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천주교 박해 조선의 천주교 박해 가톨릭 종교 사건사고 학살 조선(19세기)
1. 개요
조선 후기애 일어난 천주교 박해를 정리한 문서. 천주교 박해는 꾸준히 있었으나, 대규모 박해는 총 4번 있었으며 이 4번의 박해로 수많은 천주교인이 순교를 하게 된다.
2. 신해박해
1791년(정조 15년)에 일어난 박해.
3. 신유박해
1801년(순조 원년)에 일어난 박해. 조선의 천주교의 박해는 이 박해가 일어난 원인을 계기로 계속 일어나게 되었는데 자세한 것은 항목참조.
4. 기해박해
1839년(헌종 5년)에 일어난 박해.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프랑스인 성직자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그 외 수많은 조선인 신자들이 순교했다. 총 70명의 순교자들이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성인품에 올랐다. 자세한 것은 한국 103위 순교성인 참조. 풍산 조씨가 안동 김씨를 잠시 몰아낸 계기이기도 하다.
1839 기해박해 헌종 5년인 1839년인 기해년에 천주교인들을 박해(迫害, 핍박할 박)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를 기해사옥(己亥邪獄, 간사할 사/옥 옥) 또는 기해박해(己亥迫害)라 부른다. 기해년에 벌어진 천주교 박해는 사실 첫번째로 일어난 박해사건이 아니었다.. 제1차는 1791년 진산의 양반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한 신해박해다. 그리고 제2차는 1801년, 순조 1년에 일어난다. 개혁과 대통합을 통해 조선 후기의 황금시대를 이룩했던 정조(재위 1776년 ~ 1800년)는 천주교에 대해서는 관대한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남인 계통의 천주교 신자들를 옹호해 왔던 채제공(蔡濟恭, 1720년 ~ 1799년, 정조시대를 대표하는 정승으로 개혁을 주도)과 정조가 죽고 1800년 순조가 1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정조의 정적이자 영조의 어린 신부였던 정순왕후(1745년 ~ 1805년, 경주 김씨) 대왕대비 김씨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벽파(僻派, 궁벽할 벽, 노론 중 정조의 탕평책을 반대한 세력, 사도세자를 배척한 당파)는 남인 시파(詩派, 정조의 탕평 및 사도세자 지지한 당파)의 세력을 꺽기 위해 대왕대비를 움직여 시파와 종교적 신서파(信西派, 서학을 수용하는 개방적 실학정신을 계승한 세력 vs 공서파/攻西派)에 대하여 일대 정치적 공세를 취하게 된다. 1801년 정순왕후는 박해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했다. 이 사건으로 이승훈, 정약종, 정약용 등 천주교도 수백명이 처형당하거나 귀양을 갔으며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였던 청나라의 신부 주문모도 자수를 하여 참형을 당했다.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로 1년 만에 희생자 수가 300명이 넘었던 이 사건이 바로 신유박해다. 1839년에 일어난 기유박해는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시파인 안동 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 풍양조씨가 일으킨 사건이다. 정순왕후가 죽고 순조가 열다섯 살에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는 순조의 장인 김조순(1765년 ~ 1832년, 안동 김씨)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씨들이 권력을 장악하며 세도 정치가 시작된다. 김조순이 등용한 안동 김씨 시파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안동 김씨들이 정권을 잡았던 시기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누그러졌었다. 순조(재위 1800년 ~ 1834년)의 아들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순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것은 순조의 손자, 8살의 어린 헌종(재위 1834년 ~ 1849년)이었다. 당시 헌종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1789년 ~ 1857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시기도 안동 김씨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헌종이 결혼을 하고 친히 나라를 다스리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1808년 ~ 1890년)가 풍양 조씨인 조만영(1776년 ~ 1846년)의 딸인 조대비였기 때문이다. 벽파 풍양 조씨 외척들은 악랄한 종교 탄압을 하는데, 이는 천주교에 관용적이었던 시파 안동 김씨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감행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바로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 사건이다. 현석문이 쓴 ‘기해일기’에 따르면, 참수된 자가 54명이고, 교수형 장하에 죽은 자, 병사한 자가 6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세도가문은 안동 김씨에서 풍양 조씨 가문으로 옮겨졌다.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는 1849년 헌종이 죽고 철종이 들어설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 마지막으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은 1866년, 대원군 시절에 있었던 병인박해 사건이다. 5. 병오박해
1846년(헌종 12년)에 일어난 박해.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을 비롯한 9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김대건, 현석문,남경문,한이형,임치백,우술임,이간난, 정철염
병오박해 9월은 한국천주교회에서 정한 ‘순교자 성월’이다. 그리고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이다. 역사를 살피면,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가 종결된 날이다. 김 신부는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3일 후 현석문이, 20일에는 임치백과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이 목숨을 잃었다. ‘승정원일기’는 마지막 일곱 명이 맞아죽었다고 기록했다. 그들이 장살형(杖殺刑)을 선고받았지만, 모진 매를 맞고도 목숨이 붙어있던 사람들은 교수형으로 숨을 끊었다는 기록도 있다. 한국천주교는 이승훈이 1784년에 베이징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신자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서양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인 특별한 역사다. 하지만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까지 100여 년에 걸쳐 순교로 점철된 죽음의 행진을 면하지는 못했다. 신유박해(1801년) 때 서울에서만 300여 명이 희생됐다. 기해박해(1839년) 때 참수된 신자는 70명이요, 매를 맞거나 옥중에서 병사한 신자도 60명 이상이다. 병인박해(1866년)의 순교자는 8000~1만 명으로 조선 전체 신자의 절반에 이르렀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정하상은 죽음을 앞두고 박해를 주도한 우의정 이지연에게 보내는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쓴다. 복음의 이치와 신앙의 자유를 역설한 글이다. 믿는 사람의 결기가 선명하거니와 참혹함 또한 외면하기 어렵다. “성교(聖敎)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 임금의 자식이 아니란 말입니까? 옥중에서 죽어가고 성문 바깥에서 처형되는 것이 끊이질 않아 피눈물은 도랑을 이루었고, 통곡이 하늘에 울리고 있습니다.”정하상은 곤장을 무수히 맞고 주뢰(周牢)형을 당했다. ‘술재상서 정보록일기(述宰相書 丁保祿日記)’는 “두 넓적다리와 살갗은 모두 벗겨져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났다. 피는 용솟음쳐 땅으로 흘러들었지만 얼굴빛은 평소와 다름없었다”고 기록했다. 우리는 조선이 천주교를 박해한 이유를 ‘조상제사 거부’라고 단순히 생각한다. 조상제사 거부는 유교 국가의 근본 질서, 즉 왕과 권력 구조의 절대성에 대한 거부를 함축한다. 그래서 천주교의 교리는 조선 체제의 정당성을 해체할 수도 있는 폭약을 간직했다.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의식은 계급에 대한 도전이다. 약자에 대한 착취와 폭력을 제어하지 않는 제도와 관행에 짓눌려 살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정의와 평등, 사랑의 가르침은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조선 기득권층은 분노와 공포를 함께 느꼈을 것이다. 천주교 박해의 역사는 1886년 6월 4일 조불수호조약(朝佛修好條約)과 더불어 종언을 고한다. 프랑스는 조약 전문 제9조 2항에 ‘교회(敎誨)’를 명기함으로써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승훈의 세례로부터 235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로부터 173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도록 천주교의 사명은 미완으로 남아 있다. 과잉과 결핍, 권력과 민중 사이의 단층은 변함없이 선명하다.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시간의 수레바퀴를 붙들어야만 지속 가능한 기득권의 저항에 부딪친다. 그리하여 박해는 계속된다. 그 주체이자 도구는 정치와 미디어, 법과 제도를 적용하는 대상과 방식의 차별, 마타도어, 가짜뉴스와 같은 것들이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아시아경제 6. 병인박해
1866년(고종 3년)에 일어난 박해. 조선의 마지막 천주교 박해이지만, 조선의 천주교 박해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총 24명의 순교자가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이 박해로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라우렌시오를 프랑스어로 읽으면 로랑이며, 범은 앵베르 주교가 쓰던 조선 이름인 범세형을 줄었다.
앵베르 주교를 따라온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프랑스 이름은 베드로와 야고보를 프랑스어로 읽은 피에르, 자크로 두 신부는 나백다록, 정아각백이란 조선 이름을 썼다.
앵베르 주교가 2대 교구장인 이유는 전임자인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1792~1835.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조선식 성은 소蘇) 주교가 초대 교구장 (당시에는 조선대목구 감목, 이후 서울대교구 교구장 목록으로 소급)이며 범 주교는 후임이다. [출처] 조선의 천주교 박해|작성자 이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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