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봉의 화려한 경력]
*1980.11 ~ 1996.10 - 한국 국가대표 배드민턴 선수
*1987.03 ~ 1991.12 - 전북도청 배드민턴 선수
*1997.02 ~ 1999.09 - 영국 국가대표 코치
*1999.10 ~ 2002.12 - 말레이시아 국가대표 코치
*2003.01 ~ 2004.02 - 아시아연맹 및 세계배드민턴연맹 순외코치
*2004.03 ~ 2004.08 - 한국 국가대표팀 코치
*2004.11 ~ 현재 -- -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
[박주봉 스토리]
‘세계의 황제, 한국의 머슴 - 박주봉’
어떤 스포츠 팬에게 ‘박주봉’ 하면, “누구? 쿠웨이트 박?” 하고 반문을 할 정도로, 박주봉의 존재는 우리 머리 속에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진 않다. 지난 십 수년간 그의 이름 옆에 항상 따라 다니던 수식어, ‘배드민턴의 교과서’, ‘셔틀콕의 제왕’, ‘복식황제’… 등등을 들어 오면서, 필자 역시 아주 막연하게, ‘정말 배드민턴 잘 하는 선수’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점을 고백한다. 하지만, 후추 명예의 전당 후보자로 그의 업적, 기록, 그리고 성장과정…등을 면밀히 조사 하면서, 박주봉의 ‘위대함(Greatness)’에 대한 새로운 ‘경이’를 갖게 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배드민턴 강국들인 동남아나 유럽에선 그의 지명도가 도무지 어느 정도이길래, 해외에서 그렇게까지 ‘박주봉~ 박주봉~’하고 난리를 떠는지?... 알아야만 했다. 아주 간단 명료, 그리고 시원 삼빡하게 말하자면… 세계가 바라보는 ‘배드민턴의 박주봉’은, 우리 국민들이 ‘축구의 펠레’, 또는 ‘육상의 칼 루이스’ 쯤을 바라보는 시각과도 같다고 생각하면 정확할 것이다. 올림픽 말고는 제대로 배드민턴 중계조차 안 해주는 국내 방송의 현실 때문에, 테니스나 골프와 같이 배드민턴에도 ‘그랜드 슬램’이 있다는 사실조차 우리는 모르고 산다. 동남아 국가들처럼 자기나라 선수들에게 ‘일방적이고 열광적인’ 지지 (지난 방콕 아시안 게임 때, 다들 이미 목격했겠지만)를 보내는 사람들 역시, 박주봉의 ‘마술’ 앞에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고, 세계 최강대국 미국조차 은근히 깔보는, ‘자존심의 지존’ 유럽인들도 박주봉의 ‘세기’에 혀를 내둘렀다. 반면, 우리나라 피가 펄펄 끓고 있는 박주봉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시각은, 국제대회 나가서 종종 메달 따오는, 그저 그렇고 그런 ‘비인기 종목 선수들 중에 하나’쯤이 아닌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의 이런 ‘무지함’ 때문에, ‘살아있는 전설? 박주봉’은 지금 이 시각 말레이시아의 한 체육관에서 그의 ‘후계자 양성’이 아닌, ‘엄한’ 말레이시아 선수들을 열심히 조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잘 하는 소리로, ‘그저 곁에 있어만 줘도 고맙다.’라고 한다. 우리가 영원히 사랑하고 아껴줘야 할만큼, ‘Korea’를 빛내고,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들려 줬던 선수들. 우리나라가 배출 해낸 ‘세계적인 스타’들이 왜 하나 둘씩 바다를 건너 쓸쓸한 이국 땅에서만 기억되고, 존경받고, ‘재활’되어야만 하는지… 우리나라 축구 팀이 ‘베켄바워’를 감독으로 영입하게 되는 영광 정도의 ‘특혜’를, 현재 말레이시아 배드민턴 대표팀은 박주봉을 통해서 누리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배드민턴 팀은 현역시절 ‘박주봉의 밥’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중국 '애'들한테서 지도받고 있는 판국에 말이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비 인기 종목’ 선수들에 대한 우리의 애정과 관심이 점점 식어갈 때, 박주봉이 보여줬던 ‘신기’는 우리의 몫이 아닌, ‘그들의 몫’이 되어 버릴 것이고, 나아가서는 ‘효자이기는 하지만 인기 없는 종목’ 그 자체도 우리 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국내 팬들이 ‘박주봉의 전설’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꼭 팬들의 잘못만은 아니기 때문에… 이젠 진정으로 그의 ‘위대함’을 누군가는 밝게 비춰줘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한국인 박주봉’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 석자를 ‘후추 명예의 전당’에 영원히 헌액시킨다.
배드민턴 신동 박주봉’
언젠가 ‘세계 테니스계의 큰별’ 존 맥캔로의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난다. 자기 키보다도 더 커 보이는 테니스 라켓을 들고 비교적 정확하게 공을 맞추는 그의 어린 모습을 담은 흑백 릴(reel) 테이프 였다. 필자는, 박주봉의 ‘어린 시절’을 취재하면서 언젠가 보았던 그 ‘흑백 화면’을 자꾸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타이거 우즈, 마라도나, 그리고 캔 그리피 주니어...와 같이, 어렸을 적부터 소위 ‘천재성’을 타고 난 외국의 대 스타들을 바라보며 혹시라도 ‘부러워’ 한 적이 있다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우리 한국에도 그런 믿기 어려운 ‘천재성’을 지닌...박주봉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주봉의 배드민턴 ‘입문’은, 앞서 언급한 그런 ‘세계적인 스타’들의 그것처럼, ‘천리안’을 가지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박주봉의 부친 박명수(67) 선생은, 말 그대로 평생을 어린 학생들과 함께 숨쉬며 살아 온,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6척 거구’ (186 cm) 라는 표현이 전혀 손색없을 만큼, 워낙 탁월한 신체 조건을 타고 나셨고, 고등학교 시절 연식정구 선수로 뛰었던, 정말로 경험이 풍부하셨던 ‘스포츠맨’ 아버지를 둔 이점을 톡톡히 본 셈이다. 4남2녀 중 ‘막내둥이’로 태어난 박주봉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승부욕’을 과시했다. 동네 꼬마들과 한번 맞붙은 ‘구슬치기’나 ‘딱지치기’에선 왠만하면 져본 일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항상 자기보다 나이 많은 ‘형’들을 상대했고, 무슨 일이든 ‘지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었다.
교직생활을 하시던 아버님의 점심 도시락을 배달(?)하기 위해, 여섯살 난 박주봉은 매일같이 전주 풍남 국민학교에 등교를 했다. 점심시간 중에, 어린 학생들과 배드민턴을 치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간접적으로나마 그는 배드민턴의 '첫경험'을 하게 된다. 아버지가 지도하시던 풍남 국민학교 배드민턴부 선수들과 함께 어울려서 라켓을 처음 잡아본 그는. 그로부터 일체 다른 놀이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죽어라고, 정말로 죽어라고 배드민턴 라켓만 손에 쥐고 놓질 않았다. 너무나도 어린 주봉이었지만, 셔틀콕을 맞히는 재주가 남달랐고, 국민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는, 방과 후에도 얼른 숙제를 끝내고 곧바로 라켓을 휘두르는데 열중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풍남국교 배드민턴부 정식 선수로 선발되고, 곧 이어 5학년 때, 처음 출전했던 제2회 소년체전(부산)에서 당당히 ‘단체전 우승’이라는 놀라운 스타트를 끊는다. 하지만, 이듬해 배드민턴을 비롯한 일부 종목들이 소년체전에서 사라지게 되고, 한참 배드민턴에 빠져 있었고,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소년 박주봉에게 일대 ‘고민’이 시작된다. 풍남학교 배드민턴부는 해체되지만, 이때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체육에 대한 비전’과 ‘아들의 실력에 대한 신뢰’ 덕분에, 그는 ‘개인 훈련’을 하며 6학년 시절을 보낸다. 당시, 실내 강당이 없어서 풍남학교 강당에서 연습하던 전주농고 선수들의 ‘잔심부름’을 해가며 말이다.
그리고 곧 그는, 서울에서 열렸던 종별 선수권 대회에 홀로 출전, 또 한번의 우승을 따 낸다. 전주 서중학교 시절 박주봉은, 1학년 때부터 중3 선배들과 연습을 하고 시합을 했을 정도로 기량이 돋보였고, 출전했던 대회란 대회는 모조리 휩쓸었다. 한마디로 ‘스타의 탄생’이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챔피언의 자리에 등극한 박주봉을 스카우트해 가려는 고등학교는 여럿 있었지만, 당시 전북의 배드민턴 명문 전주농고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았다. 박주봉은 고교 진학을 앞두고 또 한번 거취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여기서 박주봉의 부친, 박명수 선생의 믿기지 않는 ‘통찰력’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0년 전에 이미 그는, ‘대한민국 학원 스포츠의 병마’에 대해서 정확히 예지하고, ‘공부를 뒷전으로 하는 운동’에 대해선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셨다. 중학교 시절에도 전주 서중 교장선생의 배려로, ‘국, 영, 수’만은 수업시간을 조정하면서까지 듣게 하였고, 방과 후 저녁시간에는 ‘특별과외’를 받아 가면서 학교 공부를 소홀하지 않게 하였다. 당신이 한 평생 교직 생활을 하셨기 때문인지, ‘운동은 평생 할 수 없는 것’이란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다. 아무리 독보적인 ‘배드민턴 신동’ 박주봉이었지만, 비교적 운동 선수들의 학업 참여를 ‘가볍게’ 배려(?) 하던 전주농고에 입학하는 것을 너무나 속상해 하시던 박명수 선생이었다. 당시, 이런 박주봉을 위해서 명문 전주고에 배드민턴부를 창단한다는 계획까지 있었지만, 없던 일로 돌아갔고 결국엔 전주농고에 입학하게 된다. 모름지기,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들 부모님의 학업에 대한 열성이, ‘자식 스타 만들기’의 그것에 반만 되더라도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은퇴 선수들의 ‘무기력함’은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관점에서 박명수 선생은, 운동선수 부모로서의 훌륭한 벤치마크(benchmark) 대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배드민턴의 쿠데타 (Coup d’Etat)
박주봉이 전주농고에 입학하자마자, 대한민국 배드민턴 역사의 한 페이지는 새롭게 장식되고 만다. 1980년 대구에서 개최되었던 전국 종별 선수권 대회 준준결승. 광주일고 3학년 배드민턴부 주장이자, 당시 고교 랭킹 2위였던 안상우 선수를 맞아, ‘까까머리 고1’ 박주봉은 체력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적게 뛰는’ 시합을 주도. 2:0 이라는 완승을 거두게 된다. 코치, 부모님들 마저 ‘안상우한테는 힘들다.’ 라고 포기했던 경기였지만, 박주봉은 위기 때마다 고1답지 않은 테크닉과 승부 근성을 선보이며, ‘골리앗 안상우’를 격파한다. ‘완벽한 두뇌 플레이의 개가’라고 당시 배드민턴 인들은 평가 했고. 이후, 준결승에서 맞붙은 고교랭킹 3위 서성민, 그리고 결승에서의 김창국 등의 ‘선배’들을 차례로 물리치며 고등학교 진학 후, 첫 전국대회 우승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또한, 이 대회에서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곧바로 박주봉의 가슴엔 ‘태극마크’가 달려진다.
처음으로 국가대표 선수가 된 박주봉의 첫 국제무대는 이웃나라 일본에서 열렸던 ‘한-일 고교 선발 교환 경기’ 였다. 5명씩 출전하는 단체전에 출전한 박주봉이 ‘한국 고교 랭킹 1위’를 달고 나왔고, 대회 규정 상, ‘랭킹 1위 대 랭킹 1위’가 맞붙어야 하는 상황에서, 당시 일본측 배드민턴 관계자들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무리 친선 경기지만, 너무나 ‘승리’에만 집착한 한국 선수단은 고등학교 1학년짜리 풋내기 선수를 랭킹 1위로 속여서 일본 랭킹 1위와 대결 시켜 그 경기는 포기하게 하고, 나머지 4경기를 독식하려고 한다’는 비난이었다. 웃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 애들의 이런 성급한 ‘호들갑’은 풋내기 박주봉의 ‘신들린 플레이’로 말끔히 사라지게 된다. 일본 랭킹 1위 선수와 붙어서 깨끗한 승리로 장식을 했으니 말이다. 당시, 우리보다 한수 위에 있었던 일본 배드민턴계는, 박주봉 덕분에 아주, 제대로 ‘쑈크’를 먹게 되고, ‘세끼네’라고 하는 일본 배드민턴 협회 관계자는 어린 박주봉의 현란한 ‘두뇌 플레이’를 보면서, “저런 어린 선수가 저 정도의 두뇌 플레이를 구사한다면, 앞으로 일본 배드민턴은, 한동안 한국을 꺾기 힘들 것이다”라고 예언한 바 있다.
1980년 일본에서의 ‘박주봉 신드롬’은, 그 후 10년 아니 15년 가까이 계속 되어온 박주봉의 ‘세계적인 명성의 서곡’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은 그 후로, 한국과는 배드민턴에서 ‘쨉이 안될 정도’로 급락하게 되지만, 그들의 지속적이고 한결 같은 배드민턴에 대한 사랑과 ‘영웅에 대한 예우’는 우리 한국인들의 낯을 뜨겁게 한다. 자국 선수도 아닌 한국 선수 박주봉의 엄청난 플레이에 완전히 매료되었던 당시일본의 ‘배드민턴’ (‘배도민톤’) 잡지사는, 2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박주봉의 친가에 매월 잡지를 무료 우송해 주고 있다. 어림잡아 240권의 잡지를, 한 달도 빼놓지 않고 매월 박주봉의 전주 본가로 우송해 주고 있다는 얘기다. 누가 부탁을 하지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박주봉… 그 후로 그가 보여 준 ‘우승 행진’은, 그 전까지 우리가 보아온 수많은 스타들의 ‘승리’ 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Made in Korea’ 마크를 달고 뛴 그 어떤 선수의 커리어보다도 완전한 ‘독식’이었고, 동남아, 유럽에서 그의 인기는 국내팬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아주 간략하게나마 ‘박주봉의 전설’을 되돌아 본다.
["박주봉의 전설" ㅡ 화려하다 못해 미친 경기기록들...]
연도 대회명 성적 비고
*1982 30회 덴마크 오픈 우승 복식경기‘처녀출전',한국 배드민턴사에 첫복식 우승!
*1983 3회 말레이시아 월드컵 우승 김문수와 처음으로 복식 출전
세계 선수권 동메달세계 선수권 출전 사상 첫 메달 (당시 한체대 1년)
*1984 32회 덴마크 오픈 우승
*29회 스웨덴 오픈 우승
*1985년 - 일본오픈 남자복식 1위 (박주봉,김문수)
- 전영오픈 남자복식 1위,
- 제6회 아시안챔피언쉽 남자복식 1위,
- 제4회 월드챔피언쉽 남자복식 1위,혼합복식 1위
*75회 전영 오픈 우승 남자 복식의 교과서'란 별명 얻다!
6회 아시아 선수권 우승
*1986년 - 전영오픈 남자복식 1위, 혼합복식 1위,
- 중국오픈 혼합복식 1위,
- 제10회 아시안게임 단체우승, 남자복식 1위, 혼합복식 1위
*1987년 - 프랑스오픈 혼합복식 1위, 제7회 월드컵 남자복식 1위
*1988년 - 일본오픈 혼합복식 1위
- 전영오픈 남자복식, 혼합복식 1위
- 홍콩오픈 혼합복식 1위
- 중국오픈 혼합복식 1위
- 서울 올림픽 시범경기 혼합복식 금메달
*1989년 - 월드컵 남자복식, 혼합복식 1위
- 태국오픈 남자복식, 혼합복식 1위
- 말레이시아오픈 남자복식, 혼합복식 1위
- 제5회 월드챔피언쉽 혼합복식 1위
- 전영오픈 남자복식, 혼합복식 1위
- 스위스오픈 혼합복식 1위
- 일본오픈 남자복식, 혼합복식 1위
*4회 캘거리 세계 선수권 우승 남복,혼복 첫 2관왕(김문수,정명희와 한조 이뤄)
*1986 86 아시안 게임 우승 3관왕!
*1987 대만오픈 준우승첫 단식 출전. '허리부상'으로 분패. 6개월간요양
*1988 88 올림픽 시범 경기 금메달 김연자와 한조
*1989 말레이시아 오픈 우승 남.복/ 혼.복 싹쓸이 우승!
*태국 오픈 우승
*월드컵 선수권 우승
*전영 오픈 우승
*일본 오픈 우승
*1990 일본 오픈 우승
*90 북경 아시안 게임 금메달 2관왕
*1991 일본오픈 우승
*코리아 오픈 우승
*21회 세계 선수권 우승
*전영 오픈 우승 배드민턴의 '윔블던' 3연패 기록!
제29회 대한민국 체육상 수상 경기부분
기네스 북에 오름 세계대회 최다 우승자(남복 25회,혼복25회)
*1992 코리아 오픈 2연패 우승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현역 은퇴후,결혼
*1993 세계 혼합 단체전 우승 박주봉-김문수 일시 컴백
한체대 전임강사
1994 배드민턴 용구 'JB' 브랜드 제작 ㈜ 마스만 스포츠와 합작
1995 국제심판 박주봉으로 일시 복귀
배드민턴 특사' 브루나이 왕실 방문, '왕족 지도'
박주봉 컴백 애틀란타 올림픽 대비. 태릉 입촌
*홍콩 오픈 우승 박주봉-심은정
*중국 오픈 우승
*태국오픈 우승 박주봉-나경민
*1996 일본 오픈 우승
*코리아 오픈 우승
*스웨덴 오픈 우승 혼복 랭킹 5위로 올림픽 출전권 획득!
*96 애틀란타 올림픽 은메달 세계랭킹 1위 김동문-길영아 조에 패배
영국 대표팀 코치로 5년 계약
1997 IBF 선정 '허버트 스칠상' 수상 역대 8번째
1999 말레이시아 코치로 임명 IBF 사상 가장 '파격적인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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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세계대회 총 70여 차례 우승이라는 통산 업적을 기록.
위의 표에서 명시된 대회에서 대부분 2관왕, 내지는 3관왕을 차지했다고
보면 대략 70여 차례의 기록이 나오게 된다.
그가 ‘축구의 펠레’, 그리고 ‘육상의 칼 루이스’에 버금가는 선수란
호칭이 풀어보자면 기록과 기량에서 말해주듯...
부적합할 명분은 없을듯싶다..… '대한민국 땅, 전주의 아들 - 박주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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