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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 辛 庚 戊 申 巳 申 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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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66 56 46 36 26 16 6
戊 丁 丙 乙 甲 癸 壬 辛
辰 卯 寅 丑 子 亥 戌 酉
先生以嘉靖戊申七月八日申時。生于漢陽貞陵洞第。
조선시절 예학(禮學)의 태두로 평가되는 사계 선생의 사주는 월지 申中 壬水가 사령하여《상관격》이다. 금수상관에는 火가 필요한데 시간에 丙火가 투출하여 일지 巳에 통근(通根)하니 사주가 맑고 좋다.
甲子대운 끝 무렵 45세(壬辰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乙丑운에 벼슬은 높아져 갔으나 전란중에 고생이 많았고 丙寅운에는 비록 삼형살이 있어 기복은 있었으나 용신이 발현되어 벼슬길에 있었으며, 丁卯운에는 스스로 벼슬은 포기하고 학문을 연마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을 썼으며, 戊운에 상관을 억압하고 용신을 생하니 오히려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벼슬이 높았다. 辰대운에 申辰이 合水하여 상관이 강해져서 84세(辛未년)에 사망하였다.
「생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출신.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김호(金鎬)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우참찬 신영(申瑛)의 딸이다. 아들이 김집(金集)이다.
1560년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癸亥대운
34세(辛巳)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그 뒤 순릉참봉(順陵參奉)과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거쳐 활인서(活人署)·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등의 별제(別提)와 봉사(奉事)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인의(引儀)를 거쳐
甲子대운
44세(辛卯)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45세(壬辰)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였다.
乙丑대운
49세(丙申년) 한 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익위(翊衛)의 관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50세(丁酉년)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54세 1601년 조정에서 『주역구결(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丙寅대운
58세(乙巳)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63세 1610년(광해군 2)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丁卯대운
66세(癸丑)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戊辰대운
그 뒤 76세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6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사업(司業)을 겸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13가지의 중요한 정사(政事)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78세(乙丑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해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한 뒤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80세(丁卯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해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김장생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김장생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김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예학(禮學)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던 송익필이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의 일로 환천(還賤: 천인으로 되돌아감)되자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徐渻)·정엽(鄭曄) 등과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000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小學集註)』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小學)』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저서로는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喪禮備要)』 4권을 비롯, 『가례집람(家禮輯覽)』·『전례문답(典禮問答)』·『의례문해(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沙溪先生全書)』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2) 전법무부장관 이귀남
丙 壬 己 庚 午 戌 卯 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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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63 53 43 33 23 13 3
丁 丙 乙 甲 癸 壬 辛 庚
亥 戌 酉 申 未 午 巳 辰
진상관격이다. 木火가 왕하여 신약하니 연간의 庚金이 용신이다. 왈《상관패인격》다른 용어로《상관용인격》이다. 사주가 희용이 뚜렷하게 맑으니 상격(上格)이라 하겠다.
31세(庚申)에 용신의 연운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33세부터 검사로 출발하여 요직을 거친후 乙酉 대운중 60세(己丑)년에 차관을 거쳐 드디어 제 61대 법무부 장관으로 승진하여 62세(辛卯) 8월까지 근무하였다
용신 대운을 벗어나서도 격이 청순하므로 탈 없이 노후를 잘 보내고 있다.
경력
1980년 :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1982년 ~ 1985년 :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검사
1986년 ~ 1988년 : 광주지방검찰청 검사
1991년 ~ 1993년 :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1996년 ~ 1997년 :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 부장검사
1998년 ~ 1999년 :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제3과장
2004년 ~ 2005년 : 대구지방검찰청 제2차장검사
2005년 4월 ~ 2006년 2월 :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2006년 2월 ~ 2007년 2월 : 대검찰청 공안부장
2007년 3월 ~ 2008년 2월 :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2008년 3월 ~ 2009년 1월 :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
2009년 1월 ~ 2009년 9월 : 제52대 법무부 차관
2009년 9월 ~ 2011년 8월 : 제61대 법무부 장관
변호사이귀남법률사무소
2012년 8월 ~ : 오리온그룹 고문[1]
2016년 ~ (주)GS 사외이사
2018년 3월 ~ : 기아자동차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
기아자동차 투명경영위원회 위원장
3) 군벌 차오쿤(曹錕)의 팔자
1862년 음력 10월 21일 子시생
丙 庚 壬 壬 子 子 子 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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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68 58 48 38 28 18 8
庚 己 戊 丁 丙 乙 甲 癸
申 未 午 巳 辰 卯 寅 丑
「서낙오評」
관성을 보아 파격(破格)이라 하나 그 실상은 상관의 변격(變格)이 된다. 金水상관이 기쁘게 관성을 보았다.
운이 丁巳 10년에 이르러 일생의 최고 길운이 되었고 戊운에 이르러 火가 土를 생하므로 불리하였으며 午운에 이르러 子水를 충하니 쇠신(衰神)이 왕한 子水를 충하므로 실패하여 하야하였다.
「학선註」
월지 사령이 壬水라 엄밀히 따지면 식신격이지만 일지 시지에 상관이 있어 식신과 상관이 너무 과하게 많다. 이런 경우는 상관격으로 취급하는 것이 통예다.
금수상관격은 火가 필요하므로 시간의 丙火가 아름답다.
격국인 식상 水는 死支이고 용신 丙火에게는 욕패지(浴敗支)인 卯대운 힘든 시절 33세(甲午년)에 청일전쟁 때문에 조선에까지 와서 죽을 뻔 한 고비도 넘겼으나 용신이 힘을 얻는 丙辰 대운부터 丁巳에까지 욱일승천하여 대총통(요즘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에 까지 이르렀다가 대운 교체기 未대운말에 7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생애」
자는 중산[仲珊]. 직례성 톈진[天津] 사람이다. 1890년 톈진 무비학당을 졸업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군대를 따라 조선으로 갔다.
전후에 위안스카이[袁世凱] 부대에 투항하여 북양군의 관대·협통·통제 등을 역임했다. 중화민국 초기에 사단장이 되었고,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 직례독군이 되었다.
북양군이 직례파·안후이파[安徽派:皖派]·펑톈파[奉天派]로 분열되었을 때 직례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직례·산둥[山東]·허난[河南] 3성의 순열사에 임명되었다. 1920년대초 직례파가 베이징[北京] 정부를 장악했다. 1923년 10월 차오쿤은 국회의원을 매수하여 대총통에 선출되었는데 이로 인해 회선총통으로 불렸다. 다음해 11월 펑위샹[馮玉祥]이 베이징에서 정변을 일으켜 그를 총통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4) 청나라 팽옥린(彭玉麟)의 팔자
癸 戊 辛 丙 丑 子 丑 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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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62 52 42 32 22 12 2
己 戊 丁 丙 乙 甲 癸 壬
酉 申 未 午 巳 辰 卯 寅
「서낙오評」
土金상관이 丑중에서 金水가 일제히 천간에 나타나니 천부(天覆)되고 지재(地載)하여 있으니 정화(情和)하고 기협(氣協)하였다.
이는 12월에 생하였으므로 金은 춥고 土가 얼어버리니 丙火인수가 조후하여 길하다. 운이 남방으로 향하니 공명이 혁혁하여 청나라의 중흥명신(中興名臣)이 되었다.
「생애」
청나라 호남(湖南) 형양(衡陽) 사람. 자는 설금(雪琴)이고, 호는 퇴성재주인(退省齋主人)이다. 제생(諸生)에 올랐다. 도광(道光) 말에 이원발(李沅發)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나중에 뇌양(耒陽)에 이르러 다른 사람을 위해 경리를 맡았는데, 허장성세(虛張聲勢)의 전법으로 인근에 있던 태평군(太平軍)을 물리쳤다. 다시 증국번(曾國藩)에게 투신하여 상군(湘軍) 수군(水軍)을 통솔했다. 반벽산(半壁山) 전투에서 지부(知府)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육군(陸軍)을 보좌해 구강(九江)과 안경(安慶)을 함락하고, 제독(提督)과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을 지냈다.
동치(同治) 2년(1863) 수군을 지휘해 구보주(九洑洲)를 격파하고, 진격하여 천경(天京)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했다. 전투가 끝난 뒤 장강(長江)의 수사영제(水師營制)를 정하고 해마다 장강을 순시하니 명성이 더욱 알려졌다. 중불전쟁 때 휘하 장병을 이끌고 호문(虎門)에 주둔하면서 화의(和議)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병부상서(兵部尙書)까지 올랐다. 시호는 강직(剛直)이다.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임종욱, 김해명]
5) 청나라 장동(張洞)의 팔자
戊 戊 戊 丁 午 申 申 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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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68 58 48 38 28 18 8
庚 辛 壬 癸 甲 乙 丙 丁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土金상관이 丁火 인수를 보니 길하다. 운이 남방으로 향하니 소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다음으로 운이 동방으로 향하니 중외의 중직을 역임하고 공명도 일국에 혁혁하였다.
이상 두 팔자(4번과5번)는 사주에 한 개의 관성도 보지 않음이 길하다. 그러므로 상관상진(傷官傷盡)이라 한다.
日元의 기세가 초약(稍弱)하고 운이 동방 관운으로 향하니 이는 남방의 길함에 미치지 못한다.
6) 중국(中國) 김소증(金紹曾) 팔자
丁 乙 丙 丁 亥 丑 午 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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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66 56 46 36 26 16 6
戊 己 庚 辛 壬 癸 甲 乙
戌 亥 子 丑 寅 卯 辰 巳
木火상관이 丙丁火가 왕성하니 관성을 보지 않은 것이 마땅하다.
연일에 양 丑자가 있고 태어난 시가 亥를 만남이 길하다. 그것은 조후가 급함이다.
亥宮 壬水로써 용(用)을 하니 중년 水木운에 뜻을 얻게 됨을 알 수 있다.
庚子, 辛丑 金水의 운에서 바로 과거에 급제하고 辛丑운에 암금(暗金)의 살(殺)이 되어 발전하고 子운에 쇠신(衰神)이 왕신(旺神)을 충하니 기복을 면하지 못하였다.
7) 사상가(思想家) 강유위(康有爲)
庚 壬 乙 戊 子 子 卯 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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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65 55 45 35 25 15 5
癸 壬 辛 庚 己 戊 丁 丙
亥 戌 酉 申 未 午 巳 辰
「서낙오評」
水木상관이 재관(財官)이 양쪽에 보니 기쁘다. 水木상관이 어찌하여 官이 기쁜가?
水가 왕하면 木이 뜨므로 土를 얻어 水를 제거함이 마땅하며 木의 뿌리를 배양한다. 또한 재(財)가 기쁜 것은 어찌함인가?
이는 火가 아니면 따뜻하게 하지 못하므로 木이 발아를 못한다.
이치는 비록 이와 같으나 쓸 때는 마땅한 것을 따라 용(用)하여야 한다.
이 팔자는 水木상관이 재관(財官)을 양쪽에서 보는 중 운이 남방으로 향하니 명성을 크게 떨쳤다.
午운 중에 子水를 충하므로 좌절하여 외국으로 망명하였으나 그 명성을 사라지지 않으니 운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8) 군벌 장종창(張宗昌) 팔자
壬 壬 壬 壬 寅 寅 寅 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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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51 41 31 21 11 1
己 戊 丁 丙 乙 甲 癸
酉 申 未 午 巳 辰 卯
「서낙오評」
이 사주는 역시 상관의 변격(變格)이다. 水木상관이 재관을 양쪽에 보아 길하다. 그러나 실은 재(財)가 좋고 관은 좋지 않다. 운이 남방으로 향하여 乙巳, 丙午, 丁, 25년에 개부(開府) 벼슬을 하고 왕에게 신임을 받았다. 이것은 재(財)가 왕한 이유이다.
未운에 이르러 木이 묘고(墓庫)에 들어가고 午未가 합되어 실패하여 하야하니 권위도 같이 떨어졌다. 戊申운에 이르러 寅중 丙火를 申중 壬水가 충하니 피살(被殺)되었다.
「학선註」
동해 서낙오선생은 식신이 과다하여 상관격으로 본 것인데 필자가 보기에는《종아격從兒格》으로 취급하였으면 좋겠다. 비록 壬水 비견이 3이나 있다 해도 지지에 뿌리가 없는 것이니 있으나 마나한 존재다. 고로 종격이다.
戊申대운 壬申년 戊申월에 종을 강하게 거역하니 급사하게 된 것이다.
「장종창평가」
중국의 근세 혼란기였던 군벌시대에는 별별 인간들이 시운을 타고 기회를 잡아 출세도 하고 몰락하기도 했다 . 이 과정에서는 나름대로 원대한 꿈으로 만인에게 영웅이라 불리울 만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그야말로 양아치 수준의 인물이 분수에도 없는 권력을 쥐고 온갖 패륜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간쓰레기"의 궁극에 달한 자가 바로 장종창이란 인물이다.
별명이 도박을 너무 좋아한다고 "개고기장군"(중국 산동에서는 도박하는 것을 개고기를 먹는다고 함), 재산이 얼마인지 모르고 첩이 몇 명인지 모르고 부하가 몇이나 되는지 모른다고 "삼불장군"이라 불리웠던 장종창은 스스로를 "영웅중의 영웅"이라 운운하며, 장작림밑에서 한때는 "산동왕"이 되어 자기 고향인 산동사람들의 등꼴을 골수까지 뽑아먹으며 악명을 떨쳤었다. [출처]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12화 "민국시대 최악의 꼴통, 산동왕 장종창"|작성자 욱이님
9) 상관격(傷官格) 이재화상(以財化傷)
甲 己 庚 戊 子 丑 申 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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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 丁 丙 乙 甲 癸 壬 辛
辰 卯 寅 丑 子 亥 戌 酉
상관이 관성을 보았을 때 반드시 그 세력의 강약을 보아 관성이 약하여 무기(無氣)하면 관(官)을 버리고 상관을 용(用)함이 좋다. 그러나 이 사주는 둘이 서로 세력이 비등하니 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병용하게 되니 문제점이 된다.
관성이 일주(日柱)와 합되며 서로 귀기(貴氣)가 교환되고 甲木관성이 寅에 록(祿)을 얻으니 관성을 버리라는 이치는 만무하다.
그리고 庚金은 월령에 당왕신(當旺神)이 되므로 버리지 못한다. 이는 재(財)로써 화(化)하지 못하면 서로 보존이 못된다.
일찍이 金운에 병액(病厄)이 많고 戌癸운중에 파패(破敗)함이 많다가 亥운에 들어오니 정신이 새롭게 발전하므로 납자부조(納資部曹)라는 벼슬을 하고 甲子운에 접행(接行)하니 명의원(名議員)에 홍사관(紅司官)이 되었다.
乙丑후의 운에 실패하고 어느 작은 회사에 비서가 되니 명의(名議)가 추락되었다. 그러므로 자기의 포부를 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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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오늘도 공부 잘 했습니다.
흥미로운 자료 감사합니다. 지속적으로 읽어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