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뱉는 말이다. 어느새 입버릇이 됐다. 코트 깃을 여미고 점퍼 지퍼를 올려도 야속한 바람은 온 몸을 휘감는다. 몸과 더불어, 마음도 꽁꽁 얼어붙는다. ‘주위에 관심이 필요한 시기’라는 구호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싸늘해진 마음은 눈과 귀를 멀게 한다.
노숙인들은 얼어붙은 파란 몸을 이끌고 거리를 헤맨다. 이 시기만 되면 흔히 보이는 모습이다. 갈 곳도 쉴 곳도, 머물 곳도 찾지 못한 그들에게 이 계절은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렵다.
수녀는 아무도 받아주지 않던 그들을 따뜻하게 맞는다. 발길이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던 이들을 포근하게 감싼다. 몸을 녹일 따뜻한 담요와 잘 덥힌 우유, 정성스레 준비한 식사를 준비한다.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조차 묻지 않는다. 그들의 호주머니에 지폐가 몇 장 꼬불쳐 있는지는 아예 관심도 없다. 꽁꽁 얼어붙었던 이들의 마음은 어느새 풀어져 녹아내린다.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삶의 의지가 이들을 감싼다.
전주사랑의집 ‘안젤라’, ‘루치아’ 수녀를 만난 노숙인들은 입을 모은다.
‘세상을 따뜻하게 비추는 빛과 같은 존재’가 곁에 있어 겨울이 춥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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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집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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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사랑의집은 1958년 현재의 완산교 자리에서 갈 곳이 없는 노인과 부랑인들을 돌보기 위해 ‘인생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얼추 6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역 어려운 이웃과 함께 했다.
1999년부터는 전주가톨릭 사회복지회의 위탁관리를 받아, 보건복지부 지정 노숙인 요양시설로 거듭났다. 그 간 지역 노숙인들과 함께 해 온 공을 인정받아 전국 37개소에 불과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노숙인들의 성녀’로 불리는 안젤라 심근자(여·58)수녀가 전주사랑의집에 온 것은 2009년이다. 이듬해에는 루치아 홍미라(여·49)수녀가 이곳으로 왔다.
안젤라 수녀가 처음 이 곳에 와서 한 일은 시설을 둘러싼 철조망을 걷어내는 것이었다. ‘노숙인들은 죄인이 아니다’고 생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젤라 수녀는 시설을 찾아 온 노숙인들의 건강상태와 식습관, 생활태도 등을 꼼꼼히 살폈다. 그들을 먼저 알아야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후 그들과 매일 따뜻한 대화의 시간을 마련했다. 처음에는 어려웠다. 사람과의 만남이 익숙치 않아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고 몇 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랫동안 주위와 담을 쌓고 살아 온 노숙인들에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그래도 안젤라 수녀는 이 끈을 놓지 않았다.
이듬해 루치아 수녀가 오고 나서부터는 이 시간이 한결 편해졌다. 말 한 마디 만으로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는 재주가 있는 루치아 수녀는 이들과 빠른 친화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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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라 수녀가 든든한 조력자로서 루치아 수녀가 친구이자, 대화상대로서 노숙인들과 끈끈한 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두 성녀의 애정 어린 노력에 노숙인들은 차츰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었다. 어두웠던 표정이 어느새 환해졌다. 시설을 찾아오는 누군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시설에 훈풍이 감돌기 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추운 겨울 새벽만 되면 몸과 마음이 꽁꽁 얼어붙은 노숙인들이 시설을 찾았다. 누군가와 다퉜는지 심하게 다친 이들도 많았다. 극심한 알콜중독으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노숙인들도 있었다.
이들을 돌보는 것은 고스란히 안젤라, 루치아 수녀와 전주사랑의집 직원들의 몫이었다. 시설을 찾아 온 노숙인을 씻기고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혔다. 건강상태에 따라 죽과 밥, 음료 등을 먹인 뒤, 시설 내 양호실에서 건강상태를 확인했다.
이후에는 갓 세탁한 이불과 잘 정돈된 담요가 있는 침실에서 그 동안의 피로를 풀도록 했다.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보다 노숙인들의 건강이 더 중요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노숙인들은 급한 허기만 달래고 바로 밖으로 나가버리거나, 술이 깨고 나서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다른 노숙인들과 싸우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두 수녀와 직원들은 이들의 잘못조차 따스하게 감쌌다. 시설에 적응하고 나면, 잘못된 행동도 고쳐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 예상은 꼭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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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층 여성 거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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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말을 일절 나누지 않았던 한 노숙인은 시설에 들어오고 몇 달 뒤부터 종이로 공예품을 만들었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부터 두 손을 모은 성모마리아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공예품을 안젤라 수녀에게 전했다. “잘 만들었죠?”라는 인사말도 함께였다.
또 다른 노숙인은 반년 뒤, 아무 말 업이 시설을 떠났다. 안젤라, 루치아 수녀를 비롯, 직원 모두는 이 노숙인을 찾아 밖을 헤맸다. 떠난 노숙인이 술에 취하면 산에 불을 놓는 버릇이 있었기에 며칠 동안 마음을 놓지 못했다.
비가 무척 많이 왔던 초여름 저녁, 그 노숙인들 다시 시설을 찾아왔다. “저를 다시 받아주세요”라며, 울먹였다. 얼굴에는 미안함과 그리움이 함께 묻어났다. 안젤라 수녀는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두꺼운 담요를 덮어줬다. 시설 직원 그 누구도 “어디에 다녀왔느냐”, “또 불을 지른 것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그의 표정에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읽은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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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층 헬스실 설명하는 안젤라 수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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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라, 루치아 수녀와 전주사랑의집 직원들의 노력에 힘입어 2011년에는 보건복지부 노숙인보호시설 평가에서 전북지역 1위로 선정됐다. 전국에서도 네 손가락 안에 꼽혔다.안젤라, 루치아 수녀가 이 곳에 온 지도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노숙인들도 이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환한 표정, 적극적인 태도, 활발한 성격이 이를 증명한다. 노숙인들은 두 성녀를 ‘세상을 비추는 빛’과 같은 존재라 말한다. 그녀들의 수고로움이 밀알되어 시설 내 모든 노숙인들이 올해도 따뜻한 겨울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안젤라 수녀는 “지금 하는 일들을 희생이나 봉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도자는 사회에 필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을 하면 될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소외받거나 아프거나 다치지 않고 언제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며 은은한 미소를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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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숙인이 만든 종이 공예품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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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사랑의집은1958년 부랑인과 노인 보호시설로 설립됐다 1999년 전주시 조례개정을 통해 ‘전주사랑의집’으로 명명됐다. 초대 이재후 원정을 거쳐, 2대 박정규 원장, 3대 공은미 원장이 노숙인 돌봄 시설로써 기틀을 닦았다. 4대 심근자(안젤라 수녀)가 취임한 이후, 보건복지부 시설평가 전북 1위, 민간위탁사업 우수기관 선정, 산업은행 사랑나눔재단 ‘차량지원’ 대상 선정 등 도내 대표 사회복지시설로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는 전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 화장실 보수 지원사업에도 선정되는 등 언제나 쾌적하고 깨끗한 장소를 노숙인들에게 제공하고 있다.후원문의는 전화 063-255-8393로 하면 된다. /글 = 정경재 · 사진 = 이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