 요구된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83문제집’이라는 저서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하나의 계란은 다른 계란의 모상이 아닌데 그 이유는 뒤의 계란이 앞의 것에서 표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참으로 모상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다른 것으로부터 종에 있어서 혹은 적어도 종의 표시에 있어 그것에 유사한 것으로 발출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하느님의 경우 발출이나 기원을 내포하는 것들은 위격적인 것들이다.
따라서 모상이라는 명칭은 위격적 명칭이다.
제2절 : 모습 혹은 모상이란 명칭은 성자에게 고유한 것인가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그리스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성령을 성부와 성자의 모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라틴 학자들은 성자에게만 모상의 명칭을 귀속시킨다.
그것은 정경(正經 - 성경)에서 모상이란 명칭이 성자에 대해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사실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제1장 제15절에서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조물의 맏이시로다'라 하고, 또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 제1장 제3절에서 '이 아들은 그분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 본체의 표상이십니다'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런 이유를 드는데, 성자는 성부와 본성에 있어 일치할 뿐만 아니라 원리 즉 근원의 개념(특징적 표지)에 있어 일치 하는데 성령은 어떤 개념(특징적 표지)에 있어 성자와도 성부와도 일치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충분치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관계에 관해 하느님 안에서는 균등성도 불균등성도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상의 개념을 위해 요구되는 유사성도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또 다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은 성자의 모상일 수 없다.
그것은 모상의 모상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부의 모상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모상은 직접적으로 그것의 모상인 것(원형)과 관계되는데 성령은 성자를 통해 성부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모상도 아니다.
그 이유는 만일 그렇다면 둘의 모상이 성립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결코 모상이 아니라는 귀결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후에 말하게 되는 바와 같이 성부와 성자는 성령의 한 근원이며 따라서 성부와 성자가 하나인 한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하나의 모상이라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인간 또한 전 삼위일체의 하나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는 달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성령은 그 발출로 말미암아 성자와 마찬가지로 성부의 본성을 받지만 낳아진 자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렇게 성령도 성부와 유사한 형상을 받지만 모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성자는 말씀으로서 발출하기에 그 말씀의 개념에는, 형상이 그것에서 발출하는 것[원형]에 대한 유사가 들어있는 데 반해 사랑의 개념에는 이런 것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비록 성령인 사랑에,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인 한에 적합한 것일지라도 그런 것이다.
어떤 사물에 있어 다른 것의 모상은 두 가지 양태로 드러난다.
그 한 양태는 종에 있어 같은 본성을 갖는 사물 안에 드러나는 것인데, 예컨대 왕의 모상(모습)이 그 아들 안에 드러나는 경우다.
다른 양태로는 다른 본성을 갖는 사물 안에 드러나는 것인데, 예컨대 왕의 모상이 화폐 안에서 드러 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성자가 성부의 모상인 것은 첫째 양태로 말해지는 것이고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하는 것은 둘째 양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 있는 모상의 불완전성을 표시하기 위해 인간은 다만 모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상을 따라서라고 불린다.
이런 것을 통해 완전성을 지향하는 어떤 운동이 표시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에 대해서는 모상에 따라서라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성자는 성부의 완전한 모상이기 때문이다.
제36문제 성령의 위격에 대하여
제1절 : 성령이라는 명령은 하느님의 어떤 위격에 고유한 것인가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 안에는 두 발출이 있는데 그것들 중 다른 것(둘째 것) 즉 사랑의 양태로 이루어지는 발출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유한 명칭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양태의 발출에 의해 발생하는 관계들도 무 명칭적이다.
이것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 때문에 이런 양태로 출하는 위격의 명칭도 같은 이유로 인해 고유한 명칭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말한 관계들을 표시하기 위해 언어의 관행에 따라 어떤 명칭들이 적용되는데 우리는 그런 관계들을 발출과 숨 내쉼의 명칭으로 부르게 된다.
이런 발출과 숨 내심은 그 본래적 의미로 관계들보다 더 인식 표징적인 행위들을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양태로 발출하는 하느님의 위격을 표시하기 위해 성경의 관행에서 성령이란 명칭이 적용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타당성의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점에서 찾아질 수 있겠다.
그 첫째로는 성령이라고 불리는 것의 공통성 자체에서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론」 제15권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성령은
"다른 양자에 공통적이기 때문에 성령은 양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고유한 명칭으로 불린다. 즉 성부도 영이고 성자도 영이다. 성부도 거룩하고 성자도 거룩하다.”
둘째로는 고유한 의미에서다.
즉 스피리투스란 명칭은 물체적 사물들에 있어 어떤 충동(혹은 추진력)과 운동(혹은 원동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리는 입김과 바람을 스피리투스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랑하는 자의 의지를 사랑받는 자에게로 움직이고 충동하는 것은 사랑의 고유성이다.
그리고 거룩함[성성]은 하느님께로 질서 지어지는 사물들에게 속성으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한) 위격은 하느님이 사랑 받는 그런 사랑의 양태를 통해 발출되기 때문에 마땅히 성령이라고 불린다.
제2절 : 성령은 성자로부터 발출하는가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우리는 당연히 성령이 성자로부터 있는 것 즉 유래하는 것을 말하여야 한다.
만일 성령이 성자로부터 있게 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성령은 절대로 성자와 위격적으로 구별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에서 명백하다.
사실 하느님의 위격들이 (관계적이 아닌) 절대적인 어떤 것에 의해 서로 구별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이런 경우) 셋(위격)의 본질이 하나가 아니라는 귀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 안에서는 어떤 것이 말해지든 그것은 다 본질의 일체성에 속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위격들은 관계들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된다는 결론이 된다.
그런데 관계들은 대립적인 한에서만 위격들을 구별할 수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에서 명백하다.
그것은 성부는 두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그것들 중의 한 관계는 성자께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께 관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계들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 위격을 구성하지 않고 성부의 한 위격에 만 관련된다.
그러므로 만일 성자와 성령에 있어 이 양자가 성부와만 관련되는 두 관계만을 발견하게 되는 것
이라면 그런 관계들은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성부가 그 양자와 관련되는 관계들이 서로 대립적이 아닌 것과 같을 것이다.
따라서 성부의 위격이 하나인 것처럼 성자와 성령의 위격은 성부의 두 관계로 말미암아 대립하는 두 관계를 가지면서도 하나의 위격일 것이라는 귀결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삼위일체의 신앙을 폐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단이다.
그러므로 성자와 성령은 서로 대립적 관계들로 관련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 안에는 대립하는 관계들로서 기원의 관계들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위에서 증명된 바와 같다.
기원의 대립적 관계들은 근원에 근거하여, 또 근원에 유래하는 데 근거하여 파악된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성자가 성령에 유래하는 것이거나 성령이 성자에 유래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전자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후자, 즉 성령이 성자에 유래한다는 것을 신앙 고백한다.
또한 양자의 발출의 이치도 이런 것과 일치한다.
사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자는 지성의 양태를 통해 말씀으로서 발출하고 성령은 의지의 양태를 통해 사랑으로서 발출한다.
그런데 사랑은 필연적으로 말에서 발출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정신의 회임(개념)으로 파악하는 데 근거해서만 어떤 것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런 근거에서 성령이 성자로부터 발출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또한 사물들의 질서 자체가 이런 것을 가르쳐 준다.
사실 일에서 다가 무질서하게 발출되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지 못한다.
다만 질료적으로, 즉 소재적으로 다른 것들에 있어서는 예외다.
그것 은 마치 한 제작자가 소재적으로[수적으로] 서로 다른 많은 작은 칼들을, 서로들 사이에 어떠한 질서도 없이 생산하는 것과 같다.
이와는 달리 다만 소재적 구별만이 아닌 사물들에 있어서는 산출된 많은 사물들 안에 어떤 질서가 발견된다.
따라서 산출된 피조물들의 질서에 또한 하느님의 지혜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성부의 한 위격에서 두 위격, 즉 성자와 성령이 발출한다면 이 양자 상호 간에는 어떤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 하나가 다른 것에 유래된 다는 본성의 질서 이외의 다른 어떠한 질서도 해당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자와 성령은 그 어느 분도 다른 분(상대방)에서 발출하지 않는 식으로 성부로부터 발출한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누가 이들 안에 질료적 구별을 주장한다면 별도이겠으나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인 자신들도 성령의 발출은 성자께 대한 어떤 질서를 갖는 것으로 인식한다.
사실 그들도 성령이 성자의 영인 것과 그리고 성자를 통하여 성부로부터 있게 되는 것을 인정한다.
또한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성령이 성자에 유래하는 것 혹은 성자로부터 유출하는 것을 인정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성령이 성자로부터 발출하는 것은 인정치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의 무지에 기인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완고함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올바르게 고찰 하기만 한다면 발출이란 말이 어떤 기원에 속하는 것이든 간에 그 (기원에 관련되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공통적인 것을 발견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어떤 기원을 지시하기 위해서든 이 말을 사용한다.
예컨대 선은 점에서 발출한다, 광선은 태양에서 발출한다, 개울은 샘에서 발출한다고 하는 경우와 이와 같은 다른 모든 경우들에서 그렇다.
따라서 기원에 관련되는 어떤 용어에 의해서도 성령이 성자로부터 발출한다는 결론이 될 수 있다.
제3절 : 성령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 발출하는가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어떤 자가 어떤 자를 통해 작업한다고 하는 모든 표현에 있어 이 ‘…을 통하여'라는 전치사는 원인적인 것 안에 그런 행위의 어떤 원인 즉 근거를 제시한다.
그런데 행위는 행하는 자와 행해진 것 사이의 중간이기 때문에 이 ‘…을 통하여'라는 전치사가 첨가되는 원인적인 것은 어떤 때 그 행위가 행위자로부터 나오는 데 근거하여 행위의 원인이다.
이런 경우 그것은 행위하는 자에 있어서의 원인이며 그것은 목적인일 수도 있고 형상인 일 수도 있고 능동인 혹은 운동인 일 수도 있다.
예컨대 제작자가 돈벌이를 위해 작업한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목적인이다.
그와는 달리 그 기술을 통해 혹은 그 기술에 의해 작업한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형상인이다.
또는 다른 자의 명령에 의해 작업한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운동인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이 ‘…을 통하여'라는 전치사가 첨가되는 원인사가 행해진 것에 대해 종극(終極 - 맨 마지막)을 갖는 한에서는 행위의 원인이다.
예컨대 그것은 제작자가 망치를 통해 작업한다고 우리가 말하는 경우다.
즉 (이런 경우) 망치는 제작자에게 그가 행위함의 원인으로 표시되는 것이 아니라 제작자로부터 발출하는 것으로서 제작된 것에 원인으로 표시된다.
그리고 망치는 이런 것 자체를 제작자로부터 받는다는 것으로 표시된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연유다.
즉 이 ‘…을 통하여'라는 전치사는 어떤 때는 정격적으로 권위적인 것을 (즉 직접적인 원인성을) 지시한다.
이것은 왕이 각료를 통해 작업한다고 하는 경우다.
또 어떤 때는 사격적으로 (즉 간접적인 원인성을) 지시한다.
이것은 각료가 왕을 통해 작업한다고 하는 경우다.
그러므로 성자는, 성령이 성자로부터 발출한다는 것을 성부로부터 받는 것이니 성부는 성자를 통해 성령을 발출시킨다고 할 수 있다.
혹은 또 성령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 발출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것 (이 두 가지 표현)은 같은 것이다.
제4절 : 성부와 성자는 성령의 한 근원인가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성부와 성자는, 양자 사이에서 관계의 대립이 구별 짓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있어 하나다.
따라서 성령의 근원이라는 점에 있어 성부와 성자는 관계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성령의 한 근원이라는 귀결이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한 근원이라는 명제는 적절치 못한 것이라고 한다.
즉 이 근원이라는 명칭은 단수로 취해지면 위격을 표시하지 않고 오히려 고유성을 표시하기 때문에 그것은 형용사적으로 취해진다고 한다.
그런데 형용사는 형용사에 의해 한정되지 않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한 근원이라는 것을 적절하게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이 하나가 말하자면 부사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이해된다면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한 근원, 한 양태로써 근원이라는 의미가 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런데 (만일 그렇다면) 같은 이유에서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두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두 양태로써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이 근원이란 명칭은 고유성을 표시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 고유성을 실체사의 양태로 표시한다.
예컨대 피조물계에 있어 아버지 혹은 아들이란 명칭이 그렇다.
그러므로 이 근원이라는 명칭은 다른 실체사와 마찬가지로 (이 명칭으로) 표시된 형상으로부터 수를 받는다.
그러므로 마치 성부와 성자가, 하느님이라는 명칭에 의해 표시되는 형상의 일성 때문에 한 하느님인 것과 같이 성부와 성자는 근원이라는 이 명칭 안에 표시된 고유성의 일성 때문에 성령의 한 근원이다.
제37문제 사랑이라는 성령의 명칭에 대하여
제1절 : 사랑은 성령의 고유한 명칭인가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에 있어 사랑이란 명칭은 본질적으로도 위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그리고 위격적으로 사용되는 데 따라 그것은 성령의 고유한 명사다.
그것은 마치 말씀이 성자의 고유한 명칭인 것과 같다.
이것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야 한다.
즉 하느님 안에는 위에서 벌써 말한 바와 같이 두 발출이 있는데, 그 하나는 지성의 양태에 의한 것 즉 말씀의 발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의지의 양태에 의한 것 즉 사랑의 발출이다.
그런데 먼저 것이 우리에게 더 쉽게 알려지기 때문에 이 발출 안에서 고찰될 수 있는 그 하나하나의 것들을 표시하기 위해 더 많은 고유한 명사들이 고안되었다.
그러나 의지의 발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발출하는 위격을 표시하기 위해 완곡한 표현들을 사용한다.
또한 이런 발출에 따라 취해지는 관계들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발출과 숨 내쉼 혹은 발함의 명칭들로 불린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말의 본래의 의미에 의해서는 관계의 명칭들이기보다는 기원의 명칭들이다.
그렇지만 그 양자 중 어느 발출도 같은 양태로 고찰되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데에서 인식하는 자 안에 인식된 사물의 어떤 지
성적 개념, 즉 ‘말'이라고 하는 지성적 개념이 생겨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어떤 사물을 사랑하는 데에서 사랑하는 자의 느낌 안에 말하자면 사랑받는 것의 어떤 각인이 발생한다.
이런 각인에 의해 사랑받는 것이 사랑하는 자 안에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인식되는 것이 인식하는 자 안에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거나 사랑할 때 그는 사물의 동일성에 의해 자기 자신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식되는 것이 인식하는 자 안에 있는 것과도 같이 또 사랑받는 것이 사랑하는 자 안에 있는 것과도 같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성의 편에서는 인식되는 것에 대한 인식하는 자의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용어들이 고안되었다.
이것은 내가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는 데서 명백한 바이기도 하다.
또한 지성적 개념의 진행 과정을 표시하기 위해 또 다른 용어들이 고안되었다.
즉 ‘말하다'와 '말'이 그런 것들이다.
따라서 하느님에 있어 '인식하다'라는 것은 다만 본질적으로만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것은 발출하는 말과의 관계를 내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씀은 위격적으로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것은 발출하는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하다라는 것 자체는 개념적으로(특징적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말씀의 근원의 말씀 자체와의 관계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지의 편에서는, 사랑하는 자의 사랑받는 것과의 관계를 내포하는 애정을 ‘갖다'와 '사랑하다'라는 것 이외에는 사랑한다는 것에서 사랑하는 자 안에 발생하는 사랑받는 사물에 대한 각인혹은 느낌의 관계를 내포하는 어떤 용어들이 주어지지 않으며, 또한 그와는 역(대되는 것)의 관계를 내포하는 어떤 용어들도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용어들의 부족 때문에 이런 유의 관계들을 사랑과 애정의 용어들로써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말씀을 우리가 '회임된 인식'이나 '낳아진 지혜'라고 명명하였을 것과 같은 것이겠다.
그러므로 사랑이나 애정 안에서 사랑받는 사물에 대한 사랑하는 자의 관계만이 내포되는 한, 사랑이라는 것과 애정을 갖다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인식이라는 것과 인식하다라는 것의 경우와 같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용어들을 사랑의 양태를 통해 발출하는 것의 근원과의 관계와 그와는 역인(대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한, 즉 사랑을 통해 발출하는 사랑이 인식되고 애정을 갖다라는 것을 통해 발출하는 사랑을 발하다 가 인식되는 한에 (하느님에 있어) 사랑은 위격의 명칭이고 애정을 갖다라는 것이거나 사랑하다라는 것은 개념적(특징적) 명칭이다.
이것은 말하다 라는 것과 낳다 라는 것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제2절 : 성부와 성자는 성령에 의해 서로 사랑하는가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한 난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성부가 성자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한다'라고 할 때 어떤 원인과의 관계에서 탈격이 사용되기 때문에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 사랑함의 근원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성부와 성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서로를 사랑한다'라는 명제를 거짓(허
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명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와 유사한 명제 즉 '성부는 낳아진 지혜로 말미암아 지자
이다'라는 명제를 철회하였을 때 그에 의해 철회되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비본래적 명제라고 하며 '성부는 성자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한다. 즉 성령에게 고유하게 귀속되는 본질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한다'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탈격은 표지(標識 - 다른 대상과 구별하여 어떤 대상을 확정하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표상적(表象的) 또는 개념적 특성)와의 관계에서 구성(사용)되며 의미상으로는 성령이 사랑으로서 그들(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는 한에 '성령은 성부가 성자를 사랑한다는 표지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탈격은 형상인의 관계에서 구성(사용)된다고 하였으며 그 이 는 성령은 그로 인해 성부와 성자가 형상적으로 서로를 사 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탈격은 형상적인 결과와의 관계에서 구성(사용)된다고 하였다.
이 마지막 설을 취한 사람들이 비교적으로 더 진리에 접근하였다.
따라서 이 문제를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야 한다.
즉 흰 것은 휨에서, 인간은 인간성에서 이름 붙여지는 것과 같이 사물들은 일반적으로 그 형상들에서 이름 붙여지기 때문에 사물이 그것에서 이름 붙여지는 모든 것은 그런 한에서 형상의 관계를 갖는다.(즉 형상의 위치를 갖는다.)
내가 만일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즉 '그는 옷으로 둘러져 있다 (즉 그는 옷을 입고 있다)’라고 한다면 이때 탈격(옷으로)은, 옷이 형상은 아니지만 형상인의 관계에서 사용된다.(즉 형상인의 구실로 혹은 대신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어떤 것은 그것이 발출하는 것에 의해 이름 붙여지게 되는데, 그것의 행위하는 것 즉 작용하는 것이 그 작용으로 말미암아 이름 붙여지는 경우 뿐만이 아니라 작용의 종국(終局 - 일의 마지막)자체로 말미암아서도 이름 붙여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종국은 결과다.
그리고 이런 종국은 결과 자체가 작용의 개념 안에 내포될 때 그런 것이다.
사실 우리는 '불은 덥게 하는 작용으로 덥게 한다'라고 한다.
이 경우 덥게 하는 작용은 불의 형상인 열은 아니지만 불에서 발출하는 작용이다.
또 우리는 '나무는 꽃들로 말미암아 꽃 핀다'라고 한다.
이런 경우 꽃들이 나무의 형상은 아니지만 나무에서 발출하는 어떤 결과들이다.
여기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즉 하느님에 있어 사랑한다는 것은 두 가지 양태로 취해지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개념적(특징적)으로 취해진다.
본질적으로 취해지는 데 의해서는 성부와 성자는 서로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하지 않고 그 본질로 말미암아 사랑한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 제15권에서 "성부는 자신도 성자도 성령도 다만 성령을 통해서만 사랑한다는 것을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여기에 근거하여 첫 견해들이 올바르게 제기된다.
그런데 특징적으로 취해지는 데 의해서는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발한다는 것'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말한다는 것이 말을 산출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고 꽃 핀다는 것이 꽃들을 산출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꽃들로 말미암아 꽃 핀다고 하는 것과 같이 성부는 말씀 혹은 성자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과 피조물을 말한다고 한다.
또한 성부도 성자도 성령 혹은 발출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서로를 또 우리를 사랑한다고 한다.
제38문제 은사라는 성령의 명칭에 대하여
제1절 : 은사는 위격적 명칭인가
'은사'의 명칭에는 주어진다는 것에 대한 적합성이 내포된다.
그런데 주어진다는 것은 그로부터 주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에 주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관계를 갖는다.
즉 그의 것이 아니고서는 어떤 자로부터 주어질 수 없을 것이고, 또 그의 것이기 위해 어떤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위격이 어떤 자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예컨대 성자는 성부의 것이라고 하는 경우처럼 그 기원에 의한 것이거나 혹은 어떤 자로부터 소유되는 한에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소유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거나 향유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양태로 하느님의 위격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께 결부된 이성적 피조물뿐이다.
다른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위격으로부터 움직여질 수는 있지만 그들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위격을 향유하며 그의 결과를 사용하는 식으로 하지는 못한다.
이성적 피조물은 어떤 때 이런 데에 도달한다.
그것은 예컨대 하느님을 자유롭게 참으로 인식하고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과 발출하는 사랑을 분유하기에 이르는 경우다.
따라서 오로지 이성적 피조물만이 하느님의 위격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위격을 이렇게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고유한 능력만으로는 도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위로부터 그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다른 것에 의해 소유하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위격에, 그것이 주어진다는 것과 은사라는 것이 적합하다.
제2절 : 은사는 성령에게 고유한 명칭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 제4권'에서 "성자에게 낳아졌다는 것이 성부께로부터인 것처럼 성령에게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는 한에 그 고유의 명칭을 얻는다.
따라서 은사도 성령에게 고유한 명칭이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은사는 하느님에 있어서 위격적으로 취해지는 한 성령에게 고유한 명칭이다.
이것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은사(선물)는 본래 반환될 수 없는 증여다.
즉 갚아질 의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그것은 무상(無償 - 대가나 보상 없음)의 증여를 내포한다.
무상의 증여의 근거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이에게 어떤 것을 무상으로 주는 것은 우리가 그에게 좋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에게 주는 제일 첫째 것은, 우리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좋은 것을 원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무상의 은사(선물)가 그것에 근거하여 주어지는 제일 첫째 선물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명백하다.
따라서 성령은 벌써 말한 바와 같이 사랑으로서 발출하기 때문에 제일 첫째 은사의 성격 안에서 발출한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 제15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이라는 은사를 통해 많은 각기 고유한 은사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 나누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