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게시물은 제가 '여행공감'이라는 모임에서 다녀온 여행지에 대한 저의 블로그 글을 옮겨왔습니다.
연천군 백학면 - 제1땅굴 - 연천숭의전지 - 전곡선사박물관 - 재인폭포
경기도 연천군 개요
경기도의 군. 군사분계선 바로 아래에 위치한 최전방 지역이다. 경기도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기초자치단체로, 1983년에 인구 8만 명을 찍은 이후로 2011년까지는 인구 감소세에 있었으나 각종 인구 유입 사업과 출산장려 정책, 관광지 홍보 등에 힘입어 2012년부터 소폭 증가세로 돌아섰다. 이것도 무려 30년 만에 증가한 것. 하지만 2016년 이후로는 다시 감소하고 있다.
역사
삼국시대 고구려의 공목달현(功木達縣)이 있었으며, 신라가 차지한 이후 경덕왕의 전국 지명 한화 정책 때 공성현(功城縣)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는 장주(獐州)였다가 충선왕 때 연주(漣州)로 고쳤으며, 조선, 태종 때 연천(漣川)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4년. 원래 있던 경기도 삭녕군을 일본제국의 조선총독부에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5시와 11시 방향으로 선을 그어서 서쪽과 남쪽을 연천군에, 북쪽과 동쪽을 강원도 철원군에 각각 붙여버리고 삭령군을 없애버렸다. 그 이래로 삭녕군은 아직까지 부활하지 않았으며 설상가상으로 삼팔선이 쳐지면서 삭녕군이 모조리 북한 영토가 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인해 휴전선이 쳐지면서 옛 삭녕군이었던 땅 중 철원군으로 붙은 옛 삭녕군은 독검리만 제외하고 전부 북한 영토가 된 반면, 연천군 쪽으로 붙은 삭녕군은 전부 대한민국 영토로 편입되었다. 참고로 삭녕군은 조선시대 기준으로 보면 경기도 최북단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통일 후 삭녕군을 복원시키면 삭녕군이 통일 한국에서 경기도 최북단이 된다.
1945년에 삼펄선이 그어지면서 북한에 대부분이 넘어갔으며, 이때 소련 군정 하에서 1946년 9월에 강원도로 이관된 후 동년 12월에 38선 이북으로 넘어간 포천군 청산면, 창수면을 편입하였다. 이후 6.25전쟁 휴전 이후 연천군의 대부분이 수복되다. 그리고 휴전선 이남에 위치한 장단군 일부 면(面)들을 합했고 1963년 철원군에서 신서면을 넘겨 받았고 1983년 포천군에 관인면을 넘기고 청산면을 받아 와 현재에 이른다.
물론 1950년 중순 잠시 조선인민군에 의해 함락당하던 시절에는 북한이 이곳도 철원군으로 우겨넣은 적이 있었으나 인천상륙작전이후 이곳을 수복한 대한민국 정부가 연천군을 부활시켰다.
6.25전쟁 때 활약한 레클리스 기리는 조형
연천군의 재인폭포가 유형의 관광 자원이라면, 6.25 전쟁 당시 '군마(軍馬) 레클리스(ReckIess)'의 활약상은 역사적 고증에 따른 무형의 자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레클리스(ReckIess)는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라는 뜻이다. 이런 수식어가 6.25전쟁 중 수송 임무를 담당한 군마 '아침 해'에게 붙었다.
몽고종 암말인 '아침 해'는 전쟁 전 서울 신설동 경마장에서 경주마로 출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남침으로 6.25가 발발하면서 미 해병대가 수송마로 구입을 한다. 이후 '아침 해'는 연천에서 첫 전쟁에 참가하게 되는데, 당시 중공군과 미 해병대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고지전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침 해'는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활약을 펼치게 된다. 실로 어떤 군인도 보여주지 못한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연천은 특히 산악이 많아 차량으로 무반동 소총과 탄약 보급이 어려웠다. 군인 등 인력만으로는 효율성이 많이 떨어졌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침 해'는 첫 번째 임무에 투입된다. 당시 '아침 해'는 포탄이 떨어지자 다리를 땅에 접고 눈이 하얘지며 질렸으나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후 '아침 해' 그녀는 날뛰거나 도망가지 않고 곧장 정신을 차리고 부대의 움직임에 놀라울 정도로 적응했다. 포탄 소리에 놀라 도망갈 것이라는 일부의 우려를 깨고 빠르게 적응하며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아침 해'가 '레클리스'로 불려지게 되는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군인들은 이후 '레클리스 그녀'로 '아침 해'를 부르게 된 것이다.
당시 레클리스 그녀는 수십 kg의 탄약을 짊어지고 오솔길과 45도 각도의 급경사 산비탈을 해병대원들과 함께 386번이나 왕복했다. 왼쪽 눈과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새벽부터 황혼까지 아군의 탄약 공급을 도왔다. 격전지였던 연천전투(네바다전초 )를 포함해 실로 영웅적인 면모를 보였다. 또한 전투가 없는 동안에는 통신선과 많은 양의 전쟁물자를 운반하는 등 인근에 있던 호주 군인들도 감명을 받을 정도로 커다란 활약을 했다
당시 함께 전투에 참가했던 미해병대 상사는 “암갈색 몸매에 하얀 얼굴을 한 레클레스가 말없이 총탄을 뚫고 생명과 같은 포탄을 날라주는 모습을 보고 우린 모두 감동해서 사기가 크게 진작됐었다. 물론 북한군을 괴멸시키는 원동력이 됐었다고” 회상했다.
미 해병대 장병들은 전장에서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한 레클리스를 정전 협정 후 미국으로 데려갔다. 미국은 레클레스에게 전투 중 부상을 당한 군인에게 수여하는 '퍼플하트 훈장 물론 미 대통령 표창장 국방부 종군기장을 수여했다. 또한 1959년에는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군마인 레클레스를 하사관으로 진급시킨 후 근무 기장인 선행장도 수여했다. 이후 1960년 성대한 전역식을 가진 레클리스가 죽자 미해병대는 정식 장례식을 치르는 등 마지막까지 예우를 다했으며 . 1997년 세계 100대 영웅으로 링컨 마더 테레사 등과 함께 라이프지에 선정됐다.
백학역사박물관
역사박물관내 전시물
휴전선과 38선이 교차하는 지점
휴전선과 삼팔선이 교차하는 지점이 연천군 백학면 매현리에 있지만 민간인은 접근 불가한 지역이다.
구멍난 철모
백학행정복지센터 앞 항일독립운동기념비
내가 기다린 딸기농장
탐스럽게 익은 딸기
어수정
어수정 설명 표지석
평화누리길 11코스 안내 간판
연천숭의전지
고려 태조를 비롯한 7왕의 신위(神位)를 봉안하여 제사지내던 곳이다. 1399년(정종 1)에 창건된 뒤, 1452년(문종 2)에 숭의전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고려 왕족의 후손들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종3품인 사(使)를 비롯하여 종4품의 수(守), 종6품 감(監), 종9품 여릉참봉(麗陵參奉) 등의 관리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역대 왕조의 시조를 모신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은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모셨고, 평양의 숭인전(崇仁殿)은 기자(箕子)를 모셨다. 경주의 숭덕전(崇德殿)은 신라의 시조를 모셨고, 충청남도 직산의 숭렬전(崇烈殿)은 백제의 온조왕을 모셨으며, 숭의전에는 고려 태조 및 혜종·정종·광종·경종·목종·현종을 제사지냈다.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정전(正殿)·후신청(後臣廳)·전사청(典祀廳)·남문(南門)·협문(夾門)·곳간(庫間)·수복사(守僕舍) 등이 남쪽을 바라보며 배치되었다. 하지만 6·25전쟁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졌고, 최근에 정전과 함께 위패를 모신 이안청(移安廳), 공신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陪臣廳), 삼문만을 원래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숭의전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1979년 10월 2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78년 미군 병사 보웬이 처음 확인한 이후 10차례 발굴 조사된 이 유적은 전곡읍 남쪽 일대의, 한탄강이 U자 모양으로 감싸고 도는 대지상(臺地狀)의 지형에 분포하고 있다. 이 일대에는 ‘전곡현무암(全谷玄武岩)’이라 부르는 철원-평강 지역에서 흘러온 현무암이 고기하천(古期河川) 퇴적을 덮고 있는데, 하부(下部)의 연대가 약 60만년 전, 상부의 현무암이 약 30만년 전후로 알려졌다. 현무암 대지 위에 두께 3~8m의 퇴적물은 한탄강이 현무암 대지 위를 흐르는 동안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 퇴적물 속에서 석기가 발견되었다.
퇴적층은 하부에 우각호(牛角湖)에 의해 퇴적된 호소성(湖沼性) 퇴적물 또는 강에 의해서 퇴적된 모래층으로 구성되었고, 이 위를 적색 또는 황갈색 점토가 덮고 있다. 이 퇴적물은 현무암이 절리(節理)현상으로 인하여 빠른 속도로 침식되는 과정을 고려한다면, 현무암 상부의 30만년에서 많이 떨어지는 시기가 아닌 대략 중부홍적세의 후반 20만년 전후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아직 신뢰도에 문제가 있지만 퇴적물의 발열형광법(thermoluminiscence dating method)에 의하여 얻은 4만 5천년 전이라는 연대를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며, 상부홍적세에 들어서 급격히 침식되어 현재의 지형을 형성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지금까지 발굴에서 채집된 석기는 4천여 점이 넘으며, 지표에서 채집된 석기도 많다. 석기는 석영암(石英岩)과 규암(硅岩)을 이용한 것이 대부분이며, 현무암과 편마암도 약간 섞여 있다. 재료는 거의 강바닥에서 채집된 것이다. 가장 특징적인 석기로는 아슐리안형의 주먹도끼류이고, 평면이 첨두형인 것과 타원형으로 만들어진 주먹도끼류와 한 면 가공된 주먹도끼(handaxe) ·가로날도끼(cleaver) ·뾰족끝찍개(pick)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찍개 ·긁개 ·다각면원구 ·소형찌르개 등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 외에 많은 수의 몸돌[石核] ·격지[剝片] 및 부스러기돌 등이 발견되었다.
석기는 대부분 직접타격법 또는 모루떼기법으로 제작된 것이며, 기본형이 만들어진 뒤에 2차 가공을 시도한 것은 극히 적다. 2차 가공이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가공에 그치고 있어서 동아시아의 전기구석기의 일반적 양상인 석기의 비정형성이 나타난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의 석기는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세계 전기구석기문화가 유럽 ·아프리카의 아슐리안문화전통과 동아시아 지역의 찍개문화전통으로 나누어진다는 기존의 H.모비우스 학설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전곡선사박물관 조형물
박물관 맘모스
조형물
조형물
재인폭포
한탄강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곳으로 오래 전부터 명승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재인폭포는 북쪽에 있는 지장봉에서 흘러 내려온 작은 하천이 높이 약 18m에 달하는 현무암 주상절리 절벽으로 쏟아지는 것이 장관을 이룹니다.
재인폭포에서는 다양한 현무암의 특징들을 관찰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주상절리를 비롯하여 하식동굴과 포트홀, 가스튜브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높이 약 18m에 달하는 폭포는 계속해서 폭포 아래를 침식시켜서 수심 5m에 달하는 포트홀을 만들었습니다. 포트홀이란 하천에서 암석의 오목한 곳이나 깨진 곳에 와류(물이 회오리 치는 현상)가 발생하여 깊은 구멍이 생겨난 것을 말합니다
재인폭포
출렁다리
재인폭포
50+재단 소속 여행공감의 주체 및 백학면의 협조로 연천군을 여행하게 되었다.
제1땅굴은 군사보호구역이라 사진촬영이 불가하여 촬영이 허가 되지 않아서 아쉽게 사진은 없지만, 상승전망대에서 바라본 군사분계선과 남북 2km 비무장지대는 분단국가의 현실을 다시보게 되었다.
고려왕의 위패를 모셔놓은 숭의전은 북한에만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려왕조의 유적지가 남한에도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껴지네요.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미군 병사에 의해 발견되어 우리나라에도 전기구석기유물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루 만에 연천군을 다 둘려보지 못한 아쉬움은 다음기회에 다시 한번 방문하고 싶은 마음으로 남았네요.
첫댓글 개인적으로 처가가 연전군 전곡이라 반가웠어요~~~
숭의전 보시고 바로옆 ``아미원`` 냉면, 카페,베이커리 추천 드리고....
재인폭포 보시고 ``망향 비빔국수`` 영화 강철비에도 나왔어요... 너무 맛있어요.
전곡 선사 유적지 가시면 ``오두막골식당`` 민물 새우탕, 빠가사리 매운탕 아주 죽여줘요....
맛있는 곳을 소개 해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