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에서 막다른 길에 맞닥뜨린 표현을 노서입각(老鼠入角)이라 한다. 아무리 영특한 늙은 쥐라도 일단 소뿔 속에 들어가면 꼼짝달싹 못한다는 것이다. 참구(參究)하는데도 그렇게 벽을 대하듯 막다른 처지에 이르러야 진정한 공부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가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막다른 한계(限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부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럼 끝은 어떤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다. 이를대로 이른 막바지에서 한 발자국을 내딛고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때 스승에게 짓밟히고도 웃을 수 있으며, 몽둥이로 내치면 같이 맞받아 쳐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한마디로 대박(?)인 것이다.
납자에겐 내면적인 공통점이 있다. 한계다. 그것이 경험이든 관념이건 간에 어느 정점에 이르러 보았다는 것이다. 1991년 동안거 때 해인사에서 만난 한 납자가 있었다. 유명한 S대 수학과 출신으로 모르는 것이 없어 일명 ‘박물학자’로 통했다. 일찍이 선어록을 대했다고 한다. ‘논리’라면 누구보다 자신했다던 그가 선문답을 접하고는 초논리에 매료되어 출가 했단다. 관념의 한계였다.
화두를 참구할 때는 벽을 대하듯이
막다른 처지에 이르러야 공부가 돼
그러나 일상에서는 평범했다. 정월명절이 되어 잠시 자유로운 시간을 틈타 장기 둘 때의 일이다. 대개는 큰 말을 먹는데 그 스님은 고집하듯 ‘졸’을 즐겨 먹어 주위에서 한마디 했다. “어찌 졸만 먹나요?” “새우도 반찬이여!” 순식간에 좌중이 뒤집어 졌다. 늘 조용하고 성급히 뛰는 일이 없는 스님은 잠깐 휴식할 땐 언제나 오른쪽으로 누었다. 부처님이 그러셨단다. 산철이면 답사를 했다는데, 당시 남한의 사적지와 유적지를 거의 다 탐방해 수집해 놓은 자료가 상당했다고 했다. 그 후 10년이 흐른 2000년부터 삼보사찰의 하나인 총림에서 박물관장 소임을 보고 있다.
내겐 일상에서의 고비가 종종 있었다. 일찍이 부모님과는 4살 때부터 떨어져 조부모님과 숙부모님 슬하에 자랐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숙부모님과 은사님 그리고 학우들과 주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졸업했다. 이후 몇 년의 공무원 생활을 정리하고 출가 당시엔 주변에서, 이제 웬만큼 생활할 여유가 됐는데 굳이 그 길을 택하느냐는 것이었다. 와중에 중학교 시절 은사 한 분은 격려해 주셨다. “자네는 그간의 여정이 꼭 출가하기 위한 생활이었던 것 같네!” 생각 같아서는 그간 도움을 주셨던 모든 분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싶지만 마음뿐이다.
고비마다 베풀어 주셨던 은인들께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고민하다, 더 많은 분들께 보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고심한 끝에 출가의 결심을 하게 됐다. 입문한 날부터 즐거웠다. 갈등과 회의가 밀려 올 땐 어김없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정진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다. 그것은 스스로 걸머진 걸망에서 비롯됐다. 다행히 그때마다 그에 걸맞은 정진 처소를 만났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한 곳에 진득이 있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특히 선원에 갈 때는 더욱 그랬다. 1999년 해인사에서 8개월간 강사를 지내다 불현듯 걸망을 지고 은사 스님을 뵈니, 마뜩찮아 하시며 이르셨다. “너 그렇게 내려가면 어떡할래?” “제가 여기서 더 이상 내려갈 일이 있겠습니까.” 곧장 단호한 표정으로 말씀 하셨다. “네게 더 이상 말하지 않으마.”
아마도 지난날(출가전) 역경을 겪으면서 얼마간 한계에 부딪혀 생긴 내성이, 입산해서도 늘 새롭게 충전하고픈 의욕으로 용솟음치지 않았나 자찬해 본다. 요즘 이 글로 ‘잘 나가고’ 있다. 행여 은사 스님의 준엄한 말씀 있지 않을까 싶다. “너 그렇게 오르다가 어떡할래?” 나의 지금 심정은 이렇다. “아직은 배가 고픕니다!”
법광스님 / 고창 선운사 승가대학장
[불교신문 2516호/ 4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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