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화요일(3/24)부터 목요일 오늘(3/26)까지 무등경기장 야구장(기아 챔피언스 필드 말고)에 갔다. 소년 체육대회에 출전할 광주광역시 중학 야구팀을 선발하는 대회에 광주충장학교가 참여하기 때문이었다. 첫날 내가 응원하던 충장중은 전력이 더 강하다던 동성중을 3-2로 가까스로 이기고 첫 관문을 통과했다. 어제는 사실상 결승전인 무등중과의 경기에서 거꾸로 아쉽게 3-2로 졌다. 오늘 진흥중을 6-5로 이겼지만 결국 무등중에 밀려 소년체육대회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경기에 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내년을 또 기약하면 될 일이니 아주 절망은 아니다.
꽃다운 10대를 보내던 1970년대 중반 고등학교 때 야구를 무척 좋아했다. 다니던 고교(전남고)에 야구부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야구부들과 친하게 어울렸다. 그러다 보니 다른 학교 야구선수들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당시 호남야구의 주역이던 군산상고나 광주일고, 광주상고의 선수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그 중 몇몇은 세월이 흘러 1982년 전두환이가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 허용했다던 프로야구 출범이후 전설의 야구팀 해태 다이겨스(Haitai Tigers) 팀의 주역으로 야구팬들의 스타가 되었고 지금도 전설로 남아있다. 그렇게 활짝 꽃피운 선수가 있는가 하면, 이런저런 연유로 꽃을 피우지 못한 팍팍한 삶을 살아온 친구도 있다.
이 시대 서민들에게 고달프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내 한 친구가 지나온 삶의 여정은 정말 안타깝다. 1970년대 중반 광주일고의 투수였던 그 친구는 너무도 정이 많아 가지 않아도 될 고달픈 길을 걸어갔었다. 경희대로 진학해 경희대 에이스 역할을 하던 그는 광주항쟁이 나던 해 입대했다가 첫 휴가 중 사고로 왼쪽 팔의 신경이 끊기는 부상을 당해 결국 의병 제대를 했고 그 길로 야구선수의 생명이 끊났다. 함께 뛰던 대부분의 친구들은 초창기 프로야구에서 거액(?)의 연봉을 받으며 선수생활을 해가던 그 때, 그는 한 손은 불편했지만 초등학교 팀의 지도를 맡아 선수를 길러내는 일을 계속 했다. 지금은 프로야구팀에서 활약하는 선수를 발굴하여 지도했다. 그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묵묵히 해왔다, 긴 세월을.
나는 그냥 그 친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멀리서 전해들었다. 서른이 되어 갈 무렵부터는 대학의 교수 자리를 얻는 일에만 시간과 관심을 쏟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10대와 청년기를 함께 했던 친구들과 거의 모든 관계가 끊겼던 것이다. 그러다가 2013년 야구장을 갔다가 그 친구를 만나서 드문드문 통화도 하고 만나기도 하게 되었었다. 그래도 바쁘다는 핑계로 그렇게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작년 여름 함께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가 그제 야구장에서 다시 만났다. 걸음걸이가 불편하게 보여 무심히 "너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지금 항암 치료 중이야"라고 대답했다. 1개월 전 진단을 받았다며, "잘 견디고 있다. 식욕도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어야."라며 말을 이었다. 몇 마디를 더 나누다가 그 친구는 "운명대로 살다 가는 거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함께 앉아 야구경기를 3일 동안 함께 보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투병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냥 옛날 10대의 시절을 떠올리는 얘기를 주로 했다. "이곳 야구장은 1970년대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관중석 규모만 조금 켜졌을 뿐이다. 저기 저 투수 마운드, 네가 서 있던 그 자리 아니냐? 기분이 어떠냐? 10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 라는 등의 말만을 했다. 누워 있지 않고 날마다 자신의 흔적이 있는 야구장을 찾아나오는 그 친구의 발걸음이 오래오래 더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첫댓글 운명대로 살다 가는 거지.
몇 일 먼저 가고 몇 일 뒤에 가는 일인데....
좀 슬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